남은자

틀린소리 바른소리060913

아빠와 함께 2013. 3. 3. 11:28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재상   2006-09-14 14:34:05, 조회 : 196, 추천 : 0

십자가 = 지팡이

십자가는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저주의 형틀이었으나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구원의 형틀이 되었다.

불뱀에 물려 죽자 지팡이를 세워 바라보는 넘은 살았다.
지팡이에 살리는 힘이 있는 줄 알고 사람들이 지팡이를
숭배하자 우상이 되어버려 지팡이를 없앴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우상이 되었으므로 없애는 것이 옳다.

이 곳에만 믿는 넘이 모여 사는 것 같아 십자가 마을이라
이름 붙였겠지만 틀렸다.
주 예수를 믿는 넘만 모인 것 같지만 입술로만 믿는 넘이다.

십자가 마을만 믿는 넘이 모여사는 곳인 것 같으나 성경은
믿는 넘이 생긴 지명에 따라 고린도에 있으니 고린도 교회
에베소서에 있으니 에배소서 교회 데살로니카에 있으니
데살로니카 교회라 불리운다.

부산에 있으니 부산 교회라 불리어야 옳으나
십자가를 팔아 장사하는 곳이니 십자가 마을이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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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근호   2006-09-14 15:06:51, 조회 : 200, 추천 : 0

그러면 사도 바울도 틀렸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지팡이)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갈 3:1)

오늘날날도 마귀와 이단들이 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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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재상   2006-09-14 17:51:31, 조회 : 176, 추천 : 0

   할례가 할례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가 중요한 것인데
그렇게 쉽게 풀어줘도 살리는 말씀을 죽이는 말씀으로 들이대다니.

님이 말씀을 전한다니 이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은혜를 전하니
갈라디아 교인이 눈이라도 빼어줄듯이 기뻐했으나 다시 와서 또
은혜라 전하니 믿었으니 이제는 행위가 있어야 하쟎냐고 바울을
원수 보듯이 대하므로 갈라디아 교인을 꾸짖는 말씀인 것 쯤은
알텐데 님은 왜 율법을 하나님 말씀인 것 처럼 전하는가?

님의 댓글 서로 사랑하라를 봐도 그렇다.
성경이 말씀하는 사랑을 보라.

 

주 예수를 사랑에 대해서는 베드로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베드로가 모두가 주 예수를 버린다 할찌라도 나만은 주 예수를
따르겠다고 말했을 때 거짓 마음이었을까?
나는 진심이었다고 본다.
주 예수를 부인을 넘어 저주까지 했을 때 닭이 울자 통곡한 그를
보고 주 예수를 사랑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사랑할 수 없다를 보여준다.

주 예수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씩이나
묻는 것이 주 예수는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를 말씀하는데 그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촛점은 주 예수를 사랑할 수 없는 나의 흉악한 죄를 알라고
주 예수의 십자가 죽음 없이는 이 죄를 씻을 수 없노라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나는 구원얻었노라고.

내가 주 예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주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만 해도 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그만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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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근호   2006-09-14 18:57:11, 조회 : 173, 추천 : 0

베드로서의 핵심은

'피 뿌림'과 '택함에 있습니다. (벧전 1:2)

믿음이란

이 '택함'의 결과인데

이 택함받은 사람은만이 '피 뿌림'의 능력으로만 거룩히 됨을 압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 뿌림인 십자가를 걷어치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곧 죄며 인간의 본심이며 마땅히 표출되는 자신의 운명입니다.

이것을 증거해야지

엉뚱하게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면 안됩니다.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곧 자신을 증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에다 뭘 더 보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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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재상   2006-09-14 19:06:39, 조회 : 161, 추천 : 0

님은 성경 무엇이 죄라고 말씀하는지 아는가?

알면서 십자가를 걷어치우는 것이 죄라고 말하는가?

님의 이글을 보면 님은 성경이 말씀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

답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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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재상   2006-09-14 21:22:29, 조회 : 200, 추천 : 0

  손무성님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성경 말씀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성경 말씀이
앞 뒤가 안 맞으니 자기도 모르는 횡설수설하는 글을 봤다.
이는 루터도 못 풀었으니 그렇다 치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의 문제를 잡고 늘어진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도 답을 못하면 님에게 양심의
털끝이라도 남아있다면 이 싸이트를 닫으라.

하나님 팔아 장사하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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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있는 사람과 비겁한 사람 
이근호   2006-09-14 15:32:37, 조회 : 163, 추천 : 3

인간은 항상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게 되어있다.

아담의 마음상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릴 그 어떤 구조도 없다.

따라서

당연히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다.

"나는 십자가 복음 대신 하나님이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시는 자비로운 분이라는 것을 믿겠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다.

그 솔직함에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이런 분보다

더 얄밉고, 추잡스러운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십자가 복음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한다고 우긴다.

하지만

나오는 열매들을 보면

모두

'교회 개혁하기', '교회 부흥 시키기' '바른 교회 만들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이다.

참으로 비겁한 자들입니다. 

솔직하게

십자가 지신 주님을 꼴보기도 싫다고 본심을 털어놓아야 한다.

혹은

"나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싶기에 이제는 여전히 십자가 매달린 예수님으로부터는 그만 떠나고 싶고 헤어지고 싶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한다고 누가 욕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속내가 정상적인 심성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모든 학문과 신학이 이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한 번 심하게 고생하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잊자! 이제 공(ball)은 우리 손으로 넘어왔다. 주님이 주신 성령이나 잘 활용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으로 변화되자"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쪽인데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 앞에서 떠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다들 다 떠난 버리고 휑하니 찬바람만 날리는 허전한 곳인데...

십자가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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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김명현   2006-09-14 18:06:09, 조회 : 156, 추천 : 0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께 덮침을 받아, 인간의 본성이라는 죄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가를 경험해 가는 자만이 십자가가 이해가 되어진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내 눈 앞에 밝히 또 밝히 보여지는 사람들만이 믿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고로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눈 앞에 밝히 보여지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믿겨지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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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re) 십자가 마을이 틀렸다 
이재상   2006-09-14 19:17:07, 조회 : 160, 추천 : 0

   쌈박질하다가 막히면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우기는 넘이 또 나타났군.
주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음으로 내 죄가 다 씻어진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었으나 주 예수가 짐으로
원수 사이였던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죄인을 살리는 구원의 틀로
바뀌었다.

성경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쉽개 씌여져 있지 골탕먹이려고
어렵고 비밀스럽게 씌여진 말씀이 아니다.
마치 무슨 큰 비밀이나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돈 보내라는 곳이
하나님 팔아 장사하는 곳이다.

모두가 목이 곧은 넘들뿐이니 듣든지 안 듣든지 성경 말씀을 말씀대로
전한다.
성경 말씀을 틀리게 알고 있다가도 성경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다.
안 돌아오고 우기면 회개하지 않는 것이므로 떨어진 넘일뿐이다.

성경 말씀으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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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싸움박질하다가 비밀이라고 나타난 넘에 대해서 
김명현   2006-09-14 20:22:14, 조회 : 174, 추천 : 0

   왜 이재상씨는 싸움박질하다가 막혀서 비밀을 들고 나온 넘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답변하여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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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박질하다가 막히면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는 
김명현   2006-09-14 21:01:24, 조회 : 161, 추천 : 0

    또한 아울러 이재상씨가 말씀하신 대로,  주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음으로 내 죄가 다 씻어진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셨는데 " 그 의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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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싸움박질하다가 막히면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는 
이재상   2006-09-14 21:17:10, 조회 : 168, 추천 : 0

안 믿는 넘은 주 예수를 한 사람으로 봐서 한 사람이 죽어
어떻게 죄가 다 씻어지느냐고 주 예수가 피흘려 죽어 내 죄가
다 씻어진 사실을 안 믿는다.

님은 님의 죄가 다 씻겼다는 사실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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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질하다가 막히면 하나님의 비밀로 나오는 넘에 대해서 
김명현   2006-09-14 22:12:15, 조회 : 174, 추천 : 0

   그래 좋습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니 노골적으로 말하지요. 죄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다.  님은 남의 죄가 다 씻겼다는 것을 믿는냐고 물으셨느데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손무성 얘기가 들어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뭍튼 싸움박질하다가 막하면 하나님의 비밀 언급하면서 나오는 넘으로 이해가 된 원인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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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싸움질하다가 막히면 하나님의 비밀로 나오는 넘에 대해서 
이재상   2006-09-15 10:04:40, 조회 : 131, 추천 : 0

  짝짝.
주 예수를 믿지않는 것이 죄이다.
나를 찌른 성경 말씀이다.
성경은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고 말씀하는데
왜 님은 여기에 십자가 지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더하는가?
하나님이 사과를 먹지말라 말씀하니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를 더한 것처럼.

왜 님의 위대하신 이근호님은 답하지 않고 뜸을 드리고 십자가를 걷어치우는
것이 죄라고 더할까?

하나님의 비밀이라서 그럴까?
아리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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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상님께 
손무성  (Homepage)  2006-09-14 23:32:36, 조회 : 205, 추천 : 0

이재상님께
정중히 질문합니다.
손무성입니다.
이재상님께서 아래와 같은 글을 남기셨네요...

" 손무성님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란 성경 말씀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성경 말씀이
앞 뒤가 안 맞으니 자기도 모르는 횡설수설하는 글을 봤다."

이재상님! 정확히 어디에 그런 글을 저가 남겨 놓았는지 알려 주십시요.

정말 횡설수설을 해서 그런 글을 적었는지 저가 다시 살펴 보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수정을 해야지요.


그리고
아래와 같이 글을 남기셨는데...

"십자가 = 지팡이

십자가는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저주의 형틀이었으나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구원의 형틀이 되었다.
불뱀에 물려 죽자 지팡이를 세워 바라보는 넘은 살았다.
지팡이에 살리는 힘이 있는 줄 알고 사람들이 지팡이를
숭배하자 우상이 되어버려 지팡이를 없앴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우상이 되었으므로 없애는 것이 옳다.
이 곳에만 믿는 넘이 모여 사는 것 같아 십자가 마을이라
이름 붙였겠지만 틀렸다.
주 예수를 믿는 넘만 모인 것 같지만 입술로만 믿는 넘이다.
십자가 마을만 믿는 넘이 모여사는 곳인 것 같으나 성경은
믿는 넘이 생긴 지명에 따라 고린도에 있으니 고린도 교회
에베소서에 있으니 에배소서 교회 데살로니카에 있으니
데살로니카 교회라 불리운다.
부산에 있으니 부산 교회라 불리어야 옳으나
십자가를 팔아 장사하는 곳이니 십자가 마을이랄 수밖에."

이 내용은 님의 지방교회의 교리적 잣대(?... 지방교회를 거론하기에 하는 저의 추측입니다. 혹시 님께서 지방교회 교인이 아니라면 용서하십시요 )인것 같은데 그러지 마시고 성경을 조목 조목 대시면서 십자가마을이 무엇이 틀렸는지를 말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무턱대로 자신이 속해 있는 지방교회의 교리적 잣대(?)로 틀렸다고 하면 아무에게도 어필이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이 곳의 글을 어느 정도는 읽어 보시고 성경을 조목 조목 대시면서 평을 하면서 이것은 틀렸다 저것은 틀렸다 하는 것이 예의인 줄 압니다. 님께서 회원 등록하신 시간이  06년 09월 14일 14시 18분에 이신데 14시 38분에 글을 남기기 시작하신것을 볼 때 이곳에 글을 얼마나 읽어 보셨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저가 만약 님에게 당신은 보나마나 "못생긴 사람이다" 라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이곳에 글을 충분히 보지도 않고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해놓고 틀렸다.,, 이것은 내용도 제시하지 않고 글도 몇개 정도 읽어 보지도 않고 보자마나 "무조건 틀렸다" 라는것은 정말 무례한 짓입니다.

정중히 다시 부탁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목 조목 성경을 제시하면서 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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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상님께 
이재상   2006-09-15 08:40:25, 조회 : 161, 추천 : 0

여기에 있군.
따와서 붙여 놓았다.


로마서의 믿음과 행함(율법의 행위)은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과 다른 차원이라는 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행위라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지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믿음이 있기에 행동으로 보여 주는 모습을 두고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 기생라합이 사자(정탐꾼)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한 행위를 이야기 합니다.
이 때 이들이 한 행함를 두고 믿음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라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믿음이 있기에 , 복음과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마땅이 있어야하며(그리스도 안에서), 없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결과물이라니.
믿음의 결과물이면 행위가 믿음이 되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꾸짖는 바와 같다.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고 사도 바울이 전하니 갈라다이 교인들이
기뻐 눈이라도 빼어줄듯이 기뻐했지만 다시 와서 믿음이라
전하니 믿었으니 믿음의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고 바울을 원수로
대했다.

알아듣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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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 
손무성  (Homepage)  2006-09-15 10:38:21, 조회 : 184, 추천 : 0

아래 글은  자유게시판 3157번에 답글로 쓴 내용이다.

"로마서의 믿음과 행함(율법의 행위)은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과 다른 차원이라는 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에서 행위라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지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믿음이 있기에 행동으로 보여 주는 모습을 두고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 기생라합이 사자(정탐꾼)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한 행위를 이야기 합니다.
이 때 이들이 한 행함를 두고 믿음의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라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믿음이 있기에 , 복음과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마땅이 있어야하며(그리스도 안에서), 없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위의 내용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리 되지 않는 부분이다.

행함과 믿음의 문제에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행함, 즉 율법의 행위를 두고 야고보서의 행함과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는 부분이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여기며 폄하했다. 그 이유는 그도 성경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도사인 자신과 동료들이 수준 높은 경건(?)과 수도사들의 실천적 행위에 대해 세속화 되어 버린 교회들은 그 행위들을 아주 높이 떠받쳤다. 문제는 수도사들 자신들의 경건의 행위와 실천적 행위를 점점 자신의 공로로 삼으며 어설픈 공로사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루터는 이것은 아니다 하여  구원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다 라는 취지를 로마서를 통해 깨닫고, '오직 믿음' 이라는 sola fide 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가 지푸라기 복음으로 보였을 것이 뻔하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행함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행함은 전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 표현이다.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야고보서의 행위나 로마서 갈라디아서의 행위를 동일하게 보려한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로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강조점을 가지고 말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서 행함이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행함은 율법의 행함과 동일한 행함을 말할 때 사용된 행함이 아니다.

야고보서에서 행함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누어 주신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을 두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바친 행위, 기생 라합이 사자(정탐꾼)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한 행위-
야고보서에서 강조하는 바는 행함만 강조하는 것도 아니요,  믿음+행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야고보서에서 야고보가 행함만 강조하거나, 믿음+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면 루터가 말한 것과 같은 지푸라기 복음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강조하려는 바는 주께 받은 믿음이 있다하는 성도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요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부르셔서 주(구원의 주)의 이름을 높이라고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에”- 마땅히 발생(시키는) 되야하는 행함이라는 것이다.(개인의 도덕적, 윤리적 자질 향상이 아니다. 제 3자가 볼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결코 율법의 행위(육체)에서 나온 행함이 아닌, 성령의 일하심의 결과로서 나온 행함이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의 증거물인 것이다.
그러니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있는 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한 후에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 행위를 자기 경건이나 높은 실천적 신앙의 가치로 높이며 자랑한다면 교만이요, ‘자기 공로’로 삼겠다는 육체의 마음이며, 죄악된 마음이다. 이런 자는 마땅히 회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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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상 넘과 손무성 목사님의 차이점 
이근호   2006-09-16 09:17:51, 조회 : 201, 추천 : 2

이재상 넘께서는 '행함이 믿음의 결과'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손무성 목사님께서는 야고보서에서의

'행힘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님의 일하심의 결과'라고 하셨다.

야고보서에서의 행함이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런 '차원'(표현이 대단히 모호함)의 '믿음과 행함'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손 목사님께서는 그 증거로서,

아브라함의 자식 살해와 기생 라합의 거짓말 하기가 결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말하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윤리적으로 용납이 되는 그런 '행함'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참으로 인간 외적 주체자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생될 수 없는 사례가 비로소 '참된 믿음의 결과로서 나오는 참된 행함'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인간이 제 정신으로 자기 자식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선뜩 죽이고자 하겠는가)

그러니까 손 목사님의 주장은,

이러한 특이한 행함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말하는 그런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행함과 같은 레벨에 두어서 논하지 말고 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르고

이재상넘은,

십자가 이름 팔아먹고 예수 장사하는 자들아! 전 걷어치워라고  격노했고,

손 목사님의 입장에서는

'이 무식한 넘!. 신학에 개코도 모르는 자'라고 몰아 붙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 보자.

손무성 목사님께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이재상넘은 지적한 것이다.

과연

신약성경 내부에서 각기 서로 섞일 수 없고, 결코 통합될 수 없는 여러 층들을 계속 남겨 두어야 할 때,

성경을 하나의 '단 한 권'의 책으로 일관성있는 통일성적 구조를 가진 계시의 책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신앙인의 심성 내부에서도 과연 여러 층의 서로 다른 신앙층으로 균열되어 방치되어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을 이 재상넘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성령께서 성경을 쓰섰고, 성도의 마음에 들어오신 분이 성령님이신데, 그 성령님의 능력으로 성도가 성경의 그 어느 대목을 바라보면서

과연 동일한 개념들로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대로,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따로 다른 차원이나 입장이나 시각이나 차원을 보게 하실까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예를 들면,

어느 가정에 자식이 10명이 있어 각기 상호 개성이 다 다르기에 부모는 각 개성따라 각각 달리 교육하게 된다. 일관된 교육 방식으로 동원하지 않는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아는 요령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은 서로 차이진다고 말하기는 곤란하고, 동일한 부모 사랑이 그대로 그 자식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만약에 부모 마음 속에 서로 다른 사랑의 레벨을 지닌다는 것은, 부모 정신 세계가 분열되어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주신 사랑으로 동일하게 모든 성경을 대하게 된다.

분열이란 용납이 될 수 없다.

야고보서를 대하던지 로마서를 대하던지, 요한일서를 대하던지, 성도는 그 말씀을 갖고 주님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면,

비록 로마서나 사도바울이 계시한 환경이 상호 같지 않다고해도

동일하게 일관성있는 마음의 상태를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털어놓게 마련이다. (안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님, 야고보가 뭐라고 하던, 저는 오직 주님의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는 표현을 매개로 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되지 결코 나의 행함으로 구원될 줄로 믿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란' 실은 제가 믿는 이 믿음이 야고보가 말하는 그 '죽은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행함'으로 표현될 로 압니다. 이로서 더 이상 균열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손 목사님께서

'차원'이라는 말을 들고 나와서

각기 다른 차원은 차원대로 남겨야지 서로 섞여 하나로 만들면 안된다고 주장하니

도데체 그렇다면

십자가 신학이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야고보나 사도 바울 신학 사이에서도 제대로 통합시키지 못한 신학에 불과하다면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 하나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이 헛 말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손 목사님 주장대로하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하지만

인간들 입장에서 여전히  '다 이루었다'고 하나로 통합될 세계로 진입할 생각 말고 

서로 차이지는 상호 다른 차원을 부동켜 안고 균열된 의식으로 그냥 머물러 있으나"라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 재상넘은 말씀하신다.

"행위의 결과물이면 믿음이 되냐?"고

아브라함의 자식 살해와 기생 라합의 거짓말 하기와 같은 그런 특이한 것들을 줏어보아놓으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가지고

"오 그런 행위들을 믿음으로 간주하노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재상넘이 손 목사님께서 계속 따지고 드는 것은

손 무성넘의 주장이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복음적 대전제로 어떻게 복귀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손 목사님은 그냥 '다른 차원'으로 남겨두자는 이야기이고,

이재상넘은

그냥 '각기 다른 차원으로 남겨두면' 구원의 방식이

1. 믿음으로 2. 행함 으로 두 가지 방식이 통합되거나 승화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둔 셈이 되니

그렇다면 결국

성경 구절 일일이 다 찾아서

1. 사도 바울 방식 2. 야고보 방식, 3. 사도 요한 방식 4. 베드로 방식 등등 으로 이어지다가 이것도 모자라면

아예

'설교단에서 성경 구절을 그대로 외우지 않고 거기에다 자기 생각을 더 덧붙이는 놈들은  다 이단!'이라는 논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니

그것이 어떻게 십자가만을 내세우는 십자가마을 다우냐 하는 것이다.

만약에 손무성넘께서 '나도 특이한 행위들을 다 줏어모은다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생생하게 산 믿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라고 간주하고 싶다면

손 목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해명해야 한다는 것이 이 재상넘의 속셈이다.

첫째는,

행함에서 산 믿음(죽은 믿음)으로 전환될 수 있는 인식론적 기준이 무엇인가를 먼저 확정적으로 제시하고 난 뒤에 '다른 차원'을 운운해야 옳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둘째는,

과연 그렇게해서 제시한 참 믿음에 해당되는 참 행함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을 대체시킬 수 있는 개념(다른 차원으로 말한 개념)으로 활용이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만약에

손무성넘께서 하신 주장에 동의하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제부터

남들에게, 자신 안에는 성령께서 살아계셔서, 죽은 믿음에 해당되는 행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산 믿음에서 파생된 행함이 있읍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해 줄만한 행위만을 알리고, 주의하고 절제하고, 자기 관리에 나설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행위를 함부로 하게 되면 남들로부터 '죽은 믿음의 소유자'라고 지적받더라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자기가 전에 해놓은 맹세가 있기에)

과연 손무성넘께서 바라던 바가 이런 교인들의 출몰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 교인은

본인의 원했던 아니면 손무성넘께서 강요했던 간에

그 사람은,

십자가를 믿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믿는 자가 되어버리니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는 갈라디아서에 사도 바울으로부터 책망받을 짓이 아니고 무어냐 라는 것이다.

실컷 '믿음으로 구원'이라고 믿는다고해 놓고서

바른 믿음을 제시하니 모두 주섬주섬 행위들을 꺼내놓더라 이 말이다.

그러니

손 무성 넘의 주장이 수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재성넘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그 위선성으로 인해 '넘'이라고 소리를 들어서 싸다 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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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가 보는 견해 
이근호   2006-09-16 10:16:37, 조회 : 178, 추천 : 4

>이상봉 목사님은

그 분의 최근 저서인 '성문 밖으로 나아가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겼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새겨져서 밖에서 누가 하나님을 알라고 가르칠 필요도 없고 행하라고 강요할 필요도 없는 것이 신약시대이다."(p 28 위에서 7째줄)

손무성 목사님께서 하신 '차원'은 참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은연중에

목사란 남(교인들)을 감시할 정당한 자격증이라고 소지한 분처럼 들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손목사님께서 주장하는 바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들에 의해서 장악되지 않고, 인간들의 기대나 예상에 포착되지 않고 자유로이 일하시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강변하는 주장이라고 보아집니다.

"나는 내가 믿고 있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신자 맞다"라고 우기지 말고  도리어 성령께서는 그것을 깨부수시기 위해 야고보라는 사도를 동원하셔서 참으로 오묘한 복음적 풍요를 제시했는데 왜 사람들은 한 면에만 집착하는지 그것이 안타깝다는 심정에서 이런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손무성 목사님의 발언이 어떠한 오해와 부작용을 낳다는 것을 감안해서 다음과 말을 덧붙여야 하는 겁니다.

"심지어 남들로부터 '방종'이라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라도 주님은 자기 사람을 자유롭게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예상밖의 특별한(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의 행위처럼) '산 믿음에 해당되는 그 행함일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손 목사님께서 반대로 나아가는 발언을 하시니

손 목사님께서 혹시 발언의 진정한 진위가,

"복음을 목사들이여. 왜 교인들이 방종에 빠지는 것을 왜 그냥 두고만 보십니까! 야고보서에서 뭐하고 하던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죽음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로서 죽음 행함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에게 복음적인 믿음이라고 아부하는데 믿음을 구걸하는데 급급합니까? 이제는 그들을 감시하고 책벌하세요!"라는 목소리로 들릴 공산이 있다는 겁니다.

라는데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을 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상봉 목사님의 저서에서 말한 것이 정면으로 배치되고 마는 겁니다.

"손 목사 당신이 뭔데 감히 , 내 속에서 성령께서 활동하셔서 하는 일을 가지고,  당신 나름대로 살아온 당신의 좁은 인생에서 수집된 단편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식들을 잣대로 삼아 함부로 나를 '죽은 믿음의 소지자'라고 폄하하느냐? 네가 과연 교인들을 평가할 전지전능한 라이센스(자격증)라도 부여받았는가? 네나 잘하세요."라는 반발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손무성 목사께서는 '차원'이라는 표현을 하시니 사람들은

그 새로운 차원에 담길, '산 믿음의 소산인 행함' 바구니 속에는 어떠한 행함의 리스트(항목)이 모아지는가 자연 궁금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그 행함의 리스트가 발표되면

첫째

손목사님 당신은 과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완수해서 '산 믿음의 소유자' 로 자처할만 하는가?

둘째,

그 제시된 행함의 리스트를 달성하는데 있어 

교인들에게 과연 등급제가 도입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다 지키지 아니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열매가 아니라고 판정을 내릴 것인가?

세째,

둘째와 비슷한 맥락에서

그 행함의 리스트 중에 얼마만한 실천 비율로 구원의 당락을 결정짓는 '산 믿음'과 '죽음 믿음' 사이가 가려지는가?

예를 들면, 초심자들도 일괄적으로 그 행함의 모든 모양새를 한 주간(7일)만에 모두 끌어당겨야 하는가 아니면 1년간 유예 기간을 주는가?

네째,

행함의 질을 판정단을 따로 구성하는가 아니면 목사 혼자서 재판하도록 일임해야 하는가? 아니면 제직원의 3분지 2의 찬성으로 결정하는가?  아니면 노회 목사님으로만 구성하는데 여기에 노회  장로님도 참여시키는가?


결국

문제는 여기에 있다.

남이 하는 것을 '방종'이라고 매도할 만한 충분한 자격자가 과연 예수님 말고 또 있겠는가? 라는 문제에 국한 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연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주님께서

성도가 그런 일에 관심두라고  이 땅에  살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1)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는 이상  그 어느 것도 주의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죄는 우리가 생산하고

은혜는 십자가에서 나옴을 증거하는 일 외에 성도의 일은 없다.

야고보서를 비롯해 모든 성경 말씀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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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상 넘과 손무성 목사님의 차이점    이근호 2006/09/16 2 202

[re][re]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믿음 = 야고보서의 행함 과 동일 
손무성  (Homepage)  2006-09-18 00:26:24, 조회 : 156, 추천 : 2

글쓰는 가운데 오해와 나의 입장을 다시 밝힌다.

먼저 행함에 관한 부분에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야고보서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부분에서

행함이라는 것에 대해 다른 차원이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행위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라면

야고보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믿음이라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이라고 강조하려 했다.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믿음 =  야고보서의 행함  과 동일하다는 차원에서 다른 차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야고보서의 행함을 말하면서 최근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복잡한 심경과 연관을 가지다보니 이 행함을 성령의 일하심의 결과와 연결된 면을 제시한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의 실수요 정정해야할 부분인 것을 인식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다.

성도의 구원 역시 믿음이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행함으로" - '아브라함과 라합이 행함으로( = 믿음으로) 의롭다" - 라는 의미는 믿음 따로 있고 그 다음 행함을 발휘 해서 라는 의미로 제시 한 것이 아니라,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오해로 받지 않기를 바란다.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의인은 성령 안에서 행함으로(= 믿음으로) 산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방종하며 사는 '성도' '형제'라고 하는 이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방종을 어느 기준에서 네가 함부로 평가하느냐 '라이센스' 있느냐 할지 몰라도...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고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었던 것이다. 성도라면 야고보서에서 말한바와 같이  이런 행함(=믿음) 없는 자는 아닐 것이다.

말만 하고 떠벌이면서 방종하고 있는 자는 자신의 믿음(=행함)으로 살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을 합리화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여기에 믿음을 또 다른 행위로 생각하고 있다고 시비 걸지 않기를 바란다. 제발...)

성도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갈 2: 14)이 분명 있다는 사실이다.....이것 마저 부정하려 들면서 말만 믿는다고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일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점을 이해 하고 그 동안 행함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했다는 것을 알고 오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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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믿음 = 야고보서의 행함 과 동일 
이근호   2006-09-18 08:27:40, 조회 : 153, 추천 : 5

행함이 되었던, 믿음이 되었던 항상 '십자가'와 관련성을 갖고 개념 정리되어야 합니다.

즉 십자가 사건에서 출발할 때, 이러이러해서 야고보의 행함은 십자가 의미와 이렇게 연결되고,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이러이러해서 십자가 의미와 연결됩니다 라고 해 주어야 복음을 증거하는 바가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말장난으로 끝나버립니다.

성도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증거케 하기 위해  성도되게 하셨는데,

성도가 만약 자기 논리의 '모순없음'을 들고 나오면 (언어 세계는 절대로 모순이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언어자체가 모두 자기 존재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변호하는 비유로서 차용되어 동원시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과학, 기술 언어도 예외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이 듣고싶은 자들에게 ,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낯선 소리 (나는 아직도 가치 있는 존재니 날 건드리지 말라)나 듣는 격이 되고 마는 겁니다.

믿음이나 행함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기 행위를 속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언어에 십자가 복음이 실리게 되면 주님 보시기에 가치있는 복음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상 그 어느 인간도 한 순간도 방종하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방종합니다. 특히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한 일'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방종합니다.

하지만 성도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소위 말해서 '성령의 인도하셔서 한 일이라고 여긴 것이  왜 네 자신의 방종일 수 밖에 없느냐'를 깨닫게 현상이 일어나지만 (주위 사람들이 복음적으로 큰 유익되는 혜택을 입은 결과를 낳아도 그것과 상관없이 성도는 방종한 것입니다.)

불신자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 당사자로서는 비극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시도 주님의 영이 간섭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장 절대 신으로 변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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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상님께 
이석원   2006-09-15 00:46:35, 조회 : 219, 추천 : 0

이재상님, 말 끝마다 '넘' '넘'하는데 내가 이재상님보고 '이재상넘' '이재상넘'이라고 해도 되겠는지요?
안된다고 생각된다면 이재상님도 그런말 사용하지 마시지요. 읽기가 많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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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상님께 
이재상   2006-09-15 08:23:58, 조회 : 184, 추천 : 0

넘은 내가 만든 예삿말이다.

성경에는 믿는 자라 번역되어 있으나 자란 놈자짜인 깔보는
낱말이다.
한자로 쓰면 낮춤말도 그냥 넘어가고 우리 말로 쓰면 님처럼
나무라는 사대사상에 젖어있다.

님도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한자말이 아닌 한글을 애끼고 써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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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상님께 
이석원   2006-09-15 23:41:59, 조회 : 123, 추천 : 0

생각했던대로 당신은 말장난하기 좋아하는 넘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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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상님께 
F.다투는 샛별  (Homepage)  2006-09-16 14:04:19, 조회 : 191, 추천 : 0

언어의 자의성은 알고, 역사성은 모르는 사람에게 인간의 도의를 말한들 그 실익이 있겠는가 !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지도 하나의 앎이라 칭하였다만 난 오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부정해야 겠구나.

인터넷을 방패삼아 언행불일치적 강아지다운 발상을 계속해보거라 ! 이 카페에 어느 누구도 네게 격식적 권고를 하나 나

는 격식따위를 네게 적용하지 않는다. 여기의 글들이 싫으면 떠나거라. 너의 강아지적 지식 따위로는 이곳의 글의 `ㄱ`자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곳이다.

재상 강아지 ! 고마해라 마이 무따아이가 ~

네가 원한다면 내가 오프라인으로 만나 저어기~ 가서 널 좀 교육시켜줄 수 있다.


p.s. 네가 `십자가 = 지팡이` 라는 강아지적 발상을 하였더구나. 역시 넌 천재(天災)야 !
     
      근데 난 너의 그런 공식하에 이런 공식을 만들어 봤어 `이재상 = 강아지` 어때 피타고라스의 정리 이후 최고의 공식이

      라 할 수 있겠지. 

##############################################################################################

이재상님께 
이미아   2006-09-16 00:51:50, 조회 : 160, 추천 : 0

국어사전 검색결과 (1-2 / 총2개)    국어사전 홈

놈 [명사]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그 무리를 이르는 말.
[의존명사]
1. ‘사내’를 낮추어, 또는 욕으로 이르는 말.
↔년.
2. ‘사내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
3. 어떤 동물이나 물건 따위를 홀하게 이르는 말.
4. 《주로 ‘~ 놈의’의 꼴로 쓰이어》 마뜩찮음을 나타내는 말. 놈
놈 [명사] 보통의 사람. 놈.
영어사전 검색결과(1-1 / 총1개)    영어사전 홈


1 【남자를 낮추어 부르는 말】a fellow;a chap;a creature;a guy《미》;a bimbo;a wretch;a bloke《구어》
2 【동물·물건을 낮추어 부르는 말】thing;one;case
3 【사내 아이의 애칭】a kid;a boy;a baby;little one


차라리 넘이라고 하시지 말고 놈이라고 하시는 것이 더  솔직하지 않을까요?
자신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