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것'이 있다는 서글픔
이근호 2006-11-01 22:23:34, 조회 : 115, 추천 : 1
예수님은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 앞에서 예수님의 옷을 두고서 소유권 확보를 위해 가위 바위 보를 하는 군인들처럼
예수님은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 피 앞에서 '자기 것'도 녹아져 흘려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돌리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것' 뿐이다.
'자기 것'만 달랑 남은 그 서글픔,
우상이 따로 없다. 피가 묻지 않는 자는 스스로 신이요 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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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목사님에게 독후감을 보낸 취지
이근호 2006-11-02 01:01:28, 조회 : 156, 추천 : 3
숱한 책을 자의든 타의든 받게 됩니다.
박기삼 사장님의 책들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독후감을 써보낸 일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복음적인 글들이었고, 행여 저의 독후감으로 인해 박 사장님께서 품고 있는 주님이 넣어주신 복음적 정념이 저로 인해 방해받을 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제가 훼방꾼이 되기 싫었던 것입니다.
이광호 목사님으로부터 여러 권의 책을 받았습니다.
복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복음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라는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건전하게 놀기'에 관한 요령들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현래의 글과 이호식씨의 글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박했습니다. 복음을 깨부수는 주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손에 그런 글이 들어왔다는 것은 뭔가 복음을 전하는 계기처럼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달에 건네받은 책은 기존의 '교회 안에서 아름답기 놀기'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성경 귀절들 속에서 십자가 복음 정신은 있는대로 다 빼돌리고, 모든 성경 귀절을 '교회 절대화'와 접속시키는 작업에 관한 절차였습니다.
저는 이 분이 이 책을 왜 주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 4 가지로 정리하면서 그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혹은 그 중의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1. "제가 이렇게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하여 오랫동안 사투를 벌리고 있으니 어디 가서 제 욕이라고 하지 마세요."라는 취지일까?
2. "현 한국교회에서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꿰뚫고 지나가면서 조명하는 그런 교재가 드문데, 이번에 제가 뭔가 섬광같이 아이디어가 떠올라 도저히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어 주님의 뜻인줄 알고 힘들게 썼습니다." 하는 뜻일까?
3. "평소에 이 목사님하고 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내 생각이 이 목사 당신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라고 확인받고 싶어서 주신건가?
4. " 한 번 읽어보시면 이 목사 당신이 평소에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신학적 지혜들이 터져나올 것인데, 당신 설교나 강의에 많이 인용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데 도움된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라는 취지에서 주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과 같은 이광호 목사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요구, "신랄하게 비평해 주세요!" 와 이 네 가지 이유가 연결을 시켜야만 했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에게도 "신랄하게 비평해 달라"고 요구했을까?
일반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말씀했을까 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근호 당신은 아예 나를 앞 뒤 안 가리고 언제든지 신랄하게 비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고, 나 이광호는 그런 당신을 즐길 것이며 그 신랄한 비평에 대해서 겸허하게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 올시다'라는 말이 됩니다.
즉 '나를 감히 신랄하게 비평하겠다면 나는 아예 당신 같은 저질에게 이 귀한 책 거풀도 못 만지게 할거요'라는 식으로는 사전에 이 광호 목사님께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저는 정립을 했습니다.
1. 이 책 세권에는 이광호 목사님의 평소의 지론이 자신만만하게 집대성 되어 있다.
2. '신랄하게 비평해 달라면서' 나에게 책을 건넨것은 단순히 '그냥 읽어보시고 도움된다 싶으면 속으로만 새기세요'라는 것이 아니라 뭔가 나의 반응을 손에 쥐게 되기를 은근히 고대하고 있다는 말이다.
즉 '신랄하게 언제든지 비평할 사람으로부터도 신랄하게 비평받기는 커녕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는 탄성을 받게 되면 본인에게는 더욱 자신감이 더 붙을 것이라는 것을 이광호 목사님이 기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입장에서 이 분의 책에 대해 독후감을 써보내는 것이 이 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자 주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기회로 보았습니다.
즉
왜냐하면 '신랄한 비판'도 받아들이겠다 했으니 이제 이광호 목사님의 관심사는 '건전히 교회 놀이'가 아니라 진실로 십자가 복음에 있겠다고 다짐한 듯이 보여서 저로서는 기뻤습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고 성경 해석 오류 같은 것은 그냥 사사로운 것이라고 여겨 못본척 그냥 넘어가주고 큰 흐름, 기본적 흐름이 과연 십자가 복음쪽으로 흘러가는지 가슴두근거리면서 속으로 이광호 목사님을 응원하면서 찾아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챤스라 여기고,
만약 참으로 이광호 목사님이 주님만 생각하고 이 책을 건넸다면, 내가 신경써서 쓴 독후감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나 이광호는 평소에 이 목사님같이 교회 부흥이나 교회 성장에는 관심없고, 오로지 복음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신랄하게 마음껏 비평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번에 책 세권은 그런 일관된 복음 정신의 산물입니다. 만약에 이 목사님 비평 속에 복음만 들어있다면 그것이 평소에 이 목사님에게 듣고 싶었던 원하는 바 내용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십자가 피와 복음만 담겨서 이 메일로 보냈는데, 벌써 5개월 째 소식이 없다가, 시비쪼로 강의에 자기 이름 거론된다고 물고 늘어집니다.
참으로 내가 비평한 것이 십자가의 피의 복음이 안 담겨 있다면, 그리고 참으로 이광호 목사님께서 십자가의 피만 바라보고 책 세권을 썼다면, 저의 신랄한 비평글에 대해서 더욱더 신랄한 비평을 담아 보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이광호 목사님이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의 자존심이나 위신이나 체면이나 대외적인 명예나 자신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순진한 교인들의 영혼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십자가 피만 평소에 바라보고 살아왔다면 ,
이근호 목사의 비평 내용이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일방적 편견에 근거한 인신공격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오로지 주의 복음을 위해서라도 공개적으로 반박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바보같은 두 목사, 이근호 이광호 두 목사 싸우는 꼴을 보면서 그들의 논쟁 속에서 십자가 복음이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며 어떤 식으로 성경 해석이 이루어져야 복음적인가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벌써 5개월 째 소식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랄하게 비평해 달라'라는 의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농담이었어요? 장난친 겁니까? 설마 신랄하게 비평할까? 인사치례? 선배에 대한 예의?
답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저에게 좋은 평을 바라고 책을 건넨 겁니다.
이런 심보가 모든 인간들에게 (저에게도) 다 들어있음을 말하기 위해 강의 시간에 적절하게 인용한 겁니다.
만약 이광호 목사님께서 어떤 식이라고, 혹은 비밀스러운 메일이라고 반박글을 보내주었더라면,
"이 이광호 이 분의 관심사는 오직 진리 뿐이구나. 자신의 자존심 지키기가 결코 아니구나. 평소에 이런 식으로 교회서나 대외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구나"라고 간주하겠는데 그런게 없으니,
유리하면 삼키고, 쓰면 뱉아버리면, 그러면 십자가 복음은 뭐가 됩니까?
십자가를 앞장 세운 자기 영역 고수하기?
자기 것 지키기?
차라리 이렇게 말씀해야 옳습니다.
"이근호 목사님, 성경은 십자가 피가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신학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에게 '신랄하게 비평해 달라'는 말을 왜 했습니까?
도대체 뭘 기대하고선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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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 말씀을 좀 더 신중하게 하셨으면 합니다.
이광호 (Homepage) 2006-11-02 09:06:00, 조회 : 157, 추천 : 3
이 목사께서 하신 말씀을 백번 이해하려 해도 받아들이기 힘드는 군요.
"모든 성경 귀절들 속에서 십자가 복음 정신은 있는대로 다 빼돌리고, 모든 성경 귀절을 '교회 절대화'와 접속시키는 작업에 관한 절차였습니다"
이 목사님 보시기에 제가 그렇게 했다는 말씀이지요? 이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복음정신은 무엇인지요? 그런 단정적인 주장은 정말 두려운 내용입니다. 이런 목사님의 글을 읽는 이들은 저의 책의 표지 조차 보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이 되면 다른 분들의 판단을 가로막고 이 목사님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이입시키는 노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정신은 있는대로 다 빼돌리고....." 가슴 아픈 이야깁니다.
"교회 안에서 건전하게 놀기"를 추구하는 인간에서 이제는 '복음정신을 빼돌리는 인간'으로 간주되고 보니 할말을 잊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누구 누구는 복음적이고.... 라고 하면서 실명을 밝히는 모습에서 다른 원군을 얻으려는 처신으로 보인다는 저의 마음을 감추지 않겠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저에게 주신 책들도 많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감사한 마음마저 희석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 저에게 책을 주실 때 마다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시면서 주셨습니까? 저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고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며 받았을 따름입니다.
지난번 제가 이 목사님께 책을 드릴 때는 아무런 특별한 의도가 없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상상하고 짐작하신 것은 단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네 가지 짐작은 그야말로 목사님 혼자의 상상이었을 따름입니다. 목사님의 상상을 저의 바램이나 생각이었던 것 처럼 주장한다면 잘못입니다. 목사님께서 웃으면서 신랄하게 비판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제가 그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목사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평은 정확해야 합니다.)
그날 제가 목사님께 저의 책을 드린 이유는,
1.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났기 때문입니다.
2. 가까이 있는 저의 차에 책이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이 목사님을 평소에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말은 그날 목사님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거나 저의 차에 책이 없었거나 혹은 제가 이 목사님을 몰랐다면 그 책을 드릴 리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의로 덧붙여 상상하여 그것을 목사님의 입장에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책을 드린 제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목사님의 주장이 어느 정도의 타당성이라도 지니기 위해서는 제가 목사님을 찾아가서 평을 부탁드렸거나 목사님께서 저에게 책을 우편으로 부쳐 주셨듯이 제가 그렇게 했다면 어느 정도 오해의 가능성 있는 짐작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제가 책을 드릴 때는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목사님,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판단자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목사님을 복음의 판단자나 교회의 판단자로 세우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복음에 대한 분별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목사님의 주장에 동의하면 복음을 깨달은 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복음과 상관이 없는 자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혹시 이 목사님께서는 스스로 역사상 그리고 우리시대에 가장 탁월한 '판단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렇게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 저 혼자 생각해 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목사님의 저의 책들에 대한 서평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무엇 때문에 이 홈페이지에서 이런 논의가 시작되었는지 그 원인을 우선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논지에 벗어나 엉뚱한 이야기를 확대하여 전개하게 되면 언어유희를 통한 천박한 놀음 이상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이 목사님과 저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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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 말씀을 좀 더 신중하게 하셨으면 합니다.
이근호 2006-11-02 10:19:21, 조회 : 166, 추천 : 1
귀하께서는 책을 나누어 주실 때, 복음 증거와 상관없이 나누어 주십니까?
마치 벼룩 신문 나누어주시듯이 남발하십니까?
성도가 성도와 교제 할 때, 복음 안에서 교제없이 사사로운 면식에 의해서 교제가 성립됩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성령의 음성이 성도의 일상적인 삶과는 동떨어진다고 보십니까?
복음이 무엇입니까?
개인적인 습관이나 습성이나 그 때 당시의 심리상태나, 지금의 기분 같은 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런 것들을 한데 줏어 모아놓으면 그것이 복음됩니까
아니면, 이미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의 죄인이며 그 죄라는 것은 현재 만나는 사람이나 앞으로 만날 사람이나 전에 만났던 사람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어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들이 주님 앞에서 죄인임을 알리는 것이 복음입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할 때, 자기에게만 적용되는 그런 사항만 골라서 전파했습니까 아니면 전 인류에게 공히 적용되는 진리를 전파했습니까?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특정인에게만 특별히 해당되는 사항만 골라서 설교하십니까 (다른 교인들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이)
아니면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지니고 있는 죄성과 그리고 은혜받은 사람만이 아는 십자가의 용서하심을 전하지 않습니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히라"는 것이 목사님에게는 해당이 안됩니까?
제가 말하기를, 이 말은 나 빼놓고다 나 외에 모든 사람에게만 해당되면 절대로 나 이근호 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세상에 어느 최고 판단자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며 나서는 판단자가 어디있습니까?
어느 판사가 말하기를, "나도 너처럼 죄인이니 차마 너에게 싫어소리 못하겠노라"라는 판사가 어디있습니까?
자신을 죄인이라고 판단하면 그 판단 자체도 죄가 되어 대중적으로 무시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는 모든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이며 왜 죄인일 수 밖에 없느냐하는 점을 공감을 갖는 가운데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분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귀하 혼자 빠질실려고?
아직 그런 죄는 안지었기에?
무심코 책을 주었다고요?
아무 의도 없이 주었다고요?
그렇다면 교회 강단에서 예배 시간만 말씀 전파 생각하고 평소에는 복음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이 사십니까?
만약 그렇게 사신다면 그런 태도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보십니까?
상대방을 대하거나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 저 분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복음 안에서 교제하라고 만나게 하시는구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이유도 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다"라는 마음가짐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안 살아가신다고요?
그렇다면 소위 복음의 종이라고 여기는 본인에게 문제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신다요?
그렇다면 저에게 책을 건네 줄 때에 아무 생각없이 그냥 남아 도는 책 소비하려고 주신 것 자체가 주님 앞에 죄가 된다고 생각드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귀한 돈과 책을 쓸 수 있는 귀한 시간과 정력을 받아놓고서는 그것을 투자해서 만들어놓은 책을 그 누구에게 주면서 아무 생각없이 건넨 것은 주님의 것을 마치 자기 것인양 함부로 허비한게 아닙니까?
신랄하게 비평해달라는 말은 누가 먼저 끄집어 내었습니까? 제가 먼저 끄집어내었습니까?
목사님께서는 영적 전쟁의 장소을 특정 공간으로 한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한정 지으라고 하지를 않았다고 믿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제를 나누고, 아무리 오랫동안 정분을 쌓은 부부라도, 언제 어느 순간에 '복음 듣기 싫어. 내 앞에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는 다시 끄집어 내지마! 이제 지긋지긋해. 살기 힘든데 어디 한가하게...."라고 속마음을 드러낼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그럴 순간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또한 그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복음 전해도, 복음 전하는 본인이 그리스도에게 버림받을까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본인이 혼자 생각하는 것은 괜찮고, 타인이 이야기해 주면 기분 더럽고, 그런 겁니까?
복음 안에서 교제가 아니라 자존심 안에서의 투쟁이네요.
제가 인간에게 이런 면이 있기에 성도는 모이고 교제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감사하고 그 앞에서 우리의 부족을 말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저에게 "당신이 최고 판단자냐?"라고 시비건다는 것은 도대체 귀하의 평소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자아실현입니까? 그래서 날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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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바라봄
최은성 2006-11-02 06:39:10, 조회 : 97, 추천 : 1
많은 사람들은, 주의력을 그들의 감정에 고정시키고 자신의 전진과 퇴보를 판단함으로써
그들의 신앙 생애에 심각한 과오를 범한다.
감정은 안전한 기준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납된 증거를 찾기 위하여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우리를 낙심케 할 것 밖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의 희망은 "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 "는 데 있다(히 12:2).
그분 안에는 소망과 믿음과 용기를 고취시켜주는 모든 것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의, 우리의 위로와 기쁨이시다.
위로를 얻기 위하여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자들은 싫증과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무가치함을 느낄 때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십자가)을 간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할 때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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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끼리 듣고 싶은 이야기
이근호 2006-11-02 08:42:45, 조회 : 101, 추천 : 1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삽니다. 주님이 공로 삽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어떤 인간도 자기 몸뚱아리 보존 본능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다.
신학을 하던, 목회를 하던, 장사를 하던, 공직에 있던, 농사를 짓던, 그냥 백수로 살던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몸덩어리 유지, 보존하는 것에는 예외가 없다.
이것을 하버마스는, '인지적-도구적 합리성'이라고 불렀다.
즉 물리적으로 물껑물껑 손에 잡히는 자신의 신체를 도저히 배제하며 살수는 없고, 그 몸의 유지를 위해 이 사회가 합리적인 방안으로 움직이는 것이 생활세계라는 것이다.
비록 규범적-도덕적 합리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지적-도구적 합리성'에 자신감을 붙을 때 한번쯤 가끔 생각해보는 정도이다.
(배고파서 빵을 훔칠 때, 법적으로도 형량이 참작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몸뚱아리가 따라 다니는 이상 어느 인간도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먹을가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이래서 죄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보혈만 생각해보면 그저 감사하고 고맙고, 부끄럽습니다"라는 것이 성도끼리 만날 때 서로가 듣고 싶은 이야기이다.
예수님 믿는다고 내가 장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대단히 착한 일 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오직 못났으면,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주셨겠는가! "이것 없이는 너는 언제든지 멸망하느니라"라는 취지로 말이다.
그렇다면 성도 끼리 모였을 때는 이런 고백이 감사와 더불어 나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단도박 모임이라는게 있다. 도박을 이미 끊겠다고, 혹은 이미 끊은 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서는 자신의 도박 경력을 자랑삼아 자랑하지는 않는다. 단지 자신의 못남과 약함을 자인하는 자리이다.
그 자리에게 설치대면서, "나는 당신들보다 죄를 덜 지었다"고 나서면 그 자가 바로 '선 자'이며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자이다.
교회라는 것은, 그저 자기 몸뚱아리 간수하기 위해 평생을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사는 자들이 이미 믿음을 선물로 받아, 자신의 죄를 자인하고, 그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십자가 피에 감사하는 곳이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안심하고 자신의 부족을 말하고 아울러 주님의 은혜과 사랑을 찬양하고 노래하고 영광돌릴 수 있는 것이다.
정말, 기적을 받아 구원된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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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고 있는 삶과 소유당한 삶의 차이
이근호 2006-11-02 17:56:54, 조회 : 86, 추천 : 2
누구에게도 소유당한 적이 없는 사람은 좋던 싫던 자기 인생을 자기가 끌어가야 한다. 달리 끌고 갈 분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주님에 의해서 소유당한 사람은 늘 내부에서 투쟁이 벌어진다. 주님께서 끌고 가시는 인생을 옛 습관대로 본인이 끌어가보겠느냐고 덤벼들다가 늘 낭패보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은 행복하다. 주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실감나게 체험하게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구약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실패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님의 인도하심과 인간들의 기존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인생을 끌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들이닥친 사태들은, 늘 그들에게 큰 낙심을 주는 장벽들로 보였다.
그들은 깨달아야 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이나 선행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신에게 던져준 맹세와 약속과 언약의 힘으로 진행되면서 성취된다는 것을!(히 6:17-18)
이런 점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자기가 자신을 소유한 인생이 아니라 이미 소유당한 인생의 모습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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