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

신랄한 비평을 구하는 이에게 하는 신랄한 비평(이근호)061101

아빠와 함께 2013. 3. 2. 10:20

이근호 목사님,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광호  (Homepage) http://salthouse.pe.kr/  2006-11-01 17:00:52, 조회 : 207, 추천 : 0

Re:이근호 목사는 자기 도취에 푹 빠진 사람 같은대요
(숭사리에서 옮김)

이근호 목사가 부산서 강의할때 이광호 목사에 대해 평한 글을 올립니다. 이근호 목사는 이광호 목사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하니까 이광호 목사도 자기의 인정을 받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자랑하고 있군요. 이근호 목사는 우연히 이광호 목사를 만나서 책을 얻었다고 해놓고는 이광호 목사가 자기를 후원자로 얻을 생각으로 자기에게 갖다 바친 것 처럼 단정짓고 자랑합니다. 이근호 목사는 자기가 굉장히 존경받는 인물로 착각하고 있어요. 이광호 목사님께 정말 그런지 한번 물어봐야겠어요. 아래 글을 보면 이근호 목사는 자기 추종자들 모아놓고 이광호 목사님을 일방적으로 욕하고 있네요.

Re..060530b [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2)
20060530b 부산강의-[타인의 얼굴-레비나스 철학](2)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전에 이광호 목사 평해 논 거. 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이전에 우리 한번도 못 만났잖아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야외예배 가던 날, 하나님의 무한자의 사건인지 모르지만, 그 바로 위에 같이 소풍 왔어요. 인사하러 왔어요. 수고한다고 인사하고 하는데 다시 왔어요. 자기 차에서 책을 세 권 가지고 와서 읽어보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냥 읽어만 보는 게 아니고 독후감 씁니다. 이랬거든요. 웃으면서. 하니까 이광호 목사님이 자신만만하게 그냥 독후감하지 말고 신랄하게 비평을 해달라는 거예요. 그럼 제가 신랄하게 비평하겠습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비평했습니다.

이게 이메일 같으면 그 사람한테 공격 안하고 그 사람한테 개인적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제가 박영선 목사님 평해 놓고 반성, 개인적으로 보냈습니까? 로이드 존스 책 읽고 로이드 존스 개인적으로 했습니까? 이미 죽은 사람 없지만. 공격했지요. 왜 공격했느냐 하면, 이미 뭐로 나왔느냐 하면, 이걸 내가 개인의 편지를 읽고 평한 게 아닙니다. 이미 책으로 나온 거예요.

책으로 나왔다는 말은, 어느 누구한테 제가 지금 보이겠습니다하는 거예요. 이 책에 대해서 어떤 것도 비밀로 할 이유는 없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제가 책을 썼어도 마찬가지에요. 문자로 박혔다 했어요. 문자로 박혀서 썼다는 말은,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문자로 박혔다는 말은 이걸 통해서 마음껏 짓밟고 눌릴 각오가 돼있습니다 하는 뜻에서 책을 낸 거예요.

이것은 개인적으로 서신해서 목사님, 이런 게 문제입니다. 할 문제가 아니고, 이미 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개인서신이 아니고 책으로 나왔고, 이광호 목사가 하는 그 신학교 교과서에 쓰이고 있어요. 나왔기 때문에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냔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신랄하게 했습니다.

핵심은 뭐냐 하면, 도대체 우리가 육과의 영의 싸움이 아니고, 악마의 싸움인데 마귀가 이정도 모르겠느냐? 마귀가 이정도 모르겠냐 말이죠. 메시아가 여자의 후손이다. 알았기 때문에 귀신들린 청년은 예수여, 왜 벌써 오십니까? 아직 때가 안됐는데. 이런 소리 했단 말이죠. 알기 때문에 광야에서 시험한 거예요. 마귀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대충 성경지식, 흐름, 조립해서 이게 성경적 진리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저 쪽에서 말이 많은 모양이라. 여러 가지 이야기 들어보니까 제일 공격하는 것은, 내용에 대해서 글에 대해서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왜 공격했느냐? 아니 생각해 보세요. 이 미천한 나도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러면 글 쓸 때 눈을 주신, 귀를 주신 주님 앞에 좀 반듯하게 떳떳하게 주여, 주께서 공격해도 저는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왜 이러한 자유성을 가지고 왜 글을 못 쓰냐 말이죠.

이광호 목사가 그 책을 나한테 준 것은 의도가 뭐냐 하면, 하도 이근호 목사가 남한테 욕을 얻어먹어도 존경스럽다 하니까, 그 존경스럽다 하는 사람도 내 책을 인정하더라. 그러니까 마음대로 여러분들은 이제 하자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백그라운드 하나 더 포섭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책을 줬는데, 내가 보면, 그따위 사고방식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이근호를 믿는 거다 말이죠. 그게.

내가 호응을 하면 내가 천국문을 열어줍니까, 내가 천당을 보내줍니까? 왜 나한테 호응을 얻으려고 해요. 그 사고방식으로 목사를 해요? 이런 소리 여러분들은 많이 듣지만 그 사람은 간만에 듣잖아요. 간만에 들으라고 하는 거예요. 또 그 사람한테 그 소리하지 않습니다. 사람 조지고 또 조지면 너무 잔인하니까 안 하는데. 여러분들은 속으로 많이 듣지만 그 사람은 오랜만에 들어요. 참석 안 해요. 우리 모임에. 사랑인 줄 알아야 돼요. 세상에 그런 사랑이 어디 있어요?

좋은 후원자 하나 얻으려고 온 그걸 가지고 후원자는 주님이 후원자지, 내가 후원자 될 수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거예요. 진짜 믿는 사람 같으면 진짜 십자가 믿는 사람은 내가 신랄하게 비판하면 이것도 주님 주신 무한자의 사건이다 여기고 감사히 받아야지요. 그게 왜냐하면 개인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 앞에 내용에 대해서 수정을 하든지, 조심해야 되든지, 공부를 더 하든지 이렇게 하면 마귀를 이기는데 얼마나 협조하면 안 좋겠습니까? 항상 그러니까 공부 안하면 교주돼요. 항상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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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맙습니다' 말은 못할 지언정 
이근호   2006-11-01 17:32:35, 조회 : 196, 추천 : 1

저서를 성의를 다하여 읽어주고 성의있게 긴긴 평을 해주었으면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게 예의거늘

일언반구 한 마디없다가 이게 무슨 시비입니까? 

제가 분명 평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기분 나빠 제 평을 다 읽어보지도 않았다더군요. 낭설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답장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긴 긴 독후감을 써 보낸 저에게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강의 시간에 이광호 목사님을 예를 든 것은,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서 강의 내용에 도움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기에 박영선 목사님의 명함도 나옵니다. 누구든지 책으로 활자화 해서 자기 생각을 내놓았으면, 공개석상에서 지적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겨서야 합니다.

제가 설교 몇 편 가지고 시비걸지 않습니다. 책으로 내놓을 때는 그만한 책임도 지셔야 합니다.

제가 목사님만 그러한 사람이라고 성토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누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에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저도 포함해서

 

그럼 목사님의 책에 대한 평을 다시 적습니다.

복음이 아닌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지적해주는 것이 사랑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과 [구약 신학의 구속사적 이해]라는 책과 [ 에세이 산상수훈 ]이라는 책에 대한 독후감

1. [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 (도서출판 칼뱅: 서울: 2006)

16pdp 보면, “하나님께서 ‘그 여인의 후손’과 ‘사탄’ 사이에 엄청난 전쟁이 발생될 것을 예고하셨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고 고난을 받는 사건이 있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탄에서 속한 악한 세력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왜 미리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 초반에 사탄을 심판을 행하지 않는가? 즉 왜 그리스도께서 미리 당겨서 나중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몸이 아니라 아예 하와의 몸을 빌려서 오셔서 사탄을 박살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과연 예수님이 천상의 왕이라면 심판 행위없이 궁극적인 승리를 표현할 수는 없더란 말인가? 꼭 사단이라는 피조물을 갈구야만 했던가? 그냥 악은 악대로 놔둔 상태에서 일단 승리를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지옥에 보내어 영원형벌을 받게 하면 안될까?

즉 영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영적인 악을 처리하면 될 문제를 왜 인간의 몸을 입는 번거러운 절차를 꼭 밟고 육의 수난이라는 거쳐서 승리됨을 선언해야 하는가? 그렇게 되면 이것은 순수한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 해결 지운 승리가 아니라 육이라는 조건에 근거하는 승리이기에 육적인 승리가 되는 것이고, 이는 곧 영적 세계만으로서 승리요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어떤 결함 요소를 말해주는 것이 예가 아닐까?

이 두 가지 점 을 고려해 볼 때, 저자는, 창세기 3:15이라는 약속과 그 성취성이 왜 하나님에게 있어 꼭 필요했어야 하는지를 그 원인 규명을 포기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라면을 끓이면서 조리 방식을 소개하는 것과 왜 라면을 만들었는가 하는 원인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라면의 경우에는 라면을 만든 목적을 몰라도 가르쳐준 조리법에 따라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만 창세기 3:15의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에 창세기 3:15의 제시되어야 될 이유를 모르는채 창세기 3:15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라는 분이 오셨다 하는 것을 수용하면 비록 창세기 3:15과 예수와 연관성을 인지하는 바로 그 당시자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악마에게 속한 사람일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가볍게 다루게 된다. 실제로 악마도 창세기 3;15에 약속된 그 인물이 예수님 인줄 명백하게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할 만한 경우가 249p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저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로 하여금 인간의 육을 입고 십자가 지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이런 의문점이라면 이미 십자가 지기 이전 겟세마네 기도에서 해결 본 바다.

즉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비록 자신을 그렇게 의문을 표시하는 반문으로 외치더라도 실은 몰라서 새삼스럽게 묻는 외침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신 일을 알리기 위한 취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매달려서 연기를 멋지게 하고  계신 것이다. 관중들을 의식하시면서, 그것도 7이라는 숫자를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조금도 이런 뜻이 아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버려져야 만 이유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과의 연관성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쪽에서 이미 갖고 있음을 아신다는 고백이다. 즉 이 광경은 자신과 아버지만의 세계이고 다른 인간들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한 분은 버려야 할 분이요 다른 한 분은 버림받아야 당해야 될 분이다. ‘버림’이 없는 하나님의 일을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만의 세계이며 다른 피조물들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된 세계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냥 버림받아야만 한다. 구원이고 뭐고 다 아버지의 몫으로 남는다. 고린도후서 13:4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로서 인간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모든 구원역사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고 그들만의 소박한 성경 해석이요 희망사항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예수님을 버림으로서 인간에서 올라오는 모든 해석도 다 거부하시고 차단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 (요 5:21-23)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자신의 약속에 준해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제 주도권은 예수님이 쥐게 되었고 인간들에게 돌아갈 몫은 없게 되었다. 즉 ‘모든 인간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신학의 배제를 뜻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결과이다. 성도가 되게하든, 구원을 시켜주든 이제 모든 것은 주님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만 제공될 뿐이다.

인간은 이제 성경을 놓고서 예수님과 머리를 맞대어 같이 토론할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올바른 성경해석을 운운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학으로도 구원이 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아니, 아예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그 어떤 권리나 자격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구원이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된다는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은, 인간의 의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원이 전개된다는 뜻이다.

“이렇게해서 구원해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렇게해서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 뿐이단다”라는 것을 증거하는 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이란 상대방을 향하여 ‘그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그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의 의지만’만을 펼치는 증거물이 되도록만 그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모두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할 수 없고(일시적인 목숨은 계속 죽음 속으로 사라져야하고) 십자가의 능력만 활개치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당연히 ‘교회만들기, ’교회 됨‘, ’바른 교회 유지‘라는 아이디어 같은 것은 주님 앞에서 용납이 될 수 없는 사항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성경을 참조해서 구상해 내는 교회라는 것은 너무나도 불필요한 짓이기 때문이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표현으로 마감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구상하는 교회상이란, 인간이란 존재성에 기초해 있기에 존재로만 확인이 될 뿐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존은 오로지 사건으로 만개된 활동을 펼치시기 때문에 ‘인간들의 교회존재’를 위한 그 어떤 시도를 통해서도 포착되지 않고 만약에 붙잡는 순간, 곧장 교회라는 이름의 ‘신종 우상’으로 등장될 뿐이다.

카톨릭이 그러했고 개신교도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성에 기초해서 교회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현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존→‘성도’라는 이름의 존재→그들의 성경 지식을 참고로 하는 ‘교회 지탱하기’로 교회가 존립하는 줄로 안다.

왜 이런 견해를 갖는가 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참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현존만으로 끝난다면 눈에 보이는 사람은 불필요하고 없어져야 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현존이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즉 십자가에서 나오는 ‘배제하는 능력의 적용과 발휘’라는 방식으로 자기 사람을 관리한다는 그 의의를 거부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그들(카톨릭과 개혁주의자들) 성경을 해석하기를 십자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존재성에서 출발해서 창세기 1장을 펼쳐놓고 역사를 새로 보고 조립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창세기 1장에서 인간 소멸과 지옥을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는 아직 예수님이 개입한 흔적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집어넣으려니 창세기 3장에 와서나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 전까지는 인간의 고유의 가치를 보존하는데 주력하고자 한다. 정리하면 인간이 죄를 짓기 전의 정황에서는 십자가가 개입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창조하심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예수님의 일생 가운데 일부에만 해당되고 곧장 예수님의 존재적 본질로 얼굴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과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고. 그 이해된 예수님의 관점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다 해석하려고 덤벼드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진실은 오직 이것 뿐이다. “십자가 외에 다른 하나님의 뜻은 없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 지신 분 외에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십자가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미진한 것을 보충해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가치는 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십자가를 통해 더욱 더 빛이 나는 모습으로 고유의 귀한 가치를 부여받았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의 존재성 자체가 원래 가치가 있는데, 우리 인간이 부족해서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셔서 우리를 도움주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이미 거듭난 버린 성도에게 있어 더 이상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저 수시로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게 하는 모범적 행위 같은 것이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의 노골성을 다음과 같이 까발리면 이렇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반가워한다.

그런데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의아해 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인간의 버림을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가 버려지지 않는
그런 십자가이기를 원하면서 바울 서신의 모든 십자가와 복음에 관련된 구절을 해석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되었든 인간 존재의 가치에 ‘버림의 정신’이 포함되지 않고 빠지는 양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의도를 달리 묘사하면 이렇다. 

즉 "예수야, 이제 내 앞에서 비켜서 한켠에 비켜 서 있어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잘 실천하지 못할 때 다시 부르마 
네 사랑과 네 뜻을 내가 이제  알았으니 이제 직접 내가 하나님에게 나서겠다.
앞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답게, 성도답게 반듯하게 살아볼련다.
그러니 예수야. 제발 이제 십자가 가지고 그만 얼쩡거려라. 그것은 내가 불신자에서 신자 될 때 한번 적용했으면 그만이 아니냐. 이제 나도 너처럼 새사람되었단다.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라는 너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새사람된 나)를 기다리고 고대한다. 그러니 이제 그만 십자가 이야기는 내 앞에서 사라져주었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건전한 내가 계속 존속해야지만  성경준수하기, 하나님 섬기기, 하나님 찬양하기가 성사된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복음의 능력이나 내용이란 

새 사람되었다는 자신들의 지혜로 채워진다. 그리고 그들끼리 뭉쳐서 소위 ‘교회’라는 결사체를 꾸려가려고 한다.

그런데 성경대로 하면 진리란 예수님이시기에, 그 분이 살아있는 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의 능력도 계속 살아있다.

왜냐하면 ‘버림’의 능력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마치 기계가 고장할 때 수리용으로 집어넣다 빼는 작동기계가 아니다.


도리어 십자가에서 쉬지 않고 계속 나오는 능력이란,  인간이고 뭐고 그들이 신봉하는 소위 삼위일체 신까지 지속적으로 박살내어버리는 그런 능력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십자가만 남는다.
왜냐하면 결국 그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수립된 천국과 지옥만 최종 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란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된 한시적 상황이다.


2. [구약 신학의 구속사적의 이해]  도서출판 칼뱅(서울:2006)

p59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유기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유기한 자들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는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라고 되어 있다.

즉 저자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에게는 ‘의도적’으로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지옥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의도적일 수’는 없고 적극적 관여가 안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논리를 전개해느냐 하면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란다.

즉 소위 성도라는 자들이 이번에서 하나님 구출작전에 나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죄의 주동자’로 몰리는 것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이 변호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은 ‘죄’ 개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극복하지 못하니 하나님도 자기네들처럼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6:8에 보면, 성령님은 도리어 인간들의 그 잘못된 죄관을 공박하는 식으로 활동한다고 되어 있다. 그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되어 있다.

즉 십자가 사건이 빠진 예수님은 곧 인간들이 예상한 메시야에 해당된다. “설마 하나님을 말씀을 존중하는 우리보고 뭐라하시겠느냐”하는 식에 기준에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기준점이 수립되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비단 유대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보편성을 말해준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은 오로지 예수님이 행할 수 있고, 뿐만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이름으로 그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리기 위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즉 “나도 예수님처럼 압니다”라고 할 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없게 만드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빌 2:9-11)

하나님의 영광이란 오직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양상에서만 생겨난다. 그런데 신체적인 무릎 꿇기가 아닌 이유는 그것은 ‘신체’라는 존재성의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의 ‘무릎 꿇기’란 존재하고 있는 신체에게 요구하는 바가 아니라 영적으로 벌리는 ‘사건’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열심히 ‘지옥만들기’에 나서시는 그 활동을 마치 “예수님 활동을 그렇게 하시면 예수님께서 지옥만들기 위해 강제로 죄를 만드는 꼴이 되니 주의를 요합니다.”라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에 관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바로 그 건방진 태도가 곧 ‘죄’이다.

유대인들이 평소에 자신의 죄인이 아니라고 우겼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천하의 의인인줄 알았고, 부자 청년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여겼지만 요한복음 15:22의 말씀처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인간의 건전한 이성과 건전한 의지와 건전한 감정(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잠재된 하나님의 형상에서 회복된 그리스도의 형상’ p53) 자체가 곧 예수님을 죽이고 미워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 존재를 기초로해서 거기에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성을 부가하여 웅장한 신학 체계를 구축하고 보다 완벽한 기하기 위한 신학적인 반성과 발전을 도모해 왔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누구보다도 도사 중에 도사, 천재 중의 천재가 사도 바울이었으며 그는 철통같이 믿은 바는, 하나님 있고, 성경이 있고 창세기 3;15의 약속대로 메시야가 오신다면 그것으로 부족한 점이 결코 없기에,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버림받는 나사렛 청년이 필요했겠느냐 하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충절을 극단으로 더욱 더 밀어붙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살해하고 체포했다. 그 천재라도 십자가의 ‘메시야 버려짐’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인간의 신학으로 알 수 없는 이런 죄악된 점을 오로지 십자가 사건으로만 근거해서 알려주기 위해 성령님을 활동하시는 것이다.

3. [에세이 산상수훈 ] 칼빈아카데미(서울:2005)

p221에 보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5절)

주님께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탓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조그만 티도 제거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빼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각이 말씀 안에서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앞서 말한 권징 사역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뺄 수 있는 목사가 누군가? 목사 개인인가 아니면 소위 당회라고 하는 장로 집단체인가?  그리고 그들의 눈의 티는 누가 빼는가?

그리고 일반 교인들에게는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티가 빠지지 않고 소위 교회 중직들의 잔소리와 권징을 들어야지만 눈에 티가 빠지는가?

즉 일반 교인들은 바로 성령에 의해서 티가 빠지지 않고 소위 교회 고위층이란 단계를 거쳐야만 눈에서 티가 빠지도록 우리 주님께서 조직틀을 확정지어놓으셨는가? 

목사 장로의 눈의 티는 하나님이 관리하고 일반 교인들은 그 목사의 관리의 관리를 받도록 그렇게 법적으로 명시해 있는가? 과연 하나님께서 바로 교인들의 눈의 티를 빼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을 하시 전에 먼저 당회라는 것을 소집해서 그들이 훈계에 의해 눈의 티가 빠지도록 하시는가?

저자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 피의 활동의 결과와 열매로 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히기 위한 중간 단계로 인간을 동업자 자격으로 직분을 주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소위 거듭난 자들의 은사 받은 솜씨를 어딘가를 써먹기 위해서 주님께서 은사를 주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은사란, 은사를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주신 은사이다. 즉 “제 능력으로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한 은사이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사도행전 3:11-12)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즉 주님으로부터 권징을 받지 않는 성도는 아예 성도가 아닌 것이다.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8)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 일서 2:27)

교회 내에서 참된 치리와 권징이란 항상 결과적인 고백으로만 등장되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다.

우리가 치리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친히 치리하셔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부인하는 그런 고백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 1:19-20)

사실 누구나 이렇게 치리를 받을 수 밖에(사단에게 물려 지옥갈 수밖에 ) 없는 존재들인데 오로지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롬 8:34/히 7:25) 버티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결 론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 속에는, 인간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그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안된다’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다 이루었다’라는 점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성도에게 있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정말이지 빈말이 아니라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의 행함 속에서 여전히 그 어떤 ‘미흡함’에 메우려는 요소가 어떤 식으로 스며나오고 있느냐를 주목하게 된다.

하지만 가짜로 거듭남을 내세우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여전히 고수하게 된다.

“정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신의 완벽한 진리라는 뜻일진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나는 여전히 내가 보기에도 밉고 부족하고 미흡하다. 따라서 비록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고 위로의 말씀을 주셨지만 나는 그럴수록 겸손하고 정신 바짝차리고 성령님의 도움심으로 날마다 증진 또 증진해서 나에게서 나오는 미흡함을 개선, 보완해서 날로 훌륭한 인격자,(즉 그리스도의 새사람, 새형상을 본받는 것) 나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다. 성경 말씀은 폼으로 있는 게 아니고 또한 비록 율법은 끝났지만 율법의 의미는 남아 있으니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고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p132]- 거룩한 주일도 성수하고 [예수님 생애 마지막 7일 p283] - 율법의 요구하는 바를 달성하면 (구약 성도들이 성령 못받아서 못한 것)비로소 하나님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믿게 된다.

그러니까 가짜 성도는 늘 미흡함에 시달린다. 이것은 시간 의식과 역사 의식의 틀 위에서 성경을 해석한 유대교의 시작의 연속성 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성도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미흡하고 날마다 죄를 짓는데 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까? 아아, 내가 버티고 있는 이 육체와 세상 전체가 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흙으로 되돌아갈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에 그 품고 있는 죄악성이 날마다 더욱 풍성하게 뿜어져나오기 때문이구나. 즉 주님께서는 오로지 십자가 중심으로만 일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살고자한다든지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의지 밑바탕에 이미 악마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음을 ‘나’라는 인간을 통해 들추어내어 구원받는 자로 하여금 날마다 주님의 이름 앞에 자기 이름을 부정하기 위한 조치였구나, 그리고 평생 이 상태로 가겠구나”라는 고백이다.

바라기는 저자가 근원적으로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바란다. 거기에서 시간조차 박살내버리고 오로지 시간을 초월한 십자가의 묵시적 능력을 마지막 재림 이전에 미리 맛보기를 바란다.
 

추가해서

꼼곰히 안 읽어본 것이 아니라

꼼꼼하게 평을 하지를 않은 겁니다.

꼼꼼히 비평하면 성경 해석에 더 많은 지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비평은 특정인을 모독하는데 목표점을 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본적으로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복음적으로 합당한 가를 이광호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취지입니다.

이광호 목사님의 책에는 분명히

기존 교회에서 주장하는 해석의 잘못된 바에 대해서 공박하는  해석이 책 세 권 전편에 걸쳐 흐르고 넘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지 윤리도 도덕으로 봐서는 아니된다는 대목이라든지
('에세이 산상수훈'에서)

그리고
"모든 율법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완벽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지어야 한다"고 [에세이 산상수훈 p78]에서 언급한 것이라든지

또한

인간의 행함의 구원 능력을 부인한 것이든지(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7일)

그리고 성전의 의미를 건물에 두어서는 아니된다든지 하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존의 교회들의 성경 해석과 얼마나 차이나며 얼마나 멀리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존 교회에만 악마가 들아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항상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적개심이 수시로 움터는 중심지로 얼마든지 악마가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 복음이 얼마나 유사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기존 교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반박한다고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봐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제가 비평한 글에도 나와있듯이

예수님께서 창세기 3:15과 메시야의 도래를 연결시킨다는 사실은 악마도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행함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모습을 보일려면  뭔가 늘  자신을 부인해야만 하는데

'자기 부인'을 가능케 하는 기준점이 과연 십자가 복음이냐 아니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갖다놓았느냐 하는 점을 저는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본문 해석에서 십자가를 발췌되지 않는 해석들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세이 산상수훈] p231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대목을 해석하시면서, 성령님을 받은 교회에게 순종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임을 잘 기억해야 한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본문의 의미는, 우리가 순종을 할 때만  말씀이 비로소 성취되고 순종을 안하면 이 말씀은 성취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이 말씀의 성취가 성령님의 활동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즉 "대접하라는대로 그대로 될지어다!"라고 믿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영역 속에 교회에 놓여있음을 인정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기준에 맞춘 대접의 기준이 결코 이 말씀 적용과 상관없음이 파악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제가보기에 그분에게 있어  '날마다 자기 부인'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다른게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거룩함'입니다. (에세이 산상수훈 p102)

즉 "주님의 도움의 도우심 없이는 영원히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고 이광호 목사님이 누누이 언급하시지만(에세이 산상수훈 p100) 사실 목적하는 바는 인간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혹은 구원이 이르렀다고 스스로 안심놓고 확인할 수 있는 수준까지) 거룩성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함입니다.

이 논리는 [구약신학의 구속사 이해]라는 책의 '하나님 형상'에 관한 이론에서 잘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현 인간에게 완전히 깨어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관계성으로 남아있다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된다는 이 형상 이론은 중세 카톨릭에서 확정된 ' 하나님 형상론'이며 루터나 칼빈이 그냥 그대로 차용한 '하나님의 형상론'입니다.

이 이론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이성에서 나오는 기본적 '자기 반성 행함 기능'의 일반 본성을, 거듭난 자만이 지니고 있는 '회복된 그리스도의 형상'의 본성으로  유지시킨 것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형상론의 문제점은,  십지가 복음의 단절(버림받음)의 능력이 전혀 스며들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등장된 것은 결코 미진함에서 제대로됨으로 구체화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광호 목사님의 십자가 의의란 바로 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최종 목표점을 삼는 중간 기착의 의미만 지니기에

지속적인 '자기 부인'의 근거로서 십자가 복음의 의의는 탈락되고 만 겁니다.

즉 "왜 제대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 안해"라고 다구치면서 자기 부인을 촉구하려는 신학을 품고 있어도  "왜 십자가 복음을 안 믿어!"라는 식으로는 자기 부인을 촉구할 수는 없는 그런 신학을 여전히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에게 있어 "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렸으니 앞으로 더욱 더 잘해 볼께요(산상수훈처럼 남을 더 잘 대접할께요)"라는 말에 성립이 되어도


"그렇습니다.  제가 또 살아났군요"라는 고백을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믿음이란 갈라디아서 2:20처럼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려내고 있음"에 대한 고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근거를 기초로 우리를 날마다 살려낼까요?

오직 말씀을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십자가 능력 뿐입니다.

즉 늘 말씀 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주님의 대한 미움과 적개심을 지적하시면서(이 적개심은 '나도 얼쭈 성경 말씀을 최선을 다하여 잘 지키고 있는데 시-"에서 나오는 적대심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피의 공로 만을 증거케 합니다.

우리 성도가 피 흘리지 않는데 분명하지 않습니까?

끝으로 귀하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유월절날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지시만 따르는 심판의 천사가 오직 '양의 피만' 보고서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신학을 하든 목회를 하든 성경을 공부하고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를 봉사했든지 간에 그것으로 심판의 저주가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피, 오직 그 보혈의 피 뿐입니다. 그것만 우리 마음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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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객관적이고 냉철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이광호  (Homepage)  2006-11-01 22:32:18, 조회 : 153, 추천 : 2

이 목사님, 논지를 분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저의 책을 드린 이유는 목사님께서 상상하고 계신 것과 다릅니다. 제가 오늘 이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글을 올린 이유는 서평 자체 때문이 아니라 사실에 어긋난 목사님의 주장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광호 목사가 그 책을 나한테 준 것은 의도가 뭐냐 하면, 하도 이근호 목사가 남한테 욕을 얻어먹어도 존경스럽다 하니까, 그 존경스럽다 하는 사람도 내 책을 인정하더라. 그러니까 마음대로 여러분들은 이제 하자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백그라운드 하나 더 포섭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책을 줬는데, 내가 보면, 그따위 사고방식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이근호를 믿는 거다 말이죠. 그게."


저는 이 목사님으로 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런 인정을 받아서 뭐하겠습니까? 백 그라운드 하나더 포섭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책을 줬다는 말은 지나친 상상아닙니까? 목사님의 강의를 듣던 사람들은 목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불구하고 목사님께서 그와 같은 상상을 하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조금전 쓰신 글에서 "제가 기분이 나빠 목사님의 평을 다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말씀은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야말로 낭설입니다. 목사님께 그런 말을 전달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무서운 사람이군요. 목사님 주변에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봅니다. 제가 목사님으로 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든지 백그라운드 하나더 포섭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책을 주었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저의 책에 대한 목사님의 평에 대한 저의 생각은 따로 말쑴드리겠습니다. 이런 대화를 통해 목사님께나 저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득이 되기를 바랄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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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객관적이고 냉철한 답변을 기대합니다. 
이근호   2006-11-01 23:04:58, 조회 : 146, 추천 : 0

귀하께서는

"제가 본의 아니게 귀하의 명예를 실수시킨 것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참으로  대단히 송구스럽고 죄송스럽게 여깁니다"라는 답변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 같으신데

강의 시간에 그 누구도 거론할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있지도 않는 사실을 뒤집어 씌울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라면 항상 그렇게 살아왔고 그럴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

누가 꽃을 사심없이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두고서 뇌물로 바치는 꽃이라고 강의 시간에 언급을 했습니다.

꽃을 보낸 분이 항의합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꽃을 보낸 것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그런데 강의한 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보냈던지 간에 강의 내용에 적합하다는 식으로 활용했을 뿐이라고"

만일 꽃 보낸 자가 그 강의시간에 현장에 설사 있었다치더라도  강의자가 임의대로 강의 내용에 적절하다고 여기면 충분히 임의대로 수정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꽃 보낸 자가 "저는 그런 식으로 꽃 보낸 것이 아니데요"라고 반발해도,

강의자는 말하기를, "이 강의 전개상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강의의 주제는 당신을 밟겠다는게 초점이 아닙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 강의 주제는 특정 인간을 매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예를 들고 설명한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누구나 그러합니다. . 

제가 남의 강의나 설교에 대해서 시비 걸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설교나 강의하다보면 강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든 무작위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코메디언까지 거론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코메디언에게 일일히 물어 '당신의 발언의 진위은 진실로 그러합니까?'라고 묻지를 않습니다.

그냥 임의대로 활용할 뿐입니다.

제가 귀하라면 이렇게 반응하겠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쭉 그렇게 살아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자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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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나친 논리비약 아닌지요? 
이광호  (Homepage)  2006-11-02 00:43:50, 조회 : 154, 추천 : 1

목사님으로부터 억지 사과를 받아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대한 항변도 아닙니다. 제가 무슨 명예 따위를 중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면 오해입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마저 버려지면 모든 것이 혼돈에 빠져 뒤범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기 언어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질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는 지도자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 목사님께서 "강의를 위해서는 있지도 않은 사실을 (특정인에게) 뒤집어 씌울 수 있다"고 하신 말씀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자칫 있는 사실 조차도 거짓으로 받아드릴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목사님의 논리 대로라면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강의하면서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쭉 그런 식으로 말해 왔고 또한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동원할 수 있다는 목적주의자들의 자세와 무엇이 다른지요? 목사님을 통해 배우는 이들이 목사님께서 그동안 비판해 오신 한국교회 문제 역시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강의를 위한 필요에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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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나친 논리비약 아닌지요? 
이근호   2006-11-02 11:32:07, 조회 : 139, 추천 : 0

성도는 상대방이 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강의자가 다음과 같이 강의했다고 합시다.

"이근호라는 작자는 아주 나쁜 자인데, 그 사람의 나쁜 면도 우리 자신이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근호가 되었던 누가 되었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봅시다"

그 현장에 제가 있다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기 기적받은 사람이 또 있네!. 저분이 그리스도의 공로만 높인다면 시비걸면 안되겠구나. 저 사람에게 시비걸면 심판받겠다. " 라고 말입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라는 성경구절은 (갈5:10) 이런데 해당됩니다.

자아와 자아의 만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 죽은자와 죽은자의 만남이 교회입니다

 

2013.3.2.읽고 나서의 나의 소감:

아! 너무 멋진 말이다

죽은자와 죽은자의 만남!

나도 내 말로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