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

십자가의 피의 능력만이 증거되어야 한다(이근호)100726

아빠와 함께 2013. 3. 1. 15:50

이근호 (IP:117.♡.164.12) 10-07-26 20:50 
어떤 설교가나 성도의 고백을 평할 때는, 십자가의 피의 공로와 은혜가 그 사람에게 전달되어서 그 입을 통해서 십자가의 피의 능력만이 나오고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애써고 노력해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성령의 개입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 말과 전도함이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그렇다면 설교 자체가 사람의 지혜를 거부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이 만약에 성도라면 그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십자가의 피의 능력에서만 나왔음을 그 설교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겁니다. (고전 1:18) 김성수 목사의 설교 중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2010년 7월 25일의 설교)에 관한 설교를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출발점이 어디에서는 가를 유념하며 들었습니다. 즉 설교자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됨을 인식하는 가운데 '거지와 나사로'라는 주제를 가지고 교인들 앞에 서고 있느냐를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김성수 목사가 생각하는 죄라는 것이 무엇이며, 김성수 목사가 생각하는 은혜, 혹은 복음이라는 개념안에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담겨 있는 지를 살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각양 종교인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자기 부인'을 성사시키려는 자들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부인'을 시도하는 그 바탕과 근거가 과연 십자가 피 능력인가 아니면 자기 반성인가를 살피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 반성'이라면 그동안 자신이 버려야 할 것들을 나열하게 마련이고 이제는 그런 사고방식 반대편에 자신을 포진시키면서 지난 날의 삶을 질책하는 설교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나'라는 육신이 마땅히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반대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처럼 "십자가 능력으로 인하여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산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고백이 진정 성령받은 성도의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이 성향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해석한다면 과연 김성수 목사와 같은 논조와 의견을 개진할 것인가를 봐야 합니다. 즉 김성수 목사는 자기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것이 진정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 설교를 통해서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1.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들의 종교적 열성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2. 돈을 무시하는 것이 돈을 정복하는 것이니 제발 더이상 이 세상 살면서 돈에 굴복되지 말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3. 자신들은 평소에 늘 지금 당장 죽음이 임했다고 여기면서 살면서 그 순간에는 오로지 십자가 복음으로만 영원히 살 수 있음을 고백할 수 있기를
 그런데 과연 이런 기대가 사도 바울의 기대하는 바가 동일할까? 김성수 목사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복음과 같지 않는데 그 원인을 바로 출발 자체가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인간들의 의도적 종교성을 파헤치고 그 한계점을 출발점으로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논리학에서 말하는 '변증법적 논리구조'입니다. 반대의 한계를 지적하므로서 그 반대와 반대가 되는 것이 곧 선한 영역임을 제시하는 방식입니다. "저것은 안돼, 저것은 틀린거야"라고 지적하는 것으로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제 귀에는 설교 내내 유사 십자가 복음을 설교하고 있는 것으로 들렸습니다. 십자가 피 복음으로 출발점으로 하여 '거지와 나사로'를 설교하면,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 자체가 율법으로 전환됩니다. 즉 사건의 형식으로 주어진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 복음에 의하면 율법이란 모든 자의 입을 막는 것입니다.(롬 3:19) 다시 말해서, 그 어느 인간도 이 '거지와 나사로'라는 사건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가 없게 됩니다. 즉 "우리는 거지가 됩시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부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자입니다"가 됩니다. 우리가 거지 나사로보다 부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김성수 목사가 긴 설교 시간동안 애써서 지적한 그런 인간적인 오류 때문이 아니라 부자 역할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김성수 목사의 사상의 결정적인 과오는, 죄인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소개하는 그리스도가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의 중요함 놓치고 있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점을 결코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려야 한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전부는 예수님의 주되심에 있다"입니다. 따라서 김성수 목사는 '거지나 나사로' 설교에서는 도저히 '예수님의 주되심'의 차원과 제대로 연결지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 "예수님의 주되심"이 증거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유용성을 우리 소지합시다"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즉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산다"라는 사실이 곧 죄인에서 나오는 죄의 발로라는 점을 김성수 목사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김성수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은 여전히 개혁주의 신학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십자가 복음과의 차이점입니다.

바라기는 저의 이 설교평을 김성수 목사의 사이트에 올렸으면 합니다. 그의 소견이 궁금합니다.
 서동훈 (IP:120.♡.175.187) 10-07-27 00:16 
설교 속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어져야 되는데 아무리들어도 주의 영이 증거하는 예수그리도가 도출되지 않는 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평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