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롯과 천사의 만남(창19;1-3) 1703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9. 22:33
2017-03-08 20:39:00조회 : 48         
   롯과 천사의 만남 17030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롯과 천사의 만남 (창세기 19:1-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Du_SgZuUrig, Hit:3
 이근호17-03-08 21:25 
롯과 천사의 만남 

2017년 3월 8일                    본문 말씀; 창세기 19:1-3 

(19: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19: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19: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천사와 인간의 만남에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호기심이나 궁금해서라도 천사에 대면해서 살필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은 천사를 요청해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천사는 인간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낮의 존재’입니다. 낮에 활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저녁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치 포장지에 해당 상품의 알려주는 바코드 이미지처럼 밝음과 어둠의 줄 무늬가 교체되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 되는 겁니다.(창 1:5) 밤은 인간들이 활동영역이 아닙니다. 즉 이 창조세계 안에 여전히 신의 시간적 영지(領地)가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그 영지(領地)를 통해서 천사가 출몰합니다. 밤은 창조주의 일관성 있는 주도권을 드러내는 간격입니다. 낮에 인간들이 무슨 활동을 했든지 상관없이 창조세계는 하나님의 목적달성에 차질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낮의 허점, 낮의 망침, 낮의 혼란과 견주어서 밤은 대단히 침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천사는 소돔성에서 숙식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경야(經夜), 즉 밤을 지새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밤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과 소돔의 심판과 관련성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비해 롯은 자연스럽게 평소에 외진 사람에게 하듯 친절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낮’과 관련 있듯이, 롯의 친절도 천사의 일과 무관한 인간의 일일뿐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는 인간의 일입니다. 이 인간의 일이 천사를 통해서 감행되는 심판을 지연시키거나 중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천사는 늘 인간을 기피합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철저하게 하나님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시할 따름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하거 초조하거나 누구에게 화풀이하거나 짜증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8:11에서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얻고자 했다가 살해위험을 안고 고향에서 도망쳐 나옵니다. 즉 같은 인간하고 경쟁하고 싸우다가 피곤한 육신을 끌고 벧엘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잡니다. 그 때 꿈에 사다리가 보이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야곱은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곧 ‘야곱’을 위해서 천사를 보디가드 식으로 보내는 줄로 알았습니다. 야곱이 이런 오해를 한 것은 아직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밤을 통해서 변화된 존재의 위상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또 ‘마하나임’이라는 많은 수의 천사 집단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여전히 낮의 사람입니다. 형 에서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킬 자아’가 여전히 있고 그것이 본인이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싸움을 한 것은 형이 보낸 자객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죽은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축복을 받습니다. 

즉 전에 주어진 모든 하나님의 일정들이 낮은 사람은 ‘야곱’을 위함이 아니라 ‘밤’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되는 ‘이스라엘’을 겨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인간과 이러한 천사의 관계를 오늘 본문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8:33에서 일단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 작업에 빠집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즉 ‘아브라함 언약이 기준이 되어 실시되는 심판’에 아브라함은 일체 기여하지를 못합니다. 그 언약을 천사 둘이 감행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한 심판 기준은 이제 심판 행위 속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핍박이요 고난입니다. 천사에 의해서 실시되는 심판에서 ‘하늘의 유황불’에 강조점을 두면 아니됩니다. 

정작 심판의 핵심은 ‘소돔이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동안 인간들이 자신의 온갖 지혜와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질서유지책과 협력과 문화와 문명이 몽땅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무의미하게도 말입니다. 소용없게도 말입니다. 마치 주부가 그릇에 물을 담았다가 물을 도로 붓고 다시 빈 그릇이 되는 형국입니다. 

‘낮의 존재’인 인간들은 이 주부가 하는 일에 쓸데없는 일로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부가 여호와 하나님이요 천사라면 그 빈 그릇이 비워있지 않고 ‘없는데서 새로 생긴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에 의해서 새로 나타난’ 주님이십니다. 단순히 있는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없어지고 사라지는 그 현장에서 새로운 언약적 결과성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언약의 일관성’, ‘언약의 지속성’, ‘언약의 성실성’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롯이 바로 그 인물입니다. 천사 둘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지만 롯은 아직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것’이요 ‘자기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요즈음 식으로 말하는, ‘자기 구원’ ‘자기 영생 얻기’ 위해 교회 다니는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롯은 ‘자기 구원’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합니다. 마치 야곱이 이스라엘을 전혀 눈치 못챈 것처럼 롯도 천사 만나기 전에는 그냥 친절한 이웃일 뿐입니다. 인간적인 안목에서 보면, 그냥 소돔에 살던 ‘한 사람의 의인’ 정도입니다. 이것은 본인마저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천사처럼 내 것이 없어야 합니다. 천사처럼 하나님께 소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천사와 더불어 소돔에서 고난 받게 합니다. 그 고난의 증거가 바로 19:8에 나옵니다. “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마치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심정과도 같습니다. 딸에서 ‘내 것’이 떨어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롯은 천사처럼 ‘하나님의 것’, ‘하나님 소속’이 된 겁니다. 롯은 자기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이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오늘날의 성도는 바로 ‘주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게 됩니다.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성도 자체가 아니라 그 성도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라지는 이 세상에 미련두지 말게 하옵소서. 남들에게 하소연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3-09 21:29 
78강-창 19장 1-3절(롯과 천사의 만남)1703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9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2페이지입니다. 

  

창 19:1-3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오늘 본문은 희한하게도 사람과 천사의 만남입니다. 성경에서 천사가 나온다 하니까 사람들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들어서 인간의 입장에서 천사와 만나서 우리가 모르는 하늘나라 소식, 정보, 지식이라도 얻을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됩니다. 성경에 천사가 나오니까 21세기의 우리도 천사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창세기 19장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롯이 천사대접 잘해서 구원받았다고 다들 그렇게 해석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봐도 다른 해석은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다 멸망했는데 구원은 누가 받았는가? 롯이 받았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천사 대접해서 구원받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실례로 히브리서 13장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라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요. 처음에 나오는 “날이 저물매”라는 것, 그리고 2절 끝에 보면,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경야, 밤을 지새우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날이 저물면 밤이 됩니다. 경야(竟夜)라 하는 것은 밤을 그냥 꼬박 지새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항상 먼저 염두에 둘 것은 천사가 사람을 피한다는 사실이에요. 사람은 호기심에서 천사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 호기심은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에서 문제가 돼요. 롯이 천사를 만났지만 천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천사를 두고 굉장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판단해 보겠다.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우리가 상관하겠다.” 이렇게 나옵니다. 근본적으로 천사의 소속이 하나님소속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자꾸 놓쳐버립니다. 소속이 하나님소속이라는 말을 더 쉽게 하면, 하나님 것이에요. 우리 인간 것 아닙니다. 천사가 인간의 장난감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의도적으로 밤에 의미를 줬습니다. 5절에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창조 속에 인간 만들었고, 새 만들었고, 달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왜 저녁을 만들었다는 것은 빼먹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만든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상품 뒤에 보면 스마트 폰으로 찍으면 다 나오는 상품정보가 담긴 바가 있어요. 그게 줄 선처럼 되어 있지요. 흰 것 검은 것, 흰 것 검은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하나님나라의 정보를 모든 세상 만물에 입력을 시키듯이 거기에 저녁을 다 집어넣어 놓았어요. 밤을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밤은 인간이 활동을 멈추는 순간입니다. 그런 기간이에요. 그렇게 활동을 멈출 때 누가 활동하는가? 천사가 활동합니다. 창세기 28장 11절에 야곱이 형을 속였다. 이것은 어느 바탕, 어느 지평에서 일어나는 일이냐 하면, 인간과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일어난, 인간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에요. 

  

동생은 형을 속이고 재산을 다 차지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밤이 되었다는 겁니다. 야곱이나 에서는,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낮에 활동합니다. 낮에 티격태격 아버지 재산을 누가 독차지하느냐를 두고 경쟁하고 싸웠던 겁니다. 오늘날 이 사회, 쉽게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지요. 

  

자본주의 사회가 뭐냐 하면, 경쟁사회입니다. 그냥 이유도 없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사회가 아니에요. 더, 더, 더 가지고 싶은 사회인데 그 경쟁사회의 본질이 이미 에서와 야곱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재산이 없었으면 싸울 일이 없어요. 아버지재산이 있고, 아버지가 늙어 돌아가시게 되면 누가 그 재산을 가질 것인가의 싸움을 미리 당겨서 했습니다. 

  

그 싸움이 성경에 죽 나오는데,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서 어디를 주목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는 그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느냐를 주목하지 않아요. 야곱은 어떻게 했고 에서는 어떻게 했던가? 야곱이 저렇게 해서 복을 받았으니 나는 야곱처럼 되리라, 라고 한다면 무엇을 빠트리게 되느냐? 밤이라는 사실을 빠트린 거예요. 

  

왜 인간은 인간에게 주목하느냐? 나는 내 것이거든요. 이것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결혼제도입니다. 결혼이 참 희한해요. 남편과 아내가 결혼하면 남편이 오해하기를 아내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내는 오해하기를 남편이 자기남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가정은 하나인데 소유주가 둘이 되었습니다. 평온할 리가 없어요. 

  

가정이 조용하려면 딱 하나만 하면 돼요. 내가 내 것 아니면 돼요. 내 이 몸, 내 인생 살아온 것을 내 것이라고 등기를 안 하면 되는 겁니다. 내 것을 포기하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나라는 인간이 나 말고 다른 남자에게 모든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이 돼요. 넘겨주면 조용한데 아담 후손치고 넘겨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넘겨주는 척 하면서 몽땅 다 가지는 머리는 쓰되 절대로 못 넘겨줍니다. 행복하다는 조건하에 넘겨줄 수는 있지만 반드시 조건이 붙어요. 행복할 때만. 불행해도 넘겨주는 이것은 바보지 정상이 아니에요. 그런데 비교해보라는 거예요. 그게 낮에 활동하는 존재들의 주고받는 사고방식이고 생각들이고 다툼이고 경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밤에는 경쟁이 없어요. 물론 전쟁은 있는데 경쟁은 없어요. 왜냐하면 밤에 활동하는 것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자기 것이 아니에요. 천사의 특징은 뭐냐 하면, 몽땅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천사가 고민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천사가 걱정한다? 왜 걱정하는데요? 천사가 짜증낸다? 말이 안 되지요. 

  

내 것이라고 뭔가 남겨져 있어야 짜증을 내든, 희망을 품든, 목적을 가지든, 애를 쓰든, 노력을 하든지 하는데 내 것이 없는데 무슨 걱정을 하고, 근심을 하고, 염려를 하고, 짜증을 냅니까? 불안해하고 무서워합니까? 야곱이 형과 싸우고 고민이 되는데 밤이 되고 잠은 오니까 잠을 잤습니다. 돌 베게 하고 잠을 잤지요. 

  

야곱이 잠을 자고 있는 그 때 그 밤에 천사가 왜 그렇게 시끄럽게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여기서 야곱은 또다시 오해합니다. 이 천사들이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줄 알고 있어요. 야곱 이야기를 잠시 중지하고 오늘 본문 창세기 19장 바로 앞에 있는 18장 끝 대목을 보겠습니다. 

  

3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하나님이 하는 일이 하나님과 주고받고 또 주고받고 한 것 같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한 번 읽어보세요. 항상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자기 갈 길로 갑니다. 협조가 안 되고 협력이 안 됩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 하느냐 하면, 그동안 구원에 대해서 인간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잘 보이면 그걸로 날 구원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하고 함께 하지 않습니다. 18장 33절 말씀처럼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자기 갈 길로 가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자기 볼일 보러 가시는 거예요. 

  

그 볼일에 이어서 천사 둘이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난 겁니다. 아브라함을 배제하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오늘 말씀의 결론부분을 미리 당겨서 이야기합니다. 하도 논리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구원에서 구원받아야 돼요. 자기 구원욕구에서. 구원보다, 내가 심판받는다는 그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 것은 내 것이에요. 내 것이니까 나는 심판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고 나는 구원받아서 꼭 천국가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 이런 정신머리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같이 동업할 수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여섯 번이나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 전부 다 퇴짜 당했습니다. 

  

그래놓고도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나는 내 것이라는 것이 기본 베이스가 깔린 상태에서 더, 더, 더 사고의 범주를 넓혀보니까, ‘살아 있을 때도 살지만 죽고 나서도 뭐가 있겠지? 죽고 난 뒤에 나는 어떻게 되지? 살아야 되지. 사는데 어떻게 살지? 천국 가서 살아야지. 천국 가기 위해서 뭐 하면 되지? 그래, 예수 믿어야지.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네 생각이고 그것은 야곱생각이고 그것은 나의 생각이고, 에서의 생각이고, 여전히 내 것은 내 것이라는 그것을 조금도 포기하거나, 양보하거나, 미련을 떨쳐버릴 일이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바로 그 점을 수정하기 위해서 제가 언급한 것이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언약의 차이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올 때 아브라함의 소원을 들어주러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무심하게 자기 업무를 추진하시는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언약입니다. 누굴 통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언약입니다. 착각하고 오해하고 오류를 낳고 실패하는 그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언약에 적합하다고 하나님이 생각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속 들락날락 하시면서 이야기를 하시되 정작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모든 목적은 아브라함 네가 제시한 그 목적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계속 일깨워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다윗과 다윗언약이 달라요. 다윗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번제도 아니고 상한심령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찾아왔으니까 상한심령을 알지 본인이 아무리 도 닦아 봐도 상한심령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롯으로 하여금 천사가 당하는 수모를 같이 당하게 만들어요. 아브라함은 18장 33절에서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는 아무 연관도 없는 다른 곳에 갔어요. 이 말은 천사가 가는 곳과 다른 곳, 외부인으로서 지금 아브라함은 머물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간 쪽은 두 천사에요. 

  

쉽게 이야기하면 두 천사가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아브라함언약을 이루는데 정작 아브라함은 딴 곳에 있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언약은 이뤄야 되겠고 아브라함은 딴 곳에 있으면서 그 순간에 외부인 되고, 그러면 아브라함언약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참여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에요. 

  

그러면 롯을 구원한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롯을 구원하지 않아요. 롯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두 천사는 롯까지 배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천사를 앞장세워서 하는데 천사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나 롯이나 저나 여러분이나 전부 다 내 것이에요. 내 것을 고집하고 있는 이상은 절대로 하나님의 언약에 동조하거나 협조할 수가 없어요. 협력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동업자가 아니에요. 

  

다시 창세기 28장으로 돌아가서 야곱이 오해한 것이 뭐냐? 잠을 자고 있는데 사다리가 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했다. 야곱이 오해하기를, ‘아, 하나님이 내 소원 들어주기 위해서, 형으로부터 날 안전하게 지켜서 아버지재산을 몽땅 차지할 수 있도록 천사까지 보내서 날 보디가드처럼 보호해주는구나.’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28장 22절에 보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다시 돌아오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야곱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돌아오는 것은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돌아오지요. 

  

지금 야곱이 천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돌아온다고 하는 거예요. 이 오해는 무슨 오해와 같으냐 하면, 천국 가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현재 이 땅에 사는 그 나, 천국 가는 그 나는 지금 천국 가고자 하는 그 나라는 겁니다. 중도에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해요. 

  

어떻게 바뀝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 바뀌는 것이 창세기 19장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빠져있어요. 자기 동네로 갔습니다. 천사의 작업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곳에 있어요. 천사 둘이 아브라함언약을 이룹니다. 

  

야곱 이야기 더 해봅시다. 야곱이 라반을 만나서 부자가 되었어요. 라반을 떠나서 돌아올 때 뒤에서 형이 쫒아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1절에 보면 야곱이 얍복강에 들어설 때에 누굴 만나는가? 하나님의 군대, 천사들의 집단을 만납니다. 마하나임이에요. 마하나임을 만나게 해놓고 정작 야곱은 천사들 만난 것보다 같은 인간, 낮에 활동하는 존재, 인간에 더 신경을 써요. 

  

그래서 형이 날 죽이러 오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에, 무려 400명이나 데리고 오기 때문에 잘 보이기 위해서 정실부인출신의 자식들은 제일 안전한 자리로 돌리고 종의 자식들은 위험의 확률이 많은 곳에 두는 식으로 해서 자신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밤입니다, 그 밤에 야곱은 사라집니다. 

  

오늘 설교에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성에 천사 둘이 와서 심판했다는데 사람들은 어디에 주목하느냐 하면, 불 심판,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는 것에 주목을 해요.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취지에 안 맞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취지는 유황불에 주목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라진다는 거예요. 

  

이 소돔과 고모라가 사라진다는 겁니다. 사라진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원래 소돔과 고모라는 누가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든 것을 하나님이 사라지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낮에 활동하는 그 어떤 인간도 모릅니다. 모르면 심판대상이에요. 유황불보다 더 무서운 게 사라진다는 거예요. 사라지면 뭐도 사라지는가 하면, 윤리와 도덕도 사라져요. 

  

내가 천사 대접한 것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뭐도 사라지는가 하면, 성공할거냐, 실패할거냐, 성공실패에 대한 모든 의도도 먼지처럼 ‘그게 무슨 소용 있는데?’ 의미 없이 사라져 버려요. 사라진다는 것은 여태껏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조심했고, 절제했고, 자기 관리했고, 남에게 나쁜 짓 안하면서 착한 일 끌어 모으고, 복 끌어 모아서 살아야지, 살아야지, 하는 그것이 사라진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의도와 행함과 노력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게 심판이에요. 그러면 우리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렇게 사라질 거 왜 만들어 놨습니까, 라는 거예요. 참 이 대목이 정말 어려운 대목이에요. 그릇에다 물을 담았습니다. 엄마가 그릇에 물을 담으니까 그걸 보는 애들이 “엄마, 이 물 가지고 뭐할 거야? 라면 끓일 거야.”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옵니다. “화초에 물 줄 거야?”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오는데 엄마가 씩 웃으면서 그릇에다 담았던 물을 도로 부어버립니다. 

  

자식들이 놀래요. ‘엄마는 다시 버릴 물을 왜 담아놓았지?’ 엄마가 비워놓고 “그릇 봐라. 보이나 안보이나?” “뭐? 안 보이는데? 안보이지? 맨 그릇이잖아. 물 담았는데 물 부어버리니까 빈 그릇만 보이는데?” “네 눈엔 빈 그릇만 보이느냐?” 빈 그릇만 보이는 거예요. 뭐가 있는가 하면, 하늘나라 천국의 백성은 없는데서 나오는 겁니다. 

  

야곱이야기 다시 할게요. 야곱은 낮의 사람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내 것과 형의 것, 내 것 이미 된 것과 내 것 아닌 것을 구분합니다. 야곱에게는 본인이 있으므로 자기소유물도 있습니다. 양떼도 많고 자녀도 열이나 되고 아내도 둘이나 있고,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야곱을 이스라엘로 칩시다. 이스라엘은 단 한명의 아내도 없고, 한명의 자식도 없습니다. 재산도 없어요. 

  

야곱은, 내가 없음을 위하여 잠시 있어진 상태를 천사 만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밤이 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이 세상 모든 천사와 악마와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 만들기 위한 근원적인 창세전의 계획이라는 것, 그게 새언약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성령 받지 않으면 몰라요. 

  

성령 받지 않으면 육의 상태기 때문에 내 것 유지하려고 하고, 내것 확장시키려고 하고, 내 것 키우려고 하는 거예요. 천국, 현재 있는 내가 저기 간다는 것, 저기 갈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거예요. 성경에서 예수 이름으로 간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내 이름으로 그대로 간다는 거예요.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를 전제로 할 때 이름이 있어요. 내 이름, 야곱이면 야곱이름, 이스라엘이면 이스라엘이름, 그 이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가요. 주님의 지체가 되어서 갑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고 우리는 주의 몸에서 생성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천국, 아들의 나라, 주님의 그 나라에 가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습니다. 그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릇들이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1장에 보면, 그전까지 내가 알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존귀히 되게 하려 함이니, 그리고 그 다음 말,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느니라. 어느 세상에서? 사라지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세상입니다. 고생 많은, 지옥 같은 이렇게 힘든 세상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힘든 세상이라는 것보다 더 확실한 표현은 사라진다는 거예요. 재벌 되어도 사라지고 땅을 15만평 가져도 사라지는 겁니다. 장로 목사 집사 되어도 사라지는 거예요. 자식이 열 명 되어도 사라지고 이 땅에서 창기나 세리가 되어도 사라지고, 심지어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땅에서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하늘나라 가면 남성 여성도 사라져요. 

  

군에 갔다 왔습니까? 아직 안 갔다 왔습니까? 그것도 사라져요. 인간의 윤리와 모든 도덕을 극복하지 않으면 신자 아닙니다. 그거 신자 아니에요. 지금 창세기 19장에서 천사와 하나님관계가 언약관계에요. 천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이유가, 천사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에요. 

  

소속이 하나님소속입니다. 하나님 소속이 되면 이 천사는 낮의 세계에서는 소속이 없어요. 하나님은 롯을 소돔과 고모라의 소속을 없애버리는 걸로 천사와 만남의 주선을 한 거예요. 이 땅에서,
사라지는 세상에서 소속이 없는 것,
이것을 네 자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히브리서에서 나그네라고 해요. 


  

나그네가 가는 곳은 고향이 아니고 본향이에요. 그러나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본향은 못가요. 태어난 곳인데 못가요. 우리는 고향은 있는데 본향은 주님만이 바꿔주는 상태에서 그것이 알려지기에 그렇습니다. 지금 롯이 천사 만났다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천사 둘은 소속이 하나님 소속입니다. 

  

그래서 밤의 존재입니다. 밤의 존재이기에 밤을 지새워요. 나중에 얍복 강가에서 밤에서 낮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 떠나야 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하면, 낮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밤에서 만들어졌어요. 그러면 야곱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야곱은 인간들이 만들었기에 낮에서 만들고 낮에 소속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과 천사가 보기에는 낮에 소속된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만 완료가 되면 사라져야 될 것입니다. 불로 오든 뭘로 오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라진다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인자가 도적같이 오는 이유가 이 세상을 사라지게 하는 거예요. 

  

엄마가 그릇이 물을 담았다가 다시 쏟아버릴 때 그냥 담았다가 쏟았다가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잖아요. 천사가 와서 소돔과 고모라를 사라지게 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언약을 만들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왔잖아요. 

  

아브라함과 관련된 롯으로 하여금 롯을 현재 소돔과 고모라의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천사처럼 소돔과 고모라에는 소속이 없고 천사처럼 하나님의 것이 되는 그러한 사람으로 변경시켜 주는 거예요. 이것은 롯이 생각하는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구원에 하나님께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을 때 그 과정이 뭐냐? 천사가 당하는 수모를 똑같이 당해야 됩니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요한복음 15장에 가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때 너희들 인상 보고 미워한다고, 행동보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야.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세력 속에서 네가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 악마의 세력이 “너도 같은 편이지? 같은 편이지!” 하면서 이유도 없이 미워한다는 거예요. 

  

사라지는 세계를 붙잡고 있는 그것들이 사라져서 떠나야 될 것을 눈치 채고 이유 없이 미워한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빛의 자녀를 미워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거 보면 교회라는 것이 참 위험한 모임이지요. 복 받기 위해서 모인 교회가 성도 하나 있으면 그렇게 미워해요. 제발 좀 나가 줬으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이 들어가는 것이, 천사의 소속이고 롯이 천사를 대접했으면 구원받으면 될 것이 아닙니까, 하는데 롯이 경험을 해야 됩니다. 천사가 어떤 수모를 당하는가를 경험을 해야 돼요. 없어질 것들이 있는 척을 하는 그 수모를, 진짜 영원히 있는 천사에 대해서 어떤 대우를 했는지를 롯도 같이 경험한다는 것에서 같은 편이 되는 겁니다. 

  

경험을 안 하면 같은 편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롯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경험 못한 굉장히 낯선 겁니다. 롯이 만약에 우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 지키면서 윤리 도덕으로 무장할 거예요. 지금 무장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나게 해줬어요. 그럴 때 롯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다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천사가 반겼습니까? 거부했지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천사와 인간은 만날 수가 없어요. 낮에 활동하는 성깔과 성질가지고 제대로 천사를 이해하거나 동조하거나 협조가 안 됩니다. 도움이 안돼요. 

  

천사 입장에서는 그냥 갈라서는 수밖에 없어요. 야곱과 얍복강의 그 천사는 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롯은 성의를 다해서 대접을 한 겁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 대 인간의 사랑 그대로 귀한 분을 알아 모시고 성의를 다 한 거예요. 성의 다 해서 구원받은 것 아닙니다. 이제는 천사가 당한 것 하고 똑같이 롯이 당해야 됩니다. 

  

천사가 그 동네 깡패들한테 당하지요. 19장 7절을 봅시다.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게 아버지가 귀한 딸에게 할 소리입니까? 그런데 거침없이 해버리지요. 롯이 왜 이렇게 거침없이 두 딸을 제물로 바쳐가면서 천사를 보호하려고 합니까? 롯은 자기 것이 없어졌어요. 지킬 내가 없어졌어요. 천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속이에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소속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왜? 장차 이 세상은 예수의 나라가 만들어져야 되기에 인간나라는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만들어놓고 없애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언약 안에 들어 있는 핵심내용이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 주의 하늘나라 만들기 위해서 언약을 줬고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도 찾아왔던 겁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소속인데 문제는 이제 롯도 천사처럼 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만 남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해요. “두 딸을 제물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천사와 같은 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눈물 흘리면서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서슴없이 했을 겁니다. 

  

심판의 이유가 뭐냐?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해서 심판했다? 지난 시간에 했어요. 음란한 것이 아니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의 이유는 우상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몰랐던 겁니다. 신을 부르고, 여호와를 부르고, 예수 찾고, 온갖 것 다 찾지만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언약에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예수님께 잘 보여서 덩달아 구원받아볼까, 영생 얻어 볼까, 심판을 모면해 볼까, 여전히 자기 것에 놓여 있다면 그렇게 놓여 있는 사람을 부르고 싶어요. 

  

불러가지고 자기 두 딸 깡패들에게 내놓은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해보라고 테스트하고 싶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얼마나 귀한 딸인데 그걸 왜 내놓아요? 아브라함이 자기 이삭을 바친 것, 롯이 두 딸 바친 것, 지금 이 두 딸을 깡패들이 안 받았다고 하지만 받고 안 받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딸을 내놓은 그 상태는 이미 딸을 포기한 거예요. 목숨보다, 내구원보다, 내 심판보다 소중한 것이 뭐냐? 그것은 바로 주 예수의 나라에요. 우린 피조물이거든요. 피조물이 피조물을 중요하다고 하는 이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그 마음을 집어넣어서 그런 거예요. 이것은 저주받을 마음이에요. 지옥 갈 마음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못 고칩니다. 고칠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때문에 성령이 찾아와서 “네 소속이 어디야? 넌 누구 꺼야?” 물을 때 “우리는 주님 겁니다.” “너 잘난 것 많은데?” “그건 배설물입니다.” 그러면 이 땅은? 이 땅은 주님 가신 길을 가면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하심을 털어내면 되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내용에 대해서 잘 알았다 칩시다. 이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아직 세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천사가 활동한다는 말이고, 그리고 성령이 활동한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목사님, 과연 제가 롯처럼 이제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간단하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때문에 밉상 받고 고난 받으시면 그게 바로 롯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처럼 한다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저주받을찌어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에 대해서 너무 치근대지 말고 너무 의지하지 마시고 사람에게 너무 하소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고 이 세상이 사라질 세상이며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뒤에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을 우리는 정말 구경하듯이, 관람하듯이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롯이 대접 잘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가 어디 소속인지, 그리고 자신도 그쪽으로 소속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자기의 구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안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소급해서 확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