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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사람의 행패(창19;4-11) 1703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16. 08:01
2017-03-15 20:48:40조회 : 28         
   소돔사람들의 행패 17031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소돔사람들의 행패(창세기 19:4-1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SKcdtp_gACU, Hit:1

 이근호17-03-15 21:30 
소돔 사람의 행패 

2017년 3월 15일                   본문 말씀: 창세기 19:4-11 

(19: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19:6)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19: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19:8)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19:9)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19: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19:11)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이미 소돔은 멸망받기로 하늘에서 확정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냥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리시면 되는데 구태여 천사 둘을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의 이유를 지상에서 유발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5:2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즉 예수님이 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의 선과 악은 윤리적으로 단정짓게 됩니다. 이미 인간들은 자신들이 선과 악에 대해서 나름대로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 앎은 그들이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것은 하늘이 봐서도 살만한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즉 선한 이는 이 세상에서 계속 존재할 타당성을 갖게 되고, 악한 이는 이 세상에서 죽어도 마땅하니, 따라서 계속 존재하고 싶다면 계속 선한 존재로 유지하는 것이 그 조건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선한 존재로 버티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이 뭔가에 대해서 이미 ‘안다’는 것이다. 

사람은 행동할 때, 뭔가 알고 있기에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안다’는 것은 그 안에 선하고 참되고 진리스럽게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도적으로 나쁜 짓 하는 경우보다 별반 나쁜 일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행동에 나서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보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살만한 자격이 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나는 이 세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특히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분별력이 있기에 이 분별력에 입각해서 행동에 나서게 되면 필히 선한 행위가 되고, 따라서 누가 나에게 벌주거나 심판하기가 곤란하고 도리어 계속 존재하기를 권장할 만한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세요. 소돔에 낯선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소돔에 존재한 자들이 아닙니다. ‘존재한 자’가 아니기에 ‘부재(不在)’의 존재가 나타난 겁니다. 부재의 존재란 다시 사라질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 존재의 세상에서 흔적만 남길 뿐입니다. 부재의 존재의 등장은 곧 이미 그 소돔의 주민들에게 있어 그들의 앎에 한계를 제공합니다. 

즉 이미 아는 것은 아는 것이지만, 낯선 인물의 등장은 그들의 앎의 범위 밖의 인물의 출현입니다. 따라서 소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위협과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상관하리라’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의 뜻은 ‘정보를 획득하겠다’는 뜻입니다. 

즉 낯선 두 부재의 존재에 대해서 나름대로 알아보겠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 대해서 극구 알고자 하는 겁니까? 이것은 바로 ‘동일시의 횡포’입니다. 즉 사람이 남을 대할 때, 이미 자신이 진행하고 있고 펼치고 있는 자기 영역에 그 타인을 강제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나타내게 됩니다. 

특히 소돔의 사람들은 자기네들 끼리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이 말은 소통하는 의미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롯은 소돔의 주민들에게 자신의 집에 들어온 그 분들에 대해서 알려주기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해도 못 알아볼 ‘바깥 세계’에서 출몰하신 분으로 롯은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두 사람은 우리 소돔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바로는 그 범위를 넘어서고 있음을 롯은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미 소돔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심판은 확정적입니다. 새삼스럽게 구제의 기회를 제공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 천사의 입장에서 볼 때, 소돔의 사람들은 심판이 끝난 ‘과거의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사람은 미래의 사람과 소통될 수 없습니다. 롯은 과거와 미래의 그 중간에 끼어 있습니다. 롯은 과거의 사람들로부터 미래의 분들을 지켜주려고 합니다. 과거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어떤 지식을 동원해도 천사들에게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소돔에 대한 심판이 ‘언약에 의한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소돔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언약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심판주는 ‘언약의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이해할 자는 인간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도 아는 이 없고, 그 기준이 되는 언약에 대해서 아는 이 없고, 또 알려주어서 이해하는 이 없습니다. 

그 언약이 주어지는 환경에는 온통 ‘인간의 지식체계’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나름대로 아는 게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언약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해를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소돔의 사람들은 두 천사를 핍박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행동하면서 발생되는 ‘자유의 여백’ 부분에서 작렬하는 악한 권력의 횡포입니다. 인간들의 지식은 자꾸만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서만 묻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두 천사에 의해서 유발된 상황을 안다고 이렇게 자문해야 합니다.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지금 인간 세상은 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십자가 피’를 기준으로 해서 진행됩니다. 십자가는 새언약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면서 세상을 복음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재의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처럼, 멸망당할 세상에서 ‘흔적’으로 보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람들의 지식에 근거한 행위가 복음과 접하면서
그들이 벌린 자유로운 행위로 인하여 새롭게 발생된 그 ‘자유의 여백’에서
꼭 심판받아 마땅한 악의 속성이 발휘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돔의 사람들이 롯을 보고 ‘자칭 법관 노릇한다고’고 비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이미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권력의 질서에 묶여서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권력이 총체적으로 반(反)-언약적입니다. 천사가 개입하는 그들이 아는 것은 혼돈으로 변했습니다. 눈이 어두워 무지상태로 돌변했기 때문입니다. 

롯은 천사가 심판하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이 심판 이후의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은 그 미래 편에 섭니다. 심지어 자신의 두 딸보다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 
과거의 사람‘들은 이 미래적 존재를 알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 롯과 같은 처지에서 세상 권력으로부터 쉬지않고 공격 표적이 되는 처지에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심판 속을 질주하는 언약 열차의 사정을 헤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7-03-16 07:49:28조회 : 19         
79강-창 19장 4-11절(소돔사람들의 행패)170312-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61.84.174.21)

79강-창 19장 4-11절(소돔사람들의 행패)1703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9장 4-11절입니다. 구약성경 22페이지입니다.

 

창 19:4-11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오늘 본문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그 공동체, 인간사회에 전혀 없던 두 사람이 등장한 겁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부재의 존재라고 하는데, 없던 사람, 존재하지 않았던 부재의 사람이 나타났다는 말은, 그분들은 곧 사라져야 될 분입니다. 그러면 존재하지 않는 분이 존재로 나타났다가 다시 부재로 되느냐?

 

그 가운데서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이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이 인간세계 말고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인데 다른 세계가 있다,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장차 오신 예수님도 요한복음 12장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고 이 땅에 왔다가 들려야 하리라. 흔적만 남기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흔적만 남긴다는 말은 좋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아니고 흔적을 남길 때는 반드시 심판이 곧 기정사실화 되었다, 하늘나라에서 심판하기로 확정지었다는 통보 같은 뜻이 있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그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심판하면 그냥 하지 왜 흔적을 남기는가? 심판의 이유를, 심판받아야 될 그 근거를 이 지상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님보시기에 이미 심판받을만한데 그 심판받을만한 의미가 지상에서 흔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심판은 이 하나님이 할 테니까 심판받을 이유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만들어서 나에게 가져오너라.” 하는 뜻이지요. 인간사회라 하는 것은 이미 심판이 확정된 입장에서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행동들은 심판받을 이유들을 만들어낸다고 굉장히 분주합니다.

 

이런 짓거리를 해서 심판받는다는 그런 것이 성도의 눈에 들어와야 돼요. 왜? 우리는 부재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현재의 이상은 있음이거든요. 있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해보겠다는 겁니다. 5월 9일에 대선 치르겠다는 것은 여기에 있는 같은 인간들끼리 해보겠다는 거예요. 탄핵해서 빅뉴스가 나타나도 소용없어요.

 

전부 다 있음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창세기 19장 이야기는 있다가 사라지는, 잠시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 흔적을 주워들어야 돼요. 마치 고고학자처럼. 무엇이 왔다갔지? 그런 겁니다. 다녀간 거예요. 우리는 이 세상에 있다, 다녀간 흔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 우리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바뀌어야 됩니다.

 

이 세상이 있는데 어떤 분이 흔적을 남기고 가셨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돼요. 이제는 흔적 그 지점에 와서 남기고 간 흔적지점에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전에는 내 입장에서 하늘나라 흔적이 뭐지, 하고 다가가는 입장이라면 이제는 아예 두 발을, 우리의 전셋집을 흔적 위에 세우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우리의 거주지가 되는 겁니다. 이사 갈 필요 없지요. 전세 뺄 일도 없고. 십자가 안에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가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내가 십자가 안에 있으니 세상 보기에 나는 이미 죽은 자고 내가 보기에 세상 너희는 죽은 자고.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우리는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복음을 창세기 19장과 견주어보면 똑같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창안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지혜로 짜낸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다시 이야기합니다. 누가 다녀갔어요. 다녀간 분이 어디 있느냐? 찾지 마세요. 부재의 존재입니다. 부재하시는 분이기에, 원래 이 땅에 안계시던 분이 흔적만 남기고 가셨기 때문에 그 분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마시고 그분을 찾을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다녀갔는데 다녀간 이유를 다시 설명 드리면, 그 다녀간 이유가 심판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다녀갔고, 그렇다면 그냥 심판해버리지 왜 다녀갔느냐? 다녀감으로서 심판할 이유를 이제는 구체적으로 유발시켜 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질적으로. 잘 이해를 못하시는 듯한데 요한복음 15장 22절을 말씀드리면 비로소 이해가 되실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내가, 이 부재의 존재가 존재만 눈에 띄는 너희들 세계에 오지 않았다면 너희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나 내가 다녀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너희들은 핑계치 못하리라.

 

예수님이 안다녀갔으면요, 존재하는 인간들끼리, 있음이 있음 가지고 하기 때문에 죄는 어떤 죄냐 하면, 십계명에 나오는 죄들이 있잖아요. 윤리적 도덕적 죄. 윤리적 도덕적 죄는 뭐냐 하면, 그런 나쁜 짓을 안 하게 되면 선한 사람이 돼요. 왜냐하면 하고 안하고는 내 행위에 달려 있기 때문에.

 

내가 나쁜 짓을 하게 되면 나쁜 사람이 되고 나쁜 짓을 안 하게 되면 안 나쁜 사람이 되는데, 더 편리한 것은 내가 나쁜 짓을 했더라도 그 나쁜 짓 보다 더 많은 양의 착한 일을 해버리면 더하기 빼기, 해서 여분의 착함이 남아 있으면 우리는 약간이라도 선한 쪽에 서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저주받기로 작정된 선악사고방식에서는 선과 악이, 죄라는 것이 그렇게 결정되는 거예요.

 

선과 악 중에서 선이 적으면 죄가 되고 선이 많으면 나머지만큼 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세계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이여, 예수님이여, 성령님이여, 그리고 목사님이여, 교인들이여, 내가 무엇을 할까요?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거기에 대한 정답을 설교시간에 알려주세요. 내가 하라고 하면 다 하겠나이다.” 무엇을 할까요, 라는 질문을 하는데 천사가 이렇게 왔다 간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무엇이 진행 중이냐를 보라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뭘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나만의 역사를 새롭게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진행 중에 있는 거예요. 진행 중에 있는 것과, 새삼스럽게 내가 뭘 할까요, 라는 것은 질문자체가 달라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는 질문과 내가 무엇을 할까요, 하는 질문은 완전히 다른 질문이에요.

 

여기에 대한 아주 진짜 쉬운 예가 뭐냐? 달리는 열차와 그리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 안에서 내가 뭘 할까요, 와 똑같은 거예요. 내가 열차 안에서, 객차 안에서 뭘 한다고 해서 열차가 스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차는 기관사 마음대로 계획된 대로 그냥 달리는 겁니다. 이게 전체지요. 그냥 달리는 거예요.

 

그런데 열차 안에 있는 사람은 지금 달리는 기차 안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자기 집 안방인줄 알고 양발 벗고 잠 자고 코 골고, 이렇게 하면 그것은 지금 자기가 있는 이 세계는 어디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감이 없어요. 그저 내가 열심히 바르게 살게 되면 내 미래는 뭔가 필 것이라는 독자적인 자기만의 미래를 또 설계하고 만들어내는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이미 천사가 왔으면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은 끝난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너무 오류가 많아서, 잘못 해석들 해서,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그런 조로 하는데 소돔과 고모라는 어떻게 구원받는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심판받는 이유만 나와요. 구원받는 이유는 없습니다. 왜 구원받는 이유가 없느냐 하면 이미 심판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롯의 구원문제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롯이 어떻게 구원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롯이 있던 이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심판받게 되었느냐를 그 이유를, 새삼스럽게 흔적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흔적은 롯이 있어서는 몰라요. 천사와 롯이 한집에 들어가야 죄 짓는 증거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참 여기에 깊이 있는 내용들이 첩첩이 쌓여 있습니다.

 

첩첩이 쌓여 있지만 몇 가지 제가 알기 쉽게 정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이렇게 읽었지만 여러분이 이 본문 보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롯이 자기 집에 들어온 두 천사가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자기에게 찾아온 주민들에게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이분은 하늘에서 온 천사라는 식의 설명이 되는데 전혀 설명을 하지 않아요.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롯 자신이 이미 소돔과 고모라사람들에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를 사용해봤자, 지식체계라 하는데 그 지식체계가, 단어선정이라는 의미체계가 완전히 층이 달라요. 다른 층이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써도 그 쪽에는 화를 더 돋울 뿐이에요. 그 이유를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부재의 존재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롯이 천사 둘과 왔으면 주도권은 천사에게 빼앗겨 버렸어요. 같은 소돔과 고모라주민들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고 부재, 동네 사람이 전혀 아닌 낯선 나그네, 부재의 존재에게 롯의 주도권은 넘어가버린 겁니다. 부재의 존재에게 주도권이 넘어가 버린 사람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설명을 해야 되는데, 현재 소돔과 고모라주민들이 익히 알고 있는 개념이나 언어사용이나 의미라 하는 것은 우리 소돔과 고모라가 계속 유지되고 발전하고 진화하고 성장해야 된다는 것을 기본 모토로 한 거예요.

 

있음이 계속 확장된다는 그것을 기본 모토로 깔고 모든 단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면, 지금 tv에서 롯데하고 두산하고 야구게임을 한다 칩시다. 야구시즌이 아니니까 축구로 예를 들어봅시다. 중국하고 한국하고 월드컵 예선전을 치른다. 그러면 관심사가 거기 가 있다는 말이지요. 중국이 사드 때문에 괴롭히는 마당에 우리나라가 또 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그 때 속보에서 “인민군이 남침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이북에서 쳐들어왔다는데 쳐들어온 것은 쳐들어온 것이고 축구는 보고가자, 이런 사람은 없다 이 말입니다. 롯의 입장이 그래요. 축구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는 거예요. 우리한테 존재하지 않던 사건이라는 말이지요. 낯선 사건이 롯의 집에 쳐들어와서 롯은 주도권이, 사고방식이 저쪽에 빼앗겼어요.

 

롯의 입장에서 지금 다급하고 시급한 문제는 뭐냐 하면, 천사의 입장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것은 롯만 알고 있는 사항이고, 저쪽에서 지금 야구 이야기하고 축구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를 못하지요. 이미 심판이 확정된 채 한국이든 미국이든 살면서 그렇게 세상보기하고, 심판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당장 밥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지, 하고 단어선정부터 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서로 소통이 안 된다니까요.

 

그것을 담론(discourse)이라 하는데 담론이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롯은 천사를 보호하기는 하지만 이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설명을 안 합니다. 설명을 해주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서, 롯이 나중에 구원받았으니까 롯의 편에 들고 소돔과 고모라의 깡패주민들 편을 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거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지요.

 

우리는 바꿔서 생각해 봐야 돼요. 우리가 부재하는 사람이 아니고 존재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우리는 출발점을 어디서부터 해야 되느냐하면, 롯부터 들어가지 말고 소돔과 고모라주민부터 시작해야 되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주민부터 시작한다면, 몇 백 명 되지도 않는데 여기에 어떤 낯선 사람이 왔으면, 마을 이장이 와서 “그 사람이 좀 수상해 보이는데 누구요? 숨길 생각 말고 롯씨, 우리한테 넘기라니까 그 사람을 숨겨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혹시 전염병이라도 퍼뜨릴 만한 사람인지, 아니면 우리를 멸하러 온 사람인지 우리가 확인 좀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소리 하는 것을 충분히 우리가 이해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5절에 보면,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낯선 사람이 왔으면 무관심한 것이 더 이상하지요. 낯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은 들었고, 이상하게 생겼다는 소리는 들었고, 롯의 집에 들어가더라는 신고가 이미 들어왔으면 마을 주민들이 같은 운명공동체라면 당연히 롯에게 찾아가서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한번 확인해봐야겠다는 것이 당연한 거지 그게 뭐가 나빠요?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라는 말은 원어에서 ‘야다(Yadah)’라는 것이 원형인데 ‘야다’는 정보를 가지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모든 성경번역은 ‘재미 보겠다. 강간하겠다. 남자대 남자로 동성애하겠다.’ 소돔, 동생애를 ‘소도미(sodomy)’라고 해요. 사사기에도 보면 베들레헴에서 온 여인을 베냐민 사람들이 욕보일 때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성적인 관계를 갖겠다.’라고 되어 있어요.

 

‘상관하겠다.’라는 말에서 천주교번역은 ‘강간하겠다.’라고 하는데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볼 때 소돔과 고모라는 타락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타락은 어떤 타락이냐? 특히 베드로후서에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7-8)

 

여기서 ‘음란’이 나오니까 소돔은 음란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뜻이니까 상관하겠다는 것은 새로운 남자가 왔으니까 여자는 시시하고 남자는 건드려보겠다, 천사가 인물도 이상하게 생겼으니까 이런 게 다 있나 싶어서 건드리려고 덤벼들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서 롯 입장만 생각해버리면 성경해석이 반 토막 나는 정도가 아니고 근원부터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우리가 반 토막을 내서 롯의 입장을 옹호하는 식으로 해석해버린다는 것은 뭐냐? 우리가 구원받겠다는 사고방식에 성질이 급해서 그래요.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서 어떻게 행하면 구원받습니까, 이것 자체가 롯의 생각이 아니고 오히려 롯과 대척관계에 있는 멸망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거예요.

 

‘야다’라는 뜻은 뭐냐? 안다는 거예요. 정보를 갖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세계에서는 살기 위해서 뭔가 지식으로 축적이 되고 알아야 돼요. 알아야 동지인지 적인지 알아서 대처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아브라함도 몰랐어요. 아브라함이 심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아니거든요.

 

심판하겠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인데 어떤 하나님이냐?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아브라함 앞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을 내린다는 말이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일체 인간들의 지식체계에서는 포함되지 않는다, 언약은 인간이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을 심판하는 거예요.

 

인간은 왜 심판받는가?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심판받는 거예요. 그러면 심판받기 전에 언약을 알면 될 것 아닌가. 알 재주가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특징이에요. 알 재주도 없는 인간에게 그냥 심판해버리면 이것은 불공평한 심판이고 그게 무슨 정의로운 심판인가. 이야기해주고 안 믿을 때 심판해야 그게 심판이 되는데 알지도 못하고, 알 능력도 없고, 모르는 상태에서 네가 몰랐다고 때려버리면 그게 무슨 정의의 하나님인가.

 

그게 하나님이에요. 그게 언약의 하나님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은 소돔과 고모라해석을 하면 할수록 죄만 더 짓지요. 이미 심판하기로 확정했어요. 예수님 오시고 십자가지고 난 뒤에 심판하기로 했어요. 십자가를 누가 알았습니까? 사도바울도 몰랐어요. 누가 알아요?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 그 십자가를 가지고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언제 알아요? 십자가 몰라요. 찾아와야 알지요. 주님 쪽에서 넘어와야 알지요. 자기 힘으로는 몰라요. 사도바울의 자기지식은 뭐냐 하면,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데 다 쓰임 되는 모든 지식이라니까요. 사도바울이 소돔과 고모라사람들하고 똑같아요. 사도되기 전에. 그걸 가지고 자유의 여백이라 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을 하게 되면 자기는 안다고 행동해요. 세상에 모른다고 행동하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가 이것을 알고 행동해요. 전세 얼마짜리인지 알고 행동한다고요. 자기는 자유롭게 안다고 행동하는 그 순간 그 지식이 스스로 한계로 동그라미 쳐서 그로 말미암아 여백이 생깁니다. 내가 안다고 요만큼 행동한 그 순간 그 행동으로 인하여 미지의, 무지의 세계가 비로소 그 옆에 열려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권력 안에 이미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가 아는 그 지식이 자기가 행사할 수 있는 힘, 권력의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안다고 행동하고 난 뒤에 행동을 실천에 옮김으로서 비로소 뭐가 발생되느냐? 내가 미처 모르는 미지의 세계, 무지의 세계가 같이 옆에 열리게 되어 있어요.

 

지금 소돔 주민들이 답답한 게 뭐냐 하면, 지금 천사가 안 왔으면 평화롭게 사는 마을이에요. 이것을 거짓된 평화라 해요. 한시적 평화라 하는데 어쨌든 평화롭게 사는 마을입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들어왔어요. 낯선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은 자기무지, 자기가 아는 데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그 진리성에 여분이 생겨버린 거예요.

 

왜? 모르니까? 저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처치해야 될지, 그것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왔기 때문에 지금껏 자기가 아는 것, 자기가 아는 것에서는 저게 진리가 될지 비진리가 될지 감을 못잡는 거예요. 이것은 불안요소를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천사가 안 왔으면 전혀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옴으로서 주민들이 약간은 동요가 되고 불안한 거예요.

 

뭐지? 저 두 사람이 뭐지? 불안한 거예요. 그런데 불안한 요소와 접촉을 시도합니다. “너희 집에 있는 두 사람 나에게 줘.” 우리가 상관하리라. 우리가 정보를 획득해 보겠다. 어떤 사람인지 내가 심사해보겠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들이 알아보겠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미 심판을 확정지은 천사잖아요.

 

그러면 천사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사실은 미래에 심판을 내리니까. 이 소돔과 고모라사람들은 천사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인물이 되는 겁니다. 과거는 미래하고 대화가 안돼요. 이미 미래에 도착된 사람하고 과거에 있어서 미래를 모르는 사람하고 무슨 대화가 됩니까?

 

그 과거하고 미래하고 대화가 안 되는 그 중간에 현재의 인물이 있어요. 그 인물이 롯입니다. 롯이 천사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자기는 소돔과 고모라의 과거의 사람이 아니고 이미 미래 쪽으로 경도된, 기울어진 사람이에요. 그래서 설명해도 못 알아본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이 완전히 천사처럼 미래의 사람이 아닌 이유는 심판의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왜 우리가 심판되는지 그 심판의 이유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심판될 이유를 모를 수밖에 없지요. 왜? 심판되는 이유는 천사를 보내서 새삼스럽게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만들어져야 되거든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한다. 나는 재림만 기다리겠다. 그러면 안돼요.

 

재림이라는 것은 미래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 재림을 모르는 사람은 뭐냐? 그냥 과거의 인물이에요. 그러면 그 틈새에 누가 끼어있습니까? 성도가 끼어있어요. 성도는 현재의 사람이에요. 현재사람 같으면 현재와 미래 양쪽을 다 겸하게 됩니다. 심판하게 되면 심판할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죄가 되는 겁니다.

 

그 죄를 성도는 지금 2017년도 이 지점에 천사가 되어가지고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소개하고 있는 이 복음에 대해서 저쪽 과거의 인물들이 마구 나를 핍박하고 욕하는 그 수모를 당할 때 그 당하는 모습들이 심판당할 정당한 이유들이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죄를 유발하는 하나의 핵심요인으로서, 우리가 씨앗으로서 이 세상에 박혀 있는 거예요.

 

너희를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너희를 남겨둠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향하여 빗발처럼 쏟아내는 그 모든 요소들이, 바로 이 세상에 빗발 같은 유황불을 받아야 마땅한 죄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는 겁니다.

 

제가 아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부재의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고. 우리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 되었으면 천국가도 돼요. 사도바울도 소원이 뭐였습니까? 천국 빨리 가고 싶어요. 그러나 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예수님이 뭐 때문에 죽었는가, 복음 때문에 죽었잖아요.

 

우리는 뭐 때문에 삽니까? 복음 때문에 살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 심판받는 기준은 복음입니다. 과거의 사람이라 하는 것은, 천사의 입장인 미래에서 봐서 그들이 하는 것이 다 과거가 되니까 과거의 사람들, 과거에 갇혀 있는 사람들 그들이 지옥가야 되고 벌 받아야 되는 이유는, 가까이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를 핍박한 거예요.

 

그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지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않게 주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처음부터 죄의 속성이 있었는데 그 죄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주께서는 자기성도들을 보내서 하시고 지금 여기 본문에서는 천사와 롯을 통해 그것을 밝혀주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이것이 언약에 의한 심판의 모델로 이 소돔과 고모라를 봤습니다. 시범케이스죠. 시범케이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 속에서 언약의 실체, 언약의 본질의 내용을 발굴해 내야 되고 찾아내야 돼요. 그래야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 본문해석의 끝은 이렇게 돼야 돼요.

 

하나님께서 왜 심판하느냐?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심판한다. 언약을 드러내는 것이 뭐냐? 그들이 언약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언약을 모르는데 왜 심판받느냐? 심판주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을 내세우기 위해서 언약 모르는 자에게 심판을 내린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너는 그냥 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에 불과한 거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요, 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나는 무조건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심보인데 그 심보가 어디서 나온 심보냐? 나는 뭔가에 대해서 안다. 앎을 내가 아는데 누가 아느냐 하면 내가 안다. 그래서 나라는 이 존재는 계속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영원한 천국에 가야 돼, 라는 사고방식이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뭐냐? 존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부재의 존재가 이 세상에 없는 다른 천국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자기가 존재하고,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내가 알고, 내가 납득이 되면 믿을게, 내가 수긍이 되면 믿을게, 하는 그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고 롯도 그중 하나였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딱 볼 때 롯은 특징이 뭐냐 하면, 주도권을 천사에게 넘겼다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구원받는 이유가 뭐냐? 자기 삶의 주도권을, 이 존재의 주도권을 부재의 존재에게 이미 넘긴 거예요. 남에게 소개할 수도 없어요. 뭐가 보여야 소개를 하지요. 부재의 존재인데 어떻게 소개합니까?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롯은 지금 자기가 숨기고 보호하려는 천사가 누군지를 설명을 안하고 있어요. 설명을 안 하고 있는데 설명을 할 필요도 없지요. 저쪽에서는 이미 폭력적으로 나왔다 이 말이지요. 폭력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제가 네비나스 강의할 때 이야기했지만, 폭력이란, 반드시 나와 같아야 돼, 이게 폭력이에요.

 

딸은 반드시 엄마의 사고방식과 동일해야 돼, 이게 폭력이에요. 나의 동일성을 확장시킬 때 필요한 것이 폭력이고 그 폭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권력에서 나오고 그 권력은 항시적, 항상 계속해서 유지하고 절대로 계속 발전해야 되고, 멈추지 않아야 된다는 그런 것이 권력이라는 말이지요.

 

그 권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 권력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요. 사람은 권력이라 하면 굉장히 싫어해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맘껏 내 자유대로 한다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자유롭게 한다고 했지만 내 요구대로 세상이 안 따라준다는 말은 뭐냐? 내가 행동을 하면서부터 뭘 느끼는가? 미흡함을 느끼고 여백, 내가 자유롭게 뭘 한 순간 내 자유로 미처 정복하지 못한 여백이 그 때 발견되고 느껴지는 거예요.

 

에고, 자식도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이게 바로 자유의 여백이잖아요. 남편도 내 맘대로 안돼, 이게 자유의 여백이라니까요. 그러면 하나님께 뭐라고 하겠습니까? 남편을 내 맘대로 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네가 뭔데 내가 네 말을 들어야 되느냐?” “제가 성도거든요.” “성도는 부재의 존재야. 이 인간아!”

 

너는 소속이 존재에 속한 것이 아니고 부재에 속한다고요. 성도는 이 땅에 흔적만 남기고 가면 돼요. 미련만 남기고 떠나간 사랑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그처럼 이 땅에 흔적만 남기고 갈 뿐이에요. 언제 사도바울이 백년 살았습니까? 베드로가 언제 이백년 살았어요? 말씀만 남기고 갔잖아요. 지금 롯은 떠날 사람이에요.

 

떠날 사람이니까 소돔과 고모라한테 설명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쉽게 말해서, 내가 설명해봐야 너희들은 이 분에 대해서 몰라, 이게 바로 롯의 심정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그걸 어떻게 아는가? 어느 정도 주도권을 넘기는가 하면, 8절에 나옵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 말은 뭐냐? 롯이 하는 말이, “소돔주민들아, 나는 너희를 알거든. 너희들이 천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나도 너희와 같이 생활했기에 너무나도 잘 아는데 내가 너희에게 굳이 할 말은 뭐냐? 이 분은 내가 설명을 해도 모를 분이야. 어느 정도로 모를 분인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내 딸과 내가 알고 있는 내 딸을 너희에게 넘겨줘도 이 분은 못 넘겨준다.”

 

이미 그걸 통해서 롯은 두 발을 더 이상 존재의 세계에 두지 않기로 작정한 거예요. 이제는 그쪽권력, 그쪽 동일성의 권력, 우리는 같은 사람이잖아, 라는 그 말, 거기에 합류하지 않기로 작정한 거예요. 두 딸을 볼모로 내줄지언정 나는 이쪽 편에 서 있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가 이미 심판받기로 확정된 대구 땅, 이 도성, 한국, 이 세계에서 처하는 위상입니다. 이런 처지에 있어요.

 

우리는 그러면 왜 맨날 조용하게 살아갑니까. 저쪽에서 폭력으로 안 나왔으니까 그렇지요. 저쪽에서 폭력이 안 나왔거든요.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 주변 사람을 주께서 과격하게 폭력적으로 안하도록 해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명절이라든지 무슨 일이 있을 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전부다 노란리본 달 때 “너는 왜 안달아?” 할 때 그게 폭력인 거예요.

 

열일곱 먹은 애들이 불쌍하다는 거예요. 왜 불쌍한가? 우리는 그들을 안다는 겁니다. 감정이입이에요. 내가 만일 그 나이에 죽었으면, 차가운 물에 빠졌으면 얼마나 안타깝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 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안다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서 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심판은 인간들이 아는 것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으로 심판해요.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롯은 어떻게 구원받는가?

 

전혀 몰랐, 었, 었, 었, 었, 었는데 성령을 통해서 언약이 자기자식이나 심지어 나 자신보다, 이 세상 어떤 지구의 보물보다 십자가 새언약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넘어와서 알려주는 순간 나는 이미 부재의 존재가 되었고 사는 것은 그냥 흔적으로 될 뿐입니다. 그들의 말이 무슨 뜻이냐를 알아요.

 

그들이 얼마나 걔들을 불쌍히 여기는지 다 알아요. 박근혜 탄핵할 때 대구사람들이 불쌍하게 보는 것을 알아요. 태극기 흔들고 난리들 났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하나의 권력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날 예수님이 오시면 또다시 예수님에 돌 던져 죽이고 못박아죽일 그 힘을 성도는 아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는 4대성인중의 한사람일 뿐이고, 그저 훌륭한 사람 중의 일부에요. 자기 아는 범위 안에 예수님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취미생활이 되고, 친목모임이 되고, 오락이 되는 겁니다. 별로 말씀이 중요하지 않아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천사가 심판한다는 것은, 모든 세상은 말씀으로 된 거예요. 시편 119편 88, 89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말씀으로 된 겁니다.

 

말씀이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라는 말이지요. 약속에 의해서 하는데 이미 이 지상의 마귀의 편이 된 인간들은 자기 아는 것으로 권력을 만들어서 서로 결집하고 단결하고 거기에 낯선 것이 들어오면 가차 없이 폭력적으로 배척하고 배제하고, 그런 세상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간음죄를 안 하고 바람 안 피우고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그들은 복음을 몰라서, 십자가를 몰라서 심판받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알려주면 될 것이 아니냐. 네가 십자가 아는 성도에게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사람들은 십자가는 아는데 기존의 아는 것을 무지로 돌리지 아니하고 나는 안다, 아는 것에 보태서 십자가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짜십자가들이 범람하고 무지에 무지를 더하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그것이 십자가로부터 지옥 갈 이유, 죄가 되는 겁니다. 메시아에 대해서 안다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다시 깨끗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9절에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게 뭐냐? 앎의 폭력을 쓰는 겁니다. “롯, 나와. 나도 너 알거든. 어디서 아는체해? 우리 다 아는 사이잖아. 네가 어딜 법관이 되려해?” 이것이 하나의 지식이고 지식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천사와 이 사람들이 직접상대하지 않습니다. 롯이 중간에 끼어듭니다. 11절에 보니까 안다는 인간들이 자기의 문을 찾지 못하고 곤비했다고 되어 있어요.

 

천사가 약간 힘을 발휘하니까 그들은 눈이 어두워졌어요. 알기는 개코나 알아요. 동서남북도 모르고 해매는 것이 인간입니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우기는 것, 내가 정말 몰랐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 오셔서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그 때 십자가를 드러내는 죄,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 내가 죄인으로 살았다는 것, 이 존재자체가 죄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롯같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이미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이제 남은 문제는 왜 심판받을 수 없는가를 들춰내고 드러내는 그 일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십자가를 알았기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모든 것을 실시한다는 것을 감사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