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창 18장 16-21절(천사의 심판소식)1702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8장 16-22절입니다. 구약성경 20페이지입니다.
창 18:16-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초월적 민족이 따로 있다는 것이 이 땅을 사는 하나의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는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의 민족을 통해서 다른 민족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아브라함민족은 기존의 다른 민족에 속하지 않는 특수한 민족으로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 되는 겁니다.
똑같은 수평의 민족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든 민족은 돌출하고 그 위에 따로 존재하지요. 따로 존재하는 민족을 만들어서 그 민족으로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움직임을 아브라함중심으로 움직이겠다는 것을 이미 선언하고 나선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브라함은 굉장히 기분이 좋겠지요?
‘아, 하나님께서 내 중심으로 하는구나.’ 그런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오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중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런 이야기의 차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중심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중심이라는 말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현대의 말로 넘긴다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정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해서 가족이 구원받을 이유는 전혀 없어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해서 ‘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니 내 자손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민족’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성경에서 제가 분명히 먼저 언급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이렇게 언급을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내가 예수 믿고 복음 받아들였으니까 내 자식들도 구원받아야 된다.’ 하는 억지가 우리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거든요. 정말 믿음이 있다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내 가족도 구원받아야 된다는 어떤 어드밴티지는 없어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그 당시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에게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아브라함은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똑같은 오해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맨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브라함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는데 그 오해를 그냥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을 제거해 나가지요. 그것을 노이즈, 잡음이라고 하는데 그 잡음을 제거해 나가는 겁니다. 네가 생각하듯이 네 가족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단적인 예가 그렇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막강하게 될 것이라는 그 약속을 하고 그 다음에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둘을 파견합니다.
거기에 누가 살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관련된 친척, 쉽게 말해서 갈대아우르에서 함께 나왔던 그 사람들 중 한 사람 롯이 소돔에 살고 있습니다. 그 소돔을 천사가 심판하러 가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를 생각해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오해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살려주세요. 내 조카.” 이렇게 나온 겁니다. 노골적으로 “내 조카는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가지는 못하지만 50명만 있으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아브라함 네가 보기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50명이라는 숫자가 상한선이 되어서 50명만 된다면 심판 안하는 수준으로 나의 심판을 보고 있는 것이냐?” 라고 묻는 거지요.
50명을 건진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자기 조카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50명만 있으면 심판하지 마세요.” 라고 했어요. 오늘 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거예요. 노이즈, 이 잡음을 제거를 해야 되는데 막상 제거하려 들면 또 반발이 강력하고 대단해요. 그 반발중의 하나가 이런 겁니다.
만약 가족 중의 하나가 교회 나가면 다른 가족이 이렇게 나옵니다. “네가 나를 믿게 해 봐라.” 이렇게 나와요. 아주 시건방지게 나오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나는 안 믿는데 네가 날 믿게 해봐라.”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정말 교회 나와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가족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니까요.
하나님이 가족 만들기에 나선다는 이야기지 가족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가족 만들기에 나설 때 그 가족만들기의 원리원칙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낳는 그 단절된, 끊어진 절차를 반복해서 태어나게 할 그 때 등장하는 것이 아브라함언약이 되는 거예요. 18장 16절까지 이어지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못알아듣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이맘때에 아들 낳는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나 사라도 그냥 웃는 겁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지금 나와 계약을 했다면 내가 알아듣도록 이야기를 해줘야지요. 제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고 믿는지를 아시지요?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관계라면, 언약당사자가 나라면 내가 이해하는 쪽으로 해줘야 우리끼리 동업자가 아닙니까?’라는 뜻이에요.
이 말은 아주 중요하면서도 어렵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 하는데 나는 하나님의 말을 도대체 못 알아듣겠다는 이야기에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은 모르겠는데 나는 하나님 말을 알아듣는다고 우기는 거예요. 이거 백 프로 가짜입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백성은 계속 주고 받고가 이어져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사랑하는 것은 믿어지는데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겠습니다.” 이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계속 붙잡아 줬으니까 계속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을 듣게 되지 내 맘 같아서는 벌써 하나님 믿는 것 걷어치웠습니다. 나는 내가 납득되는 하나님만 믿었습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십자가 피로서 생명과 죽음의 세계가 연결됩니다. 오직 피로만 연결된다는 것은 인정은 되는데 어째서 그런지는 납득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계속 이끌고 가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만약에 납득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이렇게 나와요. “하나님이여, 이제는 납득이 되네요. 제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뒤에서 후원해주시고 전도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가족들을 다 설득하겠습니다. 왜? 내가 설득이 되니까 내가 설득된 대로 남을 설득시키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구원은 주님의 소관인 것이 아니고 본인 소관이 되어버려요. 만약에 본인 소관이 되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나요. ‘아버지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자식들은 지옥 가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천사가 마이크 팍 댑니다. “너 지금 하나님 믿어, 안 믿어?”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할 말이 없어서 “제가 하나님 사랑하고 잘 믿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잘 믿는다면 왜 하나님 방식에 맡기지 않고 네가 왜 나대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왜 남을 구원하려고 설치느냐는 말이지요. 주님 방식이 따로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좋은 게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알고 나도 알고 좋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아브라함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질 때는 아브라함을 설득한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실수와 실수 범벅이로 계속 가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 자체가 잡음, 노이즈에요.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언약을 방해하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평생이 다 할 때까지. 그 증거가 바로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이것이 다음 수요일의 설교인데 다음 설교를 미리 당겨서 한다면 그 철딱서니 없는 아브라함의 기도에 따라서 하나님이 하강한다는 사실입니다.
내려와요. 계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불신앙에 말려들어주십니다. 이게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방법이에요. 터무니없이 믿음이 없는데 그 믿음이 없는 것을 쓸데없다고 내치지 않으시고 그 믿음 없는 구석으로 계속 들어오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믿음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없다는 것을 계속 지적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기어이 구원되게 하는 그것이 아브라함언약 안에 들어 있어요.
외형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해서 구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박자를 잘 맞추고 추임새도 넣으면서 호응이 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창세기를 한 번 보세요. 전혀 호응이 안 됩니다. 호응 같으면 기도 한 번이면 되었어요. “하나님이여 심판하시는 것 보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한 명도 없으니까 심판하지요.”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이 한 명이라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이 내려버리면 그 의인 한명이 다쳐요. 아브라함이 진짜 믿음이 있을 거 같으면 이렇게 이야기하게 돼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다? 아하, 내가 생각해도 심판 안 받을 의인이 심판 속에 있는 모순이 발생되면 안되니까 아하, 그런 뜻이구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한 명도 없구나.’
이걸 아주 편하게 생각하면 되는데 ‘내 조카, 내 조카는 어떡하지?’라고 나온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놓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가족을 강대하게 하고 우리 가족에게 복을 준다는 그 말이지요?’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가족중 하나인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 있거든요.
그런데 천사가 그 성을 심판한다 하니까 조카걱정이 되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이 뭐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줘서 아브라함 가족을 강대하게 하고 많은 민족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는다고 했을 때에, 그렇게 해놓고 천사 둘을 소돔과 고모라에 보내는 그 이유, 하나님의 그 취지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하고 아브라함언약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경 주석을 보고 뭘 봐도 나오지 않는 것이 있어요.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국의 복을 받는다고 해놓았는데 지금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왜 갑자기 소돔과 고모라에 가시느냐 그 말입니다. 지역이 다른데 그 다른 지역에 왜 천사를 보내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어떤 책에도 나오지를 않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를 보내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라함 언약이 갖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 아브라함자체가 노이즈, 잡음역할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소돔과 고모라에 보내신 거예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하나님이 생각하는 아브라함언약과 다르다는 것까지 아브라함 언약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너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내가 나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한다고 한다면 필히 너는 네 마음대로 생각을 해서 나는 이래서 의인된다는 그 잡음이 필히 나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오게 되어 있다는 그것을 주께서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가 구원할 자기 때문에, 이래서 너는 나를 완전히 오해한 거야, 라는 그 귀찮은 일까지 주께서 다 해주시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언약을 확장시켜 나가는 거예요.
표정을 보니 전혀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것 같은데 에스겔 18장 20절을 보겠습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스겔 18장 20절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범죄해도 아버지가 범죄한 것을 자식이 담당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에스겔 이야기를 끄집어냈느냐 하면, 출애굽기 20장 5절에는 그렇게 안되어 있기 때문에 끄집어낸 거예요. 출애굽기 20장 5절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되어 있거든요.
출애굽기 20장 5절에서는 아버지가 죄 지으면 그 죄의 벌이 자손 3, 4대까지 이르게 된다고 되어 있는데 에스겔 18장 20절에서는 아비의 죄는 아비의 죄로 끊어진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창세기 18장에 와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언약대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기다렸던 아들입니다.” 한 것이 아니고 웃어버린 거예요. 이미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현재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육이 되든 약속이 되든 그것은 나중 문제고 어쨌든 아들이 있으니 그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포함해서 구원받는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왜? 이미 나이가 많아서 자식생산은 끝났거든요. 그것을 오늘날로 적용해 봅시다. “집사님은 복음을 믿어서 구원받습니다.” 집사님이 있다가 “내 아들은요?” “아들이 어디 있는데요?” “아들이 있잖아요.” 아브라함이 실수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예수 믿는다고 무슨 빽이 있습니까?
그동안 뭘 믿었는지? 내가 십자가 믿으면 자식이 그 모습을 보고 ‘야, 십자가가 진리구나.’ 하고 모방해서 같이 믿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뭐가 있느냐 하면, ‘너는 어디까지나 내 자식이야.’라는 것이 기본 베이스로 깔려 있는 거예요. 그 깔려 있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 새언약, 십자가를 방해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그 말입니다.
천사가 왔는데 이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는 천사에요. 천사가 와서 “지금 당신에게 아들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피식 웃었다는 말이지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은 이미 있고 더 이상 아들은 못 낳거든요.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 얼마든지 이스마엘로 천국 가는 복의 근원되게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먼저 낳아서 16세까지 함께 있게 해놓고 있지도 않은 자식을 보고 아브라함언약의 복을 잇는다고 할 때, 그러면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은 태어나지 말도록 했어야 깔끔하게 정리가 될 것이 아닙니까? 누구 입장에서? 아브라함입장에서. 아브라함입장이 뭔데요? 육의 입장. 육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언약의 상대자를 정했으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언약상대자로 삼으면서도, 요새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한다고 하시면서도 깔끔하게 정리되는 어떤 간편함을 인정을 안 해주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주님 앞에 잡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어떤 큰 덕을 쌓는 것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이 무슨 덕이 됩니까? 무슨 착한일이 되겠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아브라함은 분명히 생각했습니다. 믿는 것이 의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믿어준 그것이 착한 짓을 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어요. 왜?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육이기 때문에. 남들은 안하는 짓을 나는 했으니 내가 얼마나 착하냐 하는 것이 반드시 우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약을 방해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가 안할 수가 없어요. 왜? 우리가 육이니까. 고마운 사실은 이러한 곡해와 오해와 착오를 주께서는 방치하지 않으시고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십자가 은혜를 주면서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내 자식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을 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원래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버려도 상관없는 존재인데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예수님하고 속닥속닥 의논하더니만 구원 안 받아도 되는 나에게 구원이 주어졌으니까 이제부턴 나에게 주어지는 모든 인생의 남은 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것이지 예수 잘 믿는 나하고 의논해서 내 앞길이 열리는 것은 결코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내 자식이 구원 받든 안 받든, 내 딸이 구원받든 안 받든 그것은 예수님에 속한 문제지 내게 속한 문제는 아닌 거예요. 중보기도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는 겁니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를 보낸 이유를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에 조카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고 심판하겠다는 거예요.
심판하겠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한명의 의인도 없어요. 한 명의 의인도 없으니 당연히 조카도 심판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저주 받아야 돼요. 이게 아브라함언약의 취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놓고도 그 일에 대해서 저지하듯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서게 되는 겁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 “심판을 유보해 주세요.” 무슨 말이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만 있더라도 심판하시겠습니까?”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심판을 좀 늦추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 말은 좀 더 나가서 “왜 그렇게 하나님은 심판에 서두르십니까? 심판하는 대신 의인 열 명을 키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제 아이디어입니다만.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 2천년역사동안에 아브라함의 이 기도본문을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자비하신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심판 안한다고 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을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면 의인 열 명 하나님께서 키워도 된다는 말이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 키워도 돼요.
50명에서 45명, 40명 ……,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 언약에 대해서 아브라함 네가 모르는 게 있다는 거예요. 네가 언약의 상대자로 살아가면서 네 안에 있는 어떤 요소들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을 훼방하고 방해하는지를 본인이 모르고 있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피로서 구원받습니다. 믿습니다. 하나님!” 그래놓고 뒤에 나오는 기분이 있어요. ‘나 참 잘했지요?’ 성경에서 아버지는 아들 예수님과 의논해서 모든 구원을 이루신다고 제가 수천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막상 사람들의 관심사가 자기 천당 가는데 있어놓으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가 믿는 일을 참 잘했지요? 이 착한 일을 남에게 권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권하지 마세요. 구원은 예수님의 소관입니다. 왜 그것을 권합니까? 자꾸 그렇게 권하니까 상대방이 “나를 믿게 해봐라.” 하고 시건방지게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자기가 마치 구원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시건방지게 나오는 그 이유가, 소위 먼저 복음 알았고 예수 믿는다는 우리들이 아직도 복음의 내용, 복음의 진실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기 때문에 ‘아, 안타까워 죽겠네. 이 좋은 것 남에게 전해야지.’ 이렇게 하니까 남에게 세일하는 보험회사 영업사원처럼 보인다는 그 말입니다.
“목사님은 우리보고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래야 돼요. “주여, 오늘같이 또 주의 일에 감사치 못하고 방해하면 진즉에 잘렸어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아브라함이 갔던 그 인생처럼 계속 가게 하시는 그 전체가 주님께서 하나님의 십자가복음의 그 진실됨을 우리가 계속해서 가리고 있으니 그 가리고 있는 그것을 치우기 위해서 제거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돼요.
색맹테스트 하는 검사지가 있지요. 글자를 죽 적어놓았는데 그 글자를 여러 가지 색깔로 얼룩덜룩 잡스럽게 해놓았어요. 색맹인 사람은 그것이 7인지 8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정상인 사람은 색이 구별이 되어서 숫자를 금방 알아요. 주님 보시기에 우리를 그렇게 보는 거예요. 분명히 내 백성이고 내 양인데 걸핏 하면 딴 길로 계속 새는 거예요.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닌 것은 아니에요. 끝까지 성령께서 책임지고 자기 백성을 오직 십자가의 피로만 건져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그런 관심사를 모르고 예수 믿고 난 뒤에 헌금도 하고, 착한 일도 하고, 남을 구제하기도 하고, 이런 어지러운 잡 색깔, 잡음을 마구 우리 인생에 집어넣었어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살았으니 이제 우리 딸이 모범대로 본받아서 같이 예수 믿겠지. 그러면 같이 천당 가겠지.’ 주님이 하는 일을 우리가 뺏는 혼선을 우리가 유발하고 있어요. 살아가면서 내내. 출애굽기 20장 5절에, 아비가 범죄하면 자손 3, 4대까지 저주가 이르게 한다는 이것을 왜 집어넣었는가 하면, 그 내용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원래 원판이 아브라함언약입니다. 믿음으로 의인되는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이미 율법이 들어가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겁주기입니다. 율법으로 의인될 자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계명을 주면서 네가 만약에 이 말씀을 안 지키면 삼사 대까지 벌을 내린다고 분명히 했어요.
그렇게 해놓고 이스라엘백성이 망합니다. 망하고 나서 에스겔에서 왜 다시 아브라함 쪽으로 오느냐 하면, 이제는 모세언약으로,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이 다 들통 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새로운 다윗이 와요. 다윗언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아브라함 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래서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전가되지 않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니 여기서 정신 차려야 됩니다. 육과 육의연쇄 고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직도 오해하고 있어요. 아들 이삭이 육의 고리가 아니라 하늘의 개입이고 하나님의 투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육에 속한 자기 조카를 걱정해서, 화들짝 놀랐어요. 그래서 계속 심판하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겁니다.
50명, 45명, 이런 식으로 계속 잡아당기는 거예요. 같은 육에 속한 조카 좀 봐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봐주십니다. 봐주시는데 롯을 건지면서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육의 자식으로서 내린 약속이 아브라함언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없는 자식을 새로 만드는 그것이 아브라함언약이에요. 만약 내 딸이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내 딸이 아니고 주님의 신부로서의 딸이고, 만약에 내 아들이 복음을 믿는다면 그것은 내 아들이기에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기 때문에 나에게 홀연히 출현하고 출몰된 거예요.
이제 끝으로 로마서 4장을 봅시다. 4장 19절입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나중에 아브라함 인생을 끝에서 보면 이렇게 보여요. 예수님이 죽습니다.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육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단 하나의 사건, 십자가사건으로 온천지에 한꺼번에 다 증거 한 거예요.
“내 자식이기에 구원해달라는 그 입을 다물어라. 십자가를 보고도 그런 소리 나오면 안돼.” 그런 뜻이에요.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죽은 거예요. 그리고 사는 것은 아버지를 본받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를 본받아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거두어주심에 의해서 세상에 내 딸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내 아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거예요
애비를 닮아서, 이런 육적인 연관성을 잇지 마세요. 그 중간에 십자가라는 단절성을 집어넣으세요.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개입해서 그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이스마엘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언약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복이 된다 하니 기분은 좋았지요.
기분은 좋았는데 그것은 하나의 노이즈, 잡음입니다.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매일같이 우리는 나에게 가까이 관련된 사람에게 특혜를 달라고 엄청 기도하는데 특혜는 어떤 특혜인가? 그 자식이 우리 옆에 있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내 자식을 더 사랑하는 노이즈, 그 잡음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 증거 하는데 가장 적합한 환경을 준비해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우리는 우리식대로 자기 편리대로 자기 맘대로 해석했습니다. 믿음도 아니면서 믿음인척 했습니다. 주여, 우리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피, 십자가에서 나오는 주의 믿음으로, 성령의 은사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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