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기도
2017년 3월 1일 본문 말씀: 창세기 18:22-24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8:23)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18:24)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두 천사를 소돔으로 보내고 난 뒤, 하나님과 아브라함만 남았습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왜 소돔에 대한 심판을 서두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중을 알기 위해서 끈질기게 질문을 해댑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하실 상황과 하나님의 심판하실 상황이 일치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과 상관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믿음으로 의인’되었음도 인정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생각에는,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이 합치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소돔에 대한 심판 감행에 대해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와 하나님의 견해에서 차이나는 것을 조정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아브라함 생각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그 숱한 사람들 가운데 분명히 최소한 의인 50명은 충분히 상주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아브라함 그동안 자기 인생을 살아오면서 체험한 상식입니다.
50명이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 쪽에서 양보할 대로 양보한 수치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경솔하게 심판하실 분이 아니시다. 아마 대다수가 하나님의 격노케 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진멸하시려고 하신다. 따라서 언약의 상대자인 나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충분히 이해해 드리자.
하지만 한 가지 수긍이 되지 않는 일은, 만약 하나님께서 당장 심판을 감행하신다면 악인도 아니면서 억울하게 심판받을 자들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죄인이 벌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다지 심판받을 짓도 하지도 않는 의인들이 심판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저의는 무엇이지?”
바로 아브라함은 이 점이 궁금했던 겁니다. 소돔도 고모라 성에 최소한 50명 정도는 정도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여긴 것은, 아브라함 본인의 의와 악의 기준에 입각한 견해입니다. 나중에 이 숫자가 10명까지 내려갑니다. 이 10명까지 수치를 낮추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이해 못하는 자는 바로 아브라함 본인이다 는 사실에 접근합니다.
이해 못한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이번 심판이 불합리하게 보이는 그런 심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에서 ‘의인이 악인과 함께 같은 징벌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위배된다’는 생각은 결코 틀린 견해는 아니라는 의식을 계속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의 견해가 다른 걸까요? 어디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 자신이 때로 열외해서 나가그저 관찰이나 하고 관람하는 입장이라고 여긴데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은 본인의 존재 자체가 의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언약 상대자라는 이유 때문에 심판에서 면제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다른 아브라함은 내치시지 않고 ‘언약에 준한 심판’에 있어 아브라함을 끌어넣습니다.
아브라함의 잘못된 질의와 견해를 내치시지 않고 계속 아브라함을 궁지로 몰아세우십니다. 지금껏 인생을 살면서 관찰해온 의인과 악인의 분류기준은 전혀 ‘아브라함 언약’에는 부합되지 않는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언약에서 새롭게 등장할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인간으로서 도무지 상상도 못할 기준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를 놓고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핵심적 대상이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떨어진 유황불로 죽은 이들은 그저 심판의 곁저리에 불과하고 부수적 장식에 불과합니다. 진짜 언약적 심판은, 일반적으로 인간적 견해를 가진 그 견해로 인하여, 언약의 대상자마저 심판을 당해야 이 작업이 곧 언약 달성의 필수적인 절차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견해를 고집부리면서 계속 심판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심판의 지연을 촉구하는 아브라함의 고집을 따라 끝까지 이 바닥 지상까지 하강하시는 겁니다. 마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상황을 미리 연출하시는 겁니다. 갈구을 필요도 없는 그런 똑같은 견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인내성을 가지고 대꾸해주시는 이유는, 그 죄인된 아브라함 자리까지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려는 겁니다.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아버지가 내리시는 저주를 장차 언약의 주께서 같이 받으시는 겁니다. 천사 둘이 소돔 땅을 밟습니다. 이는 ‘영원한 시간’이 일상적 시간에 따라 사는 인간 세계에 침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끝’이 현재에 인간 사회에 잠입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시간적 활동들은 ‘동작 그만’에 해당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동결된 행위’에 ‘전면 중지된 행위’에 해당됩니다. 시간은 탈취되고 인간의 근원적 속성만 노출됩니다. 이렇게 되면 소돔이라는 공간은 영원함에 의해서 재규정됩니다.
곧 심판은 확정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에 내재된 심판성의 ‘모델 도시’로 소돔과 고모라를 책정하셨습니다. 이는 거기에 ‘아브라함과 관련된 인물’이 있어 그 인물은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라는 언약의 본래적 구원 의미를 증거할 자로 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6)
이제 남은 것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왜 심판받아야 하느냐는 겁니다. 일반적인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이미 아브라함에 의해서 ‘아닌 것으로’으로 검증된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이 성문란일까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11:22-24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즉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것이 심판받을 기준이었습니다.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구약 때부터 실시된 그 심판의 기준은 새언약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형식으로 신약에 나타나 영원히 굳어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우상숭배자’로 낙인 직혀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기준으로 보면, ‘아브라함 언약’을 모르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하나님마저 하나님에게 심판받은 처지에서 모든 인간이 심판받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구원이란 오로지 ‘새언약의 효과’라는 가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9:29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심판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마저 저주받은 이 세상에 대해 더 이상 미련두지 말게 하옵소서. 언제 심판하시더라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7강-창 18장 22-26절(아브라함의 기도)1703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8장 16-22절입니다. 구약성경 20페이지입니다.
창 18:22-26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찌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오늘 본문의 내용은,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뒤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취지에 대해서 자신이 확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은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질문하는 거지만요.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32절에,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천사 세 명 중에서 두 명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수긍을 해야 되겠는데 이 심판에 대해서 납득이 되지를 않고 수긍이 되지를 않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의중과 합치되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이런 식으로 심판하시는 것이 맞지요, 라고 확인작업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심판은 악인에 대해서만 주어진다는 이 원리에 대해서, “하나님, 제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도 같은 생각이지요?”라고 자기의견을 개진하는 거지요. 심판은 의인한테는 하지 않고 악인한테만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심판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라면 자기로서는 납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에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가 옥토가 있었기에 인구밀도가 가장 높았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의인이 5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아브라함 자기생각입니다. 50명의 의인이 최소한 있다고 본다면, 지금 하나님생각과 자기생각이 같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50명을 억울하게 희생시키면서까지 구태여 심판할 이유가 없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악인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50명이라는 그 의인이 악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은 일관되게 악인에게만 심판한다는 그 원리와 부딪히기 때문에 아브라함 자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두 가지 딜레마가 있어요.
심판은 악인에게만 한다. 그런데 그 생각이 만약에 하나님생각과 같다고 한다면, 심판은 악인에게만 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맞는다면 의인마저도 악인에게만 국한되는 그 심판에 합세해서 악인이 받아야 될 심판을 같이 받는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조치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뭘 모르는가 하면, 하나님이 악인에게 심판한다 할 때 그 악인의 개념과 아브라함 본인이 생각하는 악인 개념이 같은 것이라고 아브라함 본인이 스스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본인이 심판받아야 될 악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생각해 본적이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믿음으로 의인되게 했고, 언약을 주신다 하셨고, 그래서 당연히 자신은 의인인데 하나님이 의로운 하나님이기에 그 동일한 의가 자신에게 있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도 의롭고 나도 의롭다면 같은 의로움끼리는 의견이 합치된다고 생각해서 자기생각과 맞는지를 계속 물어보고 있는 거예요.
뭘 확인하느냐 하면, “절대로 의인은 악인과 더불어서 심판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제 3의 지대에, 무풍지대에 관찰자로, 관람하는 사람으로 따로 자리를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자기는 당연한 의인이니 이번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가 소돔과 고모라는 아니니까요. 심판하는 곳은 소돔과 고모라인데 자기 살던 곳은 아니니까 자신은 심판의 대상은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으면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속속 다 들어주시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이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과 아브라함개인이 격차가 벌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자라고 해서 하나님이 하는 그 심판에서 관람자의 위치, 제 3의 위치에 따로 동떨어져 있을 수 있는 자격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누구만 아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알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본인도 안다고 우기는 겁니다. 본인 나름대로 정립이 되었다고 우기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대들 듯이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는 해야겠고, 아브라함은 착각을 해서 자기가 아브라함언약에 대해서 뭔가 하나님처럼 안다고 우기고 있고, 그러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안다고 착각하는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간격을 좁힐 필요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면서 아브라함을 곁에 두시면서 아브라함의 기도와 질문을 자꾸 받아주는 이유는,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을 몰아붙이는 겁니다. 아브라함생각과 하나님생각이 일치될 때까지 계속 몰아붙이는 거예요. 이 대목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겁니다. 50명이라 하다가 아니라고 하니 45명, 아니다, 40명, 아니다, 30명, 아니다, 20명, 아니다, 10명, 아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을 밀어붙이고,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자기의견을 내세우면서 궁지에 몰리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것을 스포츠댄스라고 한다면 두 파트너가 춤을 맞춰서 춰야 되는데 박자가 맞지를 않아요.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몰아붙이는 그 취지와 아브라함이 밀리면서 여전히 뭐라고 하느냐?
절대로 의인은 악인과 함께 심판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 원칙은 맞잖아요, 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계속 밀리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의인은 악인과 함께 심판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서 아브라함생각과 하나님생각이 같다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궁지에 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면 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래, 네 말이 맞아.”라고 하면서도 계속 심판을 중지하지 않고 감행할 의사를 개진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기본생각, 의인은 악인과 함께 멸망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 생각 하면서도 아브라함이 자꾸 내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맞다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 이야기가 2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놀라운 것은 50명만 빼주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50명의 의인만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전체의 심판을 그 50명을 보고 중지시키겠다는 거예요.
50명 빼고 나머지를 다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50명만 있다면 심판 자체를 중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아, 네 생각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아느냐?”라고 궁지에 몰아놓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숫자 문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너무 많이 불렀구나. 그러면 45명’ 지금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을 전혀 이해 못합니다.
이것은 숫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자신의 생각이 하나님이 생각하는 심판의 취지와 합치되었다고 아브라함이 계속 우기고 있습니다. 의인은 악인과 함께 심판받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틀릴 리가 없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게 맞다고 하시면서 “그래, 네 말이 맞구나. 내가 50명의 생명을 너무 하찮게 봤구나. 50명 봐서 심판 중지할게. 사실은 50명까지는 안되지만 한 10명을 되거든. 10명은 되니까 중지할게.”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밀어 붙여요.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말은 주께서 이미 심판하기를 확정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심판하기를 확정했다는 것은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심판에서 면제될 정도의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을 사전에 눈치 챘어야 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단 한명도 없다는 말을 선뜻 동의하기가 난처한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소돔과 고모라성에 사는 사람들, 물론 자기친척인 조카 롯도 있지만 친족뿐만 아니고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기에 ‘아, 저 사람은 의인될 사람이다.’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그래도 의인이 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살아온 경력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누구와 대화를 할 때는 그 사람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사람이 살아온 경력과 이력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온 것을 봤을 때 내 말은 내가 살아온 이력에 준하면 상식에 합당하고 이치에 맞습니다, 해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혀 먹히지를 않습니다.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하나님께서 계속 밀어붙이니까 하나님의 뜻과 자기 뜻이 너무나 격차가 난다는 것을 감을 잡았어요. 격차가 난다고 해서 자기의견을 수정할 건덕지는 없어요. 자기가 바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수정합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겸손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게 27절에 나와요.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면 “주님, 제가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는데 이거 하나만큼은 제가 제대로 알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티끌 같은데 아무리 티끌 같지만 이 티끌 속에 하나님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한 것은 들어 있습니다. 그 진실에 근거해서 제가 또 하나님 앞에 질문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이렇게 들이대는 거예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브라함이 이런 기도를 할 때에 우리는 어떤 편에 서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역시 하나님은 인간보다 위대하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돼요. 아브라함이 하는 그 이야기를 보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기도가 우리가 보기에 전혀 틀리는 점이 없고 굉장히 아브라함은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무한한 이웃사랑을 펼쳐주는, 그야말로 신앙인중의 신앙인, 이웃을 사랑하는 모델 같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착하기 그지없는, 자기와 상관없지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받는 사람들이 너무 가련하고 너무 불쌍해서 마치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어쨌든 할 수만 있다면 심판 안 받는 쪽으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는, 인간성으로는 최고의 착함을 보여주는,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것으로 아브라함의 기도하는 태도에 대해서 감탄을 금치 못하지요.
그런데 그러한 아브라함이나 그런 아브라함을 옹호하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숨겨진 심판받아 마땅한 죄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 본인입니다.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인간은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창세전에 갖고 있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줍지 않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와서 자신을 의인이라고 하고 언약을 주니까 자기상식에 의해서, 자기가 살아온 인생경력에 의해서 ‘이정도 하면 제 뜻과 하나님 뜻이 일치되지 않겠습니까?’라고 고집을 부리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생떼를 끝까지 따라붙습니다. 이것은 뭐냐?
곧 하나님이 아브라함 따라서 하강하시는 거예요. 하늘로부터 위에서 내려오시는 겁니다. 지금 소돔과 고모라에 천사 둘을 보냈습니다. 천사 둘을 보냈는데 관람자자리에, 관찰자자리에, 심판을 행사하는 자리에 여호와가 계신데 그 여호와 옆에 아브라함이 함께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있어서 그 끝, 그 끝은 위, 하나님 계신 그곳이 바로 끝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무엇을 뜻하느냐? 심판이라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 모든 도시의 역사의 끝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마을에 천사가 개입되었다는 것은 시간의 영원성이,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끝장내는 취지로서 하나님의 시간성, 하나님의 영원성이 지상의 인간의 시간성속에 개입하는 거예요. 개입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소돔과 고모라는 뭐가 되는가? 동작 그만, 이 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스톱이 되는 거예요.
모든 현장은 동결되고 인간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그걸 쳐다보고 있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천사가 품고 있는 그 끝 지점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의 시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인간적인 시간성을 자꾸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늦추려고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확정된 심판에 대해서 늦추지를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 입장에서 이렇습니다. “의인 50명만 있다면 심판하지 않겠다. 의인 50명만이 아니라 그 나머지 악인조차 전부 심판하지 않겠다.”고 나오신다면 의인 50명이 생길 때까지 기회를 더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지요. 심판하는 것이 뭐가 급해가지고.
하나님은 언제든지 심판할 수 있는데 심판하는 것이 뭐가 그리 다급한 문제라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못 죽여서 그렇게 당장 죽여야 되느냐는 말이지요. 아브라함은 땅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는다면 의인 열 명을 만들 때까지 기다리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열 명을 친히 만들면 되지요.
의인을 키워서 아예 심판이 없는 쪽으로 하는 것이 아브라함입장에서 볼 때 ‘그게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맞잖아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은 공의가 뭔지도 모르고, 의가 뭔지도 모르고, 죄가 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나는 죄가 뭐며 의가 뭔지를 나름대로 자기가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는 죄가 뭐며 의가 뭔지를 안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빌미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기존의 소돔과 고모라사람들이 알고 있던 죄와 의의 기준을 대변해주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채택하고 있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 하나님의 뜻은 전혀 모르면서 안다고 우기는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 아브라함과 상대해서 언약을 이루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언약을 이루려면 아브라함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어디서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해? 너는 저리가 있어.” 그것이 아니고 그 아무것도 모르는 아브라함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계속 끈질기게 하강하시는 거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올 때, 말씀이 육신이 될 때 온 세상이 더럽다고 그냥 유황불 내려서 다 멸망해도 되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안 되는가 하면, 언약이 안 이루어져요. 성경을 볼 때 언약중심으로 봐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구원중심으로 보면 안돼요. 하나님의 자비중심으로 보면 안 됩니다. 삼위일체 중심으로 보면 안돼요. 하나님이 자기언약을 이루시는 언약중심으로 봐야 돼요. 그 언약을 위해서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선악과를 심어놓았고 인간의 죽음이 다 필요한 거예요. 악마도 필요한 겁니다. 언약의 마지막 결말은 예수님만이 심판주가 된다는 것, 그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 예수님 심판주를 기준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이 나누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소돔과 고모라는 뭐냐?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의 모형도시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2장 6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여기에 본이라는 말이 나와요. 모델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델하우스처럼 모형이 되는 도시에요.
모형이 되는 도시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지상에서 사는 아브라함이 말하는 인간의 상식에 의한 의인과 죄인의 기준에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기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기준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먹통이에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지금 이 시간까지라도 사람들은 모르고 있을 거예요.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한 죄인과 악인의 개념과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언약에서 새롭게 도출된 의인과 죄인은 따로 있습니다. 언약에서 나온 의인과 죄인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전혀 모른다는 말은, 이미 아브라함마저도 본인이 아브라함언약에 대해서 아는 바 없는 죄인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본인이 수긍을 해줘야 됩니다.
그걸 수긍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질문을 다 받아주면서 끝까지 아브라함의 마지막 남은 자기견해까지 반응을 나타내시고 응답을 해주셨어요. 오늘 본문 32절에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납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다시 말해서 “또 나에게 질문할거면 질문해봐라.” 이 말은, 이번심판은 네가 납득되는 심판일 수가 없다는 거예요. 네가 아무리 나와 언약을 맺은 입장이지만 언약을 맺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언약 속에서 새롭게 마련한 그 의인과 죄인의 개념은 뭐냐? 그 의인과 죄인의 개념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내세우는 의인과 죄인개념을 끝까지, 나중에 아브라함이 입을 다무는 그 때까지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언약에서만 나오는 죄인과 의인의 새로운 개념이 뭐냐?
그 개념은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앞장세워서 전도하시면서 그 지역에 대해서 심판을 선언합니다.
심판을 선언할 때 무엇과 비교하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해서 심판을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와 비교해서 심판을 선언했다면 그 당시의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무서운 심판을 받을 두로와 시돈, 고라신, 벳세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과 예수님 옆에 있는 제자들은 뭘 알아차려야 되느냐 하면, 이 벳세다와 고라신과 시돈과 두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가 뭐냐,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뿐만 아니라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의 유황불을 받을 때 소돔과 고모라가 받았던 그 심판의 이유가 뭐냐는 그것도 같이 소급해서 알아야 돼요.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을 죄는 우상숭배입니다. 간음죄도 포함되겠지만 모든 죄는 최종적으로 우상숭배 쪽으로 통합되게 되어 있어요.
우상숭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겁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지금 모르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심판기준을 전혀 모르겠다는 거예요. 전혀 모르겠다고 하면 되는데 자꾸 안다고 우깁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 많은 사람 가운데 분명히 의인이 있을 것이고 죄인도 있을 것인데 그 의인과 죄인을 같이 멸하면 안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조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아, 너도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야.” 왜? 언약에서 말하는 의인과 죄인의 기준을 전혀 모르는 우상숭배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1장에서 벳세다, 시돈, 두로, 고라신이 마지막때 하늘에서 유황불을 받고 저주받는 그 이유는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새언약의 완성자임을 모를 경우에는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의인과 죄인에 입각해서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세상을 평가하게 됩니다. “참 세상 더럽다. 하나님은 뭐하십니까? 심판하소서.”라고 누가 세상을 보고 한탄한다면 그 말은 뭐냐? 본인은 그 심판받을 죄에서 제외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우기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심판받을 죄에서 면제될 위인은 이 세상 인간가운데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마저 인간이 받을 심판에 합세했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마저 아버지가 주시는 그 저주를 받아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는 원칙은 간단합니다. 다 죽인다. 다 심판하는 거예요. 심지어 자기 아들마저 내어버려두사 다 죽이는 겁니다.
얼마나 깔끔하십니까? 인간은,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만 아는, 하나님과 예수님만 아는 그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자동 태어나면서 우상숭배자로 살 수밖에 없어요. 그 모든 죄는 우상숭배로 집결됩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가 있게 말찌니라.”부터 시작해서 간음죄, 살인죄, 도둑질하는 죄가 다 나오지요.
그 뒤에 나오는 탐내지 말라는 것까지 모든 죄는 하나에 집결됩니다. 우상숭배. 언약의 하나님이 일하는데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느냐를 묻습니다. 언약을 모르면 지당하게 지옥가고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언약을 마련하면서 아브라함자체를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자로 삼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장차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핵심 되는 요소로서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그 내용을 이 지상에서 받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새언약을 달성, 지옥과 천국을 가름하는 마지막기준의 달성이고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러면 창세기 18장으로 돌아와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대상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롯입니다. 그래서 19장에 보면 하나님의 천사가 누굴 찾아가느냐 하면, 롯을 찾아가요. 왜 롯을 찾아가느냐? 창세기 19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했어요.
엎으시는 가운데 내보내셨다는 이 말은, 어떤 언약도 심판 없는 언약은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심판을 경유하지 않으면 언약의 가치가 나오지를 않아요. 주님이 죽어야 부활의 가치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냥 멀뚱하게 제 3의 자리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박수나 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양도 마찬가지에요. 직접 심판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도달될 때 이 심판의 정당성, 그리고 이 심판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필수코스인 것을 인정할 때, 믿게 될 때 그 사람이 바로 이 시대의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복음 전도자에요.
이미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 죽었던 자가 사람을 겁내겠습니까? 세상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더 이상 시간의 진척에 대해서 기대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우리나라에 의인 2천명만 있어도 심판을 지연시켜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언제 도적같이 오셔서 심판하셔도, 언제 주님 재림하셔서 유황불로 이 지구를 멸망하더라도 그것은 합당합니다. 잘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할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기준은 남보다 내가 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피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피를 보고 주님의 심판과 그 심판과 더불어 함께 있는 구원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영, 성령이 왔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을 눈치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아브라함의 그 남을 배려하는 성실성에 얼마나 찬양을 했습니까? 훌륭하다 아브라함. 자기 일도 아니면서 그렇게 조카 살리기 위해서, 또는 다른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 바짓가랑이 붙들고 하나님이 조금만 지연시켜 달라는 그 애틋한 인류에 대한 사랑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지신 그 마음과 합치된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은혜를 나누는 어처구니없는 해석들을 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대상이 있어요. 심판대상이 된다는 그 사람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유일하게 구원될 사람입니다. 심판 없는 구원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는데 우리는 마치 구경하듯이 남의 일처럼 잘못된 상식에 입각해서 주님의 심판을 거론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신이 늘 십자가 안에서 지금 죽어도 합당한 죄인의 모습으로 사는 그것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복음을 증거 하는, 십자가를 증거 하는 성도라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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