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천사 셋(창18;1-5) 1702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2. 20. 21:14
2017-02-15 20:35:13조회 : 104         
   천사 셋 17021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천사 셋(창세기 18: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3RzxGS-uzug, Hit:6
 이근호17-02-15 21:11 
천사 셋 

2017년 2월 15일                       본문 말씀: 창세기 18:1-5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18:2)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18:3)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18: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18:5)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하나님의 등장은 ‘원형’의 등장입니다. 이는 결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원형’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원형’을 꾸준히 염원하게 됩니다. 종교라는 것이 이런 겁니다. 진정한 자아 찾기로부터 시작해서 신을 보고 싶어하고 신과 사귀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신은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들은 이러한 염원이 죄의 연장(延長)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고상한 행위라고 자부하고 경건이라고 여기고 거룩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즉 자신들의 최선에 대해서 신 쪽에서 나름대로 성의를 표해줄 것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식의 ‘신 찾아나서기’는 인간쪽에서 발사되는 응시에 신이 포착되기를 바라는 식입니다. 과학적 인식이 이런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성사는 하나님쪽의 응시가 결정적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고 계시냐’가 관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그 시선의 선이나 폭 안에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행을 데리시고 아브라함 가정을 방문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은 그저 ‘판 깔아드리는 것’ 뿐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 일행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로 모를 나그네 행색으로 하나님이 찾아왔을 뿐입니다. 이것은 예상 못할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나그네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성이 듬뿍 담긴 대접은 해드릴 요량은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한계를 지키면서 하나님 일행을 대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제시한 계획에 대해서 아브라함 가정은 결국 “피싯”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의 평소 생각을 반영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인간 세계가 지닌 임계점이기도 합니다. 

웃음이란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의미군(群)으로서는 도저히 포착이 불가능한 초과적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다가오셨다는 바가 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악지식체계 안에 갇혀 있고 굳어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앎은 그 앎에 근거해서 행위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안다고 곧 지식이란 이미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판정 내려진 그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 지식에 입각해서 시도되는 모든 생각과 행위도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선악지식체계를 내용으로 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정에 대해서 인간들은 알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을 분리해서 이해하고 있기에 악을 행할 때는 선이 아니요, 선을 행할 때는 악이 아니라고 자부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자체적인 평가는 하나님의 방문으로 그 한계가 들통납니다. 그저 죄에서 죄로 이어질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15:6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내용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으로서 처음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어디까지 ‘의인’이 아니라 ‘무죄(無罪)’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란 아무리 죄가 득세해도 더 이상 죄가 스며들 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란 ‘이미 죄에 대해서는 이겼음’이라는 내용을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죄 속에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전히 ‘죄 속에 있기에’ 뭘 생각해도 죄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 찾아올 때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낯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부부는 피싯 웃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 일행은 역할 분담에 들어가게 됩니다.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과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 파견될 천사와 말입니다. 창세기 19:1에서 셋 천사 중에 두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는 곧 심판의 감행인 동시에 죄에 대한 전쟁이고 곧 전쟁의 승리에서 생기게 될 전리품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27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남자와 여자, 둘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형상’의 지상 방문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성을 맞는 성질을 발휘하면서 실시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3:15에서는 여자에게 약속 구현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약속이 주어지고 난 뒤에, 여자의 이름은 생명(=하와)로 바뀌게 됩니다. 

즉 저주밖에 없는 이 선악의 세계 안에서 생명이 약속 구현의 사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그것도 ‘여자의 후손’으로서 말입니다. 요한복음 11:35에 보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이는 인간 세상을 둘러싼 죄의 띠를 통과하시면서 피조물 형태로 등장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비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피조물 형상으로 섞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상(象)을 신비로움으로 일관하지만 막상 그 곁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형상(원형)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가정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의 상대자로 일하기 위해 판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판이 사라를 통해서, 곧 ‘여자의 후손’이라는 약속의 취지를 살리면서 순전히 약속으로 태어날 이삭으로 인수인계됩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비웃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봅니다. 하지만 선악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생명은 바로 그 십자가 안에만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2-16 23:22 
75강-창 18장 1-5절(천사 셋)1702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8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20페이지입니다. 

  

창 18:1-5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오늘 본문은 5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15절까지 진행될 겁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는데 그 행색이 나그네 행색이었어요. 나그네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곳에 머물고 싶은 의사가 없는 사람, 나그네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아브라함이 익히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 동네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단지 아브라함과 그냥 그 시각에 마주침이지요. 마주침은 다른 말로 사건이지요. 낯선 사건을 아브라함이 또 다시 맞닥뜨리게 되는데요. 사건이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올 때는 사건으로 온다. 어떤 사건? 예상치 못한 사건, 우발적인 사건으로 오시는 겁니다. 

  

우발적 사건의 특징은 아브라함의 손에 소유되거나 장악되거나 하지 않고 아브라함 쪽에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렇게 할 수 없는 대상이 나그네요. 아브라함이 그 여호와일행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호와께서 그 일행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조금 보여준다고 생각하세요. 

  

이것이 바로 우발적사건에 부합되는 내용입니다. 자꾸 “하나님을 보여주옵소서.” 하는데 그것은 전혀 성경하고 안 맞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조금 보여주게 되면 조금 보여준 범위 안에서만 조금 알게 되고, 좀 더 보여주시면 좀 더 보여주신 범위 안에서 아는 것뿐이에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데 하나님을 보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는 ‘저 하나님을 어디에 써먹을까?’라고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볼 때는 ‘저 아브라함을 어디에 써먹을까?’ 하는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에서, 내가 하나님을 만나서 뭘 해보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돼요. 

  

그러면 잘못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돼요. 그것은 신앙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종교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가면서 자기는 신앙생활 한다고 우깁니다. 종교가 뭔지도 모르고 자기 종교가 신앙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점점 더 많이 나와요.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음흉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교회 다니면서 얼굴이 펴지지 않는다는 말은 뭔가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하나님에게 성의를 표했으면, 하나님도 어느 정도 내 의중을 알고 마음을 알게 되었다면, 내가 말을 안 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좀 채워줘야 우리 관계가 제대로 굴러가는 관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노림수 같은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가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평소에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관리하다 보니까 남을 만날 때도 평소에 자기를 관리하던 버릇을 남들에게도 그대로 연장시켜 버립니다. ‘남이 내게 이렇게 할 때 나는 도움을 주겠어. 그 마음가짐 가지고 내가 남을 도와주면 내가 타인에게 도움을 줄 때 이익을 얻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거야.’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없어요. 그냥 자기 뜻대로 하나님이 뜻이 따라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냥 자기고집이지요. 그런데 창세기 15장 6절이 굉장히 중요해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기 ‘의’라는 말이 왜 중요한가 하면, 창세기 15장은 이미 창세기 3장 이후입니다. 

  

창세기 3장 이전에는 창세기 2장이 있겠지요?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기 전의 인간은 의인이 아닙니다. 죄지을 가능성이 있는 무죄상태에 있었지요. 의인이 아니에요. 의인이란, 아무리 옆에 죄지을 요소들이 있더라도 그 죄가 물들지 않고 의가 그대로 남는 것이 의인이에요. 그러나 중립상태인 무죄상태는 죄가 없다는 것뿐이기 때문에 항상 죄에 물들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그게 창세기 2장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죄에서 무죄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서 의로 구원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방식을 사용할 때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을 의인되게 만들어서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인 되게 만들었어요.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그냥 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빼놓고 다 죄인 되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죄인 된다는 말은 죄인이 구원되려고 하는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이 아무리 죄에서 발을 빼려도 해도 뺄 수가 없어요. 마치 끈끈이에 쥐가 걸려서 밤새도록 몸부림을 쳐도 아침이 되면 결국 저에게 잡힙니다. 유아실에 쥐가 많이 나오거든요. 백날 몸부림 쳐도 아침이 되어서 죽어 있는 것을 그냥 처리하면 그만이지요. 

  

인간이 자기가 죄를 짓지만 일단 죄를 짓고 나서는 그 죄가 끈끈이에요. 죄가 인간보다 더 셉니다. 약한 인간이 더 센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그걸 죄의 왕노릇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종교요? 그거 죄입니다. 구원받고자 노력하는 거요? 그거 죄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요? 그거 죄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죄짓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 그거 죄입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보면서 자신이 중립지대에 있다고, 창세기 2장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마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우리는 아담이 새로 시작한 것처럼 새로 시작하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처음 아담은 새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죄에서부터 출발해요. 우리가 행동하게 되면 콜타르같은 끈끈한 것이 모든 행동에 다 묻어나옵니다. 그것이 로마서 7장이에요. 선을 행하고자 해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선을 알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어서 선에 악이 달라붙었는데 문제는 선에 달라붙은 그 악이 선보다 더 세다는 것이 문제에요. 

  

뭘 더 이상 명확하게 생각합니까? 인간이 뭐냐? 죄악에 허덕이는 쥐새끼. 그것보다 더 명확한 정의, 명제는 없습니다. 교회 와서 구원받고자 하는 그 의도자체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내가 누구냐, 그것이 우선되어야 돼요. 성경을 보세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창세기 2장부터 로마서 5장, 7장, 요한계시록까지 죽 나오잖아요. 

  

별로 어려운 문제 아니에요. 약간 어렵다면 창세기 1장으로 넘어가면 약간 어려워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그러면 인간이 출발하는 그 배양지가 뭐냐? 하나님의 형상에요. 뭔가 키울 때 그 모판을 배양지라고 하잖아요. 배양하는 그 토대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토대하고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아담은 이미 단절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는 이유가 뭐냐? 창세기 15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 했거든요. 의는 누구 생각이냐 하면, 우리 인간들 생각이 아니에요. 의는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피조물을 새롭게 창조한다면 이 작업의 개시와 과정과 그 결말은 다 누구 작품이냐 하면, 순전히 하나님의 자체적인 작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대접한 것은 뭐냐? 그것은 판을 제공한 거지요. 자리 제공한 것입니다. 작업을 하세요, 라고 자리 제공한 것뿐이에요. 자리 제공했으니까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18장 12절에,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지금 사라가 웃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도 웃었지요. 17절에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창세기 17장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웃었고 18장 2절에서는 사라가 웃었습니다. 둘 다 웃었어요. 그러니까 이 웃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주목합니다. 18장 13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라고 했어요. 

  

이게 장막 뒤에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인간 대 인간관계처럼 “하하하!” 이렇게 웃었겠어요? 소리 안 나게 웃었겠지요. 하하하, 웃었으면 소리 다 들렸겠지요. 소리 안 나게 웃었는데 그게 들킬 수 없는 환경인데 그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 웃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주목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의 배양지가 되는, 토대 자체가 되는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이 땅에 내려와요. 올 때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이 땅의 아브라함 자리와 그리고 하나님이 하는 작업에서 이 모든 의사소통이 단절돼요. 그것은 당연하지요. 죄니까. 단절되었다는 말을 창세기 3장식으로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디까지나 선악체제, 선악지식 안에서 못 벗어나요. 

  

그 가운데 갇혀 있는 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어디서 생기는가? 하나님의 의는 생명나무 그쪽 동네에요. 생명나무의 취지가 하나님에 의해서 손을 대게 되면 나중에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선악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의라는 것은 생뚱맞는 거예요. 선악을 아는 사람은 항상 무죄상태로 돌아가는 그것이 한계에요. 

  

아브라함가정과 여호와의 일행이 마주쳤다는 것은 단절되는 양상을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왜? 사라는 웃었으니까.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웃었잖아요. 웃음이라는 것은 임계점이라, 한계, 거기까지라는 말이지요. 웃었다는 것은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임계점인 동시에 초과적인 의미가 돼요.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의미에 초과되는 것, 넘치는 것, 의미라는 것은 단어인데 그 언어, 단어, 개념, 기호, 상징, 은유, 모든 것을 다 해도 설명되지 않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고 십자가는 미련해요. 어디서? 이 땅에서.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선악체제로 저주받아야 마땅한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일행이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말은, 이것은 왜 인간들이 하나님을 못 믿느냐 하는 이유도 돼요. 

  

왜 인간들이 하나님을 못 믿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 피조물 속으로 와서 피조물이 되어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못 믿어요. 인간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항상 상상하고 대단한 존재를 ㄱ스리기 마련이에요. 설마, 설마 피조세계까지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의 작업을 하리라는 생각을 정말 못한 거예요. 정말 실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에요.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요. 그냥 하늘에서 꽃가루 뿌리듯이 하나님의 의를 뿌려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서 일구어 낸다는 것, 인간은 왜 그래야 되는지를 알지를 못해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은 그저 주고 우리는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의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 인간 쪽 생각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중요하고 그 의로 천국 간다면 그 의를 하나님은 주시고 우리는 받아 챙기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생각이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간편하지요. 우아하고. 그러나 여호와 한 분이 오신 것이 아니고 세분이 한조를 이루어서 왔거든요. 세분이 왔다는 것은 한 분과 두 분이 역할 분담이 되어 있어요. 

  

창세기 19장 1절에 보면 “날이 저불 때에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호와께서 두 천사를 대동하고 오신 거예요. 창세기 18장 20, 21절에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역할분담이 뭐냐? 선악체제에 있는 인간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어요. 이것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그렇게 법으로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선악과를 알기에 추방시켰어요. 선악을 안다는 것은 생명나무를 겸해서 알 수는 없다는 이 말이지요.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악지식은 피조물입장에서는 선악지식도 알고 생명나무도 아는 법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생명나무를 알아보게 되면 이것이 어디에 흡수되느냐 하면, 선악체제에 흡수되어서 하나님의 의가 되지 못하고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선악체제에 입각해서 생명을 얻을 수 없어요. 이 말은, 선악체제에 입각해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거나 바라보거나 하는 것은 전부 다 죄가 된다는 말이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주세요.” 이 자체가 죄가 돼요. “네가 죄에 대해서 알아?” “압니다. 내가 이런 나쁜 짓도 하고 저런 나쁜 짓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런 나쁜 짓도 하고 저런 나쁜 짓도 했다고 하면서 실실 웃는 법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어요. 심각하잖아요. 회개할 때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찡그려 가면서 “주여,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사람을 마음속으로 미워했고 간음했고 탐심을 냈습니다. 이런 나쁜 놈이 있습니까? 용서치 마옵소서.” 이렇게 진지해요. 

  

실실 웃으면서 하지 않습니다. 진지하게 통회하면서 한다는 말은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마치 소나기가 지나가고 하늘이 맑게 갠 것처럼 깔끔하게 내 죄가 없어질 것을 미리 내다보는 거예요. 내다보는 그것이 뭐냐 하면, 선악체제와 단절된 것이 아니고 선악체제에서 이어지고 연속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사죄, 은혜, 자비, 은총, 거룩, 경건, 의, 그런 것들이라는 말이지요. 

  

종교에요. 최고의 거룩을 추구하는 종교가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분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아브라함이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실 웃습니다. ‘나그네면 그냥 지나가세요. 제가 그래도 이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농을 거시면 곤란하지요. 내년이면 백 살이에요. 왜 이러십니까? 노인네를 놀리시네요. 그냥 식사하고 가세요.’ 

  

처음에는 대접을 잘 하다가 그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노인네를 천사가 놀리나.’ 그런 생각이 들 거에요. ‘이게 뭐하는 시츄에이션입니까?’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자기가 스스로 자기에게 선악체제 안에서 경건이 뭐며, 죄가 뭐며, 거룩이 뭐며, 그 반대되는 흉포함이 뭐고, 완악함이 뭐고, 교만함이 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쪽 교만함에서 경건함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쓸 거라는 말이지요. 

  

그렇게 애를 쓰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제일 잘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그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하지만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까? 왜 못 듣습니까?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와 똑같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한 전략이고 작전이었습니다. 

  

죽어서 만나는 줄 알았지요. 살아서 하나님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는 말이지요. 요한복음 11장 33-3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마리아 마르다가 예수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 앞에 닦달 내는 거예요. “그렇게 아프다고 전갈을 보냈으면 진작 오시면 되는데 죽고 나서 오시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왜 이제 왔습니까?” 하고 달려들어서 오빠 죽은 애석함과 분풀이를 예수님에게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 반응은 뭐냐 하면, 주위에 섰던 유대인들과 친척들도 같이 울고 통분해 하니까 예수님이 거기서 울었습니다. 

  

그 우신 것이 뭐냐? 예수님께서 인간을 둘러싼 그 죄의 띠, 지구가 대기권에 둘러싸였듯이 그 죄의 띠, 인간이 빠져나올 수 없는 선악체제, 선악지식이라는 그 띠, 그 띠를 통과하면서 우시는 겁니다. 아픔이에요. 그 단절을 감수하시는 아픔, 저들의 불신을 감수하시는 아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기 위해서 다시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죽으면 만나겠지.’ 죽어서 영혼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에요.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의를 받지 아니하면 죽어서 지옥 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해 보세요. 우리가 믿을게.” 이렇게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하면 실실 웃는다니까요. 믿는 것이 아니고. 그냥 웃어요. 농담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배드리지, 헌금하지, 기도하지, 봉사하지, 청소하고, 선교사까지 보내고 얼마나 많이 했어요? 

  

“이런 것이 다 쓸데없다는 말입니까?” 예, 쓸데없어요. 그러니까 피식 웃을 수밖에 없고, 배척할 수밖에 없고, 복음에 대해서 핍박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했잖아요.”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천사와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일행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부부는 둘 다 웃었습니다. 농담인줄 알고 웃었어요. 단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는가? 죄의 띠, 다시 말해서 심판입니다. 여호와 일행이 왔을 때 두 천사는 심판을 감행하게 돼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선악과 아는 인간들이 생명나무 의를 안다? 이것은 전부 다 죄고 거짓말입니다. 뭐냐? 심판을 받아야 돼요. 세 명의 천사를 우리가 지금 만났다 칩시다. 그 세 명의 천사 가운데 한 분 여호와는 선언을 하고 그 여호와의 명에 따라서 두 천사는 지금 여호와를 대접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무서운 유황불로 심판할 권세를 가진 분이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에 안 속합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죄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지요. 없다면 이 죄와 더불어서 저주받고 심판받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 소식을 통보하러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왔습니까? 심판하러 왔어요. 그러면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겠네요? 전부 다 심판해 버리면 구원받을 사람도 없겠네요. 아브라함도 실실 웃었으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조치하시는 언약이 된다는 겁니다. 이 피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작업을 장착시키고 그것을 정착시키는, 쉽게 말해서 만남의 장소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셔서 하나님께서 언약의 상대자로 일방적으로 자기 자리를 만든 거예요. 

  

아브라함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자리에요. 그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해서 하나님이 그와 상관하고 관계하는 겁니다. 아까 그랬잖아요. 하나님께서 보여준 만큼 자리가 마련된다고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했잖아요. 그 다음에 사래를 사라 되게 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언약의 자리입니까? 

  

아닙니다. 방금 언약의 자리가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뭐냐?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이삭이 새로운 언약의 자리로 인수인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든다고 되어 있어요.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요. 

  

사람을 만드는데 그 뒤에 가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중요해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냥 아담으로 완제품 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완료시켜 놓아도 괜찮은데 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는가 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내재하는 관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를 만든 겁니다. 내재적인 관계라고 하면 너무 함축되어서 어려운데 창세기 3장에 보면 그 사실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기서 남자와 여자를 완전히 구분시킵니다. 

  

여자의 기능이 두 개가 되어버려요. 아담의 처로서의 여자가 있어요. 그런데 아담의 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임해버리면 처의 이름이 여자에서 생명으로 바뀝니다. 선악체제로 완전히 굳혀진 이 세계에서 드디어 생명이 나와요. 그런데 이 생명은 여자에서 나와요. 여자에서 나온다는 것,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에요. 

  

그러면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해집니다. 이 세상은 뱀이 통치하는 악마의 세계가 되어버려요. 그걸 아까 죄의 띠라고 했어요. 악마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미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악마와 여자와 남자는 이 땅에서 저주를 받으면서 죽어야 돼요. 남자도 죽고 여자도 죽어야 돼요. 그런데 여자가 죽어가면서 이름이 남자에게 속한 여자가 아니라 생명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죽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가죽옷으로 입히는데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겠다는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는 실패로 끝나지 않고 완성으로 끝난다는 겁니다. 누구덕분에? 여자가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그 뱀의 후손과 전쟁을 해야 돼요. 싸워야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이 내용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 있는 내재적인 관계성이에요.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가 누구냐 하면, 그가 하나님처럼 보이지만 13절에 보면 “사랑의 아들” 다시 말해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아들 됨은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의 모든 것이 종결될 때 아들이 등장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하나님의 형상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어떤 기능을 발휘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을 홀로 다 수행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게 여자의 후손이에요.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왔어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아담에게도 없어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누구와 관련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이 형상답게 완성할 때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지요.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리 내줌, 자리제공자, 판을 제공하는 위치에 있는 겁니다. 판을 제공하면서 이 판이 뭘 로 물드느냐 하면, 악마의 유혹에 의해서 죄로 물들었습니다. 죄로 물든 이유가 뭐냐? 선악체제를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인데 선악체제를 악마와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악마도 피조물이잖아요.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돼요. 선악에 대해서 알지 말아야 돼요. 선악체제를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형상은 선악체제를 알게 된 그 처벌이 그 기능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아는 것을 처벌하지 않으면 생명나무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완성할 수가 없어요. 

  

왜냐? 선악지식과 생명은 같이 엮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에 그래요. 하나님이 그렇게 제정했어요. 창세기 3장에서. 따라서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했어도 그냥 판을 제공한 것이고 작업은 일방적으로 누가 하는가?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해요. 자체적으로 하는 것이 역할 분담이에요. 두 천사가 하나님의 일행이 되어서 판을 벌린 아브라함 가정에 쳐들어온 겁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에게 쳐들어온 것과 똑같아요. 성도가 뭘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심판을 알되 그 심판의 이유가 뭐냐? 선악과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함을 수긍하고 “과연 그렇습니다. 합당하십니다.” 이렇게 수긍하고, 심판받아 마땅함을 수긍하고, 수긍한 그 자리가 우리의 죄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께서 찾아왔기 때문에 일어난 놀라운 인식의 변화에요. 

  

이것은 우리 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바라보는 그 틈, 아브라함처럼 그 틈을 얻은 거예요. 그 틈에서 보이는 그것을 믿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 의는 필히 심판이 필요한데 그 심판의 근거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와서 하거든요. 직접 올 때 죄의 띠를 통과하면서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운다는 말은 십자가에 희생한다는 뜻이에요. 이 죄의 저주를 같이 받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성된 그 십자가 안, 그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의의 백성 만드는 하나님 쪽의 작업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