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와 세례
2017년 2월 8일 본문 말씀: 창세기 17:20-27
(17:20)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17:21)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17:23)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17:24)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이었고
(17:25)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삼 세이었더라
(17:26)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17:27)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창세기 15:6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의’라는 것을 유발코자 하십니다.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성취시키십니다. 그 취지에 준해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 가정에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가 취해집니다. 이는 어디까지는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다가섬입니다. 이처럼 언약이란 하나님쪽에서 준비하셔서 제공되며 그 과정이나 그 결과도 일체 인간의 행함의 개입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달성되십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의’라는 원칙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함을 배제합니다. 인간들 쪽에서 혹시 오해해서, 자신의 행함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여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제시되는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인간들의 의사결정에 의해서 절대로 믿을 만한 내용이 아님이 드러나게 됩니다. 골로새서 2:11을 보겠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렇게 할례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 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언급하면서 할례와 교환해서 사용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엔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할례의 완성’이라는 입장에서 세례를 보고 있습니다. 이는 할례와 세례가 공통적인 내용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인간인 성도가 참여가 가능하도록 하는 공통 구역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례라는 말은 구약에 나타나고 세례라는 말은 신약에 나타납니다. 구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세례가 구약의 할례와 서로 내통하는 개념이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작 창조하시려는 것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창조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시는 겁니다.
창조를 바탕으로 하되 창조의 본래의 목적은 이 창조물이 다가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창조물을 몽땅 훼손하는 한이 있더라도 건져내고 싶은 바가 이 창조 안에 담겨 있는 겁니다. 할례나 세례나 모두 현 창조 전체를 한꺼번에 둘러치는 울타리 같은 기능으로 작용합니다. 물건을 끈으로 포장을 해버리면 그 물건을 포장지 안에 전부 담기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장지가 실내용은 아닙니다. 할례나 세례는 창조세계를 포괄하시려는 하나님의 일관된 알림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창조 세계에서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에서의 할례와 신약 시대에 알려진 세례가 곧 칸막이로 작용합니다. 즉 인간 쪽에서 하나님 나라로 넘어오는 것은 막혀 있음을 통보하는 방식이 할례요 세례입니다. 창세기 3:24에 나오는 하나님의 ‘에덴동산 차단 의지’의 연장선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할례에 대해서 신약에서 바라보는 안목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너희는 하나로 통합된 채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2:48-49에 보면,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을 치러야 될 히브리인들은 개인적 자격으로 유월절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이는 곧 유월절 사건이 히브리인들의 사적인 구원을 위해서 주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치 식판에 음식을 담아먹는 원리와 같습니다.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식판은 주방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할례라는 언약에 거기에 참여한 자들이 다 구원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언약이 임의로 결정내린 그 결과에 군말 없이 따라야 조건을 부여하는 겁니다. 즉 아무리 할례 언약을 해도 저주받는다면 그것마저 언약 안에 포함된 내용이기에 따라야 합니다. 만약에 어떤 이가 구원받는다면 이의 달지 말고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의 할례’가 이스라엘을 규정합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할례 언약의 취지, 즉 모든 '있음의 구역‘을 하나로 통합하는 개념에 준해서 실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번째 세례인 물세례가 이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세례 요한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요단강 물세례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때 하늘에 열리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세례를 받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우리는 물세례에서 성령세례에 이르는 유일한 주인공을 보게 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에 의지에 달린 겁니다. 원인이나 구원의 요건이 일체 이 ‘있음의 세계’에서는 없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마저 이 점에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질을 구성하는 이러한 집단적 구원은 고린도전서 10:1-4에서 보다 확연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 같은 음식’과 ‘다 같은 음료’를 먹은 이유가 모두 한 바다를 통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정 구원된 자들은 ‘믿음으로 의’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나온 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결코 자신들의 신앙의 요령이나 기술이나 힘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에서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에게도 동일하게 할례 언약은 적용됩니다.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수 5:4-5)
결코 성급하게 땅 차지하는 게 급선무가 아닙니다. 개인적 구원성이 제거된 자들만이 그 땅을 살 권한이 있습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지 않도록 늘 우리 마음을 죽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4강-창 17장 20-27절(할례와 세례)170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7장 20-27절입니다. 구약성경 20페이지입니다. 창 17:20-27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생장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양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구십 구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그 양피를 벤 때는 십 삼세이었더라 당일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생장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하나님께서 지금 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의사나 의견은 일단 별로 중요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가정이 약속의 가정이지요. 약속의 가정이라는 것은, 온 집안 식구가 우르르 몰려가서 예배 참석한다고 해서 약속의 가정이 아니고, 인간이 하는 종교행위를 결집한다고 약속의 가정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어떠한 종교행위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 가정에 하나님에 의한 완전한 변혁, 예상치도 못한 달라짐,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달라져 있지요.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노아가 종교행위를 했던가요? 노아는 종교행위를 한 것이 아니고 방주를 만들었지요. 그 방주만드는 것이 이웃사람 보기에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갖잖아 보이지요. 한심스럽고 갖잖은 거예요. 돈도 되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되지 못한 행동을 노아가 보이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이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집안 할례 행했다고 해서 이웃사람이 박수쳐주고 칭찬해줍니까? 우대해 줍니까? 이상하게 보지요. 낯설게 보고요. 신앙의 가정, 약속의 가정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꿈꾸지도 못하는, 예상치도 못하는 현상이 그 집안을 덮치게 되는 경우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게 되면 이런 복을 얻는다, 이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렇게 따르게 되면 나중에 행복이 온다는 그런 것이 전혀 없어요. 조건 없이 그냥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인데 그 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나는 어떤 그 무엇, 그리고 다른 사람과 차이가 난다는 것은 단순히 차이가 난다는 그 정도가 아니고 아브라함 본인이 생각해도 ‘내가 미쳤나?’ 할 정도로 기이한 모습으로 돌변해 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입장을 당하게 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 까, 하는 그런 것은 걱정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 그것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남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이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어떤 눈치 보기나 그들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만 의식하는 거지요. 주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는 것 이상으로 생생하게, 오히려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주님이 살아계셔서, 그 계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시와 명령을 하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접수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 가정을 우리가 보고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 자신과 대조를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말씀을 통해서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리는데 그 지시내용은 오늘 본문에 언약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뭐냐? 할례에요. 합쳐서 할례언약을 아브라함이 받았던 겁니다. 그러면 할례언약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했는데 어떤 취지에서 지시를 내렸는지 아브라함도 알아야 되고 우리도 지금 알아야 되는 겁니다. 창세기 15장 6절을 비교해보면 알 수가 있어요.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을 믿으니 하나님이 그의 의로 여기셨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의라는 것이 생산됩니다. 의라는 것인데 그 조건이 뭐냐? 아브람이 믿으니 그 믿음으로 의로움이 된다는 그 조건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믿으니 의롭다, 할 때 그 믿을만한 내용을 우리한테 주시고 우리가 믿으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의롭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겠지요. 그런데 믿으면 의가 되는 것은 알지만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아브라함에게 믿을 내용을 줘버립니다. ‘믿을 내용을 줘버리면 믿으면 그만이지. 아주 쉽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믿을 내용을 하나님이 주실 때 그 믿음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없는 내용을 줍니다. 가면 갈수록. 초반에,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의롭다 하는 그 순간 ‘야, 의인되게 쉽네.’라고 아브라함이 쉽게 생각했는지, 혹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가면 갈수록 자기가 믿었다는 그 내용자체가 인간의 능력 밖의 내용이 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그 내용은 내가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니고 점차로 내가 도저히 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심화시키고 좀 더 추가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그 내용을 주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21절에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아브라함 나이가 99세인데 100세 되기 1년 전에 이런 내용을 받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믿어야 의로운 것은 알지만 주님께서 내리는 지시가 점점 더 판단해서 수용하기에는 난처한 내용들이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믿으면 되지. 믿습니다, 라고 하면 되지.’ 그게 아니에요. 오히려 주께서 내민 그 내용이 네가 믿을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 너는 “믿습니다.”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네 믿음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믿습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진짜 믿음은 네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주는 언약 그 자체에서 네가 의인이 되는 믿음마저 거기서 만들어져서 제공되고 제시되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할례언약이 무엇이냐, 하는 그 대목이지요. 할례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인간이 칼 들고 자식 고추 끝을 자르면 되지 그게 뭐가 어려워?’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할례언약이 갖고 있던 진짜 내용, 정말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이 함유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스마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마엘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그 다음에 할례이야기로 넘어가는 겁니다. 할례언약이라 할 때 이스마엘까지도 포함시켜서 할례를 다 행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최초의 가정이 되는 거지요. 아브라함 혼자서 할례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집안에 있는 아브라함과 그리고 이스마엘, 달랑 두 사람만 할례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집의 용병들, 돈 주고 산 사람들과 거기에 같이 살아왔던 종들까지 다 할례를 다 받았어요. 그래서 할례가 무엇이냐를 설명하면서 제가 쉽게 가겠습니다. 할례란 울타리다. 뭔가 울타리를 치는 것, 보자기처럼 확 덮어버리는 거예요. 울타리를 쳐버리면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눈치채야 되느냐 하면, 너 잘났다, 나 잘났다, 그런 비교가 의미 없게 되는 겁니다. 울타리를 쳐버리면, 보자기를 확 덮어버리면. 이 말은 뭐냐?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언약을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할례언약자체가 아브라함을 구원하면 아브라함이 구원돼요. 덮쳐진 보자기인데 그 보자기에 덮이게 되었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몸에 할례 행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몸에 받았다는 말은 이제부터 구원에 관한 선택권과 권한은 할례언약 쪽으로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넘어갔으면 그 넘어간 쪽으로 어떤 내용으로 결과가 주어지느냐 하면, 할례언약을 받으면 언약 안에 있고 언약 안에 있으면 어떤 것을 인정을 해야 되느냐 하면, 누구는 구원해주고, 누구는 구원 안 해주고의 권한에 대해서 쉿, 입 다물라는 것이 언약 받은 사람은 수용을 해줘야 된다는 거예요. 언약 받아놓고 잘려서 지옥 가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거나 이의를 제기할 권한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라는 말을 해야 돼요. 언약은 언약자체를 위해서 언약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할례언약 받은 그 이스라엘이 결코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할례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라는 말도 정답이 됩니다. 왜? 신약에 오게 되면 할례가 뭐로 바뀌는가? 세례로 바뀌거든요. 할례 받았는데 그것으로 구원이 안돼요. 세례를 받아야 돼요. 세례는 성령세례와 불세례, 그리고 물세례가 있는데 성령세례를 받을 때 그것은 확정적으로 구원된 사람입니다. 신약의 세례와 구약의 할례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 12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11절을 다시 보게 되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러면 손으로 할례를 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 양피를 베는 것이라면 손으로 하지 않는 것은 아예 육적 몸을 홀라당 다 벗기는 거예요. 껍데기를 다 벗기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죽지 살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런 말 할 때 유대인들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뭐야? 왜 지어낸 이야기를 해?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해라.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네가 뭔데 왜해?”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할례라 함은 구약의 담당에서 구약에서 규정한 대로 해야 하고 구약에서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른다고 확정되어 있으면, 그것이 아브라함에 찾아온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다면 사도바울 네가 뭔데 그걸 고치느냐는 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가 하나님이야?” 대번에 이런 반발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겠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눈 깜짝도 않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그 할례는 그림자인데 12절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할례에서 세례로 넘어온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방인가운데 세례를 받더라도 그냥 세례 받으면 안 되고 구약의 할례의 의미를 알고 세례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1절의 말씀대로 할례는 이런 것이고, 할 때 ‘할례가 뭐지? 난 몰라도 돼.’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는 이런 것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너희가 할례에 대해서 알아야 돼. 그리고 그 할례와 세례가 어떤 공통점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네가 알아야 된다.” 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내용자체가 사람의 상식과 철학과 과학과 인간의 이성으로 믿을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에요. 사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용도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 받으면 내 말 알거야. 나머지는 안 믿겨지거든 믿지도 마.”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배짱도 대단한 배짱이지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자기소관이 아니니까 배짱부릴 만하잖아요. 구원받지도 않은 사람 하나라도 더 데려가면 그 책임은 사도바울이 져야 될 건데요? 그러나 구원되지도 못한 사람, 자기하고 친하다고 해서 “천당 갑니다.”라고 말 함부로 할 수 없는 거예요. “너 구원받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전하는 것을 믿나?”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성도가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 그렇게 부담을 갖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부부라도 안 믿으면 할 수 없는 거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것도 우리가 잘나서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7년에 이 땅에 단 한명도 믿는 사람이 없다면 없어야 마땅하지요. 믿지 말라고 이야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 전하면 되는 거지요. 믿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믿을 사람이 안 믿을 것도 아니니까. 복음 전하면 돼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란 것이 뭐냐? 남자를 이유로 전부 다 양피를 다 잘라버렸어요. 이것은 키가 크든 작든 직업과 관계없이 전부 다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식구들처럼, 이제는 살리든 죽이든 할례가 결정하는 겁니다. 할례언약 속에 양피 잘린 생식기 가진 남자들은 이제는 본인구원이 아니라 할례언약자체를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동원된 연기자들입니다. 저는 이것을 쉽게 식판과 그냥 밥그릇에 밥을 먹는 것으로 예를 들고 싶은데요. 관공서 식당에 보면 식판에 밥을 주잖아요. 아무리 무식한 아프리카 사람이라도 식판의 밥을 먹고 난 뒤에 식판까지 우걱우걱 깨물어 먹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식판은 반납용입니다. 밥 먹고 반납해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할례라는 식판을 제공하고 그리고 그 할례를 도로 반납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식판 없이 집에서 밥그릇가지고 밥을 먹으면 밥그릇은 자기 것이니까 반납할 필요도 없지요. 본래 자기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식판이라는 언약을 내밀 때는 그 자체가 하나님 거예요. 언약도 하나님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거기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도 다시 반납 받으면서 결정을 주께서 내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식판을 가지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니까 식판에 음식이 담겨야 되거든요. 할례가 식판이라면 식판이라는 할례에 어떤 음식이 담기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12장 48절에 보면 나옵니다.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월절 어린양을 먹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되는데 어린양의 양고기라는 것을 판에 담긴 음식이라고 본다면 그 식판역할 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는다는 말은 똑같은 식판을 받은 거예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교사든, 백수든 어린애든 간에 똑같은 식판을 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식판과 어울려야 돼요. 식판과 격이 맞아야 돼요. 우리가 그냥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식판에다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의 생명나무를 받아야 되지 그냥 식판 없이 영생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개인구원이 되고 마는 거예요. 사적구원, 개인적인 구원이 되는 겁니다. 왜 그것을 주께서 거부하는가 하면, “하나님, 내 구원받는데 네가 뭐 하면 됩니까?”라고 행함이 등장하는 것을 차단시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믿음이라면 그것은 행함에 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창세기 17장에 있어서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용병, 종, 심지어 저주받을 이스마엘까지 할례라는 식판을 다 받았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이 사적인, 개인적인 믿음은 거절한다는 뜻이에요. 네 믿음과 내 믿음을 모으는 것이 아니고 네 믿음 내 믿음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주께서 공통적으로 제공하신 믿음, 그것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지심으로 성령을 통해서 주신 그 믿음,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믿음의 내용이 십자가라는 내용, 십자가라는 내용이 식판에 담겨서 다가올 때 그것은 할례의 취지와 연결된 세례가 되는 거예요. 자기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이 하나님이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라고 해서 면도칼로 두피부터 째서 위에서부터 자기피부를 벗기는 식이 아니라 그냥 살면 돼요. 그것도 막살면 돼요. 살다 보면 죽잖아요. 죽는 것이 육적인 허물을 벗는 여정인 겁니다. 어차피 육은 죽어야 되니까. 하나님이 죽어야 될 육을 어디다가 끌어당겼느냐? 할례란 이스라엘 자손을 할례 받게 해서 보자기로 둘러싸고 울타리를 쳤지만 신약의 세례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죽는다는 그것을 예수님의 세례에다 결부시켜 버렸습니다.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은 전부 다 죽어야 된다는 한정된 식판위에 살아가고 있어요. 마귀나 불신자나 공중권세 잡은 권세자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모조리 다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의 언약체제 안에 이미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테두리 쳐져서 포함이 되어 있어요. 인간은 언약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행함과 상관없이 자기를 둘러싼 외부의 환경이 언약적으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그 언약적 환경으로 본인의 하루하루삶이 본인이 확정한 자아가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아로 변모되고 변신되고 있음을 항상 뒤돌아보면서 인정하게 되는 것, 이게 신자입니다. 내 인생은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주님의 식판위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동일한 식판이라도 저주받아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더라도 이스마엘은 지옥가야 됩니다. 지옥 가더라도 이스마엘은 할 말이 없어요. 왜? 할례라는 언약의 식판에 의해서 이스마엘이 있기 때문에. 그 운명의 결정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천국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지옥도 들어 있습니다. 언약대로 지옥 만들고 언약대로 천국 만들었어요. 따라서 언약대로 만들어져 지옥을 채워야 될 사람도 언약으로 만들어지고 언약대로 만들어져서 천국을 채워야 될 사람도 언약대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걸 뒤돌아보면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겁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로마서 4장의 말씀처럼 일체 인간의 행함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행함은 개인적 행함이거든요. 개인이 개인을 살리기 위한, 구원받기 위한 모든 시도라는 말이지요. 성화론도 그렇고 개인이 개인을 살리기 위한 것, “믿습니다.”하는 그것도 그렇고요. “회개합니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헌금, 기도, 예배참석 다 마찬가지고. 전부 다 개인이 하는 행위가 개인한테 구원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시도라는 말이지요. 그게 다 믿음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이 돼요. 그런 사람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내가 옛날에 구원받으려고 얼마나 잘 믿었는데, 자꾸 개인이야기가 나오지요. 이것은 할례의 테두리, 구역 짓는 그 취지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주도적인 노릇을 했던 유대인들입니다. 요한복음 8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죄사함 줬습니다. 간음하다 잡혔든, 살인하다 잡혔든 간에 죄사함의 권한은 새언약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자기 맘 대로에요. 자기선택입니다. 간음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간음이라는 상황 속에서 구원받은 것이지 그 여자가 간통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는 그 상태가 간음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니까 33절에 그들이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라고 이야기해요. 그 뒤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는 죄를 지었다, 가 아니라 죄가 나오는 것을 보니까 너는 처음부터 죄의 노리개고 죄의 하수인이고………, 여기서 죄라고 하는 것은 뒤에 나오는 대로 악마입니다. 너는 처음부터 악마의 앞잡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기에 반대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할례를 행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유대인들은 할례에 멈추고 말았어요. 할례가 마음의 할례에 넘어와서 세례까지 넘어와야 되는데 예수님을 공격하는 유대인들은 할례에서 멈췄어요. 할례에서 세례로 넘어오는 그 과도기, 그 경계선에 있던 자가 누구냐 하면,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라는 말을 처음으로 함으로 말미암아 할례는 무효고 세례로 접어들었다고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누구든지 하늘나라 갈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서 자기 죄를 자복하게 회개하라는 이야기를 그 경계선에서 했거든요. 그러나 세례요한도 물세례밖에 몰랐어요. 성령세례는 몰랐습니다. 물론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장차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준다고 미래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물세례 주는 그 요단강에 풍덩 뛰어드는 동시에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가 내려와서, 아래쪽에서는 물세례 받고 위쪽에서는 성령세례 받았어요. 이것은 예수님 한 분 안에서 물세례로부터 시작한 그 세례의 마감이 성령세례로 마감된다는 것, 세례의 시작과 끝이 예수님의 한 몸으로서 완성을 보인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에게 무엇이 일어나느냐가 구원의 결정이지 내가 예수님한테 뭘 했느냐 한다든지 내가 어떻게 착하냐와 상관이 없는 문제에요. 왜? 우리는 죄의 종이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것도 하나의 보자기로 싸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하고 죄인 되게 하는 보자기가 너풀거리면서 모든 인류에게 덮친 것이 세례요한의 물세례라고 보면 돼요.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거예요. 이미 죽은 인간이 할례를 받든, 헌금을 하든,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든, 십계명을 지키든 구원되지 않아요. 언약은 주님이 홀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약에서 빠져야 돼요. 그냥 언약에 포함된 사람이고 당할 뿐이지요. 우리가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언약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할례를 했으니까, 십일조를 했으니까. 생산물의 십일조를 했잖아요. 주께서 “의와 인과 신은 어떻게 하고? 그게 지킨 것이냐? 의와 인과 신을 빠트렸는데?” 그러나 육에서 나온 것, 육의 정신적인 것, 열심, 궁극적인 것, 이런 것이 한계인데 왜 그게 한계냐? 어쨌든 육이니까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뭔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계라니까요? 내가 뭘 해야 된다는 것 그게 바로 한계에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이 성령세례 받을 때 한 게 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성령이 그냥 임했어요. 찾아오는 것도 사도가 그냥 찾아왔어요. 사도바울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그냥 안수한 거예요. 안수했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그냥 지점만 찍었을 뿐이에요. 그저 시키는 대로. 여호수아가 요단강 건너왔습니다. 요단강 건너왔으니까 약속의 땅으로 쳐들어가면 되는데 아서라 말아라, 여호수아 5장 4절, 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지금 땅을 차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복, 땅을 준다는 그 땅을 널름 챙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의 정복이 아니고 할례언약의 정복이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약속이라는 것,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이 예상하는 나라가 아니에요. 인간이 상상도 못한 나라입니다. 인간이 예상한 나라는 육에서 나온 거예요. 인간의 육에서, 예상해서 나온 천국, 그 자체를 잘라버리는 이것이 할례라는 말이지요. 잘라도 머리에서는 계속 나오잖아요. 그래서 아예 죽여 버리는 거예요. 할례 받았으니 천당 갈 거야, 믿었으니 천당 갈 거야, 이걸 아예 죽여 버리는 겁니다. 내가 뭘 했으니까 나는 뭐가 될 거야, 라는 이 공식, 그 공식 자체가 행함에 속합니다. 죄의 종이라는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언약은 바로 그런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 보니까 이제는 할례뿐만이 아니라 구약에 있는 그 사건조차도 사도요한은 세례로 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다 같은, 다 같은, 모두 다 같은 홍해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적구원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인 행위가 그 행위의 출처가 되는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뭔가 덮쳐야 되는데 십자가라는 것, 십자가의 사죄의 능력이 덮쳐버리면 나만 달랑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동일하게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받은 사람은 세리나 창기나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그런 것과 관계없이 모두 다 한 형제로서 구원받는데 그 결과가 교회라는 겁니다. 한 음료를 마셨고 한 음식을 먹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따라서 세례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오직 한 분에만 집중해서 생각한다는 겁니다. ‘너하고 나하고 누가 기도 오래 하나?’ 그것이 아니고 ‘누가 헌금 많이 하나?’ 그것이 아니라 너나 나나 다 같은 죄인인데 누구 덕분에 구원받는가, 그 누구라는 한분, 그 한분을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한분을 경유하는 그것이 이웃사랑이잖아요. 그게 형제사랑 아닙니까? 흔히 미제물건을 뭐라고 합니까? MADE IN USA라고 하지요. 중국제를 MADE IN CHINA, 한국제는 MADE IN KOREA, 주께서 원하는 것은 MADE IN HEAVEN, 천국에서 만든 것. 어떻게? 할례로, 또는 할례의 완성인 세례로. MADE IN HEAVEN. 천국에서 만드는데 그 천국은 인간들이 예상 못한 전혀 없는 나라였어요. 있지도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것은 다가오시고 찾아오시고 예상 밖에 우리의 정신세계, 육이 있으면 정신도 있거든요, 육과 정신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낯설기 짝이 없는 그 천국이 오게 되면 내가 뭘 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홀로 십자가지시고 그 결과로 나를 구원하시는군요.”라고 오는 겁니다. 그런데 저 구원하러 오는 것을 보니까 아, ‘저’가 뭐로 바뀌는가? ‘우리’로 바뀌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군요.”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우리’가 나오지요.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우리, 너희. 전부 다 우리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언약의 조건이었습니다. 아브라함가정이. 아브라함도 할례 받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이삭한테 미뤄야 돼요.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너하고 언약을 맺지 않고 네 자손 이삭과 언약을 맺겠다는 것. 이삭은 지금 오늘 본문에 주어진 이 시점에서 이삭은 없는 사람입니다. 이삭이라는 자식이 안 태어났어요. 없는 사람과 계약을 맺어서 현재 있는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것처럼 아무도 예상 못한, 아무도 믿지 못할 예수님이 오셔서 어떤 인간도 생각 못한, 상상도 못한 예수님이 오셔서 홀로 십자가 지셔서 예상 못한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복음을 알기를 원합니다. 복음 안다고 하면 자꾸 복음을 내가 내 힘으로 믿으려고 하는 이 모든 헛짓이 다 죄라는 사실을 이제 깨닫게 된 것이 감사합니다. 주어진 환경자체가 믿을 수밖에 없는 환경 자체도 주님의 약속된 언약 속에 포함된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인 것을 저희들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