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창 16장 6-10절(구원의 구조)170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6장 6-10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6:6-10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4절부터 봐야 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여자주인이 자기 종을 통해서, 일종의 씨받이죠,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게 하도록 조치를 해놓죠. 하갈은 종이니까 여주인이 시키는 대로 주인과 동침을 해서 잉태 했습니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다음 말,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원래 예상 시나리오에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자기는 주인의 은총을 받아서 임신이 되었는데 원래 주인은 임신을 못했다. 이성적인 입장에서는, 애 낳아서 주인에게 가져다 바치는 그것이 종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다. 그래서 애 낳아서 주인에게 바치면 되는데 멸시한지라, 멸시감이 나타난다는 것은 사람이 단순히 기계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 단순히 로봇 같은 기계가 아니에요.
기계 아니면 뭐냐? 기계라도 아주 못돼먹은 기계에요. 차라리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으면 좋겠는데 못돼먹은 기계라는 것이 문제에요. 악마는 기계를 손대지 않습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기에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악마는 인간을 앞잡이로 세웠습니다. 인간을 앞잡이로 세웠다는 이 말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옳다’라고 해도, ‘이것은 선한일이야,’라고 하더라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악이 선인줄 알면서도 선이 나타나는 그 현장에 그 선을 완전히 무마시킬 정도의 더 큰 악이 선과 더불어 악이 함께 나와서 악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갈이 주인을 멸시하는 것은 하갈만의 본성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의 본성입니다. 드라마에서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악한 역할도 있고 선한 역할도 있지요.
드라마 볼 때 악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원래 천성이 악한 줄 알고 선한 역할 맡은 사람은 원래 천성이 선한 줄 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러한 느낌이 들지만 촬영이 끝나고 난 뒤에는 똑같아요. 역할이 그래서 그렇지 천성은 어디 가지를 않고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하갈이 임신했다고 자랑질을 하면서 ‘주인이 되었으면 나처럼 임신을 해야지. 임신도 못한 주제에 어딜 주인행세를 해?’라는 식으로 주인을 멸시한다고 해서 여주인 사래가 하갈보다 더 착하다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걸 성경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멸시하니까 사래가 약이 오른 거예요.
그래서 주인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집안의 권력자니까. “내가 이렇게 받을 욕은 당신이 받아야 된다.” 이걸 자기고 세자로 바가지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당신이 남편이면 남편 값을 하라. 당신의 아내가 저 하찮은 여종한테 이렇게 멸시 당하는데 당신이 뻔히 보고만 있나?” 거기다가 하나님까지 거론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나오니까 아브라함이 “당신 맘대로 해. 누가 뭐래?” 이렇게 나온 거예요. 등장인물이 세 명입니다. 하갈, 사래, 아브라함, 이 세 명의 똑같은 종류의, 똑같은 성격의, 똑같은 수준의 세 명의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가정이라는 그 구조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야 될 구조 안에서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각자의 성질을 다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을 평준화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남들 보기에, 누가 보더라도 본인이 다른 백성들보다 훌륭하고 믿음 좋은 선지자로 여겼는데 막상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뒤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중요하지요. 나도 망하는 백성 중에 한 멤버가 된다는 겁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망하는 백성중의 한 일원이라는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렇게 망하게 되는 그것은 나만의 성깔이 아니라 이스라엘전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포괄적으로, 통째로 전부 다 썩고 썩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주변에 포진한 이방민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물어, 물어, 한 것처럼 신앙생활 잘못했을 때 이방민족이 쳐들어와서 학대를 많이 해요. 일제 36년 동안 학대를 하듯이 학대를 한다는 말이지요. 학대를 당할 때는 답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가 죽겠습니다. 출애굽하게 했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구원자 그 레벨이 같은 동네 사람이에요. 깡패고, 놈팡이고, 여자 밝히는 그런 인간도 있고.
그게 뭐냐 하면, 특별한 구원자, 아주 뛰어난 영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점을 주느냐 하면, 인간끼리는 믿음이 좋고 나쁘고 고만고만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럽기는 한결같고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더 낫고 더 못하고가 없어요.
이렇게 하니까 마침 생각나는 걸그룹이 있어요. 크레용팝이라는 걸그룹을 보면 점핑, 앉았다가 일어서는 춤인데 어른들 보기에는 똑같아요. 그 안에 쌍둥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전부 다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다 똑같이 생긴 거예요. 점핑, 올라갔다 내려갔다, 점핑, 점핑, 똑같은 거예요. 그 팀이 다섯 명이죠.
“주님 저 어때요?”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점핑, 올라갔다 내려갔다, 똑같아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게 바로 신자에요. 똑같은데 하나님께서 구원했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 이것은 주님의 기적이 아니면 도저히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갈도 마찬가지고 뭔가 하나 챙기니까 여주인도 멸시하잖아요.
“애 낳아봤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없을 때는 전부 다 공평하고 다 같이 ‘우리는 못난 인간입니다.’ 하는데 뭐 하나, 갑자기 부자 되게 한다든지, 갑자기 교회를 부흥하게 한다든지, 갑자기 인기가 높아진다든지, 그렇게 되면 자기가 뭔가 원래 높아질 가치가 있다는 착각을 해버려요.
저는 혼자서 생각합니다. 만약에 제 설교의 조회 수가 많고, 집회하면 수백 수천 명이 온다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자살할 차례가 아닌가. 큰일 날 뻔 했어요. 이렇게 허전하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원래 이래야 돼요. 탕자가 되어야 구원의 하나님인줄 알아요. 양은 잃어버려야 스스로 구원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교회는 ‘가줄까? 가볼까?’ 그렇게 돼요. 자기 쪽에서. 이번 수련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구약의 제사의 특징이 뭐냐? 자기가 예물 들고 다가가는 거예요. 이스라엘 제사가 그래서 실패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제사는 주님 쪽에서 본인이 예물 다 챙기고, 성전 챙기고, 희생제물 챙겨서 본인이 제사장 되어서 찾아와서 구원되는 겁니다.
왜? 우리 제물은 안 받습니다. 십일조고 뭐고 안 받습니다. 더러워서 안 받아요, 더러워서.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십일조라도 하게 되면 안낸 사람보다 신앙이 우수하다는 그 보람으로 내요. 그것은 주식투자지 그게 무슨 헌금이겠어요. 알아달라는 겁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지만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낮아져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는 겁니다. 높아지는 그 방향이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예수를 안다면 이쪽 방향, 방향이 정반대라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그 방향과 반대방향이에요. 이렇게 한다고 또 스스로 뭘 내려놓고, 기도원에 들어간다든지, 아내는 돈 벌라고 해놓고 자기는 10년 동안 돈도 안 벌고,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정도로 내가 믿음 좋다는 나름대로의 다른 방식의 의 마일리지 쌓기에요.
처음부터 막 살아온 것, 예수 믿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막 살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내가 내 인생 조작한다고 인간될 그런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거예요. 여기서는 똑같은 인간인데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역할이냐 하면, 하갈은 학대받을 권리를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사래가 평소에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사래가 비선실세가 되어서 남편 빽 학대로 대항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을 했어요. 도망을 하니까,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그 다음에 8절에 나오는 호칭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갈아”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너는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너는 독자적인 인생을 꾸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너희들 세 명중 누가 잘 되냐에 관심 없고 누가 구원받는지에 관심 없어요. 세 명이 한 세트가 되어서 인간의 죄가 의가 되는 복의 근원의 구조를 생산해야 될 공장을 만들어야 돼요. 그 구조에 의해서 하갈의 역할은 저주받는 역할을 필히 해줘야 되는 겁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역할. 세 사람이 드라마 주인공인데 한 사람 빠져버리면 드라마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 너는 종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지금 나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중에 창세기 21장에 보면 그 때 나가야 돼요. 지금 나가면 안돼요. 총 연출가 감독이 하나님의 사자기 때문에 그래요. 이 점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성도에게 어떤 큰 중요한 점을 알려주느냐 하면, 사적인, 개인적인 구원은 없어요. 아예 없습니다.
그것은 종교게임이고 친목단체에서 놀이하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을 만드는 장치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를 인도할 때 나 좋으라고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리는 청사진 좋으라고 인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래구조가 틀어지지 않고 원만하게 그 구조가 진행되는데 필요한 하나의 연기자로서 집어넣은 거예요.
예수님 앞에 성도의 역할은 딱 하나에요. 탕자, 아니면 죄인. 탕자나 죄인이나 마찬가지죠.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려죽여도 주님 곁에서 떠나지를 못한다는 이런 즐거움이, 감사가 있어야 돼요. “나 같은 인간에게 주님만이 구원자라는 드라마의 테마, 주제를 보여주는데 있어서 나도 한 역할을 맡기다니 참 감사합니다.”
그 역할이 어떤 역할이냐 하면, “예수를 날마다 핍박하는 역할, 예수님 앞에 죄인으로 찾아가는 역할을 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럴 때 그 구조가 주님의 언약을 이해하고 언약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구조는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천국까지 이어져요. 천국까지 이어져서 “나의 구원은 주님 덕분입니다.” 하고 면류관 던져주고 찬양하는 그 역할이 영원토록 계속되는 겁니다.
그 역할을 살아 생전에 미리 할 의사 없습니까? 천국 가서야 그 생활하려 하지 말고 이 땅에서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역할을 하게 되면 여러분 개인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더불어 그 사람을 엮어서 주님께서는 평가하는 겁니다. “이번 연기 좋았어. 아주 좋았어.” “저는 십자가 앞에 죄인입니다.” “어, 그거야!” “제가 두 사람이나 전도했는데 전도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거야!”
모든 행위를 통해서, “내가 교회 강대상이 허전해서 꽃꽂이를 했는데 그것을 통해서 죄인인 줄 알았습니다.” “바로 그거야!” “헌금했는데 그 헌금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거야!” 왜? 그럴 때마다 십자가 공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이번에 십자가 수련회에 바빠서 참석 못했습니다.” “바로 그거야!” “이번에는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그 참석한 것이 죄인줄 알았습니다.” “바로 그거야!” 하나하나 모든 것이 내가 어떻게 결정했다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니까 주님의 연관성 속에서, 나는 주님 때문에 움직이고 있었던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저는 하갈의 역할이라고 했지만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이것을 역할로 하지 않고 은유라고, 비유라고 해요. 갈라디아서 4장 22절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지난 주에도 했지만 지난 주에서 더 보충한다면, 23, 24절에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세팅된 구조 안에서는 사람이라는 명목은 빠지고 네가 있는 그 위치에 따라서 그 위치를 보여주는, 하나님이 설정하고 할당시킨 그 위치를 보여주는 하나의 역할, 또는 밖으로 나올 때는 하나의 은유가 되는 겁니다. 은유가 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 세사람은 주님의 복의 근원, 복을 생산하는 구조에 대해서 이들은 세 사람 다 감금당한 사람입니다.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갇혀 있을 경우에는 어떤 현상이 이어지느냐 하면, 세 사람 사이에 서로 1, 2, 3, 1은 2, 2는 3, 3은 1, 그 세사람 사이에 유관되는 그 관계가 감금시킨 환경과 배경에 따라서 같이 연동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본인이 결정해서 하나님이 구성해 놓은 그 복의 근원의 원천이 흔들린다는 것은 없어요.
이걸 가지고 행함으로 구원되는 길은 없습니다. 내가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감금시키는 빡빡한 그 환경의 모든 상황이 나로 하여금 흔들리게 만들고, 움직이게 만들고, 거기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만드는 겁니다. 서로가 하나님의 구조 안에 감금되어 있는 이 세사람 속에서……, 더 쉽게 이야기하면, 공이 겨우 세 개 들어가는 박스에 공을 세게 넣어 놓고 밖에서 밀폐시키고 흔들어버리면 구슬이 위 아래로 마구 섞이면서 흔들리잖아요.
그렇게 흔들리게 하는 거예요. 개인 공 하나하나의 운명과 팔자라 하는 것은 본인이 정하지 않는다는 그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렇게 흔들리면서 뭘 드러내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구조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축복은 무엇이며 저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갈같은 경우에는 학대를 받아서 도망을 갑니다. 도망간 이유가 뭐냐? 살기 위해서 도망가지요. 8절에 보면, “사래의 여종 하갈아.” 사래의 여종이라는 것은 종으로서, 모든 지옥갈 사람의 조상으로서 역할을 다 해야 되는 겁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갈에게 낳은 자식이 하갈의 자식이 아니고 어떤 요소가 그 안에 담겨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요소가 담겨 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요소,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했느냐? 창세기 13장 16절에 보면,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진다는 거예요. 남자가 혼자 아기 못 낳잖아요. 자손이 티끌같이 많아지려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배태해야 될, 잉태해야 될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 그 역할을 이스마엘이 해야 되는 겁니다. 어떻게? 땅의 티끌같이. 땅에다 티끌을 깔아버리는 거예요.
땅에 티끌을 까는데 그게 아브라함의 혈육적인 숫자로 아브라함에게 준 복, 다시 말해서 네 자손이 많아지는 것, 자손을 땅에 깔게 되면 그걸로 그 요소가 다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갈이라는 본 주인에게 저주받아 합당한, 기껏해야 여종에 불과하다는 요소까지 티끌같이 많은 자손 속에 페인트칠을 해버려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세상 대부분 사람들이……,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는 것은 성령받은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합니다. 성령받은 사람 빼놓고 대부분 사람들이 죽는 이유도 모르고 살고자 하는 거예요. “나이 많으면 죽겠지.” 아니에요. 복에서 배제되어서 죽어요. 모든 인간은 아브라함의 요소가 들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지만 저주의 근원도 되는 거예요.
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기 못낳는 사래가 있고, 저주의 근원되기 위해서 아기 못낳는 하갈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비유라고 해놓고 그 비유의 실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뭐냐?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잉태치 못한자가 누구냐 하면, 사래에요. 잉태치 못했다는 것이 그 환경이 뭐냐? 복의 구조안에 공이 세 개 들어 있잖아요. 한 공이 잉태치 못한 자라면 그 옆에 있는 공은 무슨 공이냐 하면, 잉태한 여자에요. 잉태한 여자가 아브라함 요소 때문에 땅에 티끌, 먼지 깔리듯이 쫙 깔려버리는 겁니다.
그게 대세지요. 쭉 깔아놓고 다들 잉태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예상밖에 놀라운 사건을 벌입니다. 잉태치 못한 자가 진정 최종적으로 영원히 천국가는 천국의 백성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땅에 깔아놓은 것은 잉태하는 자들의 집합이 땅에 깔리는 겁니다. 그러면 땅은 무슨 세계냐? 잉태한 자의 세계에요.
그러면 천국가는 사람은 잉태하는 자는 가지 못하고 잉태하지 못한자가 천국간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되어 있어요.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데 땅에 있는 사래는 은유가 되지요. 사래가 아기를 낳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을 통해서 약속의 자손이 태어나는 겁니다.
시초는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는 우리고. 우리라는 말속에 정말 우리가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하여튼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나듯이 우리도 성령을 통해서 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고향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필히 우리의 고향 따라 하늘로 가게 됩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목사님, 듣기는 좋은데 구라지요?”
복음 이야기하면 꼭 그 이야기가 나와요. “그거 구라지요? 거짓말이지요? 나는 그 말이 좋아는 보이지만 믿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믿는 것은 뭐예요? 땅에 이상적인 교회 만들기에요. 사랑실천하는 교회. 그래야 돼요. 그래야 저주받은 티를 내기 때문에. 그게 하갈의 후손들이거든요.
하갈의 후손들은 죽는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 살아야 되고, 살면서 그냥 살면 안돼요. 행복하게 살아야 되고 그 행복은 뭐냐? 남들이 나를 잘났다고 해야 되고, 사랑많다고 하고, 남들이 인정해줄 때 그것 때문에 교회라는 것을 만들고, 교회를 찾아가게 되어 있고, 교회 가서 큰 소리 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보다 많이 안다고.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세계에요. 예수님의 재림은 이겁니다. 내가 옛날에 이땅에 온것처럼 그렇게 초라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구름타고 올라갔다는 말은 내가 영광스럽게 다시 내려온다는 거거든요. 옛날 하찮은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죄의 종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에요. 심판주의 모습으로 와요.
무엇을 심판할까요? 사람에게 버림받은 그분을 하나님께서 심판주로 세웠다는 말은 무엇에 대해서 심판하겠습니다. 사람에게 피고의 역할을 해서 버림받은 그분을 피고자가 아니고 판사로 세워서 그 판사가 다시 온다면, 그 판사가 재판할 대상은 방향이 거꾸로 아닙니까? “누가 나보고 죄인이라고 했어?” 자기를 떠민 모든 사람에게 저주할 것이고 그리고 심판할 겁니다.
그 전체가 갖추어지는 것이거든요. 그 전체가 갖추어지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는 두명의 여자가 필요했던 거예요. 하나는 종의 여자, 율법의 종, 저주의 종, 저주받을 여자가 필요했고 영원히 축복받는 천국의 백성은 어떻게 가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축복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 여자는 이 땅에서는 잉태치 못해요.
이 말은 이 땅의 인간적인 생식능력으로 사람이 되었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라고 일체 간주하지 말라는 당부를 이 시간에 우리보고 하는 겁니다. “집안이 어떻게 되십니까?” “경주이씨 집안입니다.” “저주받은 집안, 그것도 자랑이라고 합니까?” 이 땅에는 육신이 있는 한 반드시 우리의 씨족이 있어요. 조상이 있고.
그래서 어떤 인간도 잉태해서 태어나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구원될 자격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의 육으로 태어나지 않는 분이 와야 돼요. 성령에 의해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해서 인간의 몸을 빌려서 오신 분이 있어야 돼요. 그 분이 와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게 되면 그 사람은 육과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이쯤 해서 또 한마디 하겠습니다. “목사님, 참 멋진 이야기인데 그거 구라지요?” 본인들이 안믿어지니까 경상도 말로 “진짜인교? 진짜입니까?” 빈무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다 무덤이 있는데 예수님도 그렇고 그런 인간중 하나인줄 알았어요. 무덤에 묻었어요. 그런데 사흘뒤에 가 보니까 무덤은 비어있고 거기에 어떤 아저씨가 다리꼬고 앉아 있어요.
“너 누구 찾는데?” “주님 찾습니다.”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난다고 이야기했잖아.” “거짓말인줄 알았습니다.” 어떤 인간도 이것을 진심으로 들은 인간이 단 한명도 없어요. 왜? 우리는 탕자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새로운 영이 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절대로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영이 임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이 경로,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구조를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그 구조 통째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하갈과 그리고 사래와 아브라함, 셋다 우리하고 똑같은 그렇고 그런 혈육에 속한 보통인간, 죄인일 뿐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역할을 하는데 하나는 잉태하는 역할, 또 하나는 잉태치 못하는 역할, 그렇게 함으로서 그 공 세 개 사이에 인간이 더러운 본성이 다 나오게 했습니다.
아들 낳았다고 주인보고 자랑질 하는 것도 문제고, 남편과 동침하라고 자기가 시켜놓고 자식자랑좀 한다고 그것이 꼴보기 싫다고 남편에게 일러서 “나가!” 하고 쫓아내는 그 본 주인도 못되게 이를데 없어요. 그렇게 내보내면 굶어죽으라는 말입니까? 어떻게 살라고요? 그것도 못됐고요. 그 두 여자의 질투싸움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아브라함도 아무 대책이 없고.
결국 무능한 세 사람 모아놓았는데 그 그림은 누가 연출했는가? 여호와의 사자가 연출했던 겁니다. 제 4의 외부인물이 침투해서 이런 복의 구조의 롤모델을 이렇게 성사시킨 겁니다. 사래가 구원받는데 전혀 한 것이 없고요 아브라함이 자기 구원받는데 전혀 한 것이 없어요. 다만 그렇게 색깔 다른 공 세 개를 서로 묶어 놓은 거예요.
이처럼 이 구조가 지금도 원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련회 9번째 강의에 그게 나옵니다만, 예수 믿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이 바르게 살아야 된다,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해야 된다, 거짓말 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죽 골로새서 뒷부분에 나와 있거든요.
많이 나와 있는 그것,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이제는 그것을 지켜서 주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된다고 되어 있는데 실상 그 해석은 딱 하나만 필요한 거예요. 네가 살기 위해서 그것을 지키는가, 죽기 위해서 그것을 지키는가? 내가 살 자격도 없다는 입장에서 살아가면 저절로 그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고 내가 이 말씀 지켜서 더 살아보겠다는 마음가지면 네가 아무리 성경말씀에 근접할 정도로 완벽하게 지킨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탄이, 악마가 시킨 겁니다.
종은 상전에게 이렇게 해야 되고, 남편은 아내한테 이렇게 해야 되고, 부모는 자식에게 이렇게 해야 되고, 그 모든 저변, 베이스에는 네가 죽어 마땅함을 밑에 깔고 봐야 돼요. 이거 지켜서 복받고 더 오래 살아야지, 부자 되어서 살아야지, 사는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앞의 1장, 2장, 3장의 십자가의 피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전혀 주님의 일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수 믿고 더 살아보세, 가 아니라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를 알면 돼요. 우리가 죽어야 될 이유. 죄 값으로 죽는데 그 죄 값이라 하는 것은 윤리적 죄가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고 내일 죽거나 모레 죽더라도 우리는 어차피 죽을 마당에 주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주의 백성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자꾸 교회 열심 내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수상한 구석들이 많아요. ‘살기 빡빡한데 주님의 행운을 얻어서 또 사는 수가 나오지 않겠는가. 피할 길을 주시겠지.’ 피할 길을 왜 받아야 되는데요? 그래서 그랬어요. 아홉 번째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다고요. 종이 상전에게 또 상전이 종에게 어떻게 하라는 대목에서.
내가 만약에 한국의 지도자가 된다면 이 나라의 정규직을 다 없애고 비정규직을 만들겠다고. 이유가 뭐냐? 사장은 도둑놈이 되고 노동자는 천사가 되어 있으니까 그게 문제란 말이에요. 돈 관계로서 둘 다 도둑놈으로 만나놓고 “사장님은 나빠요.” 너는 안나쁜가, 너는? 그래놓고 제가 물었지요. 사장은 돈 있어서 사는데 그러면 노동자는 뭐 먹고 사는가?
누가 살래요? 예수님은 서른세 살에 죽었는데. 가장 문제가 뭐냐 하면, 내가 사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도와주느냐, 이게 바로 교회가 점집 되는 거예요. 주님은 왔다 그냥 갔어요. 우리도 그냥 왔다 가면 돼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거든요. 땅에서 왜 얼쩡거립니까? 모든 문제와 불만이 내가 살고 싶다는 것을 감추고 시작하는 거예요.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 가치가 있어.’ 이걸 감추고 자꾸 “대통령이 나쁘고, 뭐가 나쁘고…….” 세월호에서 애가 빠져죽는 동안 뭐 했냐고 하고. 그 밑바닥에 뭐냐? 원래 죽게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고마운 줄 알아라! 왜 살아야 되는데? 살 이유 있어요? 근거 있습니까? 복음도 모르면서 교회 오고, 주께서 더 살려줄 줄 알고 착각하고 오는 거예요.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점치는 곳이에요. 기도하면 더 살려 줄줄 알고. 철야하면서 “주여, 내일은 죽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가 어디 있어요?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탐심은 우상숭배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십계명에서 탐심이라 하는 것은 열 번째 계명이지요. 우상숭배는 첫 번째 계명이에요. 그 열 가지 계명이 안에서 다 내통되어 있습니다.
그 내통된 것이 주님한테는 두 계명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고 로마서 13장에서는 계명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수련회 8강, 9강에 다 나옵니다. 1계명과 10계명이 서로 휘어져서 만난다는 거예요. “탐심이 우상숭배니라.”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탐심덩어리로 태어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탕자고 이 탕자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사람, 이게 바로 사래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에요. 글쎄 그 성도 역할을 하는 쪽에 속했으면 여러분은 평생 여한이 없고 받을 것 다 받아 챙겼으니까 늘 감사하면서 다 같이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피조물 자체를 위해서 창조주가 계신 것이 아니고 창조주의 계획을 위해서 피조물이 만들어졌다는 이 간단한 논리마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거부하고 반항합니까? 그런 탕자가 된 입장, 죄인 입장에서 이제는 그걸 마다않고 찾아오셔서 진짜 계획을 심어주신 주님께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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