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여종하갈(창16;1-4) 17010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15. 14:09
2017-01-04 20:44:59조회 : 137         
   여종 하갈 17010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여종 하갈 (창세기 16: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febwydLTfc, Hit:10
 이근호17-01-04 21:25 
여종 하갈 

2017년 1월 4일                          본문 말씀: 창세기 16:1-4 

(16: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6: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 년 후이었더라 

(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수시로 나타나신 것으로 보지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10년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실행작업에서도 주도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누구나 구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행작업에서 인간의 주체성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대해서 어느 인간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변화나 변환에 대해서 자기 외부에서 찾아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본인 자체의 변환에 대해서는 미리 수긍할 준비가 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인이 어제나 오늘이나 늘 한결같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의식의 주인공인 본인은 달라질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달라지지 않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말씀에 대처하고 그 결과를 예상하는데 오류가 발생하는 겁니다. 창세기 15:3-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즉 하나님께서 바로 이삭을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아브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내세운 그 말씀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그 ‘말씀 성취’의 혜택을 입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곡해하는 본성을 지녔다는데 있습니다. 

인간들은 당연히 자신의 소중함과 건전함에 준해서 복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런 내용으로 생각을 억지로 먹지 않더라도 타고 난 성향이 이러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그 예언의 말씀을 아브람의 개인적 구원과 혜택으로 엮어서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인간은 거기에 맞게 순종하므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낳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협력이 가능한 관계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만큼 평소에 인간들은 자신에 대해서 늘 좋게 보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10년 째 아브람 가정에 잉태의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다리다가 아브람 부부가 결론은 이러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되 그 말씀을 알아듣고 실천의 옮길 몫은 바로 자신들이다 는 겁니다. 사래는 잉태치 못하는 본인 대신 임신이 가능한 몸을 가진 하갈을 남편과 동침하도록 의논을 하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방식을 들고 나온 겁니다. 

그만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아브람 가정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본인들이 어떤 식으로 관여함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 가정이 하갈을 통해서 자식 낳기를 유도하신 것입니다. 왜 그래야하느냐 하며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는 본질마저 들추어내는 과정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받겠다고 뭔가 시도하면서도 의도를 나타내는 바,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은 결코 구원될 자가 원천적으로 아님의 증표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에 부응하겠다고 성의 있는 태도가 계기가 되어 인간이 평소에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담겨있는 그 본질을 보여주게 됩니다. 기도, 헌금, 전도, 예배가 저주의 변종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외부에서 하갈이 투입되었다는 것은 곧 그 ‘하갈적 요소’가 근본적으로 아브람과 사래의 중심적 삶의 의미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바가 곧 그 사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약속을 나름대로 지켜서 하나님이 말씀을 현실화하겠다고 나서는 그 와중에서 결국 아브라함과 헤어질 속성인 ‘하갈적 속성’과 요청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람 가정을 하갈을 필요로 했다는 말은 본인들이 평소에 하갈적 의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은 아브람의 근원을 파헤치는 작업을 유발하게 됩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일같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 원리를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주가 부지런히 작동되는 원리로 최종 확정지으십니다. 갈라디아서 4:21-26에 보면,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보편적인 우주적 원리 안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개인적인 역량을 과시하는 것이 자기를 구원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이미 ‘저주 아래’ 있는 자이며, 이런 현상은 인간들이 ‘육’이라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즉 이 지상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상황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구원을 요구할 권리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씀에 의하면 마땅히 줄곧 저주아래 있어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상황 맞다 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 가정으로 하여금 구원될 수 없는 가정인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를 아브람 가정이 스스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처해서 율법 아래, 저주 아래 있음을 보이는 행동을 취한 겁니다.  

어차피 아브람과 헤어져야 하는 그 하갈적 요소가 하나님의 유도함에 의해서 아브람 가정에 투입되어야 아브람 본질이 드러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 구원욕구를 들어주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하늘의 약속에 의한 조치가 주어지지 않는 한 그 어떤 인간도 ‘하늘에 속한 인물’이 못됨을 ‘저주의 십자가’로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따라서 참으로 성도라면 매일같이 하갈적 요소가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서 외부로 방출되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될 필요도 없는 자가 하나님의 자의에 의해서만 구원됨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1-05 19:55 
69강-창 16장 1-4절(여종하갈)170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6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6:1-4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어진 관계가 한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살아생전에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두 번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전 인생, 평생을 복의 근원,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의 근원이 되겠지요,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 되는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인생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것이, 그 원리가 계속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과 저주의 기준점은 뭐냐? 기준점이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지식으로 하나 더 습득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브라함이라고 해서 지식 하나 습득하면 되는 그것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기본이지요. 

  

하지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살겠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약간 힌트만 주고 나머지 신앙은 본인이 한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아브라함 전 인생을 자신의 약속대로, 예언대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는가? 신앙생활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친히 만드십니다. 만드는 기준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하면 말씀에 의해서,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아브라함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또 다른 말로 하면 복의 기준과 저주의 기준을 계속 드러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와 비성도를 관리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하나님께서 역시 또 아브라함 인생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관여하는데 직접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라는 그런 대목은 없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지시는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던 아브라함의 가정의 부부사이에 대화하는 내용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를 할 수 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미 15장 3절, 4절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먼저 시동을 건 거예요. “네 몸에서 나온 그 자식을 하나님께서 너의 상속자로 준다. 그리고 그 상속자라는 것은 네 집안의 상속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던져준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물이다.” 

  

이렇게 하나님 쪽에서 먼저 언질을 줬다는 말이지요.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참 힘들고, 난해하고, 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는 겁니다. 이걸 요즘 말로 고치면 성경말씀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아침 6시 반만 되면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날 일을 지시하니라.” 그 다음날 6시 반에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꿈에 지시하니라.” 그 다음 날 또 6시 29분이 지나 30분이 딱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렇게 매일 숙제를 주듯이 말씀을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냥 약속을 던져줬어요. 10년 동안 아무 일 없었습니다. 10년 동안이나.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매일 하나님이 짠,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 사람들이 조급증이 있어서 ‘나도 옛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나타나서 약속해주면 좋겠다.’ 하는데 약속해놓고 10년 동안 안 나타나는 그게 좋습니까, 매일같이 성경 보는 것이 좋습니까? 어느 것이 확실합니까? 우리는 성경 보면 되잖아요. 

  

매일같이 이사야 보고, 고린도후서 보고, 요한계시록 보고, 창세기 보고 늘 보잖아요. 성령에 의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졌어요. 그러나 신약시대에서는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모든 우주 자체가 완료된 말씀에 의해서 완료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말씀과 연관되게 되어 있어요. 말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과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새벽 2시 46분에 잠을 깼는데 그 때 주께서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하는데 왜 나타나야 되는데요? 자기가 아브라함도 아니고. 옛날로 다시 돌아갈까요? 눈이 없습니까, 안경이 없습니까? 보면 된다 이 말이지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 얼마나 말씀이 가까이 있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게 12월 30일까지만 유효하고 31일은 관계 안 되는 것이 아니고 1월 3일도, 4일도 역시 성경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또 내일이 되어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모레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그 다음날 되어도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세상과 짝하면 간음함이라.” 이게 성경에 다 나오잖아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말씀이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진짜 말씀 속에서 익사할 판입니다. 말씀이 너무 많아서 계시에 파묻혀 죽을 판이에요. 베개에 ‘계시’라고 써가지고 잠자고 있는데 코 한번 눌러 볼까요?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베개로 누르면서 “이게 계시다.” 하는 것처럼 숨도 못쉬게 할 정도로 모든 것, 좌로나 우로나 걸리고 부딪히는 모든 것이 말씀에 의해서 벌어진 상황을 늘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부딪힌 상황 속에서 ‘아, 이 말씀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고, 이 말씀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는 겁니다. 지난 가락교회 동영상설교에서 언급했거든요. 사람이 사는 이유가 뭐냐, 라고 물으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게 사는 의미냐? 사고팔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그게 우리가 보통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보통의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 언급이 되어 있어요. 열심히 운전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말씀이라는 그 밀폐된 공간 안에서, 천장부터 바닥까지 다 도배가 된 말씀의 공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운전하고, 뛰어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거 하면서 살잖아요. 

  

그런데 어디에도 말씀의 범위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그 동영상설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게 의미냐는 말이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의미가 전부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게 전부냐 그 말입니다. 문제는 인자의 오심을 놓쳐버리면 먹고 마시는 그런 것이 아무 소용이 없고 의미가 없는 것이 돼요. 헛되고 헛된 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말씀 안 들었다, 말씀 모른다, 계시 안 받았다, 그런 소리 하면 안돼요. 제가 생각해도 인류역사에 제일 웃기는 코미디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지옥가고 있으면서도 큰소리치는 것. 그것보다 더 웃기는 코미디가 없어요. 멸망의 길로 가면서 큰 소리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엄마 최순실이다.” 이렇게 큰소리치는 거예요. 지옥가고 있으면서. 

  

그저 눈앞에 먹고 마시는 것이 보이고, 그 먹고 마시는 것을 포함해서 그 결과가 뭐냐? 결국 저주고 심판으로 가고 있잖아요. 왜 먹고 마시는 그것만 보고 그런 상태로 심판으로 끌려간다는 히브리서 9장의 말씀은 성경 안에 담겨 있는데 왜 그걸 모르고 “계시를 주옵소서. 주께서 나타나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주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나타나는 거예요. “뭘 줄꼬?” 다 줬는데 뭘 줘요. 뭘 줄꼬, 하고 나타나면 가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다 줬는데 또 뭘 줘요. 만약에 뭘 더 줄꼬, 한다면 요한계시록에 더 보태야 돼요. “지난 새벽 3시 반에 주께서 나타나서 이런 말씀을 주셨다. 나도 성경 따로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Ⅱ, 사도행전 29장, 30장 만들어서 받은 계시 집어넣어야 됩니다. 

  

그래서 간증집회라는 것이 그렇게 위험스러운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줄 때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말씀 주셨으니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말씀을 주게 되면 지켜야 되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네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일이 왜 안 일어나는가, 왜 그럴 리가 없는지가 말씀을 줌으로서 일어나는 거예요. 

  

10년동안 기다리면서 기껏 한 것이 뭐냐? “여보! 아직도 임신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몸에서 난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은 하셨고 그 실천은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행함과 결부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자.”라고 사래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요청을 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사래가 믿음이 있니 없니, 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을 주신 목적이요, 말씀에 순종해서 구원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말씀 성취는 주님이 알아서 하는데 주께서는 말씀을 줘놓고 참고 참다가 “에이 못 참겠다.” 해서 우리 쪽에서 성의 있는 순종과 행함으로서 “그래, 우리 쪽에서 실천에 옮기자.”라는 타이밍, 그 때까지 계속 주께서 팔짱 끼고 쳐다보는 거예요. 

  

참다 참다 “에이, 더는 못 참겠다.” 하고 너의 행함이 튀어나오는지를. 튀어나올 때 그게 뭐냐 하면, 빠져나가야 될 것, 결국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빠져나가야 될 그 요소가 외부에서 투입되는데 그 투입된 인물이 하갈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니고 아브람 속에, 사라가 아니고 사래 속에 하갈요소가 있었던 겁니다. 

  

하갈은 아브람과 사래 안에 이미 공존해 있었던 거예요. 들어 있으니까 아브람 자기 남편을 하갈과 동침하게 해서 이스마엘을 낳도록 하는 거예요. 주께서는 자기본색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기다린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던져놓고 그 약속에 대해서 인간들의 반응을 보는 겁니다. 

  

인간들의 반응을 본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금 내 모습이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본인은 절대로 구원 안 되거든요. 구원될 수가 없어요. 구원이 안 되면 왜 구원이 안 되는지, 내가 예수 믿고, 내가 하나님 믿고 왜 구원이 안 되는지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본색을 드러낼 때 그 본질이 드러나게 돼요. 

  

우리 속에 하갈적요소가 있으니까 그 하갈적요소는 천국에 못갑니다. 아니 말을 바꿔야 돼요. 하갈 빼고 천국 보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하갈,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빼면 되지 않는가? 절대로 빠지지 않아요. 언제 빠지는가? 우리가 착각해서 주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나설 그 때 빠져요. 

  

이런 이야기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있을 때 하나님은 ‘당신’(2인칭)이 되고 우리는 ‘나’(1인칭)가 되거든요. 이 나가 하나님덕분에 하나님 나라에 가겠다는 시도를 이 내(I)가, 또는 MOI, 이 주체가 하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것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도 않았어요.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하지 않는데 뭐가 문제냐 하면, 구원될 수도 없는 존재가 자꾸 시도 때도 없이 구원받고자 시도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뭔가 괴물이 꿈틀거리고 있는 겁니다. ‘나는 고생해서는 안될 존재야. 나는 고생이 심하면 안돼. 나는 마땅히 행복해야 돼.’ 이게 꿈틀거리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왜 옵니까? 행복 찾아 오잖아요. 이 땅에서 행복하고 죽어서도 행복하고. 자기 잘되기 위해서 오잖아요. 

  

그런 인간들의 모습이 구원될 수 없는 모습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약속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사람의 기본은 “당신의 직업이 뭡니까? 당신의 재산이 얼마입니까?”가 아니에요. 이것은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에요. “지금 당신은 무엇을 원합니까?” 

  

뭘 원하느냐 하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자발적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날이 있어요. 그게 12월 31일과 1월 1일입니다. 해 떴다. 그리고 정월대보름날 달이 떴을 때 자발적으로, 누가 묻지도 않아도 자발적으로 빌어요. “그저 올해 우리 집 장사 잘되게 해주시고, 온 가족 건강하게 해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것이 우리의 원하는 바라면, 우리가 원하는 바가 풍성하게 꽉 들어차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 어떤 말씀을 해봤자 우리는 마중을 나가면서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말씀을 차용할 수밖에 없는 본질이 우리본질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원하는 나라는요. 그게 마귀의 나라이지 하나님나라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나라를 채울 수 있는 인간은 어떤 것이냐? 인간이 원하는 나라는 천국가지 못하고, 저주받고, 지옥 간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아야 돼요. 내가 원하는 나라는 천국이 아니고 그것이 결국 실상은 지옥이라는 사실. 

  

왜냐하면 나는 죽어도 나에 대한 행복과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못할 존재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지옥갈 인간인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네가 복을 받는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뭔가 하나님의 조치가 일어나야 돼요.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하면, 외부에서 투입했다가 빼버리는 겁니다. 외부에서 투입했다가 빼는 것. 



옛날 수도가 있기 전에 촌에는 물펌프가 있었잖아요. 그냥 펌프질 하면 물이 안 나와요. 먼저 개시할 수 있는 물, 마중물을 부으면 신기하게 꿀떡꿀떡 하다가 퍽 하고 나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우리의 본질을 아는 것을 하나의 개시물로 보는 거예요. 하갈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낳게 해서 아브라함가정에 투입을 시켜버립니다. 

  

투입을 시켜버리면 하나님과 함께 있던 아브라함과 사래의 본색이 드러나 버려요. 어렵게 느껴진다면 결론부터 말해서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원치 않는 모습의 메시아를 개시물로, 십자가 지는 모습으로 우리 속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 지켜서, 착하게 살아서 그냥 공중으로 올라가지 않고 어디로 가는가? 십자가의 저주받는 길, 아버지한테 저주받는 길로 가버려요. 

  

여러분, 이 이야기 처음 듣는 것 아니지요? 예수님 가신 길이 저주받는 길이라는 말이지요. 이스마엘이 가는 운명을 쳐다보라는 말이지요. 이스마엘은 저주받아요. 하갈도 마찬가지고요. 저주받아야 될 운명자를 하나님께서 유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유도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해요. 

  

우리는 교회 올 때 나의 자아는 건전하면서 나는 행복해도 마땅하고, 나는 구원받아도 될 정도로 착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줘버려요. 그러면 아브라함하고 똑같아요. ‘이 말씀 지키면 지금보다 더 향상된 나의 자아가 되고 괜찮은 작품이 되어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내놓는 것,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 열심히 해서 내놓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말씀이라는 미끼로 말미암아 내 속에 뭘 원하는지가 그대로 들통 나서 바깥으로 뽑혀나가는 겁니다. 다음에 나오지만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헤어지게 된 그 동기부여를 누가 하느냐? 하나님께서 말씀을 먼저 주시는 겁니다. “네 몸에서 난 아들이 내 약속의 축복의 자녀가 된다.”라고 동기부여를 먼저 하니까, 그 말씀이 들어오니까 아브라함과 사래가 거기에 대해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반응을 나타내지요. 

  

반응을 나타내면서 하는 짓거리가 있어요. 애굽의 여인 하갈, 도망치는 여자라는 뜻인데, 하갈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드디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 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고자, 성의를 표해서, 최선을 다해서 했던 그들 속의 본질을 바깥에 이스마엘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낸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때를 기다린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부터 보게 되면,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여기서 두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두 아들 이야기를 했으면 그 두 아들 중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쁘다고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마땅한데, 그게 우리네 상식인데 두 아들 이야기해놓고 그 뒤의 이야기는 두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두 어미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이삭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고 했어요. 하늘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참 이런 것이 어려워요. 

  

엄마가 하늘에 있거든요.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는 말은 아무리 인간이 용을 써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 하면, 용을 쓰는 내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고, 땅에 있는 그것을 두고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저주 아래’ 있다는 겁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는요, 저주 아래 있어야 돼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원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 아래 있다, 다른 말로 저주아래 있다고 하면 제발 저주 아래 있어라, 저주 아래 있는 주제에 축복을 자꾸 기대하고 원하느냐는 말이지요. 

  

저주 아래 있으면서 축복을 원한다는 말은 그 축복이 저주의 확장형입니다. 축복을 원하고 천국을 원하는 그 자체가 저주의 변종이에요. 그게 저주에요. “여러분, 구원받고 싶으면 구원해드리겠습니다.” 이게 지옥갈 멘트라 그 말입니다. 애가 얇은 이불속에 들어가면 엄마가 뻔히 알지요. 저도 애 키우면서 그런 것을 많이 해봤습니다. 

  

“우리 아가 어디 있나? 없네?” 그러면 이불속의 애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잖아요. 보이는 것은 이불만 보여요. 그런데 이불이 그 안의 어떤 형태와 움직임을 나타내잖아요. 저주라는 이불이 덮였어요. 저주라는 이불이 덮였기 때문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종교라는 저주가 나오는 거예요. 

  

지금 갈라디아서나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새벽 2시 40분에 계시 안받아도 돼요. 이 꽉 차있는 성경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겁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아래 있다는 거예요. 저주 아래 있지 않은 인간은 단 한명도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저주 아래 있지 않은 인간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 사람 어머니가, 모친이 하늘에 있다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사람만이 하늘로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땅에 있는 사람은 하늘로 못가는 것이 당연한 거고.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잉태했거든요.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는데 이스마엘을 출생으로 보십니까? 나는 출생으로 보지 않아요. 출현으로 봐요. 나타남으로 봐요. 저주아래 있는 세계의 속성을 이스마엘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마엘이 어디에 있었는가? 아브라함의 육의 안에 들어 있었어요. 그리고 하갈을 가지고 자기 남편과 동침하라는 것은 사래의 요구사항이었어요. 사래가 원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뭐냐? 저주 속에 있는 인간은 저주만 원해요. 행복이라는 것이 저주에요. 행복을 원하는 것이 저주에요. 

  

1월 1일이나 정월 대보름날 해 돋는 데나 달이 잘 보이는 곳에 가서 비는 것은 “제발 저주받게 하옵소서.” 그걸 비는 거예요. “남산 위에 잘 뛰노는 저주가 임하게 하옵시고 올해 사업이 잘 되는 저주가 있게 하옵시고, 애가 고 3인데 내년에 서울대학 들어가는 저주가 있게 하옵소서.” 그거 빌고 있는 거예요. 

  

그 기도를 누가 들어주는가? 저주의 신, 악마가 들어주는 겁니다. 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게 저주라는 두꺼운 이불 밑에서 마귀가 계속해서 그렇게 이끌어왔거든요. 날씨가 추워야 난로를 피웁니다. 이게 진리 아닙니까? 날씨 추워야 난로 피우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는, 우리가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준 그 후에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에요. 우리로 하여금 늘 십자가 안에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늘 우리에게 감사가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그 예수님이 바로 내 안에 있었다는 거예요. 내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저주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을 죽게 한 그 동기와 원인이 평소에 나는 나라고 했던 그 안에 이미 본질로 중추 핵을 장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누가 대표로 보여주는가? 아브라함가정을 통해서 대표로 보여줍니다. 왜? 믿음의 조상이니까. 믿음의 조상이니까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동질, 똑같아요. 인간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그래야 믿음의 조상이 되니까요. 같은 계열이 되니까. 이화여대 자랑을 하려면 이야기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다 이화여대 출신이 되어야 돼요. 해병대 자랑하려면 둘 다 해병대출신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 곧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 되려면 아브라함 계열에 속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브라함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곧 나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제발 네 속에서 결국에는 빠져나가야 할 것을 주께서 계속 만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 나쁜 피를 뽑았다고 깨끗한 사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 나쁜 피는 계속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생산되기 때문에. 육의 끝은 어디냐? 나의 저주받아야 될 이유의 끝은 어디냐? 계속 나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옥 보내려고 하갈과 동침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천국 백성인 것을, 복의 자손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갈과 동침하게 한 거예요. 

  

하갈과 동침한 그 과정을 누락시켜 버리면 그야말로 아브라함은 지옥 가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내가 구원받을 자라고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데 내가 구원받는다는 자체가 이게 저주받을 일이고 이것이 마귀가 시켰다는 사실은 오직 구원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의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말씀 순종한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은 언젠가 주께서 싫어하는 바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한테 통보하면서 도망치듯이 떠나야 될 거예요. 하갈은 도망치는 여자 아닙니까? 도망치듯이 헤어져야 되고 떨어져 나가야 돼요. 떨어져 나가야 될 것. 우리는 평생 살면서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야 될 것이 무엇인가 계속 말씀을 통해서 떨어져 나가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성취과정입니다. 완성된 모습이고요. 

  

계속해서 떨어져 나가는 것, 그것은 세자로 ‘자기의’입니다. 한 20년 잘난 체 하면 자기의 고갈된다는 것이 없어요. 20년째 잘난 체해도 21년째 2017년도에 또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12월 25일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교만해서 구원받자고. 이번 표어는 ‘교만하자.’ 작년에도 교만했는데 올해는 교만에 박차를 가해야 돼요. 

  

더욱더 교만 합시다. 잘난 체 더 하고. 조금 해놓고 뽐내고. 조금 뭐 해놓고 “주여, 복 주세요.” 쿠폰과 상품을 바꾸는 것처럼 “착하니까 복주세요.” 하고 내놓고. ‘말씀 순종했으니까 이번 주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이런 거요. 이런 일을 하지 말자고요? 천만의 말씀, 이것을 중지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항상 어떤 일을 놔두고는 그 일이 실패로 끝날까봐 조마조마 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딴에는 중요한 일, 뒤돌아보면 하나도 안 중요하지만 뭔가 일이 있을 때는 항상 긴장이 되면서 ‘실패로 끝나면 나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거리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속에서 자아라는 것을 빼버렸습니다. 자아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 없는 인간은 없어요. 그것은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고 자아를 뽑아서 보여줘요. 핀셋으로 뽑아서 보여줘요. “이 괴물 네 안에 들었지롱?” 딱 보여줍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사랑했던 그것, 그 대상, 그게 자아거든요. 

  

심지어 자살까지 하면서도 지키려고 하는 그것, 그게 자아거든요. 내가 목숨 내놓고도 지키려는 그 수상한 그것, 그게 바로 외부에서 주어져야 돼요. 하갈입니다. 외부에서 주어졌다고 하니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기생라합 이야기가 나오지요. 사람들은 기생 라합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기생 라합을 이스라엘이 구원한 것이 아니에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겁니다. 기생 라합이 일종의 하갈적위치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당연히 구원받는 민족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이방인 여자가 자기를 구원할 줄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탐꾼 둘이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이 살려줬습니다. 

  

그 기생 라합이 살려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무사히 빠져나와서 여리고성을 칠 수 있었지요. 그러면 여리고성에 있어서 나중에 다 무너지고 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찾아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창문에 달아 내린 붉은 밧줄, 그걸 찾아야 돼요. 그걸 놓쳐버리면 핵심을 놓치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놓은 것, 기생 라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이 정탐꾼을 살린 거예요. 못난 우리를. 우리가 무시한 기생 라합, 이방여인이 우리자신들을 살려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를 대할 때 이처럼 외부에서 ‘나는 착한데 저것은 시시하다.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붙여줍니다. 

  

붙여줌으로서 한껏 교만했고, 한껏 잘난 체하고 자기의가 풍부한 그것, 우리가 무시한 사람이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났으니까 하나님의 의가 높아지겠지요. 그 높아진 것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하면, 자아, 셀프에 붙어 있어요. 그것을 통해서 핀셋으로 또 집어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네 모습이야.” 

  

그러니까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이 상황이, 말씀 전체가 이미 완료되었으니까 매일같이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뭐가 있다는 것은 놀랍게도 주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계속해서 빼내주는 겁니다. 너는 저주받아도 마땅한데 내가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서 너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도록,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에 속한 자에서 성령에 속한 자로,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속했다는 것을 매일같이 확인시키는 방법은 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데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은 잊어버리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설치는 것만, 어떤 업적과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될 사람이라면 날마다 우리 속에서 죄가 나오는 그 현상을 우리가 목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