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강-창 17장 4-8절(아브라함의 의미)170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7장 4-8절입니다. 구약성경 19페이지입니다.
창 17:4-8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데 그 조건은 전에 나왔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 또 다른 말로 하면 저주의 근원이 되는 것, 그렇게 결정되어 있습니다. 복이라는 것만 해당되지 않고 저주가 필히 병행되는 이유는, 하나님께 이 땅에 찾아오는 것은 곧 심판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겁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인이 되었고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끝까지 추궁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냥 에덴동산에서 추방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징벌과 준비된 저주가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본격화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못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끝까지 갈구시고 끝까지 죄에 대해서 심판을 감행하시는 하나님 상으로서 먼저 하나님을 떠올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어느 누구도 면제되거나 피할 길이 없다는 거지요. 그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그냥 독자적으로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한다든지 자기운명을 규정할 수가 없어요. 항상 하나님, 그것도 심판하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냐? 나는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그렇게 조율되어야 되고 그렇게 정리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 상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는데요. 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언약을 앞장세운다 해서 그 하나님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그 언약의 하나님이 이름을 알려주시는데 결국 그 이름 안에 그전에 택한자에게 제공했던 언약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 언약이 완성되는 날 하나님은 그 이름에 합한, 그 이름에 부합되고 일치되는 모습으로 모든 하나님의 일이 마감이 되고 안식에 들어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스케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언약을 가지고 온다는 것, 그 구체적 내용은 그 시대에는 다른 사람은 몰라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축복과, 축복이 있다는 것은 곧 축복이 없는 자는 저주받으니까,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분명히 자기의 택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언약을 맺는데 이름을 왜 바꿔야 되지요?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냥 언약을 맺을 수도 있는데,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왜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기존에 있는 이름,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언약과 동반해서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꼭 바뀌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인간과 언약을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인간세계의 사상과 정신과 마음들과 입장들과는 하나님께서는 애초부터 언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하고 언약을 맺는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인간하고는 언약을 맺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인간이라면 아브라함도 인간인데 왜 인간하고는 언약을 맺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가? 이미 아브람이라는 존재, 오늘 이 말씀을,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있는 그 당사자, 아브람이라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순간에는 없습니다. 아브람밖에 없습니다. 아브람은 존재하고 아브라함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하고 언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여기서 또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계약의 상대자로 시작을 했다면 아브람과는 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해야 자연스러울 것인데 왜 아브람에게 언약, 계약을 맺는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이라는, 아브람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일까요?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실시되는 그 와중에 필히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전쟁은 땅에 대한 전쟁, 땅의 확보에 대한 전쟁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도착했습니다. 하란은 지금의 터키의 동쪽 끝에 있습니다. 하란은 교차로라는 뜻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우르에서 부름 받아서 하란에 왔고 하란에서 24년 만에, 아브라함이 99세 때(17절) 드디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런데 이것과 이름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사람이 자기의 고향을 떠나오게 되면 그 고향에서 부여받은 이름도 함께 같이 떠나면서 날라 가버려요.
고향이란 처음 자기가 출생한 곳입니다. 출생했다는 것은 신체라는 덩어리가 처음 이 세상에 등장한 때에요. 등장하게 되면 그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는 거예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신체라는 덩어리, 몸체라는 덩어리가 있다는 말이고 그 덩어리가 있다는 말은 덩어리에게 이름을 부여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아브라함의 부모가 살고 있는 고향이 엄연히 있다는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것은 과거지요. 하란에 온 것이 75세 때니까 벌써 태어난 지 75년이나 된 어떤 할아버지가 24년이나 있다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하고 언약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언약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언약을 맺는데, 그러면 하나님 두 분이 하늘에서 알아서 언약을 맺으면 되는데 왜 이 지상에 와서 언약을 맺으시는가, 그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정에 필히 들어가야 될 내용이 있습니다. 성취해야 될 내용이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그 범죄는 지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지요. 그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지상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관여를 하게 됩니다.
관여를 하게 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물론 하늘에서도 뱀하고 예수님하고, 악마와 미카엘천사가 전쟁을 해서 악마가 이기지를 못하고 땅으로 쫓겨났지요. 그 땅으로 쫓겨난 것을 끝까지 주님께서는 추적해서 땅까지 내려오는 겁니다.
땅에 내려와서 마귀가 저질러 놓은,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그 선악계명을 따먹게 한 범죄의 현장까지 하나님께서는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깊숙하게 주도적으로 관여해 버려요. 관여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후손, 뱀의 후손이라 하는 것은 곧 사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그리스도고 뱀의 후손은 사탄인데 그 뱀의 후손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인간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은 인간만이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 언약, 하나님의 약속, 스스로에게 내린 약속을 구현하기 위해서 큰 전쟁이 벌어져야 될 현장, 그 구체적인 터로서 역사가 진척이 되고 진행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언약을 이루되 하나님끼리 하늘에서 이루시는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 와서 언약을 이루시는 이유가 뭐냐?
그 언약의 내용 안에 필히 전쟁이라는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전쟁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원수는 하늘에서 전쟁하다가 땅까지 밀려 내려와 버렸어요. 그래서 땅이 지속적이고 연속되는 하나님과의 전쟁터가 되는 겁니다. 그 전쟁터에서 끝까지 갈구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상의 인간 일에 관여하게 된 겁니다.
관여하는 것과 이름을 바꾸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금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라.’ 하는 겁니다. 그 이름은 자기가 태어나서 갈대아우르에서, 현재의 이라크인데 그곳에서 자기의 부모인 데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이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인간이 토지를 자기의 삶의 터전으로 삼고 그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후손들에게 그 땅을 물려주기 위해서 부모가 자식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그들이 어디로 내려갔는가? 창세기 3장 23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근본 된 토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의 입장에서는 제 2의 인생, 가장 인간의 삶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공간, 그게 근본 된 토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의미가 토지와 결부되어서 나오는 거예요. 인간에게 어떤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토지에 대해서 죽자하고 붙들고 대대손손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역할을 가정에서 누가 하는가? 아버지가 하는 거예요. 그걸 가부장제도라 합니다. 아버지가 존귀하면 존귀할수록, 권력이 한 아버지로 모일수록 그 가정은 근본 된 토지에서 살 수 있는 확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겁니다.
아버지의 노동력, 아버지가 권위를 가지고 근본된 토지에서 권위 있게 가정을 관리하고, 통솔하고, 통제하고, 자식을 계속 낳고, 이것이 사람 사는 거잖아요. 옛날 우리 시조에도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라고 하고 마태복음 1장 족보에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항상 아버지가 근본 된 토지를 대대로 유지하고 인간의 나라, 인간의 사회를 지속시킬 책임자로서 아버지의 역할이 그 가정에서 절대적인 겁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이름도 존귀한 아버지,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존귀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마땅히 존귀함을 받아야 되는 아버지. 그 당시 모든 인류사회가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책임자로서의 아버지의 역할이 이름 속에 강력하게 박혀 있는 겁니다. 아버지의 역할이 이름 안에 강력하게 박혀 있다는 것은 인간은 이 토지를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 가진 그 사람과 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것, 언약을 체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인물이 있다는 거거든요. 하나님께서 나하고 언약을 맺지 않으면서도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은 아브람의 이름이 갖고 있는 속내, 그 본질 안에 어떤 역할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반발하고, 대들고, 반항하고, 극렬하게 외면하고, 하나님 일에 반대하는 성깔, 그런 성질을 품고 있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가? 육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단적으로 말해서 곱게 찾아와서 곱게 조용하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고 전쟁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이삭이 있습니다. 그 이삭이 자기의 아내감을 얻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종을 보내게 되고, 그래서 라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삼게 되는데 라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라반이 자기 여동생을 축복하기를, 천만인의 어미가 되고, 네 씨, 이삭과 리브가에서 태어난 자식으로 그 원수의 성문을 연다고 하지요. 원수라는 것, 곧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의 언약에 대드는 원수의 성문을 연다고 합니다.
누이동생이 시집가는데 덕담을 해야 될 자리에서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것은 하나님의 준비된 아브라함의 며느리 속에 이미 언약적인 내막과 요소, 본질이 담겨 있어서 아브라함의 종은 순적히 아브라함의 색시감을 얻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금 축복을 한다면 나에게 축복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 인간사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은 나에게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축복이 성취되는 과정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반대하고, 반박하고, 반항하는 요소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축복, 언약의 완성을 일구어 내시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이라는 사병, 자기 집에서 거느리던 종들을 데리고 전쟁을 했는데 그 전쟁에서 큰 승리를 했어요. 아브라함은 알았어요. ‘내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내리면서 이 언약에 주어지는 약속은 아브람의 계통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고 지금 현재 존재하지 않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언약과 약속이 성취된다는 내용을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있습니다.
현재 내 이름이 아브람인데, 그 아브람, 이 땅 속성을 대변해주는 이름이지요. 가정에서 아버지가 존귀한 여김을 받아야지 누가 가정에서 존귀한 여김을 받겠어요. 아버지가 대표해서 권위를 가지고 대대로 지켜야 될 조상의 토지, 떠나서는 못사는 이 토지, 에덴동산에서 떠났는데 또 이 땅에서도 떠나면 어떻게 삽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추방되었지만 근본 된 그 토지에서 우리의 뿌리와 근본을 일구어내야 될 책임을 지고 있는 인간, 거기서 살면서 우리 이름을 부여받고 부여받은 그 이름대로 이 땅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미래와 영광과 행복한 민족과 국가를 이루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식의 인식을 갖고 있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언약이라고 찾아오면서 그런 인간과는 언약을 맺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을 어디서 맺는가? 하늘에서 맺는가? 아니지요.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찾아오면서 언약자체가 우리 안에 현재 우리를 부정하고, 우리 자신을 거부하고 우리가 아닌 새로운 우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들어 내놓고 그 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그 육신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과 아버지가 언약을 완성시킨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새언약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고, 하나님이 인간이 자는 그 잠을 자고,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까지 내려왔고 낮아졌다는 것은 이 인간세계에서의 전쟁이라는 것이 흔히 인간들이 생각하는 성공과 축복, 출세,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사람들은 자기의 아버지, 고귀한 아버지의 노동력을 투입한 그 땅에서 난 곡식과 열매와 그 생산물을 먹으면서 자기의 기존의 육을 계속 살려나가는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지금 나는 살아있다. 따라서 내일도 살기 위해서 나는 애쓰고 땀 흘리고 노력해야 된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서 부여받은 인간의 본모습이지요.
그런데 그 본모습하고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찾아오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고자 하는 그 목적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하나님의 적의 편, 반대편에 서서 전쟁을 본의 아니게 끊임없이 벌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폭발시킵니다.
로마서 5장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용어가 나오지요. 그러니까 아브람이, 아브람에 있는 성격자체가 아브라함의 계획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언약 받은 당사자 아브람이 기어이 아브람 요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왜? 그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그 방식에 대해서 아주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이 아브람도 나타낼 수밖에 없고, 자기 아내 사래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인간은 그런 일 밖에 못해요. 인간이 기대하는 축복은 벌써 여기 존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우리의 소망대로 잘 되는 것을 축복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언약은 기존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아브람을 없애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을 없애버립니다. 왜? 악마의 통치권이 아브람 속에 강력하게 작렬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5절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아브라함의 취지에 입각해서 아브람을 상대로 모든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라는 뜻은 뭐냐? ‘많은 무리의 아비’에요. ‘열국의 아비’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취지를 살리면서 아브라함의 취지가 담겨 있는 자손들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번성하는 그것이 개개인이라 할지라도, 그 숫자가 하늘의 별같이 많다 할지라도 항상 성격이라는 것은 하나의 성격에 종속됩니다.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 정확하게 말해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옮겨지는 그 과정에 비로소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을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겁니다.
그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성격을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해서 번창해서 애굽의 안정된 나라, 그리고 부강한 나라 속에서 인큐베이터역할, 비닐하우스역할을 해서 숫자가 과다하게 늘어납니다. 그 사람들이 다 혈통적으로는 숱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겠지요.
그들이 4대만에, 400년 만에 약속의 땅, 아브람의 고향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처음 나타난 이곳, 이 고향 이 가나안 땅으로 그들은 오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혈통적으로는 자손이 맞는데,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인데 그들이 진짜 자손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가 그곳에 머물고 있으면서 점점 더 그 안에서 새롭게 계속 추가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에 병행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언약의 자손들이, 혈통과는 다른 언약에 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조금씩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혈통으로 숫자 많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자손, 아브라함자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고 언약의 역사에 의해서 아브라함처럼 아브람은 죽고 아브라함으로 다시 태어나는 언약적작용의 반복의 취지에 따라서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경로를 통하는가? 전쟁입니다. 처음에 전쟁할 때는 이 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애굽 군대와 싸웠지만 광야에서 그들은 모세와 싸워야 했고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 형태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난 뒤에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진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완성은 구약이 아니고 메시아가 오셔서, 예수님이 오셔서 진짜 아브라함 자손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바로 백부장이 그러하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러하고, 간사한 것이 없는 나다나엘이 그러하고 오늘날 성령세례 받은 성도들이 진짜 참 이스라엘,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육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한 사람들이 그 때 성령의 힘에 의해서, 십자가의 용서의 힘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타나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허다한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들고 하늘의 별같이 많은 숫자가 천국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어린양중심으로 경배하는 천국을 이룹니다.
그걸 숫자로 하면 14만 4천. 야곱에게 속한 아브라함의 축복이 천대까지 계속 번창하고 번창해서 마감이 되는 그 숫자를 14만 4천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을 두고 지금 창세기 17장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의 많은 사람의 아비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열국의 아비라 하는 것은 기존의 혈육적인 아브람에게 주어지는 언약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열국들이 있어요. 그 열국들이 많이 등장하게 될 겁니다.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어떤 나라에 있든지 간에 그 나라에 아브라함자손이 포함이 되어 있고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열왕기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이 나타나는데 그 나타나는 취지 하나하나가 창세기 17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취지를 계속 살리는 쪽으로 내용이 포함된 채 이스라엘의 열왕들을 태어나게 합니다.
그것을 ‘다윗의 등불’이라고 하는데 다윗의 등불에 의해서 많은 왕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리고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가나안땅, 지금 이 약속을 받고 있는 아브라함의 땅을 하나님의 새로운 땅으로 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이라는 것은 뭐냐?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 본문의 약속대로 아버지로부터 확보하게 된 새로운 땅, 그 새로운 땅이 아들의 나라요, 천국이요, 그게 영원한 영생의 나라고, 그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전쟁이 있어야 되고 그 전쟁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기존의 육에 속한 이름들, 혈육적인 이름,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과 신체와 거기에 붙어 있는 이름은 새로운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부정당해야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된다는 사실을 오늘 언약 안에서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있지도 않은 새로운 자아를 위해서 주께서 먼저 언약을 알려주심을 감사합니다. 기존에 부모로부터 받은 혈육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 된 몸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언약완성의 몸을 저희들이 부여받는다는 약속을 받았사오니 그 안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하자 없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취지를 지금부터 드러낼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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