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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체결(창15;12-21) 1612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29. 03:13
2016-12-28 20:37:01조회 : 22         
   언약 체결 16122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이근호16-12-28 21:34 
언약 체결 

2016년 12월 28일                  본문 말씀: 창세기 15:12-21 

(15: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15: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아브람은 막연하게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차후에 그에게 어떤 조치가 주어지더라도 그것은 아브람에게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언’을 생각할 때는 그 예언의 출발지, 진원지를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의 개시 지점에서 인간은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되는가를 조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하고 인간은 나서서 거드는 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예언하시지만 그 예언 진행에 있어 아브람은 주도하는 처지에 있지 못하게 하십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예언으로 인하여 아브람에게 맨 처음 벌어진 일은 아브람을 예언의 성취성에서 배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서 따로 뽑아내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람의 자손’입니다. 이 자손의 등장으로 인하여 아브람은 예언 성취에 있어 부수적 역할에 머문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는 곧 아브람이 예상될 수 있는 내용이 이 예언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예언이 이루어지는 환경은 기존 환경이 아니라 예언발생의 효과로 새롭게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빈 공터에 예언으로 인하여 낯선 환경이 새롭게 조성되는 겁니다. 이 새롭게 조성될 환경에 대해서 예언 받은 당사자는 아무 것도 기여할 게 없습니다. 본인을 소외시키는 작업과 병행하면서 예언을 진행시켜 나갑니다. 

따라서 예언의 진원지는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람 손으로 차려지는 제물에 있습니다. 제물이란 곧 ‘죽음’을 뜻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지상에 자신의 예언을 성취하는 모습은 ‘낯선 죽음’을 기점으로 실시합니다. 예언의 시발점이 죽음이라는 말은 곧 예언 내내 그 성격이 유지하게 되고, 그 최종 결말도 낯선 죽음으로 완성이 되는 법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존재들은, 일단 자신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에 그 ‘살아있음’을 어떻게든 지속시키려고 시도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산 자를 위한 성격의 역사와 노선’을 고집하고 예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언의 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예언이 진행되는 내내 하나님의 예언은 ‘낯선 죽음’을 알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언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은 어떻게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띠게 될까요? ‘아브라함 자손’이 지닌 운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브람에게는 그 어떤 자손이 나올 수 없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예언의 성취와 관련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을 바꾸어주십니다.   

이 바뀜을 통해서 참으로 바뀌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비가 자식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식이 아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겁니다. 아브람은 예상 못할 자식의 출현을 불신앙 가운데 맞이해야 하는 겁니다. 즉 ‘믿지 않으므로 믿음이 되게 하시는 작업’이 하나님의 제사에서 나오는 예언이 가능케 하십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세 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그 전인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의 이름은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세 명의 천사와 아브라함 가정과의 대화에서 서로 상반되는 신앙관이 충돌합니다. 이는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야곱과 밤에 찾아온 천사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는 천사의 말을 듣고 웃게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혈육의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던 겁니다. 다 늙은 자기 몸에서 자식이 나온다는 낯선 나그네들의 예언에 대해서 본인은 수긍할 수 없었던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산 사람들의 바탕을 점검해 주시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명제의 성취는
아브람의 결단이나 용기나 결심이나 의지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비웃음 받을 방식으로 성취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의 쪼개짐’으로 유발된 원리가
죄만 덮힌 이 지상에 의(義)를 생산해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음을 보여줄 제사의 제물처럼
누군가 구체적 인격성을 가지고 죽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죽음의 취지를 밝혀줄 배경은 ‘죄의 관영’입니다. ‘죄의 숙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란 ‘하나님의 의’의 본질과 견주어서만 비로소 정체가 드러나는 그런 죄입니다. 이를 경우에만 아브라함은 진정으로 ‘복과 저주의 근원’ 다워집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믿음 내부에 담길 내용을 하나님의 죽음으로 담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된 제물은 하나(1)가 둘(2)로 쪼개지게 되고, 그 쪼개진 둘 사이에서 친히 하나님(횃불)께서 그 본질이 됨을 아브람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멸하시는 불로 나타나십니다. (신 4:24) 이 본질이 지상에서 하시려는 예언의 실내용은 숙정된 죄로 인해 친히 죽으시려는 겁니다.   

이 예언을 하나님께서는 ‘밤’에 알려주십니다. 창세기 1:5에 보면, 빛과 어두움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녁과 낮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새로운 날의 창조를 위해 하나님께서 밤에 출현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작업의 일관성은 후에 창세기 32장 얍복강가에서 야곱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서 알려집니다. 거기서 야곱은 축복을 받게 되는데, ‘야곱으로서 받는 축복’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받는 축복’입니다. 즉 야곱은 기능적으로 이스라엘 이름에 부합된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 이것이 곧 하나님께서 정작 베푸시는 축복입니다. 

특히 출애굽기 12:42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여호와의 밤’의 있음에서 새로운 나라가 나오는데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며 곧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야곱에게 알려진 천사의 집단입니다. 이로서

아브람에게 주어진 예언은
하나님의 전쟁을 위한 기능으로 작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로서 ‘아브람의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친히 예언, 곧 아브라함의 자손의 희생 죽음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로 채워집니다. 

이 사실을 위하여 온 우주가 다 관여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 말고 다른 사실은 하나님께서 더 주신 적이 없습니다. 확정적 진리의 전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흔들림없이 일관성 있게 굳혀진 확정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2-29 21:11 
68강-창 15장 12-21절(언약체결)1612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5장 12-21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5:12-21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본문 초반에 아브라함이 무서워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무서워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그 다음의 하나님의 절차나 조치에 대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입장에서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것은 장래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계획 같은 것을 고집스럽게 내세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라함을 두려움에 꽁꽁 묶어놓았다, 혹은 동결시켰다, 그렇게 되는데 그렇게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주신 이것은, 아브라함을 가지고 다루면서 하나님의 미래계획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펼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보통 예언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예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기 자리에서 예언했기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상당히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좀 더 세밀하게 보게 되면, 그 예언이 나오는 출처가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손을 빌려서 뭔가 설치해놓은 것이 있어요. 

  

그게 지난 시간에 본 9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해서 뭔가 설치한 것이 있는데 그 설치한 것은 제사에 필요한 제물입니다. 제사제물이 우리에게 주는 뉘앙스가 뭐냐 하면, 죽음입니다. 죽어야 될 것, 곧장 죽어야 될 것, 조금 있으면 죽어서 태워져 사라질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제물의 분류항목까지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현재 스스로 생각하기를 살아 있는 것이고, 아브라함의 손에 의해서 장만된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은 곧장 불에 태워져 없어질 구체적인 죽음으로서 죽기 위해 마련된 실체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자기가 살아 있다고 자부하고 아브라함 손에 의해서 마련된 제물은 곧장 죽어야 되고. 

  

죽음과 그리고 살았다고 여기는 생명 가운데 어느 것이 예언의 출처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예언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그 문제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예언이 어디에서 나중에 완성을 보이면서 집결하느냐? 또는 그 예언의 목적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지 까지를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고 그 살아 있다고 여기는 그 노선 말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른 노선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뭐냐? 죽음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은 죽음으로 끝나는 그 죽음의 노선을 따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손을 통해서 장만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서 또는 저주의 근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예언이 진실로 아브라함의 기능의 본질을 차지하고 있지요.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느냐, 아브라함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착한가, 성실한가, 그걸 보지 말고 아브라함 손에서 마련된 그 제물에서 나왔던 그 예언이 앞으로의 모든 인류사의 미래를 이제는 구체화시키는 원천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복받을 사람인지 저주받을 사람인지는, 아브라함을 쳐다볼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제물을 바탕으로, 그것을 토대로 해서 전개되는 그 예언을 과연 믿느냐 하는 겁니다. 그걸 축복하게 되면 복을 받고 그 예언에 대해서 코웃음 치면서 ‘그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지?’라고 외면해 버리면 그것은 저주받는 논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보면서 초점을 아브라함에서 이동시켜야 됩니다. 예언이 아브라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제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제물, 그 상만 차려놓고 자기는 그냥 빠지는가? 아브라함은 빠집니다. 빠지는데 그냥 빠지지 않고 이 제물의 예언대로, 이 제물을 차린 그 취지대로 아브라함에게 조치가 취해집니다.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이 자기 손으로 제단을 만들었지만 그 제단에 차려진 그것이 예언의 출발지이기 때문에 그 제단에 차려진 제물의 취지가 제물을 차린 아브라함의 운명에 관여하게 됩니다. 관여하게 되면 나오는 그 결실이 뭐냐? 오늘 본문에서는 자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아브라함 몸에서 뭘 뽑아내는 겁니다. 자손이라는 것을 뽑아내는 겁니다. 아브라함 몸에서 나온 자손은 어떤 원리와 원칙으로 무장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제물에 담긴 취지로서 무장이 되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9절에 나오는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을 가지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짧은 시간에 설명을 제대로 다 하기가 힘들었지만 이 시간에 다시 해 드리면,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 사이에는 하나의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년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년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이라는 제물 사이의 서열과 등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등급의 차이가 나면서 최상급의 제물과 그 밑의 밑까지 이어지는 제물사이에는 3년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3년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산비둘기와 집비둘기는 새 종류인 하급 제물에 해당됩니다. 이것이 하급이고 그 위인 상급제물은 레위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제물의 등급이 나오는데 그것이 상급인지 하급인지를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느냐? 가난한 사람, 그리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곡식이나 새 종류의 제물을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허술한 제물이라는 것도 되지만 제물을 바치는 그 범위가 넓지를 않아요. 그러나 최상급의 소나 그 밑에 있는 염소, 그리고 수양은 그 아래의 하급제물보다 적용되는 효과의 범위가 굉장히 넓습니다. 민수기 19장에 보면, 암소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전체의 정결법에 암소가 들어가지요. 

  

그리고 사무엘상 6장에 벳세메스로 언약궤가 이동할 때는 비록 블레셋 쪽에서 제공한 제물이지만 암소 두 마리가 일체 인간들의 터치 없이 자율 주행하는 차량처럼 언약궤를 짊어지고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벳세메스로 그대로 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암소를 바치면서 내기를 했지요. “만약에 저 암소가 중간에 노선 이탈 없이 벳세메스로 간다면 그동안 언약궤가 다니면서 우리 블레셋나라에 큰 재앙을 줬는데 그 재앙의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이 블레셋이 믿는 다곤신을 치고 재앙을 내린 것이다.”라는 그것으로 의미를 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를 삼는 이유가 뭐냐? 처음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애굽나라를 쳤던 그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증거로 삼겠다는 겁니다. 비록 블레셋 나라에게 제시된 내기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수용해서 암소를 가지고 벳세메스까지 언약궤는 사람의 어떤 도움도 없이 자율적으로 갔고 벳세메스 사람들은 그 언약궤를 메고 온 암소를 잡아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걸 통해서 볼때에 암소라는 것은 최상등급, 하나님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낸다는 취지를 듬뿍담은 제물입니다. 특히 암컷이니까 이것은 지난시간에 했던 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 하나님만이 관여해서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된 약속실현의 과정을 암소로 우선적으로 표현했고 그 3년의 체인과 연결된 수컷은 주로 희생되는 대상자를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80퍼센트 이상이 암컷 보다 수컷 제물이 들어간다고 지난주에 설명했습니다. 특히 어려운 대목은 3년이라는 기한을 가지고 제물 앞에 제시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제물에서 나왔던 예언의 시작점에서 이 제물이 갖고 있던 취지를 듬뿍 담고 그 뒤에 첫 번째 실행된 예언 성취가 아브라함의 자손 만들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첫 번째 자손이 이삭입니다. 만약 그 이삭을 쪼갠다면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과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새끼라는 제물의 취지가 실제로 이삭을 이삭 되게 만들고 이삭을 이 땅에 등장하게 한 하나님의 의중이 제물로 표현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아브라함은 지금 살아 있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 것은 의미 없어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은 죽음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야 그것이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사는 그 생명이라는 목숨과는 전혀 질이 다른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볼 때 이삭은 그저 사람이지만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가 표현하는 죽음이라는 것, 의미 있는 죽음, 하나님의 예언과 관련된 죽음최초로 사람 자체가 제물이 된 채로 보여줘야 될 임무를 지닌 자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입니다. 

  

그리고 그 이삭에 대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은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 된다는 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 예언의 중추적인 의미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내어주신 그 정신이 실제로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치고 난 뒤에 비로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렇게 이야기하셨거든요. 일단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데 그 믿음이 뭐냐 하는 겁니다. 의롭다 하는 것은 결과고 도대체 아브라함에게 어떤 믿음의 내용이 있었는가? 

  

믿음조차도 아브라함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각오나 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무슨 일이 터져야 돼요. 그의 인생에 무슨 사건이 터져야 돼요. 그 사건이 뭐냐 하면, 살아 있는 자기가 계속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곁에 달라붙어 있는 어떤 죽음의 장치가 자기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은 외부에서 이질적으로 낯설게 달라붙은 사건에 의한 것인데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 이 사건이지요. 그래서 이 제물과 이삭을 연계시키면서 제물이 이삭이라면 아브라함에게 묻지 않고 그 이삭이 일방적으로 제공되었다는 표시가 제물 앞에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제물과 이삭의 출생가운데서 하나님 쪽에서 구체화되어서 3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등장한 그 취지가 뭐냐? 한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나서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고, “명년 이 맘 때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르지만 장차 제물이 될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3이라는 숫자는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모든 일을 실시하고 일방적으로 계획한 조치라는 것을 제물 앞에 3으로 묶어서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 이렇게 하나의 체인을 이루는 겁니다. 암소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한 취지라면 그 시작한 지시가 구체적으로 희생으로 등장하는 것은 수양부터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 그 옆 수풀 속에 있던 수양이 이삭대신 들어가는 거지요. 어쨌든 간에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자기한테는 두려움의 조처입니다. 두렵다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자기가 입안하거나 계획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자기가 자기 장래를 미리 설정해서 미리 예상하지를 않았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오늘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아브라함언약에 있어서 아브라함 본인이 지금 빠지고 있는 겁니다. 빠지면서 그냥 빠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빼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자식이야기, 자손이야기를 하면서 아브라함자손과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체결하기 위한 조치로 지금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아브라함은 실제로는 빠지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이 제물의 취지를 듬뿍 담은 사건들을 통해서 이삭을 낳게 하고 그 이삭이 하나님의 오늘 본문과 같은 체계를 유지시켜 주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본격적으로 오늘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요. 

  

  

아브라함에게 제물을 차리라고 해놓고 아브라함을 두렵게 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 “해 질 때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 나타나셔도 되는데 해질 때에 나타나십니다. 밤입니다. 해질 때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창세기 1장의 그 취지가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 하는 것은 밤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 밤을 하나의 칸막이로 사용해서 새로운 창조를 소개하는 입장입니다. 이 세상이 이미 만들어졌어도 하나님이 관여할 때는 마찬가지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요.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보면, 희한한 용어가 나옵니다.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여호와의 밤을 통해서 그 당시 애굽나라밖에 없었던 데서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는데 그 나라가 출애굽기 12장 41절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의 원천을 찾기 위해서는 창세기 32장을 봐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거기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최초의 인물이 나옵니다.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야곱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아까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사실 누가 봐도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라는 면면이 없어요.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장하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애굽군대가 군대고 정규군이지 이쪽은 그냥 이주민들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군대라고 명칭을 붙이는 것은 이름대로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가 어디서 나왔는가? 창세기 32장 2절에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사람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천사의 떼를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면서도 그냥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파견된 사람들을 매개로 해서, 그걸 중간다리로 사용해서 야곱에게 찾아온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에요. 야곱은 달랑 한 사람이에요. 달랑 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라고 해서 그 군대가 어디서 집결하는가? 야곱이라는 그 신체에 집결해 버립니다. 그러면 야곱의 신체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느냐? 창세기 32장에 보면, 밤에 누굴 만나게 돼요. 

  

밤에 누굴 만나는데 밤에 야곱이 만나는 인물은 해가 뜨면 떠나야 됩니다. 창세기 32장 26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하나님이 얼마든지 낮에도 천사활동 할 수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나옵니다. 그러나 특히 야곱에게는 밤에만 활동하고 낮이 되면 소멸합니다. 

  

24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이 그 때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환도뼈라는 것은 야곱의 생식기관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자식을 낳는데 꼭 필요한 신체부위지요. 이것이 위골되었다는 말입니다.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축복을 해주면 되는데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을 안해주고 야곱의 축복을 거부해버립니다. 야곱이 축복받으면 축복받은 야곱이 돼버려요. 이스라엘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을 위인은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되는 그 자체가 야곱이 받을 축복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야곱에게 마하나임, 야곱과 하늘의 별같이 많은 그 자손을 통해서, 이 지상에 천사적 기능을 전쟁하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통해서 새로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그런 결론을 얻은 관점에서 다시 보셔야 돼요. 1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고 되어 있어요. 4대가 400년이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괴롭도록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자손은 400년 동안 다른 민족에게 괴로움을 당해야 됩니다. 그런데 왜 당해야 되지요? 왜 꼭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됩니까, 성도가, 믿는 사람이. 개인구원론 같으면 그냥 구원받으면 그만인데 왜 힘들게 합니까?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없어요. 야곱의 축복은 없어요. 이스라엘자체가 축복이지요. 

  

하나님의 기능이 있을 때 축복이지 개인이 달랑 천당 가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축복이란 게 어떤 일, 어떤 역할을 해야 돼요. 인간은 살아 있으면 자기 살 궁리만 해요. 하나님은 성도에 대해서 생명의 은인이 아닙니다. 죽음의 은인이에요. 죽음의 은인이란 자기가 아무리 살아도 알지 못하는 낯선 죽음에 합류하게 되고 관여하게 되는 기능이고 그게 축복이에요. 

  

낯선 언약적 죽음에 합류하지 않으면 생명이고 영생이고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죽음을 보여주는 제사의 제물을 왜 손수 차렸겠습니까? 왜 아브라함자손은 4대동안 고생해야 되는가? 그 해답은 16절에 나옵니다.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여기 죄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죄악의 보편적인 나라로 유발시키고 강제로 그렇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 세상이 원래부터 모든 자손들이 죄인데 그냥 죄다, 라고 통보만 하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죄악이 관영하게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일을 추진하시는 겁니다. 

  

그 죄악이 무엇과 만나는가 하면 하나님이 손수 죽으시는 자기 죽음과 만납니다. 손수 죽는 죽음이라는 것이 17절에 나옵니다. “해가 져서” 야곱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해가 져서 하나님이 나타날 타이밍이 되었지요.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불로서 나타났지요. 신명기 4장에도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서 나타나서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제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인격화가 하나가 아니고 둘로 쪼개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둘로 쪼개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진리고, 복음이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확정된 원리입니다. 

  

쪼개진 그 사이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언약이 나오고 하나님의 예언이 나오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는 그 내용이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상에 구체화되면 구체화되기 위한 그 작업으로서 이 세상은 몽땅 다 죄가 관영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 시범조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부터 출발해서, 사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아브라함부터 출발해서 아브라함이 얻지 못하는 새로운 자식을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또 예언에 의해서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원래 이삭의 부인인 리브가는 아이를 못 낳아요. 사래가 아이를 못 낳듯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관여해서, 그들로 하여금 살아 있다는 이름보다도 사실은 하나님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류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죽음을 유발하기 위해서 죄가 점점 더 확장되어야 되고 깊이와 폭, 그 질이 더 악질이어야 됩니다. 

  

그래야 인간의 손에 하나님이 하나의 어린양으로서 살해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했잖아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겁니다. 세상은 이미 확정되었다. 세상진리가 뭐냐가 이미 결정 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복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추진했던 그 결정된 그 사실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된 것, 그것만 확보했다면 이 세상 인생이 어떻게 비틀어지고 꼬여도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환란, 곤고, 핍박, 어떤 바람이 불고 인생이 어떻게 부러지고, 찌그러지고, 꼬이더라도 그것 가지고 불평하고 절망하면 안 됩니다. 

  

왜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고 이 세상을 힘들게 살아갑니까? 그것은 확정된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늘 흔들리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 대전 강의에서 ‘아이스케끼’ 이야기를 했습니다. 옛날 6, 70년대에 먹었던 ‘아이스케끼’ 다 녹아내리면 그 안에 막대기 하나 달랑 남아 있지요. 그 막대기는 다 먹을 때까지는 노출되지 않는 법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그 막대기, 언약의 완성, 예언의 최종점,
그것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그 죽음,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위하여
그동안 이 세상의 모든 새소리, 풀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까지도,
모든 것,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경우들, 사건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했던 죄악의 관영에 참여했던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밖에 없던 그 나라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서 400년동안 숙성시켰습니다. 숙성시키는 것은 잠간 대기하라는 겁니다. 왜 대기시키는가? 19절에,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이 10족속은 가나안땅의 원주민들이에요. 그 땅이 자기들 땅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애굽에서 언약이 없었으면, 여호와의 밤이 없었으면 절대로 등장하지 않을 생소한 나라가 새로 등장해서 그 목적지를 어디로 향했는가? 가나안 땅을 향해서 침략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을 타고 공격하는 것과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마차를 타고 침공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기존의 세계에서 없던 나라가 아브라함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찾아왔고 모세는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끌려와서 지팡이 들고 갔습니다. 

  

무기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관여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하시고 그 군대는 전쟁의 대상도 몰라요. 누구하고 싸워야 되는지도 몰라요. 가나안땅에 가서 적들과 싸웠는데 그 적이 뭐냐? 죄입니다. 관영된 죄악과 싸웁니다. 죄악과 싸우니까 그 죄악과 싸우는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의, 곧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의죠. 그 십자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미리 찾아와서 그 사람에게 예언을 퍼부으시고 그 아브라함이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여럿 두고 한 것이 아니고 딱 한 사람밖에 없다고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여럿이 아니고 하나인 그 아브라함의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세상의 내막이 전부 다 나타났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나타났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 세상의 중심, 핵에 관한 이야기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정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먹고 계속해서 이 땅을 이런 식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다른 질문은 없습니다. 다른 해답도 없고 다른 정답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이 사실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절에 가나, 안 믿는 사람이나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언약에 관여되어 있는 겁니다. 횃불이 지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속사정을 그대로 이 지상에 퍼뜨렸는데 이 지상에 퍼뜨린 최종적인 구체화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이 세상은 상대적으로 전부 다 불심판 받아야 될 저주의 세상입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정작 싸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을 상대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된 죄, 마귀와 싸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시도해야 될 그 일을 오늘날 성도를 중심으로 벌어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조차도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위해서 주께서 관여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역할 때문에 아직도 목숨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