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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언약(창17;9-14) 1701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26. 07:55
2017-01-25 20:30:03조회 : 28         
   할례 언약 170125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할례 언약(창세기 17:9-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z4xw6pEcVLc, Hit:1

 이근호17-01-25 21:13 
할례 언약 

2017년 1월 25일                        본문 말씀: 창세기 17:9-14 


(17: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7: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7: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7: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7: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제시하시는 방식은 모든 인간들의 종교 아이디어를 벗어납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고상한 방식도 하나님은 거부하십니다.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방식은 특별납니다. 이 특별함으로 인하여 인간쪽에서 시도하는 구원방식은 모조리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들에게 위기로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위기 안에 “첨벙” 뛰어들게 된 자들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방식에 더 이상 휘둘릴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최고의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해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쪽에서 지시한 방식에 휘감기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사실상 사라집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제시한 그 방식을 위해서 복무해야 될 인생만 남아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단호하게 인간의 모든 방식을 거절하시는 이유는, 인간은 이미 저주의 땅으로 추방된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추방시키신 그 취지는 한결 같이 유지되고 계속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위해서 인간쪽에서 실시되는 모든 방식은 거부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시켜 놓으시고 다시 인간을 찾아오시는 겁니까? 그것은 버려진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시한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즉 ‘언약을 세우기 위해’ 혹은 ‘언약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을 동원시키시는 겁니다.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언약 달성에 있어 죄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죄를 요청한 채 언약, 곧 구원방식은 완성이 됩니다. 언약이라는 것이 인간들에게 구체화된 물건이나 물체로 이해되는 것이 알기 쉽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물체를 가운데 두고서 신과 교류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 언약의 경우, 화끈하게 이런 속성을 만족시켜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큼직한 배를 건조해서 그 안에 노아의 온 식구가 탑승하여 맹렬하고 무서운 대홍수를 거뜬하게 견뎌내어 드디어는 땅을 밟는데 성공한 그 경우는 참으로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무엇이 언약일까요? 만약에 방주 덩어리 자체가 언약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태여 참혹한 비극을 겪을 이유가 없습니다. 보다 더 큰 방주를 만들어 구원될 자를 모두 그 안에 다 태우면 그것으로 ‘구원 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노아처럼 ‘방주 만들기’로 구원이나 언약이 완료되는 게 아닙니다. 노아 언약이 최종 언약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차후의 언약이 새삼스럽게 필요 있단 말입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약 달성에 있어 인간들이 부정적인 역할로 개입되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주제에 자꾸만 저주없는 불멸의 존재되기를 탐을 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시도하는 것은 인간 구원이 아니라 ‘언약 세우기’입니다. 언약 완성이 목표입니다. 인간 구원이 목표라면 수 천 척의 방주를 건조해서 구원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완성은 신약에서 십자가로서 마감됩니다. 곧 죽음입니다. 그냥 일반적 죽음이 아니라 '언약적 죽음‘입니다. 이 ’언약적 죽음‘ 안에서만 생명이 있고 그 외의 지역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왜 그래야만 할까요? 노아 언약의 취지는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려는 ‘할례언약’의 취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아 언약의 본질은 ‘노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담당자는 노아를 같이 동승해 온 ‘정결한 짐승’입니다. 따라서 방주를 노아를 살리는 목적이 아니라 제물이 되어야 될 정결한 짐승과 새의 죽음의 의미가 최종적으로 드러나기 위해 실어나르는 ‘장례식 관’같은 기능입니다. 

즉 물에서는 죽지 않지만 언약으로 인하여는 필히 죽어야 될 운명이 바로 제물이 되어야 될 짐승과 새입니다. 노아가 홍수 속에 잠기지 않았던 것이 생명이 아니라 이 희생제물의 죽음이 곧 지상에서 보이게 되는 생명의 징후입니다. 할례 언약이 이런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남성 생식기의 덮고 있는 끝부분의 피부를 잘라내므로서, 덮였던 것을 걷어내고 비로소 귀두 부분을 노출시키는 언약입니다. 

큰 배를 만드는 것이 언약이 아니라 사람 생식기를 가지고 인간의 생식능력 자체가 부정(否定)되는 바로 그 기능이 ‘할례 언약’입니다. 이 할례언약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을 꾸준히 덮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브람은 기존의 육신의 부모로부터 물러받는 신체성을 발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 생식능력이 ‘아브라함 노선’을 구성할 언약적 자식을 가리고, 덮고, 핍박하는 식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 쉽게 말해서 나의 육적 본성이 나의 구원을 훼방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행하면 이런 요소가 일시에 사라지는 걸까요? 아닙니다. 로마서 12:1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원하는 ‘구원 소지’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구원을 획득하게 된 그 상황을 제공하신 것이 없습니다. 성도는 평생 자기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그 언약 작업에 휘말린 자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산 제물’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는 살기 위해서 죽는 것도 아니요, 죽어서 사는 것도 아니라 죽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 대해서 발산해줄 생명의 ‘언약적 죽음’입니다. 

즉 죽어 마땅한 기존의 창조세계는 7일이란 창조에서 의해서 생긴 것이지만 8일째 주어지는 새 창조는 기존의 창조 속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를 완성시키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에 속한 모든 자는 8일 만이 할례를 행해야 하는 겁니다. 

이제는 ‘아브람 인생’이 아니라 ‘아브라함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구원은 ‘아브람 구원’이 아니라 ‘아브라함 구원’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운명은 평생 육적인 ‘아브람’ 속성에 의해서 뒤덮힐 것입니다. 즉 살아보겠다는 욕심에 의해서 참된 생명이 가리워지는 경험을 죽을 때까지 겪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 더욱 빛나는 것은 성도에게 십자가의 능력으로 육의 허물이 노출된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이로서 완성은 예수님 홀로 달성하심이 계속 증거될 것입니다.(골 2:12) 이것이 ‘예수님의 할례입니다.(골 2;1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적 죽음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가리워지지 않고 도리어 노출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2강-창 17장 9-14절(할례언약)170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7장 9-14절입니다. 구약성경 19페이지입니다.

 

창 17:9-14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방식이 따로 있어요. 우리 인간 쪽에서 실시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뭔가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 어떤 위기를 느껴야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구원되면 되겠구나.’가 아니라 ‘아,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시는구나.’ 이런 감을 느껴야 돼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평생 성경 하나도 안 본다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할례라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에게 만약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면 아마 자기의 정성을 다해서 천국가려고 쓸데없는 시도를 하게 될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이 있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제시한 모든 방식은 다 걷어내라는 뜻이에요. 그런 것 가지고 얼쩡거리지 말라는 뜻이에요.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방식만 고집하시고 그 방식만 인정하는데, 왜 인간들이 하는 방식을 들고 신을 찾겠다고 오느냐는 말이지요.

 

나름대로 순진하고 나름대로는 순박해 보이지요. 정성을 다하는 듯이 보이지요. 하나님이 제시하는 방법에 없을 때는 ‘이정도 하면 우리의 정성을 어여삐 여겨서, 가련하게 여겨서 받아주겠지.’라는 이것이 쓸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 쪽에서 언약을 맺는 방식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정성이 아니에요. 할례에요. 순수함이 아니고 할례라니까요? 열심히 아니고 할례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만 천국 갑니다. 천국이라는 곳이 좋은 곳이라고 누구나 알고 상상하고 있지요.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국에 가는 방식은 분명히 성경에 제시가 되었으면 다른 것은 두리번거릴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조차 없어요. 하나님께서 천국 가는 방식을 할례로 제시했다는 이 말은, 물론 우리의 예상 밖의 방식이기 때문에 충격을 받겠지만 그 충격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장착이 되면 더 이상 인생에 대해서 호들갑 떤다든지 우왕좌왕 한다든지, 혹은 당황스럽다든지, 혹은 걱정한다든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만약 어떤 교회에서 “일 년에 두 명 전도하세요.” 했는데 1년은커녕 10년이 지나도 한 명도 전도 못했다면, ‘1년에 두 명이면 10년이면 20명을 전도해야 되는데 하나도 못했다면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스스로 흔들릴 수가 있어요. 그러나 창세기 17장 보세요. 할례입니다.

 

전도 20명하는 것이 아니고 할례에요. 어떤 사람은 20년동안 교회 헌금 한 푼도 못했다. ‘이러다가 돈 욕심냈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이런 걱정들이 있는데 오늘 본문 보세요. 할례에요, 할례. 성경 볼 생각을 안 하고 교회가 시키는 대로만 순종하고 정성을 다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무속신앙하고 똑같은 겁니다.

 

성경 보세요. 할례인데 그 할례를 뭐라고 하는가? 할례언약이라.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확정지어 놓았습니다. 집에 불이 나고 어려움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집에 불이 안 나면 구원 얻는다는 조건이 없는 이상은 괜찮아요. 왜? 할례언약이니까.

 

“집 간수 잘하면 구원시켜줄게.” 그게 아니잖아요. “애들 건강하면 구원시켜줄게.” 이게 아니잖아요. 할례잖아요. 할례는 뒤에 언약이 붙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 언약”을 세운다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식을 집어넣어 놓고 그 방식을 방식답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야.”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언약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언약자체를 하나님이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군들과 필요한 백성들을 동원시키게 되면, 그 언약이 완성되는 날, 그것이 아들의 나라요, 언약의 나라요, 그것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언약세우기’ 그것 뿐이에요. 우리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뭐라고 구원해줍니까? 언약 세우다 보면, 거기에 휘말려 들어가면, 그게 자동적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성경 보면서 쓸데없는 걱정이나, 미래에 대해서 ‘사업이 잘 될까, 안될까’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것, 경제가 어렵니 안 어렵니, 정치가 혼란스럽니, 안정되니, 그런 걱정은 성도로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존재가 자기 행복이나 자기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의 존재이유는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에요. 성도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언약을 세우는데 필요한 노무자, 일군으로서 가담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런 할례언약을 왜 주셨는가, 그것만 알면 되지요.

 

할례언약을 왜 주셨는가? 인간들이 보기에 생뚱 맞는 거지요. 예상치 못한 방식이에요. 할례언약을 왜 주었는가 하는 것은 할례언약 이전에 언약이 또 있었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방주를 만들어서 언약을 세운다.” 했습니다.

 

그러면 할례언약 이전에 노아에게 준 언약이 있다면, 할례언약이 무엇인가, 라는 그 답변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노아언약의 내용이 부지런히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감 잡으면 돼요. 노아에게 있었던 원리원칙이 그대로 할례언약까지 넘어오고 인수인계되는 겁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십자가의 새언약으로서, 예수님의 살과피로서 이 모든 언약,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이 모든 것이 완성이 되고 온전하게 세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인간의 구원에 있지 않고 이 언약밖에 없으니까요. 그 언약이 세워진 그 상태를 천국이라고, 하나님 나라, 아들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도 그것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다른 것을 섞어 버리면 그것은 마귀가 하나님의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서, 이 세상 신인 마귀가 언약 말고 다른 것을 믿게 해서 천국 보내겠다고 위장술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할례언약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위기가 오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나는 이런 식으로 천국 가서 하나님 만날래.’ 하는 모든 방식을 다 파괴시키고 부정해버리는 요소가 이 할례언약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언약 때는 큼직하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어놓으니까 굉장히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언약은 무슨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큼직한 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의 양피를 베어내는 거예요. 공작시간에 뭘 만들게 되면 멋있어 보이고 ‘나도 하나님의 언약에 기여했다.’ 이런 것이 있는데 할례언약은 그냥 자기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양피를 벤다는 말은 귀두가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남성의 생식기 끝부분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 껍질 부분을 잘라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 껍질피부를 양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취지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아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바나나.

 

처음에 바나나우유 나왔을 때 노랗게 나왔어요. 지금도 빙그레에서 노랗게 나올 겁니다. 그런데 그 뒤에 롯데에서 나온 바나나우유는 색깔이 하얗다는 겁니다. 바나나는 노란 것이 아니고 하얗습니다. 여러분, 바나나가 노랗습니까, 하얗습니까? 바나나껍데기는 노랗지요. 그런데 바나나 껍질을 벗겨보세요. 하얀 것이 나오지요.

 

할례언약이라 하는 것은 감추고 있는 것이 따로 있고 인간의 생식기능을 하는 육이 그것을 덮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이 할례를 행하는 그 지점이 생식기능을 하는 지점이에요. 남성의 생식기니까 그 기능을 하는 지점이라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인간들이 자손을 번식하는 그 기능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의 속 본질을 가리고 있고 그것을 덮고 있다는 거예요.

 

노아 때 방주는 뭔가 새삼스럽게 만드는 것이 언약이라면 지금 아브라함 언약은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칼로 오려내서 “요게 들어 있었지.” 하고 노출시키는 언약입니다. 그러면 진짜는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면, 인간의 육적인 본능, 자식을 낳겠다는 그것을 전도서에는 원욕이라고 하는데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욕망이 있어요.

 

자식을 번성시키겠다는 욕구, 그 욕구 때문에 한 없이 계속해서 진짜 하나님의 뜻은 속에 가려져 있는 거예요. 그러면 생식기 끝을 잘라낸다는 말은 인간들의 육에 의해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아브라함 자손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 언약을 축약해 버리면 “아니야!”가 됩니다. “너, 아니야!”가 돼요. 이것은 지난 시간 수요일에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름을 바꾸지요. 이름을 바꾼다는 말은, 같은 장소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출생지가 다르다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이 땅에 거주지를 삼고 이 땅에서 계속 생식작용을 해서 자손을 퍼뜨립니다.

 

하늘의 별같이 많게 계속 퍼지겠지요. 하지만 아브람에게서 난 자식을 천국에서는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아브라함에서 나온 자식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겁니다. 누가요? 하나님께서요. 왜 그런데요? 하나님 본인이 그렇게 정했어요. 지난 시간에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현재 이 말씀을 듣는 것은 아브람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아브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했어요. 내가 엄연히 아브람이라는 말이지요. 아브람으로 구원받기를 원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은 안돼. 네가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져야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미 아브람은 데라에게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몸을 어떻게 해요? 이 질문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한테 한 질문입니다. “다시 태어나야 천국간다.” 그러면 이 몸은 어떻게 할까요? 이 몸은 자살할까요? 자살한다고 다시 태어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이 몸은 죽어도 부활이 안 되는 몸을 부모한테 물려받은 거예요. 교회 백날 나와도 소용없습니다. 헌금 많이 내도 소용없어요. 성경공부해도 소용없습니다. 지금 안되는 몸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 언약은 “그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그것은 아니야.”

 

네가 부모한테 물려받은 몸 가지고 뭘 실시하게 되면 “그것은 아니지. 그것은 천국과 관계없는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예배를 드리든 그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식으로 어떻게 새사람 만듭니까? 만듭니까, 라는 그 질문자체가 위험스럽고 잘못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새사람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에요.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다고요? 그것은 노아언약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방주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방주에 타서 노아가족들이 살았다. 그것은 언약의 요소가 빠져 있는 겁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방주에 들어가기 전의 그 노아가 멀쩡하게 살아서 방주 안에 들어가서 나올 때도 멀쩡하게 살았으니까 ‘노아식구는 물에 안 빠져서 참 잘됐다. 다행스럽다.’ 그렇게들 보고 싶어 하지요. 이 몸이 뭔가 하나님이 어떤 방법을 주시면 그 방법대로 구원받겠다, 우리가 노리고 신경 쓰고 바라는 것이 그것뿐이라면 우리는 노아언약을 완전히 이해 못하고 있는 겁니다.

 

노아언약의 목적, 그것은 하나의 관, 장례식에 쓰는 관입니다. 노아방주가 관이 되는 경우가 딱 한 경우밖에 없어요. 노아가 아닙니다. 거기에 동승해서 방주가 끝나고 나서 새 땅에 왔을 때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정결한 짐승을 번제로 드립니다. 그것은 마지막 언약적 죽음, 그냥 죽음이 아니고 언약에 실린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방주라는 거대한 관을 짠 거예요.

 

정결한 죽음으로서 노아가 살았다, 가 아니라 정결한 죽음 자체가 곧 이 땅에서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겁니다. 죽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가 생명이라는 거예요. 이래서 잘 이해가 안 되겠지요? 좀 더 이야기를 끌어가 봅시다. 할례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름부터 먼저 바꿔요.

 

아브람에서 태어난 육신은 아무 쓸데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으로 메시아가 오는 관계 때문에 아브라함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디서 구합니까? 아브라함은 어디에 쌓여 있어요. 아브람이라는 생식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아브람의 고추, 바나나라고 했지요, 그 고추에 담겨져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핍박을 받고 있는 겁니다. 언약의 속살이 육의 욕망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고 있는 거예요. 더 쉬운 말로 나의 구원을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뜻입니다. 할례언약을 행한다는 것은 그 표피를 끊어내는 거예요.

 

끊어내게 되면, 육체적 할례를 행하면 구원 받는가? 그렇지는 않지요. 육체적 할례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마음의 할례까지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할례 할 때 칼 가지고 할례를 한다면 그 칼은 육체적, 형식적 할례에서는 쓸모가 있는데 마음의 할례에서는 그 칼을 육신의 어느 부분에 손을 대야 합니까?

 

심장을 도려낼까요, 발톱을 자를까요, 손을 자를까요? 육신의 할례를 행할 때 거기에 쓰는 도구가 마음의 할례에서는 하등 소용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신명기에 보면 육신의 할례로는 안 되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이야기하니까, 이 할례언약의 성취성에 있어서 인간이 끼어들 것이 없어요.

 

육신의 할례는 칼을 들고 잘라주면 되지만 타인의 마음의 할례나 자신 마음의 할례를 칼 들고 설친다고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오겠어요? 로마서 2장에도, 그들이 육신의 할례만 알지 마음의 할례는 모른다고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할례의 끝은 어떻게 되는가를 미리 알 필요가 있어요.

 

로마서 12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제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산제사로 드리라, 할 때 제물로 만들겠다는 그 의미가 뭐냐는 말이지요.

 

이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언약을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동원된다는 겁니다.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세울 때는 노아의 언약과 맥락을 같이 해야 돼요.

 

방주 안에 노아 식구도 있지만 장차 홍수가 끝나면 죽어야 될, 제물이 되어야 할 거룩한 짐승도 함께 들어 있어요. 그러면 노아식구들을 표피라고 본다면 그 표피를 거두어내게 되면, 할례를 행하게 되면 뭐가 나오는가? 그들 죄 때문에 대신 죽어야 될 희생제물의 취지가 부각이 된다 이 말이지요.

 

할례라는 것은 표피를 잘라내면 안에 감춰진 속살, 귀두부분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람 노선에서 아브라함 노선으로 바뀌는데 그 바뀌는 작업이 이 지상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미 실시가 되는 겁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을 하고 계시는데 구원파 이야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구원 받았다면 몇 월 며칠에 구원받았습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도를 아십니까, 식으로. 그 질문이 왜 잘못되었는가 하면, 성경자체는 우리 구원을 위한 성경책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책인가? 구원은 어느 순간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성도인생 자체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제물로 만드는 작업이에요.

 

“11월 3일에 구원받았다. 헤헤.” 이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 전체를 구원 작업에 동원시키는 하나님의 제물로 만드는 겁니다. 만드는데 누가 그걸 가리느냐? 육적인 우리의 잘못된 구원관, 잘못된 육에 대한 집착, 그 집착 때문에, 행복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했던 잘못된 사고방식이, 비언약적사고방식이 평생 우리를 덮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 땅에 살기 너무 힘들다. 빨리 죽어서 천당이나 가고 싶다.’ 이런 것이 자기행복을 위해서, 자기 편하기 위해서 구원을 활용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십자가를 활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은 그게 아니에요. 너는 너 자체를 산 제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활용하겠다는 거예요. 너 자체를 하나님의 언약의 작업속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구원시키기 위해서 할례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위해서 우리가 거기에 동원되는 거예요. 하나의 제물로서. 방주 안의 정결한 제물처럼. 옛날에 나온 미국의 드라마, <스타트랙>이라는 것이 있어요. 거기서 사람들이 굉장히 흥미있게 보는 것이 있는데 ‘순간이동’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거든요. 물질로 되어 있다는 말은 그것이 분자, 전자, 양자,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순간이동을 하고 싶으면, 몇 억광년의 먼 우주를 여행하려면 거기에 딱 서면 돼요. 물질을 스캔하면 정보를 읽어서 분해시켜버립니다.

 

그 분해된 정보를 가지고 도착지점의 선반에 이쪽의 정보를 통신으로 전송하니까 똑같은 모습과 두뇌속의 모든 정보와 나의 과거와 습관과 모든 성질이 그대로 이동해서 저쪽에 도착을 하는 장면에 자주 나와요. 60년대 나온 미국의 드라마죠. 순간이동이지요. 순간적인 인간복제라고도 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그런 아이디어와 같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예수 믿으면 순간적으로 나는 천국에 가 있다. 혹은 묵시세계에 있다.’ 그 말은 틀린 것은 아닌데 문제는 요지를 놓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날 구원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평생 우리가 ‘나는 나만 구원 받으면 돼.’ 이런 생각 하다가 주께서 거룩한 산 제물로 만들려면 계속 뭐가 덮이는 거예요. 육적인 요소가 덮이는 겁니다. 육적인 요소가 덮이는 것은 매일같이 이것을 잘라내고, 들어내고, 바나나껍질 벗기면 그 속의 하얀 열매가 나오듯이 계속 노란 것을 잘라내서 하얀 것이 나오도록 주께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 그 작업을 하는데 그게 언약의 성취의 취지에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이 구원개념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더 확실하고 알기 쉬운 예를 들게요. 조선시대 영조라는 왕이 있어요. 조선시대 왕 중에서 제일 오랜 기간 통치했고 나이도 82세까지 산 왕인데 이 사람이 어릴 때부터 똑똑한 아들을 두었어요. 사도세자입니다. 똑똑하다고 기대를 했는데 커가는 중에 기대에 어긋나는 딴 짓을 하고 학문을 게을리 하니까 아버지가 성질이 나서, 너 같은 인간 안 되겠다 해서 쌀 뒤주에 가두었습니다. 새끼줄로 뒤주를 꽁꽁 묶어서 나오지 못하게 해서 7일 만에 굶어죽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쌀뒤주가 언약이라면 성도를 그 안에 두는 겁니다. 언약 안에 두는 거예요. 그게 구원상태에요. 구원받았다고 헤헤거리면서 뺀질거리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 둔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할례언약이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언약을 우리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치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진짜 구원은 방주 안에 동승했던 희생제물의 그 희생에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알아서 자기 언약을 성취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를 동원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동원시키게 되면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지금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 이것이 진짜 생명이 아니고 생명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명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현상인 겁니다. 그래서 성도가 죽는 것도 생명이 가미되어서 생명에 의해서 주도된 생명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죽는 것은. 어떤 성도의 죽음도 다 순교가 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지금 아브람은 구원을 못 받아요.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디에 있는가? 아브람 속에 있어요. 아브람 속에 있는데 아브람 속에 있다는 흔적을 어떻게 남기는가? 할례를 행하면서 “너는 아니야.”라는 식으로 아브람 안에서 아브라함이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생각해 봅시다. 아브람은 그렇게 버릴 것 왜 만들어놓았는가? 그게 할례를 난지 팔일 만에 행하는 이유입니다. 난지 8일이라는 것은 뭘 뒤돌아보느냐 하면, 1, 2, 3, 4, 5, 6, 7을 뒤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1,2,3,4,5,6,7은 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새로운 창조가 기존 창조위에서 피어나는데 기존창조는 새로운 창조를 마치 남성의 표피처럼 덮고 있는 양상이라는 거예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아브람의 이름에 부합되는 출생지를 하나님께서는 소개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 지상에서, 이 세상 것을 부정함으로서 그 부정 안에 감추어진, 덮여 있는 하나님의 것이 나오면서 언약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탄생은 바로 아브라함자손을 통해서,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출생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출생했고 그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루시는 언약을 확산시키고 그것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거기에 동원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할례언약의 완성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성취를 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바나나 껍질 벗긴다고 했지요?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제물이 된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평생이 성도의 남은 일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할례를 몸에 행했다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한 그들은 결국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똑같은 사고방식, 자기 구원만 챙기는 사고방식이 진짜 하나님의 구원을 꽉 막히게 한다는 사실을 저희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