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18강-보배와 질그릇(고후4;7-9) 1701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15. 14:04
2017-01-08 12:35:08조회 : 192         
   보배와 질그릇 17010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보배와 질그릇(고린도후서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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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1-08 13:30 
보배와 질그릇  

2017년 1월 8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7-9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평소에 인간들은 인생의 주도권을 본인이 갖고 있다고 여깁니다.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이 되는데 있어 일절 양보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은 대로 바를 목적으로 삽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원치 않는 사태가 들이닥칩니다. ‘우겨쌈을 싸이고’, ‘답답한 일을 만나고’, ‘핍박을 받는 일’이 생깁니다. 불신자 같으면 이것으로 좌잘하고 낙담하고 거꾸려집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희한일이 생기는 겁니다. 정상인이라면 얼마든지 낙심이 될만한 상황인데도 낙심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 낭패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은 성도의 잘, 잘못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것이라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성도로 하여금 낭패스러운 일이 들이닥치게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평소의 주도권을 결코 인간에게 내어주신 적이 없다는 겁니다. 즉 ‘내가 원하는 삶’이라든지 ‘내가 기대하는 이상(理想)상태’을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형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이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 추방된 처지입니다. 나쁜 짓 했으면 벌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걸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하면서 자꾸 여지를 만들어내고 드러냅니다. 즉 남은 다 지옥 가더라도 자기만을 기어이 구원되어야겠다고 고집을 피우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성경 구절을 유념해봐야 합니다. 요한복음 16:7에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완결을 보여주는 것은 ‘빈-무덤’입니다. 즉 ‘죽음’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시도와 희망은 ‘최종 죽음’을 경유하지 않은채 나온 말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일반인들의 죽음과 같은 죽음이라면 별 새삼스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란 원래 다 죽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무덤’입니다. 이래서 특별한 겁니다. 즉 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덤을 ‘빈 - 무덤’되게 하시고 다시 이 세상에 성령님을 보내시는 이유는 ‘빈- 무덤’으로서 모든 세상을 ‘무덤’ 속에 두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죽은 자들의 모든 시도는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성질’임을 증명하는 행위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시므로서 세상 전체를 일괄적으로 책망하십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착하고 너는 못났다”가 아닙니다. ‘몽땅 다 못났다’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곧 ‘미래완료적 내용’이 성령이 전하는 말씀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어떤 치매 걸리신 분이 일찍 예배당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모두 다 가버렸다”고 하십니다. 물론 잘못된 말인지 우리가 압니다. 하지만 어차피 나중 늦은 오후가 되면 모든 사람이 예배당을 다 떠날 겁니다. 

바로 이 미래완료적 상황을 이 현재에 미리 전달된 것으로 들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해석되는 성경 말씀의 내용들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향하여 용감하게, 성의있게 쳐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내용은, 그냥 내용으로 끝나는 것이 실제로 벌어질 낯선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의 욥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른 생활인인 본인에게 너무 과도한 징벌이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사태를 개선할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욥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마입니다. 같은 인간들하고 아무리 논쟁을 벌려봐야 해답이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꾸만 놓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놓칠 수밖에 없는 그것들로 인하여 인간은 엉뚱한 종교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그것이 바로 ‘빈-무덤’을 경유하지 않고 세상관을 구성하는 겁니다. 즉 뭔가 되고자 하는 본인마저 심판받아 죽어야 될 죄인이라는 생각을 미처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의 임재는 구약의 성신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성령과 성신의 기능의 차이점은 사무엘상 16:23을 통해서 개시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분명 이스라엘의 왕 사울에게는 성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신이 계속 사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떠나고 마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는 성신이나 성령에 있어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준비해 두셨다가 사울에게 기타를 쳐주니 사울에게는 악신이 떠납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음악심리치료술이 악신마저 이기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19:9-10에 보면,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다윗이 그 밤에 도피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기타로 악신을 추방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계속 이어지지면 성신을 받은 선지자들이 아무리 바른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서 체계적으로 집단적으로 이스라엘은 성신받은 선지자들을 학대합니다. 따라서 성신의 역할을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을 유발하는 겁니다. 소위 구원받은 집단이라고 간주되던 그 나라마저 하나님 나라에 갈 수없음을 말하기 위해 성신이 주어집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의 나라로 대쉬하는 것이 인간 자체의 문제로 인하여 실패하는 겁니다. 반면에 성령은 바로 ‘미래완료적 분’으로서 성도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미 ‘자구 무덤’에서 죽고 ‘예수님의 빈-무덤’ 안에서 살고 있는 자로 규정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남은 문제는 성도 안에 그리스도의 구원이 계속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일뿐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성도는 이미 주어진 해답을 계속 드러내기 위해 원치 않는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증거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17-01-12 10:21 
219강-고후 4장 7-9절(보배와 질그릇)1701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7-9절입니다. 신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4:7-9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성경이 평소에 우리가 주인공이고 그 외에는 우리를 위해서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성경본문을 이렇게 펼치게 되면 우리가 객이 됩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주인공은 따로 있고 그 주인공을 서술하는 것, 설명해주는 것, 그 주인공이 따로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우리를 질그릇에다가 몰아붙입니다. “니는 기껏 질그릇이야. 귀한 것이 없으면 그냥 질그릇이야”라는 거예요. 

  

그럼 질그릇은 담는 기능을 갖고 있거든요. 뭘 담느냐 하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이렇게 되어 있어요. 질그릇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을 보면서도 딱 보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마음 자세가 나는 자체로 중요하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 본문을 봐야 된다는 거죠. 나는 중요하지 않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교회 문을 딱 열면서, “주님이여, 왜 저는 나 자체로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까? 그걸 알려 주세요.” 이런 마음으로 와야 되는 거예요. 이 중요한 것을 얼마나 더 키우겠습니까? 하는 이런 마음이 아니고, “중요하지 않음을 더욱더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그 동기를 오늘도 이 시간에 제공해주시옵소서. 안 중요한 것을 아는데, 안 중요한 이유와 오늘보다 내일 더욱더 안 중요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이 안 중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가족이 안 중요하고, 우리 회사가 안 중요하고, 내 인생이 안 중요하고, 우리 국가와 민족이 안 중요하고, 대한민국 헌법 1조가 안 중요하다는 이 말입니다. 이게 안 중요한 거예요. 이게 뭔가 더욱더 안 중요하도록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건데, 그 이유를 가르쳐주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와야 돼요. 우리 교회가 안 중요하고, 우리 교단이 안 중요하고, 우리 기독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옵소서. 

  

원래 복음이라는 것의 출발이 빈 무덤에서 출발했어요. 무덤. 보통 무덤이라는 것은, 현대 국가에서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바깥에, 외곽에 있어요. 서양에서는 무덤이 마을 한복판에 있지만. 교회가 있으니까 마을 한 복판에 있겠지만. 빈 무덤에서 출발하는데, 앞에 빈을 빼버리면 무덤이에요. 무덤이야기가 이게 성경이야기고 복음이야기고 기독교이야기입니다. 

  

무덤이야기가 죽음이야기입니다. 누구나 기피하는 이야기에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 것인가, 하는 이 문제가 아니고요. 그거는 불교고요. 인간이 행복해지는 것에 대한 것은 불교입니다. 모든 철학이고 과학이고. 그러나 기독교는 그게 아니고 어떤 특수한 분이 죽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를 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죽어버리면 그냥 일개의, 수십억의 무덤 가운데 하나의 무덤일 뿐이에요. 무덤이라는 것이. 

  

예수님 이전에도 왔다가 죽었고, 그 이후에도 왔다가 죽었고, 이순신 장군도 왔다가 죽었고, 뭐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해도 무덤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앞에 뭔가 하나 붙어요. 무슨 무덤이냐 하면 이게 빈 무덤이에요. 그럼 빈 무덤이 된다면, 이것은 평생을 죽는 것이 무서워서 쫓겨 다니는 우리에게 뒤통수를 쳐버리는 겁니다. “무섭기는 개코나 무서워?”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행운을 얻어서 좀 더 행복하게 살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교회 왔는데, 뒤통수를 쳐버리는 겁니다. “죽어도 괜찮아! 이 인간아! 죽어도 괜찮아! 이제는 죽음에 고만 시달릴 수는 없냐?” 이런 뜻이에요. 죽음에 그만 시달리라는 거예요. 그냥 빈 무덤을 믿으니까, 무덤을 믿는 것이 아니고 빈 무덤이라니까요. 무덤인데 들어가 보니까 비어있어요. “어디 갔지?” 

  

그럼 그동안 모든 인간들은 뭔가 알 수 없는 것에 쫓겨 다니면서 살아 온 겁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다 그런 겁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게 되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이 말은 평소의 인간의 정신상태가 어떻게 굴레에 쌓인 채 살아간다는 이런 뜻이에요. 평소에 우리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우리는 낙심되는 일이 벌어질까봐 조마조마하고, 그런 식으로 기죽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마음에 낙담이 일어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주여! 하고, 커피 석 잔 먹어가면서 금요철야하고, 새벽기도 나오면서, 이게 뭐냐 낙심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낙심을 해야 니가 빈 그릇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니는 빈 그릇이야.” 니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낙심을 유도하고 있어요. 낙심을 유도하고 쌓이는 것을 유도하고. 그 다음에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할 때마다 여러 번 이야기해서 여러분들이 또 그 이야기한다고 식상해할 텐데, 할 수 없어요. 오늘 본문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욕을 먹어도 해야 되겠어요.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보세요. 인간이라는 것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아무도 날 찾는 이가 없을까봐 겁내고 있는 거예요. 노인네들이 참 힘들다, 어렵다, 생활이 어렵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럼 나라에서 생활비 대주면 안 어렵습니까? 나중에는 먹고 잘 것이 보장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외로워서 못 살겠다는 거예요. 그럼 진작 그런 이야기해야죠?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그 나는 뭐냐 하면 계속 누가 좀 나를 주시하고, 칭찬해주고, 사랑해주고, 관심 가져주고, 나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줘야 마땅한 나라는 겁니다.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어? 니가 뭔데 왜 그렇게 해줘야 돼요? 이건 너무나 일방적인 주장들을 인간들은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 나온다는 것은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나올 수가 있어요. 외로움을 덜기 위해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이 8, 9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성도에게 이런 일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 내겠다는 겁니다. 진짜 빈 그릇인지, 보배가 담긴 그릇인지를 한 번 보자는 거예요. 도대체 한 번 보자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복음 설명한다고 신자라고 믿지 마세요. 복음 설명한다고 신자라고, 전도한다고 신자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그거는 전도를 빙자해서, 복음을 빙자해서, 아무도 날 찾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찾고 나한테 관심두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수가 있어요. 외로워서 말을 건네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이 말이죠. 전도라는 이름으로. 선교라는 이름으로. 

  

제가 20년 전부터 이야기했어요.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기존교회에서 당회장만 쳐다보고 나는 안 쳐다보니까, ‘에이! 선교사나 가서 내가 당회장 하련다.’라는 그런 경우가 95퍼센트입니다. 95퍼센트. 제가 이게 틀리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고 하면 누구처럼 장을 안 지질수가 있어요. 새누리당 이정현처럼. 

  

돈, 돈, 밥벌이, 밥벌이 하지만 인간은 어릴 때부터 사랑받아서 왔기 때문에 그 부모 사랑을 내내 그리워합니다. 내내 그리워해요. 이왕이면 큰 조직에 있어서 자기가 큰 그릇에 담겼다는 것을 굉장히 안심 놓고 그렇게 살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빈 무덤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게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듯이,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것은 바깥에 나가면 적응력이 없어요. 죽어버려요. 안에서는 아름다운 꽃이지만 바깥에서는 얼어 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애굽이라는 따뜻한 곳에서 바깥 한지寒地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끄집어내게 되면 끄집어내는 그 작업이 구약의 이스라엘이잖아요. 끄집어내놓으니까 뒤에 용수철이 달렸는지, 뭐가 달렸는지,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몸은 애굽에서 나왔는데, 마음은 전혀 나온 적이 없습니다. 구원 같은 소리하고 있네?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무슨 구원입니까? 애굽을 염원하고 있는데요? 사랑받기를 원하는데 무슨 구원이에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컸던 그 본성, 육적인 본성 그대로 갖고 있어요. 어릴 때 오냐, 오냐 했던 그 본성요. 엄마를 닮은 아내, 아빠를 닮은 아버지. 그런 것 찾고 있는 거예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를 사랑해주는 그 대상. 진리라는 것이 그런 것이죠. 옳다, 그르다가 뭡니까? 나를 사랑해주면 옳은 것이고, 나를 미워하면 그른 것이죠. 진리의 기준이 본인이잖아요. 본인. 빈 무덤은 날아가 버렸어요. 빈 무덤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존재부터, 자기 잘남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야기 하더라도 그걸 신자라고 보면 안 돼요. 오늘 본문에서 보배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영을 의미합니다. 성령. 성령을 의미하고 또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보고 있는 이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쓴 책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립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쓴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육으로 사는 사람은 성경의 어떤 단어를 보아도, 원어고 번역어고 관계없어요. 어떤 단어를 배워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모르게 되어 있고 접근을 허하지 않습니다. 접근을 허락받지를 못합니다. 접근 방식이 거부당합니다. 성령으로 썼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9시 40분쯤에 오셔서 한 10분 견디다가 답답했는지, 사람들이 다 가버렸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갔다는 거예요. 그걸 한 세 번씩 이야기해요. 제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하니까 아니, 사람들 다 갔다고 해요. 그게 바로 성경해석법입니다. 미래완료로 설명하는 거예요. 지금 뭐냐 하면 분명히 11시에 예배를 해도 오후 3시, 4시 되면 다 가버려요. 다 가버리는 그 미래의 상황을, 미래 이전에 벌써 이야기를 할 때, 이게 바로 성경의 해석법입니다. 

  

끝까지 다 가 본 사람, 죽음 이후까지 가 본 사람이, 가 본 분이 성령님이죠. 가 본 분이 이 성경책을 쓴 거예요. 그리고 사도바울을, 이미 인간의 끝부분, 그 이후의 세계까지 장악하고 있는 그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성령을 줘서 이 성경을 쓴 거예요. 따라서 성령으로 썼기 때문에 이걸 성경에서는 먹으로 쓰지 않았다. 볼펜으로 쓰지 않았다. 성령으로 썼다는 말은, 성령을 받은 자만 분류하고 성령이 없는 육에 있는 사람은 분류 밖으로 이렇게 내놓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 내놓는 것을 쓰레기라고 합니다. 원래 쓰레기통은 쓰레기를 넣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쓰레기를 다 모아놓았어요. 성령을 주신 것은 쓰레기는 쓰레기로 좀 티를 내라는 거예요. 쓰레기는.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성령으로 해석한 것과 육으로 해석한 것이 어떻게 다른가? 육으로 해석을 해버리면 빈 무덤을 경유하지 않습니다. 경유하지 않고 무덤가기 이전에, 살아생전에 이 몸뚱아리를 어떻게 천국에 집어넣느냐, 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이건 육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나를 사랑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몸을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책임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나를 천국 보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아이디어를 제시하시면 제가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하든, 뭐를 하던 간에 시키는 대로 해가지고, 순종한 몸으로 하나님이 원하는 그런 인간이 되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거룩한 인간이 되어서,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는 인간으로 내가 나를 조작해내겠다는 겁니다. 구성해내겠다는 거예요. 

  

쓰레기입니다. 그거 쓰레기입니다. 그 사람들 모으려고 지옥 만들어놓았어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뭐를 경유하지 않았어요? 무덤을 경유하지 않았죠. 성령은 반드시 무덤을, 그것도 참된 진짜 무덤을 경유하고 오신 분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 보면,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한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한다, 바통 터치하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느냐 이 말이죠. 지적하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그 뒤에 말씀이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천국을 가고 싶어? 그렇다면 기준을 알아야 되거든요. 

  

그 기준은 인간이 자기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으로부터의 기준은 알 수 없는 기준이에요. 아무리 해도 그 기준을 잡고, 그 기준에 순종해서 나를 천국에 보내야 되는데, 그 기준을 내 쪽에서 잡고자 해도 잡을 수가 없어요. 왜? 나한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왜? 나는 현재의 존재지, 미래의 완료를 거쳐서 온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미래에 갔다 온 존재가 아니고, 옛날부터 계속 살아온 그 과거의 나거든요. 그 과거의 나를 계속 움켜쥐고 있는 거예요. 

  

그걸 동질성이라고 하는데, 과거 16살 때, 20살 때, 40살의 내가 지금의 나고, 그 동일한 나라는 말이에요. 동일한 나는 계속 죽어봐야 똑같은 나에요. 미래의 완료가 되지를 못해요. 사람의 본색이 뭔가를 알려면 그 사람을 공격해보면 됩니다. 말로 공격을 하든지, 무기로 하든지, 공격을 딱 해보면 그 순간 본능적으로 방어기술이 나오는데, 그 방어기술이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왔던 본인의 인생관이 누적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냥 멀쩡하게 가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보고 되게 못생겼다고 말로 공격을 하게 되면, 이래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생긴 거라고 대꾸가 나오면서, 그런 공격 이전에, 평소에, 그런 말을 듣기 이전에, 평소에 자기는 스스로 자기 마을에서 자기를 위장하고 왔다는 그 무기가 그만 공격을 통해서 들통나버린 거예요. 또 누가 집사님 왜 기도도 안 합니까? 하고 딱 공격이 들어오면, 내가 얼마나 기도 많이 했다고? 이렇게 나왔다는 것은 실제로 옛날에 기도 많이 했고, 그 기도는 기도 못했다는 소리를 예상해서, 방어하기 위해서 내가 계속 기도해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합리화하기위해서 사전에 예비 된 질문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나는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나를 지켜왔습니다, 라고 이렇게 내놓기 위해서 누적된, 쌓였던, 포개지고 포개진 그러한 자기 의로움이에요. 그게. 

  

이게 쓰레기지 뭐가 이 땅에서 쓰레기에요? 그 중의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욥이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자식 열 명 낳고, 그 다음에 재산 많았고, 가내家內가 평안한 것, 이것은 내 믿음이 좋아서 그렇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또 생각도 그렇게 했었고. 그런데 욥을 다 읽어보면 마지막에 욥이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악마를 놓쳤어요. 악마를. 영적존재를 놓쳤다고요. 

  

한 발짝, 한 발짝 인생을 살아가면서 영적존재와 무관하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이성적인 책임감 때문에 아주 착실하게 살아온 거예요. 미래를 결정한 것은 착실하게 살아온 지금의 나의 착실함이 아닙니다. 성실함이 아니에요. 인간은 그냥 빈 그릇입니다. 성령이 담기면 보배요, 악령이 담기면 쓰레기고. 그런 겁니다. 

  

영의 문제지, 성령은 성경을 쓴 거예요. 그래서 영의 문제로 다가서지 아니하면 성경은 해석이 안 됩니다. 뭔가 명령하고 지시하면, “네. 순종하겠나이다. 지키겠나이다.” 한 번 지켜보죠? 못 지키죠. 이웃사랑을 하라고 하니까 어떤 서기관이 “사랑은 알겠는데 이웃이 누군지 알려주세요.”이래 나온 거예요. 

  

하나님은 이웃사랑 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웃사랑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웃사랑 하는 그 자체를 건지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그 과정을 구원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죠? 이게 무슨 뜻이지 모르면 수련회에 참석하든지 하지.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생명나무에서 추방시켜버렸어요.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그 과정, 하나님이 스스로 집어넣으신 영적인 그 과정을 구원하시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거기에 딸려 들어가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완료적인 문제입니다. 

  

주님이 가셨다가 안 오시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안 오면 아무도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 혼자 구원받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예수님이 가고 난 뒤에, 내가 가야 보혜사가 와요. 뭐냐 하면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이미 창세전에 정해놓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영이 와버립니다. 

  

예수님의 영이 와버리면 비로소 그들은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것이 되고, 보배를 질그릇에 담게 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빠져나간 그 위력이 본인을 통해서도 그게 발산이 돼요. 발산되는 방식이 뭐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고 있음을, 예수님을 증거 하는 거예요. 내가 믿음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걸 왜 남한테 이야기합니까? 그걸 왜 남한테 이야기해요? 남한테 인정받아야 믿는 자에요? 뭐 구원파 욕할 것이 없어요. 한국 교회 전체가 구원파입니다.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니나 잘하세요. 그걸 왜 니한테 이야기하는데?” 제가 한 12년 전에 어떤 목사한테 그 이야기했다가 욕을 뒈지게 얻어먹었어요. “목사님은 구원받았습니까?” “말 안 해.” “봐라 이 목사님은 자기 구원받은 것을, 자기가 믿음 있는 것을 이야기 못하잖아.” “왜 당신한테 이야기해야 되냐?” 

  

이 말은 나한테 “당신은 믿습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평소에 질문하는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이 남한테 인정받는 것으로 자기 믿음의 내용을 방어적으로 축적했다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티를 내버리는 거예요.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그랬겠어요? 얼마나 담긴 것이 없으면 그랬겠습니까? 

  

늘 낙심할 준비가 되어 있고, 늘 쌓임을 당할 준비가 되어 있고, 늘 버림받을까봐 겁을 집어먹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구원 안 해주면 어떻게 할까? 주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신 예정론은 믿습니다마는, 믿다가 치매 걸려서 잊어버려 기억이 안 나면, 기억이 나지 않으면 나는 어떡해? 참 혼자 노는 놀이에요. 혼자 노는 놀이에 푹 빠져 있습니다.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욥처럼. 

  

욥이 악마를 놓쳐버렸어요. 악마를 몰라요. 악마를 모르니까 뭐가 해결이 안 되느냐 하면, 왜 내가 고난 받는지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난 받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고난 받지 않아야 되는데 왜 고난이 왔지? 지금껏 여태 고난 없이 살았는데 왜 고난이 왔지? 

  

오늘 본문대로 하면 우겨 쌈을 당할 일이 없는데 왜 우겨 쌓임을 당하고, 답답한 일이 없는데도 왜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안 당해도 될 정도로 착하게, 거룩하게, 성화론 잘 하면서 교회생활 잘 했는데, 왜 핍박을 받지? 하고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거는 니 잘남으로 쓰레기 같은 쓰레기만 채웠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놓고 남한테 복음을 설명하고, 신학을 이야기하고,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하고, 전도를 하고, 목회를 하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다 교회에 좀 문제가 있으면 갑자기 낙심을 하고, 갑자기 버린바 될까봐 겁나고, 사방으로 우겨 쌓이게 되고, 두렵고, 쓰레기 티 다 내버렸어요. 

  

그렇다면 결국 이 문제의 해답은 뭐냐 하면, 문제가 있는데 문제 자체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왜 답답하지, 라는 문제 자체가 자기구원, 사적구원에 매달려있다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받고 싶어!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던 말든, 무조건 나는, 남은 다 지옥 가더라도 나 혼자라도 천국가고 싶어! 글쎄, 그게 문제라니까요. 그게 잘못된 거예요. 

  

모든 게 나만 좋으면 된다는 그 생각이 마귀가 집어넣어 준 생각이에요. 근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고 또 남을 보고 있어요. 남이 다 그렇다고 나도 그래야 됩니까?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되, 안 그런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아주 적그리스도의 상투적인 상품입니다. 종교상품이에요. 멘트에요. 

  

예수님을 좋아하는 척하지만 결국은 자기 이득을 챙기기 위한 의식이거든요. 행동이라 말이죠. 그럼 이 문제의 해결책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바로 성령과 성신의 차이를 두고 보면 알아요. 성령과 성신의 차이. 많은 사람이 백번도 들었을 거예요. 저한테 구약의 성신과 신약의 성령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라는 질문을 하는데, 이 시간에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성신은 궁극적인 죽음을 경유하지 않습니다. 성신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바깥쪽에서 초월적인 능력은 오는데, 그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파괴, 해체까지는 이르지를 못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그냥 말로 하는 것보다 성경을 보면 좋겠죠. 

  

사무엘상 16장 14절을 보게 되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악신도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여호와의 허락 없이는 악신도 지 맘대로 하지를 못해요. 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사탄이 욥에게 찾아갑니다. 

  

그러니까 마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마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자꾸 마귀한테 달라 드는 것은 하나님한테 대드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 하나님이 시켰구나.’ 그래 보셔야 되는 겁니다. 어떤 인간이 있는데, 사울이라는 왕이 있는데, 성령은 없고 성신을 받았어요. 성신을 받았는데, 이 성신이 어떤 기능을 다하다가 그 다음에 끝나고 하나님이 악신을 집어넣은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서는 조금 전까지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일하다가 이번에는 악신이 임해서 일하는 거예요. 23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성신은 뭐냐, 왔다갔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거예요. 왔다가 갔다가 들어왔다가 빠졌다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무엘서 19장에 보게 되면 9절,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절,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처음에 16장에서는 악신이 있어도 다윗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니까 악신이 떠났는데, 19장에 오니까 이거는 떠난 것이 아니고, 기타 쳐도 소용이 없어요. 강도가 더 세졌습니다. 

  

이처럼 악신과 성신을 다루는 이 나라가 유일하게 이스라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신과 성령이 어떤 차이가 납니까? 라는 질문 이전에 먼저 던져야 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래 나와야 돼요.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스라엘은 희한한 나라에요. 이스라엘은 바다를 건너온 나라입니다. 같은 인간으로 군집된 애굽은 동일한 홍해를 건너올 때 다 죽었어요.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바다에 들어갔는데 살았다가 정상일까요? 죽었다가 정상일까요? 죽었다가 정상이에요. 바다에서 사는 것은 오징어라든지, 문어, 갈치, 통대구, 금붕어...이런 게 바다에, 물에 살아요. 거기에서 사람이 살면 안 됩니다. 들어오기는 어디 바다를 기어 들어가요? 바다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이 땅에 없어도 되는 존재, 나라에요. 없는 나라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안 오셔도 되는 분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안 오셔도 되는 분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 없이도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아무 지장 없어요. 괜히 예수님 오셔가지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니 쓰레기 된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 오셨기 때문에 듣기 싫어도 들어야 되지만, 예수님을 만약에 제켜버리고, 나 예수님 말 안 들어, 라고 해버리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 문제없는데 뭔가 놓친 것이 있어요. 뭘 놓쳤는가? 우리가 살다 죽으면 어디가지? 그건 좀 찝찝해요. 왜? 누가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해답을 제시한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가 바로 네 글자로 이스라엘인 겁니다.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양을 잡았는데 사람이 살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바퀴벌레를 잡았는데 사람이 살았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양은 양이고 사람은 사람이에요.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산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그 어린양의 흘린 피가 우리에게 영생을 준다.”라고 말을 할 때에, 그걸 믿는다는 사람은 두 종류에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뭔가 하면 무조건 중요한 것은 가져오고 보자고 해서, 믿지도 않으면서, 내용도 모르면서, 믿지도 않으면서 일단 믿습니다, 하고 걸치고 보는 사람. 가짜죠. 

  

이런 사람은 그걸 믿어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정상이라고 하는 특징이 있어요. 제 이야기를 잘 들으셔야 해요. 지금 말이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어린양이신 예수 믿습니다, 라고 해도 생활이 아무런 달라짐이 없이, 예수님 없이 살아갔을 때 하고 똑같이 정상인이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남한테 기 안 죽고 살란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고거는 아주 수상한 사람입니다. 신자 아닐 가능성이 많아요. 

  

그런데 양이 죽었는데 사람이 산다는 것을 진짜 믿는 사람은 어지러워요. 그 다음부터 사는 것이 어지러워요. 왜? 질그릇의 보배가 가만히 두지를 않아요. 어지러워요. 다른 민족에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나거든요.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어지러워요. 다른 민족은 우상을 그냥 섬겨도 방치하는데, 왜 이스라엘은 조금만 우상 섬겼다고 하면 주위에 있는 나라들이 쳐들어와서 박살을 내놓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만들어요. 

  

다른 나라는 농사짓고 사는데, 이 이스라엘은 농사지을 땅도 없고 사막에다 집어넣어 놓고 원망하지 말라는 거예요. 밥을 줍니까? 물을 줍니까? 고기를 줍니까? 그냥 여호와만 바라보고 살아라. 진짜 이거는 현기증 나는 인생입니다. 어떻게 내 인생이라는 것이 날아가 버렸어요. 없고, 흔들어대는데 무당이 대나무 흔들어대듯이 흔들어요. 가만히 있어도 흔들어요. 여고생들이 연필 잡고 흔들면서 분신사바 하듯이. 주께서 자꾸 흔들어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어요. 미치겠어요. 왜 남들과 다른 대우를 해줍니까? 왜 남들과 다른 인생을 가게 하십니까? 좌로 가면 좌가 막히고, 우로 가면 우가 막히고, 위로 가면 위가 막히고, 아래로 가면 아래가 막히고, 죽으려고 하면 못 죽게 만들고. 이거 뭐에요?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라고? 고백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임재범 불러다가 고해를 해도 소용이 없어요. 

  

남들이 뭐라고 해도 본인은 알아요. 내가 정상인 아니다. 그걸 가지고 저 무당 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들렸다고 이야기해요.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성령 받았다고 이야기해요. 저쪽에서는 신들렸다는 거예요. 그 신들린 사람이 성경을 썼어요.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덮을까요? 펼까요? 계속 이야기할까요? 말까요? 차라리 성경을 덮고 예수를 안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지극히 조용합니다. 정상입니다. 정상적이고. 이제 남은 것은 박근혜가 빨리 퇴진하는 것만 남았지, 아무 문제없어요. 

  

그러나 성경을 펼쳐버리면 거기서 쓰레기 문제가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이방민족은 쓰레기다. 성신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을 모르기 때문에 쓰레기다. 성신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이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성신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든, 없는 데서 만든 그 나라, 홍해 건너 왔고, 양 잡아서 사람 살리는 그 기적의 덩어리, 그 나라가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집단인 것을 알려주는 그 역할을 성신이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꾸준하게 성신에 의해서, 성신을 받아서 이야기했습니까? 이야기해봤자 그들은 듣지를 않습니다. 듣지를 않아요. 그것은 왜냐, 미래완료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이 백성은 멸망되기로 작정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빼놓고, 예수님의 나라 빼놓고, 다 저주받아 마땅한, 지옥 심판받아 마땅한 나라인 것을, 미래 완료하는 식으로, 그게 성경에서는 분사로 나오는데, 이미 확정된 일로, to부정사죠. 이미 확정된 일로 신명기 마지막에서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알아도, 결국 너희들은 마귀에 의해서, 사탄에 의해서 멸망되도록 되어 있다. 성신은 신명기에서 하는 말씀을 실제 역사 속으로 구체화시킨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모든 인간은 구원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예수님 빼놓고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아무도 구원될 수 없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그 취지는 아직도 유효하고 살아있다.”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없다 이 말이죠. 구원이 없는데 왜 구원을 언급하느냐? 그게 바로 욥이 놓쳐버린 악마입니다. 악마에요. 악마는 종교를 만들고, 거기에 행함을 집어넣고, 순종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사기를 치고, 성경공부하고, 전도하고, 교회참석하고, OT하고, 선교비 내고, 하늘나라 확장하면,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다고 이야기해요. 이런 거짓말을 늘어놓는 겁니다. 

  

근데 그 거짓말이 통하는 이유는 너나 나나 다 쓰레기이기 때문에 통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좋아서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지금 있는 나를, 지옥이라는 것을 들은 이상은, 지옥을 보낼 수가 없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니 인생 책임질게.’ 매일같이 나한테 재촉하고, 나한테 자제하고, 절제하게 만들고, 온갖 좋은 성령의 열매는 다 갖다 안기고,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 거예요. 

  

뻐꾸기 둥지에 있는 자기 새끼를 위해서 어미 뻐꾸기가 힘들어도 새끼를 위해서 부리에 먹이를 물고 오듯이, 온갖 귀한 것을 다, 복음이야기, 십자가이야기, 언약이야기,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쭉 해가지고 모든 것을 자기한테 집어넣는데, 집어넣어봤자 그거는 쓰레기입니다. 없어요. 시편 4편 7절에 보면, 참 성경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이 시편은 구약입니다. 구약이야기인데, 제가 들려드릴 테니까 한 번 들어보세요. 참 기가 찰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뭐 또 안 들었다고 하지 마세요. 안 들을란다고 하지 마세요. 이걸 요즘말로 바꾸면 “예수 믿는 것보다 현찰 20억이 들어온 것이 이상하게 안 기뻐야 되는데 기쁘더라.” 이거 정상인입니다. 시편 4편 7절을 기억하고 있어요. 돈보다 주님이 기쁘다는 것은 이론상 알아요. 이론상. 왜? 봤으니까. 근데 실제로 한 40억, 50억 나눠주고 전에 예수 믿을 때보다 기분 좋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기분 좋다고 한다면 쓰레기다 이 말이죠. 

  

성경 구절이, 이 지식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 없어요. 자기 정당화 외에는 없어요. 자기 방어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주님 앞에서 농담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고 난 뒤에 성령이 왔을 때에 성령은 뭐냐 하면 일괄적으로 이야기해요. 이 세상에 대해서. 누구누구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우리를 꾸짖지 않습니다. 우리가 뭐라고 꾸짖어요. 꾸짖는 것은 내가 나를 꾸짖죠. “니 손들어! 전에 예배 늦게 왔잖아? 헌금 천원 더 보태!” 이런 것. 

  

자꾸 우리가 꾸짖지, 주님은 꾸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쓰레기거든요. 쓰레기를 꾸짖는다고 그게 인간 될까요? 안 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해골, 바짝 마른 뼈에요. 뼈. 뼈를 꾸짖어서 뭐 할 겁니까? 뼈한테 필요한 것은 뭐냐, “뼈야! 힘줄이 생겨서 너는 인간이 되어라!” 그 말씀 외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놓친 것이 뭐냐 하면 자꾸 평소에 내가 나한테 성경 몇 장 읽고, 기도 몇 분 하느냐, 내가 나한테 집어넣는 것 때문에, 지금 주님께서 우리를 빈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는 현재진행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면, 사방에 우겨 쌓임을 당하게 만들고, 답답한 일을 당하게 만들고, 핍박을 받게 만들어요. 언제 이런 경우를 아느냐 하면, 우리가 잠시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할 경우에 마귀가 확 달라 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생각 안 하고, 평소에 정상인으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면서 살면, 이런 낙심할 일도 없고, 버림받을 일도 없고, 쌓임을 당할 일도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가시고 난 뒤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하나의 세트로 와요. 뭐가 세트로 오냐 하면 우겨 쌓임을 당하면서도 쌓이지 않는 것이 세트로 해서 같이 와요. 답답한 일을 당하면서도 낙심하지 않는 일이 같이 일어난다고요. 같이. 

  

사운드뮤직이라는 영화를 아시죠? 그 영화에 보면 마리아라는 가정교사가 애가 일곱 명이 있는 트랩대령을 사랑하는데, 다른 여자하고 약혼을 해버렸어요. 사랑하면서도 약혼녀가 있으니까, 주의 뜻이 아니라 하면서 마리아는 다시 수녀원에 가요. 가서 수녀원 원장을 만났는데, 수녀원 원장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니가 사랑한다면 수녀가 되지 말고 세상에 나가라.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을 주면 반드시 피할 다른 창문을 열어주신다.” 노래 잘 부르는 수녀원 원장이. 

  

주께서 주실 때 그 창문이 보통 창문이 아니에요. 천국을, 미래 완료로,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답답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답답한 일을 주시면서 세트로 해결책도 같이 주시는 거예요. ‘참, 내가 주인공이 아니잖아? 내 인생 내 것 아니거든? 근데 또 내 거라고, 내 자존감을 위해서 있는 인생이라고 내가 또 착각했구나!’ 

  

그걸 수시로, 수시라고 하지만, 한 달 한 번 오는 사람도 있고, 6개월에 한 번 오는 사람도 있고, 1년에 두 번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가끔, 수시로, 제가 말을 조심해야 돼요. 매일 두 번씩 온다고 하면, 두 번 안 오면 신자 아닙니까? 이렇게 하니까, 그럼 십 년에 두 번 온다고 할까? 뭔가 한 순간에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 왔을 때에, 와도 한 3초지나면, 5초 지나면 정상이 됩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미친 놈 되었다가 다시 정상인 돼요. 

  

왔을 때에, 주께서 이미 나를 성도되게 하셨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4장 7절, 8절, 9절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빈껍데기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친히 건진다는 것. 니는 빈 그릇으로 제공 될 뿐이라는 것. 답답한 일도 알아서 마귀보고 시켰고, 욥처럼, 거기에 대한 해결책도, 이미 현장에 해결책이 있어요. 

  

그 해결책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기적을 내가 행함으로 가리지 않도록 우리를 제거하는 작업을 주께서는 준비해두신 겁니다. 나는 사랑받아야 돼! 라고 하면 멱살 잡고서, 이리 나와! 어디를 가려? 십자가의 피, 어린양의 피를 가리지 말라고 끄집어 당기고. 또 한 5초 지나고 하루 지나고 나면, 역시 나는 믿는 자야. 믿는 자 이리 와! 니는 쓰레기야! 하고 치워버리고. 

  

그리스도의 지금 일하심, 지금 주께서 일하신 그 결과물이, 주의 열매가, 그냥 막 사는 이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증거 하라고 피조물 만들어놓았는데 마귀가 우리를 사용하여 주님 십자가를 가리라고 마귀가 또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죄인이기에 주님보다 마귀와 짝짜꿍이 된 이런 입장이지만, 놀랍게도, 놀라운 기적으로 성령이 오셔서 바로 그 모습이 껍데기인 것을 이 시간에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