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17강-어두움과 빛(고후4;6) 1701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3. 07:25
2017-01-01 12:42:09조회 : 115         
   어두움과 빛 170101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어두움과 빛(고린도후서 4:6)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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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1-01 13:32 
어두움과 빛 

2017년 1월 1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6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창세기 1:2-3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이 창조 원리의 반복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나님답게 활동하신다는 말은 세상을 계속해서 ‘어두움’으로 조성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서 이 세상은 강력하게 반발하는 조짐을 늘 보여 왔습니다. 그러니 어두움이 어두움답습니다. 일괄해서 어두움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어두움 가운데 빛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나만 어두움 아니다”고 외칠 여지를 없앱니다. 하지만 그동안 어두움 속에서 그런 현상이 늘 있어왔습니다. 요한복음 12:43에 보면,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 더 사랑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위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그 무리에 하신 이야기입니다. 

이는,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은 줄곧 사람들의 ‘자기 영광성’에 가리워지고 훼방받고 있는 실정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려면 필히 사람들이 추구하는 자기 영광에 있어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하나님 영광’이라는 개념을 차용하고 있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너희들 자체로서는 이 하나님 보시기에 늘 ‘어두움’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두움이 어두움 값을 하게 마련이고 티를 내게 마련입니다. 이는 어두움이 스스로의 시도를 통해서 결코 빛으로 변모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8정도’라는 것을 내놓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독력합니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념, 정전진, 정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하면할수록 악마로부터 주어지는 공포심을 더욱 증가됩니다. 인간은 반성의 대상이 아닙니다. 반성한다고 해서 질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두움의 굴레가 더 깊어지고 짙어질 뿐입니다. 사도행전 3: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여기서 ‘은과 금’이 없다는 단언을 사도가 내리는 이유는, 바로 어두움이 요구하는 바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알려면 그 사람의 원하는 바가 무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두움은 필히 어두운 성질만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은 이 앉은뱅이가 예수님편에 속한 사도들을 만날 때입니다. 즉 어두움 속에 있는 자는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의 이름’을 먼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은과 금을 버리고 말이지요. 

'예수의 이름‘이 주시려는 분의 의중에 의해서 어두움 속에서 침투될 수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이 사도행전 3:16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과 오늘 본문 끝부분과 일치됩니다. 일방적으로 어두움밖에 없는 동네에 하나님 스스로 철회할 수 없으신 창조행위가 발동되어 ‘빛’이라는 것으로 창조하시게 됩니다. 따라서 이 빛된 창조의 혜택을 입은 사람만이 원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어두움’에 속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 어떤 ‘인권(人權)’이라든지,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세상 자체를 어두움에서 따로 분리할 것으로 시도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 창조의 작업이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는 모습은 인간들의 자유성 발휘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이 세상의 인간 자유를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공리주의적 자유입니다. 즉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는 필히 쾌와 불쾌에서 비롯된다는 겁니다. 유쾌한 것을 받아들이고 불쾌한 것을 멀리하려고 하면서 자신들의 자유권을 행사한다는 겁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다 자기 자유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손해가 된다고 여기는 것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두 번째는 ‘자기 완성적 자유’입니다. 즉 인간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신이 따로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자기 한 몸을 불사르려 합니다. 나라를 건지기 위해 과감하고 독립운동에 나선다든지, 기독교의 확장을 위하여 힘든 여건 속에서도 선교사로 나서려고 하는 일들이 이런 일입니다. 

혹은 부잣집 자녀이면서 가난한 예술가의 길을 간다든지 하는 것도, 고생을 사서 하면서 세계의 높은 고지는 다 등산하려는 고독한 등산가의 길을 하는 것들도 포함됩니다. 이런 자유 발동의 동기는 ‘자아 실현’입니다. 참으로 나의 나다운 삶을 따로 영위하겠다는 겁니다. 아낌 없이 자신의 목숨마저 버릴 일을 찾아나서겠다는 겁니다. 이것도 어두움에 속한 일입니다. 

세 번째로 어두움에 속한 일은, 자아마저 무아로 돌리는 일입니다. 즉 자아 자리를 텅텅 비어 더는 세상의 모든 욕망과 유혹으로부터 해방되겠다는 해탈을 시도하는 자유를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예수님의 자유입니다. 의인이면서 죄인의 삶을 사는 자유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저주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의 토대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진 독생자의 영광이 성도의 마음을 점령하고 차지하게 되면 성도의 남은 인생은 자기 자랑의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이 들통 나는 기간이 됩니다. 성도의 감사는 이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자꾸만 자신을 죄인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가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 영광만을 되비치는 사역에 합류시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증거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만드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1-02 19:30 
217강-고후 4장 6절(어두움과 빛)170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6절입니다. 신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오늘 본문 딱 한절이거든요. 그 한 절 안을 보면 우리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 찾아가는 길은 아예 여지가 없어요. 전혀 없습니다. 6절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췄을 때에 우리 마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6절에 보니까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 창세기 1장 2절에서 3절 이야기를 또 하고 있습니다. 

  

왜?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기 때문에 창조의 작업을 중단한 적이 없어요. 계속해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있었다. 옛날에가 아니라 지금도 그러하다. 세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작품입니다. 우리 인간의 작품은 여지없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자기인생, 자기작품을 자꾸 고수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의영광이 가려버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6절에 보면,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는데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창세기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나시지는 않지요? 천지창조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는데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 3절을 달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빛이 있으라.” 그 전에는 어두움만 있었다고. 빛이 빛 되려면 항상 어두움만 있었다는 것이 늘 성사돼야 돼요. 어두움만 있는 것도 하나님의 창조작업의 일환입니다. 우리 어두워집시다. 우리는 한껏 어두워집시다. 어두우면 어두워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빛을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인 것을 늘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훌륭해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 돼요.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천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진짜 믿는다면 우리는 늘 어두움이라도 좋소, 늘 어두움이라서 좋은 거예요. 

  

안 어두워서 좋은 것이 아니고 어두움이라서 좋은 거예요. 남한테 자랑질 할 것이 없어서 좋은 거예요. 남에게 과시할 것이 없어서 좋은 겁니다. 어두움을 과시할 겁니까? 내가 이렇게 못났는데, 어두웠는데 빛이 있었다는 것을 자랑질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 하는 사람이 돼야 돼요. 

  

나를 실어 나르면 안 됩니다. 주님을 실어 날라야지 자꾸 나를 실어 나르면 안돼요.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보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직접, 오죽 답답했으면 친히 방문까지 하셨겠습니까?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뭔가 언급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뭐부터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영광을 어떤 식으로 구축해오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어요. 

  

내가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하는 면면들, 그런 모습들에 대해서 우리가 외면하면 안돼요. 우리가 자신의 영광을 보는 방법 중 하나가 아침에 나와서 거울 보는 겁니다. 얼마나 내 모습이 영광스러운가. 어떤 프로그램 보니까 여자들이 화장하는데 24가지 코스를 거친다는 거예요. 남자는 스킨 바르고 로션 바르면 그걸로 끝났어요. 그런데 여자는 각종 기구가 있어요. 

  

볼터치는 기본이고 24가지 코스인데 나는 여자가 아니라서 그것을 몰랐어요. 물론 그것을 알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어두움을 알려면 알아야 될 것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알기 위해서 사람이 자기 영광에 얼마나 매진하는지를 꼭 알 필요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인간 세상에 와서, 이 세상에 뛰어들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은 너희 영광이 우선이지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지적하시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사람들, 그 당시 유대지도자들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사람답게 삽니다.” 그것을 교육했던 사람들이고 가르쳤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너희의 영광이 우선이다.” 

  

이걸 풀이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척 하면서 그 결과로서 자기영광에 골인하는 그 수법이지요. 축구로 하면 바나나킥에 해당됩니다. 주님의 영광이면 좋습니다, 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향하여 가면서 벌써 거기서 각도가 달라집니다. 잠시, 내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삽니다, 하다가 결국은 유턴해서 주의 영광마저 돌릴 줄 아는 괜찮은 나의 영광으로 되돌아와 버리지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기에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그거예요. 어떻게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과 대치관계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믿는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하고 반대방향에 있어요. 반대방향에 그냥 서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서로 충돌하고, 씩씩거리고 있고, 원수지간이 되고 있어요. 

  

사람들이 찾는 그 신이라는 것, 인간들이 소망하는 그 신이 진짜 하나님과 맞닥뜨려 보니까 가짜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를 하나님이라고 지금 신봉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거울이에요. 거룩한 내용이 담긴 거울이 성경이에요. 성경은 우리 자신이 진짜 어둡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마저 낚아채서 하나님 믿는 것, 교회 나와 주는 것, 이런 것도 결국은 나의 영광으로 골인되는 것을 계속해서 갖고 있는데 그게 어디서 들통 나느냐 하면, 거룩한 거울, 성경에서 들통 나고 말씀에서 들통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중에는 기피한 것처럼……처음에는 자기 영광을 위한다 하니까 찾아갔다가 나중이 되면 다 기피해요. 도망치기 바빠요. 그것처럼 오늘날도 어쩌면 어두움의 생리가 똑같은지. 

  

설교 듣고 말씀 보는 그 기회에서 자꾸 얼굴을 돌려버려요. 들킬까 싶어서. 내 영광 갉아먹을까 싶어서. ‘그러면 나만 손해? 내가 그만큼 쌓아놓은 영광이 있는데 그걸 손해 보는 짓을 내가 미쳤다고 왜 해? 내가 사는 보람이 여기 있는데. 행여나 그것이 엉터리라고 들통이 나면 나는 그동안 헛살았잖아.’ 이런 상황이 겁나는 겁니다. 그게 공포스러운 거예요. 지난주에 그런 설교 했습니다. 공포스럽다고요. 

  

해외에서 연말에 안부인사가 와요. “Happy new year!” 이런 인사가 왜요. 그만큼 순진하다는 뜻이지요. 여기서는 잘 안하는 인사인데. 우리 교회 교인들은 다 도가 터서 그 해나 저해나 태양은 동일한 태양인데 하면서. 이것은 도인인지 안 그러면 자포자기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분이 안부하면서 말하기를, 자기 어머니가 큰 교회 전도사님인데 “아들아! 네가 회개 안한 것은 회개해라.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말끔하게 회개 다 하고 내년에는 새 마음을 품으라.” 

  

그 이야기는 제 답변을 원해서 한 것이기 때문에 답변을 했습니다. “인간은 회개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성의 대상이 안돼요. 인간은 반성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요. 그런데 회개하고 반성하겠다는 말은 지금 공포에 휩싸여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회개하고 회개할수록 공포는 점점 늘어난다는 겁니다. 

  

“이케요? 저케요?” 아무리 자학하듯이 자기를 때리면서 묵은 한해의 모든 죄를 회개한다고 하면 마귀가 옆에서 “그래서 되겠어? 더! 더!” 음주운전 측정하듯이 더, 더, 더, 더, 더! “더 세게 해야지. 더 자기를 때려야지. 그래가지고 정신 차리겠어? 더 반성해야지.” 

  

그러면 반성하면서 자기가 믿는 신에게, 물론 마귀인데 자기가 믿는 신에게 “신이여, 여호와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이케요?” “더, 더!” “이케요?” “더 성경보고 더 기도해야지. 새해를 맞이했는데 적어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해야 될 것 아닌가. 네 자식들 남산위의 노루새끼같이 잘 뛰어놀고, 사업하는 일 잘 되고, 만사에 가족들 다 건강하고, 나라 안정되고, 송박, 박은 보내고, 이런 것들 다 기도해야지, 나라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가정의 책임자가 할 일이잖아.” 마귀가 계속해서 교회 안에서 그걸 강요하는 거예요. 

  

자식을 더 공포에 몰아넣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걸 듣는다고 거기에 말려들 자식은 아니지요. 반성한다고 해서 인간 달라지지 않습니다. 불교에서의 신은 사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이잖아요. 불교의 신은 이 어두움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빛이 찾아오지 않는 상태가 어두움입니다. 그 어두움에서는 어떤 종교, 어떤 신이 유행이 있는가, 인기가 높으냐?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해요. 정견(正見), 바른 지혜. 정사(正思:正思惟), 바른 생각. 정어(正語), 바른 말을 해야 되고요. 정업(正業), 바른 행동을 해야 되고요. 정명(正命), 바른 도리로 살아야 한다. 정념(正念), 바르게 알아차려야 되고요. 정근(正勤:正精進), 나쁜 것은 빼내야 되고요. 정정(正定), 바른 삶을 살아야 되는 것. 이것이 팔정도(八正道)에요. 

  

정견(正見), 정사(正思: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근(正勤:正精進), 정정(正定), 이것에 매진하게 되면 그만큼 업이 되어서 너와 너의 후대에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공포입니다. 이게 공포에 쌓인 인간의 모습이에요. 알 수 없는 공포에 쫓기고 있는 겁니다. 어디 현상수배 당했어요? 

  

놀라운 사실은 이 팔정도하고 청교도가 똑같다는 거예요. 개혁주의신학에서 나온 청교도. 인간의 내면을 닦고 또 닦자는 겁니다. 거울에 먼지가 묻으면 털어내듯이 원래 인간은 착한 인간인데 세상 산다고 먼지가 많이 묻었으니까 먼지를 털어내면 깨끗한 내면이 보인다는 겁니다. 인간의 내면은 지방간이 내면이에요. 딴 것 없어요. 

  

무슨 인간에 내면이 있습니까? 자기가 지어낸 것인데요. 인간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본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의 내면을 조사하고 분석하고 쪼개고 쪼개면 남는 것은 힉스장이 남아요. 어떤 여관 이름이 아닙니다. 처음질량이 나오는 그 필드가 나와요. 양자물리학에서. 그 이야기를 다음주 수련회 초반에서 이야기할 거예요. 

  

인간을 쪼개면 뭐가 나오는가? 인간은 현대과학에 의해서는 그냥 정보의 집합에 불과합니다. 선과 작대기로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절로 구성되는 것, 이것이 모든 생물의 복잡성입니다. 복잡구조에요. 배아에서 나오는 그 모든 것은 스스로 모양, 틀이 만들어지는데 점과 선으로 자의적으로 만들어요. 그렇게 복잡해져 가는 겁니다. 

  

인간이 어둡다, 그리고 인간은 빛이 있어야 산다는 이것은 누구의 일방적인 이야기냐 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볼 때 그렇다는 이야기에요. 성경만 덮어버리면 인권이 작용합니다.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에게 인권이 있다. 인간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하지만 성경만 펼치면 인간은 통째로 일괄 어두움입니다. 

  

본문 다시 봅시다. 6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지 아니하면 그 우리라는 것도 없고요.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이 없어요. 하나님과 관련성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어두운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두운 가운데서 뭘 내놓는데 그렇게 인간이 모여 살아봐야 맨날 나오는 것이 어두움밖에 없다, 라는 이야기는 예수님 쪽에서 하는 일방적인 주장이라니까요. 

  

인간들이 예수님 주장을 “입 다무세요.” 하고 끊어버리고, 성경 없애버리고, 그냥 인간들끼리 모아놓게 되면 남는 것은 뭐냐? 인권, 인간의 권리고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민주주의만 남아요. 인간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그것만 남아요. 인간의 권리, 자유가 있다.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는 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해도 그것은 네가 해가 되지 않는 한 입 다물라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벌거벗고 길에 다녀도 너에게 손해가 되지 않거든 옷을 입었느니, 벗었느니,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세 살 먹은 애가 담배를 피워도 그 담배연기가 나에게 오지 않는 한 관여할 것 없다는 거예요. 이게 남의 이야기지 싶어요? 오늘날 2017년도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이 이겁니다. 

  

여러분 자녀들 어떤 사고방식 갖고 있어요? 엄마가 뭔데 나한테 스마트폰 보지 말라고 하느냐, 왜 간섭하느냐 그거 아닙니까? “엄만 밥이나 해대고 아빠는 돈만 벌어주면 그만이지. 왜 낳았는데? 낳았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 젊은 애들 그거잖아요. 어두움에서 배운 것. 그런데 부모는 그 어두움이라는 것을 생각 안 해요. 

  

인간은 다 그렇다는 거예요. 왜? 인권이니까. 자식한테도 인권이 있으니까. 무슨 개코같은 소리 하고 있어요. 인간에게 무슨 인권이 있어요. 어두움에 무슨 인권이 있고 어두움주제에 무슨 인권을 찾아요. “지옥 앞으로 갓!” 착, 착, 착, 착! 이거예요. “넓은 길로 가서 다 지옥으로 가!” 이게 창세기 3장의 뜻입니다. 

  

그 소리가 성경에 나오지요. 문제는 성경에 나오더라도 꾹 눌러서 성경을 안보면 돼요. 성경 꽉 눌러서 그런 소리가 귀에 안 들리고 안 보이면 그만인 거예요. 기독교가 마귀종교입니다. 인간이 원하는 신들을 성경용어 몇 개 구슬 엮듯이 꿰어서 들어가 보면 교회가 아니고 점치는 곳이에요. 점치는 곳인데 용어는 전부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성경 왜 봅니까? 다 나의 영광,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해요. 그러면 그것은 악마의 증인이에요.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사람의 영광이 지금 가로막고 있거든요.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너희들은 지금 어두움에 푹 빠져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었던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거는 네 생각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미는 거예요. “네 생각이고, 네 생각일 뿐이고, 그 이야기 다른데 가서 하지 말고!” 그렇게 푹푹 쑤시는데,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아주 모욕적이고 거만하게 푹푹 쑤시는데 어디까지 몰아넣었는가 하면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아넣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믿습니다.” 하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십자가를 믿습니다.” 하는 말은, “예수님은 옳고 세상은 틀려먹었습니다, 그걸 믿습니다.”하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세상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미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나는 틀려먹었고 예수님만 옳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왜 ‘나는 틀려먹었고’라는 말을 해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영광이 어떻게, 신학이 어떻고, 내 아들 목사 만들겠습니다, 교회 선교하겠습니다, 백날 해도 결국 그 화살이 꼬부라져서 유턴을 하거든요. 

  

실컷 예수믿는다고 해놓고 뭔가 일이 잘못되면 ‘내가 이러려고 성도가 되었나?’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나, 하는 것처럼. ‘내가 이러려고 성도되었나.’ 무슨 이상한 미사일이 이런 미사일이 다 있어요. 쏘았는데 이게 되돌아와서 자기에게 와요. 어두움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두움은 어두움 값을 해요. 빛이 왔다 가면 완전히 소문이 나서 빛이 있는 곳을 폭파시켜버립니다. 

  

복음만 없으면 사람이 점잖아요. 그러나 복음만 들어버리면 그 다음부터 발작을 일으킵니다. 죽으라고 군홧발로 짓밟듯이 복음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환장을 해버렸어요. 6절 끝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오늘 설교시간에 제가 해야될 임무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뭐냐, 그걸 지금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그동안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무엇이 막았느냐 하는 것을 먼저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틀어막고 있는지. 사도행전 3장 6절, 저는 이 대목을 구세군 냄비 앞에서 꼭 전하고 싶어요. 구세군이라는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매년 연말이 되면 냄비 걸어놓고 모금활동 하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꼭 이야기해주고픈 성경구절이 있어요. 

  

사도행전 3장 6절,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하는 이 말씀. 너무 장난기가 심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세상에 돈이 없어서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빛이 없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없어서 어려운 거예요. 돈 모아서 돈 대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라고, 그런 취지로 1800년대 후반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기독교 단체에서 구세군이라고 세운 거예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게 사도요한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지금 사도는 예수님 편에 서 있는 예수님의 대리자에요. 그리고 앉은뱅이는 온 세상 어두움을 대표하는 대표자입니다. 그 대표자 앞에서 어두움이 먼저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여요. “돈 한 푼 주세요.”라고 내세웠어요. 

  

돈만 있다면 살만 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복음이 와야 우리 내면이 새로 생겨요. 우리 내면을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하는지. “돈 없어서 못살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를 1.5배로 살려놓았으면 지금 나가라는 소리 절대 안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문제가 아니고 돈 문제에요. 이걸 거지가 그대로 이야기해 줍니다. 

  

가난하다고 마음이 가난한 줄 아십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 되고 싶은 심보는 남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습니다. 한이 맺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지 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저희 것이 아니에요. 어두움에서 어떤 요구를 하든 그 요구는 어두움의 티를 내는 요구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무엇이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그 사람을 알려면 “네가 원하는 것이 뭐냐?” 하는 겁니다. 재벌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 뭡니까?” 돈! 돈을 많이 가져도 돈. 그러면 부도난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돈! 똑 같네. 똑같이 취급하는 거예요. 

  

“교장선생님이 원하는 것이 뭡니까?” 돈! “농사짓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뭡니까?” 돈! 은과 금 그것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 사도요한이 얼마나 냉혹합니까? “금과 은, 네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거지를 앉은뱅이가 되게 해서 거지되게 하신 거예요. 왜? 그것도 어두움이 그 어두움을 감추지 못하고 튀어나오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사도를 성전미문에서 만나게 하신 겁니다. 자기의 솔직한 것을 드러내게 하신 겁니다. 어두움은 어두운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불쌍합니다. 돈 주세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어떻게, 만족하십니까? 

  

허당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뭐지? 뭐야? 나사렛 예수 이름이 어쨌다고? 그것 준다고 배불러?” 그 해답이 사도행전 3장 16절에 나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걸인에게는 믿음이 없어요. 거지한테는 믿음이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믿음이 없는데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예수 이름안에 포함이 되어서 예수 이름으로 전달된 겁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그리스도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전에는 내 마음이 내 마음이었는데 내 마음은 없어지고 주님한테 압수당한, 주님한테 강탈당한, 그러니까 컴퓨터 CPU안의 중심칩을 몽땅 갈아엎은 거예요. 

  

그걸 저는 토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보기에 인간의 자유가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첫째, 둘째, 이렇게 할때는 세 번째 할 때 첫째와 둘째를 다 잊을까 걱정이 되는데 그것은 주께 맡기고요. 첫 번째는 공리주의적 자유관이라 합니다. “이걸 하게 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오느냐?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두고 공리주의적, 자기한테 이익이 되는, 또는 손해가 덜 되는, 맨 같은 겁니다,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한다는 이것이 공리주의적이에요. 

  

공리주의적자유관이기에 인간이 모든 자유로운 행동,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에 그렇게 한다, 라고 벤담이라는 사람이 주장했고 그 뒤에 존 듀이부터 현대미국의 사상을 접수하고 점령했어요. 이것은 지금 나온 것이 아니고 옛날 기원전 4세기 때 이미 나왔던 겁니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나온 것인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몸이 불쾌한 짓은 피하고 싶고 유쾌한 것은 하게 되어 있다는 이것이 현대에 들어와서 공리주의라 하는 겁니다. 

  

배고프면 불쾌하잖아요. 양식을 먹으면 유쾌하잖아요. 밥을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돈 벌기 위해서는 취직도 하고 어떤 행동에 나서지 않습니까? 그게 공리주의라는 말이지요. 밥 주고, 뭐 주고 다 주게 되면 취직해서 좀 생활하다 튀어나오고, 또 뭐가 힘들다고 튀어나오고, 인간대우 안 해준다고 튀어나오고……, 이게 첫 번째, 공리주의적자유관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는 거예요. 우리가 왜 사는지, 왜 행동하는지, 우리 행동의 동기가 뭔지, 돌아보자는 거예요. 두 번째, 마이웨이입니다. 이것은 자유 그 자체를 추구하는 방법이에요. 아무리 돈주고 나한테 잘해주더라도 나는 내 방식대로 사는 것. 나는 내가 하고 싶은대로, 내 취향에 맞도록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그것. 이것이 자아실현의 자유입니다. 걱정되어서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적 자유. 나한테 이익이 되기에 움직입니다. 두 번째는, 나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나를 절대자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아무리 재벌 아들이지만 그것 포기하고 중이 되겠다는 그런 것 있잖아요. 

  

나는 하버드를 나왔지만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는 것. 목사한테는 그런 사람 없어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겠다든지 선교사로 가겠다는 그런 것. 그게 자아실현의 자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첫 번째 자유, 두 번째 자유, 전부 다 이 어두움에서 나온 자유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어두움에서 나오는 자유, 이것도 악마에게서 나온 자유인데 그게 뭐냐? 이런 저런 내가 하고 싶은 그것도 초월하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이나 이익도 초월해서 나는 나를 텅텅 비우겠다는 것. 이것이 불교의 해탈에서 나온 자유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자아의 흔적조차 지워버림으로 말미암아 고통 하는 주체조차 없애버리고 욕심내는 주체도 없애서 마치 공기처럼, 공기 반 소리 반이 아니라 아예 공기처럼 산소같이 사는 것, 그런 영원한 이상적인 자유, 이거 불교입니다. 

  

이것은 불교인데 천주교의 도닦는 데도 있어요. 천주교에 그런 것이 많아요. 수도원에서 하는 짓거리가 이 짓거리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슨 자유냐? 자유 없습니다. 속박만 있을 뿐입니다. 이미 힘에 눌려 있어요. 어떤 힘? 내가 뭔가 원하는 것의 끄트머리의 목적으로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외로우면 못산다. 그리고 세상 것은 탐내기 마련이다.” 이 세 가지가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한 거예요. 사람은 떡 없으면 못산다. 두 번째는, 사람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한다는 거예요.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사는 맛이 없다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 설움 받고, 이 사람에게 설움 받고, 가족에게 설움 받고, 친구에서 설움 받을 때 남은 것은 자살밖에 없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남에게 “나 어때? 이만하면 나답지? 그지?” 이거 이야기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첫째는 떡, 기본적인 먹는 것에 눌려 살고, 그 다음에 남이 보는 시선과 응시에 눌려 살고, 세 번째로, 내가 요구하는 것, 보고 싶은 것은 다 얻고 싶은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욕망에 자극제가 된다는 이것에 눌려 사는 것, 그 권세에 눌려 사는 이것이 마태복음 4장에서 나오는 악마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눌려 사는 인간이 반성한다고요? 올해는 회개해서 싸그리 저주의 씨앗을 없애버린다고요? 내 자식아? 뭘 노리는데? 저주 안 받겠다는 그것이 저주 아닐까요? 어떤 굴레, 어떤 짐 같은 것. 성경에 분명히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의 자손은 이 땅에서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고생하라고 보낸 겁니다. 

  

왜 이 땅에 사는가? 고생하라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지옥은 지옥대로 가고. 지옥 앞으로 갓! 인간이 인권, 존엄성, 성경에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합니다. 6절에, 모든 것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해야 돼요. 어두워야 새롭게 주님 쪽에서 나온 빛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말고 진짜 하나님은 어두움을 지독하게 조성해놓았습니다. 그 어두움이 자기 손으로 반성하거나 회개한다고 해봐야 소용없어요. 

  

인간의 행동은 자유에서 나오는데 그 자유는 세 가지 틀을 못 벗어나요. 1. 공리주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2. 나는 돈 줘도 내 취향에 맞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평생 한다. 나는 미술도 하고 선교사로 갈 거다. 왜? 내가 하고 싶으니까.” 3. “이것저것 해 봐야 힘드니까 아예 나를 없애버리고 나도 없는 무아의 세계에서 진공상태를 유영하듯이 살 거야.” 절에 가서 도를 닦든지. 진리를 찾아서. 

  

이 세 가지의 자유는 다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체가 밥 달라는 것을 억지로 외면하는 것 밖에 안돼요. 결과적으로 어둡기 때문에 어떤 해결책이 없어요. 올해 반성하지 맙시다. 지난해도 반성 안했지만. 해봤자 반성하는 자체가 수상해요. 마귀가 더욱 더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그 정도 반성해서 되겠어? 더 해야지. 헌금 그 정도 해서 돼? 더 내야지. 기도도 그거 해서 되겠어? 시간도 늘이고 성경공부 시간도 좀 더 늘여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공포심을 유도할 건데 누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감당 못합니다. 내가 나를 지켜야 되는데 무슨 수로 지켜요? 지킬 수가 없는데요. 그러면 빛의 내용은 뭐냐? 하나님의 영광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옵니다. 그 얼굴이 뭐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관계입니다

  

그게 토대에요. 성도는 자기 안에 영광의 빛이 오게 되면 그 안에 터를 잡습니다. 토대지요. 그 터가 예수님과 아버지사이에 있었던 관계가 우리의 기초콘크리트가 돼요. 그 안에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저주에, 죄에다 아버지가 아들을 집어넣어버렸어요. 우리는 빛을 향하여, 선을 향하여, 영생을 향하여, 구원을 향하여, 착함과 거룩을 향하여 뭔가 자꾸 나아가지고 하는데 하나님은 반대로 더 깊은 죄, 궁극적인 저주가 기다리는 그 자리로 예수님을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증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저주의 증인, 죄의 증인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한 구원입니다. 흉내 낼 생각하지 마세요. 지난 금요일 오후 3시에 근처 우리마트라고 개업을 해서 두 달 전부터 행운권추첨한다고 해서 이왕 물건 사는 것 행운권 열심히 적어 넣었습니다. 어제 오후 좀 추웠는데 오후 3시부터 한다고 해서 갔습니다. 

  

조건이 뭐냐? 그 현장에 당첨자이름의 당사자가 없으면 절대로 상품 주지 않고 패스한다는 조건을 달아서 할 수 없이 제 아내와 함께 참석한 거지요. 마침 우리 교회 교인들은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작은 상품부터 추첨해서 이제는 200만 원짜리, 50만 원짜리, 25만 원짜리, 이런 진짜들이 남아 있어요. 

  

50만 원짜리가 나왔는데 박석무씨, 라고 호칭을 했어요.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예! 하는 거예요. 보니까 저 맞은편 보성 2차 아파트 20층에서 창문 열고 예! 하고 대답한 거예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전부 다 “패스! 안 돼, 안 돼!” 왜 안 될까요? 창문열고 예, 하고 대답했는데. 나이는 한 70이 되었어요. 춥다고 안 나온 모양이라. 

  

아파트 바로 밑에서 행사하는 그 장면들이 다 보여요. 50만 원짜리 당첨되었는데, 그래서 예, 라고 대답했는데 전부 다 패스, 패스, 안된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 사람은 뭐가 문제냐 하면, 현재의 자기의 터를 떠나지를 않았어요. 떠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구원 받는가 그 정보만 창문 열고 얻으려고 한 거예요. 

  

토대는 평소에 내가 사는 그것 그대로 유지하고, 나중에서 죽어서 천당 가는 행운권만 바라고 있었던 거예요. 천국에서 전부 다 안 된다는 거예요. 현장에, 그 바람 부는 현장에 함께 와 있어야 돼요.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살아온 현장을 오늘날 우리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가 어두움의 길을 가도록 해 버려요. 2017년도도. 

  

이제 2017년도는 해 뜨면 안돼요. 계속 어두워야 돼요. 우리를 어두운 세계에, 더 깊은 질곡에 집어넣으십니다. 집어넣어서, 내가 지은 죄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더, 더 우리 죄를 알아야 돼요. 아까 세 가지 자유. 공리주의, 나는 내 이익이 없으면 절대로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두 번째, 얼추 돈 좀 있다 싶으면 취미생활 하는 것. 등산, 낚시, 내 방식대로, 마지막 죽을 때 마이웨이, 노래 부르면서 죽으려고. 내 방식대로 살았다, 그래서 후회 없노라는 그것 이야기하려고. 세 번째는, 이거고 저거고 다 귀찮다, 그것. 

  

이 어두움, 일괄적인 어두움, 이 어두움을 앞서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터를 잡아야 돼요. 우리가 스스로 개선하고 청소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200만 원짜리 당첨권은 삼익빌라에 사는 사람이 타갔어요. 그 사람은 그 현장에 있었어요. 첫 번째 부른 사람은 현장에 없어서 패스 되어서 두 번째 이름 부른 사람이 현장에 있었어요. 

  

심지어 그 자리에서 ‘이진희’라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는데 예, 하고 나왔는데 그 이진희는 당첨자 이진희가 아니었어요. 동명이인이었어요. “전화번호 뒷자리가 이거 맞습니까?” 하니까 “아니요.” 했어요. 오늘 본문은 한 마디로 해서 당첨입니다. 주께서 호명하십니다. 주께서 없는 믿음 다 주셔요. 예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이 이름이라는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주께서 먼저 앞서서 보여주신 그 죄를 깊이 아는 그 현장의 자리로 인생이 터가 잡힌 거예요. 죄를 더욱 더 아는 자리로. 

  

그것이 아! 성경말씀대로

지속적인 창조,
빛의 창조,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앞에서 죄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부활의 영광, 영생이 주어져서
우리가 주의 빛과 영광의 터전이 되는 겁니다.
땅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이 땅의 이야기입니다. 

  

추상적인 신은 가짜신입니다. 언론이라 하는 것은 집단히스테리를 만들어요.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지요. 나머지는 인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이것은 비실재적이에요. 실제가 아니에요. 으쌰, 으쌰, 하는 인간의 집단 히스테리를 조성하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직접 죽었습니다. 집단 히스테리 아닙니다.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그 길이지요. 하지만 주께서는 그 길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이토록 죄였는가?’ 감사하시면 됩니다. 모든 일에 주께서 내 인생을 터를 바꿈으로, 완전히 기초공사를 다시 해서 터 자체가 주님의 터로, 주님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기초가 되어 있는 터 위에서 우리는 죄 지으면서 자기 자신을 헤쳐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주님의 신음소리와 고통과 죽음과 아픔을 발견하는 한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엉터리 신을 믿어놓고도 그게 복주는 하나님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저 나만 잘되는 이것이 어두움의 속성인데 마치 그것이 인생의 다인 줄 알았습니다. 주여, 우리의 기초부터 바꾸게 하여 주옵소서. 앉은뱅이가 되게 하시고 “너에게 줄 돈 없다.” 하는 그 이야기가 왠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지고 오직 주의 이름만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