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용서-우리의 용서를 버려야 주님의 용서가 주어진다(사55;6-7)이근호080723

아빠와 함께 2013. 2. 20. 08:49

본문: 이사야 55장 6- 7절
제목: 용 서
듣기: 음성 , 보기 : 동영상
 이근호 08-07-23 20:59 
용서

2008년 7월 23일                       본문 말씀: 이사야 55:6-9

(사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사 55: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를 원합니다. 모호하게 넘어갈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도 인간들은 안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용서해주시는 전문가’라는 겁니다. 마치 이발사가 이발하는 것이 전공인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는 것이 전공이라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그 분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용서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엉터리 용서 개념입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봐주기’ 혹은 ‘눈 한번 질금 감아주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가지고 인간과 흥정이나 의견 조율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 어떤 인간이던 반드시 죄인임을 드러내고야 마는 그런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말은 ‘너는 용서받지 아니하면 아무런 희망이 없을 정도로 죄인이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라면 왜 나는 나 자신에게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존재인가를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그동안 생각한 용서를 철폐해야 합니다.

인간의 용서는 용서 전과 후에 자신의 가치가 상승할 것을 고려한 용서개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남을 용서해준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용서받은 자는 나에게 어떤 식으로 종속되는 관계로 전락됩니다. 이로서 용서한 자는 용서받은 자에 군림하게 되고 이 또한 자신의 값어치가 그만큼 상승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용서를 철폐하고, 용서하는 자나 용서받는 자나 모두가 사람들이 하는 용서와 다른 차원의 용서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가 어떤 차원에서 사뭇 다를까요?

하나님의 용서는 끝지점에 서서 미리 시행하시는 용서입니다. 즉 심판날에 과연 유효한 용서가 되어야 제대로된 용서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8-9) 눈일을 빼는 고통이 대단하고 오른팔을 잃는 생활이 고통스러워도 나머지 성한 몸으로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훨씬 이익이 될 정도로 지옥은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겁니다.

마지막이 고통스러우면 전부 다 고통의 세월입니다. 과거에 잘 나갔던 것을 지금 고통 중에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심판대 앞에 선 우리 본 모습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없이는 그 어떤 인사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이 귀하고 위대하다는 겁니다.

즉 인간 사회에서의 용서란 용서하는 자의 자존심을 더높아주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는 용서받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심각한 죄인이었음을 들추어내는 주사 바늘과 같은 것입니다. “용서한다, 용서한다”라고 하나님이 외칠 때마다 우리는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가 확실해지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용서를 철폐시키고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여쭈기를 “내가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가치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기를, “일흔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에게는 남을 용서할 만큼 의롭지 못한 자임을 드러내기 위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내용은 용서의 본질에 대해서 잘 말해줍니다. 동네에서 행실 나쁘기로 소문난 여인이 가만히 예수님에게 와서 비싼 향수 상자를 왈칵 예수님의 발 위에 부어버립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 씻는데 주안점을 둔 행위가 아닙니다. 물로서 얼마든지 예수님의 발을 깨끗하게 씻을 수가 있습니다. 여인은 값비싼 향수를 예수님의 발 위에 부은 것은, 평생토록 자신의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분을 만났다는 그 감격과 그 고귀함을 사람들이 고귀하다고 생각한 향수와 견준 행동입니다.

즉 나를 용서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내가 뭔들 아까와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행위의 가치를 보여주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그 ‘용서’ 자체를 드러내고자 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용서란 사람들이 감추고 부끄럽게 생각한 그 죄마저 계속 들추어내는 용서로 작용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윤리나 도덕이나 자신의 거룩된 생활의 자랑같은 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용서가 크게 작용해야 구원될 자와 작게 작용해도 구원될 수 있는 자 사이에 등급이라고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듭니다.

즉 크게 칭송받는 자가 예수님의 피 아니고서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이 갖지 않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희생을 모독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는 ‘희생’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가 때로 있음을 알리는 가운데 주어지는 용서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이 세대나 오는 세대나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죄가 어떤 죄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공이나 발전을 꾀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인됨을 드러내기 위해 피를 흘렸는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을 운운하면서 그 능력으로 자신이 대단한 성공자로 거듭 태어나려고 합니다. 참으로 자신의 마음판에 피가 위에서부터 젓셔 흐른다면 우리는 그 희생 앞에서 고개만 푹 숙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발 자기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따지지 맙시다.

욥처럼 입을 막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아 돌아오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제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이용하려는 악령적인 인식을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