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60;1-3)이근호081001

아빠와 함께 2013. 2. 13. 10:37

 

일어나 빛을 발하라

2008년 10월 1일                           본문 말씀: 이사야 60:1-3

(사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사 6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죄인보고 “빛을 발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어불성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죄인에게는 나올 것은 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빛을 발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이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간들이 물론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고 “빛을 발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 백성을 다루시되 이 말씀이 성취되는 양상으로 다루시겠다는 뜻입니다.

빛은 하나님 소관입니다. 뿐만 아니라 빛을 발해야 될 사람이 등장하는 것도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인간과의 연결점이 끊어지지 않는 신입니다.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아이디어가 다 동원됩니다. 옛날부터 나라란 신을 등에 업고 등장합니다. 자신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신과 관련시킵니다. 신 앞에서 영웅이 등장하면 그 영웅을 시조로 받들므로 서 나라의 정당성이 보장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요 제사장으로 군림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혈통이나 씨족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 나라는 신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의 상상이 확대되어 구상해낸 신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숨어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나라의 신은 인간이 찾으면 얼마든지 찾아지는 신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내미신 약속에 의해서만 사람과 만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신은 인간의 본성이 담기지만 참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을 담아낼 그릇으로서 기존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백성을 만들어내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살던 곳에는 광명이 있었지만 애굽 사람들이 살던 곳은 흑암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밤 낮 같은 것은 자연스럽게 순차되어 진행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낮이 밤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이한 자연 질서를 보이신 것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나라인 이스라엘이 인간들이 상상도 못한 특이한 나라임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나라를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빛과 영광을 보여주어야 할 나라인데 그동안 유다 나라는 어두움에 짙게 깔린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법을 가지고 접근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이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어두움이 끼일 것 뿐입니다.

갈라디아서 5:4에 보면,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빛이란 결코 법적으로 정리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빛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어두움이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보여주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법이 아니면 아무리 해도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법적인 관계를 가지고 다가서게 됩니다. 즉 인간은 법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표현한 방식 안으로 하나님도 끌어당겨서 이해하려 합니다.

하지만 빛은 따로 있었습니다. 법에서 빛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5:14에서 성도를 가지고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만이 빛과 어두움을 압니다. 빛은 결코 인간이 만들어내지 못함을 압니다.

그리고 법이 있는 곳에는 항상 어두움 뿐임을 압니다. 이 어두움 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빛을 발하게 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18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빛을 발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공개하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2:2-3에 보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적으로 스스로 자기를 판단해서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려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법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자기 속에 있는 어두움을 온전하게 처리하지를 못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아무리 ‘미안하다’.‘사랑한다’고 되풀이해도 자기 속의 응어리를 다 해소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즉 자신의 의로움을 아무리 발휘해서 여전히 법적으로 미흡함을 남아있기 마련이고 어두움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 속에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서 나타나는 행위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빛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21에 보면,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간음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법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바리새인들을 만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여인을 돌을 치기 위해서 모여들었고, 이러한 법적인 상황을 예수님에게 가져왔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법에서는 돌로 치라고 명했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 바로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빛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이 예수님의 공로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법적인 조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혹독하게 알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을 때까지 법으로 정당화하려는 그 심보를 평생 알아서 평생토록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공로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