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자
2008년 8월 20일 본문 말씀: 이사야 57:14-18
(사 57:14) 『장차 말하기를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 내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 하리라』
(사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사 57: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사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사 57: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사람이 과연 옳다는 것이 없으면 인생을 불안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맨날 견주다가 볼일 다 봅니다. 그런데 만약에 참으로 옳다는 일을 알았다면 거기에다 인생의 전부를 다 걸어도 행복합니다. 과연 우리의 전부를 다 집어넣어도 싱글벙글 웃을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잠시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출애굽기 33:14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부탁할 것을 들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친히 가리라”입니다. 즉 모세는 혼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바가 곧 “내가 친히 가리라”입니다.
모세는 이미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적 차원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단독적으로 이 세상을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의 일을 본인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모세에게는 ‘자기 일’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세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산에 제물을 바치려 갑니다. 불 쏘시개를 짊어지고 갑니다. 이 때 아들이 묻습니다. “아버지, 불쏘시개는 있는데 왜 제물을 없습니까?”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게다”고 말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일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요 하나님에 의해서 마무리될 일에 자신들이 함몰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식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어야 믿음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시겠다는 겁니까? 왜 나님께서 친히 나서시는 겁니까? 우리 인간에게 일을 맡겨두시면 왜 안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옳다고 여기는 그 일을 자신의 친히 이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일’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자기 일’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일은 방해받게 되고 훼방받게 됩니다. 인간은 뭐든지 자신이 나서는 일은 모두 자기 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있어 참된 일이란 오직 ‘하나님의 개입’을 의미합니다. 즉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이루는 것이 올바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심 자체가 유일하게 올바른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태생이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주목하는 존재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는 무화과로 엮어서 치마를 만들고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요 본성입니다. 자기 딴에 수치를 가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노라고 우깁니다. 즉 사람이란 자기가 자기에게 가한 그 일을 잊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이처럼 ‘자기 일’이 따로 있을 때 그 일의 성과를 가지고 신의 뜻을 파악하는데 시험에 나서게 됩니다. 즉 “나의 일이 실패했느니” 아니면 “이번에 나의 일이 성공했느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자기 일이 따로 있는 이상,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이 즐겨 반겨줄 리가 없습니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돌이나 이상하게 생긴 느티나무에다 두 손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하는 식과 같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돈이나 느티나무에 대해서 미안한 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다음과 같은 경우와는 정반대입니다. 어떤 소매치기나 어떤 사람의 돈을 훔쳤는데 그 돈은 실은 곧 죽어가는 가장을 최후로 살릴 수 있는 수술비였습니다.
하지만 소매치기는 그 사람의 돈을 훔쳐서 자신의 유흥비로 다 허비했습니다. 그 소매치기 당한 가장은 졸지에 가장을 잃고 그것으로 인해 자식들이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그 부인이 정신병동에 입원해서 가장이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소매치기는 양심의 가책이 되어 있다가 20년 후에는 그 가정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는 경우를 예를 들어 봅시다.
비록 20년 만에 용서를 빌었지만 평소에도 그 소매치기는 늘 자기로 인해 풍지박산 난 그 가정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돌에다 용서를 비는 것은 실은 진정한 낮아진 마음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도 때도 없이 그 늘 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자신의 일이 꼬여서 잘 풀리지 않을 때, 영험이 있다고 여기는 그 돌에게 비는 겁니다.
과연 그 돈이 그들을 용서해 줄까요? 오늘날과 같은 과학 시대에 과연 이런 미신이 통할까요?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경우는 어떠합니까? 평소에 과연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시도 때도 없이 미안스러워 합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따로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일’이 있기에 그 ‘자기 일’의 성공 여부로 신에 대한 감사 여부가 결정됩니다. 어떤 집에 아들이 귀해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했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또 딸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무식한 귀신을 부적도 못 알아보는 법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이 가해자인 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피해 입은 쪽에서 피해를 가한 쪽에게 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어째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가해자가 되는 지를 모르게 됩니다. 오로지 자기가 벌린 일의 생사여부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패역한 자를 하나님께서 갉지 아니하시고 고쳐주시고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자기 일을 철회할 위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란 이처럼 일방적입니다. 이 일방적인 구원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임하게 되면 성도는 통회하고 울게 됩니다.
통회하는 이유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희생도 모르고 오로지 자신 일만 생각하는 그런 패역한 자를 고쳐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는 겁니다. 희생을 모르면 성령받은 자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가슴퍅에 이런 하나님이 주시는 희생의 화살이 꽂혀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이 아예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