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9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3-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개인적 자아, 이걸 존재라고 했죠. 존재라는 말은 뭘 분해하느냐 하면, 우선된 존재,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이 개인적 자아는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야, 니 죄를 몰라? 에이, 갖다버려라!’ 이게 아닙니다. 모든 사탄이든, 지옥 갈 사람이든, 천국 갈 사람이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하셔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부속품 하나 이 땅에서 버릴 것이 없습니다. 들의 백합화뿐만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주께서 알아서 쓰이게 하시기 위해서, 예비 된 것이고 배치된 것이고, 설정된 그러한 구조물들이에요. 전부 다.
따라서 이 개인적 자아가, 이게 죄로 드러난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아는 따로 있어요. 그 따로 준비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자아인데, 이 자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버지와의 사귐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 자아,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맞죠? 창조주를 아시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예수님의 자아를 우리의 개인적 자아와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바꿔치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거기다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도 모르고, 지키지도 못하고, 창세전에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모르다 보니까 사탄에 의해서 개인적 자아를 자꾸 고집하고, 모든 것을 자기한테 의미를 두는데, 하나님은 나한테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의미를 두는, 예수님한테 오는 동시에 그 뒤에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는 자가, 예수님 뒤에 관계 지어서, 동반해서 사귐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아는 순간 우리는 뭐가 되느냐, 나를 본 자는 무엇을 보았다? 아버지를 본 거죠.
이것은 새로운 자아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 모든 개인적인 자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자아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인데,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기능으로 해체되는데, 이 기능인데, 어떤 기능이냐 하면, 다양한 기능이에요. 다양한 기능.그 많은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정 인간을,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어떤 목사님이나, 어떤 특정인간을, 모세나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또는 노아나, 특정인간을 메시아로 간주할 수가 없는 거예요. 메시아로 간주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담이 죄 지었죠? 죄 짓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께서 왜 안 오셨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담 이후에 곧바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 지게 하셨다. 왜 그렇게 결정을 안 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시는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을까요? 뭣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까? 누가 답변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많이 봤다면서요? 어떤 사람은 백독 봤다면서요? 왜? 주님께서 효율적으로 일을 안 하십니까? 왜? 경제적으로 일을 안 하십니까? 왜? 쓸데없는 일을 많이 집어넣어놓고 뒤늦게 와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내시는 이유가 뭐예요?
바로 투입해야지요. 바로. 병들었으면 바로 처방전 내려가지고, 바로 십자가에 집어넣어야죠. 노아는 왜 왔으며, 모세는 왜 왔습니까? 바로 그 이유는 다양한 기능들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사귐이 품고 있는, 이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합류라고 해요. 합류. 품고 있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귐이 품어있는 그것이 이 지상에 스펙트럼처럼 쫙 펼쳐지게 되면, 노아는 예수님을 담당하는 한 기능이 되고, 엘리야는 예수님을 담당하는 한 기능이 되고. 제가 존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 되고.
그 기능은, 기능을 하는 존재에게 돌아오지 않고, 그 기능을 분여하는, 또는 배분, 공급한, 그 공급하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그 분을 향하여 수렴되게 되어 있어요. 어프로치approach,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모아지게 되어 있으면, 엘리야의 자기 기능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진정 구원받을 자는, 유일하게 구원받을 자는 예수님뿐인데,따라서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을 자는 진정 예수 이름뿐인데, 우리는 예수 이름을 드러내는 기능으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이름이 삭제고, 우리 이름의 소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며, 나는 이 죄 짓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해서 자꾸만 개인적, 이것은 내가 했다는 것, 이 기능은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기능이라는 것을, 그것을 죄로 규정해서, 죄로 규정한 그것마저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전도라는 하나의 기능을 채택했다는 것을, 본인이 결과적으로 수용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쉬운 예로 하면 이렇습니다. 부부가 되면 부부생활 자동적으로 됩니까? 부부라는 존재가 있으면 부부생활이라는 기능이 정당화돼요? 아니죠. 부부생활을 정당화해야 정상적인 부부가 되죠. 우리의 일상에도 보세요. 존재가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기능이 우선이다. 남녀 간의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자, 서로 해줄 수 있는 사랑은 이제 끝났습니까? 자,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결혼해서 이제는, 결혼이라는 것에 골인을 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사랑이 필요할까요? 불필요할까요? 답변해보세요. 필요하죠. 결혼했는데 왜 필요합니까? 결혼을 했는데? 왜 필요해요? 결혼을 했는데 왜 사랑이 필요합니까? 사랑의 목적이 결혼이 아니었던가요? 아닙니까? 깁니까?
남녀 간의 서로 연애하는 것이 결혼입니까? 결혼 아닙니까? 결혼이면 이게 땡인 거예요. 사랑하는 이유는 앞으로 계속 반복해서, 더더더 더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한 거예요. 그렇게 할 때, 그 결론이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부부네!” 이게 결론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결론을 목적으로 해버리면, 내가 결혼에 성공했다는 것을 목적으로 봐버리면, 우리는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긴장이 풀려가지고, ‘뭐 사랑한다고 안 한다고 설마 이혼하자고 하겠어? 나는 이제 그동안 연애한다고 꾹 참았던 나의 남성으로서의, 상남자로서 취미활동이나 한번 몰입해보자. 차나 바꿀까? 차 인터넷이나 하든지, 안 그러면 골프나 치든지, 등산이나 매진하든지, 안 그러면 낚시나 해볼까?’
그럴 때, 아내는 뭡니까? “이게 부부가? 살림하는 하녀지? 이게 부부에요? 니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하려고, 뭐 이게 애도 아니고, 경사도 말로 알라도 아니고, 마징가제트캐릭터 모은다고, 그거 한다고 월급의 반을 거기다가 쓰면서?” “나 니하고 결혼한다고 그만큼 밑천 들었으니까, 이제 결혼했으니까, 나의 상남자의 생활을 니가 좀 이해해 도!” “그럼 결혼은 왜 했어? 그것도 니 내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것도 결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었지.” “지금은?” “결혼 했는데 왜 물어?” 이래요.
여자분들 이거 듣고 화 안 납니까? 남자인 내가 들어도 화가 나는데? “내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하듯이, 그런 니도 니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해라!” 그럼 여자들도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백화점에 명품 싹쓸이 한 번 해봐? 카드 마이너스 한 번 해봐? 그때서 “이게 아니구나. 협상하자. 두 시간 니 취미생활, 두 시간은 내 취미생활.” 도대체 이게 결혼이에요? 갑자기 결혼이야기에 왜 흥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뭐냐 하면, 계속되는 기능이 안 나오면 그것은 진정한 결혼했다는 부부의 존재성을 붙이지 말라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결혼했으니까, 이제 아내에게 소홀해도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결혼 자체가 내 존재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로 하여금 더욱더 나 되게 하기 위한, 나를 더욱더 굳건히 하기 위한, 하나의 계략으로, 하나의 책략으로, 여자 하나 데리고 온 것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남성만이 하는 짓거리가 아니고, 좀 드물기는 하지만, 오늘 말조심해야 돼요. 드물기는 하지만 여자들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여자들이 재벌 3세 연예인을 꼬셔가지고 팔자를 고치고 지는 소비하는 재미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걸 흔히 꽃뱀이라고 하는데, 꽃뱀이 사실은 꽃뱀이 아닙니다. 꽃뱀치고 꽃이 없어요. 그냥 뱀입니다. 그냥 뱀이에요. 무슨 꽃뱀이 있어요.
모든 인간은 다 나한테 이익이 되고 이용가치가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기능이 나와서 자기는 그 기능을 어설프게 회수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뭐가 빠졌느냐, 이 기능에서, 나에서 나와서 나의 기능을 하고, “나는 고기 잡는 어부다.그러니까 나는 정당하다.” 이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이 기능에, 이 분열이, 이걸 분열하려면,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이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사전에 나한테 배분한 가상존재에요. 가상존재. 가상자아입니다.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세상에 마귀도, 지옥 갈 사람도 다 십자가에 불필요한 부속품이 아니라 다 필요한 부속품이에요. 다 필요한 부속품입니다. 아, 자꾸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집어넣게 되면, 우리의 존재 안에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는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고, 요한일서의 내용에 맞춰서 들어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상태에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걸 아까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으로 들어오죠. 사랑으로. 사랑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사랑이냐 하면, 십자가를 드러낸다는 것이 사랑의 완결체고, 이 완결체를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다섯 가지 제사, 화목제물이 되려면 앞에 있는 제사가 먼저 선행되고, 선행된 제사가 완료된 그 마지막 제사가 화목제물이에요. 화목제물 이후에 더 드릴 제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라는 말은 죄를 사할 수 있는 모든 근거는 예수님에게서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더 내놓을 행위는 인간에게서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선교한다고 해서, 추가적인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최종적인 것만 받지, 거기서 추가적인 것은 더 이상 받지를 않습니다. 헌신을 안 받아요. 주님께서는 헌금이나 돈을 안 받는다 말이죠. 우리의 봉사나 이런 것들을 받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찬양도 안 받아요.
시편에서 그렇게 찬양하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든 찬양은, 인터셉트, 예수님이 다 가져가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존재의 기능으로서 찬양이 나옵니다. 그게 어디에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아기로 태어날 때, 질문입니다. 자, 찬양은 누가 했습니까? 1번. 목자가 했다. 2번. 천사가 했다. 몇 번입니까? 천사가 했죠. 천사가 찬양하고 있는데, 목자가 거기에 끼어들어서 소프라노 해봐야 그거 찬양 안 받습니다.
왜?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찬양은 자기의 노래의 찬양으로 회수하는 그런 찬양이 백퍼센트입니다. ‘아, 이번 찬양에는 음정 두 개 틀렸다. 내 찬양 때문에 눈물 흘리네! 내 찬양 때문에 회개하고 다 나오네! 이야! 나는 이 정도 가치 있는 존재야!’ 내가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찬양으로 쑤셔보고, 십일조로 쑤셔보고,봉사로 쑤셔보고, 목사 넥타이 사주고, 목사 뭐 대접하고, 차 바꿔주고,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그 모든 행위가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을 테스트하기 위한, 하나의 쑤셔보기 위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화목제물에 섞일 수 없는 오염된 거예요. 더러운 것이에요. 더러운 손 가지고 화목제물에 끼어들면 안 돼요. 그러면 헌금하지 말고, 전도하지 말고,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경보지 말고, 그러면 성경공부 한다고 여기 왜 모였어? 하지 말라는 겁니까? 여기서 참 어려운 것이 있어요. 사람은 누가 하라 해서 하고,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위인이라는 것을, 본인이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욕망한테 못 이기기 때문에. 자기 욕망한테 못 이겨요.
차를 타고 가는데 시력이 안 좋아서, 저 500미터 앞에 경찰이 있어요. 자기는 속도위반인줄 모르고, 못 봐서 속도를 냅니다. 경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도 안 할 사람은 없습니다. 두 손 모아서 하는 이건 아니고, “주여, 오늘 아침에 운전할 때 기도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어떻게? 어떻게 좀 해주세요?” 경찰에 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본인은 알아요. 돈 날아가는 것이 아깝잖아요. 이 말은 뭐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잖아요? 그렇잖아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데, 경찰 하나 주께서 배치함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평소에, 가만히 있는 내 속에 뭐가 부글거리고 있다? 나는 돈을 사랑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부글거리고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적적하게 경찰 하나 세움으로써 발각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의 본능을, 우리의 욕망을 우리가 이긴다? “주여, 감사합니다. 경찰한테 돈을 빼앗기게 해서 감사합니다.” 이런 인간 없습니다. “주여, 할 수만 있거든 피하게 해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과연 내가 가는데, 옆 차가 과속을 해서 걸리는데, 자기도 몰랐어요. 경찰은 하나인데 차는 두 대이고, 먼저 온 차를 잡다가 나는 우회로 피해갈 때, 여러분 어떻게 반응해야 됩니까? 할렐루야! 하고 반응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 주님. 이 정도로 내가 죄인입니다.” 경찰을 무서워했다는 것은?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약간 늘려봅시다. 사랑 안에는 경찰이 없다. 이런 식으로. 사랑 안에는 부도가 없다. 사랑 안에는 계약이 깨어짐이 없다. 분명히 계약한다고 해놓고 다른 회사하고 하는 이런 것. 사랑 안에는 내 자식 성적 떨어짐이 없다. 이게 사랑이거든요. 좀 생소하십니까? 이 사랑이? 좀 이상해요?
개척교회 하는데 교인이 다 나갔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이게 사랑이거든요. 나한테 돌아오지 않는 사랑. 왜? 나한테 돌아오면 뭐가 없다? 사귐이 형성되지 않아요. 사귐이. 사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독점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 있음에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게 사귐이에요. “아이구, 그래. 내 자식이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사귐이거든요. 근데 우리는 이 지상에 태어나면서, 우리는 창세전에 내용도 모르고, “나 여기 있다. 건들지 마라!” 순 이린 식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죽어서 어디 갈꼬? 좋은 데 가고 싶은데? 뭘 믿을까? 절에 갈까? 절에 가면 중들 머리 꼬라지 보기 싫고. 교회 갈까? 어?교회 가니까 윤리, 도덕적 설교가 나온다 말이죠. 윤리, 도덕적 설교를 할 때마다 나는 약간의 반성만 하면, 점점 더 지상에서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의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어떤 자만감, 자족감, 이걸 주는 거예요. 내신 성적이 올라가는 그 기쁨 아시죠? 내신 성적. 성경은 숙제고, 이걸 지키면 지킬수록, 그걸 못 지켰을 때,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제공하니까.
잘못 했을 때도 괜찮아요. 잘만 하면, 반성하면, “이 짜식! 기특하기는, 니 반성할 줄도 알고?” 나쁜 짓 해놓고 주님한테는 보상으로 곱빼기로 받으니까. 그 회개하는 즐거움이 괜찮아요. 왜?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점점 자기가 의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교회에 새로운 교인이 오면 봅니다. ‘니가 수능 어느 정도야? 내신 성적 어느 정도야?’ 비교하게 돼요. ‘어쭈! 30분기도? 어? 저거 봐라!’ 그걸 노리고 40분 기도하고. ‘성경을 두 장 봐?’ 세 장 보고. ‘감사헌금 10만원?’ 5만원 더 내서 15만원.
이게 뭐냐 하면, 개별적 자아가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 30분 하는데, 저 사람은 두 시간하고 왔어요. 그때 감정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두려움. 저 사람이 FM(Field Manual)일까? 저 사람이 정답이라면, 저 사람은 새벽기도 2시간 했는데, 나는 30분밖에 못했기 때문에, 한 시간 반이 미흡한데서 오는 어떤 징계, 저주가, 이번 주 바이어 계약하는데 어떤 악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는 그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 고3 되어서 수능 앞두고, 갑자기 부모들이 경건해지기 시작합니다.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다가 수능에서 1점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생각하면, 그 책임이 누구한테 옵니까? 부모한테 오죠. 이게 사귀는 겁니까? 지가 자기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는 겁니까? 나 빼놓고 다 적이라는 거예요. 사귐은 그게 아닙니다. 사귐은 성령 안에서 완료에요. 자, 요한일서 3장 들어갔습니다. 벌써 들어갔어요. 쥐도 새도 모르게. 그게 완료인데, 완료가 뭐냐 하면,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는 겁니다.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
여러분!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고 하면 딱 떠오른 파가 있어요. 무슨 파냐 하면, 구원파죠. 왜 구원파가 이단의 정점이냐,박옥수, 유병언, 구원파도 한 20개가 될 걸요? 구원파가. 교인들 일일이 찾아가서, “구원받았습니까?” “예. 구원받았습니다.”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니가 알아서 뭐하게? 니가 와?” “지가 뭔데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합니까?” “구원받았으면 성령이 와야 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텐데, 변화가 없다는 것은 구원 안 받은 겁니다. 제가 변화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이런 고마울 데가!”
구원파가 구원받았습니까? 묻는다는 말은, 제가 강의 첫 번째에 어떤 질문을 했던가요?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다른 질문을 했죠? 그게 뭡니까? 복음이 무엇이냐? 이었죠. 이제 정신 차려서 기억들을 다 하시네요. 그런데 개인구원에 매여 있는 사람은 결국은 어디한테 꼬임 당할 수밖에 없어요? 구원파죠. 구원파에 유혹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기존의 한국교회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교회가 시도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구원파의 전신이에요. 전신.
여러분,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어머! 놀래라!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말 한다는 자체가 대책이 있고 처방전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도 그런 소리하는데, 우리교회만 확실하게. 경상도 말로 학실하게.표준말로 확실하게. 제가 하는 말은 거의 사투리에요. 확실하게! 확실하게! 빠른 지름길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저쪽에서는 복잡하게 하는데 우린 아주 간편하게, 스마트하게, 캐주얼로 해드리겠습니다. 믿고 영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자, 시작을 뭐로부터 했어요? 구원부터 해서 마지막으로 뭐로 끝납니까? 구원의 기쁨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나 존재로부터 해서 나 존재로 가는 거예요. 안 말려 들 수가 없어요. 안 말려 들 수가.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 목사는 쉽게 말해서 영업하는 장사치죠. 소비자는 구원받고자 하는 소비자고. 교회 목사는 구원시켜주는 중개인이 되고. 그 중간에서 커미션을 받아 챙겨서 노후대책과 생계를 보장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목사들의 관심사잖아요.
그 관심사를 간단하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양.’ 언제 목사보고 목양하라고 했어요? 목양이라는 말은 전제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이 교회가 깔려있죠. 교회의 머리는 누구죠? 교회 머리가 목사입니까? 부목사는 모가지고? 교회 조직표 한 번 보세요. 전도사는 모가지라니까요. 모가지 잘못하면 모가지 날아가는 수가 있어요. 장로가 재정이사고? 주식에 지분 가졌고? 그런 겁니까? 초신자는 미생이고?
문제는 교회를 증거 하는 거예요. 우리교회는 정당 하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회이니까, 이게 뭡니까? 개별적, 개인적이에요. 존재에요. 우리교회,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교회 목회가 “우리교회 있다!” 있음,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건 기능이 아니에요. 존재부터 시작한다고요. 존재부터. 모든 성경 해석을 우리교회가 부흥해야 돼야 된다는 것에 모든 성경구절을 다 쏟아 붓습니다. 쏟아 붓는데 그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 개인구원을 시도합니다.
“여러분! 육입니다. 육에서 혼으로 바뀌어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워치만 니, 지방교회. 이단 중에 이단이 워치만 니Watchman Nee에요. “목사님! 지금 어디까지 왔습니까?” “육에서 아직 멀었는데, 까딱하게 혼까지는 왔네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더 열심히 기도하시면 혼에서 영으로 점프합니다.” “언제까지요?” “지금까지 20년 했는데 한25년 더 하게 될 걸요.”
과연 그 인간이 딱 깨놓고 말해서, 육에서 혼, 혼에서 영이 되고 싶어 할 겁니까? 아니면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권력을 자기 몸 하나 교회에 희생해서, 자식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되고, 자기가정이 화목하게 융성되는 것을 반대급부로 노리겠어요? 안 노리겠어요? 노리죠. 내 몸 하나 교회에 헌신해서, 정작 내가 노리는, 얻고자 하는 노림수를, 주님께 이쁨 받아가지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서, 정작 내 한 몸 바쳐서 얻고자 할 때, 그것은 상술입니다. 그거는 상술이에요.
그 소비자들이 쓰는 상술을, 목사라는 이름에 장사치가 마음껏 유린하고 농락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죠. 헌금하지 말라고. 여러분 가정에 있는 것도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신 건데, 주님 것을 왜 지 맘대로 엉뚱한데 냅니까? 니 돈도 아닌데, 자기 돈도 아닌데, 왜 엉뚱한 데 내? 세 사람이 신자면 그게 교회고, 두 사람이 신자면 그게 교회에요. 가정도 교회에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듣는 사람 짜증내겠지만, 죽을 때까지 꽉 껴안으세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부모는 돈이 있어야 부모에요. 돈 없으면 부모 취급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자기 돈을 교회에 내지 말고, 끝까지 붙드세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탕웨이가 한 것처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주님이 주신 돈을 왜 놓칩니까? 지가 무슨 자격으로 남의 돈을 왜 내요? 거기다가?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그럼 목사들은 어떻게 먹고 삽니까?” 목사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굶어죽을 때, 그게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도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성령 안 받은 사도바울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하다가,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사도바울은 죽겠다는데 발목을 왜 잡습니까? “주여, 이거 복음입니다.” 발목을 왜 잡아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죽고 싶은데 너희들 때문에 못 죽는다. 주께서 못 죽게 하셨다.” 이게 뭐냐, 사도바울의 존재의 구원이 아니라, 이 기능은 주 예수님이 주신 기능, 성령 안에서 주신 기능이에요. 나는 가난하나 부요한 자요, 나는 없는 자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나는 산자다. 이 기능을 움직여야 돼요. 그래서 존재에서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 짓는 기능을 의의 기능으로 바꿀 때 십자가가 투입되는 겁니다. 존재에서 존재로, 기능에서 기능으로 바꾸어져야 해요.
사귀는 여자가 남자한테 물어봅니다. “당신은 왜 날 사랑해?” 여자는 자꾸 확인하고 싶거든요. 하도 사기꾼들이 많으니까. “사랑하니까.” “언제까지?” “영원토록!” “오케이! 결혼하겠어!” 결혼이 영원입니까? 결혼으로 끝났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에는 자기만을 향하여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을 때, 여자가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 헤어지자.” 라고 하면, 남자가 하는 말이 “이미 결혼했잖아?” 이게 무슨 말이에요?
기능이 있어야 결과적으로 결혼이 있는데, 남자는 결혼을 기능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관계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결혼했다는 것으로, 결혼 자체로 자기 존재를 커버하는, “나 결혼했다. 나 이 정도 괜찮은 존재야.” 존재로 확정지은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절대로 나하고 이혼할 수 없어. 왜? 니가 나하고 이혼하면 내 존재에 흠집이 생기니까.” 또 이야기하고 내가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여러분 화나지 않습니까? 또 이야기해야지.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부 또 여자도 그래요. 꼭 이 이야기를 붙여야 균형이 맞아요. 일부에요. 일부.
우리의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복음적인 것하고 관계없이, 십자가를 언급하고, 예수 언급해도, 결국 우리 모든 것은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이제는 성령 받아서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이것 또 골치 아픈 게, 성령 받으면 고쳐지는 것이 아니에요. 제발 좀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고쳐지는 것이 아니에요. 더욱더 내가 어느 정도로 죄인인가를 더욱더 확실하게 그 죄를 증가시키는 겁니다.
왜? 십자가와 연결되기 때문에. 옛날의 법은 내가 잘난 체하기 때문에 주어진 법이라면, 새로운 성령의 법은 왜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속에 그동안 잠자고 있던 죄를 더욱더 확대시키는 하나님의 멋진 작업이 전개됩니다. 뭘 해도 죄가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마귀한테 농락당하거나 협박, 공갈 받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저주받는 경우라도? 나는 이미 저주받았어! 니 망한다? 이미 망했어! 니 그러다 죽는다? 이미 나는 죽었어! 니 지옥 간다?이미 구원받았어!
이거는 뭐냐 하면, 누가 자꾸 뭘 하라 마라고 하는데, 니가 예수 믿으란 말이야!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기능이 나오는데, 왜 예수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믿을 주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누가 산다? 누가 나의 자리를 대신합니까? 예수님이 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산다. 예수 이름으로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산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있죠. 그럼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기 뭐가 필요합니까? 죄인이 필요하죠. 십자가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이죠. 화목제물은 뭐가 필요합니까? 죄가 있을 때만 화목제물이잖아요. 따라서 그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경유하는 겁니다. 경유하게 되면, 나는 저주받아야 돼! 나는 멸망 받아도 마땅해! 나는 징계 받아도 마땅해! 나는 지옥가야 돼! 라는 것을 경유하면서, 예수 안에서 그것이 뭐냐, 십자가만 드러내는 거예요.
이 경로가 아무리 많은 경로라도, 이게 다 어디 안에 들어있다? 이미 구원이 확정된 영생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이제 사랑이 이해되십니까?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사랑답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돌리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따라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뭐 해아 됩니까? 죽을 때까지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뭐, 논리가 이상합니까?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정신 차려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 성경말씀 보고 마음껏 거룩한 생활, 성화의 생활을 해서, 너희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그럼 그 모든 말씀이 다 어디로 간 거예요? 어디로 가기는요? 나에게 왔죠. 모든 말씀이. 나에게로 오게 되면, 그렇게 나에게로 와봐야, 거리에 경찰차 한 대 있는 것 가지고도 두려운데. 전에는 이런 말씀들이 시시하게 보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보다 더 살아있는 것이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말씀이 더 살아있는 거예요.
전에는 주의 말씀이 내가 의미를 붙여줄 때, 그때 살아서 나온 것처럼 여깁니다. 어린이 뮤지컬 같은 것을 보게 되면, 토끼 탈을 쓴 애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고양이 탈을 쓴 애도 여기 있고, 그 다음에 거북이 탈을 쓴 애도 여기 있고, 또 사슴 탈을 쓴 애도 여기 있으면, 주인공이 노래 부르잖아요. 룰루랄라~♬ 나는 모든 동물의 친구~♬ 해가지고 거북이를 탁 치면 거북이가 쏘옥 나와 가지고 같이 춤을 추는 거예요. 이 상황극이 뭔지 여러분들 예상하시죠? 이 상황극을?
주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시면서 여기에 딱 있습니다. 나는 모든 말씀을 지켰다~♬ 하면서 탁 치니까, 니는 넓은 길로 가고 있다~♬ 아이구, 죄인이구나~♬ 주여! 십자가 감사합니다~♬ 화목제물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있는데, 뒤에서 너는 죄를 지었다~♬ 니가 좁은 길 했다~♬(갑자기 발음이 꼬여서 방언처럼 되는데)이번 주 너는 바이어와 계약 깨진다~♬ 나는 깨져야 한다~♬ 나는 실패해야 된다~♬ 나는 어떤 것도 다, 지금 죽어도 마땅하다~♬ 마귀가 하는 말이 재미없어서 니하고 안 놀란다~♬
얼마나 협박, 공갈을 받는, 사탄을 미워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시고, 절망하시기 바랍니다. 절망, 실망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은 아직도 나의 존재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다는 거예요. 무거우면 스트레스로 이어집니다.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어디에 속했다는 겁니다. 우리를 대신하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표면에, 문패에, 주의 이름이 있어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
마귀가 와서 우리를 대항할 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대하지 않고, 내가 죄인 된 것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하신 기능,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에 대적할 수 있는 그 대상자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나서서 마귀를 퇴치할 때, 그 관계를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사랑의 관계, 그게 바로 사랑이 다시 한 번 돋보이는 현실태가 되는 겁니다. 현실태가 되는 거예요. ‘아하!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구나.’
주님께서 이 사랑의 관계를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감사하게도 가끔은 우리에게 확인할 수 있는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에 대한 리스트를 지금부터 읊어드리겠습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기름 값 내려감, 경주지진, 북한 핵실험, 이런 것이 올지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덤벼! 덤벼! 이 세상에서, 나의 주변에 어떤 것이라도 덤벼!
덤빌 때에, 내가 또 예수 믿었기 때문에 나는 의인이라고 촐랑댔던, 어제 7시간 전에 그 촐랑댐이, 그러한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여기는 경주가 아니니까, 캘거리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아이구, 안 되는데, 돈 모아서 부동산 하나 샀는데, 내진설계를 안 했는데 하필이면 그 동네에 지진이 일어나다니!’ 하고 벌벌 떨다가, ‘아하, 내가 주의 이름 안에 있으면서도 또 나의 이름, 나의 명예, 나의 자존심, 나의 자존감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아, 예수님께서 보내신 마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쑤시고 들어왔구나. 감사하리로다.’ 주님께 감사하세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했죠. 근데 곧장 그 다음 구절이 뭡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게 뭐냐, 거함. 소속.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해는 된다고 생각하고, 제가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믿습니다.” 말을 하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이론도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해줄게.” 라는, 뭐 그 정도로 봐주겠습니다. 그런 이론도 있다. 결정은 성령이 여러분들을 가르칠 것이고 내가 가르칠 문제는 아닌데.
개인구원과 소속구원입니다. 개인구원으로 출발하게 되면, 개인구원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름이, 개인구원, 특수구원, 나라는 특수구원이기 때문에, 나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이름을, 남한테 양보할 수 없는 특별난 이름을 갖고 있어요.그 이름을 구원하자면, 그 이름이 도중에 깨어지거나 훼손되게 되면, 우리는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아브람이, 아브람은 구원을 못 받아요. 아브람이라는 존재가 계속 되는 한, 존재에서 존재가 되는 한,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나중에 완성되죠. 십자가로. 십자가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 아브람은 죽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름이 바뀌면서 이 이름은 죽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니고, 아브람을 죽이고 여기 자리에 투입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아브라함적 기능이 작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뭘 바치느냐 하면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데, 그 이삭이 미워서 죽이고 싶은 아들이 아니에요. 어떤 아들이냐,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그것도 둘, 셋이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그 아들 바치는 존재가 아니고, 아들 바치는 기능.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이삭이라는 존재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적인 기능이 아브라함에게 작렬하여 이삭이라는 그 존재를, 바침으로써 그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로 나타나는 어떤 특수한 기능이 있어요.
그거는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죽어야 산다는 거예요. 죽어야 산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해야 영생이 확인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 계속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 제발 인생을 실패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는 경우를 제가 말씀드려야죠. 그냥 하면 또 오해하니까. 실패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벤츠 타는 실패, 부동산 두 채 더 가지는 실패, 우리 애가 하버드 들어가는 실패, 땅 값이 열 배가 뛰는 실패, 경찰 있는데 안 들키고 그냥 돌아가는 실패,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환난이요, 핍박입니다. 그 핍박치고는 괜찮은 핍박이죠?
그렇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시험케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있어야, 이런 것들이 있어야 내가 얼마나 평소에 돈 좋아하고, 출세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고, 그것 안에서 내가 안도감을 느끼면서, 마치 주님한테 복 받은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이 죽을 죄인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러한 멋진 상황들을, 부자 되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기도에 응답 팍팍 되게 하시고, 아들 목사 시켜놨더니만 오천 명 목회하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보다 나라는 존재에 꽂혀서 살아가고 있는, 마귀적인, 악마적인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뭘 아느냐, 어디에 소속되어 있어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예수 이름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예수 이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의 존재가 아니라,주님의 존재의 확인차원에서, 주님의 일하심의 증명차원에서, 우리는 이 캘거리에서, 그리고 저는 대구에서 앞으로 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강의처럼 이렇게 돼버렸는데, 이제 이렇게 했으니 두 번 다시 안 모일 거잖아요?
자, 3장 8절 보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나니, 죄를 짓는 존재는 마귀에게 속한 존재니, 이 모습은 나의 자아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모습을 보고 있죠?현재진행형이죠. 내 모습을 보고 있죠. 속한 자니, 속한 자니죠. 속했다는 점에서는 뭘 이야기합니까? 이게 내 모습인데,이상하게, 현재 우리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주님한테 속해있죠. 주님한테 속해있으니까 옛날에는 어디에 속해있었다는 것을, 저쪽 편에서, 옛날에 속해있던 그 모습을, 그 상황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성령이 임함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어떤 모습인가를 우리에게 확인하는 겁니다.말을 제가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통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아내가 자꾸 남편을 지적질하고 잔소리해요. 책망하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아내와 남입니까? 한 부부입니까? 남이라면 그렇게 잔소리 안 하죠. 특히 조수석은 참 위험한 자리잖아요. 조수석은. 어떤 때는 핸들을 뽑고 싶어요. 조수석에서 간섭하면. 근데 그럴 때 그런 생각이 든다는 자체가 뭘 의미해요? 내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소리에요. 뭐냐 하면, 나는 나가 있을 때에 비로소 나의 의미가 돼요. 너가 있음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지적받죠.
그럼 성령이 하는 일은 뭡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죠.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성령은 날마다 책망하고 간섭함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어서 죄를 짓는 자는 뭐다? 마귀에게 속했다고 성령께서 우리보고 책망을 하잖아요. 요한일서 3장 8절을 가지고, 이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니” 라고 책망을 하게 되면, 그걸 성령의 책망으로 알아듣는 사람은 마귀에 속했습니까? 주님께 속했습니까? 주님께 속했죠.
그런데 마귀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 라는 말을 하게 되면, 마귀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하냐 하면, 이렇게 해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 온지 6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좀 더 시간을 주시면, 죄 안 짓도록 노력하고, 거룩하도록 노력해서, 주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지금 성화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자훈련 10단계인데, 지금 5단계까지 왔습니다. 열심히 금요일에 성경공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마귀에 속한 거예요. 예수님께 속함을 증명해야 될 교회가 마귀에게 속한 자를 마치 성령에게 속한 자라고 위조해서 그렇게 확정짓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어요. 왜? 소비자가 그걸 원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나는 어떻습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나는 어떤 인간입니까? 오늘 밤에 내가 죽어도 천당 갈 만합니까? 지옥 갈 만합니까?” 그게 되게 궁금한 거예요.
그럼 목사님께서 처방전을 주면서, 보통 처방전을 주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 물약은 하루에 세 번 잡수시고, 이 알약은 식사 후 30분에 잡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처방전을 내리면 어떻습니까? 그게 플라시보 효과죠. 그게 어떤 약이고 간에 나는 이 약을 먹으면 장사 잘 된다는 희망과 소망과 비전과 드림과 꿈이, 현재 자기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수 있는 뭘 줍니까? 힘을 주죠. 현재 교회의 처방전입니다. 이름도 비전교회. 꿈을 키워라! 이게 처방전이에요. 이게.이게 마귀에게 속한 교회 처방전이라니까요.
그런데, “목사님. 오늘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성경말씀에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할 때, 옛날에는 ‘에이, 미약한 인간이 그걸 어떻게 지켜? 그건 예수님만 지키지. 우리는 못 지켜.’ 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오른뺨을 때릴 때, 왼뺨 내놓는지, 순간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고 싶은 욱하는 성질이 나왔습니다.” “누구 앞에서 그랬습니까?” “주의 말씀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왜?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 속한 자였는데, 이제는 그걸 깨닫게 된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불신자 같으면 무심코 넘어갈 그 성경구절이, 이제는 실제적으로 나의 구원과 영생과 주님의 기능과 관련된 주의 기능으로서 나한테 스며들었기 때문에, 컨그레츄레이션! 다시 한 번 당신의 구원을 확인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당신과 함께 있음을, 주님이 주가 되고 당신은 결과물이 된다는 것을, 그 관계를 알려주신 것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 짓지 아니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님의 처방전이에요.
그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놓아라.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를 가라 어떤 사람은 5리가라고 했는데, 25리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 안 되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랬죠. 용서해주라고 하니까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됩니까?” 주님께서 “요것 봐라! 그럼 일흔 번에 일곱 번.” “그렇게 많이?” 그럼 베드로가 오기가 있어서 그럴 다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일곱 번, 일곱 번......,” “용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야. 니가 죄인된 것을 알 때, 이미 남을 용서했느니라. 왜? 개별적 자아는 없고 보편적 자아밖에 없거든.” 십자가 앞에서 누굴 건방지게 용서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잖아요? 누가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지가 죄인 주제에.
그러니까 시간 다 돼 가는데, 여러분들 분명히 들어야 돼요. 남을 용서하는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대로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에요. 그게 성령의 열매에요. 내가 남을 용서할 자격이 없어. 내가 용서한다는 자체가 죄야. 할 때, 상대방은 무슨 저런 온유? 무슨 저런 화평? 저런 기쁨이? 그게 바로 성령이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밤 그냥 주무시고, 내일 또 언제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