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9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2-이 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늘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말씀중심으로 다시 모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같은 하늘에 어느 곳에 있든지 말씀으로만 일하시고, 말씀으로만 모든 것을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번 집회에서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요한일서를 시작했고, 지금 캘거리에서는 요한일서 3장부터 해서, 그리고 5장까지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부터 하려면 1장, 2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제가 요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라는 것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전하신 말씀인데, 이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왜 살기 분주한 인간들에게, 사도요한이 구태여 이러한 편지를 꼭 전해야 될 그 분만의 이유는 뭐냐, 이것부터 알아야 돼요.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요한일서를 전하겠다는 겁니다. 이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요청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사람이라면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또는 주문할 때, 또는 음식을 먹을 때,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지목하고, “이것 먹겠어요.” 또는 “이 물건 사겠습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왜냐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결정이나 선택을 통해서 바깥으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절에 가지 않고 나는 교회 가겠다. 나는 불교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뭐냐, “예수 믿는 것을 내가 결정했다는 것,그리고 그만한 결정권은 내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겠죠. “나는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겠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지옥 싫어!(☓) 나는 천국 좋아!( ⃝)” 이 결정을 내가 했다는 말이죠. 나는 지옥가기 싫어 천국 가겠다고 했을 때에, 그러한 결정을 할 때에, 당신이 그러한 결정을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 그리고 나는 죽어서 내가 원치 않는 곳은 가지 않겠다.” 라고 이렇게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할 때, “당신은 뭘 보고 그렇게 결정을 하고 선택했습니까?”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할 말이 없어요. “그냥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말입니다.” “당신은 왜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권리를 행사합니까?” “내가 좋다는데? 니가 와?” 갑자기 시비가 되죠. “내가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데 니가 뭔데 시비를 거느냐?” “내가 거기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런 뜻이거든요. 지금까지 제 말 틀린 것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말 틀린 것,집사님! 있어요? 없어요? “내가 천국가고 지옥가기 싫다는데 니가 왜 시비를 걸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그걸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죽어서도 천국(좋은 곳)에 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게 성경입니까? 성경 어느 대목에 나는 죽어서도 꼭 좋은 데 가겠다는 것이, 창세기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말라기에 나옵니까? 마태복음에 나옵니까? 어디에 나오죠? 안 나오죠. 성경에 안 나오게 되면 그게 진리일까요? 진리 아닐까요?
지금 어떤 마트에서 세제를 파는데 세제 하나에 2달러, 근데 특별세일로 2달러에 두 개 드리겠다는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자, 그게 성경일까요? 성경 아닐까요? 성경 아니죠. 마트에서 2달러에 한 개 살 것, 두 개 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갑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천국 갈 것 아니면, 그 마트 거래 끊고 가지 말까요? ‘나를 천국 못 보내는 곳이면 안 가!’ 이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도 꾸역꾸역 보다 더 새로운 세일을 찾아서 세제 사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출발을 뭐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미 인간은 나 위주로, 내 좋은 쪽으로, 나름대로의, 이 나름, 나름대로의 자기 성경책, “나는 이거는 양보 못해! 죽어도 이건 양보 못해! 진리냐 아니냐, 나한테 묻지도 마! 나는 그러길 원했었어. 이건 내가 원하는 바야.” 라는 어떤 문장 같은 것이 ‘나’ 뒤에 붙을까요? 안 붙을까요? 반드시 붙게 되어 있습니다.
좀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런 질문을 했죠? 우리가 사도요한을 초청한 적도 없고, 이 캘거리에 사도요한 초청한 적 있습니까? 없죠. 초청한 적도 없는데 사도요한이 건방지게 요한일서라는 책을 우리에게 왜 줬느냐? 이 말이죠. 그 준 의도가 뭐냐? “아, 하나님이여. 저는 천국가고 싶은데, 사도요한이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요한123서라는 그 편지를 손에 쥐어서 우리에게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우리가 사전에 요청한 적 있습니까?요청한 적 없죠.
요청한 적이 없는데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마트에서 세일 하냐, 안 하냐를 우리한테 물아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세일했다면, 그것을 믿고 안 믿고의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바로 나한테 있죠. 나한테 있다는 말은 어느 게 갑이고 어느 게 을이다? 성경이 을이고 내가 갑이다. 그걸 선택 하느냐, 마냐를 결정하는 내가 갑이 되죠. 그럼 내가 갑이 된 채, 계속해서 이번에는 요한일서, 다음에는 마태복음, 다음에는 말라기, 다음에는 창세기를 공부하겠다. 그가 계속 시도해서, 그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시도해서 가는 나라는 무슨 나라냐? 무슨 나라일까요? 나의 나라죠. 나의 나라를 두 글자로 줄이면,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모든 인간은 교회 다니면서 지옥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교회 간 사람도 지옥가고, 교회 안 간 사람도 지옥가고.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갑니다. 그 이야기를 어디서 하고 있느냐,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목사님. 요한일서를 믿고 싶습니다. 요한일서를 믿겠습니다.” 요한일서는 이야기합니다. “누구 선택이냐? 누구 결정이지?”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고, 자기나라 만들 사람이 또 있구나.” 자기나라 만들 사람이 또 있어요.
이 나라는 것은, 또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있습니다. 저는 거짓말 안 해요. 나라는 것이 있죠? 누가 있으라고 했습니까?이걸 우리가 몰라요. 누가 있으라고 한 것도 모르겠고,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 내가 있는 거예요. 태어나서 교회 갔더니만,하나님이 당신을 있게 했다는 소리를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있게 했다는 말이,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닐까요?제가 물을 때 굉장히 수상하게 묻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굉장히 난처하죠?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닐까요? 둘 중의 하나인데, 아무거나 한 번 찍어보세요? 정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결정을 누가 내렸습니까? 내가 내렸죠. 왜? 내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기 이전에 먼저 갑질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나’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일서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을 주니까 이게 나의 구원과 관련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은 뭐냐 하면, 타고난 나의 존재성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성이 담겨 있는 그 성질을 마음껏 발휘하는 겁니다. “기다렸습니다. 요한일서!반갑습니다. 사도요한! 나를 천당보내기 위해서 이렇게 귀한 성경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나는 무슨 나가 되게 되면 개인적인 나가 돼요.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죠? 자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복음에 대해서 필요한 나는, 개인적인 나가 아니고 보편적인 나에요. 보편적 나. 너라고 하는 나와, 나라고 하는 나와, 차이가 없는 나.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서 요청되는 나입니다. 복음에서 새로 규정하는 나에요. 근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개인적인 나에요. 개인적 나.모든 것이 나로부터 스타트하는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천국가고 지옥가고 내가 결정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사도요한, 아무리 예수라 할지라도, 내가 예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것은 단지 하나의 예수였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부를 때, 그것은 나에게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어떤 시 패러디하는 느낌이 들죠. 예수라는 것이 예수 본인의 의미는 탈락해버리고, 이미 나한테 끌려오면서 이 예수는 나에게 구미가 맞는, 탈색되고 변질된 예수로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나에게 이용당하는 겁니다. 활용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괴물이 되고, 나는 더욱더 예수마저 알게 된, 하나의 굳건한, 강화된 존재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괴물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를 건드리면 누구라도 나는 가만 못 있어.’ 그런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식으로, 그렇게 서로가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뭐냐, 1장, 2장 요약한 겁니다. 왜? 1장 2장은 몰랐으니까. 3장부터 진도나간다고 했으니까. 1장은 시카고강의에서 여덟 강의, 2장은 뉴저지강의에서 다섯 강의, 버지니아에서 여덟 강의, 지금 그걸 집약적으로 요약하는 겁니다.
이걸 하면서 지금 어디서 틀렸느냐를 보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한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차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할 때는,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 내 개인적인 구원욕구와 욕망과 관련되어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지 않고, 성경대로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복음이 나타났느니라.” “복음이 나타났네.”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복음이 나타났으매.”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내 허락도 없이 왜 나타납니까?” 이래 되겠죠. “내 허락도 없이? 누구 마음대로? 내가 요청한 적도 없는데?” 자장면 시켰는데 짬뽕 왔다. 나는 자장면 먹기를 원하는데 왜 짬뽕이?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그 문제인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마지막 때에 뭐가 나타났으니?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러니까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는, ‘아,날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이 나타났구나!’ 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접목을 시켜버려요. 미치지 않고서야. 왜냐하면 항상 나는 무슨 나냐 하면 개인적인 나거든요. 개인적인 나.
우리가 언제 봤다고 하나님하고 나하고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입니까? 언제 봤다고?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 복음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내구원이야기 아니에요. 누구이야기냐? 예수님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야기.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야기를 받으면서 무슨 멍석을 먼저 깔았어요.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라는 멍석을 깔고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이 본래 해야 될 일을 일방적으로 내 이익과 내 소원달성을 위해서,어서 오세요! 이럇샤이마세~ 어서 오라고 반기는 거예요.
복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능이 나옵니다. 숨겨진 기능. 기능이 나오는데, 우리는 뭐부터 출발했느냐 하면, 존재가 이미 닦여져 있어요. 그러면 복음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이고. 창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사이에서 의논된 것이고. 이건 상식적으로 아시죠? 몰라요? 맞아요. 복음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정 되었으니까, 근데 나라는 존재는 창세전을 몰라요.
내가 여기 있음에, 그리고 생로병사, 살기에 너무 힘들기에, 뭔가 인생역전, 인생만회를 죽고 난 뒤에 천국에서 해보겠다는 심보로써, 어떻게 나를 이 고통에서 해탈할 방법이 없을까?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저 세상에서는 아픈 곳도 없이,눈물 닦고 그렇게 살아볼까? 이미 존재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능이 우선이겠습니까? 존재가 우선이겠습니까? 기능이 우선인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존재에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복음 안에 있는 어떤 기능과 현재 나의 존재가 그 후에, 그 나중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존재케 되었는가? 이렇게 연결시켜야 되겠죠. 제 이야기에 이의 있습니까? 없죠.
그럼 뭐를 잠시 유보해야 되겠습니까? 나의 구원을 유보를 해야 되겠죠. 나의 구원을. 만약에 내일 캘거리에 비가 온다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사람들에게, “이보게! 내일 비가 온대. 근데 그 비가 나를 위해서 온대.” 이렇게 하면 미친 사람이에요. 왜, 비가 오는 것이, 보편적으로 비가 내리는데, 개인이 거기에 끼어들어요? 개인이 왜 끼어듭니까? ‘아,비가 와?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비가 와? 그렇다면 내가 대처해야 되겠지.’ 비 온다는 기능이 우선이고,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대처해서 그 기능에 부합되게 살아남을까? 그걸 생각 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고, “복음은 이렇습니다.” 라는 것이 귀에 들리더라도, 우리는 순서를 바꿔야 됩니다. 아,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나 있기 전에 프로젝트가 먼저 설정되고 확정된 사실이 나한테 밀려온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쉽죠? 쉬운데, 지금 제가 더 어렵게 이야기해버렸죠?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럼 그 기능 앞에서, 내가 말소돼야 돼요? 아니면 또렷이 버텨야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내가 말소돼야, 없어져야 되죠.
왜냐하면 처음으로 돌아가려면 나중에 있는 것은 주목대상이 되지 말아야 되거든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어디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건방지게 복음이야기에 나를 집어넣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나를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집어넣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존재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부터 먼저 이야기하는데, 그 기능을 요한일서 1장 3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귐이 나와요. 사귐.
사귐은 적어도 둘 이상입니다. 그럼 2내지 3이 나오겠죠. 사귐이 되려면 둘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존재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존재한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고기 잡는다.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고 흔한 말이죠. 그럼 내가 고기 잡으면 영생 얻습니까? 저녁에 회나 쳐 먹지 영생하고 관계없죠. 그러나 요한일서에 보면, 니가 고기 잡는다는 그 기능은 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성부와 성자사이에 사귐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의 말을, 쉽게 말해서 나는 고기 잡는 어부죠. 내가 고기 잡는다는 것과 매치를 시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평소에 우리 일상적인 생활습관으로써는 이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이거 불가능하죠. 이거 불가능하잖아요.불가능한데, 복음이 내용으로써는 니가 결부돼야 된다고 복음은 우기고. 나는 존재로 버티고 있기에 결합이 안 되고. 에이, 모르겠다. 요한일서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넘어가고, 읽는 것으로 주님께 때웠다고 하면서 넘어가는 거예요. 내용도 모르고.
모든 현실은 바로 사귐의 현실화, 구체화로써 이 세상에 펼쳐졌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의 사귐으로 펼쳐졌는데, 그 목적은 뭐냐, 아버지와 나와의 사귐 속에 너희들도 같이 집어넣어서 같이 사귀자는 것이,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고, 목적이고, 프로젝트가 되는 겁니다. 이 요한일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기도 해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사로 사귀기 위함이라.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들이 내 안에.
자꾸 아버지와 아들에 누굴 자꾸 끼어들게 하느냐 하면, 성도를 자꾸 끼어들게 해요. 끼어 넣으려고 하니까, 예수님의 기능이 결국 하나의 현실로써 작동을 하고,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이게 작용을 하고 작동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고기 잡는 어부다. 여기에서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나만 드러내는 기능일 뿐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고, 오늘도 내 할 일했다. 퇴근하자. 또 내일 아침에도 그렇게 하고. 여기 기능은 나로 회수되는, 나로 다시 돌아가는, ‘내가 내 할 일 다 했다. 역시 내 할 일은 이것뿐이야.’ 라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기능이, 우리의 기능에 손톱만큼도 안 들어가요.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공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고기 잡는 어부다. 나는 ~하는 ~다. 의사다, 판사다, 하면 결국 이것은 뭐냐, 모든 기능은 무엇을 증명 하느냐, 나의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이 일이라는 것은. “당신이 하는 일이 뭐요?” “판사요.” “당신은?” “몰라.”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이 피고인을 위해서 내가 변호합니다.”옛날에는 외지부. 드라마 옥중화에 나오는데. 나는 변호사다. 그러면 변호사는 누굽니까? 그건 나지. 결국 나로 돌아가요.나라는 일은 나를 증명하고, 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결국 무엇의 증명이에요? ‘내가 믿는단 말이야.’ 이걸 증명하죠. 신이시여!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믿습니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그거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나라, 자기가 중심이 되는 나라,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 되죠. 지옥가기 위해서 열심히 예수 믿으세요. 성령 믿고,삼위일체 믿고 그렇게 믿으세요. 백날 믿어봐야, ‘나 이정도야!’ 그런 결론밖에 도달되지 않는, 그건 아무것도 없어요. “나 이정도 믿음이니까 건드리면 니가 이단이야.”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요한일서를 왜 줬는가? 요한일서에서는 사귐이라고 했고, 우리는 사귐이 없어요.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나는 독재자입니다. 나는 나한테 독재자에요. 최정점에 내가 서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 예상 밖의 비가 오더라도 그것에 적응을 잘 하는 나는, 내가 보기에 대견스럽고 훌륭하고. 역시 내가 나한테 칭송하고 박수치고 싶은 겁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하루를 보냈어도, ‘참 오늘 아름다운 밤이야!’ 자기에게 격려하는 거예요.
심지어 우리가 지옥 갈 때라도, 지옥 가는 그 처절한 발걸음 속에서도 위로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요. ‘힘내! 지옥에도 사람들 있어! 거기에도 너같이 똑같은 사람이 있어. 걱정하지 마! 당구장도 있고 탁구장도 있고 골프장도 있어. 니가 못 다한 것을 거기서 해! 염려하지 마! 주께서 니를 예정 안 해서 지옥 보내니까, 주님의 심술이 그렇다 치고. 니가 니를 기죽여야 되겠어? 니라도 니에게 용기를 부여해줘야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에 있어요. 이걸 못 고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나타내느냐 하면,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하느냐, 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것에서의 분열. 해체를 시키는 작업이 바로 요한일서에 말하는 사귐의, 이 현실화의 작업이 바로 해체입니다. 해체, 분열,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파괴. 나를 파괴시키는 겁니다. 존재를 파괴시킵니다.
내 존재를 파괴시키면 거기서 두 가지의 기능이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누가 나를 건드렸어?’ 라고, 나한테 잠복되어 있는, ‘나는 오직 나만 사랑해.’ 라는, 자기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집념. ‘만약에 내 뜻대로 안 되면 나는 스스로 자결할거야. 자살할거야.’ 그 정도로 자기에게 집착된 자기 기능, 강력한 반발. 이게 나오면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누군가 나를 건드렸다는 사실. 두 가지의 상반된 기능이, 자아가 깨어지면서 두 개가 나오는 겁니다. 그 내부가 두 개의 요소로 나오는 거예요. 두 개의 요소로 나오면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의 존재를 깨는 작업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깨었다고 하고, 거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반발을 하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온 적그리스도, 사탄의 앞잡이, 또는 사탄이 하는 짓, 기능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는 결국 뭐냐 하면, 모든 존재를 다 묵살하고, 기능과 색다른 기능, 적대적 기능, 두 개의 상반된 대적적인 기능가지고 현실을 전부 다 설명하겠다는 것이 요한일서의 취지입니다. 취지에요.
분열이 없고, 해체가 없고, 파괴가 없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성령이 와 닿지 않아서 생긴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나 좋아라고 한, 내 존재, 어릴 때부터 그렇게 귀하게 컸던 나를, 20대, 30대, 40대... 80대가 되도록, 끝까지 내가 나를 포기하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여러분이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고 윤복희가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결국은 내가 나에게 관심두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관심두지 않고. 최종적인 관심사는, 누구도 나를 사랑해줄 자가 없다는, 강력한 나에게서 나온 이 기능. 나를 스스로 지키려는 이 기능. 이 기능에 대해서, 이게 바로 니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폭로시켜주는 또 다른 기능, 그 기능 나오면 여러분 성령 받은 겁니다. 성령 받은 거예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여러분들은 오늘 죽어도 오늘 밤 낙원에 갑니다. 낙원에 갑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1장 10절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다른 말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음은 기능으로 작용하고, 그 기능이 우리 현실에 와 닿으면 우리는 무슨 존재로 발각된다? 죄 있는 자로 발각된다. 그 죄가 뭐냐, 하나님의 사귐에 대해서 극렬하게, 악랄하게 반발하기 때문에. 사귐은 숫자로 하면 2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뭐를 고집하죠? 1을 고집하죠.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많은 레슨을 해도, 결국은 누구 좋아라고? 나좋으라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 믿어도, 결국은 누구 좋아라고? 나좋으라고. 이게 강의 첫 번째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여, 십자가 지세요. 그 다음 선택은 내가 알아서 선택하겠습니다. 골라! 골라! 골라잡아~ 아, 십자가 이게 괜찮네! 내가 행함으로 구원 못 받는 것을, 대신 십자가로 죄 용서했다고? 아, 이거 아이디어 괜찮네! 이 아이디어 내가 선택하겠습니다. 이 사람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이 뭐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뭐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중요한 타이밍에 답변이 안 나오면 어떻게 돼요? 지금까지 강의했는데?
예수 믿는 것이 뭐다? 예수 믿는 것이 뭐였다는 말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이게 바로 죄였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게.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내가 평소에 하는 행세 그대로 예수님을 선택해서 내가 믿은 거예요. 아, 저 아이디어 괜찮네!나는 행함으로 율법 못 지켰는데, 주께서 그 모든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나는 저걸 선택하겠어. 저건 내 미래를, 내 운명을 보장해줄 것 같은 괜찮은 보험이라고 본 거예요. 보험. 상조보험. 상조보험 위험해. 요새 다 부도나요. 최고의 상조, 보험은 바로 예수 믿는 거다. 나는 결심했어! 따땃따~따땃~따따~ 나는 결정했어! 드디어 나는 얻었어!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귐을 어디서 찾아요? 사귐을 찾을 데가 없네? 자기 결정에 자기가 스스로 위로받고, 자기 결정에 자기가 쾌락을 느끼고, 쾌감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는 존재. 그 존재에게 무슨 사귐이 있습니까? 그런 존재에 자기가 극대적인 신이 되어있는 입장에서,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니는 나의 극단적인, 절대적인 존재로 전락한 나에 대해서, 니는 흠집을 내기 위해서 나한테 접근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를 수상히 여기고, 관찰하고, 그리고 경계하기 마련이죠. 경계, 거리를 두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는가, 나는 주체가 되고 상대방은 뭐가 되느냐, 객체가 되죠. 그럼 그 객체의 결정은, 저게 누구다?저게 뭡니까? 독수리입니까? 저 독수리를 판단하는 기능은 어디서 나왔어요? 나에게서 나왔잖아요. 예수님은 나의 죄를 속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 결정은 어디서 나왔죠? 나에게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가짜에요. 성령이 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의 육신에서, 마귀의 앞잡이로서 예수를 믿은 거예요.
그 예수가 진짜 예수일 리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어요. 진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와 사귀는 것같이, 하나님과 사귀는 그런 존재가 나올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성령의 결과물이지. 결국 나 구원받았다고, 나 좋아라고 믿는 예수는,그건 예수가 아니죠. 그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나 좋아라고 믿는 예수기 때문에, 이거는 개인적인 예수에요.
개인적인 예수다보니까, 교회에 두 사람만 모여도, 두 사람이 믿는 예수 이미지가 다 달라요. 교회 교인이 백 명 같으면,몇 가지의 예수가 나옵니까? 백가지 나와요. 백가지. 가족이 다섯 식구라면, 그 가족이 다 예수 믿는다면, 몇 가지의 예수가 나옵니까? 다섯 가지의 예수가 나오니까, 이건 예수님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안 돼요. 주님께서는 존재를 이야기할 때,니 존재에다 내 존재를 협상하자, 타협하자가 아닙니다. 내가 너한테 제안을 할 테니까 선택하라. 그게 아니고, 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이유가 개인적인 자아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보편적 자아로 바꾸는 거예요. 보편적 자아.
보편적 자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열 명이 모여도 동일한 예수님이 나올 때, 그게 보편적이라는 용어가 합당한 거예요.보편적인 용어가 합당한 거예요. 개인적인 자아에서 보편적인 자아로 바꾸어줘야, 그 보편적 자아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보편적 자아는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생기느냐? 아버지와 아들이 사귐에서, 그것이 잠재되어 있다가, 성령을 통해서 구체화되면, 모든 하나님의 택한 성도는 개인적 자아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보편적 자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요한일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소속.’ 성경의 단어로 이야기하면, ‘거하심.’ 사도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안.’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안, 할 때, in 그리스도. 어디 안에 있다. 안에 있다를 한 번 그림으로 그려볼까요? 그림으로 그리면 여러분들이 다 알 텐데, ⃝ 안에 있다. 안에 있으니까 여러분이 보기에는 갇혀있죠. 그러면 갇혀있는 힘이 세요? 갇혀있는 내가 힘이 셉니까? 갇힌 힘이 더 세죠. 그럼 여기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결과물이에요. 그런데 내 곁에 어떤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도 갇히게 한 결과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의 결과물에 있다 보니까, ⃝ 안에 갇힌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의 예수님이 같을까요? 다를까요?같습니다. 같죠. 그 같다는 용어를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라도 뭐가 있다? 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앞에서, 화목제물 앞에서, 하나님의 기능 앞에서. 예수님의 기능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능을 기능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로 드러나야 한다? 어떤 기능도 죄가 되어야 하고, 그 죄가 되는 근거는 뭐냐, 나는 전에는 개인적, 절대적, 특수적, 절대적인 자아로부터 나의 인식이 나를 존재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성령이 올 때에, 비로소 나는 알았다. 뭐냐, 내가 개인적, 절대적 존재로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폭로당하는 이 기쁨과 즐거움이 성령의 기쁨이고 주님의 사랑의 기쁨입니다. 내가 하는 예수 믿는 것, 내가 하는 헌금,전도, 봉사,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한 기능인데, 전에는 내가 헌금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로 하여금 헌금케 한 거예요. 왜? 나로 하여금 헌금하는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전에 아프리카,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갔다. “주여, 은혜 받은 티를 냈습니다. 은혜를 공짜로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가지고, 제 한 목숨 바쳤습니다.” 라고 해서 자기 개인적 기능으로 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개인적 기능이 아니고. 선교사로 왜 가냐고, 내가 선교사로 가는 것을 비난했던, 고국에 있던 어떤 권사님의 그 존재와 내 존재와 둘 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하나님의 사귐의 기능이라는 것을 밝히시는 겁니다. 이번에 문장이 너무 길었죠? 설명이 필요합니다.
“선교사로 가지 마!” 라고 했던 권사님의 권면도 뭐가 된다? 죄가 되고. “아닙니다. 나는 성령에 이끌려서, 성령에 응답받아서 파키스탄에 갑니다.” 라고 우겼던 나도 죄가 되고.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을 안다면, 둘 다 그 사실을 인식한다면,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따라서 형제는 어떻게 된다? 싸우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래서 서로 싸우세요. 그게 서로 사랑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이상한 소리한다고 하는데,서로 싸우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싸우는 것이. 지 성질,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지 성질을 유감없이 터트리는 그것이, 결국 주님 주신 사귐에서 나온 사랑으로 실현되기 위한, 하나의 전부 다 주님의 전략이고, 하나의 주님의 활발한 실제적 활동입니다.
아까 캘거리에 일부 모인다고 했죠? 그 모임을 파괴시켜야 해요. 그거 파괴시켜야 합니다. “우리 모임에 참석하세요.” 라는 것도 죄고요. “예. 참석하겠습니다.” 라는 것도 죄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모일 때는 각각 지 팔 흔들어야 돼요. 그게 우리의 성깔에 가장 부합되는 겁니다. ‘아이고, 가기 싫은데 참고 가야지.’ 이거는 자기 성격과 전혀 상반되는, 지금 연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발 고집을 부리세요. “니가 뭔데 오라마라 하느냐? 니가 뭔데? 니가 교주야? 아이고, 까딱했으면 새로운 조직 만들겠네? 이게? 뭐 조직 만들어서 교회하고, 니가 좀 희생 좀 했다고, 희생하면 지도자야? 그래 희생 많이 해! 희생한 그것을 우리는 이용할 거야.”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지 팔 지가 흔드는 식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가더라도 제발 부탁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지금 아직 설명 시작도 안 했어요. 이 거하심에 대해서. 이 거하심에. 이 거하심을 설명하는 거예요. 뭐 안에? 기름부음 안에.성령 안에 거하심입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 거하심은 어떻게 한다고요? 아무도. 아무도, 에브리바디everybody. 내가 아는 단어 몇 개 안 돼요. 지금 몇 개 안 되는데. 아무도, 그 다음에 뭡니까?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가르칠 필요가 없고. 그 다음에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뭐라고? “니는 죄인이야. 죄인으로 니를 반드시 증명하고 확인하고 말거야.”
그렇게 가르친 결과가 뭡니까? 아, 주님의 기능이 나의 기능보다 우세하구나! 나보다 누가 강하다? 주님이 강하고, 나는 주님보다 적구나. 주님의 강함에 밀렸다는 그 결과물이 뭐냐, 주님을 알게 되었다. 주님이 나보다 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오늘 밤에 가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나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입니까? 구원받은 주님의 나라, 하늘나라, 그게 성령 안이고, 그게 바로 천국이잖아요.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이잖아요. 나는 죄인 되고, 천국 가니까 어린양의 보좌 있고.
죄인아! 소꿉놀이 많이 했지? 니 죄인 된 거 니 뜻 아니었어. 사탄의 뜻이라고? 그 사탄 누가 불렀는지 알아? 내가 너한테 사탄 보내가지고 마음대로 농락당하도록 했어. 실은 사탄 배후에 내가 있었어. 너로 하여금 요한일서 이 계시대로, 죄 있는 자 만들어서 화목제물의 의미와 가치와 효과를 통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사라지고. 뭐다? 복음이 이것이다.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가 아니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아, 이게 바로 복음이군요. 복음을 위해서 나는 죄인 되어야만 하는군요.
자기 존재를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저 결정은 따로 있고, 그 결정은 나와 주님 사이에 요한일서가 깔려있으며, 그 요한일서의 내용대로 나한테 주어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나의 어떤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나 사이는 요한일서에서 무슨 글이 적혀있고,무슨 내용이 적혀있고, 그 의미가 적혀있고, 그 의미가 적혀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리얼리티reality, 현실로 덮쳤던 사실을, 왜 나는 뒤늦게 이걸 알게 되었는고? 기름부음, 성령이 있을 때는 뒤늦게 알게 되는 겁니다.
‘목사님이 가르쳤구나. 이목사님이 먼데서 와서 가르쳤구나.’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 고백일 뿐이고.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 자아, 개인적인 나에게서의 고백이고. 그냥 참고사항, 저는 이렇게 이해했다고 제시 할 뿐이고. 여러분의 판단은 여러분도 아니고, 여러분 속에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판단하실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단 한명도 남에게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다 주님께서 전도했죠. 사도바울은 그냥 다루어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물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진도 좀 나가겠습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는 믿든, 안 믿든 이해는 한다고 하고요. 그건 제 소관이 아니고요. 이해는 한다 치고,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가 뭐냐 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을,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두 글자로 이렇게 합니다. 언약이라고 하고, 그 언약의 완성태를 요한일서에서는 네 글자로 표현합니다. ‘화목제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요한일서는 스스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두 글자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선지자를 통해서 뭘 줬느냐 하면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 율법을 줬는데, 율법을 줬다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그 지킴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화목제물의 완성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을 준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한 것 같지만, 중간에 인터셉트intercept, 가로채기 한 분이 있습니다. 율법을 줌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 율법을 줬는데 죄가 나왔다는 말은, 어디에 문제가 생겼느냐 하면, 율법을 주신 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로마서 7장에.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율법대로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문제가 있죠. 그럼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 사실은, 율법을 조금씩, 조금씩 줘버리면, “이것은 못 지켰지만 이거는 지키지요. 이거는 나중에 지킬게요.” 자꾸 미루는 식입니다. “아, 내가 바쁘다 보니까 교회 못 나왔습니다.” 이렇게 자꾸 핑계대면서 점점 자기를 지연시켜요.
근데 율법이 완성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율법의 완성이 화목제물이 된다면? 어떤 누구도 이미 율법을 완성되게 지킨 분이, 있어요? 없어요? 완성되게? 한두 개 지킨 것 말고. 모든 주어진 율법을, 몽땅 다 일관되게 지킨 분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으면 결국 인간들은 뭡니까? 인간들은 못 지키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죄인이 되고. 그 다음에 죄의 값은 뭐다? 그냥 목숨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 끊어지는 것이 벌이라면 자살하겠다. 율법이 심판이 되니까 이게 저주가 돼요.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저주가.
율법 주어서 화목제물로 완성한다는 말은, 사랑이 나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게 한, 율법을 완성하게 한 경로로써 주어지는 거예요. 경로로써. 필수절차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위에서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뭐가 성립돼요? 저주가 현실화 될 때만, 저주 안에서만 주님의 완성이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저주가 있을 때만 피어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여, 저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 라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속에서 어떤 기능이 작용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능이 작용하는 거예요. 따라서 마귀가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어이!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해야지?” “아니야. 나 저주받을 거야.” 이러면 마귀가 주는 그 협박과 공갈이 통하겠어요? 통하지 않겠어요? 본인이 저주받겠다는데.예를 들어서 어떤 마귀가 저한테 찾아와가지고 뭘 주느냐 하면, 곱창주고, 개고기 내놓고, 그 다음에 순대 내놓고, 그 다음에 오리고기 내놓고 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하나님의 복을 주실 겁니다. 이렇게 할 때 먹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입 맛 없어서 가죠. 입맛이 없어서. ‘뭐 이런 게 다 있냐?’ 하면서.
그러니까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죠. 그 말은 본인이 화목제물 십자가 앞에서 무슨 자다? 저주받도록 하나님께서 이 캘거리에 살게 했다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캘거리면 캘거리, 한국이면 한국, 대구면 대구, 살게 하신 거예요. 목사 되게 하신 것은, “저주받는 것을 니가 모르지?” 이제부터 니가 저주받아 합당한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목사 되게 하고, 장로 되게 하고, 집사 되게 하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