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0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5-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반대했잖아요. 그 반대의 증거가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면 왜 반대했을까?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그 자체에 몰입합니다. 내 것에 대해서 지적질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잔소리하지 말라는 이런 식이죠. 그 자체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계속 연속적으로 동질성, 동질성, 동질성을 지속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동질성 유지자체가 뭘 거부하느냐 하면, 숨겨진 진짜 하나님의 모습을 거부하는, 하나님이 반대세력이 갖고 있는 본질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요한일서를 누가 요청했습니까?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계속 제시하는 겁니다. 이게 현실이라고. 성경의 이야기가 현실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 말이죠. 아까 화장실에 가보니까 저기에 있는 간호사아주머니들이 딴따딴따~♬ 딴따딴따~♬ 이러며서 춤을 추더라 말이죠. 저게 현실이냐 말이죠? 저게 현실이냐?
이건 이런 뜻입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죽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어딘가에 살아있다.” 이 문장의 뜻은 뭐냐 하면, 사람이 살다가 죽게 되게 되면, 죽은 자들끼리는 다 아는 어떤 한 장소에 모여 살고 있다. 이런 내용이잖아요. 이런 내용이.이 내용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겠습니까? 이 내용이 우리에게 추가적으로 어떤 내용을 더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추가적으로 더 이야기하는 것이 없죠. 여기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처럼, 죽어서도 한 데 모여 산다. 추가적인 다른 의미가 없죠. 추가적인 의미가 없다는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지금 안 나타나있죠. 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문장이, 이게 하나님의 뜻 맞지요? 라고 억지로 추인을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아는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이것에 대해서, 아마 천국이 이런 나라이지요? 라고 인정해달라고 강요하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는 어디에 살아있죠? 산다죠. 그런데 여러분, 살기 위해서 행동합니까? 살아있는 것이 행동이 나옵니까? 아니면 행동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걸까요?
살아있기 위해서 행동을 해버리면, 살아있다는 자체에서 어떤 추가적인 의미가 안 나와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어제 이야기한, 존재에서 기능이 뽑아져 나온다면, 그 기능이 비로소 우리가 사는 목적과 이유가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뭘 하느냐 하면, 동화에 보면, 둘이 사랑했대요. 뭐 했대요. 아, 둘이 열심히 어떤 행동을 하는구나. 그래서 둘이 결혼했대요. 끝. 결혼하면 그거 사랑이잖아요. 사랑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종결지어버려요. 계속 어떤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사탄은, 악마는 모든 것을, 새로운 기능을, 인간이 행동하는 것을, 자기가 여기 영원히 있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사탄의 생각에 오늘날 우리 생각이 갇히고 말았는데.
성경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어디 살아 있다가 아니라, 천국이 있다면 천국다운 행위를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천국 가는 사람이라면 천국 가는 사람끼리 계속 행위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을 쭉 보세요.요한일서 3장 13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미워하는 행위죠. 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우리가 형제를 뭐하므로? 사랑함으로. 행위가 나오죠. 그러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주를 했다면, 그 거주 자체가 끝이 아니고, 거주한 행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거주를 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미 확정시킨 것은, 너를 구원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 구원했으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행위를 보여준다 이 말이에요. 이 이야기 들으니까, 기존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이 똑같이 들립니다. 헷갈립니다. 이런 생각이 들죠? 구원받았으면 티를 내야지? 이런 생각하고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행위로 보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본성이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함은 중간과정으로 다 집어넣어버리고,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최종적인 결과에 도달했습니다.” 하고 그냥 사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마귀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살면 된다는 동질성을, 자체적인 동질성을 고집을 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까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10절을 다시 봅시다. 제가 방금 전 시간에 했던 취지가 나와요.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라고 되어 있죠. 이 말 그대로 하면 이쪽 영역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쪽 영역은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이쪽 영역은 어디에 속했다 할 수 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죠. 그러면 끝났네. 끝났죠. 그럼 우리가 이렇게 사네, 산다, 존재한다, 이걸 자꾸 목표로 잡지 마라 말이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뽑아내기 위함입니까? 마귀에 속한 자는 마귀에 속한 일을 뽑아내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뽑아내는데, 그 행위가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행위임을 드러내고, 이거는 사탄에 행위에 의해서 드러낸 행위임을 보고자 함입니다. 너 행복하게 살라는 목적이 아니라 니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행위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원했다는 겁니다. 주님의 행위를.
그러니까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구원받았으면 뭐 볼 것 없다고 하지 말고, 구원받은 자가 어떤 행위를 보여주는가를 더 생각하라 이 말이죠. 구원받은 자가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걸 보여주라는 것이 지금 사도요한의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마귀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본문이 아주 재미있어요. 저 혼자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뭐냐 하면 여기 요한일서 3장 18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기 또 행위가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메시아가 지나간 이후에, 여기 와서 다시 이 세상이 온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말과 혀로 사랑하는 집단으로, 그렇게 규정짓기 위한 행위를 니가 보인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속한 사람의 행동을 보이는 것이라는 겁니다.
한 번 예를 듭시다. 아까 아프리카 예를 들었는데, 어떤 이웃에 있는 같은 교인이 간이 아프다. 목사님께서, “여러분 권사님께서 간이 안 좋습니다. 간의 생체조직이 맞아야 수술해서 살 수 있는데, 혹시 누구하나 자진해서 간 떼 줄 사람 없습니까?” 라고 한다면, “뭐 늙은 사람이 대충해서 죽지, 뭐 할라고 살라고 하나?” 이런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아이고, 그 권사님 욕심도 많다. 다른 사람은 간을 원하지도 않는데, 왜 그리 살라고 급급 하느냐?” 이런 핑계를 대면서 자기가 간 떼 주지 않는 핑계를 정당화하겠죠.
그런데 20대 애가 간이 아프다. 이식을 원합니다. “아이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빨리 가라. 간 이식 원하지 말고.” 이렇게 할 수 도 있겠죠. 그런데 순진한 어떤 집사님이 “제가 드리겠나이다.” 아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제가 간 떼어 주겠습니다.” 했을 때에, 그 부흥사님이 하는 말이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내한테 상의했습니까?” “아니요. 이건 주께서 시킨 것이기 때문에, 제가 간을 드리겠습니다.” 아내는 기겁을 하죠. 그 간이 지, 간이 아닌데 떼 준다고 하나?
자, 질문합니다. 그 간 떼 주는 것은 진실한 사랑일까요? 말과 혀로 한 사랑일까요? 문제 간단합니다. 진실할 사랑일까요? 말과 혀로 한 사랑일까요? 1초 2초 3초 4초 5초...계속 시간은 흘러갑니다. 빨리 답변해주세요. “말과 혀로 한 사랑입니다.” 그게 말과 혀로 한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 말과 혀로 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거예요. 하나님께 속한 자는 뭘 아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그러면 사망도 알까요? 생명도 알까요? 둘 다 알아야죠.
따라서 사망이 뭔가를 우리의 몸을 가지고 여기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이래서 지옥가야 되는구나를 마음껏 보여줘야 하잖아요. 보여주는데 그 보여주는 동기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성령이 와서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보여주게 되면, 어떤 청년이 간이 없다. 간을 떼 주기 위해서 손을 들면서 하는 말이, “이게 바로 말과 혀로 때우는 전형적인 그러한 거짓된 사랑입니다.” 라고 하면서 간을 떼 주는 거예요. 지금 무슨 말인지 혼동이 되는데, 이해되시겠습니까? 어떤 행위도 항상 우리는, 나는 생명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나오는 사람은 없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행위를 보여줘야 되지, 생명을 보여주는 행위는 인간에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제 좀 머리 좋은 사람은 약간 감이 옵니까?
내가 간 떼 주는 이것이 얼마나 자부심이겠습니까?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본분이다. 아무도 안 할 때, 내가 할게.이것이, 내가 그전에는 진실한,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줄 알았더니만, 말씀에 비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전형적인 말과 혀로 때우는 가짜 사랑인 것을, 이미 구원 받고 난 뒤에, 아! 이렇게 간사하기 짝이 없는 위장적인 가짜 사랑이구나. 따라서 그 가짜 사랑을 행사해야 된다? 안 해야 된다? 이걸 행사해야 돼요.
헌금하는 것이 죄다. 같은 논리입니다. 헌금하는 것이 죄니까, 헌금 안 한다가 아니라, 헌금하면서, 보세요. 내가 이런 식으로 지옥 갔던 인간입니다. 에이, 묵으라! 이런 짓 하면서 지옥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죄를 누가 없애줬다?십자가에서 주께서 이미 합격시켰습니다. 이제는 말한다. 이게 바로 죄인 것을! 헌금한 것이 죄고, 선교한 것이 죄고, 교회봉사 한 것이 죄고, 기도한 것이 죄인 것을! 이것이 영생 받은 사람이 보여 줄 행위입니다. 이게 바로 행위에요. 행위.성경말씀 하나도 어렵지 않죠?
그래서 이 본문은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자기성화의 책이 아니라, 이것은 뭐냐 기이한 책이고,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내용만 담아서 우리에게 준 거예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 내용을 주었을 때, 우리는 뭐로 오해하느냐 하면, 우리가 옛날부터 요청한 것처럼, 그러한 선입감을 여기다가 집어넣고, 집어넣은 견해를 도로 끄집어내면서, 이거는 주님의 해석이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우길 수밖에 없어요.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킵니다. 아무리해도 못 지킵니다. 왜 못 지키느냐, 우리가 그 형제를 위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못 지켜요. 도와주면서 왜 못 지키느냐, 도와주게 되면 마치 그것이, 도와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보여주는 행동인양 오해하게 돼요. 제가 지금 계속 꼬고 있는데, “목사님. 그만 꼬세요. 어지럽습니다.” 하겠는데.
마태복음 25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소자가 뭐라고 했던가요?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이 형제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할 때에 그들의 의식을 했습니까? 못 했습니까? 전혀 의식을 못했어요. 그러면 오른편에 있던 양이 평소에 아무런 의식 없이 행동합니까? 무심코 좀비처럼 이렇게 행동합니까? 전부 다 생각해요. 이거는 형제사랑, 이거는 목마를 때 도와줘야지. 한시도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 없어요. 다 생각하고 행동해요.전부 다. 염소도 마찬가지고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뭐다? 이거는 니가 저 사람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고 한, 그 해석은 누가 한 해석입니까? 미래에서 찾아간 주님의 해석이죠. 그러니까 현재에서 찾아간 해석과 미래에서 찾아온 해석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정면으로 빠빵하고 충돌을 일으킬 때, 콘택600처럼 우리 자신의 행동이 깨어지면서,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진짜 하나님의 본질, 십자가가 나오죠. ‘나 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없으면 벌써 지옥 갔었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어부는 고기 잡는 기능을 한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죠. 어부라는 존재는 고기 잡는 기능을 보여준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가 삽입될 때는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것이 아니고 기능에서 기능으로 나와요. 고기 잡는 기능이 십자가가 투입되고 난 뒤에는 고기 잡는 기능이 아니고, 고기 잡는 그것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 나의 존재행동이 아니라 주님의 행위고,나는 그저 도구로 쓰일 뿐임을 알죠. 도구로.
그럼 내가 형제가 배고픈 것을 알고 도와주게 되면, 우리가 옛날식 같으면, “형제여, 배고프제? 내가 도와줍니다.” “아이고만, 안 도와줘도 되는데?”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니까 형제를 위해서 가만히 있으면 용서치 않으리라, 해서 제가 도와줍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빠져버렸어요? 뭐가? 십자가가 빠져버렸죠. 십자가가 왜 빠졌습니까? 이게 뭐가 안 깨졌어요? 중간에 콘택600처럼, 중간이 부러지질 않았죠. 이게 부러져야 여기서 십자가가 나오잖아요. 십자가 행동이 나올 때 그게 영생이거든요.
십자가라는 것은 영생의 행동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관계성이 십자가에서 나온 거죠. 이웃을 위해서 헌금하는 그러한 죄인을 십자가만이 그런 행위를 한, 자기 동질성 유지책을 주께서는 분질러서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죠. “아이고, 뭐 없는 돈을 주십니까?” “제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십자가 전하러 왔습니다. 당신은 내가 돈 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죠? 이거 다 나의 의로 돌아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오른손이 한 것은 왼손이 반드시 알게 마련이다. 그런 뜻이에요.
니가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리라는 말이 뭐냐, 니가 처음부터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스포트라이트를 양쪽에 두 개를 달고 다니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는 말은, 간음은 타고났으니까 니가 고칠 생각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니가 한 번도 맹세 안 하고 하루일과를 출발한 적이 있는가를 한 번 보라 이 말이죠. 맨날 목적을 이끄는 삶인데요. 뭐. 목적을 이끄는 삶이 맹세입니까? 맹세 아닙니까? 먹고 말거야! 치토스! 맨날 이런 식으로 살아왔잖아요. 이런 식으로. 내 자식 아이비리그에 들어가게 하고 말거야! 맹세하지 말라는데.
그래서 이게 참 기이하고 특이하잖아요.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기이하고 특이하기 때문에, 그 어떤 세상지혜로도 그것을 알 사람이 없는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뒤돌아보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었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를 감추어진 지혜. 누가 알았으리요.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지혜를,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겁니다. 요한일서를 통해서.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는 계속 앞으로 가면서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을 주께서는 범람케 하는, 마치 이 세상이 홍수로 범람하듯이, 온 천지가 말과 혀로만 하는 그런 사랑으로 범람케 하실 거예요.
사랑함으로써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인간들의 그 행동을 보세요. 그들의 소망은, 마귀의 속한 사람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망은 “지속적인 발전” 다 지우고 이거만 “지속” 동질성, 또는 동일성의 지속만 소망할 뿐입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이대로, 내년에도 지금 내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여기도 교회에서 그런 것 하는지 모르겠는데, 신년, 1월1일에 무슨 행사합니까? 행사해요. 설마, 돈 내고 성경 한 구절 뽑고 그런 짓은 안 하죠. 그건 한 때 지나간 노골적인, 그걸 가지고 보이스피싱 이라고 합니다. 있지도 않는 복을 돈 내고 받는.
신년 때 하는 설교 내용이 뭘까요? 할 일 없는 지속입니다. 동질성을 붙들고 사수하자! 나의 나 됨을 잃어버리지 말자!왜냐하면 사람은 꿈이 있는데, 그 꿈을 놓치지 말자. 이 꿈속에서 깨어보면 그게 지금과 그 꿈 사이에는 지속으로 이어져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쉽게 말해서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도와줬다. “그거 제가 한 거 아니에요.” 하면서 화내는 사람 있습니까?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나는 어제, 오늘 끊어져있어요.” 이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거 제가 했습니다. 이거 말 안 할라고 했는데, 제가 했습니다.” 그거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행위죠. 그걸 말씀이 계속 유도하는 거예요.
이런 행위를 통해서, 이런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한테 일방적인 합격통지서를 내려버린, 그 주님의 숨어있는 본질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15절을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것이 무슨 자다? 살인자고. 살인자는 영생이 없는 자다.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여러분, 겁나는 겁니까? 아니면 즐겁습니까? 형제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었죠. 하나님께서 형제간으로 만들었잖아요. 가인과 아벨이 모든 하나님의 현실 속에서 이야기하는, 형제의 모델, 형제의 원형이 가인과 아벨이에요. 형제라고 하는 것은 니가 나를 사랑하냐, 미워하냐, 그런 뜻이 아니고, 그 형제 됨의 관계에 대해서 니가 어떤 식으로 거기에 개입되어 있느냐, 그걸 보고자 하는 겁니다.
말로 하면 참 어려운데요. 가인과 아벨 사이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형제의 원형, 형제의 모델을 만들었죠. 형제인데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한 사람은 맞아 죽었죠. 맞아 죽었다는 이 전체가 형제의 개념에 포함돼요. 십자가 형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내 친구라고 했죠. 나중에 로마서 8장에 보면, 내 사랑하는 맏아들이 되죠. 형제가 돼요. 이 말은 형제라는 이 관계가 주어질 때까지는 형제가 없습니다. 형제가 없고 내가 선택한 자들, 내가 혈통으로 태어난 자들을 그냥 형제라고 쳐주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된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관계를 없는데서 발생시켜야 비로소 형제라는 것이 발생되거든요.
그런데 형제라는 것은 이 둘 사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 만들어놓고 그 관계까지 포함해야 이 형제 개념에 합당합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한다면,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게 되잖아요. 결국은 이 미움을 미움 되게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들추어내는 작업으로, 없는데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형제라는 개념을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졸지에 우리는 나타난 형제 때문에, 나타난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죠.
이 땅에 형제라는 사람은 없어요. 형제 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우리 속에 담겨있는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형편 따라 형제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유발해버려요. 그러니까, 자 한 번 물어봅시다. 되게 나는 형을 좋아한다.어떤 때는 미워한다. 다시 좋아한다. 미운 관계입니까? 좋아하는 관계입니까? 종잡을 수 없죠. 미워했다가 좋아했다가,좋아했다가 미워했다가. 그럼 백번 좋아했는데 한 번 미워했다. 어떻게 살인자가 되는 겁니까? 그러면 천백번 좋아했는데, 천백일번 째 미워했다. 그럼 살인한 자가 되죠? 미워했으니까?
형제를 미워 안 한다고 하지만, 지금 형제를 미워 안 하지만,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되면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제까지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다가, 그 다음날 갑자기 뭐가 됩니까?마귀에 속한 자가 돼버려요. 그럼 이 말씀을 주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너는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니가 어떠한 죄에서 구원받았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말씀을.
제가 이야기한 이 말이 제가 말 해놓고도 참,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심에 가책이 들어서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는 가인 죄 속의 일부에요. 우리가 죄라고 여겼는데 실제로 성경말씀 보니까, 우리의 죄가 사실 큰 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자비를 베풀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생각한 자비보다 그 자비가 과잉자비에요. 과잉자비. 우리가 생각한 용서보다도 더 넘치는 용서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다 안 살아봤으니까. 전부 안 살았으니까, 항상 내가 아는 죄와 내가 아는 자비와 자꾸 연결시켜서 용서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지은 죄보다 더 큰 죄에요.
그게 뭐냐, 이 성경말씀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저에게 형이 있습니다. 지금 형을 15년째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16년째 한 번 보자.” “15년째로 마감하면 안 됩니까?” “아니, 마감하면 안 돼!” 그럼 16년째 아버지 유산 때문에 싸웠다면, 15년째 사랑한 것은 완전히 물로 돌아가 버리고 소용없어요. 한 순간에 “형님이 그러면 안 되죠?” 하니까, “어어? 이게 뭐야? 이게?” 그것도 노골적으로 형님한테 한 것이 아니고, 그것도 돌아서서. “형님이 저러시면 안 되는데?” “어어?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뭡니까? 형제를 미워했죠. 그럼 졸지에 뭡니까? 살인자죠.
그럼 원천적으로 소속이 앞으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15년 동안 사랑했어도 원천은 비로소 도출됐다고 봐야죠. 처음부터 나는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16년째 그것도 유산문제 때문에, 그것도 노골적으로, “형! 아버지 앞에서 이러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아니고, ‘형이 그러시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마음속으로 미워한 것 때문에, 졸지에 16년 했던 사랑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그 책임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이 문제를 기존교회 목사한테 물어보세요. 방금 한 이 문제. 15년째 착한 형제인데. 한 순간에 잠시, 그것도 오래간 것도 아니에요. 잠시 한 5초 동안에. 5초도 너무 길면 2초로 줄이세요. 2초 동안에 미워했을 때, 원천적으로 그 사람은 마귀에 속한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세요.
성경 본문 그건데? 아무리 봐도 그 본문 밖에 안 나오는데? 형제를 미워하는 순간 그때부터 마귀에 속했다는 말이 아니고, 형제를 미워하는 순간 처음부터 니는 마귀에 속했다는 티를 냈다는 식으로, 성경 요한일서 3장이 나왔잖아요. 제가 지금 거짓말 하는 겁니까? 맞죠? 지금 너의 근본이 뭐냐를 묻는 거예요. 형제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니 바탕 자체가 처음부터 니는 어디에 속했다? 마귀에 속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목이 쉬어도 할 수 없다.
바닥문제에요. 바닥문제. 똑바로 해! 그 문제가 아니고. 바닥문제라니까요. 바닥이 그거니까 행함이 15년째 하다가 16년 어느 날 9월 21일 오후 2시 45분에서 45분 2초까지 미워한 것이 드러난 거예요. 세상에! 그걸 누가 지킵니까? 누가 지켜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는, ‘야! 참, 내가 죄인 맞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맞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형제사랑? 아이구, 우리 둘 사이 얼마나 좋다고? 이런 것은 뭐냐 하면 큰 자비의 의미를 몰라요. 모든 게 바로 주님 말씀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구원의 합격통지서 가슴에 붙이세요. 유치부 애들이 손수건 달듯이. 합격통지서를 가슴에 떡하고 다세요.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갈 때 뭘 달은 줄 알아요? 이스라엘의 표징인 별을, 다윗이 별을 표시하듯이, 그 별을 달고 가듯이 하나님의 인을 팍 찍어버리세요. 인은 빼도 박도 못해요. 노예나 말 뒤축이나, 동물들에게 내가 주인이라고 표시할 때, 완전히 찢어서 박잖아요. 주의 구원의 성령으로 아예 인을 박아버리세요. 박아놓고 난 뒤에, ‘도대체 무슨 큰 자비가 필요해? 이같이 착한 사람한테?’ 하고 성경을 보니까 ‘아차! 모든 게 내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악마에 속한 짓거리를 그동안 해왔구나!’ 하는 태도를 나타낸다면, 그게 영생에 속한 행위가 된다. 이 말입니다.
자, 22절 봅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계명이 몇 개입니까? 요한일서의 계명이 몇 개입니까? 달랑 한 개에요. 한 개의 계명은 뭐다 했습니까? 사랑. 사랑은 어디서 나온다? 사랑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뭘 쑤셔요? 나의 동질성을 콘택600으로 깨트릴 때,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옵니까? 사랑이 나오죠. 틈새에서.
동질성은 마귀에 속했는데, 동질성을 깨트려버리니까. “목사님. 동질성을 왜 자꾸 깨트린다, 깨트린다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게 깨어졌거든요. 깨어짐. 누구에 의해서 깨어졌어요? 예수님은 반대로 누구한테 깨어졌어요? 주께서 인간한테 깨어져서 거기서 뭐가 나왔습니까? 내 살과 내 피가 나왔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누구든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고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 예수님 몸 자체가 영생을 담고 있는 콘택600이에요. 안에 들어있어요.
누가 깹니까? 인간이 와서 깨트리죠. 인간이 깨트리니까, 인간과 예수님 사이는 서로가 서로를 깨트리는 관계죠. 주님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우리를 곱게 간직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우리를 파괴하고, 해체하고, 분열하고, 그 동질성을 깨트리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걸 깨트리면서 이미 구원되었음이 우리한테 확하고, 박하사탕처럼, 핀란드 자일리톨 껌처럼 확하고 이게 퍼지죠. 그게 뭐냐, 계명이 온 몸에 확 퍼지는 거예요.
“주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 자체가 기도응답이고.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행위가, 모든 기도가, 결국 목적이 뭡니까?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욱더 알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3장을 한 번 봅시다. 너무 잘 들으시니까 제가 목이 가는 것도 아깝지 않아요. 에베소서 3장에 기도가 나오는데, 제발 이 기도를 표준기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한 기도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니 주체를 이제 그리스도로 바꾸라는 말이에요. 기도제목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절,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충만하다는 것을 제가 방금 무슨 용어로 했습니까? 그 충만함을 뭐라고 했습니까? 과잉. 안 해주셔도 되는데? 과잉이에요. 과잉입니다.
오래간만에 아들이 공부하고 집에 오게 되면, “야야! 니가 몸이 부실하구나? 내가 삼계탕 했다. 자 닭다리 뜯어 먹어라.” “아이구, 어머님. 고맙습니다.” 하고 한 두 번은 그래요. “야야! 이것도 먹어야지?”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야야! 이것도 먹어라! 아빠 안 먹는단다.” 남편이 먹고 있는 것을 뺏어가지고. “여보! 그거 내 건데?” “당신은 많이 먹잖아? 야가 지금 몸이 부실한 것 봤나? 당신은 야한테 신경이나 썼나?” 하면서 갑자기 삼계탕도 빼앗기고, 일주일 전 집에 늦게 온 이야기까지 다 해요. “당신의 행동은 하여튼 도움이 안 돼.” 갑자기 삼계탕 뺏긴 것도 억울한데, 이미 잊고 있었던 일까지 끄집어내서 잔소리하고.
이게 뭐냐, 오버한 것, 과잉이죠. 우리는 이 땅에서 재미나게 살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과잉으로 오는 거예요. “아이구, 야야! 이번에 니가 TV를 새로 바꿔달라고 얼마나 기도했으면 이렇게 응답받아서 다 바꾸게 됐나?” TV응답한 적 없어요. TV는 돈만 있으면 사면 돼요. 또 주의 응답받아 주신 걸로 쳐줘가지고 또 과잉사랑을 주는 거예요.과잉사랑을. “아이구,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다니?” 지금 자식이 마약해서 해롱해롱하고 있는데. “아이구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나?”
모든 게,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랑 아님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그래서 감사로 이어지는, 범사에 감사로 이어지는 과잉적인 사랑. 그게 뭐냐,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 그걸 항상 알기를 원하노라. 이게 누구의 기도라고요? 사도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하는 표준기도입니다. 오직 사랑에서 사랑으로. 다른 말로 하면 오직 깨어지고,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사업으로 말하면, 부도나고, 부도나고, 또 부도나고. 부부로 말하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어제는 사랑하라고 해놓고, 오늘은 또 싸우라고 하고. 싸움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싸우지 미워하면 싸우지도 않아요.
주님의 계명이 우선이고, 우리는 나중이에요. 말씀의 현세상이 현실이고, 우리는 그 현실을 위해서 복무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엉터리 몸으로, 이미 주의 사랑이 앞서서, 톰과 제리처럼, 너무 빨리 내 뺀 주님의 그 합격통지서가, 너무 일찍 과잉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치니까, 우리가 물 마시는 이것도 구원받는데 도움이 돼요. 모든 행동이 다 엮어서 연결되어 가지고 또 도움 받는 겁니다. 그게 사랑의 세계에요.
그럼 이 사랑의 세계가 어떻게 한 그림으로 형성될 수 있느냐?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면 어떤 분은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라고 생각될 거예요. 그리고 한국에 있는 사람은 이 그림이 상당히 생소할 겁니다.
누워있는 고운 강아지풀처럼 있고, 여기 소나무인지 뭔지 나무가 있고요. 여기 뭔가 숲이 깎여져 있고, 이게 무슨 산이냐 하면 설퓨릭 마운틴, 황산으로 된 황산의 산이에요. 여기 케이블카가 있어요. 케이블카에 뭐가 달렸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그런데 현재 로키산맥에 있는 황산 산의 케이블카는 산 위에서 해주고 밑에서 내려버려요. 내려버리는데, 이미 구원 안에 있는 사람은 내리지를 않습니다. 안 내리고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이렇게 합니다. 내려오면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바로 요한일서 3장을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20대에, 30대, 40대, 50대...계속 죽을 때까지.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방금 뭐라고 했어요? 보여주는 거예요. 왜 제가 케이블카를 예를 들었느냐 하면, 케이블카에 앉아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한 적도 없어요. 가만히 앉아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의 표현형이에요. 이 자체가. 우리가 행동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갈증 나서 물 마시는 것도 보니까, 어디에 해당되는가 하면 바로 주의 계명에 해당돼요. 또 사랑을 행했네. 미치겠어. 또 사랑을 행했어. 우리는 케이블카에 앉았을 뿐인데. 표현형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이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누구한테?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얼레리꼴레리~ 너희들은 미래를 몰랐지? 라고 지금 뽐내고 있는 거예요. 누굴 통해서?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기는, 성경말씀에 관심 하나도 없어요. 그저 이 땅에서 성공만 하고,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고 되고 싶은 그런 인간들을 어디다 집어넣는다? 전부 다 케이블카에 다 집어넣어가지고 내려오면서, 이런 인간도 계명 다 지켰고, 저런 인간도 계명 다 지켰고, 이런 인간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이런 인간도 뭐든지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드리고, 이런 식으로 쭉 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표현형이니까. 이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걸 가지고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바로 이게 영이라는 거예요. 영의 세계에요. 성령이 너의 행함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겁니다. 성령한테 니가 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우리가 어디 안에 거한다? 이 산이 황산 산이 아니고 성령의 산이에요. 성령의 산에, 우리는 케이블카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어서 뭘 보여줘요? 성령이 보여주는, 이미 합격시킨, 이미 구원 이후에, 메시아가 오신 이후에 있는 낯선 상황을,톰과 제리가 공중에 붕 뜨는 기이한 상황을,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천국에 붕 떠서 살아가는 그 기이한 상황을, 다시 도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몸으로, 그냥 성령으로 미리 앞당겨서 주셔서 그 안에 놓여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께서 사랑으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3장에 나오는 내용은 뭡니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22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 받나니” 우리가 받죠. 그럼 우리가 현재 누리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전부 다 받은 거예요.기도한 것도 없는데? 그러나 기도했다고 쳐요.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기도를 한다고 할 때, 처음부터 기도한다고 하면 설거지하다가, ‘아차, 기도시간이지. 기도해야지.’ 일단 앞치마를 풉니다. 앞치마를 풀어서 놓고, TV는 끄고, 애들한테, “엄마 기도한다. 옆방에서 조용히 해라.” 오늘은 관절염이 있으니까 꿇어앉기보다 편하게 앉아서 기도를 해야겠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하죠. 손을 이래 모을까? 아니면 편하게 할까? 또 하기 전에 시계를 보고 남편 퇴근할 시간 됐으니까 한 6분 동안 해야지. 선택을 하게 되죠. 그래서 문 닫고 꿇어앉고 손 모으고 하는 7분 동안의 그 시간을 우리는 기도한 시간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그럼 그 기도는 누가 정한 거예요? 내가 정한 거죠. 그거는 기도 아닙니다. 오늘 본분을 보세요. 요한일서 3장 22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그러니까 앞치마 풀 필요 없죠. 오늘 순두부 하는데 남편이 빨리 와가지고 맛있게 한 순두부를 먹었으면 좋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주께서 다 이루어 주리라. 앞치마 풀 필요 없습니다.여러분, 사도바울의 편지 보면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 했어요?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죠. 무시로 라는 것이 뭐냐 하면 시간이 없는 거예요. 무시로~♬ 무시로~♬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는 거예요. 시간 재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의 성도의 행함은 뭐냐 하면, 이 메시아 이후잖아요. 메시아 이후. 메시아 이후가 될 때는 이게 무슨 시간이냐 되냐면, 시간의 종말이 돼요. 시간의 종말이, 현재 시간,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여기서 뭐가 만들어지느냐 하면, 이게 만들어져요. 종말의 때가 만들어집니다. 지금 말장난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시간의 종말이라는 것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세상 끝이에요. 유대인 말이 맞아요.
메시아가 오게 되면 더 이상 시간의 끝입니다. 무엇의 끝이다? 시간의 종말입니다. 시간의 종말인데, 성령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찾아와버리면, 우리는 이미 이만큼 와 있는데, 여기에 이 취지를 알리기 위해서, 이 시대에 옛 생각이 있으니까,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거기서 뭐냐 하면 더 이상 시간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기도한다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이 있으면서도 뭘 느끼느냐 하면 종말을 느끼는, 종말을 체험하는 순간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책을 어디서 내가 샀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 책을 구입하도록 이미 종말론적으로 작용했지요. 이게 우리가 믿어지는 겁니다. 모든 게. 오늘 순두부 맛이 좋았는데, 순두부 내가 맛있게 해야지 하면 과거에서 현재로 가잖아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맛있게 하도록, 저에게 손을 놀리고 입맛 돌도록 했지요? 내가 다 알았다니까.” 이런 식으로.
이미 시간 끝부분에, 종말의 때를, 시간이 흐르는 이 시간 속에서 종말을 수시로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종말이 뭐냐, 다 이룬 거예요. 종말이기 때문에. 시간의 종말 때 다 이루어진 것이 앞당겨서 온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선취라고 합니다. 선취. 미리 취한다. 이걸 성경적 용어로는 뭐냐, 성령의 보증이다. 성령의 보증. 사도바울의 용어입니다. 정말 어려운 용어에요. 성령의 보증이라는 것은 미래에 만나야 될 그 분을 앞당겨서 미리 만난다는 그 뜻입니다.
끝으로 이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형이 군에 갔을 때에, 우리 외갓집 친척 가운데 보안대가 있었어요. 보안대. 군에 안 가신 여자 분들은 보안대가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군에 간 남자 분들은 보안대가 얼마나 센지 아시죠? 훈련받고 난 뒤에 후방으로 빠져야 하는데, 빽 안 쓰면 후방으로 안 빠져요. 빽 안 쓴 인간들은 전부 다 전방으로 가서 어떻게 된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 외가 친척이 보안대 하사가 아니고 중사에요. 중사가 와가지고, 대구에 있는 54사단 있습니다. 와서 형을 만나요. “니가 근수가?” “예. 충성!” “나, 니 외사촌 형이야.” “아, 예. 형님이십니까?” “내가 니를 마산통합병원으로 빼줄게.” 자,우리 형이 마산통합병원으로 갔을까요? 안 갔을까요? 갔어요.
마산통합병원에 가게 하신 그 형님이, 지금 훈련 끝날 쯤 되어 미리 앞당겨서,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선취. 확실한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보증. “야야! 이거 초코파이 하나 먹으라. 내가 보안대야. 보안대. 걱정하지 마! 나한테 다 벌벌 떨어.” 왜냐하면 보안대가 장교들 비리 캐서 퇴직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구, 보안대!” 이래 하거든요. “이근수 불러와! 몇 번째야?” “윈래 카투사로 몇 명 빠지고 그 다음에 마산통합병원인데요.” “마산통합병원에 이근수 집어넣어!” 공작 다 했어요.
요거 성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래서 성도된 거예요. “초코파이 하나 먹어라. 괜찮아.” 그럼 그 초코파이는 뭐냐, 훈련받은 대가가 아니고, 보안대 형님 덕분에 먹었다면, 여러분 앞에 귤은 누구 덕분에 먹습니까?마트에서 산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귤입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