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20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4-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원래 기독교,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성경의 내용에 보게 되면 유대교하고 달라요. 유대교는 어디서 끝이 나느냐 하면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유대교는 쭉 창세기부터 가서 메시아만 오면 끝나는 것이 이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유대교.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 또는 복음, 예수님의 교회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이미 메시아가 왔다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고, 그 이후,그 이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고 더 나아가는 거예요. 더.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기독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셨다는 종교에요. 이미 오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미국의 만화영화에 <톰과 제리> 라는 것이 있거든요. 톰과 제리, 저도 본 기억이 나는데, 쥐를 고양이가 잡으러 갑니다. 절벽이 있는데, 쥐가 고양한테 쫓기다보니까 너무 급해가지고 절벽이 있는데도, 3단 넓이 뛰기 한 것처럼 공중으로 막 달려요. 어딜 바라보느냐 하면 고양이 오는 것만 바라보고 막 달리다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공중에 떠 있어요. 고양이만 의식한다면 공중으로 떠서 계속 가는데, 고양이 의식하지 않고 갑자기 밑을 바라보는 순간 이게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만화라지만 희한하죠.
기독교라 하는 것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좋은 날이 온다, 낙원이 온다, 천국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톰과 제리 이야기처럼, 이미 메시아오고, 와도 더 와버렸어요. 더 와버리니까 이 시대는 뭐지? 뭐 이런 시대가 다 있어? 이런 시대가 다 있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면 좋은데, 이거는 더 나가버렸으니까 이거는 왜 생긴 거지? 이렇게 새로 메시아가 오셨고 세상 종말이 되었다는데, 메시아 오면 세상종말이 됩니다. 종말이 오고 난 뒤에 왜 덤으로 오는 시대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이렇게 더 추가적인 시대로 말미암아 오늘날 현재 이 시대를 우리가 어떤 안목에서, 어떤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되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기독교는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이 해석이 되어 집니다.
그렇게 해석이 되어 지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자기생활 하다가 예수님 오시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런 생각하고는 너무너무 터무니없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해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인식에, 삶에 관한 관점에, 큰 변혁이 일어나요. 기존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내가 미쳤지? 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만약에 메시아가 여기 온다면, 만약에 기다리고 있으면, ‘착실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훌륭하게 살자.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 날이 온다.’ 이렇게 해서 살면 되는데, 이미 심판 날이 지나가버렸다니까요. 심판 날이 이미 지나가버렸어요. 톰과 제리와 마찬가지로 이미 지나가버렸어요.
그러면 이 시대하고, 지나간 이 시대를 A라고 하면, 그 전에 우리가 예수님 오기를,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던, 기다림에 대한 시대 B와, 이미 기다린 이후의 A와 세상을 보는, 현실을 보는 관점이 달라도 이게 너무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메시아 이후에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라는 성경을 해석할 때도, 본문을 해석할 때도, 그냥 유대인처럼 오신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왔다고 했을 때, 메시아가 왔을 때, 우리는 이 성경과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참 어처구니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나라는 것, 세상이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 이웃이라는 것, 그리고 형제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이, 전부 다 새롭게 정립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르게 살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하죠. 유대인들이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말씀을 지키는 거죠. 바르게 살면 언젠가는, 바르게 산 사람한테는 구원의 혜택이 주어진다. 이렇게 되지만, 이미 메시아고 오시고 난 뒤에 구원이라는 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이미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성격과 성질과 우리의 태도하고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이걸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하든,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심판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죠. 이런 경우를 실제로 유사한 예로 들게 되면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 시험 전날까지 열심히 공부하잖아요. 그럼 시험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자기가 고생했다고 위로한답시고 공부를 안 하잖아요. 그러면 종교라는 것이 뭡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뭐예요? 시험 잘 치려고 하는 겁니까? 이미 시험이 끝나고 난 뒤에 나는 누구냐와 관련되어 있을까요?
유대교 같으면 잘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데, 나와는 상관없이 예상 밖에 미리 와버리면, 시험 준비하려고 하는데, 한국의 수능이 며칠입니까? 11월 달인데, 지금은 9월 달이고, 근데 이야기하기를 “8월 달에 이미 수능 끝났어.” 라고 통보를 받게 되면, ‘뭐지? 그럼 나는 뭐 한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미 메시아가 모든 판정을 내려버렸어요.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않을 자를 이미 결정해버렸죠. 그걸 방금 읽었던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이미 나타났으니, 이미 결정되었으니, 합격과 불합격이 이미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었으니, 이래 되는 거예요.
결정되고 난 뒤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일방적으로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사실을 통보해주는 겁니다. 사실을 통보해요. 시험 치지도 않았는데 합격증이 날아오고, 시험 치려고 열심히 준비 할라고 하는데, ‘앞으로 열심히 착하게 바르게 살아서 목사님 말씀 잘 듣고 해서 천국가야지.’ 했는데 뭐가 날아왔느냐 하면 이미 불합격입니다. 여러분 이걸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합격 되려고 교회 갑니까? 그런데 교회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불합격이 날아와요. “마귀에 속한 자”라는 그것이 날아오는 겁니다.
확정된, 주님이 확정시킨 사실을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어느 집은 합격, 어느 집은 불합격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이미 왔으면, 이미 인간들의 자기 자신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자기의 의견과 기대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될 자와 구원 안 될 자를 확정지었기 때문에, 시험 준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제 시험 준비 할 필요가 없어요. 캐나다에서 이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캘거리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캘거리에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이 사실을 누가 믿어요? “교회 열심히 다녀야지.” “뭐할라고? 아, 뭐 할라고 교회 다니는데?” “천국 갈라고.” “끝났어. 니 시험날짜 벌써 지난 것 몰라?”
메시아가 왔다는 것은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결정지은 거예요. 그래서 합격한 사람 특징이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내가 노력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내 대신 시험을 다 치러가지고, 내 대신 이름 쓰고 내 대신 1번에 ③번, 2번에 ④번, 내 대신 시험 쳐서, 결과 통보만, 그냥 합격통보만 날라 올 때,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자비라고 하죠.
사랑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종할 필요가 없어요. 복종한다고 사랑을 곱빼기로 더 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합격했으면 복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합격된 사람은 뭘 빼야 돼요? 복종과 순종을 오히려 빼기를 해야 돼요. 나, 복종해야지를 빼야 돼요. 나, 순종해야지를 빼야 됩니다. 그럼 순종하고 복종 빼면 뭐냐 하면, 주께서 합격시킨, 합격 그대로 나의 현재 모습으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의 심판 날을 기다린다면, 나의 모습은 심판이 오기까지 유보되어 있어요. 심판 날 돼봐야 진짜 내 모습을 안다. 열심히 해보기는 해보는데, 아직까지, 마지막 때가, 메시아가 오기 전이라고 여기는 유대인처럼 그러는 거예요. 이만큼 유보된 상태기 때문에, 내가 아직 모르는 유보된 내 상태로 인하여, 메시아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볼지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 상태가 남아있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면 과거는 아는데 미래는 모르잖아요. 현재에서 미래를 모르는, 요 폭만큼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그런데 메시아께서 이미 앞서서, 이미 우리 모습을 확정지어놓고 다시 오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미흡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미흡함이 없죠. 다만 뭐만 남아 있느냐 하면, 지금 현재상태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은 내가 현재 나를 보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이미 너는 어떻게 하든 의인이야. 합격이야. 너는 죄 짓지 않는 자야.” 라고 통보가 왔기 때문에, 그 통보가 현재 내 생각 가운데서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채택하고,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합니까? 예수님 생각을 채택해야 되겠죠. 주님이 옳으니까. 나는 오해를 하니까.
이것을 이렇게 보면 됩니다. 현실의 감상자, 또는 현실에 대한 감상자는 없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현실에 대해서, 내가 현실을 하나의 대상으로 봐가지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왜냐하면 내 자체가 어디 속에 일부로 포함되어 있습니까? 현실 속에 일부로 포함되어 있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내가 보는 현실은,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현실만큼은 남아있지만, 내가 이걸 더 안다고 해서, 더 순종한다고 해서, 더 복종한다고 해서, 내게 속한 현실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질까요? 전혀 달라지는 게 없어요.
이미 합격통지서가 온 이상,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너는 죄가 없어! 라는 그 상황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질까요? 안 달라지는 거예요. 안 달라지니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우리의 신분은 확정적이고 이미 죄 없고, 이미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과, 그리고 지금 내가 어리석고 모자라서 나는 구원받아야 돼! 그 사이만큼은 인식론에서,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미진한 것은 남아있죠. 그렇다고 신분이 달라지지는 않는 거예요. 이쪽 유대인들은 내가 모르면 내 신분은 위태롭게 돼요. 내 미래가 지옥 갈 정도로까지 아슬아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단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어떤 점에서 내가 이미, 하나님이 어떤 것을 보고 내가 이미 구원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지? 아주 기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그것을 이제, 그 빈칸은 미흡한데, 그 미흡한대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더 알게 되는 겁니다. 고3의 예를 들게 되면, 고3애들이 수능을 치는데 우리는 이미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그때 수능참고서들을, 수학정석이라든지, 정철종합영어를 본다 이 말이죠.
보는데, 보면 뭐 모르는 것이 많이 나오죠. 분명히 모르는데도 지금 주님께서는 백점이라고 했거든요. 분명히 나는 이걸 해석을 못하는데, “아이구, 니 해석을 왜 그리 잘해?” 이렇게 나왔으니까, 우리로서는 이미 합격은 받아놓았고, 도대체 뭐가 내 쪽에서, 하나님과 결정한 사항과 내가 생각한 것과 뭐가 틀어졌고, 뭐가 잘못되었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하는 행동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합격통지서를 보냈는가? 그 문제만 남아있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를 들어서 요한일서 3장 16절을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마땅하죠. 그럼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옛날에 우리 쪽에서, 유대인이라면 옛날에 이 문제지가 왔다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불합격이 되고. 목숨을 버리는 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합격이 되는 거예요. 맞죠?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온 상태에서 우리가 규정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형제를 사랑한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막 눈만 흘기고 형제에게 못되게 했는데. “이게 어데? 후배가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막 째려보고 있는데, 뒤에 주의 천사가 와서 툭툭 치면서 “자식! 참, 방금 재한테 뭐라고 했어?” “째려봤어요.” “ 잘했어! 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거야. 니 수고했어! 잘했어!” 뭐야 이거? 막 눈으로 째려보고 이랬는데. ‘저거 죽어야 돼!’ 이랬는데. 이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랑이라고 통지서가 오네요. 이걸 한국에서는 젊은 애들이 한 글자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헐~!!!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한 번 봅시다. 오늘은 어제처럼 그렇게 흥분하지 않죠? 3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예,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제가 언제 이웃을 사랑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도무지 사랑한 적 없습니다. 아니 제가 솔직하게 주님을 위했다면 제가 주님을 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평생 동안 내 이익과 우리 가족, 밥 먹고 사는 것,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나는 나 자신이 남한테 꿇리기 싫어하는 이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었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 앞에 헌신하고 순종하고 봉사했습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거 봐! 이거 봐! 말하는 것 좀 봐! 세상에 이렇게 겸손할 데가!” “제가 겸손이 아니라 언제 겸손했습니까?” “자식! 합격된 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 좀 봐!”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도대체 주고받는 대화가 안 돼.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 어딜 봐서 저를 구원하십니까?” “아이구, 이거 봐! 온유와 화평과 자비 봐!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지?” “물론 다 성령의 솜씨죠. 성령의 솜씨고 뭐고 간에 정말입니다. 진짭니데이~경상도 말로. 진짭니데이~ 제가 주님한테 한 게 없어요.” “세상에! 나는 너 같은 인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보아라! 이 구원받은 자를 보아라!” 이래 나와요.
“저는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와가지고, “주여! 메시아 언제 옵니까?” “벌써왔다.” “그러면 저는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합격!” “별로 수능준비를 못 했는데?” “괜찮아. 내가 대신 수능 다 치렀어. 합격!” 자, 왜 그렇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뭐라고요? 헐~!!! 이 기이함~!!!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시고 재림이 있어요. 재림에는 모든 것이 온전함입니다. 온전함. 온전함인데, 예수님의 재림 때 온전함인데, 메시아로 오고 난 뒤에 이 사실은, 이 현실 세계에 뭘 주느냐 하면 깨어짐, 또는 분열, 파괴, 해체를 제공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해체하고 파괴하느냐 하면, ‘열심히 순종해야지. 열심히 복종해야지.’ 라는 나의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그 인식을 주께서는 깨버립니다. 박살내버려요. ‘지금 내가 착실하고 있지. 내일은 더 내가 착실하게 순종해야지. 다음에는 착실하게 성경공부 해야지.’ 라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깨어버리죠.
그러면 이거는 한 마디로 뭐냐 하면, 충돌입니다. 서로,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차와 이미 미래에 도착해놓고 거꾸로 다시 현재를 향하여 꽂아놓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될 때, 충돌될 때,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충돌을 통해서 여기서 깨어짐이 일어나고, 그거는 우리의 주체에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분열, 또는 갈등, 이 갈등의 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깨어질 때 거기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이.
그래서 열심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일까요?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 아니에요. 왜? 깨어짐의 기회가 없었고, 깨어지는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전부가 비-동질성을 갖춥니다. 깨어졌으니까 앞뒤가 다른 성질을 갖게 돼요. 다른 성질을. 비-동질성입니다. 나는 전에는, 과거에서 현재로 잘해보고자 했는데, 주님께서 이미 구원을 합격 지어놓고 우리에게 찾아온 주님께서는, “잘 할 것 없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는 예수님의 이름의 결정을, 나의 잘함보다, 나의 착실함보다 주님의 결정을 우선시한다면, ‘내가 잘 해야지’와 “주님 잘했습니다.” 라는 사이가 동질이 아니라 비-동질이 되죠.
그러면 여기서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균열이 일어나는지를 딱 깨보니까, 여러분 제약회사 선전하는 것 보면, 콘택600선전. 캡슐이 반으로 벌어지면서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콘택600 365가지의 알맹이가 나오는 것을 아시죠? 옛날에 나왔는데, 지금도 있는가 모르지만. 콘택600선전 있잖아요. 쏟아지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육신의 종교성과 주님의 구원의 확정성 사이에, 부딪치면서 나오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었다? 없었다? 사랑이 없었죠. 우리는 지옥 갈 사랑만 열심히 했을 뿐이죠. “형제여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이걸 가사를 바꿔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랑으로~♬” 이런 뜻이에요. 열심히 사랑해서 열심히 지옥가게 하는 그 현장이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나만 배부르면 되느냐? 필리핀 애를 안다. 3만원만 내시면 50명의 애들이 하루를 굶지 않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지옥 갈 사랑입니다.
왜 그러느냐, 어제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사랑을 알고, 나는 오늘도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애들을 알고, 내가 한국 땅에서 잘 먹고 사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일부의 돈을 저축해서 유니세프 같은데 기부했다. 그러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한 나일까요? 동일하지 않은 나일까요? 동일한 ‘나’죠. 그럼 뭐가 없어요? 깨어짐이 없죠. 분열이 없죠.해체가 없죠. 파괴가 없죠. 그거는 지금 수능시험치고 있는 지옥 갈 사람이에요. 불합격이에요. 지옥 갈 사람이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실이에요.
이 모든 것을 몰랐던 것은 뭐냐, 유대교적 사고방식으로 교회 다녔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나중에 심판 날에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인간의 발상을, 인간의 발상 자체가 이거는 현실을 모르는 것으로 묵살하시고, 유일하게 현실을 아는 것은 말씀의 현실밖에 없어요. 그 말씀은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확정된 사실을 지상에 구체화해서 깔아놓은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 외에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현실을 유일하게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가 행하기 전에 먼저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메시아를 이미 지나서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재림도 온전한 것이 아니고, 이미 온전했음을 드러내고, 그전에 재림할 때까지는 이제는 이 온전한 것이 왔는데,왜 온전하지 않는 것이 온전한 것을 시도하느냐? 그걸 죽어라 깨는 작업을, 바로 예수님 초림과 재림사이에 하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요한계시록의 세계는 전부 다 파괴의 현장이고, 이 세상을 전부 다 불바다 만드는 그 순차적 작업의 기록이 뭐냐, 요한계시록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이해되십니까? 이미 온전한데, 그 온전함을 주께서 자기백성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는, 그 온전함을,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해보자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주께서는 다 깨어버리는 거예요.
환난 받으라. 깨어져라. 니 동질성, 오늘도 동질성, 내일도 동질성, 그 똑같은 동질성을, 그런 동질성의 연속을 중간에 마중 나가서 깨버립니다. 깨버리면 다리가 끊어지고. 아까 톰과 제리 봤죠? 쭉 가다가 절벽을 넘어가 버리니까, 이게 공중인지 땅인지 구분도 못했다가, 아는 순간 으아악! 하고 빠지잖아요. 성령을 받는 순간 우리는 으아악! 하고 빠져야 돼요.질문: “저기서 성령이나 사랑이 우리 스스로 어떤 식으로든 자각이 되거나 인식이 되는 형태로 포착이 되나요? 아니, 충돌되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각이 됩니다. 이러한 충돌을 언급할 때,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에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보통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을 해야 된다고 알고 있죠? 여러분 다 알고 있죠?
그럼 제가 질문 해볼게요.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제 메시아 온 후에 이렇게 나타나요. 자, 그럼 질문입니다. 왜, 우리는 마귀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한 번 답변해보세요. 왜, 우리는 가룟 유다를 동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대답: “소속이 다르니까.” 그러면 사랑 안함이 우리의 구원받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곤란해요. ‘내가 저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 돼. 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돼.’ 라고 결정하는 그것이 착함으로 이어져서, 착함으로 간주되어, 나의 착함으로 인하여 구원되는, 수능에 합격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그런 방식이 되니까, 그거는 주님의 방식, 찾아오는, 마중 나오는 방식은 아니에요.
왜, 마귀의 자녀들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까? 이걸 이천년 동안 신학자들이 풀어내지를 못했어요. 대답: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불교신자는 뭡니까? 대승적 지지를 갖고 있죠. 대자대비 하죠. 대자대비는, 죽었던 성철스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4월초파일에 법어를 발표 하는데, “사탄마저 사랑하자. 악마마저 사랑하자.” 그게 1980년대에 법어를 냈어요. 난리 났습니다. 성철스님의 그 진위는 바로 “전두환을 사랑하자.” 이 말이잖아요? 성철은,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뭐, 권력과 손잡아야지.” 이런 식이에요. 불교는 사탄마저 사랑하자고 이래 나와요.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데 공로자인 가룟 유다를 왜 우리는 사랑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어느 신학자도 답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답변하지 않은 질문을 제가 여러분에게 드린 거예요. 정답이 궁금해요?궁금하면 오백 원. 에이, 언제적 개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한다면, 자기가 일방적으로 마귀에 속한 사람은 사랑 않는다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없잖아요. 나중에 자기가 선택했는데, 형제일 수가 있고. 결국 취미가 같으면 하고. 심지어 못생긴 여자는 무조건 미워하고. 잘생긴 사람은 이유를 막론하고 사랑하고. 선교단체에 이쁜 여자만 찾아가서 전도하고 못생긴 여자는 전도하지도 않고. 그런 짝이 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마귀와 가룟 유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하지 않은 자의 특징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동질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래요. 깨지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이대로 그냥 하나님을 만날래. 그러면 성도가 깨진다는 것은 뭐냐, 성도는 동질성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는 존재에서 존재로, 또는 기능에서 기능으로 가면서 여기 뭐가 삽입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삽입됩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초림에서 이미 메시아가 왔을 때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왔습니까? 깨어지는 모습으로 왔어요. 이 깨어지는 모습이 현실을 보는 핵심이 됩니다.
그 핵심에 대해서 마귀의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속하지 않는 자들, 가룟 유다는 강력하게 그것을 거부해요. 그냥 살던 대로 살래. 메시아고 십자가고 싫어. 그냥 내 몸이 하던 대로 그냥 내버려둬. 다 귀찮아. 니나 잘 믿어라. 노쇠하신 부모님한테 오랜만에 전도한다고 하게 되면, 그 노쇠하신 부모님이 뭐라고 합니까? “니나 잘 믿어. 니나 잘 믿으면 혹시 니 빽으로 천당이나 가자.” 뭐 이런 식으로. “그래. 나 이제 늙어서 눈에 글자도 잘 안 들어와. 니나 교회 잘 다녀. 나는 하던 대로 절에 갈래. 귀찮아.” 이런 이야기 하죠. 그리고 또, 기존교회는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라고 하면, “그냥 나 하던 대로 할래. 옛날에 하던 대로 목사님 섬기고, 그냥 아침 일찍 은혜 받는 앞자리에 가서 앉아 묵상하면서, 너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새벽제단이나 쌓으면서 그렇게 살래.”
그럼 결국 동질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게 쌓이고 쌓이면 뭐가 돼요? 자기 의가 되겠죠. “나는 내가 하는 행세대로, 내 의를, 마일리지 쌓으면서, 날마다 마일리지나 쌓으면서 그렇게 살래.”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다 그렇게 만들었어요. “조심하세요. 여러분 자칫하면 그동안 쌓았던 실적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생을 조심, 조심하게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여러분, 조심스럽게 살면 구원받습니까?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관리거든요. 자기 관리, 자기 절제. 그 범위를 넓히면 자기 경영. 자기 인격 도야의 관한 서적들. 처세술에 관한 책들, 서적들. 인생이 행복하려면? 이런 책들.대인관계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것들. 대화의 친화력을 도모하려면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격도야의 관한 그런 내용들이 설교에 섞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기 인격을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걸 흔히 하는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자는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그런 말들을 하죠.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 도대체 얼마나 견적을 내야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납득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바라고 인식되는 것은, 결국에는 그 내면에 뭐가 있습니까? ‘깨어지기 싫어! 누가 나를 깨면 싫어! 나는 이대로 갈 거야! 얼마나 귀한 것인데? 얼마나 내가 보존하려고 애를 쓴 건데?’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화초나, 난초에 물 줄 때 심정이 뭡니까? ‘고이고이 자라라! 애들아 내가 너희를 얼마나 공들여 키우는데. 새벽서리 맞아서 죽으면 안 돼!’ 얼마나 물주면서 속으로 대화 나눕니까? 하물며 자기가 키우는 화초한테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죠.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조심하죠. 그게 바로 왕만두 종류에 있는 왕바리새인 이라니까요. 왕만두, 뭐 왕갈비 종류.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 미리, 사전에, 자기가 철저하게 수험생으로 준비하고 있는 그런 태도라는 말이죠. 한마디로 말해선 나는 중도에 파괴되기 싫어! 깨어지기 싫어! 그러니까 거기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빠지는 거예요. 십자가는 다른 말로 하면 거침돌이에요. 자빠져서 깨어지라고 준 것이 바로 그게 십자가입니다. 근데 일반교회에서 십자가라는 것은 자빠져가는 것이 아니고, 니가 십자가 잘 살펴서 괜찮다고 하거든 니가 받아들여라. 그런 십자가에요. 받아들이고, 죄 용서받고, 그리고 깨버리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다이렉트로, 직접 하나님 아버지하고 맞상대해라. 그런 십자가거든요.
누구나 넘어지는 십자가가 안 넘어지려고 버티니까, 이거는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 있으면 이거는 피해가는 거예요.결국 십자가 없는, 예수님이 훌륭하시다는 것은, 그건 받아들이지만,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은 이야기 안 해주는 교회. 그건 바로 절이죠. 불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열심히 자기 관리하세요.” 그건 불교에요.
그것은 성경을 뭐로 보느냐, 자기계발성, 자기를 더욱더 향상하고 발전하도록, 계발정도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럼 자기계발성에다 십자가 집어넣어버리면, 어떻게 오해를 하겠습니까? ‘그래. 십자가는 자기를 비우는 거다. 나도 나를 비워야지.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더더더 내려놓고(3탄) 더더더더 내려놓고(4탄). 이거 억지 쓰자는 것도 아니고. 더 내려놓아야 해. 더 겸손해야지. 겸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빨 아파보세요. 겸손한지. 인간이 어떻게 겸손해져요? 예?
인간에게는 환경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조용할 때와 부산떨 때와, 두 종류 환경밖에 없죠. 조용하면 겸손해지고 시끄러우면 교만해지고. 그겁니다. 모든 동물은 다 그래요. 난처한 환경은 적응하려고 애쓰고. 포근한 환경은 누리고. 그게 짐승이고 인간입니다. 그건 생물학적 자연적인 본능이에요. 그 외에는 없어요. 성경 보면서 자기 계발서로 환호하고, 계발서로 활용하는 겁니다. 목사들이 그런 식으로 잘 해주니까. ‘오늘도 기도해서 겸손해져야지.’ 기도해서 겸손해서 천당 갔으면 제가...한 명도 없어요.
사도바울 같은 모든 사람은 깨어진 사람입니다. 와장창 다 깨어진 사람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이여, 저만 남았습니다.” “니만 남았어? 칠천 명 남았다. 행함이 아닌 은혜로 칠천 명 남았다. 니만 남았다고 하지 마! 니가 현실에 대한 감상자가 아니야. 니가 현실을 보는 것은, 니는 현실을 몰라.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몰라.”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그것을 다 품으면서, 그 전체가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에서 인간은 아무리 두리번거려봐야 몰라요.
따라서 현실 바깥에서 미리 쳐들어와야 됩니다. 우리가 가보지도 않은 세계, 미래의 세계에서 거꾸로 현실 속으로 방문하시고 찾아오신 그 분이 올 때, 우리는 참으로 무식했구나. 어떤 점이 무식했다? 열심히 자기 관리하고 열심히 자기 계발하면 구원받겠지. 하는 이것이, 결국은 나의 동질, 마귀적인 동질성을 붙잡고 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인간들의 본성인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죠.
자, 그러면 좀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이 깨짐 속에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 깨어짐 속에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존재가 깨어지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그 틈에서 뭐가 나오죠?십자가 나온다고 했죠. 십자가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고, 본질이고, 본성입니다. 맞지요?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아버지여, 나 다 이루었습니다. 창세전에 약속한 대로 다 이루었습니다.” 이게 바로 속성과 본질입니다.
그럼 이 본질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고 했죠. 그럼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동질성은 깨트리는 힘으로 사랑이 들어온 겁니다. 그 예가 뭐냐, 12절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성질 급한 제가 할게요.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었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라고 되어 있죠.
가인과 아벨의 배치는 가인을 본받자, 아벨을 본받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만 보면 돼요? 사랑을 어디서 찾습니까? 아벨에서 찾으면 안돼요. 가인에게서 찾으면 안 됩니다. 사랑을 어디서 찾는가? 가인과 아벨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발견해야 돼요. 사랑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어디에서?하나님의 숨겨진 본성과 본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사랑과 합치된 사랑이 되겠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
그렇다면 그게 사랑이라면 요한일서 3장 16절이 비로소 해석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형제로 인하여 누구 목숨이 날아가요? 내 목숨이 깨지고, 파괴될 때, 이게 주의 뜻이라고 수긍될 때, 이것이 이미 합격된 자의 면면입니다. 합격된 자가 보여줄 하나님의 십자가의, 우리의 구원을 확정시킨 그 사랑의 진면목이, 그 사람으로 부터 당할 때, 그것이 우리 속에서 발산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3장 16절이 이게 정답이라면, 그럼 이걸 실제로 해봅시다. 이사를 왔는데, 이웃집에서 어떤 사람이 떠들었어요. 잠을 못자요. 애가 드럼을 친다나 해가지고, 두두두두두 팍~ 밤 열시에. 하여튼 열시부터 열두시까지 하는 모양이에요. 두두두두 두두두두 막 치는 거예요. 이쪽은 잠 못들죠. 그럼 우리는 이웃사랑을 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어요? 드럼 소리에 우리 목숨 날아갔죠? 그게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경찰신고 해야 되겠죠. 그게 이웃사랑입니다. 그럼 경찰서에 그 사람들이 밤 열두시에 한다고 잡혀가겠죠. 그럼 우리는 박수를 쳐야 합니다. 이게 이웃사랑입니다. 따라서 이웃사랑이란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느낀 아픔이 곧 주님이 이 땅에서 느낀 아픔과 같은 성질의 아픔, 주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반대 경우를 봅시다. 이쪽에서 두구두구두구 팡~ 쳤다. 성질 같으면 가서 이거 뭐야? 하고 싶더라도, 예수님이 아직 오지를 안했어요. 메시아가 아직 오지를 않았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건 주께서 주신 테스트, 이번 수능 25번 문제에요.이쪽 집에서 드럼을 칠 때, 1번. 참는다. 2번. 신고한다. 어느 쪽이 주의 말씀을 닮느냐? 정답은 1번. 참는다. 그거 참아서 그 사람 지옥 갑니다. 그게 바로 지옥 가는 일이에요. 왜? 그걸 참으면 나의 마일리지가 쌓이겠죠? 그러면 주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 사랑으로 구원받습니까?
그전부터 내가 참고, 참고, 더 쉽게 말해서 내려놓고, 내려놓고, 은장도 하나 들고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두구두구두구해도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누가 점점 더 거룩해져요? 내가 거룩해지죠. 그런 식으로 수년간 계속하게 되면 뭐가 깨지기 싫어요. 콘택600처럼 중간이 깨지기 싫은 거예요. 나의 이 고귀한 동질성, 수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그 업業을, 불교용어입니다. 쌓고 쌓은 그 업을, 난데없이 드럼 치는 청년 하나로 인해서, 한꺼번에 내 고귀한 내 경건성을 거기다가 다 깨트리는 바보 같은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여, 저게 마귀의 시험이군요? 아, 이때 정답은 참아야 하느니라. 참자! 참자! 참자!
이게 바로 마귀에 속한 자고 하나님한테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주의 본질에 속하지 않은 사람, 십자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 자기 행동으로 자기가 스스로 구원의 합격 시도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마귀의 자식이에요. 마귀의 자식입니다. 아까 뭐 궁금해요? 오백 원 했는데, 해답 보니까 어떻습니까? 오백 원 가치가 되죠. 이거 알면 여러분의 오백 원은 아끼게 된 겁니다. 오백 원 아낀 거예요.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나는 진즉에 박살나고 깨어져야 할 인간이 그동안 내가 착하게 살면 혹시 나를 잘 봐줄까 하는, 이미 시험이 끝났는데, 메시아는 이미 지나갔어. 합격된 자에게 이미 통지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그 행세, ‘착하게 살면 구원받겠지.’ 라는 그 행세에 대해서 정면으로 찾아와서, “그게 아니야! 이것들아!” 해가지고 박아버렸을 때,그게 깨어졌을 때, ‘아하, 내가 주님의 사랑을 내 쪽에서 야금야금 갉아먹었구나. 내가 앞장서서 나의 착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모독했구나.’ 이게 바로 마귀가 나를 가지고 놀던 전형적인 수작이었던 겁니다. 수작. 못된 짓이에요.
아벨은 순순히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일 때, “야, 형 온다. 피해라!” 그런 이야기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아벨아! 주의해라. 형 성질나서 지금 더럽데이. 아벨 피해! 피해! 뭐해?” 하고 알려줬습니까? 안 알려줬습니까? 하나님은 가만히 있었어요. 뒤에서 짱돌가지고 동생을 죽였습니다. 죽이고 난 뒤에 뒤늦게 와가지고, “가인아!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한다.” 이미 상황 끝났는데, 이미 상황 끝났잖아요.
요한복음 11장하고 어쩌면 똑같습니까? 시름시름 오빠가 아플 때, 마리아가 미리 전갈을 보냈습니다. “예수님 빨리 오세요. 남의 병이나 고치지 말고 사랑하는 우리 오빠 병을 고쳐주세요.” 맨날 한식집에 가서 밥 먹여주고 스테이크 집에서 다 구워주고, 이렇게 한 집이니까, 우리부터 우선순위, 0순위해서 고쳐달라고 했는데 안 와요. 죽고 난 뒤에 왜 오십니까? 죽고 난 뒤에?
그래서 이번 주일 설교에 오용익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리아는 예수님과 자기 관계를 자기 신앙을 북돋아 주는 분으로 오해했다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돋아주기는커녕, 충동이에요. 박살내려 온 겁니다. 그것도 신앙이라고?? 그것도 신앙이야? 니 신앙 깨부수는 것이, 이게 진짜 앞으로 내가 십자가 질, 그 신앙이라는 이름의 죄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겠다. 내가 신앙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는 그 죄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을 거야. 오빠는 너를 위해서 죽었다.
그리고 오빠를 다시 한 번 불러내죠. 이 세상에서 고생하다가 이미 제대했는데, 이미 예비군 제대했는데, 이쪽 세계, 메시아 이후에 왔는데, 이제는 여동생 잘 만나가지고 군대에 또 오게 됐어요. 다시 이 세상에 오는 거예요. 오니까, 세상은 다시 예수님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세상에! 두 번 타는 것은 귀뚜라미 보일러가 두 번 타지. 귀뚜라미 보일러가 두 번 타는 것을 아십니까? 귀뚜라미 보일러 선전 보면 위로 한 번 타고 거꾸로 한 번 타고 두 번 탄다는 거예요. 나사로가 두 번 죽었습니다. 이런 팔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