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강-고전 16장 13-14(남자답게)16081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 13-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성경을 보게 될 때에 사람들은 놓치는 것이 있어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체 성경을 봅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체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에서 뭐만 나오느냐 하면, “행하라”라만 보이지 내가 누구를 전적으로 의지할거냐, 인생을 맡길 것이냐, 이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내가 성경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나는 여기 버티고 있고 버티고 있는 내 인생 잘되기 위해서 마켓에서 물건 고르듯이 괜찮은 구절 뽑아서 자기를 유지하려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무엇이 통째로 다 날아가느냐 하면, 옛날 구약 때 이스라엘이 바뀌지 않아서 다 멸망했다는, 사람자체가 바뀌어야 된다는 그 내용, 그 사실 자체가 날라 가버립니다. 바뀌지 않고 개선되어서 가려고 하는 그런 시도가 되어버려요. 성경전체에 나오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이 땅에서 빠져나와서 주께서 준비한 곳에 가는데, 그 준비한 곳이 그냥 땅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라고 되어 있어요.
주께서 준비한 약속의 땅에 가려면 일단 빠져나와야 돼요. 빠져나온 사람을 약속의 땅에 집어넣고 그 땅에 가서 살려면 사람 자체가 바뀌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빠져나온 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 자체가 바뀌어져야 그 약속의 땅에서 살 수가 있는 겁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잖아요. “소돔과 고모라에 그냥 살아라. 내가 너희에게 복을 준다.” 그게 아니에요. 거기서 나오라고 이야기했고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 그렇게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전달해야 될 아브라함본인 입장도 “너는 갈대아 우르 지방, 너의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도 자기 이삭 집을 떠난 거예요. 떠난다는 말은 혈혈단신, 혼자 있다는 겁니다. 혼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한 살길이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접어든 이유가, 그전처럼 사람의지할거냐, 아니면 사람의지 아니할거냐, 그걸 가지고 네가 믿음이 있느냐, 아니면 믿음 없느냐를 판정하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이 애굽사람들과 친하게도 지낸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땅에서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애굽에서 힘은 들었어도 애굽이 정들었고 또 자기의 몸 상태가 애굽에 맞는 거예요. 그러나 애굽은 놀랍게도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놀랄일도 아니지만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빠져나와야 된다는 거지요.
빠져나오는데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애굽자체를 약속의 땅으로 바꿔주면, 내 몸은 그대로 있고 환경이 바뀌어서 살던 식으로 살면 그것으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천국이다, 그러면 굉장히 간편할 것인데, 주께서는 거기서 나오라고 지시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나오는 과정속에서 뭔가 부직포 뜯어내는 것처럼 굉장히 힘들었어요.
어떤 끈질김 같은 것이 그 나오라는 소리 때문에, 나오라는 명령 때문에, 나는 막상 혼자 산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외부에서 주님이 나오라고 하는 그것 때문에, 막상 나오려고 하니 나도 모르는 체 그동안 얽히고설킨 것들이 거미줄처럼 꽉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부부가 그냥 있을 때는 농담 삼아 진담삼아 맨날 사니 못사니 하지만, 막상 이혼한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되면 이게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그냥 살자.’ 이렇게 돼버린다는 말이지요. 얽히고설킨 것이 그렇게 많아요. 그것을 신약에 와서는 육에 얽혔다, 가족에 얽혔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족에 얽혔다는 말은 우리라는 자체가 태어나서부터 내가 알아서 챙긴 것이 아니고 가족이 요구하는 대로, 가족이 지시하고 명령하는 대로, 가족의 시선과 가족의 욕심과 욕망이 나라는 것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래서 가족이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흔히 그 때 단어를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신이 얼마나 끈질긴지의 예를 상황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남편은 카센터 직원인데 어떤 손님 만나러 가다가 멀쩡한 터널이 무너졌어요. 터널 안에 갇혔습니다. 금방 소방서에서 구하러 오겠지, 했는데 나중에 23일째 연락이 안 되고 급기야 스마트폰 밧데리도 방전되었어요.
그럴 때 가족은 애가 타는 거예요. 23일이 지났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으로 연락이 되니까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마지막 통화를 합니다. 갇혀 있는 그 하정우가 밖에 있는 아내 배두나에게 전화를 한 거예요. “나 혼자 죽을 테니 너는 가족과 함께 잘 살아라. 나는 이미 가망이 없다.” 그 때 밖에 있는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죽으면 나도 죽어요.” 이게 끈질김이에요.
당신이 죽는데 나보고 살라는 소리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당신 죽으면 나는 같이 죽겠다는 겁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은 나로 인해서 내가 사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그대 있음에 비로소 내가 산다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라고 할 때는 관계를 이야기해요. 당신은 생각하기를, 나 죽고 나머지 당신은 산다는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나 하나 죽고 식구가 세 명이 있었는데 둘이 남았다, 그렇게 되지만 인간은 짐승이 아니거든요.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세포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혈육과의 정 같은 것이 덩어리째 뭉쳐져 있습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가 살 기력이 없다는 말이지요. 연세 많은 분들도 아내가 죽고 나서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따라죽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김춘수라는 시인은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도대체 못살겠다는 거예요. 부엌에 늘 왔다 갔다 하던 아내가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늘 있어야 되는 당신이 없다는 거예요.
당신이 없으면 누가 없는가? 내가 지금 살아 있는지 모호하다는 겁니다. 이게 끈질김이에요. 이 끈질김은 아무리 애를 써도 가위로 싹둑 자를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교회 다니는 것이 전부 다 가짜라는 이야기에요. 교회 다니는 것이 다 가짜고 쉽게 하면, 도배, 나의 포장지, 혹은 도배지만 바꿀 뿐이에요. 가면만 바꿔 썼을 뿐이지 진짜 끊어질 것은 끊어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니까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가 전부 다 불가능한 말씀이에요. 불가능한 말씀을 주신 이유는 불가능한데 이걸 현재 내가 아는 내가 지키려고 할 때 그 인간이 가짜가 되고 그것은 애굽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렇게 하게 되면 보는 사람마다 ‘누가요? 아, 내가 그렇게 하라는 말이지요.’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렇게 해버리면 이것은 행함밖에 안 나와요. 행함만 나오기 때문에 결국 자기변명밖에 안 나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내 할 도리는 다 했는데, 할 만큼 했는데, 나는 지킨다고 했는데 완벽하게는 안 되더라. 봐주소.” 이런 식이 돼버려요.
그것은 봐줄 문제가 아닙니다. 빠져나와서 다른 인간이 되어야 될 텐데 다른 인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껍데기를, 이 말씀가지고 도배하듯이 페인트칠한 것 밖에 안돼요. 회칠한 무덤이죠. 시멘트 뜯어내면 옛날 내 몸 그대로 있어요. 무슨 몸? 혈육조차 끊어내지 못한 그 몸, 신이고 예수고간에 내 새끼가 최고고 내 가족이 최고라는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 손도 안댄 채로, 흠집도 안 난 채로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애굽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야 되는가의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어떤 지시와 명령을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거 하라, 저거 하라,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뭘 했는가? 어린양의 피, 어린양을 그냥 문밖에 두면 하나님이 어린양을 채가는 식이 아니고, 어린양은 감추고 어린양의 피를 내서 그 피만을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라고 되어 있어요. 희한한 방법이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그게 하나님을 마중하는 방법이에요. 오실 하나님을 마중하는 방법은 피로써만 마중이 되지 멀쩡히 혈육에 속한 이 육체덩어리로 마중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십자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게 되지 십자가 밖에서는 만나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에요. 십자가는 예수님이 피 흘린 십자가잖아요. 예수님의 존재를 붙들고, 예수님의 옷 만지고, 예수님의 팔을 붙든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덩어리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 쪽에서 언약대로, 약속대로 다 흘린 그 피가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 새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살점이 아니고 찢긴 살점과 흘린 피가 하나님의 약속이 되지 예수님의 몸뚱이, 키가 몇이고 몸무게가 얼마인지, 그 세포덩어리는 백날 붙들어봐야 그것으로 구원이 안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닌 제자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밀고 당긴지 알아요. 해도 그들은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혈육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재차 이야기하는 거예요. 혈육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우리의 죽음으로는 안 되는가? 우리의 죽음 가지고는 안돼요. 우리는 죽어봐야 그냥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흠 없는 것의 죽음, 죽음에 두 종류가 있어요. 흠 있는 죽음은 그냥 살아 있을 때도 죽었다고 봐야 되는데 흠 없는 죽음은 흠이 없기에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 죽었다는 말은 절대죽음입니다. 하나님만이 알고 있고 간직하고 있는 절대죽음, 그 절대죽음의 피, 흠 없는 어린양의 피를 앞에 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받으시고 이미 심판, 저주가 훅 하고 지나간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뒤에 남아 있던, 양고기를 뜯어먹고, 그 무시무시한 절대죽음 안에서 죽음을 이겨낸 그들이 어린양처럼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이것은, 예수님처럼 살아라, 그런 뜻이에요. 남자답게, 그 말이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산다는 말은, 현재 우리 몸 가지고는 안 되고 절대죽음 안에 놓여 있어야 돼요. 절대죽음은 어떤 행함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의 행함은 그 행함 자체가 이것은 죽어도 절대죽음에 이르지 못하기에 그래요. 아무리 죽어도 절대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그냥 그 결과만 나타낼 뿐이에요.
원래 죽었던 자가 “그래, 네가 이런 인간이었어.” 그 티내는 죽음이지 흠 없는 자, 의로운 분이 죽었다는 것, 원래 죽음이라는 것은 죄가 있어야 죽는데 죄 없으신 분이 죽었다는 말은 인간으로서는 접근하기 힘든 상상도 못한 죽음이에요. 그러니 육의 입장에서는 절대죽음이 어떤 뜻이냐 하면, 분명히 죽었는데 살아 있고, 살았는데 죽어있는 양쪽 다를 겸비하고 있는 양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장인어른이 목사님인데 맘씨가 굉장히 착해요. 맘이 고우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면이 있었어요. 살아계실 때 토끼를 집에서 키웠습니다. 그런데 장모님이 여장부고 우락부락해요. 토끼가 집에 있으니까 귀찮잖아요. 토끼를 잡아먹자고 한 거예요. 아주 맘 착한 장인이 토키를 자기 손으로 키웠기 때문에 그걸 잡는다는 것이 애처롭잖아요. 토끼의 정수를 망치가지고 한번만 톡 치면 죽게 되는데 너무 맘이 여려서 그걸 톡톡 치는 거예요. 골병들어서 죽었습니다.
착한게 문제에요. 객관적이지 못하고 냉정하지 못하고. 토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토끼를 더 괴롭게 하고 말았어요. 또 하루는 닭을 잡는데 목을 쳐야 된다는 거예요. 목을 쳤으면 닭을 붙들고 있어야 되는데 목은 쳐놓고 피가 솟구치니 그 닭은 살아서 막 돌아다닌 거예요. 호러물이에요. 엽기적으로 온데를 다니면서 목 없는 닭이 피를 뿌리고 다닌 거예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모습입니다. 그 때의 닭의 심정은 절대죽음이에요.
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할 때 윤리도덕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절대죽음으로 들어가게 하느냐 하면, 그 가야될 나라가 우리 인간들이 갈 수 없는 나라에요. 그 갈 수 없는 나라가 여섯 글자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만 살아요. 인간은 거기를 넘보면 안 됩니다. 인간나라는 이 땅에 따로 있습니다. 거기서 저주받든 말든, 죽든 말든 그게 우리의 나라에요. 폭염에 40도가 되든 말든 이게 우리의 나라라니까요.
하늘나라는 하나님만 계시는 나라기 때문에 거기 넘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들어갈 백성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만들어내는 방법은 천지 창조할 때와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천지창조에서 그 창조했다는 히브리말 원어가 ‘바라’라는 거예요. ‘bara’라고 하는데 흔히 신학에서 이것을 무에서 유의 창조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에서 유의 창조라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에요. 성경 창세기에 흑암이 어둠위에 있고, 뭐가 이렇게 있어요. 흑암이 어둠위에 있는데 바라, 빛이 있으라고 해서 빛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 전에 흑암이 있었다는 말이거든요. 무에서 유의 창조가 아니고, 그런 것은 헬라철학에서 하는 이야기고, ‘바라’의 뜻이 뭐냐 하면, 고기나 빵에 있어서 쓸데없는 것을 잘라내는 작업을 바라라고 합니다.
김밥 다 싸면 양쪽 끄트머리에 삐져나오는 것이 있잖아요. 단무지하고 오뎅하고 살짜기 삐어져 나온 부분이 있지요. 사실은 그게 제일 맛있어요. 상품가치 없는 그 부분을 잘라내는 그것을 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뭐냐? 천지창조하면서 그 중심을 도외시키지 않고 중심을 부각시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 중심이 뭐냐?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중심으로 세상은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손질을 할 때 그게 창조에요
그렇다면 창조라 하는 것은, 우리 식대로 말하는 완성되었다는 그 말은 의미가 없고, 창조는 계속되는 거예요. 잘라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국백성을 어떻게 만드는가? 죄를 집어넣고 죄를 자르는 작업을 통해서 하는데 죄는 자를 수가 없어요. 너무나 혈육이 끈질기기 때문에. 끈질긴 혈육조차도 잘라내면서 기존의 혈육 말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새로운 육, 영적 육을 주께서 조성해서 그들만 하나님의 나라, 다른 말로 하면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백성 만드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그 자라는 칼질은 주님께서 새언약, 예수의 피와 살,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 죽음의 심판주가 오셔서 어린양의 피를 받고 넘어가는 그 방식인데 그 방식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아이디어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아이디어는 육의 끈질김의 일부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도를 닦고, 성화를 하고, 어떻게 충성봉사를 해도 그렇게 한 당사자의 육의 가치를 본인 손으로 잘라낼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오죽하면 이렇게 이야기 했겠습니까?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 지킨 사람 있다면 좀 보고 싶어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던 적이 있거나 시도라도 해보려고 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 말씀은 예수님 홀로 이루시는 말씀이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자진해서 자신을, 자기 육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서 제발 저주좀 해달라고 요청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번 수련회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 가운데 혹시 오른 눈이 멀쩡한 사람은 두 경우중 하나다. 한 번도 오른 눈으로 범죄한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든지, 아니면 주의 말씀을 개 무시하는 사람이든지, 딱 그 두 종류에요. 내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잘라낼 수가 없어요. 왜? 잘라내면 나머지가 또 오른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잘라냅니까?
주께서는 일괄해서 “잘라내지 말고 그냥 갖고 있어라. 갖고 있으면서 네가 갖고 있는 그 전체 육신이 다 안 썩은 구석이 없음을 너 대신 감당하고 있는 내 육신이 대신 보여줄게. 어디서? 십자가위에서 내가 보여줄게.” 그래서 강도가 구원받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받을 때 십일조 한 적이 있습니까? 교회 나온 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관계가지고 구원하지 우리의 품세, 우리가 하는 행동가지고 구원하지를 않습니다. 그 관계를 가지고 구원하거든요. 그런데 그 관계가 어느 정도 끈질긴가 하면,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잘라낼 수가 없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은 사람이라고. 당신이 있으면 내가 산다고. 그게 혈육적인 관계에요.
자식 낳아놓고 자식을 나 몰라라 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혈육은 끊어질 수가 없어요.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자기 아들 못 알아볼 지경이면 모르지만 자식을 내칠 부모는 없습니다. 그 정도로 끈질깁니다. 못 내친다는 말은 예수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고 간에 그보다 내 자식이 최고고 내 자식이 우선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건져내는 새롭게 주어지는 새로운 영의 육은 어느 정도 끈질긴가? 육신의 끈질김보다 더 센 끈질김입니다. 남자답게 살라는 말, 남자답게 강건하라는 말은 행하라는 말이 아니고 버티라는 말이에요. 네 육이 아무리 끈질기고, 육에서 아무리 욕심이 나오더라도 그 욕심을 거두어서 의로 바꾸는 그 새로운 육의 끈질김, 새로운 육을 조성하고, 바라, 새롭게 창조하시는 주님의 끈질김이 더 세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보다 강하겠느냐.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 본문,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이 말은 믿음대로 살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너에게 믿음이 있는데 이제 그 믿음이 네가 평소에 너의 행함과 너의 존재를 믿던 그 믿음의 끈질김보다 더 센 끈질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정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거예요.
자, 이제 새로운 피조물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뭐냐?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어떤 극복할 수 없는 도덕까지 극복한 초인적인 착한 사람, 그걸 거룩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새 피조물을 생각하는데 간단하게 생각해서 이겁니다. 천사를 몰고 다니는 사람,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천사를 몰고 다니는, 천사와 함께 있는.
예수님 기도할 때 천사와 함께 있었잖아요.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도와주고,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동원되었지요. 천사가 함께 있을 때는 이미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완료된 사람이에요. 시간 뒤에 완료된 거예요. 저는 지금 올림픽 경기 하지만 안 봅니다. 쓸데없이 그런데 까지 쓸 신경이 없어요. 그러면 올림픽경기를 아예 안 보는가? 봐요. 언제 보는가? 다 끝나고 나서 봐요.
왜? 그게 복음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떻게? 구본찬이라는 양궁선수가 금메달 땄거든요. 새벽에 경기를 했는데 아침 되면 재방송하잖아요. 이미 금메달 딴 상태, 우승을 한 상태에서 뭘 보느냐 하면, 화살을 쏘는 것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이고, 저거 어쩌나. 큰일 났어. 8점을 쏘다니. 졌다, 졌어. 이미 금메달은 물 건너갔어.” 이미 아는 상태에서 호들갑을 떠는 겁니다. 이게 세상사는 재미에요. “아이고, 죄를 지었구나. 나는 끝났어. 이제 지옥이야.” 하고 웃으면서 말이지요. “세상에 이런 죄를 짓다니.” 웃으면서. “나에게는 저주가 몽땅 올 거야.”
이게 오순절 성령받기 전의 제자들과, 성령 받고 나서 사도가 된 사도들의 특징이 그겁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그 말이 너무 가진 자의 여유에요. 이게 남자다운 거예요. 아무 거리끼는 것이 없고 두려운 것도 없어요. 성공이니 실패라는 것은 메달 따기 전의 문제인 겁니다. 10점짜리 쐈다고 좋다고 하는데 상대방도 10점 쏴버리니까 생중계 보는 사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요.
해설자는 “이쪽에서 10점 쏘면 상대는 기가 죽어서 8점 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설했는데 10점 쏴버리니까 해설자도 못 믿겠어요. 도대체 인생의 미래가 암담하고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데 금메달 따고 난 뒤에 구본찬이 한 경기를 보게 되면, 오히려 호들갑을 더 떠시기 바랍니다. “끝났어, 끝났어! 금메달 끝났어!”
우리는 이미 금메달 땄다는 그 내용을 손에 쥐고, 이미 확보하고 바라보는 것, 이것이 미래가 현재에 투입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산된 상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져 있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하는가? 그게 인식에 관한 문제인데요. 진리와 관계없고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의 그 문제인데요. 그 문제에 대한 예를 들겠습니다.
쉬운 예인데요. 어떤 초등학생 누이가 오빠에게 묻습니다. “오빠! 8곱하기 5가 뭐야?” 물었어요. 좀 짜증이 났지요. “너는 그것도 모르냐? 뭐라고 생각하는데?” “8곱하기 5는 13이다.” 그게 바로 가장 육적인 우리의 평소의 대답이에요. 왜냐하면, 더하기 빼기 밖에 모르는 모습, 이에 양적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에요. 얼마나 돈을 끌어 모았는가? 재산이 얼마나 모였는가? 더하기 빼기밖에 몰라요.
5라는 숫자가 있고 8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두 개 더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13이 정답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오빠가 있다가 “바보야! 13이 아니고 8 곱하기 5는 40이야.”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것은 곱하기에요. 곱하기는 양의 문제가 아니고 질의 문제입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운동장에 아이가 다섯 명이 있다. 그게 여덟 줄이다. 아이의 숫자는 총 얼마인가?” 그 문제에요. <아이가 다섯>이라는 드라마내용에 나온 이야기에요.
거기서 8에다 5가 있으니까 13이 나와 버린 거예요. 그게 뭐냐? 곱하기라는 성질을 표현하는 수학적 논리방식입니다. 왜냐하면, 5 곱하기 8이 되어버리면, 5라는 줄 뒤에 여덟 줄이라는 그 8은 앞에서 보면 보이지를 않아요. 달랑 다섯 명만 보입니다. 그래서 곱하기라는 것은 성질의 반복을 이야기합니다. 다섯 명, 다섯 명, 다섯 명, 이걸 여덟 번 반복하면 되는 거예요.
반복이라는 것은 동일한 질이 뒤에 서 있다는 거예요. 5뒤에 또 5라는 질이 반복되는 거예요. 인생은 질을 표현할 때 곱하기로 표현하고 양을 표현할 때는 더하기와 빼기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동일한 성질이 반복될 때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받지 못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현재 다섯 명을 여섯 명으로, 또는 네 명으로 줄면 큰일 난 것처럼, 일곱 명 여덟 명으로 되면, 재벌이 되면 이 세상 성공한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더하기 빼기밖에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본질을 자기 손을 집어넣어서 못 끄집어내니까. 그러면 양적인 껍데기밖에 안돼요. 뺐다 들어갔다, 뺐다 들어갔다.
그 속에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라는 약속을 집어넣어버립니다. 약속은 처음부터 새로운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약속된 본질을 집어넣어 버려요. 본질을 집어넣게 되면 그 때부터 껍데기, 더하기 빼기밖에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오면서 굉장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왜냐? 인간들의 생각은, 물이 깊으면 빠져죽습니다.
이게 더하기빼기에요.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물고기가 아닌 이상 죽거든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을 아시지요. 물을 걸은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물에 빠졌다는 사실이에요. 주님 보시기에는 물에 빠진 것이 정상이 아닌 것이고 제자들 눈에는 물위를 걸은 것이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고요. 우리의 본질을 우리가 육의 끈질김 때문에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모르고 있을 때는 우리와 같이 하늘나라 갈 사람을 주께서 붙여주면서 이 땅에 누군가를 보내줘야 돼요. 우리와 똑같이 생긴 분을 보내주셔서, 그분은 천국가고 우리는 못가는 이유를, 그 차이를 통해서 발견하도록 하는 겁니다. 성경 간단하지요. 간단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오라. 그리고 들어가라. 나와서 그대로 있지 말고 어디로 들어가야 돼요.
나오라. 어디에서? 혈육의 세상에서, 더하기 빼기의 세상에서, 잘되고 못되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그것밖에 없는 세계에서 나오라. 아까 장로님 기도한 것처럼 나그네니까 나오라. 그리고 나오고 나서 멍청하게 그냥 있으면 됩니까? 들어가라. 어디로? 약속의 땅에. 약속의 땅은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에요. 거기는 하나님의 천사들만 사는 공간이지 우리는 안돼요.
그런데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어떻게? 나왔던 그 인간이 바뀌어야 됩니다. 어디에 합당하게? 들어가야 될 천국에 합당한 인간으로 바뀌어야 되는데 그 바뀌어야 되는 본질을 우리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독생자를, 우리 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그분은 이미 구본찬처럼 금메달을 따고 난 뒤의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여유 있는 분으로 오셨어요.
“세상은 이미 내 약속 안에서 더 연장해봐야 의미 없다. 끝났어.” 하고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은 끝났어. 희망 없어. 기대할 것이 없어. 그들은 자신의 본질을 몰라.”라는 것을 우리 주변에 반복시키고 되풀이 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이 기대대로 안 되고, 기도응답도 안되고, 다 안 될 때에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된다는 것은, 현재 나는 손도 안대고 여기서 더 플러스, 더하기, 양적으로 커지면 내 마음이 흡족하고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교회 나오는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원상회복. 자존심 회복하는 것. 자존심을 왜 회복하려고 하는가? 내 자존심은 누가 만들었는가? 혈육이 만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너는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 이런 식의 막장드라마 대사가 나오잖아요.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근본이 있는 집안이라고 하거든요. 우리아들 같이 공부도 잘하고 교사일도 열심히 하는 애가 어떻게 손톱 손질하는 애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 애는 안 된다. 그 애에 비하면 연태는 얼마나 착한지.”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자기 본질은 괜찮은지 알고 있어요.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괜찮은지 알아요. 주께서는 모든 것을 싹 살 처분하고 전부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오라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저보고 그런 이야기 하지요. “목사님, 복음 전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지금 나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와서 어디로 갈 건데요? 나왔다 치자. 어디로 갈 건데? 천국? 죽어서 가지. 지금은 난 거기 갈 생각이 없어.’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이 왜 나오지 못하는가를 마태복음 22장 43절에서 4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늘나라 계신 분인데 이 땅에 침투하신 분이지요. 인간들은 목수의 아들로 봤지만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주인이십니다.
그 차이가 무엇의 차이로 이어지는가? 어떤 차이인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22장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묻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바리새인은, 시간이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우리는 그냥 시간에 떠밀려 간다는 그것이 혈육에 속한 인간의 전부에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겪었고, 현재는 지금이 현재고. 이것은 누구나 생각하는 시간론인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이미 예수님은 금메달을 손에 쥔 분이에요. 구본찬이라니까요. 이미 금메달 땄어요. 이미 따서 하는 말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딱 이 한 질문 했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선조가 왜 후손이 되어서 오느냐는 거기에 대해서 답변해 보라는 거예요. 다윗의 선조가 어떻게 다윗의 대리자식으로, 그것도 한참 먼 후손으로 어떻게 왔는지의 그 관계를 설명해보라는 겁니다. 그것 설명 못하면 네가 성경해석, 더하기 빼기뿐이고 곱하기를 한 적이 없고, 본질을 안 적이 없다는 것으로 보겠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설명이 됩니까? 답변을 못하지요.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바리새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똑같아요. 현재 이 몸뚱이가 어떻게 천국 가는가? 그것만 생각해요. 내가 어떻게 착해지고,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최선을 다하여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면 봐주시겠지, 노력을 가상히 여기겠지, 더운데 교회 나온다고 애 많이 썼다, 복음 전한다고 수고했으니 큰 상급 주리라, 이게 우리가 아는, 나에 대해서 못 벗어나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로 귀환하는, 내 몸은 가치 있으니 손대지 마라, 누가 뭐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다, 나는 나를 못 버려,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그게 예수님을 못 알아보게 만든다는 겁니다. 이미 기존에, 건전하다, 괜찮다, 문제없다, 가 도리어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 당신이 문제 있잖아. 당신이 미치광이고 과대망상증이다.”라고 손가락질 하고 죽여 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여 버린 그것이 뭐냐?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가지고 들이댄다는 그 말은, 우리가 마귀라 그 말이거든요.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미래가 이미 과거에 있었다는 겁니다. 자, 우리가 육의 몸인지 영의 몸인지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이미 미래의 주님의 약속이 왔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내가 생각하는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으로 전환되었음을 성령에 의해서 믿게 될 때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그 믿음의 완료를 버텨야 되는 거예요. 그게 남자답게 강건한 겁니다.
애들 다섯 명 있지요. 그 다음 줄에 다섯 명, 그 다음 줄에 다섯 명, 여덟 개의 줄로 총 40명이지만 누가 보기에도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고 누가 보기에도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똑같은 인간이에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더하기 빼기로 보이지만 우리는 똑같은 인간, 백날 해도 죄밖에 안 나오는 그 죄를 반복시키는 그 작업이 “너는 혈육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미 죽은 몸이기에.” 그것을 일깨워주시는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 우리에게 믿어진다는 거예요.
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예요. 끝으로, 사랑으로 행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미래가 현재에 주어지게 되면, 너 자신에게 놓여있는 공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속해 있는 공간의 위력을 우리한테 확인시키는 거예요. 그게 구약에서는 영문 밖, 또는 성문 밖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7장 5절에 보면,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라고 되어 있어요.
신명기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영문 밖,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을 입는 공간이 있고 그 밖이 따로 있어요. 밖에 나오면 저주가 되고 안에 있으면 복이 되고. 천국이라 하는 것은 공간의 구분이 천국입니다. 예루살렘성은 천국이고 그 밖은 지옥이고. 성이 있다는 것, 특정한 공간이 있다는 말은 개인의 자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따지거나 묻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너 지금 어디 있어? 성 안에 있어, 성 밖에 있어?” 이걸 묻는 겁니다. 성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에게 복 받은 자고 성 밖으로 쫓겨난 자는 저주받은 자고, 이렇게 공간의 문제에요. 사도바울은 그것을 어렵게 예수 안이라고 했고,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 안이라고 했고, 고린도후서에서는 그리스도의영이라고 했고,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영문 밖에서 우리가 천국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예루살렘성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어려운 말인데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세상을 볼 때에, 주의 지시와 명령을 보면서, “나 저거 할까요?”가 아닙니다. 뭘 하게 되면 그 착한 것이 양적으로 더 늘어나게 돼요. 절대로 더하기 빼기로 보면 안 됩니다. 네가 저것을 하라는 그 말은 ‘아, 내가 소속이 여기로 되어 있구나. 나의 위치가 여기구나.’라는 것을 확인해준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오늘 설교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언약을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언약 안과 언약 밖의 차이점. 언약 안에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찢겨진 살이 있는 공간 안에서, 그 예수 안에서 구원받아요. 열 두 제자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 했습니다.
하지만 언약 안에, 약속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구약의 성문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피가 발려 있는 곳, 그게 요한계시록에 있는 겁니다. 일반적인 용어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더하기 빼기로 생각하지 말고 곱하기로, 본질의 반복으로, 모든 성경구절들을 볼 때 ‘내 본질은 이거였구나.’ 확인 차 성경을 보시면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야, 그릇이 참 크다. 당신 참 그릇이 크다.” 이렇게 말 할 때에, 아이큐가 낮은 사람이면 모를까 이것을 냉면집 그릇으로 보는 사람은 없어요. 냉면집에서 그릇이 크다고 할 때는 세숫대야 냉면그릇을 말하지만 보통 그릇이 크다는 말은, 상황을 용납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하잖아요. 사랑을 행하라는 말은, 사랑 안에서 네가 헤엄치고 있는 그런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양으로 왜곡해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고, 성령 받지 못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면 모든 것을 내가 쌓을 선의 양으로 따져요. 그리고 그것을 못 지키면 빼기를 해요. ‘이 성경 못 지켰으니까 이번 주는 내가 벌 받을 각오해야 돼.’라고 더하기 빼기를 하는 겁니다. “헌금하시면 복 받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공갈도 그런 공갈이 없어요. “헌금 안하시면 저주 받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개 무시한 거예요. 본질을 모르고 “네까짓 게. 너는 성공실패밖에 모르잖아. 그래서 교회 왔잖아.”라는 식으로 목사들은 설교하고 교인들은 아멘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성질 같아서는 다 세숫대야냉면에 다 집어넣고 싶어요. 천사가 하는 일은, 천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하는 일이 뭐냐? 천사는 모든 것을 상한선과 하한선속에 집어넣는 일을 해요.
천사가 도와주는 것은 우리를 성문 안에 집어넣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집어넣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잘라버리는 일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겁니다. 버티시기 바랍니다. 이미 구본찬 선수는 금메달 땄어요. 우리는 목에 금메달 걸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미 상급을 받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미삼아 호들갑을 떠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망했어, 망했어. 이번 주 저주가 올 거야.” 그 호들갑의 최고의 고수가 사도바울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ㅋㅋㅋ ……! 얼마나 대단한 가진자의 여유입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자답게 살게 해주시고 사랑 안에 행하면서 우리의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을 유감없이 이 더운 날에도 뿜어낼 수 있는 자주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