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05강-예수님의 형제(고전16;10-14) 1608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16. 16:27
2016-08-07 12:39:07조회 : 171         
   예수님의 형제 160807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예수님의 형제(고린도전서 16:10-14)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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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08-07 13:32 
예수님 형제  

2016년 8월 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6:10-12 

(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6: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6: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디모데와 아볼로가 끼어 있습니다. 좀 건방져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관해서만 이야기가 하다가 이제는 인간 이야기까지 첨부해야 복음이 완성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끝까지 예수님 이야기로 마감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왜 디모데나 아볼로 이야기가 사도의 편지 안에 왜 끼어드는 겁니까? 그들은 개인적인 자질의 우수함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를 일관성 있게 정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성립하느냐를 탐색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세계에 이 몸 그대로 밀고 들어가면 그대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설치하신 원칙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의 원칙’입니다. 즉 성도는 세상을 살면서 ‘희생의 원칙’을 찾는 식으로 삽니다. 자신의 능력의 대단함을 남들이 알아주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 발휘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결된 관계로 인하여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 관계가 작동하는 힘은 바로 ‘희생’에서 나온 힘입니다. 이 희생을 최종적인 일(1)로 삼으시고 온 우주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다수는 실은 최종의 일(1)을 위하여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믿는 자들의 발생을 통해서 예수님의 희생 중심으로 통합된 현실내막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9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사도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숫자로 표기하면 일(1)이 됩니다. 

즉 너와 나는 모두 최종적 1의 구성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우리(1)’이 성립되는 원리는 바로 ‘영원한 때 전부터’ 확정 난 사항입니다. 즉 구원은 지금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창세전부터 확정난 사항이 바로 구체성을 띠고 현실을 구성해 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너와 나’가 우리라는 형제관계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 영원전부터 준비된 원리는 구체적으로 ‘희생’의 모습으로 발생합니다. 고린도전서 1:에는 ‘아볼로’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린도전서 1:12-13)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생겼습니다. 이는 하나의 원칙, 즉 ‘희생의 원칙’에서 벗어났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타인에 의해서 희생물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자기 먹은 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부화가 누적이 됩니다. 남 탓하면서 징징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회를 상대로 보복하듯이 인생을 삽니다. 마치 빚쟁이가 빚을 청구하는 식으로 자기 권리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이는 ‘희생당하기 전에 자기 것’을 찾고 붙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쪽에 줄을 서서 타인을 희생물로 삼든지 혹은 기어이 타인으로부터 희생 당하기 싫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인생은 ‘희생의 원리’에 부합되지 않기에 천국에서 거절당하게 됩니다. 실은 모든 인간이 이런 식으로 삽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되겠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 보면 다윗이 나옵니다. 다윗은 본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도저히 몰랐습니다. 현 자아가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흔드시고 쪼개십니다. 사무엘하 11: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다윗은 자신이 기대한 다윗이 되기 위해 우리아를 중재자로 삼아 편지를 요압이라는 총사령관에게 보냅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다윗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우리아 장군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도로 다윗에게 돌아옵니다. 여기서 다윗은 알게 됩니다. 가짜를 진짜로 착각하여 가짜를 지키기 위해 의인 우리아 장군을 자신의 가짜 다윗이 발휘하는 명분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가짜 다윗은 우리아 장군의 죽음을 매개로 하여 진짜 다윗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즉 다윗 자신은 ‘죄인’이었고 그것도 처음부터 죄인이었던 겁니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겁니다. (시편 51:5) 다윗에게 있어 자신의 기대가 무너진 것은 도리어 행운이었고 축복이었던 겁니다. 

스스로 자신을 죄에서 살리고자 하는 그 모든 시도가 도리어 죄가 되면서 그 죄로 인하여 희생된 분을 ‘숨김의 세계’ 속에서 밖으로 유출되게 했습니다. 마태복음 16:20에 보면, “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그리스도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가짜 인간들이 전혀 모르는 새로운 방식을 동반해서 그리스도로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희생자’의 모습이요 ‘희생물’의 모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희생물’을 필요치 않는 식으로 평소에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자체가 살 가치와 살 권리를 품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가는 자는 항상 ‘희생물’과 더불어 삽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나중에 성령받고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제자들 자신들의 실수와 거부와 배신이 낱낱이 드러나 있습니다. 

인생이란 이처럼 평생 희생물을 요청해야 될 세월들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형제의 교제는 모두 자신들이 가짜들임을 인정하는 가운데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무리 만나도 지겁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희생 법칙의 발휘가 우리의 일상 속속들이 박혀있음을 늘 발췌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08-08 06:37 
200강-고전 16장 10-14(예수님의 형제)1608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 10-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예수님만 전달되어야 될 이 성경책에 사람의 이름이 툭툭 등장합니다. 함부로 이 주님의 세계에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속되는 일 중에 하나가 이런 인물들을 생산하는 것이고, 그 인물들을 주님의 뜻으로 만들어냈다고 보면 되지요.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똑같은 인간이지만 예수님의 세계 속에서, 천국이죠, 그 천국에 미리 수시합격해서 뛰어든 사람이 디모데, 아볼로, 그리고 19절에 나오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이 부부입니다. 

  

특히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디모데와 아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이 네 사람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도바울의 삼총사같은 느낌이 들고요. 디모데는 수행비서, 호위무사는 아닙니다. 그냥 수행비서, 늘 따라다녔던 사람입니다. 1차전도 때 루스드라에서 만나지요. 엄마가 유니게, 할머니가 로이스. 유대인인데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 이전에 복음이 많이 퍼졌으니까. 

  

그래서 디모데가 믿음 좋다는 것을 알고 1차전도 때 데리고 갔고, 2차, 3차전도 때도 데리고 갔고, 나중에 사도바울이 체포되어서 가이사의 감옥에 가 있을 때는 에베소에서 줄곧 지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담당자, 복음전하는 책임자로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라는 이 사람은 설교하는 사람이었어요. 사도바울 비서가 아니고 사도바울 없을 때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각 지역에 전했던 사람입니다. 

  

아볼로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그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었고요.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편지, 고린도는 그리스나라에 있어요. 그쪽 책임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이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의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은 교회라는 것이 처음부터 가정교회에에요. 가정이 교회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 집에 있는 교회, 그 집자체가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였다 하면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숨겨진 교회인데 나타난 교회, 그렇게 보면 됩니다. 바다가 있는데 물방울이 튀기면 그것을 파도라고 하지요. 파도 같은 역할이 지역마다 있는 교회고 파도는 원래 하나밖에 없는 교회고. 교회를 생각하실 때 항상 숫자 1을 생각하시면 돼요. 교회는 하나밖에 없다. 한 몸, 그리스도 몸 하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님세계에 인간이 이름이 끼어든다 할 때는 어떤 원리가 있어야 돼요. 그냥 무작정 예수님 세계에 뛰어들 수는 없고 예수님세계만 형성되고 통하는 그 원리가 있어요. 그 원리에 부합될 때만 이 이름들이 주의 나라에 의미 있는 이름으로 뛰어들 수가 있습니다. 그 원리가 뭐냐? 희생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이 보는 이 세계,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세계를 뭐로 보는가? 자기희생을 위하여 만들어져야 될 세계, 희생이라는 것이 거기에 가미됩니다. 희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구성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희생으로.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징징대는데 징징댄다는 것은 무엇을 모르기 때문이냐 하면, 예수님의 희생을 모르기에 징징대는 겁니다. 덥다고 불평불만하고. 

  

예수님의 희생을 알게 되면 징징댄다는 것이 도리어 예수님의 희생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불평과 불만, 그것은 이 세상이 나 사는 위주로, 내 쾌적함 위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라는 그것이 하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본다는 것, 교회 와서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잠복되어 있는 희생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교회 오는 것이고 성경 보는 그 목적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어떤 희생을 치렀기에 오늘 내가 이렇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그 연결을 보는 거예요. 희생에서 나온 그물망, 그것이 바로 천국이고 그 그물코에 해당되는 사람이 디모데고, 아볼로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디모데 나오고, 아볼로 나오거든요. 디모데가 나오고 아볼로가 나온다면 우리가 보기에 ‘디모데와 아볼로만 천국가나? 우리는 못 들어가나?’ 이런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럴 때는, 디모데나 아볼로가 사도바울의 아는바 된 사람의 그 원리를 같이 동감하면 되고 체험하면 되지요. 남 성경에 이름이 나온다고 삐지지 마시고, 우리도 예수님과 사도바울과 디모데와 아볼로 사이를 엮는 그 원리에 같이 뛰어들면 우리도 디모데 못지않고 아볼로 못지않습니다. 그 원리를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희생의 원리. 모든 것이 희생에 의해서 생겨나고 예수님의 희생을 증거하기 위해서 모든 현상들은 반짝반짝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바다에 오후 두시에 햇빛이 비추면 반짝반짝 하잖아요.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어서. 그 희생의 효과를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이 악마의 횡포에 의해서 눈이 어두워져서 모르고 있으니까 사도바울이 성령에 의해서 이 편지를 쓰는 겁니다. 금메달 하나 따기 위해서 은메달 동메달 따는 사람이 희생을 해줘야 금메달을 따게 되어 있어요. 세상은 그냥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희생 때문에 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희생을 우리가 잊고 모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희생세계에 없는 존재처럼 취급이 되어서 사실은 없는 인간이에요. 그래서 성경의 디모데와 아볼로가 등장할 때는 남들이 생각하는 디모데나 아볼로는 아니고, 남들이 생각하는 데에 없는 그 디모데, 없는 아볼로가 고린도전서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책에 끼어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천국에 있는 자아는 현재 나라고 여기는 것과 다른 나, 없는 나가 천국에 끼어든다는 말이지요. 그 연결고리가 희생의 위력,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가게 되는 거예요. 

  

천국 가서 뒤돌아보게 되면 자기 잘한 것, 행한 것은 생각 안 나고 오직 예수님의 희생덕분만 죽 생각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걸 이참에 모든 주어진 현실에서 주님의 희생이 어디서 반짝거리는가, 그것을 찾아내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그게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렇게 되면 쓸데없이 징징거리지 않는다니까요? 그렇게 불만불평 여러 가지 하지 않아요. 

  

그러면 희생하는데 왜 디모데는 왜 등장해야 되고 아볼로는 왜 등장해야 되는가? 날도 더운데 간단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에 보면, 디모데 등장하면서 사도바울이 ‘우리’라는 이야기를 해요. 나 말고 너 말고, 같이 합해서 ‘우리’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이렇게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를 거론하면서 “디모데, 너는 내 수행 비서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보다 못해.” 이게 아니고 ‘우리’라고 한 묶음으로 해버려요. 너와 나는 숫자가 2가 돼 버립니다. 우리가 되면 숫자가 하나가 되지요. 항상 염두에 둘 것은 뭐냐? 숫자 1로 달려가야 돼요. 어차피 우리 인간은 숫자 1로 다 끝나버려요. 화장터에 가서 눈앞에 불타고 있다가 나중에 수북하게 나오는 그 화장터의 회 빛 재를 보게 되면 거기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어요. 

  

차이가 없어요. 삼성그룹이 따로 있고 현대그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회백색 그 빛깔 앞에서 모든 인간은 똑같습니다. 숫자로 하면 모두 1이에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물음을 백날 묻는 사람이나 물음을 당하는 사람이나 회백질 색의 화장재 앞에서는, 요만큼은 내 것이고 요만큼은 네 것이라는 그 경계선이 의미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개인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살 처분하고 그 다음에 그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겁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어요. 기도 네가 두 시간 할 때 내가 세 시간했다는 그런 옛날의 업적들이 화장재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전부 다 똑같아요. 영원 전부터, 디모데든 사도바울이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사 구원하기로 작정한 그 확정된 사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되고 펼쳐진 것뿐이에요.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뜻의 펼침이지 내 뜻의 펼침이 인생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인생이라는 말을 사실은 써서는 안 되고 ‘우리 인생은 어떤 것이다.’ 항상 숫자 1로 그렇게 해야 돼요. 사람이 그 인생 가운데 징징댄다는 말은 자꾸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사람이 선을 보는데 소개를 받았어요. 남자가 변호사라니 한 번 나가보라고. ‘변호사? 한번 선 볼 마음이 있지.’ 하고 선을 봤어요. 카페에 앉아서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변호사라면서요?” 물으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변호사가 아니고 벼농사 짓습니다.” 

  

벼농사와 변호사와는 천지차이거든요. 중매쟁이가 발음을 잘못 들어서 벼농사 짓는다는 소리를 변호사로 들은 거예요. 좋다고 갔다가 에이, 하고 짜장면도 안 먹고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인생이란 이처럼 ‘우리’가 되지를 못해요. 끝까지 나만 고집합니다. 그러니까 징징대는 거예요. 디모데입장에서는 영원 전부터 예정된 것을 이야기하지만 아볼로의 경우는 어디에 등장하느냐 하면, 영원 전부터의 그 뜻이 이 땅에서 구체화될 때 그 영원함이라는 시간이 시작도 끝도 없기에 우리로서는 감 잡기 힘든데 그 영원함속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의 뜻이 구체화될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아볼로가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에 나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성경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본 고린도전서 16장도 마찬가지고, 디모데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개인과 개인의 차이를 없애버려요. 그것은 십자가를 통과할 때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 자로 간주하기에 죽은 자로 간주된 상태에서는 차이라는 것이 의미 없잖아요. 

  

율법도 마찬가지고. 잘났다, 착하다 하는 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율법을 줘버리니까 착한자도 없어요. 전부 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는 마찬가지고, 의를 이루지 못하면 의의 나라 천국에 못가는 것도 마찬가지고, 결국 모두 다 천국 못가는 것은 똑같은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열심히 합니까, 가 아니라 이것은 뽑아내시는 주님의 고유권한인데 중요한 것은 그 뽑아낼 때 어떤 원리로 뽑아내는가의 그 원리가 감잡힌 사람은 성령이 온 사람이고 그런 사람만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 원리가 뭐냐? 그 원리가 바로 희생의 원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희생이 없는 입장에서는 뭐가 없느냐? 형제라는 것이 없어요. 디모데가 형제라고 부르고, 아볼로가 형제라고 부를 때, 12절에 “형제 아볼로”라고 할 때 형제라는 단어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희생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제자들에게 ‘내 형제’라고 했고, 내 제자라고 한 것은 형제개념입니다. 예수님은 그 형제의 맏이가 되시고. 

  

나중에 성령 받으면 한 아버지를 아바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한 겁니다. 한 아버지에서 낳은 것으로 쳐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형제도 아닌데, 항상 인간은 남남인데 형제가 된다고 할 때는 성도끼리는 그냥 들어갈 수가 없고 주님의 희생을 앞장세워서 성도끼리 서로 이야기를 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희생이 뭐냐 하면, 너나 나나 둘 다 주님의 희생을 유발시킨 유발자로서 만났다. 나는 주님의 희생이 약간 필요하고 너는 더 필요해, 그런 것이 아니고 모두 다 주님이 희생을 하심으로 만났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그 형제 앞에서 잘난 척을 안 하지요. 진짜 형제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것이 형제냐 하면, 만나도 또 만나도 질리지 않는 관계, 이게 바로 주 안의 형제입니다. 이 소리 들으니 깜짝 놀랐지요. 막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나는 교회 가는데 저 인간 낯짝 보기 싫어서 못가겠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억지로 오세요. 형제 아니라고 치면 되거든요. 부부라는 것이 이래야 됩니다. 아침에 보고, 점심에 보고, 저녁에 보고, 밤에 봐도,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야 그게 부부에요. 

  

그런데 덥다고 각방 쓰고, 등 돌리고, 저리 가라고 발가지고 슬슬 밀어내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요. 그런데 사이 갈라지면 “나는 너 보는 것이 지겹다 그만.” 이렇게 나오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우리가 부부 맞나?’ 하는 생각이 후딱 들어요. 인간적인 힘으로 부부가 지겹지 않은 사이가 되려면 그것은 불가능하고요. 중간에 희생의 원리를 집어넣어야 돼요. 

  

희생의 원리가 뭐냐? 마태복음 16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신학자들마다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고를 때 공통적으로 고르는 구절이 마태복음 16장 20절하고 유사구절들입니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전도하러 오신 것이 아니었어요? 몰래 왔다가 몰래 가버리면 전도는 언제하고 흔히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하늘나라 확장은 언제 하는데요? 선전들을 해대야 되지요. 봉투에 돈 좀 주고 교회에 억지로라도 데리고 와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팔 불어야 되지 않습니까? 지하철에서 나팔 불고, 아침 5시에 남들 자고 있는데 예수 믿으라고 돌아다니고. 잡상인모양으로. 

  

왜 이렇게 광고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광고의 시대, 자기 PR의 시대에.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그리스도임을 알리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자들은 백 프로 사적구원, 개인구원을 시도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고립주의죠. 나만 천당 가면 되지.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거든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 우리끼리잖아요, 우리끼리.”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기존에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내 앞에서 떠벌리고 있다.”는 거예요. 나만 구원받고, 우리 가정만 구원받으면 되었다는 것, 주께서는 “너도 아니야. 그런 너 조차 천국에 받아주지 않는다.” 내가 그리스도임을 알리지 말라는 그 말은, 일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어서 즐거운, 성령 받아서 성도된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주님이 홀로 일하십니다. 

  

어떻게? 모르는데서 알게 하는 방식은 주님만 하시지 인간은 나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아무나 형제라고 넣어주면 안됩니다. 아무나 형제라고 불러주면 안돼요. “너는 우리교회 와서 형제해라.” 하면 자기하고 취미가 맞는다든지 안 그러면 친척관계라든지, 자기와 이해관계에 있는, 나중에 아쉬울 때 손 내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그리고 정이 가는 사람들을 불러서 전도하지 꼴 보기 싫으면 전도하기도 싫잖아요. 

  

모든 전도의 권한은 예수님한테 있습니다. 숨어 있는 곳에서 나타나는 식으로 전도가 돼야 천국 가는 전도지, 나타나 있는 것이 나타나 있는 것을 전도한다고 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무엇을 빠트리기 쉬우냐 하면, 희생이라는 것을 빠트리기 쉽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희생을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미쳤어요? 내가 남에게 희생하게. 인간은 태어나면서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희생하고는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희생의 원리가 빠진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열심히 사는데 뭔가 보복하듯이 살아요.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그 집에 가훈은 사자성어로 ‘두고 보자’입니다. “내가 얼마나 잘 되는지 너희는 두고 봐라. 두고 보자.” 마치 인생이라는 것이 빚쟁이 빚 청구하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사실 우리 포함해서 대다수입니다. 나 너한테 빚 받을 것이 있다고 뭔가 요구하고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인생, 모든 인생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걸 이야기하고 있어요. 자기권리 행세 하면서 세월 다 보냅니다. 

  

소위교회라는 동네도 마찬가지로 그래요. 희생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그게 바로 베드로가 주님에게 책망 받았던 것, 주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뭐냐? 자기권리 행사하는 거예요. 안되면 보복하고. 거기에 무슨 희생이 있습니까? 그러면 목사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그렇다면, 그러면 어떤 인간도 천국의 희생원리 몰라서 다 지옥 가겠네요. 그래요. 다 지옥가요. 

  

지옥가기 때문에 인간과 그리스도가 협조하거나 의논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너의 개인구원에 처박혀 있으라는 말이지요. 너는 너 밖에 모르니까. 진짜 그리스도는 희생의 원리만 앞장세워서 다가가서 건져내기 때문에 비로소 그 때만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이렇게 다가와서 건져낸 그 대표자, 물론 디모데도 그렇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자기가 사도되고 싶어 했습니까? 자기 자신을 잘난 체 한다고 그리스도 핍박했지요. 

  

그런데 영원 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거예요. 주의 희생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것을 자기인생을 통해서 자기 못남을 통해서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을 예를 든다면 다윗입니다. 사무엘하 11장에 보게 되면,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는데 남편 있는 여자를 건드렸거든요. 그래서 자꾸 다윗이 자기생각을 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얼른 이야기했지만 내가 없는 나가 천국 가는 거예요. 현재 있는 나는 천국을 못갑니다. 그런데 다윗은 나가 있다는 그것을 다윗의 전부인줄로 알고 있어요. ‘나, 이 나는 다윗이다. 다윗의 전부는 나다. 끝.’ 또 다른 다윗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겁니다. ‘현재 다윗으로 있으니 이 다윗이 나중에 하나님 잘 믿고 주님과 영원히 살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거예요. 그런데 그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희생의 원리로 작전을 벌이십니다. 

  

우리아의 벗은 몸을 보고 음욕을 품었고, 그리고 간음을 했고, 그런데 간음을 하고 보니 남편이 있고, 이제는 우리아만 없으면 저 여인을 계속 차지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다윗이 밧세바를 사랑하기는 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4절에,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구약에는 우리아로 되어 있고 신약에는 우리야로 되어 있는데 우리아나 아니면 우리야나 다 괜찮습니다. 

  

암몬하고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통에 우리아장군은 지금 이스라엘의 적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한편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간음하고 있었던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아 장군을 불러다가 밧세바의 임신에 대한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려다 실패로 끝나고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보내니.” 다윗이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붙여서 요압장군에게 보내요. 요압은 총사령관이고 우리아는 그 밑에 있는 장군입니다. 요압장군은 총사령관이기 때문에 우리아에게 명령을 해야 되고 우리아장군은 명령받고 그냥 따라야 될 입장이에요. 

  

우리아가 다윗의 중재자가 되어서 요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다윗이 편지를 우리아손에 부쳐서 요압의 손에 전달해서 다윗이 요압을 통해서 우리아장군을 죽여 버려요. 제일 화살이 많이 날아오는 적진에 우리아를 밀어 넣고 나머지는 다 후퇴해서 혼자 화살 맞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식으로 모든 상황을 유발했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다윗에서 다윗, 맨 같은 다윗이 같은 다윗에게 모든 정보가 보고되지요. “임금님! 임금님의 소원대로 우리아장군을 죽였나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요압을 중재로 해서 우리아를 죽이고 그 중재된 소식이 다윗에게 오는 겁니다. 다윗이 다윗에게 간다는 그 말입니다. 인간은 남을 피해자로 만들고 도로 처음 출발했던 자기자리로 돌아온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완전범죄였습니다. 다만 요압만 입 다물면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나단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나단선지자가 등장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우리아가 중보자가 되어서 잘난 다윗을 죄인 다윗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죽어야 되는 자기가 아니고 중보자역할을 하는 우리아가 죽고 말아요. 시편 51편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나단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당신이 의로운 우리아장군을 죽였습니다.” 할 때 시편 51편에 다윗이 하는 말이, “내가 바로 그 죄인 맞습니다.” 하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다윗은 본인이 가짜자아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잘난 나, 개인구원 할 권리가 있는 자, 나는 교회 나가서 예수 믿을 권리가 있는 그런 존재, 이것은 다 가짜였습니다. 

  

가짜였는데 가짜가 진짜 자아, 부모로부터 태어난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은 중보자의 희생 없이는 알 도리가 없어요. 나단선지자가 그런 이야기할 때 나단 선지자보고 훌륭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가짜다윗을 진짜 다윗, 천국 갈 진짜 다윗은 죄인 되지 않으면 천국 못가요. 그 진짜 다윗으로 변개하는데 있어서 우리아장군으로 하여금 희생타로 보내신 겁니다. 그게 우리아장군의 뜻도 아니고 나단선지자의 뜻도 아니에요. 

  

우리아장군으로 그렇게 하게 했고, 나단선지자로 그렇게 하게 하신 배후에 누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그 이스라엘 왕, 진짜 다윗의 계통으로 이 땅에 왕으로 오실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쉽게 말해서 모든 택한 백성의 진짜 자아를 찾아주기 위해서 앞당겨서 미리 희생타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너 예수 믿어?” 이렇게 할 때 “어떤 예수 말인고?” 스스로 내가 살기 위해서 했던 이 모든 짓거리가 예수님이라는 희생을 유발시킨 범인인 것을 깨닫는 그런 자아, 예수님중보자와 한 세트가 되어야 비로소 발굴되고 발견되는 나,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자아입니다. 이게 디모데고 아볼로에요.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고. 이럴 때 뭐가 빛나는가? 성도에게서 희생의 원리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예요. 

  

이번에 마태복음강의 들었잖아요. 마태복음 다 끝나고 난 뒤에 우리가 놀라는 것은, 물론 주님보고도 놀라지만 그 마태라는 제자가 자기와 자기제자들이 한 지저분한 짓을 온 천하에 다 공개하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 목자를 치니 양떼가 흩어진다는 그 부끄러운 짓, “예수님은 우리의 주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렇게 자신이 예수를 철석같이 믿고 주를 위해서 일했으니 이제 한 몫 본다고 여겼던 그런 생각들이, 전부 다 가짜, 그게 내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그게 내 인생이라고 여기면서 철석같이 믿는 그 가짜들이 내 뱉은 지저분한 그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깔아놓는다는 거예요. 마태에게 다 깔아놓고 그걸 두자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뭐냐? 나 주 앞에 죄인이다. 이게 복음이에요 

  

주님 훌륭하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대단하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주님 앞에서 “세상에, 죄가 이런 죄가 없다. 주의 희생 없이는 나는 안 돼.” 왜? 처음부터 나는 자아를 가짜자아를 안 놓으려고 그거 붙들고 내 중심으로 징징대면서 내 소원 들어달라고 기도하고 철야했고 방언했고 헌금했고 봉사했고 그런 식으로 교회 다녔고 목회했고 장로 했고 집사하고 평신도 한 거예요. 

  

진즉에 손 놔야 될 나를 무슨 낙을 보겠다고? 화장터의 회백질색깔 앞에서, 죽음 앞에서는 다 똑같은데. 죽음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죽음 외에는 더 이상 더 현실은 없어요. 그 죽음 앞에서 인간은 똑같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줌의 재가 될 뿐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다 그렇게 돼요. 먼저 죽었던 사람이 먼저 그렇게 되고 우리는 뒤따라가서 그렇게 될 겁니다. 

  

가짜 죽인다고 주 앞에 그렇게 길길이 뛰고 말이지요. “못살겠다, 못살겠다, 더워서 못살겠다. 35도가 뭐냐? 에어컨이 고장 나다니!” 주님도 더운데 고생했습니다. 이 땅은 이렇게 한 번 고생하라는 거예요. 저는 그걸 튀김기름이라고 하는데, 생생한 새우는 멀쩡하지요. 한번 튀겨봐야 돼요. 지옥의 맛을 봐야 돼요. 튀겨지는 소리 막 나잖아요. 후딱 건져내게 되면, 그래서 튀김옷을 입으면, 예수의 피로 입으면 구원받습니다. 그게 디모데고. 그게 아볼로에요. 

  

자기가 가짜라는 것은 희생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느껴지고, 주님의 십자가 생각 하지 않으면요, 이게 다고, 이게 진짜고, 진짜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하면 나는 보복한다, 복수한다. 항상 보복, 복수할 준비자세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살아가니 본인이 못살 지경이에요. 본인이 힘들 지경이라. 누가 날 화 돋우지 않나, 이게 긴장이 되가지고 본인성질에 본인이 못 견딥니다. 

  

맨날 아프고 그렇지요. 편찮으시다 하는 것은 남보다 일찍 가짜임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이런 소리 하는 것은 좀 아니지만요. 마태복음강해를 다 보게 되시면 왜 제자들이 자기의 잘못, 죄지은 것을 왜 그리 자랑스러워하는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인들 같으면 미친 거예요. 자기의 실수, 자기의 과오, 자기의 배신, 그것을 왜 그렇게 즐거워하는지. 

  

왜 즐거워하는가? 큰일 날 뻔 했다는 거예요. 누구 아니면? 주님 아니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욱더 놀랍고 교묘한 것은 그들이 가짜인 것을 배신할 때는 몰랐어요. 왜? 그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문제라. 하나님이 문제에요. 하나님이라는 초월적인 인상을 갖고 있다는 이게 가짜를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고 마귀자식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 믿고, 삼위일체 믿고,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아볼로 나오는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12절에,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고린도교회에서 에베소에서 설교하는 그 아볼로가 아주 유명인사가 되었어요. 그래서 아볼로패가 등장했습니다. 

  

아볼로 패, 바울 패, 베드로 패, 심지어 예수 패, 고린도교회에 이런 패들이 등장했습니다. 자,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다수는 하나로 묶어야 되거든요. 하나로 묶는데 뭐로 묶는가? 여기에 예수파도 있는데 예수파로 묶을까요? 그리스도파로 묶을까요? 그러니 인간이 낳은 용어나 명칭 같은 것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저에게 전화해서 그런 것도 물어요. “우리교회는 교단이 어디입니까?” 묻는 수준이 그러니까 수준에 맞춰서 이야기해주지요. “대한예수교장로회입니다.” “파는요?” “개혁주의파입니다.” 개혁주의파가 한 둘이 아니니까. 왜 그렇게 묻느냐 하면, 소속되어야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소속되어야 구원된다는 생각이 이게 바로 가짜입니다. 

  

소속되면 안돼요. 소속될 수밖에 없지만 소속되면 그 소속된 그 자체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수습할거냐는 말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교회는 고린도교회하나밖에 없는데, 그것도 브리스길라의 집에서 모이면서 교회는 파가 왜 그리 많은지요.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 사도바울도 자기파가 있거든요. 사도바울이 먼저 언급합니다. 십자가와 사도바울을 연결시킵니다. “내가 십자가 졌는가? 아니다. 나는 십자가지신분과 함께 있다. 따라서 정말 네가 소속이 그렇다면 바울파도 소용없고, 그리스도라는 파도 소용없고, 아볼로도 소용없고, 베드로도 소용없다.” 체험적으로 파 자체가, 파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가짜였구나. 이 가짜 때문에 주께서 희생하셔야 했구나. 그 희생된 십자가와 함께 있으라고 해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전파한 겁니다. 

  

십자가를 전파하는데 그 과정이 뭐냐? 고린도전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이 땅에서 누구에게 세례주고, 누구한테 할례행하고, 누구한테 헌금하고, 이런 모든 방식들이 있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가짜, 가짜, 가짜, 매일같이 가짜임을 드러내야 돼요. 

  

쉽게 예를 들면, “목사님, 하루에 몇 끼 먹어야 됩니까?” “세끼 잡수세요.” “세끼 먹으면 천당 갑니까?” 아니, 세끼를 먹어야 된다는 그 규칙이 또 다시 나는 내 가짜자아에 의미를 두고 권리를 행사하고, 두 끼를 먹고 난 뒤에 세끼를 먹으라고 했으니 한 끼를 더 내놓으라는 식의 어떤 권리를 반드시 행사하게 되어 있거든요. 

  

모든 것이 평생에 가짜임을 마음껏 드러내라고 죽을 때가지 이 땅에 우리가 사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뜻이냐? 이미 구원받은, 성령 받은 열두 제자가, 마태가 마태복음을 쓸 때 얼마나 기쁘게 쓰겠어요. 어설픈 것, 죄지은 것, 배신한 것, 다 드러낼 때 그것을 기쁘게 쓰듯이 죄짓는 우리의 모습을 기쁘게 돌아보는 식으로 인생을 마음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쁘게.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가짜고 자기가 만든 규칙 지켰다고 남에게 권리행사하고, 보복하려고 설쳐대는 가짜행세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으니 디모데나 아볼로나 형제가 발생된 이 자체도 사실은 디모데 이야기가 아니고, 아볼로 이야기도 아니고, 사도바울 이야기가 아니고, 형제가 있다는 것, 지겹지 않은 형제가 있다는 그 자체가 주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간판 걸었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의 원리가 차고 넘칠 때, 발휘될 때 그게 교회인줄 이제 알았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자기권리 주장하려고 자기 잘난 체하지 말고, 이러나저러나 열두 제자의 가는 길 그대로 갈 수밖에 없는 허접하고 어설픈 존재인 것을 미리 알아채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