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강-고전 16장 21-24(저주의 기준)1608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 21-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찌어다.”
고린도전서의 마지막대목이 저주를 언급하면서 끝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복음을 종합해볼 때 딱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든지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것으로 복음을 단출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여호와는 물론 아니겠지요.
이 세상에 나타난, 인간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주가 되십니다. 물론 부처는 아니고요. 알라도 아니고 공자나 맹자도 아니지요. 인생의 멘토들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주께서 임하시니느니라.” 해서 세상전체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는 그 이벤트를 위해서, 그 최후의 사실을 위해서 그동안 준비된 거예요. 이 세상의 창조부터 모든 것이 준비된 겁니다.
성경전체가, 창조주가 이 땅에 왔는데 창조주가 이 땅에 왔음을 알아먹는 사람은 천국가고 창조주가 이 땅에 온 것을 못 알아먹는 사람은 그냥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간단해요. 인간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것들이 다 이 말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이 하나를 위해서 전부 다 배정되어 있고, 할당되어 있고, 배치되어 있는 그런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는 그것을 사도바울이 복음으로 우리에게 언급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를 하려면 그냥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으로서는 이것을 알 수가 없어요. 왜 지식으로 알 수 없느냐 하면, 사람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지식이 나오거든요. ‘내가 여기에 있다. 나한테 얼마나 유리한가?’ 이 모든 것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서 뿜어져 나올 때 그게 지식이 돼요.
그것을 어려운 말로 존재라 하는데 ‘내가 여기 존재한다. 나는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것들로 사람들은 세상을 이해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BC 1240년 경 이집트에 ‘죽음의 서(死者의 書)’라는 것이 있어요. 죽은 자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 책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심판을 하는데 인간이 이 땅에 살던 동안 생각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은 심장에 그 정보가 저장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심장은 일종의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라 할 수 있지요. 그 심장과 깃털을 저울에 올려서 견주어보는 거예요. 평행을 이루면 괜찮고 만약에 평행을 이루지 못하면 괴물에게 잡아먹힙니다. 머리는 악어고, 몸통은 사자고, 하체는 하마로 되어 있는 하이브리드괴물에게 잡아먹히는데, 42가지를 묻습니다. “당신은 생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울을 보는 거예요. 저울이 평행을 이루고 있으면 “그건 되었고, 당신은 도둑질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할 때 저울이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합격.
이렇게 42가지를 물어요. 일종의 거짓말 탐지기를 옆에 두고 심판을 하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지은 죄가 있어서 깃털보다 심장이 내려가게 되면 가차 없이 물어뜯습니다. 그러면 해탈의 세계, 영원한 세계에 가지 못하고 다시 이 세상을 떠도는 징벌을 받는다는 죽음의 서, 죽어서 심판받는 책의 내용입니다. 그게 사실은 고대이집트,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때부터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나 오늘날 우리나 똑같다는 거예요.
교회를 나가고 신앙생활을 40년씩 해도 관계가 없어요. 똑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잠복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소개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도 이집트문명에 나오는데 죽음의 서와 똑같은 원리에요. 한평생 살다가 나쁜 짓 한만큼 지옥 가서 벌 받고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 이것은 이집트도 그렇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도 그렇고, 오늘날 절에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똑같아요.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음 전하면 막 졸아요. 무슨 소리 하는지를 못 알아들어요. 지난 수련회에서 마태복음 강의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예수 믿은 지 40년 되고 목회한지 30년 되고 그동안 조심조심, 욕심내려놓고, 순종에 또 순종, 요한계시록 2장 3절에 보면, 첫 사랑을 잊지 말라고 했으니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안 잊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신 차려 이놈아! 십자가사랑을 놓치면 안 돼.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었어. 그런데 십자가로 구원한 거야.” 매진에 매진을 더해서 오후 2시건 새벽 3시건 관계없이 그걸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한시도 마음 놓지 않고, 긴장 풀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고 하면서 40년, 50년 동안 신앙생활 한 그것, 그게 신앙입니까?
내가 물었어요. 강의하면서. 그게 신앙이냐고. 그게 죽음의 서, 불교의 절에 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도 닦는 것과 똑같아요. 성경은 복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잘 들으세요. 토하고 또 토하고 또 토하는 거예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까지 교회를 안 나갔어요. 예수를 안 믿었어요. 약간 사고방식이 잘못된 우리 삼촌이 “너는 너무 순하다. 남자답게 키워야겠다.” 이렇게 해서 강제로 막 술을 먹였어요. 술 먹어야 남자 되는 줄 알고, 또 오기도 있고 해서 ‘그래, 나도 남자다.’ 하면서 소주를 두 병을 마셨던가 한 적이 있어요.
옛날이야기입니다. 소주 두병 마시고 버스타고 집에 와서 수돗가에서 토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어이쿠, 잘한다.”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있어요. 그 핀잔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꼴좋다, 그런 말이에요. 그 때 토하고 또 토했어요. 그런데 신앙생활, 목회자, 또는 목회생활 백날 해도 내가 아는 복음은 ‘바로 이런 것들이 내 안에 잠복되어 있었구나. 이것마저 죄구나.’ 봉사하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이 전부가 토하고, 또 토하고, 할머니는 그걸 보고 “어이쿠, 잘 한다.”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공장이거든요. 예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죄를 의로 바꾸는 공장이에요.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쓰레기는 어떻게 하겠어요? 바깥으로 내놔야 될 것 아닙니까? 모든 나오는 것이 죄가 돼요. 의가 되었기 때문에 그냥 내 안에 있지 못하고 의가 생산되는 것과 동반해서 죄도 함께 쏟아져 나오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이고그것이 바로 복음이에요. 무슨 도를 닦아요. 뭘 완벽에 완벽을 기합니까? 무슨 철저에 철저를 기합니까? 그것은 죽음의 서에요.
육적인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완벽하게 살아서, 성화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영광을 돌리자는 그거거든요. 그것은 살아 있는 자기 자신을 존재로 보는 거예요. 나 여기 있다, 그 여기 있는 나를 죽어서도 거기 있게 하고 싶어 하는 것, 여기 있는 존재와 죽어서도 거기 있는 존재를 이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제일 먼저 어려운 것이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해서 못되게 굴면 죽는다고 하는 그 죽음은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포인트에요. 오늘 본문의 포인트는 뭐냐 하면, 사람이 죽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다가 아니에요. 사람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축복과 저주에요. 축복과 저주, 축복을 증거하고 저주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 후에 인간은 태어나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이왕 태어난 것, 이왕 존재하는 것 계속 존재하면 되지, 죽음을 어떻게든 피하면 되겠지.
죽음이 다가 아니라니까요. 죽어도 상관없어야 돼요. 성경을 볼 때 왜 잘못 보느냐 하면, 하나님,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존재가, 이 존재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습니까, 이 존재를 계속 살아남기와 엮어서 그걸 선입감으로 잡고 그 다음부터 기도를 하든, 십일조를 하든, 헌금을 하든, 그 모든 행동을 하는데 그 모든 행동이 추구하는 바가 뭐냐?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 살 수가 있습니까, 그 식이에요.
주님께서는,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해서 죽고 사는 그것으로 현실이 다 드러난 것이 아니에요. 네가 살든 죽든 저주 편에 속했느냐, 살든 죽든 축복 편에 속했느냐, 이것이 관건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저주에 대해서 처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그 전에 나오는 축복과 저주는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자손에게 한 이야기가 나오고요, 그리고 저주는 아니지만 축복이 나오는데 창세기 1장에서 복이 처음 나와요.
이것을 볼 때 인간이 여기 존재하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나중문제에요. 한 번 물어 봅시다. 밤하늘의 별은 왜 있는 거예요? 누구 허락 맡고 저기에 박혀 있는 겁니까? 사람들이 회의 했습니까? 정당대표들이 모여서 별 하나 새로 달자고 의논한 거예요? 인간의 의논 없이 별이 있지요. 별을 달아놓은 원인에 대해서 인간은 개입하지 못하지요. 그러면 별에 인간의 존재자체가개입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무식한 겁니다.
인간이 무식하다는 것은 인간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 되지요. 인간은 뭐가 뭔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별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요. 누가 저 별을 달아놨는지를 물어도 아무도 손들고 제가 달아놨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별이 왜 있는지 모른다는 말은 인간은 위기에요. 이게 인간이라, 하는 그 주장에 허점이 있어요. 문제가 있는 겁니다. 왜 있는지는 모르겠고, 나는 그냥 있고. 별이 왜 있는지를 모른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거 알 필요가 뭐가 있어? 이왕 태어난 것 밥이나 먹고 살지.’ 이것이 정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밥이나 먹고 살지, 하면 내 존재가 잘 살면 되지, 라는 식이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라는 그 지시와 명령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니까요.
예수님이 저에게 저주를 명령해주세요, 라고 우리가 요구한 적이 없어요. 저주받는 조건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걸 우리가 먼저 예수님에게 요청한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일방적으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고 사전에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들이대시는 겁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어요. 이유에 대해서 몰라요. 왜 우리가 열심히 살았는데, 차가운 겨울바람 부는 날에 시장에 가서 자식 공부시킨다고 열심히 살았는데 나중에 가보니 지옥이더라, 저주 받더라. 왜? 몰라요, 몰라. 방송에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또 맛 집 찾아다니면서 요리 먹는 것도 나오잖아요.
그렇게 먹으면서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먹습니까? 그냥 맛있어서 먹는 거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거기에 갑자기 차가 들이박히는 것처럼 갑자기 치고 들어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어? 어어? 내 인생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논리로 하면 너무 복잡하니까 해답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별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니에요. 별이 있지요. 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달이나 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별이 있는 사건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별이 저기 달려 있는 사건이에요. 거기 있다고 해버리면 별이 알아서 있는 것이 되지만 별이 있다는 것이 사건이 되어버리면 누가, 별을 만드신 분이 계속해서 별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별이 있는 것이 사건이라면 인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 있는 거예요. 우발적인 낯선 현상으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게 있음이 아니고, 사건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별을 있게 한 그 분이 이 땅에 사건으로 나타났기에 그렇습니다. 그 사건이 뭐냐? 십자가사건이에요. 그리고 부활도 부활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있음이 되지만, 사실은 사건이 있는 거예요. 없어야 되는데 사건이 터졌네, 그 사건 터진 것 중 하나가 오늘도 달은 빛나고 해는 빛나는 사건, 해가 동쪽으로 뜨는 사건, 별이 빛나는 사건,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사건, 그 모든 사건은 최종적인 사건, 저주나 축복을 결정짓는 사건, 십자가사건을 위해서 연계되어 있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사건이 아니고 그냥 존재라면 우리의 삶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의 교만을 유발해요. 살아 있는데 뭐. 이 자체가 교만이에요. “주께서 살게 해주시니 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주께서 살려주는 사건을 유발시켰네요. 감사합니다.” 이게 아니고 “어제 살던 내가 오늘도 사는 것이 당연하지 뭐. 왜? 나는 존재니까.” 사건 앞에 존재는 교만한 겁니다.
교만은 당연히 저주에요. 사건으로 이야기해야 될 것을 가지고, “나는 여기 있어야 될 이유가 있어서 존재합니다.” 하고 버티니까 이것은 맞아도 싸지요. 제가 어릴 때는 시장 통에 그런 모습들이 있었어요. 오랜만에 시장에 가면 애들은 먹고 싶은 것이 많잖아요. 치맛자락 붙들고 “엄마! 저거 사줘.” 하지요. 옛날 엄마들은 억셌습니다. 대번에 뒤통수를 때려버려요. 그러면 애가 퍽 하고 고꾸라져요. 고꾸라지면 자기가 알아서 일어나야 돼요. 안 일어나면 또 얻어맞으니까.
일어나서 좀 가다보면 또 맛있는 것이 나오면 “저거 사줘.” 하면 또 때려버려요. 또 고꾸라져요.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의 뒤통수를 칩니다. 우리는 얻어맞아 가면서 “저거 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이거 주시옵소서, 때리면 또 금방 얻어맞고도 이거 주시옵소서, 저거 주시옵소서. 일곱 번 얻어맞아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요.
매일 줘 패도 우리 눈에는 또 뭐가 들어오니까,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 또 저거 달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존재를 사건으로 만드는 방법은 십자가 능력입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게 만듭니다. 윤동주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이 말을 바꿀게요. 여러분이 오늘도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 쾌감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죽음으로 간다는 이것이 얼마나 시원한, 속 시원한 냇가, 시원한 냇가도 필요 없는 이게 바로 속 시원한 냇가에요. 이 동네도 냇가가 있는데 인생 살면서 제일 속 시원한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매일같이 ‘나는 존재한다.’ 하다가 뒤통수 맞고 엎어져서 ‘아, 죽어가는 사건을 보여주면서 죽음으로 질질 끌려가는구나. 매일같이 얻어맞으면서.’ 여기서 얼마나 희열과 쾌감을 느끼는지요. 사람 사는 즐거움이 여기에 있어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이것을 큰소리로 이야기해야 돼요. 마이크 음향장치 고친다고 지난주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상규 집사님도 아주 애를 먹었는데, 인생을 살면서 오늘도 나는 죽어가고 있다고 그걸 제발 자랑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걸 자랑해야 돼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면 “살고 죽는 그것이 진리가 다가 아니었었어. 나는 그 전,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면 다 헛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세상에, 죽느냐 사느냐는 그것보다, 저주와 축복이 내가 존재하는 것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지지난 수요설교에 시편 1편을 설교한 적이 있어요. 요새는 정말 죽어 가는지 기억력이 죽어가는 느낌입니다. 시편 1편 설명하면서, 물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서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뿌리가 있는 사람, 현재 눈에 보이는 존재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의 뿌리가 있는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의 열매를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본인의 존재가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능력이 되어서 오늘 하루도 또 살아가는 사건형식으로 우리를 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박혀 있어요. 어디에? 물가에. 그런데 저주받은 사람은 뿌리가 없어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도다. 훅하고 날라 가면 없어요. 뭔가 인생 열심히 살았는데 메달 하나 못 따고 몰래 귀국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냥 열심히 했는데 소리 소문 없이 공항으로 귀국했어요. 뿌리가 없어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죄인은 악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해서, 사람 살아가는 것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생로병사가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생로병사는 불교에서 하는 소리고, 생로병사가 끝이 아니에요. 생로병사도 일어났던 사건의 다발이고 일어났던 사건의 연속에 불과한 겁니다. 죽고 사는 것은 애초부터 문젯거리도 안 되는데 자꾸 우리 배후에서 누가 문제를 제기해요. “너 그러면 죽는다. 너 죽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너 죽으면 인생 소용없는 거야.” 자꾸 겁을 주는 세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부터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인간을 꼼짝 못하게 하도록 허락을 했어요. “너 그러면 죽는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도나 성령 받은 성도는 뭡니까? “내가 죽는 것도 십자가 사건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는 것도 즐거움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존재를 갈고 닦아서 광택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더러운 것을 토하고, 또 토하고, 또 토하는 거예요.
얼마나 안에 죄들이 잠복되었는지 평생을, 87이 되어서, 90이 다 되어가도 매일 같이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죄밖에 안 나와요. 모든 인간은 똑같아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이미 의가 들어있기 때문에, 탁탁, 쳐주니까 계속 나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의를 자랑하되 우리는 죄를 자랑하는 거예요. 다른 교회가 들으면 미쳤다고 해요. 우리는 죄를 자랑하는 거예요. 헌금한 죄, 예배 참석한 죄, 오늘 춘천의 멀리서도 예배 참석했는데요, 그렇게 멀리서 참석한 죄, 뭘 보겠다고 여기까지 온 죄, 이 모든 것.
살아가면서 주께서 살려준 것도 모르고 ‘아하, 오늘도 살았구나.’ 하고 안심하는 그 죄, 오늘도 살았듯이 내일도 살아야지, 하고 욕심 부리는 그 죄. 사건을 자꾸 존재로 바꾸는 그 이유가 뭐냐? 도대체 이 못돼먹은 이 죄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정답은 딱 하나에요. 다섯 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기 파리채. 전류를 흐르게 해서 휘두르면 파리나 모기가 타닥, 하고 타 죽도록 만든 것, 세상은 전류가 통하는 촘촘한 말씀의 망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으로 존재가 걸렸다 하면, 존재는 전부 다 타닥타닥 다 타버립니다. 존재는 사라지는데 존재가 사라지면서 남긴 그 모양새가 ‘아, 오늘도 하루 산다는 사건이구나. 내가 하루 사건으로 살아있구나. 저 별이 빛나는 것처럼, 저 달이 빛나는 것처럼.’ 주님께서 배후에서 살려줘서 사는 것, 주님이, 네가 죽고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축복과 저주가 중요하지 살고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건을 보여주는 것, 이것을 두자로 구조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어요. 어떤 구조로? 말씀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 주께서 살아가는 공생애 하나하나가 말씀에 의한 사건사건의 한발자국이었습니다. 내딛을 때마다 사건하나 터지고 내딛을 때마다 사건하나 터지고,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공생애의 그 길을 가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과 합세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존재가 아니고요. 우리가 존재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항의가 되겠지만, 십자가 사건자체가 사건이라면, 사건이라면이 아니고 사건이지요. 부활도 사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우리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존재자체를 저주와 축복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 있거든요.
마지막구조가 지옥과 천국이잖아요. 천국은 축복이고 지옥은 저주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존재이전에 먼저 축복과 저주가 먼저 있으니까요. 그래서 성경을 보실 때 어떻게 보는가? 축복과 저주의 관점으로 보시면 성경은 다 풀립니다. 안 풀리는 것이 없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살아볼까, 이렇게 보면 하나도 안 풀려요. 내가 빠지고 축복은 축복되게 하고, 저주는 저주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 땅에 살아간다고 하면 안 풀리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 풀려버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왜 이렇게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는지, 주님과 저주가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를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의 처음에 나오는 축복과 저주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불임, 여자가 애를 못 낳게 되면 이것인 인생의 결정적인 결점이 있다고 봐서 그걸 저주로 간주했습니다. 불임여성은 저주가 되고요, 하나님의 개입으로 애를 낳게 되면 그걸 축복으로 본 거예요. 제 말의 취지를 잘 모르겠지요? 모든 것은 처음부터 저주의 바다였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냅니다. 아버지 데라는 일찍 죽었고요. 약속의 땅까지 오는데 나이가 99세였고 아내 사라의 나이는 89세로 열 살 차이에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린다고 할 정도로 택한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을 불렀으면 뭔가 결점이 없어야 되는데 그렇게 불러놓고는 아내가 임신이 안돼요. 그것은 뭐냐? 축복과 저주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나타날 때는 항상 열매 없는, 불임이라는 흔적으로 먼저 와요. 그렇게 해놓고 아브람에게, 네 자손이 하늘과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은 네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아질 것이라고 해놓고 막상 아내는 아기를 못 낳는 여성이고. 이것은 두 논리 사이에 연결점이 끊어져 있어요. 지금 제가 뭘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옛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같으면 ‘죽음의 서’의 이집트 문명처럼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저주받는다고 할 때는 뭐냐? 나라는 존재는 무조건 착해야 되고 무조건 축복받아야 된다는 전제를 깔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진짜로 숨겨진 축복과 저주는, ‘나는 무조건 복 받아야 돼. 나는 착하니까.’라는 것을 완전히 무효화시키고 뒤집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는 자식이 아니면 그것은 자식을 열 명 낳아도 내가 원하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으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도 제가 이렇게 힘들어요. 워낙 모든 사람들이 교회 오면 성경 보면서, ‘저는 복 받겠습니까?’ 자기는 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오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는 저주가 합당합니다.” 라는 것을 설명하려하니 또 삐질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삐지든 말든 할 수 없어요. 이야기 천천히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숨겨진 하늘의 비밀을 담은 사람을 어떤 인간을 통해서 그대로 정보를 담아내는데,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축복이 뭔지 저주가 뭔지는 몰라요. 무조건 특이한 사람, 택한 아브라함을 보내놓고, 아무리 착해도 아브라함이 복의 사람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아주 희한한 일을 벌이는 거예요. 혼자 하나님 앞에서 독대해서 “저 착합니다.” 이렇게 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가를 보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택한 자를 보내서 택한 자에 대한 인식이 어떠냐에 따라서 복과 저주를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누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고,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게 되면 복을 받고. 인간이 착하게 살자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 존재에서 나온 존재의 열정,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것이지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일반종교지요. 이야기를 계속 나가보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브라함은 복이 뭔지를 본인이 몰라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선언을 했거든요. 본인은 그 내용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내를 아기 못 낳는 여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못 낳으면 아기 없다고 하면 되는데, 네 자식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아브람은, 우리 아버지는 존경스럽다는 뜻이거든요. 세상 모두가 남성중심의 사회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람은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본토 아비집,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네가 나오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나와 버리면, 거기서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 내용은 준비된 것을 채워줘야 되는 거예요. 그 이름이, 우리 아버지는 존경스럽다, 여기서 뭐로 바뀌는가? 만인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자식이 있어야지요. 자식이 없는데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기존의 남성의 세계에서 자식이 없으면 양자를 들인다든지, 아니면 씨받이를 들여서 대를 이어요. 그 방법을 이미 아브라함도 실시했습니다. 씨받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잖아요. 하나님은 말합니다.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기준의 내 자식은 네가 육으로 낳은 이스마엘은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하면서도…….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어떤 분은 “목사님이 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야 됩니까?”라고 의아해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을 거예요.
교회 나가면 복 받고, 교회 안 나가면 저주받는 것 아니에요?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뭡니까? 인간자체가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그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자꾸 내 인생에 손대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여러분 인생에 주님이 손대야 돼요. 왜? 육이니까. 육은 사건이 아니고 그냥 존재덩어리에요. 육으로 난 것은 자꾸 날 건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도 내 자식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식이에요.
왜 내 인생 건드립니까, 이런 식으로 맨날 육은 자기는 건드리지 말아야 될 특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에 이것은 저주에요. 이것을 뭐로 바꾸는가? 영으로 바꾸는 겁니다. 영으로 바꾸는데, 그게 축복이 되거든요. 그 바꾸는 방법, 육에서 영으로 바꾸는 방법은 없습니다. 종교를 포기하면 돼요. 기도 포기하고, 헌금 포기하고, 예배참석 포기하고, 포기할 것 다 포기하면 돼요. 어차피 안 되니까.
포기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라는 거지요. 우리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고 아무 가치 없어요. 설교한다고 해서 한 사람 더 구원되는 것도 아니에요. 구원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되지 설교자가 설교 잘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천만 명이라고 해도 한명도 구원 못했어요. 사도바울이 단 한명도 구원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열두제자가 백날 해도 한 명도 구원 못했어요.
구원은 주께서 사도에게 설교를 하게 해서 그 사람에게 성령세례를 줘서 구원받게 한 거예요. 주님의 자기활동입니다. 그래서 존재에서 뭐로 바뀌는가?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어야 그게 구원되는 것이고 영적사람 되는 겁니다. 영적사람은 존재가 아니에요. 매일같이 사건과 사건의 연속을 영적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시라도 주님께서 손대야 하루하루 살아가는 존재, 그런 사람이 영적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원형을 아브라함에게서 찾으려고 지금 주께서 개입을 하신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내는 불임여성입니다. 아기를 못 낳습니다. 약속은 되어 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 쪽에서 애를 써도 약속까지 이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동네 사람이 아닌 세 명의 사나이가 찾아왔어요. 아브라함이 정성껏 그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인줄 알았어요. 천사가 실컷 얻어먹고 하는 소리가, 내년 이맘때쯤 되어서 당신에게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걸 듣게 된 89세 된 사라가 픽, 하고 웃었어요. 나이 80이 넘은 여자가 안 웃겠어요? 우리 어머니가 그거 들으면 안 웃겠습니까? 픽, 하고 웃지요. 이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이 말은 뭐냐? 주께서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있어도, 존재가 있어도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성령 받는 방법은 일차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그 다음에 성령 보내시는 그 절차를 압축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그냥 주시는 거예요.
사라가 픽 하고 웃었어요. 천사가 천만 뒤에서 듣고는 사라가 웃었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여보! 당신 웃었어?” 아내가 “난 안 웃었어.”라고 거짓말 했어요. 잠깐 나와 보라고 해서 웃었느냐고 하니 웃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웃었다는 그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천사가 닦달을 내는 겁니까? 그 이유가 태어나는 아이의 이름을 웃음으로 지어버려요.
웃음으로 짓는다는 말은, 인간의 육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거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오늘날 우리가 천국 사람 되고, 하나님의 백성 되고, 성령 사람 되는 것은 내가 봐도 웃을 일이라는 그 말입니다. 돈만 챙기고, 내 자식밖에 모르고, 평생가도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이런 속성밖에 없는 우리가 어딜 가? 천국을 가? 이것은 진짜 길을 가다 물어봐도 웃기는 짓이 되는 거예요.
그런 웃기는 짓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존재가 아니라 주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같이 그런 사건더미속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를 비웃어야 돼요. 이것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것은 말이 안 돼. 있을 수가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딱 하나다. 누구든지 나 건드리면 죽인다는 그 살인자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내 것 건드리면 죽인다는 거예요.
이것은 아무리 감추고 도를 닦아도 이것은 감출수가 없습니다. 도 닦는다고 촛불 켜놓았는데 그 촛불 휙 불어서 꺼버리면 죽여 버립니다. 높은 사다리에 올라가서 도 닦고 있는데 사다리 치워버리면 내려와서 멱살 쥡니다. 그런 일이 어제 새벽에 또 있었어요. 뉴질랜드 한국계 골프선수인 리디아고가 공을 쳤는데 애가 공을 주워가 버렸어요. 질겁한 거예요.
인간이 하는 모든 자체가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주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기 전에 이미 인간이 하나님을 저주했었어요. 내 것 건드리는 하나님으로 왔기 때문에 인간은 이미 저주로 대들었고 그 저주가 주님의 저주로서 보복으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내 존재 건드렸다고, 내 존재의 뜻대로 안된다고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까?
그런데 이게 웃을 일이지, 예수님이 행한 그 십자가는 너를 위해서 행한 것이라는 그 이야기가 동의가 되는 순간, 갑자기 나 자체가 놀라는 거예요. 지금도 나밖에 모르는 죄가 나올 때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경기날 수밖에 없는 이런 죄인, 이미 주께서 해결했다는 이 복음이 받아질 때, ‘아,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를 내 존재식으로 유지하려는 이것이 바로 악마의 작전이었구나.’
존재를 붙들려고 하는데 마귀는 약을 올려요. ‘너 그러다 죽는다. 너 벌 받아 죽는다. 너는 그러다가 천당 가서 재판받으면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너무 무거워서 지옥 간다.’ 갑자기 착해야 해, 착해져야 해, 이것이 얼마나 자기관리에요. 그게 우상입니다. 그냥 제발 피식 웃으시고, 한바탕 피식 웃으시고 그냥 나에 대해서, 내 존재에 대해서 손을 놔버리세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주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자는 이미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축복이라는 거예요. 뒤통수 때리시고 엎어져도, 토하고 또 토해도 “어이쿠, 자알 한다.” 그것이 축복이에요. 저의 청년 때에 저를 보고 할머니가 꼴좋다고 하면서도 저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놓고도 다 치워주시고 꿀물 타주시고 그랬습니다. 예수를 안 믿었지만 얼마나 저에게 잘해줬는지 몰라요.
용납을 다 했기 때문에 우리가 잘났다, 혹은 못났다가 아니라 주님의 준비된 축복을 너라는 인간, 못돼먹은 인간을 통해서 그 축복을 낱낱이 하나하나 증명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하나의 사건사건으로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누굴 만나든지 반드시 그냥 만나지 마시고 사건과 사건으로 예수님을 경유해서 성도끼리는 대화해야 돼요.
우리 교인가운데 뚱뚱한 분은 거의 없어요. 없을 때 어떻게 보는가? 바짝 마른 습자지로 보시면 그게 습자지로 보는 거예요. 저 사람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저 사람은 빌딩 몇 채를 가지고……, 이렇게 보지 마시고 바짝 마른 그림자뿐이야, 그런 식으로 상대를 보게 되면 상대를 부러워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사건, 빌딩가지는 사건으로 보고, 나는 빌딩 없는 사건으로 보고,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다 예수님 십자가구조, 전기 파리채로 모든 말씀으로 때가 되매 구조화되어 있다는, 축복과 저주로 분류된다는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짝 마른 사람으로,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부탁은 그거예요. 앞으로 여러분이 한 20만평 부동산을 갖고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이 넘더라도 항상 ‘나는 바짝 말랐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한 달 수입이 2천만 원밖에 안되니 내가 뭘 가졌다고.’ 이런 식으로 자기를 바짝 마른, 십자가처럼 바짝 마른 그런 사람으로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시고 그래서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축복과 저주사건으로 된 이 세상, 하늘의 별, 달, 이 모든 것이 박혀 있는 것도 하나의 사건인데 우리는 나 중심으로 스스로 우상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지독한 우상을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다 태워 사라지게 하시고 십자가사건의 증거물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