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104강-연보(고전16;1-4) 1607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4. 07:38
2016-07-31 12:33:30 조회 : 112         
   연 보 160731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연보(고린도전서 16: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2MFQZXOEVFQ, Hit:6

 이근호 16-07-31 13:24 

연보

2016년 7월 3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6:1-4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16: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16: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16: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사도 바울의 편지 마지막에 ‘돈’이야기 하십니다. 그 전까지는 줄곧 복음이야기 하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의 효과로서 부활 언급을 하셨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장에서는 ‘매주간 첫날에 돈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돈을 준비한다는 것은 성도가 자기 행함, 자기 결정과 자기 결심이 동원되어야 될 사항처럼 간주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몸’ 중심의 부활 이야기가 편지 끝에서는 어떤 식으로 인간의 몸에 감안되는지를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는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 몸 살리기 중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데 필요한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돈’입니다. ‘돈없이는 못산다’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철칙처럼 간주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복음 이야기가 들려오기 전에 이미 철저하기 버티야만 하는 핵심 기둥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돈이 나를 살린다’는 실감나는 원칙입니다.

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돈 내라”고 하는 것은 공격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공격하는 것은 뭐가 되었든 적(適)입니다. 결국 복음을 이야기한 사도가 고린도교회의 입장에서 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생존의 에너지가 돈에 있는데 그 돈을 거론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복음을 언급해도 일단 돈 문제가 등장하면 그 복음은 잡소리요 잡담이요 농담이요 헛소리가 될 뿐입니다. 실질적 소득 없는 소일거리 삼아 주고받는 시간 떼우기 망언으로 전락됩니다. 이런 인간들의 심보가 있음을 사도 바울이 알면서도 왜 연보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가짜 자아’를 중심으로 버티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급한 복음 안에는 ‘가짜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3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이 이 세상을 아무리 오랜 세월 산다고 해도 이 말씀이 실감나게 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자신 있게 언급하는 겁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에 보면, 세상 역사에서는 별반 유명하지 않지만 성경 안에서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세상 사람과 직접 상대하지 않기를 유도하십니다.

마태복음 8:20-22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련해주시려는 공간은 기존의 ‘생존의 공간’이 아니라 ‘생명의 공간’입니다. 생존의 공간은 기존의 인간 몸을 개선하는데 주력하는 공간인 반면에, ‘생명의 공간’이란 ‘이미 영생이 작렬하는 공간’을 말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구약 때 모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단독으로 시내산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는 만날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만날 하나님이 계십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부여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영적 공간’이라는 모세가 산 밑에 내려올 때, 기존의 몸을 지닌 자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발산되는 영광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는 있는 지경입니다.

즉 이미 모세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새로운 몸으로 살아가는데 그 공간이 바로 ‘생명의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하시는 공간이 바로 ‘생명의 공간’입니다. 이 공간에서 제자들은 새로운 자아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에게는 두 개의 ‘자아’ 곧 두 개의 ‘나’가 됩니다.

나는 나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만들어나가는 ‘나’와 주님에 의해서 완성된 ‘나’가 따로 있습니다. 기존의 나는 후패하고 새로운 나는 부활로 그 가치가 만개하게 됩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돈의 원칙’을 붙들고 복음을 잡담정도로 여기는 이유는, 생명이 될 수 없는것에집요하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 세계에서 버틸 수없는 ‘나’에 집착하다보니 ‘나’는 하루 종일 아픕니다. ‘아픈 나’는 가짜 나입니다. 하루 종일 걱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연보를 언급하십니다. ‘돈의 원칙에서 벗어난 ’생명의 원칙‘ 안에서는 연보는 돈이 아니라 곧 영생의 흔적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도 바울의 일대를 놓고서 보면, 사도 바울은 물 위에 있는 기름처럼 물이 일렁일 때마다 성령의 움직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진짜 나는, 가짜로 가득한 쉴새없이 흘러가는 강물에, 그 바닥에서 조용히 서식하는 다슬기와에 같습니다. 사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세나 사도 바울이 알게 된 것은, 인간이란 ‘원단에 염색된 무늬’같은 처지라는 사실입니다. 모판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자아의 원천이 말씀에 의해서 생성된 것도 모르고 독자적인 활동으로 자아를 계속 생존케 하려니 ‘돈의 원칙’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부탁하고, 그것은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가려고 하는 것은, 사도가 없을 경우에도 참으로 그들이 ‘생명의 공간 안에서’ 살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연보란 자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렁거리는 움직임이 내장되어 있어 그 결과로 연보가 저축되어야 하는 겁니다.

사도가 그것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사도의 일 자체가 주님의 일이요 거기에 합세한 그들도 사도와 같은 주님에 의해서 생명을 공여받은 형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가 연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연보케 하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이미 얻어진 생명’ 안에서 사는 이와 새삼스럽게 자신을 구원코자 하는 복음 밖의 가짜들을 구분하시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의 주인님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세상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늘의 생명은 변경됨이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6-08-03 18:06 
199강-고전 16장 1-4(연보)16073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6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284페이지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갑가지 사도바울이 복음이야기 하다가 여기서 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복음이야기 하다가 돈 이야기해버리면 앞에 있는 복음이야기는 실없는 농담이 되고 말아요. 이 말은 돈 앞에서는 복음이고 십자가고 예수고 하나님이고 그것은 아무 실효성 없는 잡담, 그냥 시간 때우기 잡담처럼 그냥 흘려버립니다. 영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비현실적으로 복음이 느껴진다는 말은 현실적인 것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현실적인 세계가 뭐냐, 돈으로 매개가 되어서 대화하는 세계, 이건 철떡 같아요. 이 세계는 요지부동입니다. 돈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복음을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돈 이야기도 되고 거기에 보태서 복음이야기도 되고, 둘 다 된다고 이렇게 오해를 하죠.
  
그러나 막상 복음이야기 하다가 돈 이야기해버리면 앞서 이야기한 복음이야기 해버리면 그거는 실없는 농담같이 듣지도 않은 것처럼 날아가 버려요. 그것을 네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삶의 공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삶의 공간.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현재 여러분들은 잘 살고 있지요? 죽어서 좋은데 보내줄게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복음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고 돈 벌어서 사는 그 여러분들의 삶의 공간이 있지요?” 그거 가짜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거 허물어져야 하고 그거는 엉터리며 그게 바로 허상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진짜 현실은 따로 있습니다.”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삶의 공간은 두 종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생존의 공간이 있고 또 하나는 생명의 공간이 있어요. 생존의 공간에 있는 사람이 생명의 공간을 수용을 한다는 것은, 이거는 어불성설입니다. 이거는 성립되지 않아요. 이건 실패로 끝나 버려요. 생명의 공간이 생존의 공간을 차버리기 때문에, 튕겨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듣고 설교를 들어도 생존의 공간은, 생존의 공간에 대해서 건드리기만 해도 인간은 저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 보낸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이야기지만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손끝하나 대지마세요. 생명의 공간은 나중 문제이고 지금 다급한 문제, 시급한 문제는 생존의 공간입니다. 생존의 공간을 자기의 삶의 공간으로 그렇게 보는 겁니다.
  
여기서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사람도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고린도전서를 보고 있잖아요. 그 앞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쭉 나와 있습니다. 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등장인물, 주요인물이 등장해요. 역사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요인물로 등장하는데, 그들이 누구냐 하면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제자들 중심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계십니다. 앞에 세례요한이 있고. 그게 일반적인 생존의 공간에서는 퍽이나 중요하지 않아요.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런 인물이 있는가 싶죠.
  
바쁜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챙기고, 예수님이나 챙기고, 하나님이나 챙기고, 그렇게 성경 챙기고 할 그런 여유조차가 우리한테는 허용되지 않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 사는 게. 교회 와서나 성경책 펄럭이면서 바람내면서 설치지. 집에 가면 성경책은 차 뒤에나 있고. 우리교회는 편리하게 전부 다 놔두고 가고. 성경책은 보지를 않아요. 생존의 공간이 시급한데. 그 한 시간씩 교회 와서, 교회가 어디 천당 가는 학원도 아니고, 학원 한 시간씩 다니듯이 하는데, 그걸 신경 쓸 수 없지 않습니까?
  
근데 그 성경에 우리가 등한시하고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는 아니지만 멀리하고 싶은 성경책 안에는 사람들한테는 인기가 없지만 하나님에게 주요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와 예수님.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은 뭐냐, 사람들과 상대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과 상대를 하지 않아요. 그게 특징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사람과 상대를 하지 않게 됨으로써 그 뒤에 성령을 받아서 성도된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일한 삶을 살 것을 하나님은 요구합니다. “사람 상대하지 마라. 니만 피곤하다.” 모든 피곤은 사람 상대해서 오는 거예요. 사람 상대해서. 
  
제자들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아니, 상대하고 싶어요. 삶의 공간이니까. 생존의 공간이니까. 상대하고 싶은데, 예수님께서 자꾸 그걸 가로막습니다. “니가 전한 복음을 듣지 않거든 먼지를 털어버려라” 이런 것. “많은 돈을 갖고 있지 말고 그냥 나그네처럼 살아가라” 자꾸 주님께서 떼를 쓰고 억지를 쓰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영생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지만 방금 제 아버지가 죽어서 장례를 치르고 가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예수님께서의 답변은 그래, 치르고 이틀 뒤에 오라고 이렇게 하지 않고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례한다? 한통속이라는 말입니다. 한통속.
  
그리고 말하기를 이래요. 너희는 평소에 사는 사람은 살았다 치지만 그거는 한통속이고, 제자들을 말한 너희는 죽은 자의 범주에 속하지 않은 생명의 공간에서 새롭게 피어나야 될 새사람이라는 뜻으로 주께서는 제자들을 몰아세웁니다. 몰아세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니가 평소에 상대하는 사람들 상대하듯이 그렇게 되면 한통속이 되니까 이제부터는 너는 뭐냐 하면 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유해서 사람을 만나더라도 나를 경유해서 사람을 만나야 된다. 예수님을 경유하는 것을 예수님은 어필하시고 그걸 요구하시는 거예요.
  
전에는 직접 다이렉트로 사람을 만났지만 그냥 만나지 말고 나를 경유해서 만나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을 경유해서 만나야 되는가,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현실의 원천이라고 보는 겁니다. 오리지널이죠. 원천. 기본 또는 근본. 숨어있는 것. 그 숨어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니가 태어나서 니가 체험했던 모든 공간은, 이거는 니 생존의 공간이고, 가족 간의 오순도순 살던 과거의 가족에 의해서 구성된 그러한 자아가 만들어졌던 그러한 공간이라면, 지금 니가 나를 만나서 하는 공간은 그러한 세계로 인하여 숨겨진 세계, 원천적인 공간이 따로 있는데 그 공간에만 생명이 있고 니가 생각하는 공간에는 생명이 없고 그냥 살다 죽으면 그만인 생존의 공간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이 거기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지금 제가 무슨 설교하는 건지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나중에 그게 무슨 말인지를 다 알게 되는 기회를 따로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제가 방금 언급을 했는데요.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방법 중의 하나가 구약에서는 이렇게 했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2200미터 시내산 산꼭대기에 모세를 홀로 올려 보냈습니다. 그 시내산 꼭대기에는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없는데 거기에 누가 있느냐, 모세 혼자 있어요. 혼자서 뭐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산꼭대기에 모세를 혼자 올라가게 해놓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는 겁니까? 너희 원천, 너희 원천을 경유해서 너 자신을 새롭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단독으로, 독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과 모세를 독대해서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만나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약 때는 산꼭대기가 아니라 아예 이 지상에 내려와 버렸어요.
  
그 분이 누구냐 하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시장통에 나타났다 이래 생각하시면 돼요. 예수님이 시장통에 나타났는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기하고 동급이라고 생각했어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잖아? 니 아버지 직업은 목수고, 물론 예수님의 직업도 목수겠죠. 나는 다른 직업가지고. 뭐 똑같은 동급이지. 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 이래 되겠죠.
  
동급의 인간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나타났지만, 예수님께서 발현을 하면서 형성되는 그런 공간은, 예수님 중심의 공간은 지상의 사람들이 자기중심의 공간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멘트를 마구 내뱉고 있습니다. 생존의 공간과 생명의 공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개입이 있고 단절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성경책을 보고 교회 다닙니다. 보면서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삶의 공간에 유리하도록, 흔히 말하는 복 받기 위해서 이 성경을 인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다 사기에요. 주의 말씀은 우리라는 것을 삭제시키고 우리를 부인하고 부정하게 하는 말씀이지, 내 삶의 공간으로 점점 더 유리하고 확장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너는 사람을 상대하지 마라. 쉽게 말해서 사람을 믿지 말라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라는 이 말은, 그동안 사람 믿고 살아왔잖아? 특히 사람 믿는 너 믿고 살아왔잖아? 너 믿지 말고, 사람 믿지 말고, 누가 신앙 좋다 믿지 말고, 주변의 인물 믿지 말고, 누가 말씀 지켰다, 성화됐다, 그런 거 믿지 말고, 누가 기도 많이 했다, 누가 헌금 했더라 이런 거 믿지 말고, 누가 기도하더라, 금식 하더라, 마태복음 6장 이야기입니다. 지금 수련회 때 할 것을 다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사기에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들은 사기 쳐도 사기인줄 모르지만, 본인이 그런 일들인 주변에 일어나니까 그게 나한테 유리한가 싶어서 자꾸 시선을 거기에다 돌리게 돼요. 경건해보이고 거룩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저 사람은 곧장 죽어도 하늘나라 갈 것처럼 보이죠. 주께서는 니가 문제라는 거예요. 니가. 그런 데에 호감을 갖고 그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니가 문제라는 겁니다. 너 자신이.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공간 속에서 주께서 제공하시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생존의 공간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내가 사실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가짜의 내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나는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 진짜 내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진짜 내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와 나를 혼동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나와 나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알던 나 말고 다른 나. ego에고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나는 셀프self, 주체. 다른 나를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이미 제시했다는 거예요. 진짜 나를 예수님 쪽에서 제시를 했기 때문에 기존의 나라고 여기는 그것은 니가 알아서 폐기처분하라는 것이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진짜 나는 내가 손댈 것이 없어요. 내가 더 키운다든지, 확장한다든지, 나의 힘을 발휘해야 된다든지, 더 오래 살아야 한다든지, 지금보다 건강해야 된다든지, 이러한 기대나 노림수가 일체 추가될 어떤 희망 같은 것은, 기대 같은 것은 덧붙일 필요가 없어요. 완제품입니다. 완성품이에요.
  
근데 내가 생각하는 나는 지금보다 향상해야 되고, 발전해야 되고, 부자 되어야 하고, 건강해야 되고, 사랑받아야 되고, 남한테 인정받아야 되고, 권력 더 가져야 되고, 승진해야 되고, 출세해야 되고, 뭔가 미진한 것이 남아있다는 것은 그건 가짜에요.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사람이 인생 살면서 아프잖아요. 아프다는 것 자체가 가짜에요. 김광석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런 노래 있어요. 너무 나가 아파요. 그거 가짜입니다. 아픈 나는 가짜에요. 아프지 말고....., 아파하는 자아는 완벽한 가짜입니다. 아파하는 것 때문에 가짜 나가 가짜의 종교, 가짜의 기독교, 가짜의 교회, 가짜의 헌금, 가짜의 기도, 가짜의 전도, 가짜의 하나님, 가짜의 삼위일체를 요청할 수밖에 없어요. 왜? 아프니까.
  
아프지 말라고 했거든요. 마태복음 11장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나라는 자아는,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예수님의 자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데, 너희들은 가짜이기 때문에, 왜 그렇게 짐을 사서 고생하느냐, 마음걱정, 근심걱정을 왜 사서 하느냐 말이죠. 백 퍼센트 가짜에요. 왜? 그 환경자체가 주님을 경유하지 않는 환경, 복음 안에서 준비된 환경이 아니고, 기존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아서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나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한 가짜 껍데기에 의한 엉터리 자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을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까지 복음이야기하고 연보 이야기를 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15장까지 복음이야기 했거든요. 십자가, 부활이야기 했다고요. 그리고 16장에 와서 연보이야기, 돈 이야기 했습니다. 가짜 나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그냥 16장 연보이야기 해버리면, “돈 내라는 말이지?” 이렇게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복음이야기는 잡담이 되고 헛소리가 되고 들어도 안 들은 소리가 돼버려요. 아무 효과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이 돈 문제 배치를 복음이야기 그 다음에 돈 문제 이야기, 연보를 배치하는 겁니다. 연보는 돈이 아니고 생명의 환경이라는, 새로운 환경이라는 겁니다. 복음 안에서 피어나는 환경. 연보를 돈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돈 내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너 지금 어디서 살고 있어?” 그 이야기를 하고 겁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인간은 연보를 할 수 없어요. 인간은 돈을 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연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우리를 돈 주고 지금까지 이 나이까지 키워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돈으로 살았는데 거기에다 뭘 따로 떼어가지고 연보를 해요? 연보라는 것은 성도한테나 이 세상에나 연보라는 것이 없어요. 모든 돈은 하나님 쪽에서 시작해서 우리한테 제공된 겁니다. “니 자체가 연보다. 니 자체가 연보임을 드러내라. 니가 니 눈에는 돈으로 보이나? 내 눈에는 생명으로 보인다.” 이게 연보입니다. 돈 내는 것이 연보가 아니고 생명 내놓는 것이 연보입니다. “주님 이런 생명 주셨잖아요? 내놓는 것이 연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에 들어와서 매주일 첫날에 보면 이익을 얻는 대로 저축하라는 이 말은, 너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갈 때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갈 때 얼굴 보고 연보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명령을 해도 사도가 없을 때 연보할 수 있어야 된다는 이 말이에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와요. 기름 준비한 지혜로운 여인이야기가 나오죠. 그 다음에 흔히 말하는 달란트비유가 나오죠. 또 하나는 지극히 작은 소자가 예수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는 그런 이야기의 내용이 나올 거예요. 그 비유들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이런 내용이에요. 없는 것을 나한테 내놓으라는 거예요. 없는 것을. 있는 것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근데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움직이지 않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없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활동을 하고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생겨버린 그것을 나한테 내놓으라는 하는 겁니다. 신랑이 왔을 때 기름 내놓으라는 말은 신랑이 없을 때 기름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신랑이 가까이 왔을 때 기름이 필요하다는 말은, 신랑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새로 생긴 것이 뭐냐 하면, ‘아, 기름 준비해야 되는데.’ ‘기름 준비해야 되겠네.’라는 그 마음은 내 속에 생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움직임의 결과물로 새롭게 우리에게 발생된 것을 내놓으라는 이 말이에요. 기름 준비하라는 이 말입니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에요. 주인이 있을 때는 다 충실한 달란트, 직원들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먼 타국에 가면서 새롭게 생긴 것이 뭐냐 하면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가 얼마나 주님 앞에 충성하고 있는지가 새롭게 그 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는 말은 순전히 시작을 예수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목말랐고, 예수님이 헐벗었고, 예수님이 옥에 갇혔다. 이래 되는 거예요. 모든 시작을. 모든 시작을 예수님이 해놓고, 그 예수님에게 대접한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한테 대접하지도 않았어요. 안 했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님에게 대접한 것이 되었다 이 말이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소급해서 보게 되면 모든 성도라 하는 것은 이 생명의 환경에서는 시작도 주님이요, 중간도 주님이요, 마지막 결산도 주님의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다 제공하셨습니다, 라고 소급해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성도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간추려서 이해하게 되면 인간은 그냥 살아요. 그냥 사는데 어떻게 사느냐, 그냥 살아요. 교회 다니면서 그냥 살고, 놀러 다니면서 그냥 살고, 수련회가서 그냥 살고, 그냥 살아요.
  
그냥 사는 사람에게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헌금해도 헌금 아니고, 전도해도 전도 아니고, 기도해도 기도 아니에요. 예배참석해도 그거 뭐....., 하여튼 여름 되면 설교시간에 에어컨 꺼질까봐서 신경 쓰여 가지고. 그냥 모였을 뿐이에요. 뭐 의미 없는 겁니다. 교회 50년 다녀도 의미 없는 겁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소급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소급해서.
  
복음 안에서 지금 내가 나를 꾸려가는 이것 말고, 나 말고 따로 주님께서 꾸역꾸역 따로 마련한 나가 있는데, 그 나를. 지금 나 말고, 주께서 따로 꼬불쳐놓은 나가 있는데 그 나를 발견한 순간, 지금 살아온 모든 것은 주님의 움직임 때문에 생긴 결과물로 다시 자기 자신이 고백이 되어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층이 다르다니까요. 층이. 산 밑에 있던 모세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산 위의 모세하고 달라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성경을 볼 때는 그냥 보지 말고, 현재 니 몸으로 보지 말고, 모세가 산 위에서 봤던 그 안목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문자로 보지 말고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영으로 해석한다고 하면서, 모세가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수건 벗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리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이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위해서 이 세상 신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그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 그리스도 안에 내가 몰랐던 진짜 내가, 진짜배기 내가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같은 말씀이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니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요. 다시 말하면 니는 이 세상에서 백날 살아봐야 좀비다 이 말입니다.
  
좀비가 갈 곳은 뭐 부산행 밖에 없죠. 그리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있다. 하늘에 있는 생명을 내가 이 땅에서 기도한다고 바꿔질까요? 헌금 더 한다고, 십일조 더 한다고, 그게 변경되겠습니까? 그 위치가 바뀔까요? 택도 없는 소리! 이 지상에서 교도소 백번 왔다 갔다 해도 하늘에 있는 생명의 고유위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짜 생명은 저기에 있으라고 하늘나라 금고에 집어넣은 입장에 있어서, 이 땅에서 무슨 짓거리를 해도 나의 생명은 마귀가 손끝하나 손 못 댑니다.
  
그런데 이게 분명히 골로새서 3장 4절에 나와 있고 성경에 박혀 있는데, 사도바울의 복음이라고 이게 있는데, 왜 사람들은 교회에 근심걱정을 가지고 교회에 옵니까? 뭐가 잘못된 거예요? 왜 아픈 나를 가지고 옵니까? 나는 아파하지 않아야 되는데. 몸 아파도 아파할 필요 없고 돈 없어도 아파할 필요 없는데. 망신살 당해도 아파할 필요 없어요. 경찰조사 받아도 아파할 필요 없고. 검사장 직위 박탈당해도 아파할 필요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현재 여러분들의 자아가 놓여있는 공간은 생명의 공간입니까? 복음 안에 공간입니까? 아니면 그렇고 그런 생존의 공간이어서 그 밀림 같은, 투쟁하는, 돈 한 푼 벌기 위해서 투쟁하는 치열한 야수들의 공간, 그런 치열한 공간입니까? 어느 공간이 여러분들을 피곤하게 만들어요? 아프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눈물 나게 만들고, 서럽게 만들고.....,
  
흔히 교회에서 이런 소리합니다. “죽으면 천당 갑니다.” 죽으면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이미 우리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작동을 하게 되면, 그것은 천국의 엔진이 우리 속에서 작동하는 거예요. 저는 이것을 강물 속의 다슬기라고 합니다. 다슬기는 그냥 잠잠해요. 여름 되면 밤에 후레쉬 비춰 손 넣어 더듬거려 잡아 담는 것. 다슬기는 현재 무엇을 뚫어야 하느냐 하면 생존의 공간이라는 것. 그 생존의 공간이라는 것을 뚫고 그 밑에 잠복되어 있듯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흔적들이고 주께서 주신 은혜의 덩어리들입니다. 사금채취 알죠? 사금채취 하듯이. 사금채취 할 때 체로 받쳐서 쓰레기는 갖다 버리듯이.
  
지금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새 사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열 살 때 가말리엘 문하, 요즘 말하면 서울대에 유학 갔어요. 스물여덟 살 때 예루살렘에서 200킬로 떨어진 저 시리아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인다고 달려들다가 다메섹에서 내려가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서른 한 살 까지 아라비아에 가서 정신 바짝 차리고 하다가, 다소, 지금의 터키에 바나바를 데리고 안디옥에 가서 40살까지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42살에 첫 번째 터키지방을 돌아오는 것을 1차 전도라 해요. 그 다음에 45살 때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것을 2차 전도라 하고. 48살 때 간 곳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을 3차 전도라 하고. 그리고 52살 때 다섯 번째 예루살렘을 찾아와서 연보를 가지고 와서 예루살렘 교회에 주고. 62살 때 잡혀서 결국 67살 때 교도소에서 끄집어내서 참수 당했는지 그거는 확실치 않아요. 짐승한테 잡혔는지. 하여튼 순교당합니다.
  
자, 사도바울이 자기 인생을 이렇게 한 번 돌아볼 때에, 자기가 26살까지는 뭐냐 하면 그냥 생존의 공간이었어요. 자기의 그렇고 그런 공간이 전부였어요. 그게 전부인줄 알고. 인생이라는 것은 이런 거다. 여기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는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존의 공간에서, 그렇고 그런 보통 사는 공간에서, 어떻게 생명의 공간으로 넘어오게 되는가.
  
그 넘어오는 것, 궁금해요? 모세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뭐가 달라졌는가, 이게 달라졌어요. 애굽에 있을 때 모세는 뭐냐 하면 자기가 스스로 단독자라고 여겼습니다. 고립된 존재에요. 세상은 나하기 나름이다. 이런 겁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나는 살고 내가 게으르면 나는 잡아먹히는 이런 험악한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지팡이 들고 애굽을 다녀와 가지고, 시내산 갔다 오고 난 뒤에 모세가 뭘 알았느냐 하면,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뭘 알았느냐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원단에 염색된 무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펄럭이는 원단에 염색된 얼룩덜룩한 무늬에 불과해요. 무늬. 이 말은 뭐냐 하면 개별자도 아니고 단독자도 아니고 말씀이라는 그러한 씨줄과 날줄에 의해서 주께서 무늬로 짠, 무늬 중에 하나가 자기 자신이에요. 그럼 원단은 뭐냐, 그 원단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 안이라는 원단, 그 안에 얼룩덜룩 무늬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겁니다.
  
이사야에 나오죠. 인간은 그냥 풀의 꽃 같고 모든 영광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 모든 세상이 우리가 태어난 이 몸 하나가 주의 말씀의 펄럭임 따라서 우리도 같이 펄럭이고, 주의 말씀이 가는 곳마다 우리도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 짜여진 시나리오 각색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기에 매여 있는 그러한 겉으로 드러난 표현이죠. 인간이라 하는 것은 표현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활동과 기능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이 바로 인간이에요. 단독적이지 않아요. 
  
여기 헌금을 하는데, 연보하라는 이 말은, 연보하는 니가 니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 주보 뒤에 요약해놨는데 중간에 보면 “사람들은 일상의 생활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연보의 일종임을 잊고 삽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내민 연보의 일종이다 이 말이죠. 우리는 단독자가 아니고 고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주께서 시키는 대로, 그러니까 물 위의 기름이 물길이 일렁거릴 때마다 기름이 이렇게 변하잖아요.
  
우리는 기름이라면 그 밑에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말씀이 표면에 떠 있는 기름 같은 우리를 늘 일렁거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한 걸음, 두 걸음,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는 것, 밑에서 다 조정해줘서 먹고 마시는 거예요. 누굴 만나고, 누구와 결혼했고, 누구와 같이 애기 놓고, 자식 놓고, 딸 놓고, 이게 전부 다 표면층을 보면 내가 애기 놓고 딸 놓고 했지만 사실은 밑에서는 예수님께서 때가 되매, 뜻이 있으매 예수님의 능력으로 딸 놓고 아들 놓고 이렇게 일렁거린 거예요.
  
그게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던, 우리의 원천이라. 원천. 바로 복음은 교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아야 해요. 복음은 우리의 바닥에 붙어 있는 원천, 기름같이 떠있는 우리를 받치고 있는, 물의 넓이, 물의 전체성, 그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우리는 전체성 중에 같이 움직이고 같이 떠가는 그러한 일부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뉴스에 보니까 미국에 하버드대 나오고 법학 박사가 되어 있는 현각 스님이라는 사람, 외국사람인데, 이제는 한국불교와 인연을 끊겠다. 그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그러면 인연 끊으면 니는 어떻게 살래? 인연을 끊고 나서 나는 가난한 자를 돌보고 한국불교는 어려운 사람을 돌보지 않고 돈만 챙기고 기복신앙이고 유교적이라서 권위적이고 중이 놀아도 너무 놀고, 뭐 할 일이 있어야지. 목욕탕에 가면 매일같이 중이 와 있어요. 물론 내가 매일같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한국불교와 인연을 끊으면 니는 어떻게 살래? 딱 나와요. 고립되어서 살겠다는 거예요. 고립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니까요. 고립해서 살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고립이 되게 되면 무엇이 다 불안하고 무서워요. 사람이 다 아무리 일가친척 많아도 무서운 이유가 자기에게 받쳐주는 쪽이 없어요. 받쳐주는 쪽이 없으니까 자기 문제를 홀로 해결해야 돼요. 혼자서 해결해야 돼요. 남들 해봐야 자기 맘같이 안 도와줍니다. 안 도와주니까 거기서 너무 아프잖아요. 자아가 아픈 거예요. 기대했는데 안 도와주니까 아픈 거예요. 그 말은 뭐냐, 고립되어 있다는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자꾸 불교에서 그 사람은 성격 좋다, 착하다, 하는데 지금 주님께서는 성격 좋고 착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니가 지금 고립되어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가, 그걸 지금 묻는 것이지. “성질 좋습니다. 성질 착합니다.” 백날 이야기해봐야 그거는 고립되어 있다는 티를 내는 것 밖에는 안돼요. <곡성>이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곡성이라는 전라도 그 마을, 우리 조집사님이 살고 있는 그 마을인데, 그 마을에 귀신이 들러붙었어요. 온 천지가 귀신이에요.
  
그 영화를 보실 때, 인간들이 얼마나 생존환경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 자기만 위해서 살아가는가를 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타인이 무서운 거예요.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일본 무당도 무섭고, 거기에 나온 사람이 다 무서운 거예요. 밤중에 정전되었을 때 비 오는데 여인이 들여다보는 것도 무섭고, 왜?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일광이라는 무당이 휘익~휘익~하고 휘파람을 불어요. 이걸 소법이라고 합니다. 소법이 뭐냐 하면 무당이 귀신을 휘파람이라는 에너지를 이용해서 부르는 거예요. “휘익~휘익~나오너라 귀신들아!” 장승에다 못 다섯 개 박고 장독 발로 차서 까마귀 있고.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만이, 자기가 사는 것만이 목숨이라고 보니까 그 주변은 전부 다 내 목숨을 위협하는 부정적인 공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발짝도 바깥에 못 벗어나는 거예요. 내 마음을 준 사람과 내 마음 맞는 사람 외에는 전부 다 항시적인 적들이 되고 위험요소가 돼요.
  
여기 아침에 골짜기 산에 가게 되면 옆에 동대구경찰청에서 붙여놓은 것이 있어요. “여성 혼자는 위험합니다.” 이게 바로 고립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홀로 사는 거예요. 홀로 사는 사람이 기도하고 백날 헌금해봐야 이거는 무당이 부르는 것하고 똑같아요.
  
그러면 천주교는 어떠냐, 수녀들은 어떤가. 수녀들은 이 생존의 공간에서 생명의 공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온갖 짓거리를 다해요. 수녀회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법칙이 뭐냐, 침묵의 법칙입니다. 말을 할 때는 어깨를 치고 하고,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고, 수녀원에서 훈련받을 때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아요. 경건의 공간을 가져서 자기한테 무엇이 잘못이고 무엇이 보완될 것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을 공책에다 적어요.
  
공책 적은 내용을 보면 뭐냐 하면 “나는 같은 수녀가 아무래도 신앙이 아닌 것같이 내가 혐오했습니다.”적고. “내가 식사시간에 물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 물을 먹었습니다. 문을 닫을 때 탁하고 닫았습니다. 기도할 때 쥐가 나서 두 번씩 폈습니다.” 이런 항목들을 적으면서 이게 신을 더 가까이 모시는 접근을 하기 위한 그런 수작을 하는 거예요. 수녀회가 하는 그 짓거리가 교회도 그대로 수입되어서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곡성입니다. 교회가 아니고 곡성이에요.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 모든 짓거리가 돈 앞에 가면 전부 다 잡담이 되고 농담이 되고 맙니다. 그 대단했던 그 경건도 돈 줄까? 하면 홀라당 넘어가고. 돈 내라고 하면 다 도망 가버려요.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는지. 인간은 고립적인 존재라서 스스로 버텨봐야 바로 자기한테 해코지하는 것은 원수가 되고 적들이 되거든요.
  
예수님께서는 니가 살고 있는 환경의 원천을 보고 밑을 봐라. 니만 살겠다고 발악하고 니 아픈 것만 대들면서 반항하는 것 때문에 멀찍이 무시당하는 환경이 있을 것이다. 그 환경이 뭐냐, 생명의 환경이다. 거기는 세 살 살아도 괜찮고 서른 살 살아도 괜찮고 육십 살다 죽어도 괜찮고 짐승한테 물려 죽어도 괜찮고 이 땅에 살면서 이렇게 살아도 괜찮고 저렇게 살아도 괜찮고 치킨 먹어도 괜찮고 삼겹살 구워먹어도 괜찮고 야채만 먹어도 괜찮고 아침에 줄넘기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고 에어컨 틀고 자도 괜찮고 선풍기 틀고 자도 괜찮고 등허리 쭉쭉 들러붙어도 괜찮고 어떤 것도 상관없는, 그걸 묻거나 따지지 않는 세계, 그게 바로 이 복음의 세계입니다.
  
그 복음의 세계에서 같은 원단을 보니까 저쪽에 사도바울이 42살 때 예루살렘에 1차 헌금을 가져 갔구요. 52살 때 마지막으로 모아놓은 헌금을 가지고 갑니다. 그것은 바로 평소에 내가 없을 때, 너희들끼리 내가 없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끼리, 어떤 환경? 생존이냐? 아니면 생명이냐? 그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준비한 기근과 주님께서 준비한 소식, 저 사람들이 기근 때문에 아프다는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나눠줘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 이미 그들은 공통적인 생명의 공간에 있는 겁니다.
  
끝으로 제가 걱정이 되어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16장 2절에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이 말 하나 들어가 있다고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세상에 주일이라는 것은 없어요. 우리 평소에 월화수목... 다 주일입니다. 주일이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날이 주일입니다. 주님이 안 계신 날이 없어요. 다 주일이에요. 주간 첫 날이겠죠. 주간 첫 날. 주일이 아니고. 주간 첫 날, 그때 모이라는 것을 가지고 주일 지키라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 지킬 것은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나는 가짜이기 때문에.
  
지켜서 나는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그냥 주님에 의해서 오늘도, 7월 31일에 이렇게 던져져서 이곳에 온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주님께서 준비하신 자아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 안에서 무엇을 준비했는지, 우리는 살다보니까 그것을 시답지 않게 여기고 시시하게 봤습니다. 이제는 고립적으로 살지 말고 주님 안에 있는 하나의 원단의 무늬처럼 은혜와 말씀의 일렁거림대로 같이 일렁거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