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강-고전 15장 57-58(헛되지 않는 일)16072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57-58절입니다. 신약성경 283페이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할 때 그 대상은 이 땅에서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을 두고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고 흔들릴 필요가 없는 이유는 57절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에 국한 되는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살아가면서 우리가 뭘 이겼습니까? 아무것도 우리가 이긴 것이 없어 보입니다. 교회 다니고부터 여러분은 늘 승리하던가요? 그렇지 않지요.
그런데 뭘 이겼는가? 55절에 보면 그 내막이 나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그러니까 성도가 이긴 자가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긴 것이 성도의 이김으로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성도가 이긴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긴 것이 뭐냐 하면, 사망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참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있지요. 사망을 우리의 대적, 우리의 주적으로 삼고 사망 자체를 이기려고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같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보통 누굴 이기느냐 하면, 라이벌 되는 어떤 사람을 표적으로 삼아서 그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겁니다. 회사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또는 가정에서 자기가 이기고 싶은 사람을 자기가 정해놓지요.
이긴다는 그 대적은 어떤 실체가 있어요. 저 사람을 꺾어버린다면, 저 사람보다 더 잘 살면, 나는 속이 참 시원하겠는데. 그런데 사망 자체를 우리가 이겨야할 표적으로 삼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은 운명 같은 것이니까, 살다보면 늙어죽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마지막 모습이니까, 그것을 상대로 이겨보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객기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기고 싶은 주적이라든지, 우리가 이기고자 하는 라이벌이 되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을 이김을 너희에게 허락하노라, 제공하겠노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사망자체를 이기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행동하는 이것, 우리가 목표로 삼고 기대하는 기대상,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안 맞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어쩔 수 없다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 그 사망을 이기겠다는 조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자존심 때문에 남에게 지기 싫어서 ‘저 사람만 꺾으면 내가 한이 없겠다.’ 하는 그런 것이 있어요.
그런 것을 표적삼아 일상을 살아가고 있으니까 핀트가 안맞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방향과 우리가 노리고 표적삼아 은근히 기대하고,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 하는 그 핀트가 애초부터 맞지를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고 “하나님, 그거 말고 다른 것 주세요.”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면 그냥 받아야 돼요. 그 대신 우리는 뭘 해야 되는가? 내가 평소에 노렸던 표적을 포기를 해줘야 됩니다.
아, 이것은 주의 일이라고 핑계를 댔지만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심에서 나왔구나, 라는 것을 파악해줘야 되는 겁니다. 성경은 성도에게만 주어지고 성도라는 것은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면, 수시로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고 일치되고 핀트가 조정되는 모양새를 띌 때, 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그 사람은 성도가 되면서 가는 길이 조정 받는, 컨트롤을 당하고 있는 겁니다. 저쪽으로 가면 안 되고 이쪽으로.
그런데 그것은 말씀으로 방향 틀기를 늘 수시로 지적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 방향틀기, 한번 틀 때마다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노선과 그 노선이 도달하기 전에 내가 자존심 다 걸고 노리고 시도했던, 모든 것을 투자하고 거기에 정신을 쏟아 부었던 그 노선이 부질없는 짓거리를 했다는 그것, 각도 상 그 둘 다를 파악하는 실감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조정을 해줌으로 말미암아 핀트가 어긋났다는 것을 파악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아, 내가 신앙생활 수십 년 했어도 잘못 살았구나. 인생 나름대로 안다고 했지만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결국 돌아오는 것이 뭐냐 하면, 나 자신이 누군지를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망을 이기게 할 때 사망이 하나님의 주적이 된다면, 왜 우리는 팔자라고 여긴 사망자체를 적이라고 여기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못했느냐 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기생각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을 못하고 있거든요. 사적인 기대만 잔뜩 있어서 힘주고 살다 보니까 이 몸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필요한 몸인데, 우리는 이 몸, 내 신체가 내 욕구를 이루는 몸이라고 교육받았고, 그것이 편했고, 살아오는 동안 그것이 자연스러웠던 겁니다. 자기욕구, 몸이 당기는 대로 살면 그것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망을 이긴다 할 때 비로소 뭘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사망을 주적으로 삼는데 사망을 한 번 쪼개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사망이라 하는 것은 쪼갤 것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망이라 하는 것은, 목숨이 끊어지는 그 사망을 추상명사로 생각했지 칼이나 총을 들고 나를 해코지 하려는 사람이라든지, 내 돈을 떼먹은 사람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닌 이상은 적이라고 간주를 안 하거든요.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그 사망을 쪼개보는 거예요. ‘살다보면 죽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죽는데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망을 쪼개보니까 죄 때문에 죽게 돼요. 죄에 대해 지난 시간에 했어요. 인간은 오염되었기에 심판받는다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죽는 거예요. 그렇다면 죄라는 것도 역시 실체가 아니잖아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추상명사잖아요. 죄를 짓는다고 표현할 뿐이지 죄가 여기 있다, 여기 있다고 표현 못한다는 말이지요. 죄를 짓는다, 죄가 일으켰다, 죄가 나를 힘들게 한다, 이렇게는 되지만 “죄가 몇 그램입니까? 크기는 몇 센티에요?” 이렇게 규정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들어가 보니까 죄라는 것이 생겨날 때는 반드시 죄 짓는 사람이 있을 때 죄가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죄를 짓게 되면 죽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고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창세기 2장과 3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해서 죽음부터 먼저 언급합니다. 죽음이 어디에 있는가? 죽음은 살다보면 늙어 죽는 그것이 죽음이지.
아니에요. 원래 하나님의 창조에는 죽음이 없다는 겁니다. 죽음이 없었는데 죽을 가능성이 있다고 에덴동산에 숨겨놓았습니다. 결국 에덴동산, 그 좋은 낙원이라는 것이 사람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취지위주, 하나님의 속성위주, 하나님의 뜻 위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나라가 에덴동산입니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인하여 만들어졌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게 된 사람들의 집합체,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사람이라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뀌고 달라진 사람이 들어가는 겁니다. 바뀌고 달라졌다는 말은 뭔가 조치가 취해져야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는데 왜 굳이 자기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죽여야 되는 겁니까? 아들이 또 있었어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었는데 그 이스마엘을 죽이지 않고 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서 하나님께 드려야 되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자체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달라져야 돼요. 달라지지 않으면 천국을 못갑니다.
고등어 요리할 때 내장을 끄집어내잖아요. 인간 속에 있는 내장을 다 끄집어내줘야 돼요. 그걸 세자로 배설물이라 합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 들어있는 것이 더럽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더러워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것도, 그 어떤 것도 내 안에 들어왔다 하면 변질이 되고 썩어버려요. 더러움으로 전환되고 맙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 내 속에 있는 뭐든지 더럽게 하는 죄로 만들어버리는 그 기능에 대해서 내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 속에서 나오는 죄를 보고 “가만있어. 왜 이렇게 생각해? 나쁜 짓이야. 그러면 안 돼.” 그렇게 할 주도권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나는 바르게 살고 싶지요. 그러나 내 속에 다른 것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강의시간인데 쉬는 시간에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물론 쉬는 시간이니 녹음은 안 되어 있지요. 친하다 보니 허물없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거지요. 그 집의 막내가 엄마한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거예요. “엄마, 아침이면 왜 고추가 커져 있는데?” 남들 보기에는 ‘설교 시간에 꼭 저 소리를 하나?’ 할 수 있는데, 프로이트가 그런 측면에서 인간을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어요. 인간은 육신을 다룰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속에 무의식이 있다는 거예요.
프로이트가 신학에 정통한 사람이에요. 서양의 19세기 20세기의 사람들은 다 기독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 성경에서 육에서 육으로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왜 자꾸 영을 이야기하고 정신을 언급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과학시대에 살다보니까 육신에서 와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육신으로 끝이거든요. 정신은 나올 때가 없어요. 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정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육신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아담의 자손이 되어서 그 하나님노선을 끊어버렸거든요. 끊어버리니까, 육신은 육신으로, 과학은 과학으로 해결하다 보니까 자꾸 뭔가 처리할 수 없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나와요. 예를 들어 가인이 동생을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죽이고 싶다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여자를 바라볼 때 그저 60조개의 세포덩어리로 보면 되는데 보면 볼수록 그 여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잠도 오지 않는다. 그걸 두고 뇌신경이 어쩌니저쩌니, 그렇게 해서는 문제해결이 안돼요. 잠이 오지 않고, 그 다음에 더 무서운 문제는 밥이 먹히지 않는다. 왜 나는 일방적으로 짝사랑을 해서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히지 않고, 입맛도 없고, 왜 그런지?
이걸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야 돼요, 안 그러면 내과에 가야 됩니까? 링거나 맞을 뿐이지 이걸 어떻게 해결해요? 당구를 배웠다. 꿈속에 당구알이 막 돌아다니고, 바둑을 처음 배우는데 잠결에도 바둑을 막 둬요. 도대체 이런 모든 현상은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이유도 없이 미워지고 이유도 없이 좋아지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두뇌는 자극뿐이에요. 자극만 소멸되면 다시 그 현상이 또 일어납니다. 또 약 줘서 자극 줘서 진정시키지요. 약 떨어지면 또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간은 인간이 손대서 변화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있어야 되는데 그 지시가 율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굽이 갈라지든지 되새김을 하는 것은 먹을 수 있는데 되새김도 못하고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혹은 굽만 갈라지거나 되새김을 안 하거나, 되새김은 하는데 굽이 안 갈라져 있거나 하는 짐승은 먹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자 문제. 이유가 뭡니까? 이유는 없어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먹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네발 가진 곤충이 날개를 가졌거든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독수리, 솔개, 타조, 올빼미, 갈매기, 박쥐, 먹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고기와 젖을 함께 삶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유는? 몰라요. 우리는 먹지 말라는 것을 통해서 앞뒤로 조사를 할 수밖에 없어요. 왜 먹지 말라고 하는가? 이것은 뭐냐? 우리 스스로의 행함으로 변화되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의 행함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내 속에 있는 배설물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이 죄가 하나의 힘으로 작용해서 내가 주도권을 쥘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따라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우리 자아한테는 없어요.
인간은 못합니다. 안 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죽는 것은 팔자려니. 죽는 것이 팔자가 아니에요. 처음에 인간은 안 죽도록 만들어놓았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죽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에게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내고야 마시는 거예요. 그 해내고야 마시는 것 가운데서 관련된 법조항이 아까 말한, 먹을 것과 먹지 말 것이 구분되어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우리가 손 못 대는 그 죄를, 주님께서 손대서 기어이 자기백성 만드는 작업과 관련된 그 말씀이 바로 율법과 명령입니다. 율법과 명령의 원형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아브라함이 자기 속에 대대로 내려오는……, 이미 할례를 행했거든요. 이미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육을 끊어야 된다는 것을 주께서 먼저 제시 했어요.
육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그냥 할례를 행할 수는 있지만 할례를 행한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지는 않아요. 다만 할례 행하는 것은 “네가 할례 행하는 것처럼 그 원칙에 따라서 직접 내가 너에게 손을 댈게. 네 아들을 바쳐라.” 그래서 사랑하는 독자를 바칩니다. 아브라함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갑니다. 죽음의 형태로 빠져나갑니다. 아브라함은 달라졌습니다. 다른 인간입니다.
고추씨 빼고 그 안에 돼지고기 다져서 집어넣고 튀기는 것, 맛있지요. 그처럼 인간의 내부를 완전히 도려내고 그 안에 주께서 영생을 집어넣는 작업, 그거 하나님 보시기에 맛있는 음식이 됩니다. 그것을 응식, 제사장이 먹는 음식인 응식이라고 하는데 그게 하나님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흠향할 연기가 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음식물을 지상에서 만들기 위해서는 고기나 사람을 손질하십니다.
내장 뽑아내고 그 안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구현하신 새로운 아담의 속성으로 바꿔치기 하시는 작업을 해내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죽는 것은 팔자 따라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원천, 사망의 유발요인을 빼내기 위해서 이미 우리의 배를 가르고, 우리의 영혼, 마음을 가르는 거예요. 신체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리의 마음을 가르고 거기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가? 사망이 올 수밖에 없는 죄의 유발요인을 거기서 찾아내시는데 거기에 뭐가 총동원되는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이 총동원되는 겁니다. 마치 병원에서 엑스선이나 CT촬영하듯이 방사선이 와서 샅샅이 찍을 때……, 여러분, 방사선으로 사진 찍을 때 그 인물 전혀 안 봅니다. 손 예진인지 장 동건인지 엑스선 사진에는 얼굴이 안 나오거든요. 내부가 중요하지 포장지는 의미 없습니다. 눈깔사탕 알지요? 포장지 예쁘다고 맛있는 거 아니잖아요. 알맹이를 먹잖아요. 주께서는 속의 알맹이를 드시는데 그냥 드시는 것이 아니고 죄를 의로 바꾼 사탕 알 같은 그것을 맛있게 잡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가지고 이삭을 바치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너의 육신 따라, 너의 육체 따라 난 자식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이게 성령으로 바뀌어야 돼요. 성령으로 바뀌어야 되는데 그걸 바꾸는 방법도 우리의 역량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뭔가 하려고 들면 우리의 죄가 가만있지 않고 주님이 주신 복음을 거부하는 쪽으로 우리 죄가 자꾸 작렬해요.
고린도후서 4장 4절,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못 믿도록 역사해서 그걸 피해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손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망을 이겼다는 것, 기뻐하라고 하는 이 기쁜 소식, 두 자로 하면 복음입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 이미 사망을 이겼느니라, 하는 이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되면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우리가 하던 모든 것이 실패라는 것을 기쁨으로, 푸근한 마음, 넉넉한 마음으로 수용이 돼줘야 됩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하루 실패하는 중인데 앞에 뭔가 붙여야 돼요. 즐겁게, 아주 편안하게 실패하는 중이 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보고 실패로 간주할 수 있다는 여유로움과 넉넉함과 자유는 하나님이 허락한 마지막 자유고 최고의 축복입니다. 자기를 실패자로 간주하는 것.
실패자로 간주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 인생에 뭐 하나 성공한 예가 없고 앞으로도 성공할 리가 없다. 왜? 원래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걸 미리 앞당겨서 수용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교회도 ‘우리’ 뒤에 이걸 넣어야 돼요. ‘우리 실패한 교회’ 이게 정답이에요. 실패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실패교회. 여러분이 실패한 인생임을 알게 되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모든 진리는 한꺼번에 다 알아버린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주장을 했어요.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왜 인간은 착한데 둘 셋만 모이면 사회가 그렇게 악해지는가? 라인홀드 니버라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가 그런 주장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신학자를 신자로 보지를 않습니다. 사기꾼으로 봐요. 신학자라는 자들이 신앙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에요.
성경적 정답은 이렇습니다. 왜 인간은 죄인인데 왜 사회는 도덕적으로 움직이는가? 이게 정답입니다. 그래서 무엇도 멀리서 보면 정겨워요. 그런데 가까이 보면 다 지옥입니다. 인간 하나하나가 정말 억지로 사는 거예요. 분통터지지만 그저 참아야 하느니라, 그냥 참고 사는 것 뿐이에요. 인생이 뭐가 있어요? 인생은 이겁니다. 억지로 살고 참고 사는 거예요.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실패라고 느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께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기어이 성공하려고, 자기 꿈대로 이루어져야 행복하다고 우기는 그 인간들을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것처럼, 그 인간을 아주 작살을 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율법과 말씀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허락해주시는 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한 1분 동안 설명할 텐데 그것만 알면 성경 통째로 다 알아버린 거예요. 오늘 설교에서 감추는 듯 한 것이 왜 그렇게 많으냐? 수련회 참석하라는 하나의 홍보? 시편 103편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간단하지요.
전혀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고,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어요. 그저 욕망대로 자신의 주적을 따로 삼고 ‘저 인간만 없어졌으면 좋겠다. 저 인간만 죽었으면 좋겠다.’ 그저 가인처럼 ‘아벨만 없으면 좋겠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계시했습니다. 이야기는 끝난 거예요.
인생 성공 뭐 있어요? 이거예요. ‘아, 진리라는 것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진리구나. 그러면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아무것도 모른 체 인생 산다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주님의 계시가 주어졌다는 이 말은 아예 우리 자신을 실패한 존재로 간주하고 주께서 계시와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주께서 주시는 대로 그걸 알고 살면 그게 바로 영생이 되는 겁니다.
그 전제가 뭐냐? ‘나는 무식하다. 나는 뭘 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패자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에게 기대 걸지 말자. 나는 나에게 기대를 걸지 말자. 부모는 나에게 기대를 걸지라도 형제는 나에게 기대를 할지라도 너는 절대로 너의 주제파악을 하고 살아야 해. 나는 전혀 나에게 기대를 걸 것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알아챘기 때문에 남한테 기죽을 필요 없다.’ 누가 무슨 소리해도 눈만 멀뚱멀뚱하게 뜨고 ‘너는 몰라 인간아. 네가 계시를 알아? 모세를 알아? 이스라엘을 알아?’ 그래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거든요. 그게 시편 103편 7절의 말씀인데 중간부분을 거쳐야 됩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갑자기 하나님 이야기하다가 변화산에서 구름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하는 말이 “아버지를 찾지 말고 저의 말만 들으라.” 합니다.
저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바뀌었어요. 하나님, 하나님, 여호와, 여호와, 하다가 뭘 로 바뀌었느냐 하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말을 듣는 그것이 곧 구약 때 아버지의 말씀의 구현이 되는 겁니다. 그게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뭔가 꼼지락꼼지락 일을 벌이고 그 일을 마무리 지었거든요. 그 마무리가 뭐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그냥 받기만 하면, 우리는 다 이룬 존재가 돼요.
세상에 이것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행여 오늘 처음 오셨습니까? 처음 와도 괜찮아요. 다 이루었다 하심을 받고 가시기 바랍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독백을 한 거예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에게 찾아가서 전달하는 것만 남아 있지요.
시편 103편 7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야기한 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 조항들이 굉장히 많아요. 우리는 그것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마태복음에 오니까 지킬 필요가 없어요. 지킬 필요가 없고 이제는 뭐냐 하면, 저의 말을 들으라. 갑자기 추상적인 아버지에서 구체적인 인물인 예수님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뭔가 일을 벌여요. 벌이면서 가만 기다려보니 십자가에서 혼자 독백을 하듯 하는 말이 “다 이루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아버지가 시킨 일을 다 이룬 거예요. 물론 그 전에 예언 했습니다. “가 저들을 위해서 다 이루면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전에 아버지와 다 이야기가 되어 있어요. 그걸 다 이룬 거예요. 이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예수 믿는 여기에 예수님의 영, 십자가의 영인 성령이 관여해야만 이것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돼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이 왜 성령을 안 받으면 납득이 안 되느냐?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줘버리면 누가 마중을 나가느냐 하면, 본인이 마중을 나가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우리는 말씀을 지켜야지. 그래. 하나님의 뜻은 이제 알았어. 말씀을 주시고 십계명을 주셨으니 지키면 돼.’ 이렇게 설쳐대는 주체가 있어요.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설쳐야 돼요. 이것 지킬까요, 저것 지킬까요, 안식일 지켰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의와 인과 신을 겸해서 십일조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인간은 십일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의와 인과 신을 빼먹기 때문에. 돈, 물질을 가지고 와서 예배당에 내는 것, 그런 십일조는 애초에 있지도 않은 십일조에요. 인간은 기도 제대로 한 적 없고요, 구제 제대로 한 적도 없고요, 금식 제대로 한 적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르니까 하나님과 자기와 일대일로 상대하니까 십일조를 했다는 겁니다. 주일성수하고 안식일을 지켰다는 거예요.
선교회비 냈으니 선교했다고 하고 전도하고 철야하면서 기도했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령 받지 않아서,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려고 하기에 아직도 그런 것이 남아 있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에서 예수님으로 전환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 믿다가 아들까지 믿으라고 하니까 추가해서 믿어주지 뭐. “아줌마! 여기 밥 한 공기 추가요.” 하듯 하는데 예수님 믿는 것은 밥 하나 추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왜 실패자고 죄의 유발자인지, 우리의 배설물, 우리의 내장을 들어내기 위해서 율법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건전하다고 여기고 마중 나와서 그걸 지키려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 준 것은 “너 아니야.”라는 뜻이에요. 너는 아니고,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바꿔진 너를 구원하는 거예요.
바뀌어져야 돼요. 나가 아니고 바꿔져야 된다니까요. 하나님을 마중해서 율법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 인간은 천국에서 안 받습니다. 천국에서는 실패자만 받아요. 죄인만 받습니다. 의인은 받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괜찮은 존재로 간주해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절대로 실패자라는 그것을 내쫒기 바라지 ‘나는 실패가운데서 성공했다.’ 이렇게 마지막 성공자를 기대하기 됩니다. 자기자신을 포기할 줄 몰라요.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방법 알려드려요? 인간은 자기를 볼 때 중립으로 보지 않습니다. 무성으로 보지 않아요. ‘아이고, 예쁜 것. 괜찮은 것!’
아가씨들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있다가 내릴 때 되면 화장하잖아요. 그냥 화장만 하는 것이 아니고 ‘요 예쁜 거!’ 하면서 하는 거예요. 아가씨들의 놀이가 셀카 찍는 거예요. 이렇게 찍고 저렇게 찍고, 하잖아요. 찍을 때 마다 ‘요 예쁜 것, 참한 것, 누가 데려갈지 복덩어리야.’ 그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는 중에도 교회 다니는 아가씨들 많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누가복음 14장 26절을 안 보는 모양이라. 자기를 미워하라는 거예요. 중립인데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고 싶어 죽는 것, 내 사랑 독자 이삭, 그 이삭을 내놓아야 돼요. 나를 대체해서, 나를 대표해서 이삭을 내놔야 된다고요. 여러분 가정에서 제일 예쁜 것을 내놔야 돼요. 자기 소유 가운데서 마지막 꿍친 것을 내놓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렇게 내놓으라는 지시와 율법 앞에서 우리는 필히 거부하게 되고 반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반항과 거부의 속성을 주께서는 찾고자 하는 거예요. 진즉에 찾고자 하는 것이 그겁니다. “너 나 미워하지?” 그 이야기하고 싶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네가 내 명령을 지키다, 지키다, “더는 못한다. 내 배 째라.” 이렇게 나오겠지요. 바로 그것을 원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돈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받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사랑하는 너를 나에게 내 놓아라. 왜? 그것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니까 그거 내가 바꿔줄게.” 그러면 우리는 고물덩어리, 바꿔줄 그것을 주님께서는 평생 확인해야 돼요. “오늘도 실패하자.” 실패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뭘 해도 실패하는 즐거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존재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요. 너무 힘들어요. 기어가는 달팽이 위에다 1톤짜리 쇳덩어리 올려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너무 힘들어요.
힘들 때 그 힘든 것을 이야기해버리면 그것은 안돼요. 그런 기도는 주께서 삑, 하고 안 받습니다. 왜?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만 딱 들어 가버리면 나머지는 천국 못갈 나만 달랑 남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를 미워하라. 주께서 더 힘들게 만들어버려요. “잘했군, 잘했어.” 하춘화가 불렀던 노래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저는 가사 하나의 의미도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부부사이가 얼마나 실패인지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영감 왜 불러, 이렇게 시작되거든요. 사랑방 전세 놓고 받은 십만 원 어쨌어, 라고 물어요. 남편이 하는 말이, 서양춤 추려고 쌍나팔 전축을 샀지. 하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의외에요.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이렇게 나온다고요. 진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는 부부입니다.
우리의 주적, 우리의 적은 나에요. 성공하려는, 성공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그 내가 나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었던 거예요. 나의 영생을 내가 가로막고 있었던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을 승리한 입장에서는 우리 자신은 아낌없이 주 앞에 내놓아야 돼요. 빠삐용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그 빠삐용은 나비라는 뜻입니다. 그 주제곡이 굉장히 감미로워요.
주인공 빠삐용이 아내 죽인 살인자로 누명을 쓰고 죄인 취급받아서 판사가 잘못 판결해서 외딴 섬에 가게 되었을 때 탈출을 하게 됩니다. 야자수를 벼랑 밑 바다에 던져 봅니다. 파도가 절벽에 와서 부딪히는데 몇 번 만에 안전하게 섬 밖으로 밀려 나가는지 조사를 하는 겁니다. 야자수를 묶어서 만든 뗏목을 타고 절벽에서 뛰어내립니다. 숫자를 세면서 뛰어내려서 일곱 번째 파도를 타고 섬에서 밀려 나가면서 탈출에 성공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도 없으신 분이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왔을 때 그게 유일한 탈출의 길입니다. 그게 마이웨이에요. 주께서 죄인으로 왔을 때 그리스도를 믿고, “다 이루었다”를 믿고 예수와 함께 같이 쓸려나가야 돼요. 십자가와 함께 쓸려나가야 됩니다. 예수 안에서 쓸려나가야 돼요. 십자가의 흔적이 뭐냐?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 의인은 없고 나는 죄인이기에 지금껏 살아온 모든 것은 주께서 그냥 공짜로 주신 것이지 내가 노동해서 나의 노고로 주어진 인생이 절대 아닙니다. 내 모든 것은 죄로 얼룩진 실패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그 업적과 관련해서 이제는 알아야 되겠지요. 세 번째가 뭐냐?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게 바로 쓸려 내려가는 썰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아버지께로 쓸려나가는 거예요. 먼저는 예수님이고 그 다음이 하나님이에요. 우리가 알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시고 다 이루었다고 우리에게 전달하신 그 아버지에요. 따라서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아들이 되어버리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 하노라.” 주님이 복음 앞에서는 어떤 것도 행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손대면 톡, 아니고 손대면 다 실패기 때문에. 무시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기도하면서 우리는 기도의 실패자인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전도하라고 하는 것은 전도에 실패하라고, 예배드리라는 말은 예배에 실패하라는 말이고, 자식을 잘 키우라는 말은 자식 키우는 일에 실패하라는 말입니다.
부부사이에 남편이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 사랑하기를 목숨을 바친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실례지만 이것 성공한 분 손 한 번 들어보세요.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교회가 주께서 순종하라?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그 말씀이 없었다면 나도 괜찮은 남편이고 또 괜찮은 아내라고 으스대다가 지옥 가겠습니까? 그 말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주시니 그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게 하셔서 우리의 내장을 완전히 들어내고 그 안에 주님의 십자가 피로 집어넣는 이것이 바로 이삭의 자리로서 오신 예수님 때문에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이런 작업을 시키신 분은 장차 이런 동일한 작업을 하실 분이 오실 것이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기대하다가 보고 기뻐했느니라. 천국 갈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즐겁게 실패자를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마치겠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나의 일은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일밖에 없고 사망을 이기는 일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는 소식으로서 우리인생은 재료로서 동원되는 겁니다.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왜? 우리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 어떻게 망가져도 헛된 인생 한 순간도, 일초도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전체를 통으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남에게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 신앙자랑 하지 말게 하옵소서. 교회한테 인정받는 사람 되지 말게 하옵시고 날마다 자기자신을 보면서 실패자임에도 불구하고 또 살게 해주시는 은혜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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