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평강(고후1;1-2) 1608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8. 30. 08:16
2016-08-28 12:45:09조회 : 109         
   평강 16082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평강(고린도후서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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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6-08-28 13:26 
평강 

2016년 8월 28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1-2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람들은 ‘은혜와 평강’에 대해 탐을 내기 마련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험하고 힘든 세상에서 은혜와 평강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지를 기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은혜의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작품이요 작업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즉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님 스스로를 위하여’ 벌리는 작업의 결과물이 은혜와 평강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기대하는 은혜와 평강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인식되던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셨는지 그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대자연의 이치를 근원적으로 생각하면서 ‘신의 존재와 그 활동성’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체제를 잡아나갔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약속대로 오신다는 그리스도를 고대했습니다. 즉 자신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인, ‘하나님 아버지’라는 개념에다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을 추가적으로 얼마든지 첨부할 수 있는 성질이 것으로 본 것입니다. 여기서 사단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쪽에서 오신 그리스도는 도리어 이 땅에서 인간들에게 구박받고 억울하게 살해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 자체가 그동안 왜곡된 하나님을 신봉해왔음이 예수님에 의해서 밝혀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인간들이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바른 지적에 대해서 공격했습니다. 그해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쓰여진 성경은 바로 바로 이 십자가 의의를 담아 가지고 ‘종결된 해석체제’로서 기존의 모든 인간들의 죄성과 왜곡성을 지적하기 위해서 나서게 됩니다. 즉 사도 바울이 보는 평강과 흔히 인간 세계에서 기대하는 평강이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이 알려주시는 평강에 도달하는 경로는 필히 ‘인간이 기대하는 평강’의 실체 한복판을 뚫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은 힘든 인생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몸도 고됩니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평강과 평화를 고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기 몸’을 위한 평강획득 전략이 짜여집니다. 신에게 무엇을 제공하면 정작 내가 얻고자 하는 평화나 평강이 나와 내 가정과 나의 삶의 영역에 도달하겠느냐를 연구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그리스도됨을 마치 이미 알고 있는 듯이 행세하는 바가 됩니다. 시편 135:4에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주의 이름’의 솜씨와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 한해서만 구원을 제공하시는 겁니다.(행 1:8) 따라서 평강에 대해서 이 취지를 넉넉하게 살려야 합니다. 

즉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반복 적용하는 가운데 비로소 나타나는 평강이 참된 평강입니다. 이 평강에 접촉되는 상황은 놀랍게도 인간의 당연한(?) 분노유발 현장으로 전환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7:55-58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분노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분노를 건성으로 다루어서는 아니됩니다. 사람들이 분노할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심심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해도 평소에 꾹 참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폭발하듯이 분노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분노 이유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신의 자아성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숱한 세월동안 고생하고 노력하고 땀흘러가면서 획득한 그 자신의 가치를 훼손하고 무너지게 하고 그 세상관을 부정하게 되면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분노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분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평강은 어디있는가? 바로 그 분노 안에서 나옵니다. 즉 내가 분노하는 것조차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현상이고 이것마저 나의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위한 조치임을 아는 자에게는 ‘분노 중에 낯선 평강’을 당하게 됩니다. 

이사야 6: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평소에 자기 몸을 챙기는 보통 인간이 막상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고 난 뒤에는 자발적으로 자기를 저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아 사수에 나서는 짓을 하지 않게 됩니다. 순간적으로만 말입니다. 평소에 인간은 자신의 몸에 기초한 자아를 I, You, It (혹은 He,나 She) 세 가지 대명사를 가지고 자신을 객관화로 다루면서 살아갑니다. 즉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싶어하는 겁니다.  모든 문장과 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분노하는 것을 통해서 자아의 평강이 실패인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누가복음 2:14에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되어 천사로부터 기쁜 소식을 듣게 된 목자들에게 있어 평강이란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I, You, It (혹은 He,나 She)’로 지칭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에 벌써 말려들어가서 자신의 모든 형편도 곧 주님을 위한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자아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에게 장악된 자아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분노 속에 주어진 평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다루지 않게 하옵소서. 도리어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짐을 늘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08-29 18:08 
203강-고후 1장 1-2(평강)16082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2절입니다. 신약성경 286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이것은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그걸 말하고 그 다음에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는데 이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은 몰라요. 고린도후서 앞부분, 창세기부터 나오는 두꺼운 그 책 안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역사가운데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는 기름 부은 자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 이방인들은 어떻게 듣는가 하면,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일단 인정하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빠진 부분이 뭐냐? 우리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몰랐던 것인데 성경에 나오니까, 현재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그냥 두고, 거기에 그리스도를 첨가하게 되면 온전한 하늘나라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된다고 그렇게 오해들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 우리아버지라는 말을 할 때 유대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하나님 쪽에서 오신 아들, 하나님이 독생자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들이 온 뒤에 보니까 그들이 믿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이었어요.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이고, 그래서 너희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니고 너희 아비는 악마였다는 말이지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독사의 새끼들아.” 마태복음 23장에 나오지요. 



독사의 새끼, 뱀의 새끼인데 하나님은 되게 잘 믿어요. 이상하지요? 마귀자식인데 하나님을 너무 잘 인정하는 거예요. 그 문제점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를 전혀 모르면서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왜 있을까? 왜 존재할까? 신이 있고 그 신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그러면 그 신이 말씀을 주고 율법을 주게 되면, 십계명 주게 되면, 뭔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그러면 나는 죽어서 어디가지? 옳지. 하나님 계신 거기에 가면 되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지요.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진짜 어떤 분이 오셨다는 말이지요. 오셨는데 그 분은 뭐로 오셨냐 하면, 그리스도로 오신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고대했고, 예수님은 본인이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인간이 이성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합당할 것 같으면, 인간이 탐구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으면, 인간들이 말씀 연구한 것이 옳을 것 같으면 두 분이 만나서 이야기가 잘 통해야 돼요. 



통하기는커녕 적대적입니다.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십자가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지요. 사도바울이 이방인이 아니에요. 유대인이고 율법에 대해서 그 당시 인간이 알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다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이 뭐냐? 예수 믿는 것이 사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단이라고 한 거지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죽였고 또 체포하려고 멀리까지 갔고. 



그런데 가는 도중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뒤에 내가 나를 몰랐다는 그 고백과 더불어서, 내가 처음부터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 사실,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것이 죄였다고 하는데 그 죄로 드러나게 하는 이 사실에서 사도바울은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죄인이고 죄로 드러내게 하시는 이 작업이 예수님의 지속적인 메시아의 활동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의인되느냐, 죄인 되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죽어서 천국 가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죽어서 지옥 가느냐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들춰내는 이 작업 안에서 이미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도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구약을 다시 해석하고 다시 보기 시작한 거예요. 물론 성령이 그렇게 보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이게 보여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라고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우리 교회를 구원하고, 교회 나오는 우리를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고, 같은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는 그러한 인식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도 그렇게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오해였다, 잘못된 거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 주의 이름을 위해서 구원이 이루어지지 내 구원을 위해서 주의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 순서 하나가 바뀌어야 되는데 그 순서 하나가 바뀐다는 것은 성령 받지 않으면, 성령의 기적이 오지 않으면 그 순서가 바뀌지 않습니다. 주체와 객체의 문제에요. 



누가 주인공이냐, 누가 주인공이 아니냐의 그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았지 나 구원하려고 성부성자성령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도 분명히 나와 있어요. 성령이 임하면 이제부터 나의 증인이 된다고 했지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요구하지도 않은 나의 구원을 이미 내 속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천국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가게 하셨고 지옥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지옥은 이 세상에서나 구경하고 두 번 다시 지옥은 가지 말로 저쪽에서, 위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고 그 결정내린 사항은 예수님에 의해서 고스란히 수행되어서 우리 속까지, 우리중심까지 침범한 겁니다. 예수님의 작업은 우리 속을 겨냥하고 있어요. 



이제는 관점이,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 어떻게 복을 받고, 그런 관점이 아니고, “주여, 지금 주님은 무슨 일을 벌이고 계십니까?” 하는 그 관점으로 관점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관점자체가 바뀌게 되면 사는 데까지 살다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산다는 이 모든 것이 죽음의 일부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우리가 살았다고 여기고, 지금 숨 쉬고 있다고 여기고, 손을 꼬집으면 아야, 하고 아픈데 그래서 살아있다고 생각한 이 모든 규정자체가 성령받기 전의 죄에서 나온 규정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어떤 사람이 내 전화로 메시지를 보내서 공격을 해대요. 자기를 소개하기를, 십자가마을에 글 올렸다가 추방된 목사라고 해요. 제가 추방시킨 것은 아닙니다만 기억은 나요. 어떤 기억이 나는가 하면, 그 사람 글에 보면 항상 원어로 돌아가라는 그 주장을 한 사람이에요. 말씀을 생각해야 할 시간인데 그게 마귀 짓인지 뭔지 방해를 놓는 거예요. 댓글을 서른 몇 개까지 주고받고 했어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겨서 나름대로 복음 전한다고 애를 썼어요. 나중에는 다 지웠지만. 생각해보세요. 예수님 나타나실 때 얼마나 민중들이 예수님을 주무르고, 떠밀고, 만지고, 식사도 같이 하고, 제자들은 잠자리도 같이 했어요. 눈으로 분명히 봤다니까요. 보고, 밀고, 당기고, 만지고, 온갖 짓 다 했어요. 안 믿었습니다. 왜? 못 믿었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본다고 해서 믿어지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보도 아니고, 멍텅구리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고. 세상에 원어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제가 썼어요. 원어가 아니고 언어입니다, 언어. 예수님 언어 다 모아서 연구해보세요. 거기서 십자가 나오는지. 안 나와요. 미쳤어요. 유대인 하는 짓거리를 똑같이 닮아가요. 바리새인의 짓거리를 똑같이 반복해요. 



그 연구 왜 해야 되는데? 왜 하는지 이유도 몰라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계속 썼어요. 인간이 괴물은 언어 뒤에 숨어 있습니다. 인간의 괴물성이 언어 뒤에 숨어 있는데 언어로 등장하게 되면 자기가 위선자가 됩니다. 자기의 정당성, 내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언어니, 원어니 하면서 그것을 핑계 댑니다. 



그 사람이 시비 거는 것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똑바로 번역하라는 그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23장 23절이 뭐냐 하면, 십일조, 사람들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 대목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십일조 이야기 나오면 발작 일으킬 줄 알았다니까. 제대로 번역하라는 거예요. 



제가 그랬어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대로 번역하면 십자가를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답변했습니다. “제대로 하게 되면 죄인 된다? 이게 앞뒤가 안 맞는 논리인줄 본인도 아시겠지요?” 제대로 했는데 죄인이 된다는 이것이 말이 됩니까? 지금 머리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제대로 해서 죄인이 되면 내가 죄인이 된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죄인은 죄인이지만 제대로 된 죄인입니다, 그것이 포함된다는 말이지요. 제대로, 그 다음에는 죄인이 안 나와요. 괜찮은 의인돼요. 논리가 앞뒤가 안 맞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제대로 연구하면 십자가 안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이 된다는 거예요. 



앞뒤도 안 맞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잊어버린 분,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성경자체가, 구약자체가, 주의 이름을 위해서, 주의 이름의 작업의 결실물로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뭐냐? “여러분, 구원받고 싶으면 교회 나오세요.” 이것은 시작부터가 마귀로부터 시작한 거예요. 



‘아하, 교회 가서 예수 믿으면 복 받겠지.’ 예수님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성전 나오면 구원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전부 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육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여기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들은 자기 몸뚱이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몸으로 간주하니 얼마나 대단한 논리입니까? 



하지만 그 모든 논리가 주님으로부터 마귀새끼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왜 출발을 너부터 하느냐는 겁니다. 네가 뭔데 너부터 하는가? 네가 세상을 알아? 네가 죽고 난 뒤에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를 네가 알아? 모르면서 모든 사고방식의 출발점을 너부터 하느냐? 내 자식, 내 가정, 내 소유, 내 재산, 내 은행잔고, 내 교회, 내 민족, 내 국가, 그 모든 것을 왜 너부터 출발하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 똑바로 원어연구 하겠습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본토어가 히브리어에요. 아람어고 헬라어고. 똑바로 안 해서 예수 죽였습니까? 그들은 원어정도가 아니고 예수님을 눈으로 봤어요. 목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침착한 사람들이고 편협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회의할 때 70명의 산헤드린이 모여서 했어요. 요새말로 국회의원들이 모인 거예요. 



그 안에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개인적인 의견으로 정하지 않습니다. 70명이 만장일치로 할 때 그들은 성령의 역사라고 본 거예요. 그 정도로 침착에 침착, 다시 배려하고 그 쪽 입장을 고려하고, 성급한 결론을 내는 것을 항상 주저하면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마귀새끼들입니다. 침착? 침착한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남 배려한다고 천당 가요? 



날 때부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이미 유대인 놀이 많이 했던 사도에요. 사도바울, 진짜 원 없이 유대인놀이, 바리새인놀이,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 율법으로 흠이 없다, 율법놀이, 게임, 실컷 했던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시작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자기의 구원을 시도한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구원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중요한 말이라는 거예요. 다 잊어버렸을 것이니 처음에 한 이야기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2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나오지요. 사람들은 하나님 옆에 그리스도만 첨가하게 되면, 모자란 부분만 채우면 완전하게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은 익히 아는 것이니까. 어느 민족치고 하나님 안 믿는 민족이 없잖아요. 



다 아는 조물주 믿고 그 옆에 그리스도만 갖다 붙이면 되는 줄 알고 있었어요. 그랬던 유대인이 십자가사건을 유발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도 유대인처럼 생각할 공산이 굉장히 큽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이 뭐냐? 이렇게 돼야 돼요. 오늘 설교제목이 평강인데, 그리스도가 주는 평강하고 우리가 기대했던 평강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생각하시면 오늘 설교는 되는 겁니다. 핵심을 여러분이 접촉하신 거예요. 



주님이 주신 평강이 정답이라면 어떻게 뚫고 이 본문에 들어가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좆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지요. 좆아, 이 말은 하나의 사슬처럼 뽑아져 나온다는 그 말이거든요. 콸콸 쏟아져 나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좆아,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가 준비한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쏟아진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주님의 평강을 어떻게 알아내느냐 하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에 오실 때는 인자로 오셨다는 말이지요. 인자 안에 그리스도가 숨어 있어요. 인자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 보기에는 그냥 나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고 목수의 아들로 보이지?” 하지만 구약에서 인자개념은 어떤 개념이냐 하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서 고난을 받는 특이한 존재를 인자라 합니다. 특이한 사람. 



인자 앞에는 반드시 고난이 붙어요. 다윗에게 주신 약속에 의하면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이 땅에서 갖는 특징이 뭐냐 하면, 고난입니다. 고난 뺀 인자는 없어요. 고난을 이야기할 때, 고난을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 고대했던 그 메시아하고 차이남이 발생되는 거예요. 고난 없이 우리한테 환영을 받는 메시아가 가짜고, 진짜 메시아는 메시아를 고대하는 자들로부터 되레 “너는 아니야.”라는 터무니없는 평가를 받으면서 고난 받는 분으로 오시는 분이 진짜 메시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 받는 인자라고 한 겁니다. 그게 구약에서의 인자입니다. “그러면 메시아,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 뭡니까? 다른 말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 뭡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반드시 우리가 경유해야 될, 반드시 밟아야 될 코스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의 분노가 뭔지를 알아야 돼요.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사람들이 제일 중요한 디딤돌을 빼고 있어요. 가인의 족보가 먼저 있고 셋의 족보가 있어요. 함의 족보가 먼저 있고 다음에 셈의 족보가 있습니다. 악한 족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뒤에 하나님의 택한 족보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성경전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구약과 신약을 통으로 뚫고 있습니다. 가인족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셋의 족보, 저주받은 함의 족보가 먼저 나오고 셈의 족보, 이스마엘의 족보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이삭의 족보, 그 다음에 에서의 족보 먼저 나오고 뒤에 야곱의 족보가 나옵니다. 



앞에 나온 족보는 출발점이, 자신의 생존, 무조건 내가 존재해야 되겠다는 인간들의 일상적인 바탕을 그대로 저주받는 족보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펼칩니다. 그들의 특징은 그냥 자생, 자기들의 노동으로 자기가 살아가는 겁니다. 보통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뒤에 나오는 족보는 하나님이 간섭하는 족보입니다. 간섭해서 “너는 그쪽으로 가면 안 돼. 이쪽으로 가야 돼. 그것은 넒은 길이고 멸망의 길이야. 이쪽이 좁은 길이고 영생의 길이야.” 하고 특이한 소수의 사람들은 주께서 관여하는데 뭘로 관여하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약속대로 관여를 해야 돼요. 보통 사람은 자기가 일해서 월급 받고 그냥 사는 거예요. 그게 보통사람입니다. 이 동네 사람인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자기가 보통사람이라고 했지요. 보통 사람은 그렇게 살아요.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렇게 살지 무슨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두 번째 족보에 속한 사람은 뭐냐 하면, 그들도 보통사람이에요. 특별한 것이 없어요. 



똑같은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관여를 해요. 관여할 때 뭘 로 관여를 하는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약속을 가지고 관여를 하게 됩니다. 관여를 하게 되면 천국 가는 특이한 족보를 가진 사람은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아요. 되지를 않으면서 뭔가 내 존재가 저쪽과 다른 것 같아요. 주께서 나를 달리 이끄시고 달리 인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족보에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과 똑같아요. 똑같다는 말은 뭐냐? 저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일에 같이 화내고, 저 사람들이 좋아하면 같이 좋아하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관여를 하게 되면, 저들의 분노를 전에는 같이 공감했는데 나중에는 멀찍이 서서 저들의 분노를 이해하면서, ‘나는 왜 저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는가?’ 그렇게 생각해 버립니다. 



너무 골치 아프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보면 스데반집사가 나오는데 그가 그냥 설교를 한 것이 아니고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있어요. “보라. 너희들이 죽였던 예수님이 저기 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럴 때 유대인들이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이 대목을 보면서 소위 교회 나온 사람치고 “에이 나쁜 인간들! 그럴 수가 있나. 설교 좀 했다고 돌로 치나?” 다 이렇게 하지만 우리가 뭘 놓치고 있어요. 



그들이 분노할 만해서 분노했다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돼요. 왜 이걸 놓칩니까? 그들이 아이큐가 낮은 사람이 아니고 그들이 막되 먹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고, 자기 새끼들 귀한 줄 알고, 가정생활 잘하는 사람들이고, 이웃 만나면 인사 잘하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에요. 왜 그 사람들을 나쁘다고 봅니까? 



교회 한 20년 다녔다 합시다. 교회에서 목사가 하라는 대로 헌금 내라면 내고, 봉사하라면 하고, 개혁주의이야기도 하고, 했다 칩시다. 10년, 20년, 30년을 해도 ‘이거 내가 안 해도 되잖아.’라는 생각은 한순간에 떠올라요. 50년을 하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다 돈 벌기 위해서 하는 짓이지.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친목단체로 생각하지 뭐.’ 이런 생각은 한순간에 올라옵니다. 50년 동안 반복해서 습관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해도 ‘이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고 의미 없어. 있기는 뭐가 있어? 예수가 어디 있어? 천국이 어디 있어? 누가 가본 놈이 있나?’ 이 생각은 누구에게나 다 한순간에 올라와요.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되겠지. 교회 다니면서 착한 일을 했으니 신이 계신다면 나중에 천국가면 수고했다고 상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한다니까요. 감투, 목사, 장로, 집사, 이런 것은 백날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돌아서면 그냥 습관과 습관의 연속이에요. 안 하면 안 하면 되고. 북한이 쳐들어왔다. “교회 다니지 마세요.” “예” 한순간에 예,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철이 없는 애나 “공산당이 싫어요.” 하다가 맞아죽지만 “공산당 믿을래?” “예, 믿겠습니다.” 50년, 70년 굳게 믿고, 과거의 설교 동영상, 제 동영상에 젊을 때의 제 얼굴이 나오지 싶어요, 그거 백날해도 그 순간에 그동안의 자기 역량 쌓은 것이 한 번에 다 날라 가요. 먼지가 되어, 먼지가 되어 날라 가버립니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내 몸만 사는 것이 최고에요. 



그래서 저는 파충류라고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위신이니 체면이니 하지만, 배고픈 데는 위신이고 체면이고 없어요. 배고픈데! 배고프고 오갈 데 없으면 체면과 위신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0.1초 내에 포기할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여레지던트인데 의사라도 집 없고 오갈 데 없으니까 남의 집 비밀번호 훔쳐서 돈도 훔치고 라면 끓여 먹다가 주인한테 걸려서 경찰에게 잡혀가기 전에 라면은 먹고 간다고 하고. 가운은 의사가운이지만 객지에 가서 아무 소용도 없고, 배는 고픈데 경찰서 가면 밥은 주겠지, 하고 “순순히 잡혀 갈 테니 라면은 먹고 갑시다.” W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배고픈 마당에 다 필요 없어요. 라면이 제일 당기는 거예요. 체면과 위신,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인간은 그냥 파충류입니다. 욱 하면 성질내고, 배고프면 밥 먹고, 그게 일단 보장되니까 그 다음에 에헴, 하는 겁니다. 이리 오너라, 하고 양반행세하고 그것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걸 구약이 보여줍니다. 구약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백성을 최고의 나락으로 떨어뜨려요. 



이방인들은 그걸 몰라요. 에헴, 하고 먹고 사니 인간인줄 알지요.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겪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파충류에서 한발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배부르니 인간처럼 보이지요. 배고프면 벌레만도 못해요. 사랑? 배부르니 사랑이지 배고프면 사랑이 어디 있어요? 자기부터 챙겨야 되는데. 그것을 구약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네가 지금 누구한테 분노하는가?”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분노 없이는, 분노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평강을 모른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분노 속에 들어가야 돼요. 유대인들이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는 평소에 누적된 인간소양,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해, 그 원칙들에 준해서 돌로 쳐 죽인 겁니다. 



“스데반집사가 이단이라는 예수를 신봉하는데, 예수가 죽은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예수가 지금도 살아 있다는 식으로 나오면 대체 이 나라의 꼴이, 이 질서체제가, 정신체제가 너의 한마디로 인해서 어떻게 되겠느냐? 너야 좋겠다. 살아계신 주님을 보니까. 그러나 이 무지한 민중들, 이 백성들은 혼란에 빠지면 네가 그 책임을 질래? 우리가 다듬어놓은 이 질서를 네가 뭔데 훼손하느냐?” 그래서 돌로 쳐 죽인 거예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도 바로 그겁니다. 수십 년간 다지고 다졌던 내 세상 관과 인생관을 예수 네가 뭔데 어지럽히고 혼선을 유발시키느냐는 말이지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 노동으로 잘 먹고 잘 사는데, 네가 뭔데 내 인생에 죄인이니 뭔지 개입을 해서 “교회 다녀도 구원 못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그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야.”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토요일에 저에게 메시지 보내고 시비를 거는 인간도 분노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 목사가 제대로 된 목사 같으면, 나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이렇게 해석한다고 자기해석을 먼저 내놓아야 돼요. 나는 이렇게 해석하는데 목사님이 수련회에서 한 해석은 저와 다른 해석인데 어느 것이 맞느냐고 그렇게 나와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람 해석에 대해서 지적을 할 수 있지요. 



대뜸 하는 말이, “해석 똑바로 하세요. 거룩한 경전을 그렇게 왜곡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시비를 걸고 나온 거예요. 자기가 해석한 것은 안 가르쳐준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래야 내가 너보다 더 세며, 이것이 분노의 원인인데요, 나는 너보다 실력이 너 나으며, 이 실력 있는 나를 십자가마을에서 쫓아냈고 십자가마을 전체는 나보다 실력이 더 없으니까 내가 더 우위에 있다는 거지요. 실력으로 구원받습니까? 



세리와 창기가 히브리어 했습니까? 헬라어 강독했어요? 세리, 창기, 강도, 거지가 히브리어 헬라어, 이 구약성경 해독해서 천당 갔습니까? 강도가 강도질하기 바쁘지 언제 성경공부해서 구원받았습니까? 히브리어도 모르는 이방인이 구원받은 것은 뭡니까? 성령세례로 구원받았지요. 히브리어, 원어연구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신학박사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 십일조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사기를 쳐도 보통 사기 치는 것이 아니에요. 오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사기쳐주세요, 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뭘 행해서 구원받습니까? 네가 누군데? 우리가 왜 구원받아야 되는데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일의 결과물로 구원되는 거예요. 구원받고 싶어서 부처 안 믿고 예수 믿는 걸 골라잡아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결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 주변의 인간은 분노로 가득차 있었어요. “죽여라! 죽여라!” “바나바를 살려줄까, 아니면 예수를 풀어줄까?” 빌라도가 이렇게 할 때 주님은 “빌라도야,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가 허락해서 결정하는 거야.” 빌라도가 예수님 보고 “당신은 내 말 한마디면 풀려날 수 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지금이라도 너 아니라도 천군천사가 와서 날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나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너희들이 모르고 있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독생자인 나를 통해서 복음의 이름으로 마음껏 너희에게 지금 펼치고 있다. 너희들이 얼마나 독하게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지금 나 하나 이 땅에 보내셔서 마음껏 펼치고 있다.”는 거예요. 



“나를 잡아 죽여야 된다. 그것이 너의 역할이다.” 우리 인간이 해야 될 역할은 예수님한테 분노하는 일입니다. 오랜만에 바른 소리 했다 정말. 우리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우리가 교회 다니고 성령 받아서 예수 믿는 일이 뭐냐 하면, 수시로 예수 앞에 분노하는 일이에요. “예수님 당신이 우리가정에 해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 보태준 것이 뭐가 있어요?” 



어떤 분이 성도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이! 동창생, 오랜만이다. 날 위해서 기도해줘.” 그럴 때 그 성도가 이 한마디를 했어요. “기도 안 해. 네가 뭔데 내가 기도하나.” 네가 뭔데 기도해요. 우리는 늘 기도합니다.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런데 주님은 “나는 네가 기도하는 너를 위해서 나는 기도하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지요. 나를 위한 기도 말고 우리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라. 왜냐하면, 주께서 주신 새로운 자아는 I, YOU, HE, 세 개의 대명사를 다 갖고 줍니다. 나, 너, 그,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이 썩을 몸이 갖고 있는 나, 너, 그, 그것 말고 주께서 새롭게 주시는 I, YOU, HE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몸을 I, YOU, HE라고 한 거예요. 



주께서 몸을 줬잖아요. 평소에 내가 나를 보는데 남을 의식할 때 나를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I, YOU, HE라 하는 것은 그 때 그 때 사용처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나를 나로 보지 않고 객체인 ‘그’로 봐요. 어떨 때는 나를 ‘네가 누구지?’ 해서 ‘너’로 보고. 어떤 때는 나는 나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은 그 때 그 때 달라요. 



이 말은, 우리 몸은 우리 몸에서 못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I, YOU, HE를 통해서 우리는 그 언어를 이야기하고 그 언어로 하는 모든 것이 내 맘에 안 들면 우리는 분노를 터트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어린애들도 아는 이야기인데 예수님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천사가 이야기한 거예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평화라 하는 것, “평화로다”라는 것을 들었던 이 목자는 이제 그 고향에서 위험인물이 될 겁니다. 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 옥에 갇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열두 제자가 다 전과자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다 전과자입니다. 전과자는 이 땅에서 사람대우 못 받아요. 디모데도 마찬가지입니다. 디모데도 순교 당했어요. 



디모데가 1차전도 때 예수님을 알아가지고 예수 믿고, 2차전도 때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3차전도 때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잡히고 난 뒤에 에베소에서 목회했던 사람이에요. 그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이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네 몸에서 출발하는 그 평강은 주님이 주신 평강 앞에서 오히려 분노를 자아내게 될 것이다.” 



“주여, 교회 착실히 다녔는데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은연중에 계속 분노가 뿜어져 나와요. 정상입니다. 아주 정상입니다. 정말 정상이에요. 기도 좀 하다가 어떤 때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분노를 일으켜요. “이제부터 기도시간 줄이겠습니다. 성경 하루에 석장 봤는데 이제 한 장으로 줄이겠습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에게 내리는 벌칙입니다. 주님도 맴매를 해야 해요. 내 뜻대로 안되니까.” 



제가 친절하게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했지만 실은 ‘오늘부터 교회 안 나가.’ 이 간단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앞으로 한 달 동안 교회를 안 나가서 주님 쪽에서도 내가 얼마나 아쉬운지를 알아야 해.’ 이런 식으로. ‘앞으로 내가 헌금 하나봐라.’ 이런 것. ‘주님도 고생해야 돼. 나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고생해야 돼.’ 



이거 정상입니다. 왜 정상이라는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이걸 평소에 억누르고 교회 와요. 주님께서는 오히려 위로해요. “너무 누를 필요가 없는데? 터뜨려. 터뜨리라고.” 주께서 우리의 몸 자체에서 분노를 유발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라고 생각했는데 분노가 일어나고 난 뒤에 보니까 평강이 찾아와요. 이것은 절대로 제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천국 가는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사야 6장 5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분노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보는 나, I, YOU, HE,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하다가 막상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아, 새로운 정보가 있었네. 이거 하나 첨가해야지.’ 그게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I, 자기한테 자기가 이야기를 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죄짓는 백성 중에 한 사람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해요. “주님, 참 멋있네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때린다고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못된 놈인데 어찌할꼬, 그 말입니다. 내가 입만 열면 하나님께 분노하는 이 나를 어찌할꼬, 그 말이에요. 



“교회 한 열 번 나와서 복주나 안주니 시험했는데 열 번 나와도 아무 소용이 없어서 이제 교회 안 나옵니다, 라고 시험했던 나를, 이 못 돼먹은 나를 어찌할꼬.” 인간이 생각하는 평화란 뭐냐 하면, 흥정이고 타협입니다. 줄 것 주고 평강 얻겠다는 거예요. 힘들 때 바짝 기도해서, 기도한 효과 얻는 것, 앞으로 어려울 때 바짝 기도하고 금식해서 또 효과 얻는 것, 이것은 흥정이고 이 몸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분노할 때 우리가 그 분노를 이해해야 됩니다. 그동안 자기가 쌓아놓은 자기의가 있거든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한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대번에 하는 말이 “그게 바로 죄야.” 이렇게 하니까 이것은 정말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간통하는 여자를 현장에 잡아와서 “돌로 칠까요?” 할 때 치라 하든지 말라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라고 하니 주께서 글로 쓴 거예요. 



무슨 글을 썼는지 안 나타나요. 중요한 것은 글을 쓴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글을 쓰는 행동을 보이는 거예요. 무슨 행동이냐 하면, 내가 너 주시하고 있어, 너도 주시하고 있어, 그런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보고 지금 주님께서 글을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슨 글을 썼는지 봤는지 안 봤는지 모르겠지만 요한복음 8장을 통해서 주님이 글을 쓰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나만 챙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주께서 주시하고 있어요. 그리고서 하는 말이 뭐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하고 또 글을 써요. 이제 알지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니까 죄를 낱낱이 들춰내는 어떤 글이 나올지를 뻔히 본인도 아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나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는지 뻔히 안다는 말이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타난 하나님이 예수님이잖아요. 나타난 하나님이 자기 코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짱돌 다 놓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만큼 성심성의껏 예수를 잘 믿고, 십자가 잘 믿고, 좋은 것은 다 믿었는데 주께서 저렇게 나오면 안 되지요.”라고 할 때 주께서 또 글을 쓰는 거예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 간음한 여인이 헬라어를 공부했습니까,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까? 아무것도 공부한 적이 없어요. 간음하면서 한쪽에 성경책 펼쳐놓고 창세기 읽으면서 ‘이게 원어로 뭐지?’ 이랬습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없지?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그 증거를 간음한 여인이 가진 것이 따로 없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요. 용서한다고 해놓고 목걸이 하나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용서하노라, 그것만 받은 거예요. 그럴 때 그 여인은 내가 구원받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간통하고 간음한 이 모든 것이 소급해서 그것마저도 주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구약에서의 광야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파충류니까.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지만 못 먹고 못 마시고 어려울 때 인간은 원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구약이에요. “말씀대로 살면 복 줄게.” 하지만 그들은 계속 상실했습니다. 가진 것을 다 날렸습니다. 신약은 뭐냐 하면, 해방이에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우리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구원시켜 놓고, “이런 인간도 구원받았다. 이런 인간도! 내 작품을 봐라.” 그 말이에요.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감사하잖아. 봐라. 간통했으면서도 주께 감사하잖아. 봐라.” 보라는 거예요. 누가 그를 정죄할 것인가. 



이게 신약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맘을 겨냥합니다. 분노를 유발해서, 실컷 분노해놓고 “주여, 내가 이 분노마저 주의 일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시는 거예요. 이게 평강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북한이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쏘든지 관계없이, 롯데 2인자가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고등학교 선배가 자살을 하든 말든 관계없이, 내 마음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여, 어떻게 내가 몰랐던 내 죄를,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어떻게 들춰주시는 주의 일이 평강으로 다가오게 하십니까?” 이게 평강이에요. 



그리고 그 뒤에 경제적인 보상은 없습니다. 이제는 굶어죽어도, 맞아죽어도, 교통사고 나서 죽어도 그것도 평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무슨 생각 하고 있습니까? 적당히 믿어서 혜택 보는 마귀적 종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혜택 받겠다는 그 자체가 이제는 주께서 일부러 유발시킨 죄의 근원이고 죄의 본성인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