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75강-요긴한 지체*고전12;18-24) 1201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 22. 07:42
2016-01-10 12:33:36조회 : 258         
   요긴한 지체 160110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요긴한 지체(고린도전서 12: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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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1-10 13:20 
요긴한 지체

2016년 1월 1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2:18-24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2: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12: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12: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12: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에는 지체가 있다”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는 그런 상황에서 인간들이 공감하는 그 내용 속에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낯선 분으로 비취게 됨을 나타내는 말해줍니다. 사람들의 상상 속에는 대단히 멋져보이는 메시야를 그리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들 속에 섞여 들어오시는 하나님은 인간들로서는 따로 구분할 수 없는 정도로 평범하기에 별로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기대치에 합한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들 기준에 맞춘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만큼 인간들 쪽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즉 안다고 우기지만 정작 메시야는 못 알아보는 그런 존재들이 인간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몸은 인간들의 자기 몸 챙기기를 옹호해주는 그런 몸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존의 인간의 몸을 폐기시키는 몸입니다.

즉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몸은 천국에서도 받아줄 수 없는 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일상은 항상 자기 몸을 껴안고 사수하는 식의 생활입니다. 평생을 자기 몸 챙기고 붙드는 삶입니다. 자기가 아니면 자기 몸을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음을 몸소 체험합니다.

인간들은 체험을 통해서 자기를 알아갑니다. 체험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무리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에 예수님의 몸을 언급해도 ‘예수님의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겁니다. 없는 것은 무시할 만한 부류에 속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호감이나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몸은 자기 외의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본성을 바탕으로 줄곧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21-22에 보세요.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장례식은 산 자가 죽은 자를 처리하는 예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나 산 자는 모두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결부된 자만이 산 자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진정 산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천국에 집어넣기 위해 반복적으로 종교적 행위를 합니다.

하지만 반복은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시켜 버립니다. 마치 정답이양, 진리양 여기게 됩니다. 그속을 뜯어보면 그 안에 ‘자기 의’가 담겨 있습니다. 즉 평소에 자기에 의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본성을 잘도 보관해놓고 잇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기를 증거하는’ 자기 증인인 셈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놓고서 양보없는 전쟁을 벌릴 채비를 차리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 가진 보존책에서 유지되는 가치는 죽고 난 뒤에 새로운 상황에서 절망적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이 세상 살면서 자신의 가치를 지켜줄 꺼리들만 주워보면 자기를 위한 환경으로 조성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이야기를 보세요. 부자는 날마다 호사스럽게 파티를 열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증명해줄 인사들을 불러모아놓고 그 가운에 자신이 늘 놓여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의 상황을 미리 지상에서 보여줍니다.

그 천국 상황이라는 것이 이 지상에서는 무력한 모양새를 보이게 됩니다. 곧 지상의 상황과 천국의 상황이 정반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했습니다. 마가복음 10:36-38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너희 구원을 방해하는 몸이 곧 너희들의 몸’이다는 겁니다.

우리 몸의 구원이란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기존의 몸을 연속으로 이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몸은 죽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잃기를 싫어하는 그 몸은 잃어 마땅한 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몸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받는 주체가 상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오직 주님만의 구원이며
그래서 등장된 것이 그리스도 몸이며 성도는 그 몸의 지체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우리 몸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몸 안에 예수님의 구원 기능이 삽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필히 후패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변모시키십니다.

마태복음 17:1-2에 보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미 오래 전에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엄연히 살아있는 채로 예수님과 더불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몸은 본인들이 지키고자 하는 영혼이나 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쓴 잔에 의해서 새롭게 제공된 몸입니다. 이는 자기네들을 잘남과 의로움을 자랑하라고 주신 몸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주신 몸입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옛 몸으로 살기에 자기 증인됨을 두고서 투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럴수록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손길이 더욱 감사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가 우리 자신임을 늘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6-01-12 21:26 
173강-고전 12장 18-24(요긴한 지체)1601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2장 18-24절입니다. 신약성경 278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이게 몸에는 지체가 있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죠. 몸 덩어리만 달랑 있는 것은, 이건 장애자죠. 몸에는 삐죽삐죽 삐져나온 것이 있습니다. 손 나오고, 발 나오고, 귀 나오고, 코 나오고, 그러한 손, 발을 지체라고 합니다. 근데 몸에는 지체가 있다. 이거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이렇게 성경에서 하는 이유는 안다고 우기면서 놓쳐버린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지체가 있다. 맞나? 맞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하지? 뻔한 이야기를 왜 하지?

이 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니가 세상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뻔한 이야기,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아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닌 거죠. 뭐, 아주 요상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고, 뭔가 아는데, 근본적으로 사람에게는 몸이 있으면 지체가 있다는 것을 아는 나는, 나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으로 전혀 보이지를 않아요. 이것을 사람들 예수님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만든 창조주잖아요. 우리를 만든 창조주를 만났으면, “아! 당신은 창조주죠?” 하고 알아봐야 하는데 이게 뭔가 문제가 있어요. 만들어진 피조물이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만나도 그냥 뻔히 쳐다보고 “뭐야? 저 사람 뭐야?” 아무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놓고 몸에는 사지가 있다. 그걸 내가 알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데 씨가 돌밭에 들어가면 자라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알지.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뻔히 보고도 몰라요. 이거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이야기가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다. 이거 부정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애도 아는 이 이야기를 왜 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 성경에서 꼭 이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그거는 니가 니 자신에 대해서 모른다는 겁니다. 니가 니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이걸 시작하느냐 하면 몸이라는 것이, 우리가 자신을 몸이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몸이라고 하는 이것 때문에 진실로 참된 몸을 모르고 있다고 지금 이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에게 몸이 있고 평생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몸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외에는 별로 다른 할 일이 없습니다. 자기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죠. “나의 몸은 누구 것이 아니고 바로 내 것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근데 그 몸을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 보려고 시도를 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편 78편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열조에게 이야기하시기를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말고 그 열조의 완고함과 패역함과 정직하지 못함을 본받지 말고 이제는 충성해라. 저희가 언약을 지키지 않았지만, 율법을 준행하는 것을 거절했지만 이제는 너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옛날에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을 실패했으니까 너희들은 이제 똑바로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 지키고, 율법 지켜서 하늘나라에 가거라” 라는 말씀이 나올 때 이 말씀을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몸을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주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애를 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몸이 천국 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의 하는 행동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키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나를 구원한다. 내 몸은 내 거니까. 내 것을 누가 보호해줘요. 누가 지켜줍니까? 여러분이 지켜줍니까? 내 몸은 내가 지키는 거예요. 왜? 내 몸은 귀하니까. 귀한 몸 성경 말씀대로 지켜서, 율법대로 지켜서 내 몸이 천당 간다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근데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니는 태어나면서 기껏 아는 게 자기 몸이 몸인 줄 알고 있어요. 오늘 본문은 다른 몸을 제시합니다. 다른 몸을 제시하면서 하시는 이야기가 뭐냐,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다. 이 뻔한 이야기를 내미시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그래. 몸은 하나있고 지체 있고 뭐 그게 뭐 어쩌라고? 우리들 아는 이야기인데 뭐가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 있다고 그걸 하나님의 계시로 그 뻔한 이야기를 왜 집어넣느냐? 도통 모르겠네. 내 몸 내가 알아서 천국 가겠다는데. 예수 믿어서 천국 가겠다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그 몸은 못 간다는 겁니다. 그 몸은 천국에 들어갈 몸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범죄한 몸이고 이미 쓰레기통에 버릴 몸이에요. 쓰레기통에 버릴 몸을 우리는 평생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평생 붙들고. 이거 놓치면 안 된다고. 내가 내 몸을 놓치면 인생 헛산 것이 됐다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교육받았고 그게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몸은 우리 몸이 아니라면 그럼 몸은 어디 있는데? 천국 가는 몸이 어디 있는데? 질문이 진작 그렇게 나와야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이게 가짜고 이게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고 이게 쓰레기통에 버려야 될 것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백세 인생 살면 다 버려집니다. 진짜 천국 가는 몸은 어디 있느냐, 궁금해요? 궁금해요. 그게 오늘 바로 본문에 나오는 거예요.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몸은 우리 몸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몸이라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난감해져요. 그 몸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몸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몸은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없는 몸을 언급했으면 우리는 성경을 덮어버려요. 왜 덮느냐 하면 내 몸의 이익과 관련 없는 소식이, 소리가, 이야기가 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경이 내 몸이 잘 되는데 보탬이 안 돼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의 내용에 시큰둥하고 별로 와 닿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체험을 통해서 겪어봐야 자기 자신을 알거든요.

그런데 자기 몸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성형수술하게 되면 얼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잖아요. 그리스도의 몸은 뭐 보여야 어떻게 하지. 눈에 안 보이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어디에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내가 왜 신경 씁니까? 있는 것은 거울 앞에 있는 것은 내 몸밖에 없는데. 24시간 내 몸만 신경 써야지 보이지 않는 몸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뭐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몸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죠.

내가 선교사로 나간다. 그러면 그 선교지에 내 몸이 나가는 거죠. 내가 선교사 노릇하면 주께서 내 몸을 이쁘다 보시고 “아이고, 니가 선교사로 고생 많이 했구나. 니 몸을 천국에 넣어줄게.” 그러한 협상과 흥정과 타협책이기 때문에 선교사로 나가거든요. 그런데 당신의 몸은 선교사를 하던 뭘 하든 그것은 폐기처분될 몸이라면 그러면 내 몸을 내가 관리하고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내 몸을 지켜야 됩니까? 하고 화를 내면 니 몸은 애초부터 지킬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몸을 니는 잘못생각해서 니 몸을 니가 지키려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죠. 뭐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하고, 이 몸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한다고 핑계만 늘어놓죠. 따지고 보면 그거 누굴 위해서? 제 몸을 위해서. 니 몸 어떻게 하려고?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결국 남는 것은 자기 몸을 좋은데 올려 보내기 위한 자기의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에는 지체가 있다. 어쩌라고? 니 몸 말하는 것이 아니거든. 내 몸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누구 몸 말하는 것인데요? 예수님의 몸에는 지체가 많다. 안 보이는데요? 그걸로 대화는 끝났어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대화는 끝났어요. 마태복음 8장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도발적이고 과격한 말씀을 하시는지. 예수님께서 도대체 전도 하시려는지 안 하시려는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굉장히 과격해요. 제가 이런 이야기했다 하면 저보고 과격하다고 하시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8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 따르기 전에 아버지가 방금 막 돌아가셨나보죠.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예수님한테 아버지 장례 치르고 따르겠다고 할 때에,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이게 얼마나 파격적이고 과격한 말입니까?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로 장사하라. 너희 아버지가 죽었어. 그러면 그건 죽은 몸이죠. 그런데 그 죽은 몸을 장례하려고 모인 자식들도 죽은 몸이에요.

이걸 에수님이 이야기 안 하시면 누가 하겠습니까?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산 자가 죽은 자를 장례 치르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 상식입니다. 근데 장례 치르는 그들도 방금 죽었던 그 자와 동일하게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몸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지 않으면 누가 알겠어요? 이걸 가르쳐준다고 수용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리고는 너는 나를 좇으라. 너희들 보기에 내가 너희들 몸하고 똑같은 몸이지만 사실은 나는 산몸이고 나와 연결된 너는 나처럼 산몸이 될 수가 있고. 그러니까 너는 뭘 버려야 된다? “옛날 아버지 같은 몸이 죽은 몸입니다.” 하는 인식을 니가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이 몸은 죽은 몸인데 예수님 만나서 이 몸 포기하고 주님 몸 안에서 지체가 되어서 산몸이 된다는 인식을 이야기해줄 테니까 니는 나를 따라오라.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에요? 쇼크에요. 쇼크. 교회 나온다는 것은 이 산몸을 죽은 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확인사살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된다는 이 이야기거든요. 이게 예수님께서 전도하겠다는 말인지, 말겠다는 말인지, 이 말씀 해가지고 누가 오겠어요? 멀쩡한 몸을 가지고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반복은 우연조차도 필연으로 만듭니다. 이걸 가지고 종교습관이라고 하는데, 종교습관이 굳어지면 굳은살이 돼요. 그걸 뜯어내면 그 안에 자기 의가 들어있습니다. 같은 이 몸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이 몸 가지고 그 행위를 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똑같은 일을 해요. 아침9시에 기도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10시에 하면 안 돼요. 똑같이 아침9시에 해야 응답받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면 아침 9시에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는 것이 되고 다음날 중얼거리는 것은 기도가 아닌 것이 돼요. 이게 우리 몸에 굳은살처럼 계속해서 위선적 껍데기가 자꾸 덕지덕지 붙게 돼요. 그걸 다 뜯어내야 돼요. 이걸 뜯어내야 그 안에 숨겨놓은 자기 의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그 의는 뭐냐, 어쨌든 간에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그래도 죽어서 천국에라도 좋은데 갈 수 있지. 그저 내 몸은 내가 챙겨야 돼.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몸이 아닙니다. 방금 그런 종교적인 습관을 반복하는 그 몸을 가지고 죽은 몸이라고 합니다. 바로 우리의 선배 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 지키겠다고 그걸 습관화시키고 제도화시키고 법제화시켜가지고 그걸 계속 반복했더니만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똑같은 짓을 오늘날 교회가 합니다. 종교를 습관화해놓고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렇게 우깁니다.

30년 믿었니, 50년 교회다녔니, 이게 뜯겨야 돼요. 이게 뜯겨야 되는데 뜯기기는커녕 그걸 사수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 나옵니다. 17장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12제자 가운데 임원진들 뽑혀 올라갑니다. 회계, 총무 부회장, 세 명하고 같이 올라가요. 열 두 제자 중에서 세 명만 변화산에 올라간 이유가 그 변화산에 등장하시는 분이 세 명이기 때문에. 예수님, 모세, 엘리야, 세 명이 나와요. 그걸 수학에서 1:1대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엘리야처럼, 모세처럼, 주님이 준비된 몸으로 변화시키는 거예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보통 그런 몸으로 등산을 했는데 딱 변화산에 올라가니까 갑자가 해같이 빛났습니다. 이 몸이 몸이 아니에요. 산 밑에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식사했던 그 몸이 아니고 완전히 해처럼 변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니까 이미 죽은 걸로 돼있던, 1200년 전에 죽은 모세가 등장하고, 800, 900년 전에 죽었던 엘리야가 거기 등장합니다. 이거 장난입니까?

자,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갖고 있던 몸이 진짜 몸입니까? 그걸로 끝나는 몸입니까? 아니면 엘리야와 모세가 갖고 있던 해같이 빛나는 그 몸을 주께서 원하겠습니까? 엘리야와 모세의 몸을 원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땅에서 무슨 몸을 쥐고 그렇게 애지중지하고 있습니까? 교회 왜 나와요? 주께서 뭘 해주신다는 겁니다. 주님이 뭘 해줘요? 주께서는 우리 몸에 대해서 손대지 말라고 그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니 몸에 대해서 신경 뚝!! 안 써도 된다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다해주는 거예요. 니가 백날 교회생활 해봐야 그것은 종교적인 습관, 그 안에는 바로 타락한 자랑, 자기 의, 그것밖에 남지 않아요. 거기에 자기 가치만 고스란히 들어있어요. 자기 가치만 들어있어요. 사람들이 자기 가치 때문에 살아가는데요. 자기 가치를 옹호해주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들을 다 끌어 모읍니다. 자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만 모아서 그 환경 속에서 나는 이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돼요. 원래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잘 키우게 되면 누구 앞에 가서도, 노인정에 가서도 기죽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 아들 의사고 우리 아들 박사고, 우리 아들 판사고 그 둘러친 환경 안에서 자기는 우뚝 가치 있는 노인네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권사님들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자식 잘 키웠거든요.

일종의 이 세상은요, 기마전이에요. 기마전이라는 것은 세 명 위에 두 명이 올라타고 한 명이 올라타면 우뚝 서잖아요. 내가 이런 자식을 잘 키웠기 때문에 덩달아 나는 돋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치가 천국 갑니까? 천국에는 새로운 환경에 둘러싸였을 때 가치가 중요한 거예요. 거지 나사로를 가치가 있다고 어느 환경이 이야기하던가요? 개가 와서 놀렸고 아팠고 그야말로 병들었고 가난했고. 저 사람은 저주받았다. 망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되죠. 반면에 그 앞집에 사는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맨날 파티를 열었거든요. 맨날 파티를 열면서 친구들 그렇게 많이 불러대고, 자기는 기마전하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유력한 재벌 셋, 뭐 판사, 검사, 이런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덩달아서 나의 가치가 이정도 되는 인간이라고 얼마나 돋보이겠습니까?

그 돋보인 것, 지옥 가니까, 마지막 죽고 난 뒤에 보니까, 그 가치가 자기를 망친 가치, 진짜 자기를 감추어버린 못된 가치, 정말 엉터리 가치 속에 자기가 평생 속았던 거예요. 진정 자기 가치를 주변의 환경 때문에 내가 지옥 갈 인간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를 못했습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은 지금 천국 가서 유지될 가치를 추구하십니까? 아니면 잠시 잠간 사는 이 세상에서 남한테 부러움 사는 그런 지옥 갈 가치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기마전을 원하는 거예요? 교회 나온 사람은 양다리를 걸치는데, 천국도 걸치고 세상도 걸치는데 이게 짝 다리 됩니다. 불편해요.

제가 다리 하나 치워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치우는가, 천국 없습니다. 천국 없고, 이 성경도 구라고, 예수님도, 예수님의 몸은 이미 이순신 장군처럼 죽은 사람이고, 부활한 적도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해드리느냐 하면 여러분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 천국 하면서 실제 살아가는 태도를 보게 되면 천국의 가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어떻게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그 가치에 묶여 있다면 이건 짝 다리에요. 세상에 무게 중심 많이 두고 있고 그저 보험들 듯이 혹시나 몰라서, 혹시 재림 안 오겠지만, 혹시 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슬쩍 이거 걸치는 것, 불편해요. 그 불편함을 덜어드리겠습니다. 다리 하나로 모으세요. 모아가지고 솔직하게 사세요. “나는 이 세상의 가치가 전부다. 천국은 가봐야 안다. 어느 본 놈이 있나? 나 못 믿겠다.”

자 그렇다면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되고 하신 말씀은 뭐며, 변화산에서 봤다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그 낯선 몸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주인공이 아니고 우리는 누구한테 붙어있는 하나의 부분이고 지체라는 사실입니다. 내 몸에서 내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에요. 내 몸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불교는 물어요. 절에 가면 중들이 하는, 맨날 도 닦는 것이 그거에요.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 내 사는 목적은 어디냐? 불교는 맨날 그 소리합니다. 질문이 잘못되었어요. 나라는 것이 원래 없어요. 왜냐하면 나라고 하시는 분은 내가 붙어있는 그 분만이 나가 되고 나는 그 분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우리는 증언자들, 증언해야 할 증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증인. 증인이라 하는 것은 본인을 증인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라는 말은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증언하실 분은 내가 아니고, 내 믿음, 내 신앙 좋은 것 이런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 의사되시는 분, 병든 자를 고치시는 그 분을 증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야 했고, 태어났고, 또 그 분에게 합류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체적으로 그들은 죽은 것이 맞지만 예수님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꽂혔고, 그들을 증인으로 세웠기 때문에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있고 이삭도 살아있고 야곱도 살아있어요. 본인이 노력하고 본인이 잘나서 본인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몸을 주님의 몸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늘 이 말씀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보면서, 설교 들으면서 여러분의 몸이 처음부터 주의 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통 아멘, 아멘, 나오는데 아멘 소리 하지 마시고, 아멘 소리 하신다고 저는 안 믿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처음부터 주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내 몸이라 하지 말고, 나의 몸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주님에게 맡기고, “나는 그 분의 지체로, 그 분의 증인이로 삽니다.” 라는 고백이 있기를 원해요.

그러면 그게 어떻게 가능 하냐, 우리는 안 되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죠. 안 됩니다. 그저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기도 하면 습관 된다는데?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습관 돼요. 헌금하고, 헌금한 것을 잊지를 못해요. 헌금 해놓고 잊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어느 교회 얼마 헌금했다. 그것을 생생하게 잊지를 못해요. 그거는 자기가 자기한테 투자한 거예요. 헌금한적 없어요. 오른손이 한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겠어요? 봉사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봉사해놓고 교통사고 나서 머리 깨지면 잊거나 안 그러면 잊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만큼 봉사했고 내가 이만큼 충성했고 주님 때문에 고생 한 거, 평생 못 잊습니다.

그게 어디에 저장되는가, 내 몸에 저장되죠. 그러면 우리가 어디 이야기할 때 주님을 핑계대면서 자기 잘남을 자기 신앙 좋음을 자랑질 하죠. 그러면 자기 증인이지 주의 증인 아닙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설교할 때는 주제가 우리는 무능자라고 이야기했고 지난 시간에는 무가치자라고 했고, 오늘 본문에는 방해자들이에요. 방해자. 이거는 무가치자 정도가 아니라 훼방하는 사람.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가 우리로서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만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협조자가 아니에요. 동업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의 본성이 그렇게 만만하게 자기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 포기할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알고 아무리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할지라도 내 본연의 가치를 자진해서 반납하거나 그걸 양보할 그런 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 우리 만만치 않아요. 만만치 않아요. 열 두 제자 뽑아 놓으니까 다 도망갔습니다. 수제자 베드로 다 부인했습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뭡니까? 똑같아요. 하나님 여호와 섬긴다고 섬겼던 이스라엘 멸망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아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시도를 해서 자기가 노력해서 말씀 지켜서 천국 간다는 이건 거짓말입니다. 그런 방법을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느냐, 그러면 모세, 엘리야 뭐냐 이 말이죠. 너무 부러워요. 축 합격! 이미 천국에 갔잖아요. 우리가 그들을 모방할까요? 모방하면 습관 돼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제가 서울에 가면 언제든지 서울에 가면 우리 집에서 주무시라고 하는 참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이 계셔요. 지금도 생중계로 보고 계실 건데, 그 분 집에 목요일 저녁에 갔는데, 그 딸이 햄스터를 관찰해서 그걸 방학숙제로 내는 것이 있어요. 근데 초등하교 2학년 여자애인데 책상에다 햄스터 네 마리 이름을 다 지어서 써놨어요. 하늘이, 하은이, 두석, 윤정, 두석은 아버지 이름이고 윤정은 엄마이름이고 하은은 지 이름이고 하늘은 지 동생 이름이고. 이름을 지어놨어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본인이 이름을 짓게 되게 되면 그 햄스터는 날아가 버려요. 자기가 햄스터를 관찰하는 순간, 햄스터는 어떤 용도냐 하면 내가 너를 관찰했다는 이 괜찮은 사실, 방학숙제를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나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게 햄스터의 입장을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오늘 본문이 사실은 우리에게 기분 되게 나쁜 본문이에요. 니들은 나의 눈이고 나의 손이고 나의 발이고 이러면,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소리하면 안 되지만 하나님이 계시는데, 뭔가 내 본성과 배치가 돼요. 나는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은데. 내가 햄스터인가? 내가 애완용인가? 뭐야, 나는 로봇이야? 뭐야? 왜, 뭣 때문에 내 몸 아프게 하고 내 뜻대로 안 되게 하고, 지가 뭔데? 하나님이 뭔데 내 인생 이렇게 꼴아 박게 하고, 내 원대로 안 되게 하고, 분명히 작년에는 40억 벌게 했는데 20억 밖에는 못 벌게 하고, 딴 동네 이야기입니다. 이 동네 이야기 아닙니다. 우리 애 성적이 전교에서 1등해야 하는데 3등 하게하고 주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벌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이런 것들. 여러분들이 해당 안 되니까 아무런 감동이 없죠?

왜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제가 어렵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햄스터 본인이 갖고 있는 뜻은 완전히 삭제되어 버립니다. 그게 바로 호명한 주인, 하늘이, 하은이, 두석이, 윤정이, 이름을 붙여줄 때, 초등학교 2학년 하은이가 이름을 붙여줄 때 걔들은 자기의 종들이 되는 겁니다. 종들이 되는데 아빠, 엄마 이름을 붙여서 뭐 그렇기는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붙였죠.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모세 엘리야는 구원받기로 노력을 했습니다. 다 실패로 끝났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우리 속에다 집어넣은 예수님 구원의 기능과 작용을 집어넣는 거예요. 구원론은 없습니다.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구원은 없습니다. 왜? 우리는 햄스터이니까.

우리의 이름을 불러줄 때는 우리의 구원받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우리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내가 죄인을 의인되게 함으로써 자기 자존심과 예수님의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훌륭함과 자신의 의로움을 거기다 일방적으로 삽입시켜서 햄스터로 만들어서 거기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근데 그 작업에 있어서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옹호하거나 반길 수가 없어요. 왜냐, 예수님은 이 땅에 무력한 존재, 아무 힘도 맥도 못 쓰는 무력한 존재로 왔기 때문에 그 무력함이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느냐, 못 믿겠다. 열 두 제자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전능하신 예수님이십니까?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전능하신, 기도하면 다 들어주는 그런 예수님이십니까? 진짜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38~40절에 나옵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로 이야기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높으냐, 심지어 거기다가 치맛바람까지 불어요. 제자들 엄마, 학부모까지 끼어들어서 우리 애 천국 가면 예수님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이렇게 압력까지 들어오네요. 그럴 때 주님 말씀이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할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까 점심시간에 우리 집사님이 물었어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뭘 구해야 됩니까? 누가 복음에 보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구해도 안 줍니다. 주께서 준비한 것을 줘요. 구원입니까? 아닙니다.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뭘 주십니까? 예수님의 자기 자존심을 심어 주십니다. 자신의 가치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 주십니다. 구하라! 내 것 니 속을 째고 집어넣어 버릴 테니까. 거지 나사로한테 집어넣었던 그것. 부자한테는 집어넣지 않는 그것. 하늘나라에만 가치 있는 그것. 이 땅에서는 전혀 무력한 가치. 그걸 우리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게 뭐냐, 쓴잔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쓴잔을 주십니다. 내가 마시는 쓴잔. 쓴잔은 우리가 제조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디 공장에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쓴잔을 마시면, 그 쓴잔을 우리 속에 집어넣게 되면 우리는 무능력자도 아니고, 무가치한 자도 아니고 차라리 주님을 또다시 매일같이 못 박는, 주님의 복음을 방해하는 방해자로 우리를 들통 나게 만들어요. “주여, 주의 원수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아무리 복음 이야기해도 내 가치를 포기를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포기 못할 겁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남들이 알아주는 그런 대단한 사람을 내가 자진해서 반납할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왜? 나는 나의 주인이니까. 나는 누구의 햄스터? 누구의 부분? 이거는 내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나는 나의 잘남의 증인으로서 끝나고 싶습니다.” 이 고집, 주께서 계속 끝까지 가게 하실 겁니다.

끝까지 가게 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바로 너와 같은 죄인을 불러서 구원함으로써 말미암아 니가 입은 구원에 대해서 니가 보태준 것은 없고, 니가 협력하고 니가 기여한 부분이 전혀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럴 때 천국 가서 면류관을 내던져버리죠. “이거는 제가 쓸 자격이 없습니다. 이거는 주님만 쓰셔야 됩니다.” 이게 바로 모세였고 그렇게 부러운 바로 엘리야의 팔자였고 운명이었습니다. 쓴잔을 마셔라! 자기 아들 1등하기를 원했는데 3등으로 내려앉은 그 쓴잔. 작년에 50억 벌게 했는데 25억만 벌게 하신 그 쓴잔. 25억 만큼의 그 아픔. 이발하러 갔는데, 너무 짧게 깎았는데, 어떤 사람은 주상욱이라고 해요. 황홀한 유혹에 나오는 주상욱이 닮았다고 하는데, 얼굴이 닮은 것이 아니고 머리만. 이거 저한테는 쓴잔이에요. 내 기대한 대로 안 됐어요. 이게.

그런 예수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한테 무가치한 것, 방해자로 드러나기 싫어서 내뺍니다. 도망칩니다. 도망치는 그 자리에 뭐냐, “그래도 나는 이 정도로 잘난 존재다.“ 이렇게 하죠. 그게 바로 주의 몸 안에서 쓸데없는, 잘못된 방침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 몸에는 쓸모없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때만 있어도 일주일에 세 번씩 목욕가고 피부 홀라당 벗겨질 때까지 때 벗겨내고 사우나 가서 1시간씩 들어가 있고 이러거든요. 왜, 쓸데없는 것 다하는데. 근데 주님의 몸에는 요긴한 것도 쓸데없는 것도 있어요. 왜 있느냐, 주님의 몸에서 구약 이스라엘 구속사, 구원의 역사가 칭칭 감겨져 있기 때문에 이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 했던 것, 그게 나의 실패로 또 다시 반복이 되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 없다고 원망 했던 것, 이것도 지금의 나의 원망으로 또 튀어나오게 해서 도대체 내 몸은 없고 주의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나의 불평과 나의 화냄과 나의 짜증스러움을 통해서 계속해서 바깥으로 발산시킵니다.

물론 가끔은 감사하고, 휙 지나가듯이 고마워 할 때 있어요. 3초에요. 딱, 딱, 딱, 3초. 요한계시록은 한때, 두 때, 반 때. 한때, 두 때, 반 때, 라는 뜻은 뭐냐 하면 역사에서 묵시로 사라지는 그 방향성을 나타냅니다. 자세한 것은 오늘 저녁에. 이 몸이 내 몸인 줄 알았더니만 주의 몸인데 우리는 어떠냐 하면 “주님이여, 저를 이렇게 다루시면 안 되죠. 이래가지고는 제가 협조 못해드립니다. 내 인생 이렇게 몰아넣으면 더 이상 내가 주의 일 못합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하청업체가 되겠습니까? 개척교회 했는데 10명 나왔다가 나중에는 부인하고 나만 남아있게 되면 나는 도망갈 거예요. 이래가지고 나는 주의 일 못합니다.” 라고 할 때 이러한 모습들이 주님을 빙자하지만 여전히 자기가 대단한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잠시 예수 이름을 빌려오고, 기도 열심히 빡세게 했고 전부다 내 잘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의 몸에서 해방자로, 방해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걸 느끼면서, 그걸 통해서 주의 은혜가, 주의 긍휼하심과 용서하심이 더욱더 겸하여 발산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의 몸에는 쓸데없이 보이는 것도 함께 있어야 돼요. 선과 악이 함께 있어야 돼요. 어떻게 악이 선으로 바뀌느냐, 그 순간에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과 기능이 그 안에서 다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못난 우리를 모아놓고 주님의 잘남만 뽑아내는 작업,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두 자로 줄이면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교회에요.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이야기 있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하여튼 선거할 때마다 나오는 구호. 어떻게 새 포도주를 옛날 부대에 담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님의 쓴잔, 새로운 바탕을 깔고 주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면 이거는 새 부대에 새 술을 담는 주님의 행위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에서 의가 나오고, 의미 없음에서 새롭게 의미가 생기고, 더러움에서 거룩이 생기고, 폐허 한 돼서 새로운 피조물이 생깁니다. 뼈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그 동트는 지점, 변화된 그 지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욕 얻어먹은, 우리한테 비난받은 예수님의 그 희생, 버림받으심, 아버지한테 버림받으심이 우리의 바탕이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내 대신 버림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죄인이 이제 하늘나라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의인이라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구나! 라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누구누구의 증인이라는 사실. 그걸 알 때 사도행전 1장 8절, 너에게 성령이 임하면 니가 원치 않거나 원하거나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걸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습관과 반복된 전통으로 자기 몸을 지켜서 천국 보내려는 이 헛된 짓이 얼마나 마귀 짓이라는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