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1장 12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43페이지입니다. 애 1:12-16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주께서 내 지경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감정, 현재 멸망해서 포로 잡혀가고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그 유다나라의 운명을 자기 안에 그냥 흡수시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지요. 그래서 지금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유다나라가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유다나라가 자체적으로 구비했던 모든 것이 깨어질 때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눈물이라는 현상으로서 유다의 파괴를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이 눈물, 흔히들 우리가 성경말씀을 이해 못한다, 그렇게들 하는데 성경의 선지자의 말만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의 눈물도 우리가 그 눈물을 따라 울 수가 있느냐 하는 그 문제, 우리가 예레미야를 따라 같이 울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모든 말씀이 다 특수한 말씀인 것처럼 본문에서 흘린 예레미야의 눈물도 특수한 눈물입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봐서는 역사적으로 자기 나라가 망했으니까 원통하고 절통해서 흘린 눈물이라, 해서 사적으로 흘린 감정표현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 나오는 본문 보게 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런 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그 원망을 하나님께 쏟아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되는가, 그 문제에 대해서 14절에 보면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얽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눈물 흘리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만드는 것은 이것이 다 내 죄 때문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다의 사정을 예레미야가 품고 있으니까 이것은 유다의 죄지요. 이 말은 간단히 말해서 이렇습니다. ‘ 하나님이여, 어서 오셔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를 발각시켜 주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일으킨 일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눈물이 내 안에서 쏟아지게 하옵소서.’ 그런 뜻으로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특수한, 보통사람들이 이해 못할 눈물이라고 언급했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사람들이 교회 올 때 ‘하나님, 저를 인간이라고 취급하지 말고 인간 아닌 것으로 간주해주세요.’라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교회 나오는 이런 사람, 이런 현상은 인간이상의 능력이 오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저는 인간 맞지요? 그러니까 남은 손대도 저는 손대지 마시고 저를 키워주세요.’ 이런 숨어 있는 기대감 가지고 교회 오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오늘도 저를 박살내 주세요. 왜, 박살나야 마땅하니까요. 제발 때려주시고 나를 사람취급도 하지 말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는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교회 나오고 예수 부르짖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지요.
그저 하나님 부르짖고 예수 부르짖어서 혹시 찾아오게 될 어떤 재앙을 사전에 방지해보고자 하는, 재앙을 건너뛰어서 자기 편해보겠다는 심보로서 교회 나오지 박살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죄라는 것은 자기 편한 위주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와 같은 눈물을 우리는 흘릴 수가 없는 겁니다. 특수한 눈물이지요. 이러한 특수한 눈물이라 하는 것은 그 내막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이런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이 유다나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야곱에서 나와요.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있고 그 전에 야곱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창세기 32장을 보면서, 야곱 본인도 몰랐지요, 우리도 모르지요, 야곱에게서 예수님이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야곱 본인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냥 메시아께서 하늘에서 뛰어내려오는지 알았지요.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조차도 마리아가 처녀 되기 전 한 열 몇 살 때 자기 몸에서 예수님 태어날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것을 상상 못한 것처럼, 나 같은 인간이 예수를 믿다니 이것은 상상도 못할 느낌으로 예수를 믿어야 돼요. 예수 믿는 그 레벨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느냐하면 처녀가 애를 낳을 정도로 그 기가 막힌 상황, 기가 막히도록 그것이 느껴져야 됩니다. 일요일에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월요일에 자기 볼일 보고, 이래가지고는 예수 믿는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여러 일들 중에서 하나 골라잡으면서 ‘이것도 한 번 해봐.’ 하고 그냥 취미활동 삼아서 하는 식, 슈퍼에서 물건 골라서 장바구니에 담는 식으로 예수 믿기도 하나 담는 그런 식은 기적도 아니잖아요.
그런 것은 흔히들 하는 짓이잖아요. 등산도 가고 예수도 믿고 야구도 하고 장사도 하고 이것저것 다하고. 어부들이 갈치잡고 고등어잡고 정어리 잡는데 그 중에 하나 예수도 잡고. 우리가 잡으면 잡히는 물건 가운데 하나로 포함된 예수가 예수라면 거기서 예레미야의 눈물같은 특수한 눈물이 흘러나올 수가 없지요. 처녀 마리아는 인생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야곱에서 예수님 나왔다는 말은 야곱의 전 일생이 예수님을 잉태하는, 예수님을 쏟아내는, 예수님을 해산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의문점을 품지요. ‘목사님, 제가 예수 믿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 내 인생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그런 질문 배후에는 어떤 생각이 있느냐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얼마나 축복, 축복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고 손에 잡히는 예상 밖의 것들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라는 마음을 가지고들 물어요. 그런데 성경을 봅시다. 야곱이 하나님 만나고 난 그 이후의 생활이 어떻습니까? 축복, 축복이었습니까? 세상적인 축복이었습니까? 오히려 삭제당하는 겁니다. 자기 사랑하는 귀한 아들 요셉, 사랑하는 아내 라헬, 레아는 사랑하지도 않았으니 레아는 아니고요,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일찍 죽고 거기서 나온 사랑하는 자식 요셉도 잃어버리지요.
열두 아들 가운데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그 인생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의 인생입니다. 뭘 더 기대합니까? 뭘 더 원하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이렇게 형편이 펴서 잘 되었다, 그것은 교회에서 장사 속으로 사기 치는 겁니다. 일종의 다단계라 할 수 있지요. 그것은 넓은 길입니다. 넓은 길이 나오니 갑자기 그 생각이 납니다. 박 범신이라는 유명한 소설가가 있어요. 그 사람이 지은 소설 <은교>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소설속의 주인공이 하는 소리죠. ‘마태복음에서는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은 길이라고 되어 있는데 나의 멸망의 길은 음침하고 어두운 길이다.’라는 대목이 있어요. 그러니 그 소설의 주인공은 마태복음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마태복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눈물도 이해 못한다는 소리죠.
예수님을 바깥에 내가 쥐고 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대상으로 내가 예수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예수가 아닌 가짜, 악마가 교회로 하여금 사람들로 하여금 날조하게 만들어낸 예수라는 상품을 하나 골라잡은 겁니다. 예수 덕을 보겠다고,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겠다는 요량으로 하나 골라잡은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잡아서 내 것 만들고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다 헛짓입니다. 다 소용 없는 짓이에요. 야곱에서 예수님 나왔다는 말은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바뀌어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남은 한 모퉁이고, 그것도 언약에 의해서 남은 한 모퉁이, 예수님 증거 하라고 남은 한 모퉁이가 유다나라입니다.
그 유다나라에서 예수님 나와요. 왜, 다윗의 자손이니까. 그렇다면 지금 유다나라가 멸망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아기를 해산할 때 엄마의 모든 자기 몸이 파괴되고 해체되는 그 과정을 겪는 것, 바로 내 안에서 다른 나라를 생산하고 만드는 과정을 거치는 그것이 예수 믿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런데 죄 때문에 지금 울고 있다 그 말입니다. 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지금 막 이스라엘 몸에서 해산하는, 출산하는 그 시점의 그 모습을 지금 예레미야가 눈물로써 대신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오는가? 끝에서 옵니다. 끝에서 온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 세상 끝에서 구름 타고 오는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성도에게 끝은 뭐냐, 본인이 세상 끝이에요, 본인이. 왜냐, 인간이 예레미야의 눈물이라든지 야곱의 눈물이라든지, 요셉을 잃고서 울잖아요, 야곱의 눈물 혹은 예레미야의 눈물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늘 헤헤거리면서 웃고 다닌다는 뜻인데 그 말은 아직도 내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말은 내 것 위주로 새로운 현실상을 만들어내요.
‘내 생각에는 교회는 이래야 되고 내 생각에 주님은 이렇게 오셔야 되고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이렇게 내 생각에 지옥은 이렇고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야 되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자꾸 가짜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복음을 안다고 우기다가 결국 복음에 튕겨나가서 자기 잘난 척을 하는 개척교회 목사들을 보게 되면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 교회가 뭔지 예수가 뭔지 하나님이 뭔지 전혀 관심이 없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관심이 없고 내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내 교회에 관심이 있고 내 신앙에 관심이 있어요.
교회 떼버리고 신앙 떼버리면 어디에 관심 있느냐하면, ‘나’에 관심이 있어요. 울어도 나 때문에 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해서 우는 것이 아니고 나 때문에 운다니까요. ‘아이고, 내 청춘 돌려다오. 내 신세 왜 이 모양이냐. 내 말 먹어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적으냐. 이렇게 외쳐도 우리교회는 부흥이 안 되는가?’ 울고 고통하고 아파하는 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이에요, 나 때문! 세상이 왜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이 말은 이미 본인자체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그 세상을 만들고 있어요. 거기에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될 가짜 예수도 인형처럼 다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있는 예수님은 우리를 찢어버립니다. 파괴해버려요. 여자가 아기 낳을 때 이미 엄마는 죽은 몸이고 죽은 엄마 몸에서 아기를 낳듯이 우리를 죽여야, 내가 죽어야 죽는 내 안에서 다른 내가 탄생되는 겁니다. 언약의 힘, 언약의 힘입니다. 그것이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진 힘입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힘주고 있다가 울고 있는 거예요. 힘주고 있는 그 본인은 뭐가 되어야 되느냐, 죄가 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나는 죄지었기에 세상 종말이다. 끝이다.’ 세상 모든 종말을 한껏 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가 끝이냐 하면,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의 진노와 세상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세상의 만남이 자기 몸 안에 다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예레미야는 또는 유다는 또는 성도는 뭘 느끼느냐, 하늘에서 불을 보냈다는 겁니다. 첫 번째 불 보냈지요. 두 번째 13절에 그물 보냈지요. 불 보내고 그물 보내고. 그 다음에 ‘너는 죄인이기에 당해도 싸다.’는 그 인식을 보내시고. 14절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그 다음 15절에 보면 ‘모든 용사가 다 없어지고 소년들이 다 죽어버리고 유다를 박살내고 자녀들을 외롭게 만들고 내 자존심을 제일 건드리는 일, 멸망되어야 될 원수가 오히려 이기고 나는 그 앞에 패배당하’고 그래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주께서 허락지 않을 때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나의 인생의 끝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나의 인생의 끝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나의 끝이에요. 이제부터 ‘나’라는 말을 붙일 하등의 근거가 내 안에는 없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야곱이야기가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2장에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누굴 만나는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야곱이 알았던 것은 뭐냐, 자신의 끝이었습니다. 나의 끝. 야곱이라는 이름의 끝이에요. 야곱으로 살았던 나 야곱은 이제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잉태해줘야 될 야곱만 필요한 거예요. 이 근호라면 이근호의 인생은 예수 십자가를 알고부터 끝났습니다. 끝나고 이근호가 있어야 될 이유는 예수님을 잉태해야 될 이근호만 남아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성도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서 나의 행함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지요. 나온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죄 되게 만드시는 주님의 의만 나오지요. 나를 철저하게 죄 되게 만드시는, 나로 하여금…… 그러니까 성도가 늘 웃어야 되는데 언제 울어야 되느냐하면, 나를 생각할 때 울어야 돼요. 나를 생각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뭐가 나오느냐, 없어야 될 내가 새로 갑자기 생기면 거기에 덩달아 병행해서 내가 여기 있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 현실관이 나와요.
내가 여기 있는데 그 내가 여기 있다 보면 나의 과거가 생각나고 미래가 다시 생각나고 미래가 잘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이 나를 도와줘야 되고……, 예를 들어 6월에 내 생일이 있는데 누가 내 생일선물이라도 안하나, 아주 정확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누가 6월에 내 생일을 광고하라고 하는데 그 소리 듣자 마자 하고 싶은 거예요. 너무나 적절한 예기 때문에. 사람이 내가 여기 있으면, 과거에 나는 어느 학교 나왔으며 앞으로 몇 개월 후면 내 생일이고 내년이면 내 나이가 얼마고 칠순이 되려면 몇 년 남았고, 내가 있는 순간 그 다음부터 모든 현실이 내 앞에서 정렬해 버려요. 차렷, 열중쉬어, 차렷, 내 앞에서 정렬됩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유리한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에게 적이고 그래서 나에게 필요치 않은 사람이고, 이렇게 내가 살아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날라 가느냐, 성경의 현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정렬된 주님의 현실은 순간적으로 날라 가버리고 내가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내가 왕으로서, 우주의 왕으로서 내가 주의 보좌에 앉아서 세상 모든 것은 나를 향해서 경배해야 되고 모든 움직임은 나를 높이기 위해서 존재해야 내가 흡족하고 만족하는 허상을 꿈꾸게 됩니다, 허상! 그것들이 무너져야 돼요.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우는 자여, 우는 너희들이 차라리 복이 있다. 지금 울지 않기 때문에, 울 줄 모르기 때문에, 예레미야에 참여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참여 못한 저들에게 화가 있을찌어다.’
내가 있으면 나는 나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언약이 임하면 내가 나를 생산하고 나의 구미에 맞는 현실을 생각하는 그것을 주께서 눈물로 바꾸어서, ‘너는 자체가 죄인데 이 죄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라.’ 마치 유다나라 멸망하면서, 죄가 가득 찬 유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다른 나라가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죄악 된 국가로서 맛보는 축복, 그 죄악 속에서 유다나라가 깨어지면서 원유가 분출하듯이 그리스도의 세계가 죄 많은 유다에서 튀어나오고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야곱에서,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겁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나온다는 겁니다. 죄 많은 마리아에서 아기 예수 의인이 나온다는 겁니다. 죄지은 간통한 여인에게서 예수님의 자유가 나오고 개 같은 여인에게서 주님의 긍휼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나오지 말아야 될 나는 나오고 예수님의 공로가 안 나온다면 그것이 어떻게 유다나라, 성도, 주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예수 나불나불 거릴 때는 그것은 신자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작용하사 너를 위한 네가 존재하지도 않는 너를 계속 우기고 있는데 한 번 혼나봐라, 하고 주의 진노를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면서 다시 한 번 맛보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울음과 더불어서 기쁨이 함께 튀어나옵니다. 왜 기쁘냐하면, 이미 이긴 게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종결된, 끝난 게임을 우리는 뒤늦게 복기를 하는 겁니다. 복기라 하는 것은 바둑에서 다 두고 난 뒤에 어떻게 두었는지 다시 한 번 그대로 되돌려 보는 것을 복기라 하거든요. 우리는 이미 죄인인데 예수님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으로 피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남은 인생은 복기하는 인생만 남았습니다. 아, 이렇게 잘못되었구나, 아, 이것이 잘못되었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만, 주님의 깊은 사랑만 팍팍 원유 분출하듯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바로 예레미야의 울음이라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아브라함의 모든 역사, 야곱과 이삭의 모든 역사, 유다의 모든 역사, 인류의 모든 역사가 응축이 되는데 응축되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 받아 마땅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죄악에 얽매었다.’ 다시 말해서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신 겁니다. 이것은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주여, 나에게 원하신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그 고백과 같은 고백인 겁니다. 내가 살아 있다면 우리가 겁나는 것은 내가 죄가 드러나는 것이 겁나는 것이 아니고 내 죄로 말미암아 살기 힘들까 싶어서 겁을 내요. 부모가 애에게 매를 들면 애가 자기 죄지은 것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니고 때리면 아플까봐서 겁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살다보니 나를 살기 힘들게 만드는, 예를 들어 어디 펀드 넣은 것이 폭삭 망한다든지, 주식이 폭락한다든지, 부동산에 투자해놓은 것이 망한다든지, 애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하여튼 우리가 투자한 것 내가 살아 있다는 이 티를 내기 위해서, 내가 잘난 존재인 것을 뽐내기 위해서 걸쳐놓은 것들이 무너질까봐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오늘도 죄지은 것을 용서해 달라.’고 그런 식으로 무당한테 빌듯이 교회 오는 거예요. 그것은 예레미야의 눈물이 아니고 지금 연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을 낮춘 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마음을 낮추었으니 ‘주여, 부족합니다. 때리지 마세요.’ 이런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레미야는 그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잉태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죄인 되게 해 주신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 뜻에서 지금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저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의, 나의 의는 없어지고 예수님 의와 예수님의 용서와 긍휼만 계속해서 나오게 하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성화 론이 있으며 거기에 무슨 행함이 있습니까? 그 행함에서 누구 좋으라고, 누구를 자랑하라고! 자기 믿음 있는 것 과시하려고 그 짓 하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분노 앞에 설 때만 우리가 악마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도리어 원수가 우리를 이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가 우리를 이겼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알려줬는가?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이긴 그 악마마저 이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네가 구원받는 것은 네가 뭘 믿어서가 아니라 네 안에 너를 통해서 잉태하신, 야곱을 통해서 예수님 나올 때 야곱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엘리야를 통해서 예수님 나올 때 예수님을 통해서 엘리야 구원받고, 모세에게서 예수님 나올 때 예수님 때문에 모세가 구원받듯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낼 때 이미 그 사람이 이긴 자입니다.
최종적으로 이미 구원받은 이미 이긴 자로서 끝난 게임, 끝난 게임에서 우리는 주님에게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항상 잊지 맙시다.
언약이 오게 되면 우리를 블랙홀로 만들어서, 세상 끝이 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나의 끝이 진정 ) 나의 살아 있으면서 나오는 그 모든 꿈, 허상의 현실이 다 깨지는 그 나 자신,나에게서 나오는 그 가짜 현실을 깨는 그 ‘나’ 가 주께서 주님을 잉태하는 지점인 동시에 세상 끝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동안 헛된 세상 속에서 조마조마 하면서, 어떨 때는 타협하면서, 하나님과 흥정하면서 그저 어떻게 하면 이득 볼까 싶어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 지친 체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그 수고가 다 헛수고 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되었음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