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바꾸기
2017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2:11-13
(12: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에게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12)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2: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사도는 자신의 사도됨이 고린도교회에 의해서 거부당함을 반복해서 부각시킵니다. 이처럼 거부당함 자체도 하나님의 사도의 증표답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 땅에서 ‘다른 방식의 선과 악’를 펼치시기로 하셨습니다. 창세기 3:22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왕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아는 데 하나'가 되었으면 같이 사이좋게 잘 지내겠네라는 것이 우리 인간 생각입니다. 이미 사단과 한통속이 된 사고방식입니다.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시켜버리십니다. 그 이유는 사단을 배제한 선과 악을 새로이 펼치시기 위함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해석은 ‘하나님과 아들’이 새롭게 선과 악을 규정짓는다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1:27에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로부터 시작하는 그 어떤 가능성도 아들과 아버지가 아는데 이르게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구원되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곳곳에 견해를 두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와,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16:20에 보면,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미 모든 인간들이 나름대로 ‘믿음’이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겁니다. 즉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나름대로 선과 악에 대한 견해를 펼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9:16-17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본디 원하시는 바는, 절대로 인간들이 익히 아는 그런 윤리와 도덕에 복음이 결합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새포도주를 담는 것은 도저히 이 인간 세계에서 가능치 않는 불가능한 내용과 결합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참음과 그리고 기적과 능력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사도가 경험한 것은 결코 사도는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들이닥친 일입니다. 곧 불가능성입니다. 그 능력의 내용이 정리된 것이 바로 삼층천에 올라간 일과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가 심겨져 있는 겁니다. 특히 ‘사단’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에 유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몸을 계시의 진행 방향을 보여주는 몸으로 사용하십니다. 도착지점은 삼층천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사도의 자아는 완전히 무시됩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모를 정도로 황홀합니다. 그 반면에 시작점이 되는 몸은 육신의 가시가 작용합니다. 이것은 바닥입니다. 즉 인생의 바닥에서 천상까지의 경로가 사도의 몸을 통해 발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몸에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서는 세례 요한에게 위탁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므로서 죄많은 인간 세계에 합류하십니다. 그리고 그 끝은 십자가 저주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창세기 3:15의 내용이 실제적이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곧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악마의 대가리를 쳐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발꿈치를 물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단은 어디서 출몰할까요? 마태복음 16:2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의 행보를 말립니다. 즉 베드로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바로 이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베드로에게 명령합니다.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고 말입니다.
사단은 이 인간 세계를 모두 ‘가능한 세계’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즉 ‘자기를 위하여’ 가능한 체계를 담듬는데 분주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런데 의미 사슬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순서로 이어지게 합니다. 곧 “한 번 발생된 과거는 신이 와도 변경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만듭니다. 온갖 좋은 것은 미래에 있는 희망으로 종교생활을 하게 만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벌써 천국을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새포도주를 위한 새부대를 병행해서 같이 만드신 겁니다. 그 방법은 바로 ‘과거를 바꾸기’입니다. 과거로 바꾸는 방식은, 과거를 악으로 물들게 한 그 인간들을 죽이는 겁니다. 즉 ‘아담을 아담의 자손’이 죽이는 겁니다. 손자가 이미 죽은 할아버지를 도로 살려내서라도 다시 죽여버리는 방식입니다.
죽이는 방법은 예수님 자신이 인류와 더불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므로서 모든 자가 다 죽은 자가 되게 하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고후 5:14) 예수님은 그냥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매맞아 죽는 하나님’으로서 죽는 겁니다. 도마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옆구리를 찔려보라고 하십니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공격했고 거절하고 차버렸습니다. 이로서 모든 인류는 그들 여행의 도착점을 잃은 겁니다. 주님은 성도에게 십자가를 꽂아버립니다. 그게 성도의 도착점이 됩니다. 십자가 속이 곧 천국이었던 겁니다.
사도 바울에는 이런 요소와 더불어 삼층천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고전 15:10) 사도가 남긴 과거이 자국이 뒤돌아보는 순간, 모든 ‘하나님의 의’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마치 화투패를 깔아놓았는데 누가 와서 몽땅 뒷면으로 뒤집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는 아담이 한 일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하실 일로서 그 사람을 구원케 하시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신앙과 소망과 사랑은 십자가 안에서 몽땅 다 깨어지게 됩니다. 반복해서 깨어지게 됩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
십자가라는 절구통 안에서 산산조각 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도로 쏟아놓고 보니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바뀐 겁니다. 복음이라는 새포도주를 담는 새부대가 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구원받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12장 11절-13절입니다. 신약성경 29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12:11-13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얼른 보게 되면 사도가 꼬는데 또 꼬고, 비비 꼬아서 지금 고린도교회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이에요. 너하고 나하고 지금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기존에 알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라는 그 인식, 거기에 내가 안 따라가 줘서 미안합니다, 하는 그 이야기에요. 꼬는 거지요.
이 주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못생겨서 미안합니다.”라고 하잖아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위대한 사도가 못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원하니까 내가 위대한 척 해서 또 죄송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고린도교회가 이 편지 받고서 굉장히 기분 나빴을 거예요. 사도가 혼자가 중얼중얼, 중언부언 하는듯하기도 하고 실내용도 없이 뭐라고뭐라고 자기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뭐라는 거야 도대체.
오늘 본문 11절에서 13절을 보게 되면 도대체 너무 꼬아서,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뒤끝이 있어요. 꼬아도 너무 꼬아서 우리가 보면서도 ‘무슨 일이 있었어?’ 할 정도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이 말이지요.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겸손한 것도 아니고 겸손을 가지고 또 자랑하는 그것을……, 쉽게 말해서 “내가 당신들이 자랑하는 사도처럼 자랑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13절에 보면 아주 절정에 이르지요.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라고 하는 것은 “내가 당신들에 폐를 안 끼친 그것밖에는 부족한 것이 뭐가 있던가요? 내가 폐를 좀 끼쳐줘야 사도인줄 알아보시겠습니까?” 그런 뜻이에요. “내가 당신 교회에 폐를 안 끼쳤잖아. 안 끼친 그것까지 탓하나, 이 바보들아.” 이 말이에요.
“폐를 안 끼쳤는데 ‘그래서 너는 가짜’라고 그런 식으로 나에게 욕을 합니까?”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이 말은 절정이지요. 용서할 때는 잘못한 것이 있어야 용서를 하는데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여러분에게 잘못한 것이 없어서, 여러분의 기준을 들어주지 못해서 날 좀 용서해 줄 수 있어?”라는 그 말이에요.
잘못을 해야 되는데 잘못한 것이 없어요. 어느 정도로? 폐까지 안 끼쳤거든요. “폐까지 안 끼쳤으니까 여러분의 수법에 안 말려들어서 여러분이 얼마나 기분이 상합니까? 이 점에 대해서 삼가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그런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사도가 어떤 당당함 같은 것이 있어요.
이 당당함이란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개척교회를 했는데 교인 한 50명 되었어요. 어느 주일에 보니 자기 아내와 딸 달랑 셋 남고 다 가버렸어요. 그럴 때 그 속 시원함의 만족스런 함박웃음을 띄는 것. 그런 목사 봤습니까? “진작 가지 이제 다 갔구나. 주여, 이런 기쁨을 저에게 허락하시다니.” 이런 여유로움, 이런 당당함.
지금 그런 진리를 유일하게 아는 사도의 당당함, 이 당당함이 여기에 나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우리가 파 들어가려면 산불 나서 집 홀라당 다 타버리고 “이왕 죽을 거 하꼬방 잘 날라 갔다.” 하는 그 만족스런 함박웃음을 짓는 그 당당함, 그게 있어줘야 이 본문해석이 가능해요.
이 본문해석을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도가 고린도교회와 만났을 때 고린도교회는 전부 다 ‘for me’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이 티가 확 났어요. 그러니 다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다 나를 부인하고, 나를 버리고 가진 것 날라 가도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사이다 마신 것같이 ‘속이 다 시원하네.’ 라는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라는 그 마음 외에 달리 표현을 길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요만큼도 살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요만큼도 살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는 그 말이에요. 그것은 천국에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천국은 벌써 시작해야 돼요. 미리 시작해야 돼요 미리.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벌써 천국은 시작해야 되는데 그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델케이스가 사도바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념해야 될 핵심이 뭐냐 하면, 12절에 나옵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 참음에 대해서는 지난 수요일 설교에 이야기했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냥 양보해 버려라. 성도가 되었으면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 나온다고 했지요.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하나님을 위하여’에요. 평소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래, 너희들 잘 먹고 잘 살아라. 너 잘났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참음 뒤에 나오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뭐냐? 사도에게는 이상하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져요.
지금 세 번째, 오늘까지 네 번째 이야기하는데 또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지루하다 싶을까 해서 띄엄띄엄 보겠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깊음에 지냈고, 여행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그 다음 20절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고, 그리고 뒤에 나오는 광주리 탈출 사건.
본인이 예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본인이 이렇게 해야 된다고 기대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다가온 겁니다. 불가능성이 다가온 거예요. 이것을 사도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사도된 표시고 참음과 표적과 기사, 능력. 참음과 관련된 거예요. 참음 따로 있고 기사와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기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없는데서 풍족함이고 현재 네가 아픈데서 네 은혜가 족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해결책이라는 거예요. 육체의 가시가 있는 것이 해결책이에요. 빼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고. 왜? for god.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도도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빼달라고 했어요. ‘아, 내가 미쳤지.’ 나를 위해서, 가 왜 그 바닥에서, 그 대목에서 튀어나와요? 그러면 안돼요.
‘나를 위해서’가 튀어나오면 안돼요. 기도 잘못 한 거예요. 질책성 응답이 온 겁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사도야, 똑바로 봐. 지금 너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야? 정신 차려 이 인간아. 분명히 해.” 고린도교회는 전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준비자세가 안되어 있어요.
오늘날 모든 인간이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생각도 안 해요. 사도는 지금 불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가능성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의 권위가 연속되어서 반복해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사도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 살아 있어서 살아 있는 주님이 주님을 위하여, 아버지를 위하여 하는 그 모든 일들이 사도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바깥으로 방출이 되고 발산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인생은 한마디로 말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이 살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 해야 돼, 저것 해야 돼’가 아닙니다. 윤리도덕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몰아세우는 방식이 이래서 난 구원받았다, 자랑질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했던 그 일이 계속 연장되는 거예요. 아직까지 축구, 야구 안 끝났어요. 계속 되는 겁니다. 몇 회전을 하는지 몰라요. 권투 아직 안 끝났어요. 주께서 일을 계속해서 사도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복음가지고 교회를 찾아와서 ‘보자. 이 교회는 교회 맞나? 아니구나. 이 교회는 진짜 복음, 진짜 예수, 진짜 성령인가 보자. 아니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네.’
사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 가정은 신자 맞는가 보자. 아니네.’ 그 기준은 모두 다 불가능성으로 오고, 다르게 이야기하면 너는 지금부터 벌써 천국 생활을 시작했는가 하는 겁니다. 천국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나의 조치로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 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입니다.
본인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주님부터 시작한 일이 나라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주님부터 시작한 일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날마다 바꿔치기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내가 시작한 일이라도 주님께서 시작한 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
낮에 할 일 없는 사창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대요. 오늘도 손님 빨 있는가 싶어서 화투를 치는데 화투의 앞면을 죽 깔면서 하는데 그렇게 놓고 잠깐 뒤 돌아봤다가 다시 보니까 뒷면으로 다 바뀌어져 있어요. 분명히 나는 세상에 살면서 나밖에 모르고, for me, 이기주의의 나를 위하여 살았는데 보니까 하나님의 의로 다 바뀌어 있어요.
내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자국들이 싹 바뀌어 있어요. 분명히 오월 난초였는데 어느새 뒤집혀져 있어요. 분명히 시월 단풍인데 또 뒤집혀 있어요. 살아온 모든 것이 죄밖에 없는데 그게 전부 다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거 불가능성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한마디는 뭐냐?
마태복음 9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17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 담는다는 이것입니다. 새포도주는 절대로 옛날 부대에 담을 수가 없어요.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는다고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제자들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리고 얼마나 친절하신지 17절에 보면,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예수님의 복음은 기존에 알고 있는 윤리 도덕이라는 부대에 담을 수가 없나니.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의롭다는 그 부대에는 주님의 의는 담을 수가 없나니. 16절에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찢어질 대로 다 찢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음을 아십니까? 복음을 알면 여러분이 모든 일상은 터져버립니다. 나 잘났다는 것은 다 터져버리는 겁니다. 이 원리원칙이 지금까지, 세상이 천국으로 바뀔 때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교회 만들어서 다 바꿔놓았어요. “윤리 도덕으로 사세요.” 인과응보입니다. 이게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분간도 안돼요.
인과응보, 죄지었으면 벌 받고 착하면 복 받는다는 인과응보로 다 바꿔놓았어요. 옛 부대에 십자가를 결합시키니까 전부 다 찢어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아니에요. 벌써 천국생활 시작해야 됩니다. 벌써 우리는 새부대가 되어야 되고 새부대에 하나님의 의가, 새 포도주가 담겨야 됩니다.
이거 아니면 for me가 됩니다. 이것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가 아니에요. 다 나가도 괜찮아요. 나도 나갈게요. 교회 50명, 100명 아무 의미 없어요. 천명 있다고 그게 옛부대 아닌 것이 아니고 만 명이 있다고 거기에 새포도주가 담기는 것이 아니에요. 숫자 많으니 여기에 담아야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새포도주는 새부대를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동안 왜 우리는 이 사실을 몰랐던가.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교회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해답을 찾으면 안돼요. 문제를 찾아야 돼요.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해답부터 찾으려고 한 겁니다.
“주여, 내가 무엇이 문제입니까? 내가 어떻게 말썽꾸러기입니까?”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지 그 문제를 못 찾아요. “도대체 지금 제가 어때서요? 제가 어떤데요? 제가 무슨 하자가 있습니까?”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를 못 찾았어요. 문제를 못 찾으니 답을 못 찾을 수밖에 없지요.
미국국방부에서 전략적 방위체제를 개발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으로 자동으로 움직이지요. 스카이 넷이라는 이름의 전략적 방위체제인데 컴퓨터의 처리속도가 빨라지면서 인공지능을 심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인공지능에 자의식이 생겼어요. 나와 타인을 스스로 분간해서 인간전부를 적으로 간주해서 공격해버립니다.
<터미네이터>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만든 기계의 핵공격을 받아서 몰살당해 버립니다. 터미네이터라는 살인기계를 보내서 생존한 인간들을 다 죽이고 다닙니다. 생존자들이 지하로 스며들면서 존 코너라는 지도자를 뽑아서 게릴라전으로 기계에 대처합니다.
스카이 넷이라는 인공지능이 그것까지 알아차려서 존 코너라는 그 인간이 태어나기 전의, 1984년도에 생존해 있는 사라 코너라는 존 코너의 엄마가 될 여인을 찾아가서 그 엄마를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이 게릴라지도자를 처단하려고 하는 그 영화가 스왈츠제네거가 주연한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겁니다. 불가능이지요. 이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이 내용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이미 지나온 과거는 신이라도 바꿀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의 철학자. 신이라도 지나간 과거는 바꿀 없다고 했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바꿀 수 없는 그 과거를 바꿔버립니다. 마지막 아담이 모든 아담을 다 죽여 버리거든요. 시간 여행을 해버려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바꿔버립니다. 누가 믿었어요? 누가 알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계획을. 아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역사가지고 진척이 되지요.
그러면 그 사라 코너라는 여자를 죽이려고 터미네이터를 서기 2029년에서 1984년의 LA에 파견해 버려요. 물론 영화에서 살인기계도 오지만 사라코너를 보호하는 기계도 오잖아요. 손가락 치켜들면서 “난 다시 온다.” 하는 장면이 마지막에 나오는데.
악마에 의해서 모든 것이 사로잡힌 세계는 주님께서 오직 한 가지 시간만 적용시켰어요. 과거-현재-미래로만 흘러가는 것. 그래서 모든 종교는 미래에 잘 될 거라는 소망을, 상품을 걸고 사업을 벌여요. 앞으로 천국이 있을 거라고, 혹은 지옥이 있을 거라도 계속 미래를 쳐다보고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은 그저 그대로 멀쩡한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계획을 사도바울의 몸에다 담아 버렸어요.
도착지점, 사도의 자아가 사라지는 지점을 도착지점으로 했습니다. 그걸 삼층천이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보면 그 몸 안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이야기 하면서 남 이야기해요. 인간이 도착지점, 그러니까 천국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주님만 있으면 되는 세계, 그게 도착지점이고 시발지점은 내 몸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가시를 집어넣으니까 이 몸의 아픔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이빨 아픈 것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내 이빨이 아픈데 그걸 남이 대신할 수 있습니까? 아픈 것은 아프잖아요. 아프니까 사도바울은 빼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에요. 주님께서 불가능성을 집어넣은 겁니다.
지금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담는 그 작업을 하는데 새포도주는 있는데 새부대가 마련되지 않았어요. 그 새부대가 마련되는데 불가능성으로 사도바울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고린도교회는 몰라요. 무식해서 몰라요. 사도가 가짜인줄로 착각하고 있어요. 바닥에서 천국까지, 두 개의 사실을 사도의 몸에다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사도의 현재 몸은 육체의 고난이 있는 몸, 그리고 사도가 봤던 그 세계는 내가 어디 있지, 어디 있는 거야, 자기를 돌아본다든지 자기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없는 거예요. 자기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한다는 말은 인과응보의 원칙이 적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나쁜 짓 한다고 벌벌 떨고 착한 짓 한다고 무슨 기대를 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 경우에나 그런 경우가 생겨요.
그런데 지금 천국이 너무 좋아서, 삼층천이 너무 좋아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가 뭐 했지, 그런 것이 생각이 안나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몸을 통해서 바닥과 천국을 다 보여줬습니다.
그 시작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사탄이지요. 사탄에서 시작해서 사탄이 없는 곳까지 주께서는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자신의 정보를 사도에게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어 버리면 사도는 이미 삼층천에 관한 그 모든 미래가 자기 속에 삽입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탄에 잡혀 있다는 그 과거까지 함께 자기 몸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미래와 현재가 지금 공존하고 있어요. 사도의 이러한 은사가 주어지기까지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 거기에 요한복음까지 합해서 4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그 일을 죽 계속 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서를 한꺼번에 해석을 끝내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해석은 이렇게 한다. 지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선과 악은 너희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내가 정한다. 이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해석의 결론입니다.
선과 악은 너희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정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선과 악을 자기가 정해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1장 27절입니다. 거기 보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다시 말씀 드릴까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도록 그렇게 세상을 이끌어 간다는 거예요. 모르고 구원받는다 그 말입니다. 복음을 이해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어줌으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왜? 불가능성이 계속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불가능성이 계속 살아남아야 돼요. 그래야 은혜가 살아요. 우리는 내 죄지은 과거가 어떻게 졸지에 돌아보는 순간 하나님의 의로 바뀌었는지를 끝까지 몰라야 돼요.
왜? 주님의 조치니까. 사람은 여행합니다. 여행할 때 시발점과 도착지점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술책이고 그것은 옛부대입니다. 거기에는 복음이 안 담깁니다. 주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올 때는 도착지점을 꽂아놔 버려요. 쉽게 말해서 그 머리를 쪼개서 십자가를, 예배당 저 뒤편에 십자가 있거든요, 십자가를 거기에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를 배낭으로 여기고 배낭 속을 다 끄집어내고 십자가를 집어넣어요. 그 십자가가 도착지점이에요. 빌립보서 3장은 말합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간다. 십자가가 우리가 가야될 곳이에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요. 참 대가리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데, 사람한테는 하면 안 되는데 마귀한테는 해도 괜찮아요.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마귀로 하여금 예수님의 발목을 물도록 유도를 합니다. 뱀의 후손은 발꿈치를 계속 물어야 돼요. 물어야 사탄의 대가리를 깨요.
그리고 사탄이라는 말을 사도바울의 몸에 집어넣어 버렸어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도대체 우리의 몸은 자식 낳고, 월급 받고, 밥이나 먹고 살다가 요양병원에 가서 거지귀차고 죽으면 끝나는 그것이 인생사는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 몸으로 살게 한 문제가 묻힌다니까요. 나타나지를 않아요. 인간은 왜 태어났는지, 나는 왜 있는지가.
북한 핵이나 걱정하고 박 근혜 재판이나 구경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잖아요. 도대체 근원적인 문제로 가려면 여기에 사탄이 개입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해야 돼요. for me,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예요. 이 창세기 3장 15절을 그대로 복사를 합니다. ‘ctrl+V’ 컴퓨터 자판에 복사하는 명령어잖아요.
복사를 해서 사도바울의 몸에 집어넣어 버려요. 그리고 삼층천은 사도의 몸을 delete, 제거해 버려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그렇게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왜 이러십니까? 제가 세례를 받아야 될 텐데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사람들만 받아야 되는 물세례를 왜 받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빨리 나에게 세례를 줘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 되어야 돼요. 의인이지만 죄인과 똑같은 경우를 당해야 돼요. 똑같은 경우를 당해줘야 비로소 사람들은 모르지만 사탄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계속 알려줄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뭐냐? ‘ctrl+V’에요. 아담이 죄지은 것을 예수님 자신이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사탄의 가시가 있는 겁니다.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북한 핵문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지요. 경제를 어떻게 살리는가, 청년실업문제 그 이야기 아니지요. 제가 지금 없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신경도 안 쓰는 문제, 관심조차 없는 문제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대체 주님께서 사도의 몸에 무슨 짓을 했는가 그 말이지요. 구속사가 거기에 다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몸에다가 죄를 복사를 해서 복사기능을 하게 됩니다. 복사기능을 하면서 재미있는 것은 평소에 안보이던 사탄, 조용하던 사탄이 어떤 식으로 현장에 작용하고 있는가를 노출시키고 있는 일을 하십니다.
그게 마태복음 16장 20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20절은 2천년이 지난 이 시간까지 어떤 신학자도 풀지를 못했어요. 너무 어려워서.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대목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어떤 신학자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풀지요. 성령 받아야 풀지요. 신학 했다는 것은 성령 안 받았다는 뜻이거든요.
이유가 뭐냐 하면, 제자들, 특히 베드로, 이 이야기 듣고 그 다음이야기 듣고 제자들이, 베드로가 사탄으로 변해 있습니다. 드디어 사탄이 나온 거예요. 사탄이 평소에 인간들을 어떤 식으로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어떤 말을 던질 때 비로소 확 드러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참 제가 설명하기 어렵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식으로 알려라, 그 말입니다.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널리 전파하라, 그 말입니다. 누가 알아듣겠어요? 누가 알아듣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야기했다고요.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했잖아요. 우리 같으면 ‘죽어도 곧 부활된다고 하니 속편하게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되지.’ 이렇게 되는데 베드로는 갑자기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사탄에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니까 사탄은, 터미네이터가 와서 존코너 엄마인 사라코너를 미리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가자는 겁니다. 과거-현재-미래, 이대로 가자는 겁니다. 그래야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희망은 나중에 두고 출발했으니 도착지점을 보고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뭐냐? 베드로가 충격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살기 위해서,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었는데 그리스도가 죽어버리면 자기 모든 것을 죽음이라는 것을 최종도착지점으로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본인들이 재평가해야 돼요.
죽기 위해서 골프 쳐야 돼요. 해외 놀러가는 것 죽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돼요. 등산하잖아요. 죽기 위해서 건강을 챙겨야 돼요. 설거지하잖아요. 죽기 위해서 해야 돼요. 이거 옛부대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불가능입니다. 가능치 않아요.
베드로가 사탄으로 변한 것은 이유가 딱 한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이 믿게 되면 그 순간부터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예를 들면 전방에서 새벽에 보초서고 있는 병사가 추석날 보름달을 볼 때 그 보름달이 엄마의 얼굴로 보이는 겁니다.
“엄마가 보고플 때 ……” 눈물을 죽 흘리지요. 이게 바로 가능성입니다. 세상에 내 몸이 있으면 내 몸에서 사도는 사탄의 가시와 삼층천이 나왔는데 우리의 평소의 몸은, for me, 나를 위해서 연결되어 있는 모든 배선들, 전자기기에 있는 복잡한 배선들, 나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 생각해요.
왜? 달덩이가 자기 엄마 얼굴로 보이거든요. 70, 80까지 살아가면서 내가 봤던 것은 전부 다 내 몸의 관련성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과거라는 겁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전부 다 현재 내 몸을 위하여, 나를 위해서 전부 다 엮은 거예요. 5월 난초, 10월 단풍, 모든 화투의 앞면 그대로 다 유지하면서 나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나의 자아를 형성하는 거예요.
‘저 인간 얼른 보니 10년 전에 돈 떼먹고 도망간 그 인간 같은데?’ 이런 거요. 모든 얽히고설킨 만남, 그 어떤 관계라 할지라도 다 나를 위해서예요. 그러니 그 마음가지고 교회 온 거예요. 교회 와서 내가 어려운 것 빨리 보상해달라고 기도들 하고 철야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믿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 안 나옵니까? 믿는 구석이 있어서 안 나와요. ‘목사님은 뭐 교회 안 나와도, 수요예배 빠져도 신자라고 한다면서. 이번에 나 참석 안했어도 신자다.’ 보세요, 벌써 연속성이잖아요. 벌써 가능성 아닙니까? 내가 신자 되었다는 그 순간부터 옛날 옛부대 행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for me. 예수 믿는 것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 믿는 것도 나를 위하여. 오직 나를 위하여. 옛부대 그대로 있으면서 나는 신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놈의 문제가 뭐냐, 그놈의 믿음 때문에 그래요. 구 자억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트로트로 찬양하는 목사의 이름인데요. 그 사람 노래 가사가 이래요.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장기하의 미미 시스터즈를 본 따서 할렐루야 시스터즈라 해서 츄리닝 입고 춤추는 대목이 있어요.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것는디” 믿을 수 없것는디, 하는 거예요. 전라도 말로 하는데 믿을 수 없는 거예요. 오늘은 믿을 수 없었고 내일도 믿으면 안돼요. 내일도 믿을 수 없어야 돼요. 모레도 믿을 수 없어야 돼요.
계속 믿을 수 없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불신자가 되어야 됩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신앙이 있으면 그것을 밟아버려야 돼요. 부숴버려야 돼요.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사람이나 백부장 같은 경우에 주님을 만나는데 뭐라고 하느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 외에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돼요.
그리고 요한복음 6장식으로 하면,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자기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유가 이미 그들이 불신자기 때문에 아니고 신자기 때문에 그래요. 여호와를 믿기 때문에 그래요. 삼위일체를 믿기 때문에 그렇고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들은 지옥 가는 겁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되는데 예수를 믿다 보니까 뭘 믿느냐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for me에요.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겁니다. 그렇게 세운 교회를 믿고. 그러니 기도 백날 하니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거지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갖다 붙였어요. 붙이니까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했습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이미 예수를 믿었어요. 믿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사탄으로 변한 겁니다. 시작을 주님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데 이미 시작은 자기가 해놓고 거기다가 예수님 말을 추가해서 더 보태면 구원이 되는 줄 알았어요.
자기는 옛부대인데. 자기는 옛부대거든요. 옛부대에 새포도주를 담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내가 불신자로 달라져야 되는데 불신자 되면 지옥 가는 것이 겁나는 거예요. 불신자 되는 것이 왜 그게 나빠야 됩니까? 불신자 되어서 지옥가게 되면 지옥 가야지요. 그게 주님의 조치라면 그걸 받아들여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뭔데, 여러분이 뭔데 천당 가야 돼요? 베드로는 자기가 3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다녔기 때문에 나만은 천국가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했을 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거예요. 예수님의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어떤 경우에만 그리스도로 나타나느냐 하면, 네가 마귀에 속했다는 것을, 네가 바닥에 속했다는 사실을 들춰내는 현장에서만, 비로소 불가능성만 다가올 때만 예수님은 유일하게 그리스도가 되고 우리에게 새포도주가 되는 겁니다.
그 새포도주 앞에서 내가 옛부대에 건방지게 주님을 담으려고 했던 이 시건방 떠는 모습이 이게 사탄의 짓입니다. 이게 어렵고 중요한 것이라서 시간 좀 더 가더라도 말씀 드립니다. 사탄이 왜 그렇게 예수님의 발목을 무느냐 하면요. 꼬마라도요, 싫으면 꽉 물어요.
왜 무느냐 하면, 선악을 아는데 있어서 우리가 전부다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선악을 아는데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나가라고 한 거예요. 우리 생각은 뭐냐? 선악을 아는데 하나가 되었으면 이제부터 사이좋게 의사가 통용되고 더 좋아 보이잖아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쫓아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 하나님의 취지도 모르고 수십 년 우리가 예수 믿은 거예요. 이런 취지도 모른 채로. 마귀의 주장은 아니까 막가자는 이야기, 같이 맞먹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눈 감고 계속 넘어가자는 거예요. 선악을 알았으니 바르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여기에 모든 인간이 다 말려들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도 말려들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행위의 주체가 되어서 선악으로 행하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고 주님께서는 뭐냐? 모든 인간은 다 죽여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 죽이는 방법은 뭐냐?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20장 35절에서 37절인데 이것은 지난 여름수련회 <은밀한 나라> 강의 마지막에 했던 그 이야기거든요. 35절에 보게 되면, 어떤 선지자가 나타나서 동무에게 나를 치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아담을 죽이는데, 손자가 살아나서 이미 죽었던 할아버지를 깨워서 죽여 버려서 손자 자신을 없애는 방법을 사용하거든요.
참 어렵지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줘요. 나를 치라는 말이지요. 멀쩡한데 칠 수가 있어요? 나는 안치겠다고 하니까 길가는 사자가 와서 그 동무를 물어죽였어요. “이게 하나님의 일도 모르고.” 그 다음에 또 “너 나를 치라.” 하니까 팼어요. 잘 한 짓이에요.
선지자를 침으로 말미암아 선지자 몸에 뭐가 남느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때렸다는 흔적이 남아요. 도마에게 손가락을 가지고 창자국에 집어넣으라는 그 말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가에 난 자국은 인간들이 평소에 바닥, 악마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침 뱉고 욕하고 미워했다는 흔적을 주께서 남기는 거예요.
주님이 물세례 받았기 때문에 죄인의 모습으로 그걸 남겨서 이 몸 그대로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과거로 돌아가서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는 전략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예수님 자기 몸의 흔적은 이미 하나님을 팬 거예요. 팼기 때문에 맞아 죽은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게 새포도주에요. 하나님을 팼다는 말은 지옥 가더라도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류를 만들고자 사도에게 바닥과 천국, 두 개의 하나님의 기적을 다 보여준 겁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 없게 만드는 거예요. “재는 천국 보내주고 나는 안보내주고.” “입 다물어. 네가 나를 팬 입장에서 무슨 할 말이 있어. 입 다물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처럼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그 십자가 모습 보면서 더듬어 가는 거예요. <언니가 살아있다> 그 드라마 끝에 보면 양 달희(다솜)가 너무 못돼가지고 나중에 감옥에 가서 장님이 되어서 더듬더듬 하면서 밥 먹다가 다 쏟아버리는 장면이 있어요. 저주도 그런 저주가 없어요.
살아 있어도 저주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뭐냐? 이놈도 패고 저놈도 패고 나중에 마지막 십자가에서 제일 허접한 두 강도 사이에서 “예수 급이 저 정도 급이야. 저렇게 무가치한 급이야. 저 인간 믿지 마.”라는 것을 다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는 순간 모든 아담의 분신들은 다 죽었어.” 이것이 로마서 5장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감히 옛부대에 하나님의 의를 담을 수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의 담으면 우리 부대 찢어집니다. 찢어져야 돼요. 그 찢어지는 장면이 마태복음 21장 44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절구에 옛부대인 우리를 넣습니다. 절구에 넣고 찧습니다. “이놈아 가루가 되어라.” 가루는 불연속성입니다. 가루를 보고 우리 엄마 닮았다, 안됩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안됩니다. 그날은 그날이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모든 화투짝이 다 끊어지는 화투짝, 다 해놓고 열어보니까 반짝반짝 다 하나님의 다이아몬드, 하나님의 의가 나와요.
왜? 주께서 십자가로서 나를 부순 그 행함,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이지요. 그게 태장 맞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그리고 굶고. “이놈의 사도야, 너는 연속이 없어.” 불연속. 매일같이 주께서는 우리의 옛부대를 유지하지 않도록 합니다.
내가 뭘 믿어서……, 믿는 것 좋아하네. 믿음, 소망, 사랑, 가루로 다 없애버려요. 그래놓고 그 절구의 내용을 부으니까 거기서 반짝반짝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요.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강한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내가 너희들 보기에 죽은 같지? 내가 영원히 살았고 나는 날마다 죽고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온다.”
이 모든 사도바울의 편지의 의미는 이게 담겨 있습니다. 과거가 바뀌었다. 과거를 바꾼다. 죄 지어놓고, 이기주의, 나를 위해서만 교회 왔는데 돌아보니까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져 있을 때 “주여, 제가 또 가루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뭘 생각했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뭘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뭐 때문에 교회 왔습니까? 다 사기고 사기였던 것을. 그러나 그 사기술, 돌아보니 이미 반짝반짝 피 흘린 하나님의 의로 바꾸어주시는 그 작업으로 인하여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그 그리스도를 전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