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죽인 것
2017년 1월 15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10-11
(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보통 교회에 와서 들은 바로는, 세상에서 지은 죄, 교회 와서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용서받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세상에서 돈 번다고 지은 죄를 교회에서 처리가 가능한 것이 됩니다. 가끔은 성만찬을 하고 세례 식을 통해서 감정이입을 통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정상적으로 천국가고 있는 존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규정은 무엇입니까?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 예수님과 한 덩어리되는 과정을 왜 나와 있는 것일까요? 간편한 방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안 짊어지면 구원에서 탈락인가요? 그렇다면 죄 씻어 준다는 십자가의 효과로서 구원에 충분치 않다 는 말이 되어버립니다.
사실은 이러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 그 결과가 ‘죄 씻음’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 죽인 것’하고 상관없이 ‘죄 씻기 위해’ 십자가 앞에서 나서는 것은 자신의 동질성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속셈이 밑에 깔려 있는 겁니다. 즉 ‘나는 나를 죽어도 못놓겠다’는 고집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 죽인 것’ 앞에서 이런 고집은 옳은 것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 죽인 것’이라는 말씀은, 문법상 ‘여격(與格)’입니다. 여격이라는 말은 자기 쪽으로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결과로 죽어야 될 그 죽음은 예수님께서는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껴안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보통 재수 없고 기분 나쁘고 더러운 것은 본능적으로 밀어내기 급급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발생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사건입니다. 이제 성도에 있어서도, 그 예수님이 받아내신 바 그것을 껴안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곧 구원이 되었으면 본격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는 겁니다. 구원받았으니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 상황으로 번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래서 결코 인간의 개인적 동질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용납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잘났기에 그 잘남으로 구원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19세기 프랑스의 살롱문화 같은 성인 놀이터나 잡담이나 늘어놓는 곳이 아닙니다. 취미활동 하는 곳이나 삶의 편리하고 유익한 사회정보를 획득하는 곳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모든 자들을 민망할 정도로 노출시키는 곳입니다. 사적인 가정이나 자기만의 공간의 두껑을 활짝 열어 제키시는 그런 하나님의 활동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석기 사람들처럼 가정이라는 자기 토굴에 갇혀서 심적 천장에다 신에 대한 낙서나 해서는 아니됩니다. 말씀 앞에서 날마다 벌거벗은 채도 노출되어야 합니다.왜냐하면 어차피 예수님 오실 때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의 부끄러움과 죄를 가릴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입니다.(계 6:14-17)
따라서 ‘죄 씻음’이라는 사실은 결코 개인적인 동질성을 보장해주시는 조치가 아닙니다. 기존에 알던 그 ‘나’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창세 전의 환경을 동반시키면서 오셨습니다. 그 환경은 오직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는 형성되는 환경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계신 분이십니다. 이 원형적인 형상으로 인하여 이 지상의 인간들도 원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둘레에 무슨 힘이 흐르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구상(具象)된 것으로 다지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질서체로서 버티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는 맹렬하게 탐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탐욕은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로 보십니다. (골 3:5) 즉 너희들이 알 수 없는 신(神)이 개입된 현상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 방문은 단순히 인간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모르는 창세 전의 사정을 가지고 오섰기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본 자는 사단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언급하는 겁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아들이 오셔야만 아버지가 유발됩니다.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습니다. 순서상 아버지가 먼저가 아닙니다.
따라서 아들이 동반해서 가져온 새로운 현실상, 새로운 시-공간으로 인해 이 땅에 숨겨진 배후 세력이 들통납니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사단은 하늘에서 ‘내어쫓겼습니다’. 이는 곧 ‘추락’을 의미합니다. 추락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그 존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사람이 날마다 상승하면 마치 본인이 그 정도 성과를 가질만한 자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추락하게 되면 그 속도감 속에서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추락하는 사단’을 통해서, 범죄한 인간의 심정을 죄로 규정하십니다. 죄란 그냥 그 자리는 놓여있으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방향성을 가집니다. 이 방향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같이 뛰어들어서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곧 이것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단지 빛과 어두움이라는 환경으로 분류하실려고 합니다.
즉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장만하는 교회나 그 어떤 발달된 문명도 예수님이 가져오신 환경 앞에서는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그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을 빛이라는 새로운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빛된 자녀로서 본격적으로 세상 전체가 어두움에 불과함을 압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다 이 어두움에 갇혀 있는데 그 안에서 인간들은 구더기처럼 원형질로서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이렇게 한데 모이는 식으로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 스토리story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스토리는 이러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사적인 동질성을 옹호하는 것이 사단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인간을 앞장 세워 같이 추락하는 엘리베이트 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항상 어디에 가시든지 말씀 앞에 전신이 다 노출되는 식으로 자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나 가정을 통해서 자신의 원형질됨이 발각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19강-고후 4장 10-11절(예수 죽인 것)1701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10-11절입니다. 신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아는 상식은 교회 가면 죄를 씻어준다는 겁니다. 여태껏 그렇게 알고 있었고 성경도 그렇게 나와 있지요. 목욕탕에 때가 누덕누덕한 몸을 가지고 갔는데 목욕탕에 다녀오니까 깨끗하게 되었더라.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 살면서 죄가 누덕누덕 많았는데 교회 가서 예수 믿으니 씻겼더라. 얼마나 편리한지요. 세상에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교회 가서 샤워하듯이 매주 지은 죄를 교회 와서 예수님의 피로 시원하게 샤워하고 또 다음날 돈 번다고 죄 짓고 또 그 다음날 샤워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돼버리면 앞에 이야기한 것, 우리 몸을 항상 멀쩡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먼지 묻은 것 같은 것을 씻겨서 돌아오면 멀쩡한 내 몸 되고 다시 때 묻으면 교회 가서 씻고, 이런 식으로 나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과 우리가 한 덩어리가 된다는 이야기니까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씻는 거예요, 한 덩어리 되는 거예요?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죄를 씻어주게 되면 이 몸 그대로 유지가 가능해요. 그런데 예수님 죽인 것을 우리가 짊어지게 되면 이 몸 그대로 유지한다는 그것이 폐기처분되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야 되는 예수님의 지쳬,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가마, 또는 수레, 마차, 콜택시, 이런 식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이 두 가지의 것 중에서 우리는 어느 것이 수월한가, 어느 것이 편리한가, 어느 것이 내 욕심을 채울 수가 있는가, 그런 것을 감안해 보니까 역시 목욕탕에 가끔 왔다 가는 것이 좋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안 들은 것으로, 없는 것으로,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되는 것으로 밀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본문에 대해서 슬그머니 밀쳐버리고 “난 안들은 것으로 할래요. 그냥 매주 교회 가서 죄 씻겠습니다.” 하고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첫 번째 원리, 교회 가서 죄 씻는다는 그것도 잘못알고 있는 겁니다. 죄를 씻는다는 것은 하나의 결과에 관한 것이고 그 원천은 오늘 본문의 내용이 원천이 되어서 그 결실물로, 결과로, 열매로 죄 씻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열매만 따먹을 생각하고, 실제로 자기가 어떤 몸인지는 모르고, 남이 열매 따니까 같이 열매를 따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이 두 개가 결합이 되는 겁니다. 이 두 개를 결합해서 설명한다든지 오늘 본문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교회 처음 나온 사람에게 이거 설명해 버리면 그 다음 주일에 그 사람이 안 보입니다. 왜 그렇게 어려우냐는 말이지요. 들은 풍문에 의하면 죄 씻어준다기에 갔는데, 때 묻은 이 몸을 멀쩡한 몸으로 다시 개조해서 나온다고 알고 있는데 갑자기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신학교에서도 안 가르쳐주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오느냐 하겠지요. 이런 것 신학교에서 안 가르쳐 줘요. 왜 신학교에서 이것을 이야기를 못하느냐 하면, 이걸 설명해주려면, 이것이 설명이 가능하려면 신학교수가 사표를 늘 내야 돼요. 왜 목사가 이것을 이야기를 안 하느냐 하면, 이걸 이야기하려면 목사 자체가 늘 이번 주 마치고 사표 낼 각오로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 동질성, 나라는 동질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어떤 수작이나 방법도 이 말씀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걸 용납하지 않아요.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그 순간에 나의미래계획이라든지, 2017년도의 나의 스케줄, 이런 것은 다 부질없는 이야기로 다 날라 가버려요.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내가 살아 있어서 내 계획이 성립되잖아요. 그런데 내가 살아 있다고 하는 그 내가 그리스도에 장악되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사라져 버리면 내 계획도 같이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슨 교회 계획이 있고, 올해 12월까지 교인 몇 명 채우고, 이런 것이 어디 있어요? 다 날라 가고 없는 거예요. 신학교 학생들 몇 명을 내년도에 모집한다든지 그런 것도 없어요. 만약 신학교수가 이걸 가르친다면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 수업입니다.”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요. 그러니 이걸 누가 이야기합니까? 할 수가 없지요. “잘 배워서 목사 되어서 장사 잘하세요.” 이게 신학교의 존재이유인데 이 본문을 거기에 대버리면 이것은 신학교설립의 취지에 어긋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4장 10절, 11절을 모르고서는 그 다음에 나오는, 내가 이렇게 예수 믿으면 천당 가겠고 죄 씻음 받겠네, 피를 믿으면 구원받겠네, 하는 그 모든 노림수는 굉장히 수상한 노림수가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은 성경에 있지도 않고 하나님이 이야기하지도 않는데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얻고자 하는 정보를 획득해서 죽음에 대해서 보험 넣듯이 미리 대비하겠다는 수작에 불과한 겁니다. 이것은 가짜가 되는 거예요. 결국 가짜 아닌 양 살 수는 없고 진짜인지는 오늘 본문을 통과해야 되겠습니다.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통과를 해 봐야 돼요. 통과를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여기서 예수 죽인 것, 이것이 뭐냐? 이것을 여격이라고 합니다. 문법에서 여격의 반대말은 대격, 대격의 반대말이 여격이에요. 상대방에게 주는 것을 대격, 여격이란 저쪽에서 나에게 부여받는 것을 여격이라고 합니다. 여당 할 때 그 여, 방향이 나에게 향하는 것을 여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인간의 모든 죄와 결과물을 자기 쪽을 향하여 스스로 부여한 거예요. 여격입니다. 죽음이라는 것, 하나님아버지께서 주신 저주, 심판이라는 것, 성경에서는 그것을 ‘쓴 잔’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자기에게 부여해버렸어요. 우리 보통 인간들은 재수 없는 것은 밀치기 바쁘잖아요. 토정비결이나 손 없는 날에 이사 가는 것은 뭡니까? 재수 없는 것은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밀어내는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수용해버립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수용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거든요. 그와 똑같은 것,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일이 이제 성도에게도 똑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죄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부여하는 거예요. 구원받고부터 죄를 알고 죄를 알고부터 본격적으로 죄짓기에 나서는 겁니다. 구원받고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고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고 본격적으로 죄 짓는 일에 나서는 겁니다. 이게 예수 죽인 것을 내게 부여하는 거예요. 동양철학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심령은 착하다. 그런데 살다보면 돈 욕심내고 살다보니 먼지가 끼었다. 그래서 사람은 날마다 청정한 말씀이나 생각을 가지고 먼지를 털어버리고, 마음을 수시로 깨끗하게 해서 다시 세상에 나가서는 최선을 다해서 착하게 살고, 먼지가 좀 끼는 것은 할 수 없을지라도 할 수 있는 한 적게 끼도록 살아야 한다.” 이것이 동양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동양철학이 교회에 그대로 들어왔어요. 왜? 납득이 되니까. 이해가 되니까. ‘교회 와서 인간 한 번 만들어보자. 교회 와서 나도 인간 한 번 되어보자.’ 그런 마음으로 왔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남는 것은 뭐냐? 계속 동질성이에요. 교회 오기 전의 그 인간이나 지금의 그 인간이 동일한 인간인거예요. 동일한 인간은 어디까지 기웃거리는가 하면 천국까지 기웃거리고 있는 겁니다. 가짜입니다, 전부 다. 교회가 아니고 절이에요. 절간이에요. 누구 맘대로 넣어줘요. 자기가 보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지만 천국이라는 곳은 그렇게 넣어주지 않아요. 복음을 경유해야 되고 복음을 통과해야 돼요. 예수 죽인 것을 짊어져야 돼요. 본격적으로 죄지어야 돼요. 본격적으로 죄 짓는 그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감사가 절로 나옵니다. ‘내가 이런 솜씨가 있는 것을 미처 몰랐지.’ 옛날에는 그것을 감추기 급급했고 가리기 바빴는데, 혹시 이번 주에 저주받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게 되면 이것은 이 땅에서 인간들이 자기만의 토굴, 동굴을 만들어서 계속해서 자기만의 아지트를 만들어요. 나만의 세계를 그래서 신학을 한다든지, 성경공부를 한다든지, 교회에서 교제를 한다든지,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그 동굴에 낙서를 하는 것과 똑같아요. 소망 다음에 믿음, 그 다음에 칭의, 이런 조직신학을 배우는 그런 것은 낙서하는 거예요. 구석기시대에 동굴에 낙서하는 것과 똑같아요. 자기 안에 아지트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뚜껑을 확 열어버리지요. 숨을 데가 없습니다. 자기 몸을, 동질성을 감출데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6장 14절에 보게 되면,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우리는 남한테 들키지 않고 뚜껑을 덮는데 주님께서는 그 뚜껑을 확 들춰버립니다. 그걸 이번수련회에서 ‘전체성(whole)’이라고 했습니다. 강의 중에 앞에 앉은 분에게 질문을 했어요. “가정주부가 애도 잘 키우고, 가장은 직장생활 잘하고, 꼬박꼬박 월급 잘 가져온다. 이 가정의 문제점이 뭐냐?” 그냥 보기에 아무 문제점이 없어요. 이 가정의 문제점이 뭐냐? 이게 전체성이 없어요. 자기만의 토굴이고 자기만의 아지트기 때문에 문제에요. 그걸 구멍 난 스타킹이라고 한 겁니다. 자기만은 괜찮다고 둘둘 감은 그 윤리도덕의 잣대를 가지고 천국을 넘봐요? 자기만의 착하다고 우기는 그것, 그걸 가지고 어딜 들이밀어요? “이 정도면 구원 받겠지요?” 미리 뚜껑 열려야 됩니다. 미리 가마솥 뚜껑이 다 열려야 돼요. 이 덮어놓은 토굴 뚜껑이 날라 가버려야 돼요.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하나님의 진노의 빛 앞에서 미리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노출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4장 13절에 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마치 벌거벗은 듯 다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민망함’입니다. 늘 주님 보시기에 민망해야 돼요. 노출되어야 됩니다. 성도는 노출증 환자 같은 거예요. 남 죄짓는 것 보지 마시고요. 그것은 관음증환자고요. 본인이나 잘하세요. 늘 주님 앞에 노출되어야 돼요. 주님 앞에 늘 노출 될 때 그게 성령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뚜껑이 있어버리면 사람이 그 안에서 뭐가 생성되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질서가 만들어지고 이 질서는 적그리스도 적이에요. 이게 구성이 되고 구상이 되거든요. 뭔가 형체가 만들어지거든요. 이것은 나의 동질성, 이것은 나다, 이렇게 구상이 돼버립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쑤셔대게 되면 이게 뭐로 바꾸는가 하면, 원형질로 바뀌어요. 지난 시간에 했지만 어린애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지요. 그 어린애가 뭐냐 하면, 원형질이에요. 선도 모르고 악도 몰라요. 그냥 물컹한 아메바 같아요. 성질, 성격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원형질, 또 다른 말로 하면 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형상의 반대는 어떤 형체가 있는 구상이 되는 거지요. 구상을 해체하면 형상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 대인관계를 하게 되면 그 사람의 덩치가 있고 나도 덩치가 있으니까 서로 잘난 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의 말씀으로 와버리면 우리는 녹아져서 그동안 있던 그 경계선, 구상된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성질대로, 성깔대로 죄 짓는, 원형질 그대로, 형상 그대로 다 보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것을 가지고 성령 안, 말씀 안, 예수님이 새롭게 제시한 시공간, 낯선 현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하는 그 이사야의 고백이 나오는 상황, 그것은 주님이 주신 성령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죽인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죽인 것이 우리 몸에 와 버리면 우리가 나름대로 남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나도 인간이다.” 하는 것을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서 억지로 다듬어놓은 모든 구상의 경계선은 허물어져 버립니다. 허물어지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추락이라고 해요. 떨어지는 것, 추락.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죄라고 하는데 그냥 죄라고 한다면 고정된 어떤 장소에 안정되어 있는 것을 죄라고 보거든요. 성경에서는 그것을 죄라고 보지 않고 추락하는 것을 죄라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의 원형은 악마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게 되면, 하늘에 전쟁이 있었고 전쟁에서 쫓겨난 악마가 땅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4장 12절에 보게 되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떨어졌다는 거예요. 사람이 떨어질 때가 자기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순간이에요. 추락의 반대는 상승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10억을 벌었다. 20억 벌었다. 40억 벌었다. 그러면 점점 더 자기가 상승되면서 자기 자신은 원래 돈 40억 벌 수 있고 100억도 벌 수 있는 자격자인 것처럼 하면서 별 감동이나 감흥이 안 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어렵게 살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면 그 때는 약간 감흥을 받지만 그 다음에 계속 돈을 벌게 되면, 나는 마땅히 이런 속도로 계속 상승, 상승해야 마땅한 것으로 알아서 자기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200억까지 벌다가 졸지에 꼴아 박기 시작하면 ‘나 누구지? 한강대교에서 자살할까? 나는 이렇게는 못살아.’ 갑자기 자기존재에 외부에서 오는 강한 중력감을 느낍니다. 떨어지는 것. 떨어질 때 자기 본질의 위기를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14장 13절에 보면,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렇게 하다가도 15절에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뭐냐? 인간이 누구냐? 인간의 본질이 뭐냐, 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너는 이렇다.”라고 하지 않고 마귀의 이 떨어지는 속성과 겸해서 인간은 뭐라고 이야기해요. 마귀는 추락하는 중입니다. 어디까지? 유황불까지 추락합니다. 그런데 이 마귀가 추락하면서 혼자 추락하니까 짜증나서 인간의 손을 잡고 추락해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움직이는 모습으로 묘사될 수 있는 죄라는 겁니다. 죄는 자꾸 더 낮은 곳, 더 깊은 곳, 더 떨어질 곳을 찾아가는 것이 죄에요. 그래서 사람은 죄를 안 지으면 살맛이 안나요. 엄마가 떡을 그냥 먹으로 했을 때는 맛이 없어요. 그런데 엄마가 선반위에 떡을 올려놓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해 놓으면 그 때부터 그 애는 하루의 보람이 생깁니다. 사다리 놓고 저 선반위에 올라가서 그걸 꺼내먹을 때 오늘 하루도 보람된 하루를 살았어요. 죄를 지었으니까. 그래서 잠언서에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잠 9:17)는 거예요. 여자도 튕길 때 맛이 나지 여자가 대시하면 남자는 맛이 안나요. 튕기는 그것을 잡는 재미. 다들 해 보셨잖아요. 내가 보니 튕길만한 남자 값도 아니다만. 인간이 하루하루 사는 기쁨이라 하는 것은 하지 말라는 금지의 경계선을 넘어주는 것, 이것이 사는 재미고 보람이에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모든 것을.” 누가 소설책 제목으로 그렇게 썼잖아요. 소망이 뭡니까? 금지될 때 비로소 소망도 새로 생기는 법인데.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자기가 왜 그런지 몰라요. 마귀와 동승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동승해서 지하실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빌립보서 2장 9절에 보면, 주님이 오실 때 하늘의 영광을 자진해서 포기하시고, 반납하시고, 동등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어디까지 내려가느냐 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인간들이 가는 그 방향 따라 더 가속도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역사적 증거물이 뭐냐?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그래서 이 복음은 구라가 아닙니다. 역사적 증거물이 있어요. 무덤인데 빈 무덤이 있어요. 역사적 증거물, 이것은 하나의 종교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의 경전 같은 경전이 아니에요. 이것은 현실입니다. 안 해도 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든 말든 결국 우리는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옵니다. 좋든 말든, 절에 가든 이슬람교를 믿든 그것은 자유고. 저는 그런데 한 번도 안 가봤습니다. 제가 어릴 때 착한 아이의 모델이기 때문이죠. 안 믿지요? 롤라스케이트장에 가본 적이 없고 빵집도 깡패들이나 가는지 알았어요. 진짜 롤러스케이트장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거기서 콜라 사먹어 본적도 없고요. 거기서 목도리 두른 적도 없어요. 고깔모자 써본 적도 없고요. 왜냐하면, 착하게 살아야 미래가 풀린다는 보상심리 같은 것이 있어서. 그 때는 교회도 안다니던 때거든요. 그런데 그 롤러스케이트장, 오늘날 교회가 노는 꼬라지가 딱 그 꼬라지에요. 교회가 놀이터에요. 정치적인 이야기하고 잡담하는 곳, 취미생활 하는 곳, 소위 점잖은 신사와 숙녀들의 잡담하고 노는 곳. 옛날 18, 9세기 살롱문화. 요즘으로 하면 카페문화. 점점 교회가 카페가 되어가고 있어요. 카페가 되어가고 있는데 문제가 뭐냐 하면, 그것 하다가 후딱 해지면 어디로 가는가? 자기 집구석으로 가요. 그 집구석 뚜껑 확 열어버리고 싶어요. 왜 사람은 자기집구석을 아지트처럼 생각하느냐는 말이지요. 평소 6일내내 집에 있다가 카페교회 잠간 와서 커피한잔 마시고 다시 집으로 훌쩍 가버려요. 그러면 뭐냐? 내 동질성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살아온 내가 얼마나 귀한지 이걸 붙잡겠다는 거예요. 교회는 죄를 씻어주니까 교회 나왔으니까 죄씻음 받고 갔으니까 다시 그 다음 주에 나와서 죄 묻은 것을 털어내면 그만 아니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완전히 민망한 겁니다. 너의 그 동질성이라는 것은 네가 구상하고 네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자신은 원형질이지 남들이 다 보기에 인간처럼 보이니까 인간으로 여기는데 주님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원형질로 봐요. 하나의 형상으로, 아주 고약한 형상으로 봅니다. 죄가 펑펑 냄새피우는 형상. 원래 종교라는 것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해줍니다. 그런데 복음은 사람으로 대우를 안 해줍니다. 사람이라 는 것이 원래 없어요. 그저 죄인일 뿐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적대적 관계를 갖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은 교회 오나 집에 오나 마찬가지에요. 교회 와서 집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왔다가 집에 갔으면 집에 가서 또 죄를 지으라는 그 이야기를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집에 갈 때는 ‘이제 교회 가서 복 받았으니 모든 저주가 우리 아파트에는 안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
아파트 1층 살더라도 1층부터 19층까지 다 날라 갔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거기에는 주의 말씀이 땡볕처럼 비춘다고 생각하세요. 쉽게 말해서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살아가세요.
화면에는 화장발한 얼굴로 보이다가 붙잡혀서는 민낯을 보인 사람이 있지요. 이대 부정입학 하고 성적조작 해줘서 학점 받은 사람. 민낯 보니 많이 늙었어요. ‘아, 저게 원형질이구나.’ 갑자기 정치적 발언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제부터 좀 난해합니다.
예수님은 그 죄와 저주를 의도적으로 자기 몸에 짊어졌습니다. 그 짊어짐을 우리가 또 짊어질 때 그 과정이 뭐냐, 하는 겁니다. 짊어진다고 하면 짊어지는 겁니까? 이게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진 것을 그 다음 차례, 예수님이 짊어진 것을 우리가 또 어떻게 짊어짐으로 인수인계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짊어지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원래 있었던 창조이전의 상황을 그대로 인수인계 하는 겁니다. 태초에는 누구만 있었나? 달랑 두 분만 있었어요. 물론 세 분이지만 언약의 대상자, 성령은 언약의 대상자는 아니니까 성부와 성자, 예수님과 아버지 두 분만 있었어요. 두 분만 있으면 둘려온 환경이 뭐냐? 어두움 아니면 빛, 빛 아니면 어두움이에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창조하면서 어두움이 있었고 그 어두움에 빛이 있으라하매 빛이 있었잖아요.이 땅에 빛이 왔어요. 그러나 그 때만 빛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처음부터 빛이었습니다. 빛이 있었다. 어두움이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창조 이전에 원래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둘려 있었던 시공간이 되는 겁니다. 제가 뜸 들이는 이유가 말이 어려워서 그래요. 쉽게 하기 위해서 로마서 1장 2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장 2절에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어요. 복음이 뭐냐 하면,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서만 나타나요. 그래서 아들이 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인간이 모릅니다. 모르니까 인간들은 없는 하나님을 만들어놓아요. 그걸 물질화, 물질을 매개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그것을 우상숭배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제일 미워하는 것이 우상숭배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 우상숭배를 뭐라고 하느냐? 골로새서 강의 하면서 했지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되어 있어요. 십계명에서 제 1계명이 우상숭배에 관한 겁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열 번째 계명이 뭐냐?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십계명 전체가 하나의 계명으로 내통하고 있는데 그 내통하는 십계명을 준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의 행동은 사소한 것 하나라도 탐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탐심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탐심이 뭐냐? 우상숭배에요. 욕심을 내는 것이 왜 절에 가는 것, 우상숭배와 같은가 하면,탐심은 목적성을 가지고 방향성을 갖는데 내가 탐심에 부합되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채택하고 만들어내는 기능들이 인간에게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인간과 동반해서 추락하면서 계속해서 마귀의 심성을 우리에게 뿜어내 주는데요. 우리는 하나의 마귀의 은유가 비유니까. 그 비유가 뭐냐? 탐심, 탐욕으로 나오는 거예요. 탐욕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좋아하는 신을 내가 믿겠다는 우상숭배적 성향을 띤다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도 아닌데도 주께서 먼저 말을 건넨다는 것은 너희들만큼은 사람으로 대우해주겠다는 뜻이에요.새삼스럽게 새로운 관계를 뿜어내서. “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입니다.”이렇게 해놓고 베드로는 자기가 정답을 이야기한 줄로 착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 ‘메시아’라고 한 그것이 엉터리 답변이 되는 이유가 어디에 나오는가? 인자가 죽어야 된다는, 예수죽인 것을 짊어짐, 그것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교회에서 죄 씻어주는 줄 알고 있어요. ‘나는 나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는데 문제는 죄 때문에 천국을 못 가는데 어디 죄 씻을 데 없는가? 죄 씻는 목욕탕이 없는가? 옳지. 교회가 있구나. 예수 피로 죄 씻으면 되겠지.’라고 생각해서 “예수 믿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는 말씀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추락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거예요. 마귀와 더불어서. 베드로는 뭐냐 하면,마귀가 시키는 대로 다른 신을 믿은 거예요.
하나님이고 여호와고 명칭이야 뭘 붙여도 괜찮아요. 무조건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해요. 아들이 아버지를 유발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들이 올 때 그냥 아들만 달랑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올 때는 창세기 이전에 있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그 구조, 어떤 학자는 그것을 ‘아플라’라고 하고 그것은 물질적 구조의 접근이미지라고 설명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원형질로, 하나의 물컹한 죽으로 바뀌어버리면 그 물질구조도 거기에 맞추어서 그 원형질 되게 만드는 어떤 구조가 있을 것이고, 그 구조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어떤 행동을 조작을 못해요. 그냥 빛 아니면 어두움, 어두움 아니면 빛,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깜깜한데 인간은 물컹한 아메바같이 살아가는 것.
그런데 이것이 죄짓고 난 뒤에는 하나님 앞에서나 남 앞에서 그럴싸한 인간인 것처럼 행세하기 위해서 물질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매개로 삼아버렸습니다. 그게 뭐냐?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에요. 그 치마가 오늘날 천주교에서 보이는 신부들의 복장과 미사 때 흔드는 향 흔들어 대면서 딸랑이 하고, 루터교 같으면 절기마다 커튼 바꾸고, 목사 복장 바꾸고. 뭔가 보이는 형체, 물 뿌리고 떡과 잔, 뭔가 먹는 것, 물질성을 통해서 신과 접합을 시도하는 것. 그래서 내가 차라리 대나무나 흔들라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나무 그거나 흔들어대라고요. 차라리 그게 얼마나 우리 몸에 감각적인 자극을 주는지 몰라요. 그래서 세상적인 이 구조라 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외부에서 물리적인 어떤 진동이 오게 되면 갑자기 은혜를 받아요. 부흥회때 박수를 치는데 그냥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개병대박수를 치잖아요. 개병대 박수 쳐 보세요. 신경조직이 자극을 받아서 온 몸이 찌릿찌릿 하면서 불 받지요. 불 받으면 과거에 행했던 모든 죄들이 생각나면서 통회하게 되지요. 부흥회 때나 기도원에 가서 박수칠 때 그냥은 은혜가 잘 안와요. 뜨거운 난로 밑에 가면 더 뜨거워요. 뜨거운 불 받는 거예요. 불이 나도록 박수를 쳤는데도 불이 안 올수가 있어요. 금요철야 기도회 때 전도사가 위에는 못 올라오고 아래에서 강대상을 치면서 하잖아요. 탕, 탕, 탕, 치면서 내게 강 같은 평화, 하잖아요. 앞에 있는 물상, 어떤 매개체가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감정이입이 된다고요. 갑자기 울면서 주여, 하고 난리난다니까요. “주여, 집사주세요.” 쌍둥이 애들까지 같이 은혜 받았다고 그러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빛과 어두움 속에서는 지킬 나의 의지도 감정도 주체도 다 녹아지고 없어요. 그냥 창세 이전으로 돌아가는 겁니다.이것은 우리가 몰고 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마귀와 전쟁하는 가운데 주께서 몰고 오면서 하는 말이 “너희는 전부 다 어두움이야. 다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내가 죽음으로서 너희는 죽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빛이 오는 거예요. 창세전에 있었던 그 주님이, 빛이 오는 거예요.빛이고 생명이 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 믿고, 월급 올려주세요, 집 사주세요, 예수 믿었으니까 사업 잘되게 해주세요, 교회 부흥시켜 주시고, 선교사 많이 파송하게 해주시고, 하늘나라 확장, 확장, 전세계에 확장되게 하옵소서, 라는 그런 기도는 하나로 딱 모으면 돼요. “돈 주세요.” 이러면 될 것을 그 간단한 말을 왜 그리 빙빙 돌려서 합니까? 이 세상 뚜껑을 확 열어버리면 오글오글 마귀의 구더기들, 인간도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구더기들이 거기 쫙 있어요. 박근혜도 있고, 팔짱끼고 내려다보는 우병우도 있고……, 그 많은 구더기가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거기에 스토리가 있는 겁니다. 그 스토리가 뭐냐?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주께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심지어 마귀까지, 세상 권세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귀 옆에 있는 구더기들이 같이 동행해서 추락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가 짊어짐은 그리스도와 함께 추락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기쁜 소식 전하니 보람도 난다. 예수 믿고 추락하는 거예요. 전에는 벌벌 떨면서 추락했는데 이제는 기쁘게 추락하는 겁니다. 어디까지 추락하는가 한 번 보자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디까지 금지된 것을 넘어가는지 한 번 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진짜로 그렇게 하다가는 매 맞으면 어떻게 합니까?” 매도, 그것도 당연한 거지요. 어떤 사람이 저에게 그런 질문했어요. 함부로 까불다가 나중에 경찰서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경찰서에 가게 해주신 경험이 얼마나 감사한데요. 그러다가 사형당하면? 사형당하는 경험이 얼마나 감사한 경험인데요? 죄는 지어놓고 벌은 안 받겠다고? 그 무슨 얍삽한 소리 합니까? 죄 지었으면 벌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요. 벌 받는 그 재미. 가족들 완전히 파탄나면? 파탄 나는 재미.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진다는 말은 일부러 죄 짓는다는 말로 이 설교를 오해하지 마시고 주께서 죄 짓게 하도록 할 때 죄 짓기 바랍니다.
죄 짓는 항목을 제가 말씀드리면,고아원방문, 심방, 성경 쓰고 더 읽기, 기도하기, 이런 겁니다.헌금하기, 이런 것이 바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추락의 장소에요. 헌금하면서 ‘아, 이게 죄구나.’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에 의존교회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자기가 어떤 할머니를 도와줬다. 쌀가마니 던져줬고 몰래 용돈도 줬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그걸 종자돈으로 해서 전기담요 사서 따뜻하게 겨울을 났다. 그것을 내가 했으니까 내가 알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길 가다가 그 집 앞에 서서 이 집은 내가 전에 도와줬던 집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에게 들켜버린 죄 짓는 순간입니다. 이게 생명 안에서 원없이 추락하는 순간이에요. 뭐든지 하면서도 이것은 주께서 주의 힘주신 대로 하신 겁니다. 그 속에서 나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으로 드러나고 주님의 생명으로 하여금 너는 이래서, 이래서, 이래서 죄인이니까 나는 벌써 너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와 사건으로 우리는 전세계를 빛과 어두움이라는 아플라,두 개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성령을 준다는 것은 돈을 더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안목을 주는 거예요. 그럴 때 죄씻음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고, 목욕탕에 가서 죄를 씻는 식이 아니고, 아, 이걸 위해서 주께서 지금도 한 번 죄 씻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이 죄씼음에 대해서 오늘도 감사하고 내일도 또 감사하고 매일처럼 우리로 하여금 착한 짓 하는 나쁜 짓을 하게 만드는……, 말이 좀 어려워요. 거룩하게 만드는 몹쓸 짓을 하게 만드는 일을 또 하게 하시는구나. 항상 민망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말씀 앞에 민망하게 살아가야 돼요. 자기 딴에 도와줬지만 성경에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하는 그 순간에, 나이키 신발 사준 것이 갑자기 후회가 되면서 “먹는 것과 입는 것 도와줬는데 신발 정도는 주여, 봐주소.” 이렇게 까불다가는 “아직도 네가 덜 추락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4)
옛날에는 마귀의 아바타로서, 마귀의 은유로서 원형질 주제에 인간인양 행세했다면 이제는 주님의 비유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증거인으로서 예수님이 주체로 살아 있지 내가 단독으로 살아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을 마음껏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닙니다. 제발 토굴 만들지 마시고, 교회는 남의 동네고 우리 집은 우리 집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교회 가나 어디 가나 항상 주께서 뚜껑을 활짝 열어 제켜서 뚜껑 없이 비오면 비 다 맞고 눈 오면 눈 다 맞듯이 항상 말씀을 위에서 부여받아서 주님 말씀 앞에 민망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기계처럼 죄 지은 것 가져오고 알아서 반성하면 죄 씻어주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감격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사오니 주께서 어디에 집어넣더라도 거기서 주의 용서하신 그 사죄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