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56강-광야의 그리스도(고전10;1-4) 15083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9. 1. 08:03

2015-08-30 12:39:55 조회 : 150         
   광야의 그리스도150830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광야의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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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8-30 13:33 
광야의 그리스도

2015년 8월 3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1-4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사도 바울이 평범하지 않는 말을 던집니다. 우리네 일상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들어보기는 하지만 우리네 존재를 스스로 꾸려나가는데 있어 전혀 호응되지 못한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반석(돌)이 어떤 인물이라는 주장을 사도 바울이 합니다.

어떻게 돌(반석)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니, 왜 굳이 특정한 돌이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로서 일반인들이 이해하는 세계와 그렇지 않는 세계가 따로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는 반석 사건을 경유해서 세상을 보는 이와 그렇지 않고 세상을 보는 이는 따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됩니다.

사람들이란 자기 존재로부터 모든 의미가 나아가서 세상을 판단하다가 그 손익관계를 따져서는 자기 존재로 귀환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들의 자기 존재위주로 사는 입장에서는 항상 인간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석→그리스도’가 되는 식에 의미가 모아집니다. 인간들이 예상한 모든 하나님의 일은 그것마저 자기에게서 나오기에 그리스도에게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 됩니다. 이런 경향이 소위 “나 구원을 위해 성경보기” 경향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 구원에 신경썼다면 선악과 따먹고 난 뒤 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하시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시고, 그 만드신 나라를 친히 멸망시켜버리고 맙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말씀은 인간 위주로 해석해서는 틀린 답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도 그리스도요 심판주마저 그리스도가 됩니다. 즉 ‘나’라는 인물을 위하여, 혹은 ‘나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의 구원기능’을 위하여 세상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구원기능은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이런 세상 안에서 ‘나의 존재’로부터 의미를 발산하는 것은 모두 오류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유월절 어린 양 죽음사건’, ‘홍해 갈라짐 사건’, ‘만나와 생수가 광야에서 제공되는 사건’ 말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육 위주로 살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위주로 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 어린양 사건과 그 이후의 전쟁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싸움에서 도리어 ‘죽은 것’이 ‘산 것’을 이기는 경우들을 말해줍니다.

즉 이스라엘의 장자는 더 이상 자기 가정에 속한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장자가 됩니다. 육에서 영으로 이동은 죽음 사건으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 안에는, ‘자기를 위한 살기’가 죄와 저주받을 이유가 될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이 함께 동행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더 이상 존재로 살 수 없고 사건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그들 자체가 ‘홍해 세례 사건’이요, ‘반석 사건’이요 ‘만나 사건’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건을 유발하게 된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계속해서 사건을 일으키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들만이 ‘반석=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홍해-광야-약속의 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홍해를 건너왔다는 말은, 이제 구원의 여정에서 처음 믿었다는 말이고, 광야를 거친다는 말은 나라는 존재의 구원을 위해 성화(聖化)의 과정을 겪는다는 말이요,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말은,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에 입성한다는 말이다”는 식으로 오해합니다.

소위 ‘구원 그 이후’가 따로 성립된다는 식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광야는 우리 존재를 위하여 설치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왜 우리 존재, 즉 날마다 천국과 영생을 원하는 나라는 존재는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죄인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광야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 성도들이 자기 존재를 삭제당하고 오직 사건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만나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나 사건은 우리네 인생을 하루 단위로 절단시키는 사건입니다. 존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용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내일은 결코 오늘의 나의 소관과 여망이 미치는 시간대가 아닙니다. 광야에는 시간이 멈추고 우리네 존재는 정지 화면 속애서 고정체로 다루어집니다.

40년을 하루 같이 계산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기 존재를 기초로 해서 자기 미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다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은 오직 ‘어린양의 가치’만 높이고 드러나는 세상입니다. 인간 존재는 거기에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위한 구원’을 제거하기 위해 광야는 썩어짐의 이유가 바로 인간 존재 자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루치’ 이상의 만나를 가져오게 되면 만나는 벌레가 일어 썩게 되어 있지만 신기하게도 안식일을 앞두고 이틀치 만나를 가져와도 벌레가 일지 않고 말짱합니다. 이는 인간 존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나타나야하기에 썩어 마땅한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성도는 썩어가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해서 자신들이 썩어죽어야 될 마땅한 이유가 ‘원망’이라는 모습으로 남발되고 있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물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 없다고 원망합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합니다.

이런 원망들의 바탕에는, “나는 오직 나의 존재만을 위해서 이 현실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불신자의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나오듯이 모든 현실적 의미는 오직 예수님의 존재에서 터져나옵니다. 더 이상 구원받을 다른 존재는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이 모여 오직 하나 ‘그리스도 몸’을 구성합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과 지옥마저 주님의 일방적 기능을 반영하기 위해 준비된 영역이며, 인간들로서 다른 가능성이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8-31 21:37 
54강-고전 10장 1-4(광야의 그리스도)1508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1-4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이란 말은 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분은 어떤 인물, 사람이지요. 그런데 돌이 인물이고 어떤 인물, 아저씨, 어떤 남자가 지정된 구원의 돌이 된다는 것, 그게 참 신기하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바로 보내시면 되는데,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바로 직접 예수님이 투입되어서 아담은 건져내면 되는데 왜 아담 이후에 이스라엘 만드시고, 만드신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뒤늦게 예수님을 투입시키느냐는 그 말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구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누구시며 마지막 심판주가 누구시며 구원자가 누구신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그만큼 간격을 두신 거예요. 세상 전체가 우리 구원을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의 기능, 예수님이 하신 일, 그것을 위해서 천지가 창조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한 이 창조현실에 있어서 나를 위해서 따로 챙기겠다고 시도를 하게 되면 이것은 반칙이 되는 겁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뭘 해보겠다든지, 나의 영생, 나의 천국행을 위해서,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성경을 본다든지 뭘 하겠다는 그 자체가 반칙이 됩니다. 잘못된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그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돼요. 따라서 여기서 반석, 반석이라는 말은 잘 쓰지도 않으니까 그냥 돌이라고 합시다. 그 돌이 사람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우주, 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이 주인공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사람을 ‘빼기’ 합니다. ‘사람빼기’ 사람이라는 인식자체를 빼는 작업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야고보서 2장에 유명한 말이 나오지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억수로 유명한 말씀이에요. 거기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이야기하면서 거기에 대한 적절한 예를 두 가지 들었는데 그 예를 보자는 말이지요. 대체 무슨 행함이 참 믿음에 부합되는, 참 믿음에서 나온 행함인가? 그게 뭐냐? 기생라합이 거짓말 한 것이고 조국을 배신한 거지요.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행위, 이게 믿음에 합당한 행위에요.



이것은 아브라함이나 기생라합이 사전에 ‘나는 거짓말해서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예측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식 보자마자 ‘넌 언젠가는 내 손에 죽을 거야.’ 이런 식으로 노리고 들어간 게 아니거든요. 자식 눈에 띄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이런 식으로 평소에 산 것이 아니고 너무나 사랑했던 자식인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식을 번제로 태워서 내게 바쳐라.”라는 지시를 했고 아브라함은 그 지시에 따랐습니다.



예상 못한 돌발적인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에 합당한, ‘이 행위를 봐서 나는 믿음이 있는 것이 맞아.’라고 정립이 되는 그 행함은 우리 자신의 인간됨을 빼기, 우리 위주, 우리 잘남 위주의 모든 것을 삭제시키는 행함으로 나타나는 행함입니다. 내가 잘했다, 내가 의롭다, 나는 믿음 좋다, 라는 것은 전부 다 지워버리는 쪽으로 행함이 나온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참 행함 있는 믿음,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행위로 말미암아 행위자인 나를 도로 인간 만들어주는 그런 행위라면 그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서는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귀신이 행하는 행함, 마귀가 행하는 행함과 참 성도가 행하는 행함이 달라야 된다는 겁니다. 마귀가 행하는 행함은 반드시 행동해 놓고 거기서 자기의 자존심으로 회수가 돼요. “하나님, 저 잘났지요? 저 봉사가 많이 하지요? 제가 억수로 주님 사랑하지요?” 이런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 마귀의 일, 귀신의 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음에 의해서, 성령에 의해서 준 참된 행함은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질문을 자기한테 하게 해요. “하나님, 제가 꼭 이렇게 살아야만 되겠습니까? 왜 저는 이런 식으로 꼭 살아야 됩니까? 그동안 내 인생이라고 여겼는데 이거 분명 내 인생 아니지요? 주님이 주물럭대는 인생 맞지요? 이건 내가 원하는 인생코스가 아니거든요. 하나님!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 이런 식으로. <국제시장> 마지막 대목처럼. “저 정말 힘들었거든요. 왜 자꾸 제가 예상한 것을 어긋나서 가게 하십니까? 자식 죽이는 그 독한 아버지가 왜 하필이면 제가 되어야 합니까?” 또는 “제가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합니까? 적의 스파이를 숨겨주고 거짓으로 경찰을 따돌리는 그런 일을 해야만 왜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되는 겁니까? 왜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우리하고 사전에 어떤 동의나 의견조율이 안 되는 겁니까?”



그것은 모든 구원이라는 것이 나 하나 건지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이 세상의 창조주와 심판주,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만 돌아가야 된다는 그 사실을 열매로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피조물로 만들어진 겁니다. 교회 온다는 자체가 참으로 수상해요. 수상도 하고 참으로 위험한 겁니다. 교회 온다는 것이 잘못된 선택일 수가 있어요. 흔히 우리가 하는 내 중심의, 내가 사는 세상이라는 그것, 내가 사는 세상, 건전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 광복 70년, 앞으로 선진조국을 내다보는 그런 세상, 매스컴에서 이야기하고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그 정도로 이 세상은 고만고만한 세상이고 그럭저럭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행복한 세상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면,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누구 하나 놓쳤다고, 어떤 인물하나 놓쳤다고 세상권력이 총 궐기해서 집중해서 시행하는 행함이 있는데 그 행함은 “아기 예수를 놓치지 말고 죽여라.” 그것이 이 세상 성향, 성질입니다. 지향성, 방향성,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하지요.



이 세상은 어떤 성격이 있는데 그 성격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고 제거하는 것, 복음을 없애는 것, 복음을 아는 사람을 사전에 없애는 것, 그런 쪽으로 이 세상 경향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6절만 제가 언급했지만 요한계시록에 보면 굉장히 노골적으로 그런 경우들이 많이 등장해요. 이 세상전체가 한통속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거하는 일에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는지 알아요? 그게 아닙니다. 세계평화에 총력을 다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우는데 총력을 다 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세상이 ‘뭐 어때서? 이만하면 되었지. 행복한데 뭐? 여름 지나서 가을 오면 이렇게 선선하니 살만하네.’ 이렇게 살면 된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이 십자가의 원수 된 세상아!”(빌 3:18)라고 해요. 세상을 표현할 때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으면 “십자가의 원수.” 그게 정답이에요. 십자가의 원수 된 세상.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고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 대로 얻는다는 이 공산주의 사상, 엥겔스와 레닌이, 스탈린이 그렇게 주장했던 공산주의 사상, 마르크스는 단지 힌트만 줬던 그 사상, 그 사상에 많은 노동자들이 혹했습니다.



그런데 능력대로 일하고 필요한대로 마음껏 쓴다는 그것이 예전 러시아공산당의 모토만이 아니고 전 세계의 모토에요. 쉽게 말해서 내 생존에 납득이 되면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이 뭐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이런 것도 나왔잖아요. 이 세상이 뭐가 어때서? 오늘 우리가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보면서 신자라고 여기지 말고, 신자가 진짜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불신자로 여깁시다. 불신자로 간주해서 이 본문을 보자는 말이지요. 보면서 딱 느낌이 뭐냐?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요? 우리가 뭐가 어때서? 이 성경을 우리가 꼭 봐야 해? 이 성경 덮어버리자. 고린도전서 10장 1-4절을 왜 봐야 하는데? 볼 이유가 뭔데? 세상이 뭐가 문제인데 우리가 이걸 봐야 되는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우리가 아무 하자도 없고 문제도 없는데 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은 반석이라는 돌, 물질을 가지고 그리스도라는 어떤 인물, 구체적으로 지정된 인격과 일치시키느냐는 말이지요. 왜 사도바울이 하는 이런 이야기를 구태여 우리가, 이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밥 먹고 살기 바쁜 이때에 꼭 들어야만 되는 말이 되는지를 납득되도록 설명해보라는 말이지요. 전혀 필요치 않는 이야기를 지금 늘어놓고 있잖아요. 전혀 필요가 없는데. 이거 듣는다고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왜 필요합니까?



면접 보는데 “당신이 우리 회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반석은 그리스도십니다.” “??? 땡, 탈락!” 선보러 가서 “반석은 그리스도십니다.” “???” 고린도전서 10장 1절-4절은 반석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경유하지 않는 사람은 대화되지 않는 그 사람들을 제켜놓고 ‘반석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경유한 사람들만 아는 말씀을 사도바울이 준 거예요. 구약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요,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이스라엘 집단 내에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말씀이라는 것이 그냥 흔히 말하는 소통하는 언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과 사건에서 유발된 말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 사건이 나오지요? 하나는 홍해사건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신령한 음식을 먹었으니까 신령한 만나사건, 그리고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까 신령한 반석사건. 이 세 가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이야기, 그게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이것은 불신자 색출작전의 일환일 수가 있습니다. 교회 나왔다고 신자 아니거든요. “여기서 신자 아닌 사람 나가주세요.”라는 말씀으로 쓰이는 것이 오늘 본문이에요. 돌멩이가 무슨 사람입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너는 사건을 몰라. 홍해사건, 홍해에서 다 같이 세례 받은 사건을 모르고, 신령한 음료 모르고, 신령한 음식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 신령한 음식과 홍해사건이 반석이라는 최종적 대표사건, 의미를 제공하는, 의미의 출처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 그리스도에서 나온 그 의미로 우리는 살고 있다는 사실을 네가 모르니까 같은 한국말을 써도 ‘뭔 말이냐 이게?’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만나 자체의 뜻이 뭐냐 하면, ‘이게 뭐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그 뜻이에요. 그게 만나에요. 주우면서 ‘이게 뭐지? 대체 뭐야?’ 해서 그게 ‘만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이야기할 때에 상당히 난해하게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 본문을 보는 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가 일단 유보적이거든요. 누군지를 몰라요. 이 말씀을 경유해야 됩니다. 경유하기 전에 대기상태에 있을 때는 신자인지 아닌지를 모르기에 이 말씀 자체가 엑스선을 찍듯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신자인지 불신자인지의 두 가지 결과를 내놓아요. 따라서 이 말씀은 신자로서 보는 해석과 불신자로 보는 해석, 이 둘 다가 나오는 해석이 제공되어야 됩니다. 광야에서 색출해서 탈락을 시키는 사건의 말씀이니까.



그러면 불신자가 보는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홍해를 건너왔을 때 하나님께서 일단 구원해주셨다. 그 다음에 광야를 지나면 구원 그 이후가 된다. 세 번째, 요단강 건너가면 진짜 구원이 된다. 이것이 불신자들, 지옥 가는 사람의 해석입니다. 왜 지옥 가는 사람의 해석이냐? 광야라는 것을 지나가는 코스로서 이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지나가요? 본인이 지나가는 거예요. 본인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물에 들어갔는데 ‘아이고 살았다. 광야에서 고생 깨나 했다. 요단강에 들어갔는데 제사장이 앞서서 물을 막아주니 우리는 요단강 건너서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뭘 하나 놓친 것이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 죽었어요.



6개월이면 갈 수 있는 땅을 왜 40년간이나 뺑뺑이를 돌았는데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사람 자체를 제거해요. 사람 자체를 제거해야 만이 이 공간, 홍해, 광야, 요단강, 이렇게 지나가는 공간을 시간이 흐르면 흘러가는 대로 그냥 타박타박 걸어가면 된다고, 그냥 지나가면 지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어떤 시간적인 흐름,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거든요. 그것을 제거해버려요. 제거해버리면 광야는 정지화면이 되는 겁니다. 비디오 보다가 스톱, 누르면 정지되잖아요. 광야는 정지화면이에요.



정지화면이 되게 되면 거기는 소금기둥이나 돌처럼 인간은 그 자리에 딱딱하게 고정이 되어버립니다. 애들 노래에 그런 게 있잖아요. “그대로 멈춰라!” 하면 딱 굳어지는 놀이가 있잖아요. 스톱이 되면서 존재는 날라 가고 전체가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구원 받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 자체가 홍해사건이 되어라.” 우리 인간보고 사건이 되래요. “너는 만나사건이 되어야 되고, 너는 신령한 생수를 먹는 사건이 되어야 되고, 네가 하나의 사건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반석사건, 돌에서 물이 나온 사건이 나중에 새롭게 너희들이 예상 못한 새로운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가 왜 인생을 힘들게 사느냐 하면, 내가 하나의 사건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내 인생을 따로 갖춰야 된다고 여기니 우리는 몇 년을 더 살아도 힘들어요. 40살에 직장생활 하면서 ‘60되면 연금 받고 편히 살겠지.’ 60되어 보세요. 편하던가요? ‘70되면 편하겠지.’ 온 몸 안 아픈 데가 없을 건데요? ‘80되면 안 아프겠지.’ 80되면 정신이 없는데요?



자기 자신은 하나의 인물이고 변하지 않고 주변의 풍경이 변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 위주로 변해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를 홍해에서 끌어내고, 나를 광야에서 무사히 건져내고, 요단강에서 무사히 끄집어내서 약속의 땅에 가게 한다, 라는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 그게 바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람들의 광야 해석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해석해요. 모든 인간이 다 엉터리라 그 말이에요. 자기위주로.



그래서 유명한 책이 있지요. <구원 그 이후>라는 박영선 목사가 지은 책이 있어요. 그게 바로 잘못된 거예요. 거기서 성화론이 나와요. 그것은 마귀적인 해석입니다. 성경에는 성화론이라는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없거든요. 내가 없는데 무슨 내가 거룩해진다는 게 있어요, 내가 없는데. 우리는 뭐냐? 우리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니까요? 무슨 사건? 우리는 내가 되면 안돼요. 우리는 그리스도가 돼야 돼요. 그리스도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는 사건으로, 반석이 그리스도 되는 사건에 참여된, 그 사건의 일부로서 동원된 거예요.



그래서 너의 사건, 나의 사건, 모든 사건들이 모여서 오직 하나의 존재, 그리스도 몸이라는 존재, 그것만 만들어지면 돼요.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몸이 되고. 산다는 게 사건이에요. 내가 내 인생 계획하고 꾸며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치열한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내가 살기 위한 내 사건이 아니고 나는 없으니까 내 사건은 없고 주께서, 그리스도가 너를 살려준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주께서 유발시킨 사건에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은 내 구원과는 상관없지요. 내가 없는데 무슨 내 구원이 있습니까? 다만 이런 사건들은 그리스도가 왜 반석이고 왜 구원인가 하는 것, 왜 그리스도의 구원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면서 홍해를 건너게 했고, 광야 지나게 하고, 그리고 약속의 땅에 집어넣은 겁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우리하고 모든 성향이 똑같은 인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니까 하나님이 마치 자기 자신을 좋은 곳에 살도록 해주리라고 오해를 한 겁니다. 멋진 곳에 자기를 살게 해준다고 오해를 했어요.



그런데 그게 오해된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정말 행복하고 편하게 살게 할 것 같으면 구태여 젖과 꿀이 흐른다는 그 먼 땅에 여행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애굽나라 있잖아요. 애굽나라 정권 바꿔서 히브리인이 대통령 하게 하면 되잖아요. 능력 많으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열 가지 재앙 왕창 부어서 애굽을 종으로 삼고 종으로 부림을 당하던 히브리인들이 쿠데타 일으켜서 왕이 되고 지배자가 되어서 그동안 당했던 설움을 다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고 귀족처럼 누리면서 살면 이것이 얼마나 멋진 세계입니까?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신음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기도내용이 그거예요. 못살겠으니 편하게 살게 해달라는 그거 기도한 겁니다. “이 나라 말고 다른데 가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내용은 요만큼도 들어있지 않았어요. 기도를 해도 꼭 자기위주로 기도해요. “나만 잘되게 하옵소서. 나만 행복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네가 뭔데? 네가 황무지에 비오는 이유를 아느냐? 네가 별을 만들었느냐? 세상의 주인공은 따로 있고 너는 주인공도 아닌데, 이 세상의 창조자도 아닌 네가 왜 창조주 신인 듯이 행세를 하느냐? 네 주제파악도 제대로 못했구나.” 분명히 이런 책망이 주어질 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항상 응답을 염두에 두고 기도를 해야 돼요. 빡세게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응답을 받아야 돼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지금 엉덩이가 아픈데 어떻게 합니까? 낫게 해주셔야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요. “그거 나아서 뭐할 건데?” “제가 낫게 되면 주께 영광 돌리고 다만 몇 명이라도 더 전도하겠습니다.” “전도해서 뭐할 건데?”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가지요.” 천국은 그렇게 만드는 법이 없고, 그렇게 만든 적도 없고 그런 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거든요.



너만 죽으면 천국은 차질 없이 잘 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텐데 괜히 지금 잘 되고 있는 천국에 네가 하나 눈 딱 뜨고 있으니까 누가 천국을 방해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지금 하나님 일을 방해하고 있어요. 너만 없으면 잘 돼요. 나만 죽으면 일 잘되는데 내가 살아놓으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생라합으로 하여금 거짓말 하게 했고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자식을 바치게 한 겁니다. “네가 살아 있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어떻게 진행되는지 한번 참여시켜봐 줘? 네 자식을 바쳐라.” 이거거든요.



우리는 예상을 해도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예상하거든요. 그래서 항상 우리가 예상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과 반대가 돼요. 왜? 나 잘됨을 기본설정으로 깔아놓기 때문에 문제가 된 거예요. 존재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뭐로 만드는가? 광야를 쪼개서 하루치를 만들어요. 일회용을 만들어요. 그게 만나사건입니다. 만나사건의 특징은 뭐냐? 이틀 치의 양식을 준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사는 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게 속한 문제라는 겁니다. 네가 살고 죽고 하는 문제는 내가 필요하면 더 살려주고 안 필요하면 오늘로서 마감시키고, 그러한 권한은 주님한테 있는 겁니다. 왜? 주님은 반석에 도착해서 그리스도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광야를 준비했는가? 처음 홍해를 건너오기 전에 무슨 사건을 하나 일으켰지요. 어린양을 잡는 사건입니다. 어린양을 죽이는 척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죽어버렸어요. 어린양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전쟁은 이렇게 된 겁니다. 산자가 이기는가, 아니면 죽은 자가 이기는가의 싸움이에요. 죽은 사람이 칼을 들고 활을 쏘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설치면서 “나를 따르라!” 하겠습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죽은 어린양이 승리하느냐, 아니면 살려고 애쓰는 애굽인과 히브리인들이 이기느냐의 전쟁에서 죽은 어린양이 승리했습니다. 죽은 자가 승리한 거예요. 이것도 우리가 예상 못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장자만 구원 받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장자만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장자는 없어지고 이스라엘 장자가 여호와의 장자로 바뀌어야만 그들만 구원받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장자가 구원받고 이스라엘 장자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장자 중에서 여호와의 장자로 바뀌어야 구원받습니다. 바뀌는데 그냥 맨숭맨숭 산채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모든 일에는 원인, 이유가 있기 마련이에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을 잡는 이유는 “네 혈육, 네 가족에 속한 네 장자를 하나님에 속한 장자로 바꿔치기 하는 데는 약속된 분의 대신 죽음 없이는 성사되지 않는다.”는 방정식, 공식을 만들기 위해서 어린양을 잡은 겁니다. 이 몸이 천국가요? 그냥 가요? 안 됩니다. 공식에 맞아야 되요. 내 대신 누가 저주를 받아야 돼요. 누구 대신 죄 값을 치러야 되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잖아요. 따라서 복음의 내용으로 연장해버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물음은 이래야 돼요. 그게 복음이라고 동의하신다면 이렇게 나와야 해요. “하나님이여, 왜 나는 죽어야 됩니까?” 이런 질문이 나와야 돼요.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내가 왜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 답변은 이렇습니다. “모르겠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내가 너를 데리고 광야로 집어넣어줄게. 광야에 가게 되면 네가 죽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이제는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어린양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동행하시면서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왜 내가 내 존재를 앞장세워서는 안 되는가를 계속해서 상황과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 역할을 하면서 동원된 것들이 사건이에요. 많은 사건인데 만나사건 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시간관념이 있으니까 ‘몇 년 뒤에는 뭘 하겠다.’는 이것을 만나 사건은 하루치로 잘라버리지요.



주기도문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게 출애굽에서 나온 거예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루치만 달랑 주어져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호텔 같아요. 24시간이 되면 체크아웃 하고 나가야 돼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호텔이에요. 24시간 지나면 체크아웃하고 나가야 돼요. 24시간이니 이것은 존재라고 할 수도 없어요. 산다는 것이 하나의 사건이에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오늘도 내가 사는 사건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이렇게 삽니다.”라는 사건과 사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 만나가 보여주는 것은 일회용으로 자르는 겁니다. 하루치만 준다는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바로 매일같이 왔고 사람 인원수대로 양을 정하는데 하루에 한 호멜씩 준다고 되어 있어요. 호멜은 2.2리터고요. 그것이 안식일에는 두 호멜, 일인당 4.4리터씩 줘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광야에 가게 되면 기존의 불신자의 인식도 같이 간다고 했지요. 불신자의 인식이 뭐냐 하면, 나는 사건이 아니고 존재다, 그 말이지요. 세상 모든 것은 날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것. 내가 살기 위해서 세상은 있다는 그거잖아요.



이런 식으로 광야를 가는데 배고픈데 만나가 왔다. 분명히 한 호멜, 2.2리터만 거두라고 했는데 엄마 마음이 그렇습니까? 아줌마들이 막 “내꺼야!” 하면서 잔뜩 모아놓았어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거기에 벌레가 나고 썩어버렸어요. 여기서 중요합니다. 썩는다는 것, 우리가 나이 많아서 썩는다는 이것이 주께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건입니다. 늘어진 볼테기 살을 잡아 당기고 올려붙이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백날 애를 써도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게 그리스도의 사건이에요.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리의 존재를 살려주지 않습니다. 썩는 사건에 휘말려서 죽여 버립니다. 죽이고 썩게 하시는 그분에 의해서 뭐가 나오는가? 썩는 것과 동반해서 새롭게 살게 하는 사건이 주어져요. 썩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롭게 살게 하고. 한 사건 안에 이 두개가 다 들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하시는, 죽이시는 작업에 동반해서, 죽이시는 작업과 더불어서 살게 하는 작업이, 그러니까 우리를 썩게 하는 작업이 곧 우리를 살게 하는 작업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 우주가, 온 세상 자체가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자신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활발하게 지금 움직이고 변화되고 있는 겁니다. 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신의 자기존재,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을 위해서 세상은 있는 거예요.



믿음의 단계가 있는데 일단 소명이 있고 그 다음에 중생하고 회개하고 그 다음에 믿고 난 뒤에는 칭의가 있고, 그런 것은 다 불신자들이 만든 거예요. 그게 개혁주의 구원관이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마귀들이, 귀신들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거 없어요. 그렇게 하려면 절에 가서 도 닦으라고 하세요. 개혁주의 주장하는 교수들 앉아 있으면 전부 다 귀신들 앉아 있는 거예요. 일체 ‘나’라는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라는 것은 썩는 과정 속에서 ‘왜 나는 이렇게 썩어야 되는가? 아하, 내가 자꾸 썩으면서도 내 존재를 움켜쥐고 집착을 하고 애착하고, 세상은 망해도 나는 안 죽어야 된다는 이 지독한 자기애, 자기 사랑…….’ 썩으면서 썩는 이유를 우리 존재를 통해서 마음껏 발산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광야에서 양식을 안줘요. 시원한 물을 주지를 않습니다. 적들이 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군데군데 나오는 것이 원망, 원망, 원망할 뿐이에요. 양식 없어 못 살겠다고 원망하고, 물이 없어서 못 살겠다고 원망하고, 피곤하다고 원망하고, 벌레 있다고 원망하고, 아말렉 쳐들어왔다고 원망하고, 모든 것이 원망밖에 없어요. 그 원망한 것을 만나에 담았습니다. “‘누가 원망해?’ 라고 할 때 ‘제가 원망했습니다, 제가!’라고 하는 어떤 존재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 그거, 네가 너 아니거든?”



만나를 많이 모으게 되면 만나에서 벌레가 일고 썩어버려요. 썩고 벌레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썩고 벌레가 나올 때 그 만나 줬다는 것이 우리 눈에 사건이잖아요. 만나만 사건이 아니고 네가 지금 사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썩어가고 있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너도 사건, 너도 사건, 너도 사건, 오직 사건이 아닌 것은 뭐냐? 이런 사건을 유발하는 예수 그리스도, 반석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사건으로 합류될 때에 우리는 영생을 얻는 거예요. 내가 이 생명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생명으로 저쪽으로 건너갈 수가 없어요. 이 생명은 썩어야 돼요.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열매가 맺히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 땅에 벌레의 기능,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부 다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빛 남, 영광과 찬란함, 그 광택, 그 눈부심을 위해서 그리스도 빼놓고 다 죽어야 돼요.



그리고 악한 천사는 지독하게 지옥에서 벌 받아야 됩니다.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쩔 수 없어요. 성경에 나오니까. 마가복음 9장 47절에 보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예수님의 기능이 버리심과 찾으심, 이 두 가지 기능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도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지옥 아니면 천국. 이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내 존재가 정한 것이 아니고, 내가 미리 예상해서 정한 것도 아니고 우리는 그냥 피동적으로 주께서 벌이시는 일에 결과로 참여될 뿐이에요.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마가복음 9장 48절에, 지옥을 설명하는데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데 구더기가 하는 일은 썩는 기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기계가 구더기거든요. 하나의 기계 같아요. 맹목적으로 무조건 그 대상을 썩게 만드는데 그냥 천사처럼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 같아요. 그 기계의 작동이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는 거예요. 에너지도 무한대라, 멈추지 않고 계속 썩게 해요.



욥이 자기 몸을 통해서 경험한 것이 벌레와 썩어짐을 경험했습니다.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옛날 군사들의 갑옷 입잖아요. 옷 말고 또 껴입듯이 지금 욥은 어떤 고난을 받느냐 하면, 자기의 피부가 속살에서 붕 떠가지고 피부가 갑옷처럼 되었는데 그 갑옷이 무엇인가? 구더기가 갑옷이 되었고, 그 다음에 가죽이 합했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그런 지경에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지옥에 퍼붓는 무서운 죄에 대한 저주, 죄에 대한 진노와 분노, 하나님의 화풀이, 이것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지금 경험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을 줘놓고 어떤 인간도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받아요. 그 저주가 어느 정도냐? 그것은 너희들이 인생 살면서 그것을 경험하라는 거예요. 제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이 세상이 어때서? 여름 지나서 가을 오니 시원하고 살만한데요. 평소대로 살면 되는데 인간 세상이 뭐가 그리 잘못되었다고 지옥인가? 문제없다.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고린도전서 10장 1-4절을 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이 세상은 나를 위한, 내 존재를 위한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존재가 있어요. 반석, 돌인데 그 돌이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의 사건화되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 본문 자체가.



어떤 사건? 홍해에 빠져죽는 사건 되어야 되고, 원망했는데도 불구하고 원망하는 사건과 원망에 대비해서 만나 내려주는 사건, 더 먹고 싶다고 쟁여놨다가 썩어문드러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그런 사건의 일부로서 우리는 정지화면 속에, 스톱된 화면 속에, 나 나름대로의 어떤 미래나 소망이나 계획 같은 것이 일체 용납되지 않고 다 쪼개진 인생, 하루치를 기준해서 다 낱낱이 쪼개진 인생, 그 카스테라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다 하나하나 사건이 되는 거지요. 내가 사건 된다고 하지 말고 그냥 사건뿐이에요. ‘나’라는 말도 붙이지 마세요. 그냥 사건의 모임, 네 사건, 내 사건, 김 사건, 최 사건, 사건들이 모인 거예요.



그걸 이어붙이지 마세요. 기억이요? 추억 말입니까? 여러분, 온전한 기억은 없어요. 지금 기억하는 그 기억은 조작된 겁니다. 온전한 기억이라는 것은 없어요. 스스로 자기를 속이지 마세요. 위장하지 마세요. 과거의 경험이 기억이 될 수가 없어요. 과거의 경험은 경험이고 지금의 기억은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자랑질 하려고 조작된 겁니다.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남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편집한 거예요. 위장술이고 사기입니다. 내가 썩어지면서도 안 썩는 척 하는 거예요. 떡칠을 해보세요. 그게 안 썩는지. 분칠 내부에서 구더기가 생기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말씀으로 봤습니다. 이 말이 뭐냐? 이런 사건이 존재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썩어지는 사건과 살리는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말씀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운데 쉽게 해서 약속으로 주는 겁니다. “너희들은 내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하루하루 사건 화된 상태에서 살아가야 돼.”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집단이 바로 옛날 멸망한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성도라는 집단입니다. 사건들의 모임이에요.



그 안에서 성도는 매일같이 홍해사건을 경험하고, 음료사건을 경험하고, 음식사건을 경험해요. 어떻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원한 음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족들이 무탈하게 사는 것도 주께서 주신 사건 맞지요? 제가 알거든요. 다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을 경유해서 어린양에 대한, 하나님께서 육신의 자식을 하나님의 장자로 바꾸는 작업으로 인하여 벌어진 사건 속에 우리 가족이 이렇게 말려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이 세상에 유일하게 활동성 있게 움직인다는 사실, 그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내부에 육이 있기에 “하나님이여, 충성을 다했는데 이게 뭡니까?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또 돌아서면 자기 존재 챙기는 쪽으로 나와요. 안 돌아섰으면 좋겠어요. 문 열고 돌아서면 육이 또 나와요. 앞만 보면 되는데 뒤 돌아보면 또 다 마찬가지에요. “나한테 주께서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기존재가 또 나와요. 그 때 주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사건을 또 준비해 뒀습니다. 얼마나 고마우신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우리 예상이 빗나가서 나의 인생설계도가 완전히 묵사발 될 때에 ‘아, 차라리 죽는 것이 제일 편한 것을 왜 진즉에 몰랐을까?’



여러분, 죽는 게 제일 편해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편해요. 살게 되면요, 누워 있어도 여기 저기 박혀서 안돼요. 그래서 움직여야 되고 움직이면 고민이 많이 생겨서 안돼요. 차라리 눈 꽉 감고 있는 것이 제일 좋아요. 죽는 것도 주님의 사건으로, 쓰일 곳에 다 써먹다가 더 이상 쓸모없을 때 주께서는 마른 명태 털듯이 “됐다. 이제 오늘 밤 낙원에 있으리라.” 또 하루치, 그날 밤에 우리를 낙원에 데려가십니다. 다 써먹고, 그리스도 다 증거하고.



누구에게? 이미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이미 어린양이 동행하는 사람에게만 이것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성경 열심히 봤습니다. 그것이 마귀 적 해석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내가 새사람 되지 못하고 천국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 주님의 일을 위하여,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사건으로 다루어지는, 그리스도만 증거 되기 위해서 사건 화되는 인생을 산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