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고전 10장 5-7(광야)1509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0장 5-7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에 보게 되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인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갔던 그 일이 나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이 나올 때 우리가 그걸 꼭 알아야 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가거든요. 사람들이 평소에 성경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 읽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본인이 사람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사람이래요. 사람이면 내 세상은 내가 알아서 만들어 가는데 내가 만들어가는 내 세상에 성경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평소에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입사시험 칠 때 성경과목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선을 볼 때나 면접 볼 때, 대학 입시에서도 성경을 시험 치지 않거든요. 나에게 성경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내가 원하고 기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성경이 필요치 않는 거예요. 이 세상은 성경이 필요치 않는데 내가 만약 성경말씀이 입에서 나와 버리면 내가 그쪽 세계의 일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집단체를, 성경이 필요치 않는 그 세상을 선호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의 혹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번져 나오는 일부, 도드라진 덩어리나 혹의 일부가 우리 자신이라고 보면 되는 거예요. 세상이 원치 않는데 내가 그 원치 않는 것을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교회? 바쁘면 못나오고. 회사? 그것은 꼭 가야하고.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지요. 꼭 가야 돼요. 거기서 돈을 주니까. 그런데 그 세상에서 어떤 것이 구축되어 있는가? 이 세상 나름대로의 의로움과 윤리와 도덕이 이미 구축되어 있어요. 따라서 내가 필요한 나의 윤리와 도덕과 의로움은 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윤리와 도덕과 의로움으로 갖추면 사람 사는데 그다지 불편하지 않습니다.
20대에 망나니같이 까불고 학교에 다닐 때 그렇게도 지각을 많이 하더니 회사 입사해서 출근하게 되면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게 그쪽의 의로움이에요. 그 쪽에서 요구하는 집단적 의가 되는 거예요.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 세계를 천국에서 거부한다는 겁니다. 천국에서 넣어주지를 않아요. 왜 천국에서 안 넣어주는가 하면, 출애굽사건이라는 것이 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둘로 쪼개는 하나님의 그 의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착하다, 훌륭하다, 나는 선하다, 그런 것은 같은 인간들끼리 납득이 되는 의로움과 윤리와 도덕이거든요. 흔히 교회에서 인정하는 윤리나 도덕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버리면 교회맨(churchman)이나 되고 직장맨이나 되고 훌륭한 이웃맨이나 되어버리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천국맨, 하늘나라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뭐가 빠졌는가? 출애굽이 빠져있어요. 애굽에서 분리되는 그 사건이 빠져 있는 거예요. 가정에서 벗어나고, 교회에서 벗어나고, 직장에서 벗어나고,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의 혹처럼 연결된, 세상에서 축 늘어진 그 일부가 나인데 그 나로부터의 출애굽, 나 자신으로부터의 출애굽, 그래서 나 자신이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탈바꿈되지 않으면 천국은 못갑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육으로 난 것은 하늘나라 볼 수가 없어요.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남들은 여러분을 사람으로 보잖아요. 그러면 남들이 알아먹는 그 사람, 그 사람이 되지 마세요. 그런 사람 되면 같이 지옥 갑니다. 남들이 모르는 특이한 사람이 돼야 돼요. 납득이 안 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것이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광야에서 만들어져요. 광야의 특징이 뭐냐? 광야만 존중되고 거기 통과하는 인간들은 전혀 존중되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그런 공간체제가 광야입니다. 너 자신을 네가 존중하지 말라는 거예요. 마치 CT촬영 하듯이 들어가면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는 것들, 속에 들어 있는 암 조직 같은 것들이 다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광야에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죄들이 나와요.
그 중에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광야에 도달된 자에게만 해당되는 지적받을 일이 되는 겁니다. 광야라는 조건 때문입니다. 광야에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우상숭배자가 되지를 못해요. 그 말은 뭐냐? 애굽에 있을 때는 절대로 그들은 우상숭배자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애굽은 애굽 나름대로 멋진 종교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가 아니고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 그게 이미 애굽나라에 하나의 상품으로 애굽 전 국민에게 다 있는 거예요. 이시스라고 해서 부활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가면 거기도 부활의 종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겨울에 죽었던 것이 봄 되면 다시 싹이 나면서 부활이 되거든요. 그 부활의 신이 바알신이에요. 내가 죽어서 다시 산다. 그것은 바알종교에 해당됩니다. 우상숭배에 해당돼요. 요즘 교회가 우상숭배를 하는지를 본인들도 분간을 못하고 있어요. “주님, 저 죽으면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겠지요?”라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왜 그 나라에 들어오는데? 네가 왜 들어와 돼? 너는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들어오면 안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저는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다.” 누구 좋아라고 믿는데요? 누굴 존중하기 위해서 부활을 믿었습니까? 내가 나를 존중하기 위해서 부활을 믿었잖아요. 십자가를 믿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천국에 못가는 거예요.
출애굽사건을 생각하라고 제가 부탁을 해도 이것이 안 되는 이유가 출애굽사건이 성경에만 있고 입사시험에서 안 나오거든요. 직장생활에서 출애굽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관심 밖이에요. 장사하는데 출애굽이 필요하던가요? 아무 관계없어요. 출애굽기 1장의 내용을 요즘 버전으로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아파트 단지에서 “개나 고양이는 발견즉시 사살합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는 일체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반입할 수 없습니다. 신고하면 포상하겠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발견즉시 사살합니다.” 라는 공지를 했다면 개나 고양이는 그 아파트의 주민이 될 수가 없지요. 사살해도 되는 존재가 됩니다.
아파트라는 집단체제에 넣어줄 수 없는 대상이 개나 고양이가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 수변공원 산책을 하는데 40대중반의 아저씨가 날 붙들고 하는 말이, “요새 아줌마들 다 개를 키워서는 공원 온 군데에 다 똥을 싸서 정말 못살겠습니다.” 왜 나보고 그러는지. 내가 운동할 때 모자를 쓴다고 해서 관리인도 아니고. “보는 족족 지적합시다.” 이러고 말았는데 제가 평소에 수변공원 산책할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개 목줄 합시다. 혹시 비닐봉투 준비했습니까? 잔디밭에는 들어가지 마세요.” 이런 소리 하는 것을 여러 번 본 모양이지요. 저는 참 친절하게 살아요. 친절하게 산다는 그 말 내부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개나 고양이가 있을 때 즉시 사살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것은 제 이야기고 지금 십자가마을에도 고양이나 개 키우는 집이 한 둘이 아니니까 자제하겠습니다만.
출애굽 당시에 히브리인들은 개나 고양이 입장이었습니다. 사람 취급 받지 못했어요. 출애굽기 1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누구든지 히브리 남자를 보거든 보는 즉시 사살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아들을 낳으면 죽여 버려야 돼요. 이 말을 애굽중심으로 봅시다. 애굽중심에서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든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같은 인간이면서 같은 인간으로부터 사람취급 못 받는 그것이 구원의 절차, 처음절차에 이미 개입이 되는 겁니다. “나 사람 좋아요. 같이 살아요.” 이러면 안 돼요. 사람 취급 못 받는 현상이 일어날 때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손대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 거예요. 저들과 다른 인간 만드는 겁니다. 다른 인간, 전혀 다른 인간 만드는 겁니다.
그게 애굽에서 분리되는 출애굽이에요. 사람이 착하고 성실하다는 것, 특히 로마시대에는 내세운 네 가지 덕이 있었잖아요. 지혜, 용기, 절제, 정의, 이런 것이 있어요. 그런 것을 갖출 때 로마시민의 자격이 있다고 한 겁니다. 상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에요. 남 배려하고, 착하게 살면서도 자기 일에 성실한 것, 용기도 있으면서 정의로운 것, 불의를 참지 않는 것, 좋은 것은 다 갖다 붙였어요. 그 네 가지 덕이 나중에 열 가지 덕으로 되거든요. 그 열 가지 덕이 오늘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교훈에 다 나와 있는 것들이에요. 바른 자세, 바른 인간, 불교에도 이런 것들이 다 나오거든요.
“스스로 자기가 자기 인생을 관리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네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 바르게 살면 바른 인간되고 개떡같이 살면 나쁜 인간 된다.”는 것이 애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죽음으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애굽사고방식에는 들어있지를 않아요. 내가 알아서 그냥 성실하게 살면 되지.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때 등장하는데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 등장해서 다른 것 아무것도 보지 않고 오직 피만 보고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피만 보고.
하나님이 이상한 거예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인간들이 이상한 거예요? 둘 다 이상해요. 둘다 희한한 논리로 엮여져 있어요. “사람이 아니므니다!” 정말 사람이 아니에요. 소통이나 대화자체가 안됩니다. 이사야 4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하나님이 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도로 포장하려는가? 불도우자 앞세워서 토목공사 하면 되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사 40:4) 하나님이 온다고 도로포장 공사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도찐개찐, 똑같다. 평지처럼 똑 같다. 나대지 말라.’ 똑같은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목사, 장로, 집사, 평지처럼 똑 같아요.
교회에 여호와가 없으니까 목사나 장로나 집사라는 서열이 있지요. 교회에 여호와, 주님께서 계신다면 똑같아요. 어떻게 멋지게 똑같은가? 다 시들시들한 점에서 똑같아요. 들의 꽃 같으니, 볼 품 없다는 점에서 똑같아요. 그 여호와가 이사야 40장을 품고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 속에 섞여 들어왔습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멘트를 날리는데 그 날리는 멘트 안에 반드시 뭐가 들어 있는가? 출애굽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보는 즉시 사살한다는 그것이 이 세상 관점이라면 주님은 이렇습니다. “사살해라. 내가 너희들 보기에 특이하지? 너희들과 섞일 수 없는 이상한 인간이지? 사살해.” 그래서 사살한 것이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사람이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스스로 죽여요. 하나님이 하나님에 의해서 스스로 죽는다고 요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스스로 죽는 방법인데 그 방법에 동원된 것이 이 죄 많은 인간세상인 겁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마귀의 세상을 이용한 거예요. 활용하신 겁니다. “제발 날 죽여라. 그래서 너희가 인간 아님을 드러내라?”고. 이 사실을 제자들이 알 턱이 있습니까? 몰라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 속에 바로 이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네가 인간이다 싶어? 아니야.” 그런 조로 이야기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한 가지 예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이야기를 합니다.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이 가능합니까?” 이렇게 했어요. 바리새인들의 이 말은 이혼이 가능하냐고 묻는 말이 아니고 “이혼해도 의롭습니까?”라는 것이 꼬리처럼 뒤에 붙어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세상은 자기 나름대로의 의가 있다고, 의의 집합체라고요. 모세율법에 보면 이혼하려거든 그냥 하지 말고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혼 할 때 이혼증서 써주면 우리는 법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자가 없지요?” 라고 예수님께 물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것은 당신들이 옳네.” 라는 소리를 바리새인들이 듣고 싶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 당신이나 우리나 다 한통속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뭐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했거든요. 그 이야기 듣고 질문한 바리새인이 놀란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과 한 패먹은 제자들이 이쪽에 있고 저쪽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누가 놀랐느냐 하면, 예수님과 한 패 먹었다는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놀래면서 하는 말이 10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성경가운데서도 인간본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멋진 말인데 기억 안하고 싶어도 기억해야 되는 말이에요. 특히 남자들이요.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이렇게 이혼하는 것이 까다로울 것 같으면 미쳤다고 장가듭니까?” 이런 뜻이에요. 이 말은 뭐냐? “장가갈 때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모세가 말한 대로 이혼증서 하나 툭 던져놓고 이혼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줘야, 숨통을 터 줘야 장가갈 때 여유롭게 가고 나에게 행복이 되겠습니다.”라는 마음을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나 다 같이 갖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니 “그럴 것 같으면 장가 안 가는 것이 낫지 장가는 가놓고 빼도 박도 못하고 이 무슨 더러운 팔자가 되었느냐.” 하고 가슴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당신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합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아직도 네 눈에 인간으로 보이느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바리새인이나 예수와 한패를 먹었다는 너희나 둘 다 똑같은 애굽이라는 겁니다. 너는 네가 우상숭배자인 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 행복만 취하면 끝나는 거예요.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 되면 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 되는데 성경 왜 봅니까? 성경 볼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취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남들이 원하는 그것과 내가 동일해요. 여기에 어떤 갈라진다는 사건이 개입될 여지가 없어요.
예수님이 오실 때 십자가 지러 왔거든요. “수고했습니다.” 그걸로 끝났어요. 그 십자가가 나한테 적용돼야 나도 같이 분리되는데 우리는 분리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시큰둥해요. 별로에요. “우리는 부활의 세계가 좋습니다.” 그것은 이시스, 애굽종교에요. 죽어서 부활된다는 것. 그것은 극락에 간다고 하는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성경을 준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던 사도로부터 “너는 우리하고 같은 인간이 아니야.”라는 통보를 유도해내기 위한 겁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너는 우리하고 같은 식구기는 해도 이상하게 같은 식구가 아닌 것 같아. 다른 나라 사람 같아. 외계인 같아.”라는 평가를 의도적으로 유도해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에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 언약을 하면서 한쪽은 육에 속한 노선이 있고 또 한쪽은 하늘로 이어지는 노선이 있다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어머니가 되는데 그 노선은 육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새로 태어난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그러니 그것이 이 땅에서 구분되어야 되겠지요. 구분될 때에 기존의 애굽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광야에 가서, 그 실험장치가 있는 곳인 광야에 가서 우리가 우상숭배자인 것이 들통이 나야 됩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또 하나의 예가 있어요. 유명한 이야기인데 부자청년이 예수님한테 영생 얻으러 왔다가 걱정거리만 잔뜩 안고 되돌아가는 그 이야기거든요. “영생 어떻게 얻습니까?” 하니 “모든 재산 팔고 나를 따르라.” 하니 근심해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내 것 버리고 영생 얻을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라는 속내를 드러낸 거지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거예요. “그동안 부자 된 것은 하나님께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복 받은 것인데 이 마일리지를 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내가 부자 된 이것까지 포함해서 나의 정체성이고 나 됨인데 나 됨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나 됨이 사라져버리면, 그렇다면 내가, 바로 내가 영생 얻는다는 그것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남이 아니라 내가 얻어야 기쁜데 나 자신을 버리라고요? 그러면 나는 그것은 못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잘 가라. 너는 남들 보기에는 부자지만 내가 보기에는 천국에 못가는 존재, 인간이 못되는 거야.”라고 한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이것은 남의 애 때리니까 그 옆에 안 맞을 애가 벌벌 떠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게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못 간다는 이야기거든요. 단체로 못 간다는 거지요. 못 간다는 것을 강조해서 바늘구멍과 낙타를 동원시킨 거예요. 못 간다고 하니까 부자도 아닌 인간들이, 가난뱅이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어요. 하는 말이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아직도 인간으로 보이나? 네가 어딜 봐서 인간이야? 너는 인간 아니야. 구원 안 되지?” “안됩니다.” “안되지?” “안됩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거예요. 성경 말씀을 우리가 봐야 되는 것은 성경말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어요. 우리를 무능자로 만들기에 성경을 꼭 보셔야 돼요. 성경을 덮어버리면 우리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돼버려요. 교회 다닐만한 가치, 목사 될 만한 가치, 집사나 장로 될 만한 가치 있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목사님들 보게 되면, ‘님’자 오랜만에 붙여주는데, 목사님들을 보게 되면, 목사나 전도사나 도대체 느낌이요, 느낌이 참 거북한 게, 일반평신도는 말씀에 관심이 있잖아요. 그런데 목사는 그 말씀 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해 볼까, 여기에 관심이 있으니까 꼭 사기꾼이라는 느낌, 꼭 사기 치는 인간을 대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목사나 전도사, 신학생들 대하기가 참 거북스러워요. 저 사기술이 언제 들통 날지. “단지 십자가입니다.” 그거 팔아서 언제 목회성공하려고? 개척교회 키워서 성공하려고 하는 그런 느낌은 나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의 잘못된 선입관이겠지요.
목사나 평신도나 누구나 성경 보라는 것은 보이는 즉시 사살당해도 괜찮다는 것, 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말씀을 보게 되면 십자가 나오고 십자가뿐만 아니고 말씀이 나오잖아요. 이 말씀이 제대로 알면 너무나 큰 무게감으로 다가와요. 말씀이 너무 무거워요. 법이 주는 그 무게감이 질식할 것 같은 그것, 그 거룩과 그 의로움이 너무 심하게 다가오면 인간은 물질화되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죽고 싶어요. 물질, 돌멩이나 쇳덩이가 되어서 법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살해서는 안돼요. 자살하면 왜 잘못이냐? 하나님의 진노하심이라는 그 싸인을 품고 있어야 성도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냥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너를 죽이는,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 고통에서 면제되기 위해서 네가 알아서 약 먹고 죽거나 목 졸라 죽이는 그런 짓을 하지 말고 내(주님)가 죽이는 죽음이 있어야 돼요.
제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해 와요. 상담할 때 그 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 뭐냐 하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그게 깔려 있어요. “(이캐요?)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이게 깔려 있어요. 저는 상담 중에 늘 생각해요. ‘과연 당신이 행복할만한 자격이나 권한이 있다고 우기는데 그런 것은 누구한테 배웠지요? 누가 당신한테 그런 거짓말을 집어넣었지요?’ 타고난 거겠지요.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남은여생이 편안해야 돼.’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그것, 그것은 자기존중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자기미움이지 자기존중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질문을 하다가 이제는 복음을 좀 알아서 그런지 아니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그런지 어쩐지……. 처음에는 촘촘히 질문을 하다가 나중에는 한 달 만에 질문하다가 그 다음에는 6개월 만에 하다가 그 다음에는 뜸해져 버려요. 다시 질문답변란은 조용해집니다.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서 질문들을 쏴대지요. ‘몇 개월 가는지 한 번 보자.’ 광야라는 곳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데 그 모든 죄게 우상숭배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우상숭배의 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인간은 처음에 태어날 때는 자연에 의해서 태어나잖아요. 그런데 그 때부터 인간은 태어난 자연을 버리고 자기가 만들어가는 세상을 만듭니다. 이게 뭐냐? 모든 세상은 개인이 각각 세상을 만드는 달리기에 나서는 겁니다. 나만을 위한 세상 만들기에 나서요. 그걸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자연은 연속적인데 연속적인 자연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독자적인 자기세상을 만들게 되면 여기서 불연속, 딱딱 끊어지는 불연속이 발생됩니다. 불연속이 발생되면 ‘내 세상 다르고 네 세상 다르다. 내가 보는 현실 다르고 네가 보는 현실 다르다. 너는 여당, 나는 여당이니 다르다.’ 이렇게 연속이 아닌 불연속이 돼요.
애가 금방 태어나서 엄마에게 기댈 때는 엄마와 자식은 연속적이에요. 엄마 맘이 곧 애의 마음이에요. 애는 엄마 없이는 못삽니다. 딱 붙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세살, 네 살, 다섯 살, 이렇게 좀 이어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이 돼요. 필요할 때만 엄마를 찾고 자기한테 짜증나면 엄마도 미워하고 아빠한테 붙었다가 아빠가 미우면 엄마한테 가고.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하고 식탁에서 물으면 애가 하는 말이 “그것은 아빠 엄마가 하기 나름입니다.” 이런 식으로 답변이 진화하지요. 이게 불연속적입니다.
이걸 인류사전체로 보게 되면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벗어났는데 자연의 가뭄과 폭풍과 우뢰와 지진과 화산활동이 나오니까 그걸 달래기 위해서 신의 형상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제사 드리면서 달랩니다. 뇌물을 바쳐서 달래는 거지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그 짓을 한 겁니다. 제사를 함으로써 신과의 불연속을 연속으로 만들려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 형상이 이제는 문자로 바뀌어요. 문자로 바뀌면서 뭐가 쓰이는가 하면, 내가 지나온 시간이 역사가 되어서 문자로 기록이 되는 겁니다. 그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법이 돼요. 그 법에서 우리네 집단이 만든 나름대로의 의가 나와요. 윤리가 나오고, 도덕이 나오고, 질서가 나오고, 체계가 나오는 겁니다.
그 체계의 자식들, 체계의 후손들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그 체계와 윤리도덕은 태어나면 부모가 가르치고, 크면 학교에서 가르치고, 나중에는 사회에서 가르칩니다. 우리는 거기서 바른 인간되면 사람으로 등록이 돼요. 너는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등록이 돼요. 출애굽은 그걸 끊어버리는 겁니다. “너는 우상숭배자들의 집단의 일원으로서 사람으로 보이냐? 너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 아니다. 그런 인간은 천국에 못 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의로움, 자기 잘남과 자기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기 위한 그 법, 여기에 새로운 법이 등장합니다. 그 새로운 법은 그냥 문자의 법이 아니에요. 뭐가 등장하는가? 어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법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이 어린양으로 와요.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어린양이 와요. 그 오뎅을 꽂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가 어린양이라면 그 어린양을 위하여 1계명, 2계명, 3계명, 오뎅 열개가 꽂히는 그것이 십계명이에요. 십계명은 바로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만 십계명이 완수가 되는 거예요.
그 십계명을 바깥에 있는 우리가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제사제도도 마찬가지고. 십계명, 모든 율법의 뜻이 뭐냐? “사람 아닌 너를 내가 사람 되게 했다. 단, 과거의 너를 죽이고 어린양과 동행한다는 조건하에서 네가 새사람 되었다. 따라서 너에 있어서의 옛날 신, 너를 존중하는 신이라는 것은 전부 다 ‘너를 위함’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에 그걸 우상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본문 7절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했는데 여기서 우상 숭배하는 그 모습이 뭐냐?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좀 놀면 안 되겠습니까? 맨날 가만히 앉아서 종기날 일 있습니까? 좀 뛰놀면 어떤데요?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이것이 우상숭배다. 그래서 너는 멸망되어야 마땅하다.” 지금 이렇게 나오신 겁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 32장 6절의 말씀인데요, 출애굽기 32장은 뭐냐?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갔거든요. 모세가 시내산 위로 올라가면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또 둘로 구분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독대한 모세 쪽과 모세가 빠져버린 산 밑의 백성들, 이 둘로 분리가 돼요.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있지 않고 떠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건져내 온 것이 아니고 우상 숭배자를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거예요.
그게 어느 관점이고 어느 안목이냐? 하나님과 독대한 모세 안목,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밑에서 스스로 자기를 봐서는 아무리 봐도 자기는 우상숭배자가 아닙니다. 그 때 그들이 산 밑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는데 그들은 누굴 위하여 먹고 마셨다고 핑계를 대느냐 하면, 그 날이 여호와의 축제날이에요. 여호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건 네 생각이고!” 그것은 네 생각이고 위에서 보면, 예수니 십자가니 어떤 용어를 동원해도 그 자체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우상숭배 안할 방법은 뭡니까?” 안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우상숭배자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벌써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말은 설교 막바지에 도달했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냥 우상숭배자로 살면 돼요, 그냥 우상숭배자로. 인간이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가지고 그 다음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데 문자를 동원하고 과학을 동원합니다. 수학방정식이 다 선이거든요. 선에서 비트, 점으로 나오면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우리 힘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좀 어렵지만 유럽의 과학사에 보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세상이 돌아가잖아요. 돌아가는 그것을 인간의 이성으로 스톱을 시키는 거예요. 스톱시켜서 방정식을 만들어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예측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방정식을 만들어요. 방정식을 만들 때 나오는 것이 뭐냐? 연속적인 것이 이미 불연속이 되었으니까 이 불연속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합치하려고 애를 쓴 것이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한 미분이라는 거예요. 미분, 잘게 자르는 거예요. 미분해서 세미하게 접근해서 확률적으로, 통계적으로 0.00001퍼센트의 작은 오차만으로 합치되는 것, 그렇게 완벽하게 세상을 알아내려고 했고 실제로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이저 1호가 38년째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오차나 착오 없이.
인간이 전지, 모든 것을 알았어요. 문제는 인간이 전능하지를 않는 거예요. 전지는 되는데 전능이 안 되는 거예요. 알기는 아는데 행복하지는 않아요.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가 삐졌다. 이혼하자고 나와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아는데, 뭔가 알기는 아는데 능력으로 합치가 되지를 않아요. 사랑한다고 미소는 띄웠는데 이게 썩소, 썩은 미소라. 어색하고 뭔가 이상해. 사람 사는 고민이 뭡니까? 알기는 아는데 원하는 대로 합치가 안 되고 동일한 사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그것이 참 두렵고 공포스러운 거예요. 딱딱 맞아 들어가야 되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전능한 것을 만들었어요. 뭐로? 비트라 해서 0과 1의 숫자를 원리로 해서 컴퓨터를 만들어놓았어요. 이제는 내가 못하는 것을 컴퓨터가 하는 거예요. 전능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사람이 컴퓨터만 못하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서서히 인간자체가 뭘 부러워하느냐 하면, 컴퓨터를 부러워하면서 ‘나는 언제 컴퓨터처럼 되나?’ 해요. 컴퓨터처럼 되려고 애를 써요. 귀 고장 나면 귀를 컴퓨터로 바꾸고, 심장이 고장 나면 인공심장으로 바꾸고 모든 것을 보조물로 바꿔버려요. 신체의 장기나 모든 것을 어벤저스, 정의로운 복수자의 모습으로 바꿔놓는 거예요. 바지위에 팬티 걸친 슈퍼맨도 나오고요, 스파이더맨, 배트맨, 전부 다 컴퓨터의 도움 없이는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얼굴의 청춘도 보상받을 수 없는 겁니다. 째고 붙이고, 기계 없이는 못사는 거예요. 걷고 뛰는 것도 계산해야 되니 만보기 달아야 되고.
그래서 천국 갑니까? 하나님은 광야에서 네가 모르는 현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네가 모르는 현재, 네가 알지 못하는 현재를 만들어요. 이것은 시간대를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어떻게? 모세가 알게 된 시내산 꼭대기의 그 시간을 모세는 산 밑으로 수입해 들어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시간을 가지고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비로소 자기가 여호와의 이름을 섬긴 우상숭배자로 발각이 되지요. 출애굽기 32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이 평가하신 거예요.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여기서 나온 것이 ‘자기를 위하여.’
모든 우상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평가에 의하면 ‘자기를 위하여’ 입니다. 자기존중이지요. 자기를 위해서 교회 다니고, 자기를 위해서 안식일 지키고, 자기를 위해서 주일 지키고, 자기를 위해서 십일조 하고, 자기를 위해서 성경보고, 자기를 위해서 헌금하고, 자기를 위해서 전도하고, 자기를 위해서 예배하고, 이게 전부 다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킨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이기주의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도킨스가 인간을 제대로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인간은 이타주의에요. 오직 남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희생을 하더라도 남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가는데 그 남이 누구인가? 나의 대체물로서의 나. 자식이 있잖아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요.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남의 자식이 아니고 누구 자식이다? 나의 자식이다. 제 2의 나, 나의 대체물로서의 자아에요.
인간은 자기의 대체물을 천국에 올려 보내기 위해서 아낌없이 자기를 희생물로, 대속물로 내놓을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게 우상숭배에요. 왜? 아무리 이타주의고 희생적으로 보여도 최종적인 것은 뭐냐 하면, 거기에 큼직한 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이 까불지요. 여의봉 던져서 구름타고 날아가는데 기둥이 다섯 개가 있더라. 나중에 보니 부처님 손바닥이었어요. 사실은 그 손바닥이 손오공 자기 손바닥이에요. 부처라는 것은 상상의 존재거든요.
우리가 아무리 천국, 천국 하지만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천국 가 있는 근사한 내 모습이 나의 최종 도착지점이에요. 결국 나는 평생 내 안에 있는 겁니다. 그게 내가 만든 현재에요. “저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자기를 미워하겠습니다. 나는 자기를 부인합니다.” 해봤자 그건 다 누구를 위해서? 다 스스로 나를 건지겠다는, 나를 위한 수작이고 날조된 복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이 벌벌 떨면서 “그러면 주님이여, 누가 구원받겠습니까?”라고 하니 주님 말씀이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제자들아! 이미 너는 너의 것이 아니니라. 네 것이 아니기에 네가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2인 1조 작업입니다. 젊은 분들은 잘 모르는데 옛날에 쓰던 디딜방아라는 것이 있어요. 이게 2인 1조 작업이에요. 발로 눌렀다 놓았다 하는 것은 가장이 하고 아내는 찹쌀이나 콩이나 빻을 것을 구멍에 집어넣고 잘 빻아지도록 고르고 다 빻아지면 빼고 다른 것 넣고 그렇게 하는데 만약에 남편이 밉다, 그러면 남편이 볼일 보러 잠간 다녀오는 그 사이에 구멍에 애를 집어넣어 버리면 아내가 도망을 쳐도 남편이 뻔히 보면서도 도망가는 아내를 보고만 있어야 하는 유머가 있었어요. 애 집어넣은 것은 진짜 그런다는 게 아니고 그냥 유머이야기입니다.
디딜방아는 2인 1조가 되어서 하는 작업인데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2인 1조 작업을 해요. 우상 숭배자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고는 원망을 유발하는 거예요. 물 없다, 양식 없다, 하는 원망을 유발시키면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멋지고 좋은 재료가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우리가 자살하거나 물질화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를 지어줘야 돼요. 우리가 죄 지어주는 그것이 복음의 일이에요.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해서 여러분은 안 믿기지요? 저도 안 믿깁니다. 죄를 디딜방아에 집어넣어요.
그러면 죄가 뭐냐? “하나님, 제가 의로운데 왜 이렇게 인생을 힘들게 하십니까?” 그게 죄거든요. “그러면 네 의는 어디서 보이는데?”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합디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집단적 의거든요. 집단적 의, 예수님을 살해하게 만든 의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제발 네가 세상사람 좀 되어줘. 그래서 세상 사람들 보기에 ‘나 괜찮은 인간입니다.’라고 하도록 좀 놀아줘.” 그런 식으로 좀 살아달라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광야는 정지화면이라고 했지요. 그 네가 모르는 시간, 정지화면을 광야에 집어넣어요. 집어넣으면 우리는 자연발생적으로 “이렇게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성경연구하고, 복음연구하고, 교회 잘 나오는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는 말이 나오는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첫 공정 과정이 그거예요. 그걸 가지고 위에서 하나님께서 2인 1조, 죄 집어넣고 옛날 있었던 어린양 사건 섞어서 거기서 빼내면 새로운 피조물 나옵니다. 그걸 하이브리드라고 합니다. 혼용체, 하이브리드.
특이해요. 인간이 아닙니다. 이상해요. 다른 사람은 잘난 맛에 살고 그 잘난 맛을 남에게 광고해서 그걸 돈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 성도라는 사람은 세상사람 된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걸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아요. 자신의 행복을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어요. 네가 모르는 우상숭배자 되는 것이 목적이에요. 이 땅에서. 우상숭배자, 나만 위해서 살았다는 그것, 나만 위했다는 그것을 강조하는 특이한 사람. 다른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하면서도 아닌 척 하는 것이 주특기고, 이쪽은 나를 위해서 살면서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을 주특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 이게 하나님이 조성한 특이한 실험 장치입니다.
“옛날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그 과거가 지금 내가 만든 현재 속에, 너는 현재의 히브리인으로서 광야에 살고 있다. 따라서 너는 너 자체가 광야다. 나는 너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광야 됨을 존중한다. 날마다 광야임을 보이고 날마다 나는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상숭배자임을 보여라. 그것이 이미 어린양과 동행하는 아주 독특한, 특이한 존재니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이 평정되고 낮아지고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 깨달아지기를 원합니다. 거룩한 주님의 통치성 앞에 감히 어떻게 살 권리를 주장하겠습니까? 하지만 이 광야에 죽을 자도 살리시고 살려고 하더라도 죽이시는 주님이 권한 속에서 그저 광야의 속성, 기능만 보이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