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고전 9장 24-27(썩지 아니하는 면류관)15082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사도바울이 보고 있는 이 현실이라 하는 것은 “끝에 버려질 것이냐, 아니면 버려지지 않을 것인가?” 그것으로 결말지어지는 세계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생각하는 이 현실세계,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그런 일을 보면서 ‘내가 이런 식으로 살다가 결국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 될 거야.’ 또는 ‘이런 식으로 산다는 것은 버림을 당하지 않는 삶을 내가 지금 보내고 있는 거야.’라고 이 두 가지로 마감이 돼요. ‘하나님 앞에 버림받을 것인가, 버림받지 않고 수용이 될 것인가?’ 이게 사도바울이 보는 현실관입니다.
현실은 인간들이 머리 맞대고 연구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때문에 새롭게 알게 된 현실을 놓고 볼 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이냐, 아니냐의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도 같은 취지로 나와 있어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몸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 대표적인 것이 북한이겠지요. 김정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혼이 아니고 그 다음에 지옥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영혼이니 지옥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천국 가본 적도 없고 지옥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지나 내나 수명이 비슷하잖아요. 지가 인생을 안들 얼마나 알겠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하실 수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던져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딱 듣게 되면 인간은 이 말씀에 대해서 감당을 못합니다.
차분하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정리해서 그것을 현실이라고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입장에서 전체를 다 아시는 분이 전체를 다 아는 정보를 우리에게 던져버리면 우리가 뭘 어쩌라는 말입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왜 세상에 버림이 있고 버림 안 받는 쪽이 있는지, 왜 세상은 끝이 있어야 되는지의 그 내막이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로서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요? 감당이 안 되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 들으면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당연한 겁니다.
이런 말씀 자체가 우리 인생을 흔들어놓고 혼란에 몰아넣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게 되면 “제발 내 인생에 개입하지 마시고 제발 날 좀 건드리지 말고 가만 놔두세요.”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감당 안 되는 말을 듣게 되면 지킬 수도 없고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의도에서 했는지의 그 의도를 우리가 간파할 수가 없어요. 전체를 알고 있는 분의 이야기, 일부밖에 모르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가 들려온다고 해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도망칠 수밖에 없어요. 그 도망친다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말씀이 제대로 먹혔다는 기쁜 소식이 되는 겁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요, 나를 천국 보내는 그것도 기쁜 소식이지만 이미 천국 보내는 작업 중에 하나가 말씀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그것도 우리를 구원하는 작업이 일환으로 이미 개시가 된 거예요. 방금 읽은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이 말씀을 진지하게, 진정성 있게 받아들인다는 그 자체, 대처하는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대처는 아예 못하지요, 대처하는 것도 모르면서도 ‘이럴 수 있다.’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일 때 이미 구원은 그 사람에게 개시가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시작을 하신 분이 드디어 우리를 건드렸다는 것은 이제 우리 자신이 우리 원대로가 아니라 이 말씀을 주신 분의 원대로 바꿔진다는 뜻입니다. 이걸 화투에서 ‘밑장빼기’라고 하지요. 그 동네 전문용어로. 노름꾼들이 눈에 안 보이는 밑장을 교묘하게 빼서 장땡이라고 내놓을 때 ‘어? 이게 어디서 나왔지?’ 하고 깜짝 놀라지요. 우리는 우리 엉덩이 밑이 너무 무서워서 내 인생을 내가 깔고 앉아 있어요. 이게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이야기할 때는 우리가 아는 나 말고 내가 엉덩이에 깔고 있는 밑장을 빼서 그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그것은 이미 구원활동이 개시가 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짓밖에 할 줄을 모르고요, 방해하는 짓 외에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요. 왜? 우리 나름대로의 고집이 있거든요.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천하의 하나님이라도 나를 못 이깁니다.’ 이게 우리 평소의 생활방식이에요. ‘천하의 하나님이라도 날 못 당해 낼걸요?’ 이런 객기, 이런 오기하나 붙들고 살아간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오기나 객기에 대해서 충분히 아셔요. 알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 같으면, 우리는 그걸 지켜버려요. 하나님이 보란 듯이.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 안 되는 말씀을 줘버리면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하고 안 놀아. 나는 내 식대로 살 거야.” 어떤 희한한 반응을 나타낼 때 전혀 말씀을 듣지 못한 다른 친구들은 “저 혼자 뭘 저렇게 중얼거리나?” “너는 몰라도 돼.” 뭔가 색다른 낯선 경험에 반항하는 모습이라도 이미 말려들었어요. 저항하고 반항하면서도 이미 그 세계에 말려든 겁니다.
오늘 본문을 한 번 봅시다. 본문 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버림을 당한다.’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터무니없이 툭 던지는 식이에요. “만약에 누구든지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거야.” 쉽게 말해서 “지옥 갈 거야.”라고 버림받는다는 이야기를 툭 던져버려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대수롭지도 않지요. ‘아,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는가보다.’ 하고 무시해버리는데 이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이요? 그거까지 신경 못씁니다. 애 키우고 살림살이 챙기기 바쁜데 그것까지는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하고 어쨌든지 간에 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진실이 있고 그게 우리가 몰랐던, 나 산다고 눌러 앉았던 어떤 숨겨진 현실, 또 다른 면을 사도바울이 지금 내밀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떤 감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오늘 본문은 이겁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어라.” “생명의 면류관을 어떻게 얻습니까?”에 대한 시작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썩어질 면류관을 위해서 싸우는구나.”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아는데 출입구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대체 썩어질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싸우는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이며 생명의 면류관은 어떤 식으로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만 알면 되겠지요. 간단하지요.
단 여기서 이 사도바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제외된 사람이지요.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6장 12절의 말씀은 두 곳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세상 영들, 악한 영들과 싸우는 싸움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성질이 급해서 혈과 육은 뒷전이고 “어떻게 마귀하고 싸웁니까?”부터 묻는 성급함을 드러내는데 사도바울은 차근차근히 가는 거예요. “혈과 육의 싸움부터 네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육과 혈에 대한 싸움이 어떤 싸움인가? “그걸 왜 알아야 됩니까?” “네가 지금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그거거든. 육과 혈에 대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 싸움을 하고 있으면서 영생은 또 탐이 나고 죽어서 천당 가고 싶어서 후다닥 해답을 달라고 요청하는데, 혈과 육에 대한 싸움부터 그 본질을 드러내야 됩니다.
혈과 육, 육과 혈에 대한 싸움의 예들은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어떤 여인이 간음을 하다 걸렸어요. 그 간음죄가 사회에 퍼져버리면 문제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유대사회의 정의를 구현하려는 바리새인들이 그 간음한 여자에게 본때를 보인다고, 율법대로 돌로 친다고 다 돌멩이 들고 죽인다는 판입니다. 그냥 죽이면 되는데 그 여자를 질질 끌고 예수님 앞에까지 왔어요. “예수여, 당신이 잘난 체 하는데 우리 율법에 보면 이런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재판해 보세요.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말까요?”
상당히 어려운 질문을 자기들이 생각해 냈다고 여기고 던진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의 답변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렇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렇게 이야기 해놓고 땅에다 뭘 썼어요. 그 쓴 것을 보니까 자신의 과거의 죄상이 다 나타났거든요. 그래서 만약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게 되면 그 여인의 피 묻은 돌을 주님이 쥐고 자기에게 던질 그 상황에 해당되는 겁니다. “너도 한 번 맞아봐라.”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간음한 여자를 돌려 치려고 했던 사람들이 돌을 놓고 다 가버렸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혈과 육의 싸움을 한 거예요. 뭐냐? 주님한테 그냥 돌 맞으면 되잖아요. 돌을 던지고 싶으면 자기부터 돌을 맞으면 되잖아요. 그걸 안하고 바리새인들이 갔다는 말은 주님 보기에 그것은 마귀하고 싸운 것이 아니고 자기체면과 자존심, 자기 혈과 육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도용한 거예요. 그야말로 사기를 치고 있었던 겁니다. 그냥 맞으면 되는데! 그 바리새인들은 혈과 육의 싸움 노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 그것은 구원, 구출이 안 되는 거예요. 혈과 육이라는 그 족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본인이 맞아 죽으면 되잖아요, 본인이. 그들이 그렇게 잘 안다는 다윗도 그랬거든요. “내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한테 죄졌습니다.” 그 말은 “나는 너한테 당당하다.” 그런 뜻이 아니고 “진짜 나를 때려죽일 분은 하나님밖에 없사오니 하나님이 나를 때려죽일 때, 죄를 물을 때 비로소 그게 진정 나입니다. 진정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내 자존심과 체면의 이 모든 덩어리가 결국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밖에 안 되는, 돌로 쳐 맞아 죽어야 할 나, 사형당해야 싼 나입니다. 하나님은 번제를 원한 것이 아니고 이 상한심령을 원하기에 저를 상한심령으로 발가벗겨놓기 위해서 그동안 율법을 주셨습니다. 나, 그런 인간이에요.” 다윗은 이렇게 나왔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도 그렇게 나오면 되잖아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 구명보트 하나 의지하고 있는데 파도가 더 심해졌어요. 곧 파도에 묻혀서 죽을 거예요. 거기 보니 어떤 구조선이 지나가요. 그러면 사람들이 “살려주세요!” 하겠지요. “살려주세요.” 이러면 안돼요.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자기가 구명보트에서 살겠다고 애쓴 모든 것이 혈과 육을 지키기 위한, 나 자신, 자아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거든요. 그 몸부림을 지나가는 구조선이 건져줘버리면, 구조선에 태워져서 친절과 배려 속에서 간호를 받고 원기를 회복하게 되면 그 원기 회복한 덩어리가 뭡니까? 맨 혈과 육이잖아요.
뭐가 구원되었어요? 구원이 안 되었어요. 있는 그대로인데 그게 무슨 구원이겠습니까? 교회가 구조선이고 방주라고요? 허허, 참! 제가 설교시간에 자주 웃는 편은 아닌데 같잖아서 웃습니다. 살려달라고 교회 온 사람을 교회는 살려주면 안 됩니다. 똑같은 육이 수천 명 모여 봐야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전혀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난파선에는 난파선이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양쪽에 강도가 있었거든요. 강도로 살았든 뭐든 간에 자기는 지금 죽을 판이에요. 살고 싶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든 나를 살려주기만 하면 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이런 각오인데 한 강도는 말하기를 “예수여! 당신이 남 살려내는 전문가라면 십자가에 달린 우리 손과 발에서 못을 빼버리고 살려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치를 좀 해 봐라. 그러면 당신이 믿지 말라고 해도 내가 믿어주마.”라고 했어요. 그 이야기가 강도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다니는 교인들의 요구사항 아니겠어요? 그게 교인들의 요구사항이잖아요. 금요철야 하면서 하는 교인들의 요구사항이 그거잖아요. “당신이 메시아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무슨 조치를 좀 해 봐라. 힘들어 죽겠다. 돈을 주든지 취직을 시켜주든지 뭘 어떻게 좀 해보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당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마. 자꾸 믿으라고 하는데 믿지 말래도 내가 믿어줄게.” 그렇게 나온 겁니다.
그 강도 지옥 갔습니다. 그 강도 지옥 갔다는 말은 교회가 지옥의 입구가 된 거예요. 지옥가려면 교회에 다 가라는 그 말하고 똑같은 소리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강도는 지금 자기도 난파된 상태에 있지만 주님도 마찬가지이거든요. 난파선이 난파선으로 이동해야 살아요. 사람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죽는 게 백 프로입니다. 그리고 사는 것은 영 프로에요. 못삽니다. 죽습니다. 결국 죽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왜 죽는지를 알면 살아요. 왜 죽는지를 알면 산다고요.
이 혈과 육을 살려달라고 요구하지 마시고 “나는 왜 죽어야 됩니까?” 그것만 알면 돼요. 그것만 알면 “네가 생명을 엉덩이로 깔로 앉았잖아.” 밑장빼기를 하면 돼요. “엉덩이 치워라, 엉덩이 치워!” 우리 주님을 깔고 앉아 있다고요.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것은 우리로서는 감당이 안돼요.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말씀이에요.
그 지킬 수 없는 말씀을 우리에게 줬다고 했을 때는 머리를 좀 쓰세요. 분명히 우리에게 줬는데 우리보고 지키라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왜? 그 취지를 모르니까. 그 말씀을 주신 분만이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서 구원돼 보겠다는 평소의 버릇, 혈과 육으로 날 지키겠다는, 어쨌든 지금의 나를 살려보겠다는, 썩어질 면류관 때문에 싸우는 이 버릇을 버리지 않고 그냥 마중 나가서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제대로 생각해 보세요. 제대로 지킨다고 하면서 북한에 선교하러 갈까요? 그러다가 나중에 “나는 북한의 아름다운 정치를 모독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이런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되는 겁니까?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무시해서 깔고 앉은 그 분이 이 말씀을 지키게 되어 있어요.
전에도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지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데 남들 보기에 아브라함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기도하면 응답도 받곤 하지요.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린 그 가문의 여성들이 전부 불임이 되는 저주를 받는 식의 놀라운 일이 벌어지니까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대단한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믿음이라고 사람은 그렇게 인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도 인정했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인정 안 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유일하게 인정한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매진하는 그런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취급을 안했다니까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정받는 것은 딱 한순간이었습니다. 멀쩡한 아들 죽이는 거예요. 멀쩡한 아들을 죽이는 그 순간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교회에서 인간들이 가능한 믿음들을 끄집어냈기 때문에 그게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믿음이라고 대부분 다 인정하고 있거든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육과 영을 유인하기 위한 마귀의 장난이에요. 진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 자신의 소멸입니다. 내가 소멸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깝잖아요.” 아깝기는요, 몇 십 년 더 살아보세요. 소멸하지 말라고 해도 다 소멸하지요. 죽는 것 백 프로입니다. 백 프로 죽습니다. 결국 소멸해요. 소멸하기 전에 일찍 와서 밑장 빼주시는 거예요. 너 말고 네가 깔고 있는 네 몸의 주인공, 현재 네 육의 주인공이 앞서 주신 그 말씀에 입각해서,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사는 겁니다.
지금 아직도 여름이잖아요. 그런데 낯선 계절이 일찍 찾아오게 되면 우리 눈에 상당히 특이하게 보이고 신기하게 보여요. 날씨가 꾸물거려서 에어컨 틀어놓으니 23도까지 내려갔어요. 우리 어머니는 도로 집에 가서 겨울 옷 입고 왔거든요. 여름 가운데 겨울, 낯선 계절입니다. 그것을 선취라고 하는데 이미 겨울을 앞당겨서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누굴 만나는가? 같은 인간인 형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야곱은 이미 형과 혈과 육의 대단한 싸움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상속분을 빼돌리니까 형은 죽인다고 달려들고. 이것은 혈과 육에 관한 문제거든요.
하나님이 내 재산 지켜주고 내 인생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그 모든 것이 육과 영을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지켜주는 하나님일 때 나는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그것마저 육과 썩어질 면류관에 해당되는 거예요. 야곱은 아직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야곱이 누군지를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야곱은 밤중에 찾아온 분이 에서인지 알고 오해를 했는데 그게 아니고 이게 보통 인간이 아니에요. 낯선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왔을 때 비로소 야곱이 살려달라고 했는데 그렇게 살려달라고 했을 때 야곱이 경험한 것은 자기가 결국 늙어죽는 그 죽음, 거기서 살려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 잘 들으세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내 목숨이 늙어 죽어서 흙이 되는 거기서 살려달라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 앞에서도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이것은 혈과 육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존재 아니면 말씀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못 삽니다. 영원한 축복을 못 누려요. 버림받아야 돼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무심코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렇게 무심코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손들어 보세요.”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몇 년 더 살았다. 그것도 부자로 살았다. 그것은 사도바울에게 썩어질 면류관입니다. 그것은 문제꺼리도 안 됩니다. 구조선이라고 올라탔습니까? 그거 지옥 가는 거예요. 적어도 진짜 여러분을 구원하는 구원은 여러분을 살려주는 분이 아니고 제대로 더 밟아서 죽여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만날 때, 내가 늙어서 맞이할 죽음을 앞당겨서, 이제는 내 몸이 쇠해서 죽는 것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저주받을 목숨인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계기로서 마태복음 10장 28절을 주신 겁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 말씀을 미리 앞당겨서 주신 겁니다. 감당 안 되는 것은 다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 방해자가 누군가? 이 몸이 아니고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이 몸을 가지고 ‘나’라고 여기는 이 자아가 방해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말씀을 주셔서 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몸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을 계속해서 투입시키는 겁니다. “네 몸 네 것 아니다. 네 몸 네 것 아니야!” 계속해서 투입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아까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이라도 나한테 못 이길걸? 천하의 하나님도 날 못 당한다.” 그게 바로 혈과 육, 자기 자신의 싸움,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나에 대한 그 미련, 나에 대한 애착, 죽어도 이것을 인간은 포기 못할 겁니다. 인간들이 혈과 육의 싸움을 어떻게 하는가? 일단 자기가 알아요. 일단 뭔가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뭔가는 보고 있어요. 그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아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 갭, 틈이 생겨요.
그 틈을 하나로 일치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매우 몰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연히 잘사는 동네의 집안에 들어가 보게 되면, ‘저 집 너무 좋다. 내가 평소에 꿈꾸던 집이 딱 저 집인데 나도 돈 벌어서 저 집에 살아야지.’ 어떤 잘 사는 집이 있으면 그 집은 내가 옛날에 꿈꾸던 그것을 다시 기억나게 만들어요. ‘바로 저 집이야. 내가 꿈에 그리던 바로 그 집이야.’ 이렇게 아는 거예요. 아는데 실제로 현재 내 것으로 보이는 것은 없지요. 그만큼 틈이 갈라지고 벌어져 있는 거예요.
집까지는 너무 거창합니까? 남자들은 자동차. 길에서 슝, 하고 지나가는 차를 보면 온갖 튜닝을 다 해서 음악은 쿵쿵쾅쾅, 나오면 ‘그래. 나도 돈 벌어서 저렇게 튜닝 해야지.’ 그 다음부터 갑자기 직장 일에 열심을 내고, 꼬박꼬박 저축하고, 그동안 잘 먹던 술도 안 먹어가면서 절약을 하지요. 왜?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이게 남자들이에요. 그러면 집에 있는 여자들은? TV에 일곱 살 먹은 애가 나오는데 4개 국어를 한다? 이제 돌아버렸습니다. ‘그러면 내 아이는? 아직 한글도 제대로 안되는데?’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애를 천재로 만드는 것인데 현실은 애가 나를 안 닮고 자기 아빠를 닮아서 공부를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열심히 벌어서 학원비 만들어서 자기애를 천재로 만드는 작업에 매진하게 되지요. 아는 것(천재)과 보이는 것(현실속의 내 아이)의 틈을 메우는 일에 매진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하고 있는 혈과 육의 싸움이에요. 그렇게 매진하는데 얼추 맞췄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거기에서 또 새로운 현실이 나오거든요. 이만큼 왔다고 생각했는데 가보니까 거기 엄청난 세계가 또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집은 비슷하게 따라 붙였는데 내가 그리던 그 집에 가보니까 완전히 인테리어가 끝내주는 거예요. 자기는 달랑 집만 있는데. 그래서 집 안에 합당한 외제가구들로 채워야 돼요. 또 시작이라.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이 일치되어야 해요. 또 시작이라. 이게 혈과 육의 싸움이에요. 그런 가운데 자아는 점점 더 발전하는 겁니다. 벌써 그만큼 높은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이 서로 안 맞으니 거기에다 뭘 집어넣는가? 법, 율법을 집어넣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온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면, “내가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이 일치가 안 되어서 화가 났는데,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면 이 틈을 메워주실 거지요?”라고 해서 이스라엘은 열심히 주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거기에 매진했습니다. “옆에 있는 다른 나라, 이방나라처럼 우리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실 거지요?” 하고 율법에 매진한 거예요. 그런데 그게 혈과 육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 혈과 육의 자아성, 조금 어렵게 해서 이렇습니다. 자기의 자아성이 덩어리가 되면 이게 국가와 민족과 공동체가 돼요. 사적인 자아성이 뭉치가 커지게 되면 국가와 민족과 공동체, 교회공동체가 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뭘 하는가? 말씀에 심지어 목숨까지 겁니다. 어제 토요일에 집안에 모임이 있어서 갔다 왔는데 4시 반부터 집안 어른들이 난리 났어요. “붙어라! 붙어라!” 5시 넘어서 전쟁이라도 난다 하니까 “붙어라, 붙어!” 6시 되어서 회담한다고 하니까 “에이, 씨! 그냥 붙어보지.” 국가와 민족, 그거 자아의 확장입니다. 나의 확장, 육과 혈의 확장이에요. 전쟁하면 교회마다 기도한다고 난리날 거예요. “주여, 우리 편이 이기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서 우리의 소망과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자아를 소멸시켜 버렸습니다. 자기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아가 소멸된다니까요, 자아가. 자아가 소멸되면 진짜 엉덩이 밑에 깔려 있던 진짜 나의 자아가 따로 나와요. 이 자아는 뭐냐? 주님의 말씀, 주님의 약속, 주님이 주신 말씀에 입각해서 새로 만들어야 될 자아가 여기 엉덩이 밑에서 튀어나와요. 밑장빼기를 통해서 튀어나온다니까요?
그동안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질식시키듯이 엉덩이로 꽉 누르고 앉아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런 현상이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지금 저 하늘이 있잖아요. 저 하늘, 보이지 않는 것. 제가 다시 이야기 할게요.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을 일치시킨다고 했잖아요. 이게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이 생명의 면류관은 안 보이는 겁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 이전에 썩어질 면류관이 먼저 있다는 말입니다.
썩어질 면류관은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렇게 했는데 사람이 자기 육체를 위해서 심는 이유는, 썩어져도 심는 이유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보이는 내 몸을 나 아니면 누가 관리하겠어요?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뭘 로? 내가 아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을 일치시키는 것을 통해서. 그러면 내가 아는 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아는 것은 허황된 환상을 자꾸 만들어내요. 이게 어디서 나왔는가? 욕망에서 나오거든요.
이 욕망에서 나온 그 아는 것과 실제 현실세계에 주어진 것이 안 맞으니까 열심히 매진하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 몸을 위해서? 아니요. 이 몸에서 유발된 나,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썩어질 것을 거둔다 이 말이지요. 영생이 아니고!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영생은 어디서 오는가? 하늘에서 오잖아요. 그러면 하늘을 쳐다보면 되지 않겠느냐?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구약시대고요, 신약시대에는 하늘이 땅을 향하여 침공했어요. 침공입니다. 외계인의 침공처럼. 하늘이 땅을 향하여 침공을 해버려요.
침공을 해버리면, 우리의 자아가 그 침공을 당하면 압축이 돼요. 응축되어서 납작해져 버려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가까이 오신 분이 누구냐? “천국이 어디 있어? 천국이 어디서 오는데?” 하고 보니 초라한 행각의 예수 그리스도가 저벅저벅 오신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겁니다. 이것은 야곱이 밤중에 천사와 만난 것과 동일한 순간입니다. 이제는 내가 저 사람을 씨름해서 이기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예수 입에서 나오는 저분의 말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의 씨름입니다.
감당 못합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감당 못합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한 것은 사회정의를 구현함이고 사회정의가 될 때 그렇게 정의로운 사회 안에 속해 있는 나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보다 더 큰 악을 저지른 사람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뭘 보는가? 그 가운데 있는 나를 봐요. “네가 내 일, 이 주의 일에 방해물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안하고 누구를 친다? 사도바울이 누구를 친다는 말입니까? 자기 몸을 쳐버리는 거예요.
“부족합니다.” 이런 식으로 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내가 복음에 참예함이라. 곧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어떤 인간도 인간이라는 자체가 없음을 알리는 그 일에 내가 참여함이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데 자꾸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우기는 나 자신을 쳐대는 거예요. 매일 치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세상의 특징은 뭐냐? 모든 것의 개성을 살리거든요. 예를 들어서 나만의 개성을 살리는데, 하지만 연세 좀 드신 분은 누구나 알아요. 지하철이나, 시장이나, 학교나, 영화관이나, 광장이나, 어딜 가도 삶의 스타일이 밋밋해요. 다 똑같아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고, 그 인간이 또 그 인간이고, 풀장에 가도 마찬가지고, 시장에 가도 마찬가지고. 무엇을 닮았는가? 죽음을 닮았어요. 죽음은 복수가 아니고 단수에요. 죽음은 하나입니다. 지난번에 설교했잖아요. 철수에서 죽음을 주사기로 쏙 빼내고 그 다음에 영희에서 죽음을 주사기로 쏙 빼내보면 그 죽음은 똑같은 성질의 죽음이죠. 똑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똑같은 죽음을 가지고 ‘나’라는 이유 때문에 남하고 다른 인생이라고 우기고 싶어 하는 겁니다. “너 돈 없지? 나 돈 많아. 나 키 크지? 너는 키 작아.” 이런 식으로 나만이 체면과 자존심, 나만의 색깔과 무늬, 얼룩덜룩한 무늬를 까는 거예요. 제가 어제 집안 친척 애에게 물었어요. 고 2 학생이에요. “너 공부 왜 하니?”라고 물었어요. 제가 주관식으로 내지 않고 객관식으로 냈어요. 1번,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공부한다. 2번, 세계 평화를 위해서 공부한다. 나는 정답이 안 나올 줄 알았어요. 정답이 나왔어요. “나를 위해서 합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지. “나를 위해서 공부합니다.”
그 말이 막 제 입에서 나올 뻔 했어요. “네가 뭔데? 너는 너를 몰라. 너는 너를 모른다고. 부분밖에 몰라. 태어나서부터 네 기억에 들어 있는 그것밖에 몰라. 그게 너의 전부가 아니야. 그리고 너 같은 인간들이 뭉친 것이 국가와 민족이야. 그게 세계야. 그게 세계 안이고 그게 국가와 민족 안”이에요. 생명의 면류관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치는 거예요.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살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우리에게 다가온 난파선은 놀랍게도 진짜 옆에 같이 죽었던 그 예수 그리스도에요. “내가 오늘 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것은 바로 강도 네가 너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너를 봤기에 너는 나와 한통속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주의 입에서 나온 그 모든 말씀은 주님이 알아서 회수하고 성취를 해버려요. 그것을 믿으셔야 돼요. 그것을 믿으셔야 된다고요. 나라는 존재가 날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던져진 주의 말씀을 위해서 나라는 몸이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말씀이 나를 회수해 가라는 그 말이에요. 그러면 따라가게. 그게 구원이고 생명이라는 말이지요. 왜 자꾸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깁니까? 자아가 소멸해야 되는데. 자아가 소멸하지 않는 이유는 뭐냐 하면, 나와 다른 타인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나 타인이고 자아고간에 시장바닥이나 지하철을 타 보세요. 다 똑같아요. 전부 다 인간은 밋밋해요. 죽음은 밋밋한 거예요. 죽을 때 혼자 죽는 것 같아도 남 다 죽는 죽음이고 아무 색깔도 없어요. 안 죽어봐서 모르지만. 가룟유다가 귀신이 들렸거든요. 가룟유다가 귀신들렸으니까 죽을 때 마지막 귀신들린 티를 다 내줘요. 자살해서 죽는 순간에 다 내주는데 그게 뭐냐? 그는 내가 의식하는 죽음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자기가 의식하는 죽음이 죽음의 전부인 줄 알고 ‘까짓 거 죽으면 되지.’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가룟유다가 알고 있던 죽음은 뭐냐? 자기가 태어나면서부터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에요. 아는 것과 보이는 것이 자기 죽음 안에서 일치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 아는 것도 부분이고 지가 죽는 것도 부분이고. 전체는 주님이 알고 있는데.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룟유다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을 소멸 못한 그것이 문제였어요. ‘아, 주의 말씀을 들어보니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거네.’ 그렇게 되면 된다는 말이지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횡재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간음합시다.” 그렇게 나올 수는 없는 문제지만. 왜냐? 간음한 여인에게 그동안의 타자, 또는 타인, 남이라는 것은 전부 다 헛방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남이 있기에 내가 있는 거거든요. 나와 다른 존재를 남이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모든 구분이 예수님 앞에서는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더냐?”라고 물으니까 “그런 타인은 다 가버렸습니다.” “그래. 진정한 너의 타인은 나밖에 없다. 이제는 그 타인마저 너의 자아가 되어라. 내가 너를 용서하리라.”
예수님이 뭔데 우리를 용서합니까? 바로 우리 몸이 주님의 자기 것이기 때문에 용서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것이 용서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약속의 구현이고 성취가 되는 겁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한마디로 말해서 사자성어로 ‘밑장 뽑기’ 깔고 있는 다른 화투장을 내놓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내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그동안 싸워왔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전부 다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요소에요.
오늘 본문을 설교 준비 한다고 딱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어요.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 말씀을 딱 들을 때의 느낌이 뭐냐? ‘아, 인간들이 지금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구나. 지금 방해하는 요소의 힘이 이 세상에 흐르고 있구나.’ 그게 딱 감이 잡혔어요. 뭔가 방해하고 있다. 나의 구원하시는 주님을 누가 방해하는가?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에게 상담하기를 “목사님, 제가 잔느기용처럼 신앙생활 하고 싶습니다.” 잔느기용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중세 프랑스의 순교한 여자에요. 그래서 제가 “왜 자꾸 잔느 기용을 모델로 삼습니까? 주님은 당신을 모델로 삼았는데 왜 당신은 주님 말고, 우리를 모델 삼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엉뚱하게도 주 기철이나 손 양원, 손 씨 집안, 주 씨 집안, 그게 뭐가 있다고 그걸 모델로 삼습니까?” 주님은 허접스러운 우리를 자기 모델로 삼으면서 자신의 능력, 복음의 위력을 지금 증명하려고 해요.
사사기 16장에 보면 삼손의 여자가 1, 2, 3 이 있었거든요. 2번째 여자 만날 때 블레셋인들이 삼손을 포위했다고요. 그 때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잖아요. 나실인의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오니까. 그 때 삼손이 포위된 성문의 문짝을 그대로 어깨에 들고 헤브론 산으로 가버렸다는 그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은 우리가 둘러치고 있는, 나의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설정해 놓은 모든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완전히 들어 내버려요. 완전히 해체시키고 부숴버려요. 이 딴 체면치레가 나에게 뭐가 필요하냐는 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성령의 위력입니다.
십자가의 성령의 위력이 내 안에 있는데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응시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남 앞에서 내가 독자적인 나를 따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왜? 너나 나나 둘 다 밋밋하기 때문에. 죽음 같아. 죽는 자리에서는 직업이 뭔지 키가 큰지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최근에 맹한 C그룹회장도 죽었잖아요. 죽은 사람은 죽고 삼송그룹회장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안 나타나고 있고. 이게 다 뭐예요? 똑같아요, 모든 인간은. 개죽음입니다. 그 개죽음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자기 자신을 개죽음으로 몰아세웠기 때문에.
원래 가만 놔두면 주께서 말씀대로 영광스러운 생명을 주시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가 나름대로 나서서 나를 건져보겠다고 “주여, 이러면 구원되겠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되겠습니까, 교회 와서 목사 말 들으면 구원되겠습니까? 아니면 헌금 하면 복 받겠습니까?” 자기가 자기 법을 자꾸 집어넣어요. 인간의 법은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을 합치시킬 수 있는 본드가 되지를 못해요. 인간의 언어가 오히려 인간을 죽입니다. 합치된 의미를 몰라서 자기가 답답해 하다가 끝내 모르면 자살해 버려요.
‘진리를 알아야 될 텐데. 모르면 죽자. 예수를 알아야 될 텐데. 예수 모르면 죽자.’ 지가 예수를 왜 알아야 되는데? 주님이 알려주는데 지가 왜 알아야 돼요? 우리는 가만 살다 보면, 갑자기 노래가 하나 생각나네요. ‘살다 보면’ 이걸 들국화가 불렀나요, 아니 ‘사노라면’, 가만히 사노라면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 항상 우리에게 그런 사태가 찾아옵니다. ‘아, 주께서 우리의 뜻대로 안 되게 해주시는구나. 이미 하늘나라가 말씀을 가지고 침공했구나.’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여기서 하늘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매일같이 달라집니다. 하늘개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전에는 날 살리는 하늘개념인데 살아가면서 나를 아주 노리고 작심하고 날 죽이려고 하는 하늘개념으로 바뀔 때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교회 찾아온 그 자체가 이미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옵소서.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이 아니고 주의 말씀에 입각한, 주 앞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이 주의 일을 훼방하는 일이 아닌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주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저희들도 할 수 있도록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