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고전 9장 19-23(구원의 방식)1508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19-23절입니다. 신약성경 274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사도바울이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마귀를 상대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6장, 그리고 성경 여러 곳에도 나오는데 ‘나의 싸움은 혈과 육의 인간들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악마와 싸운다.’고 이야기했어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그 말은 사람은 나의 상대가 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전에 이미 사도바울은 사도가 되기 전에 이미 사람과 상대를 해왔었어요. 사람을 어떻게 해볼까, 그렇게 했습니다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람들이라는 그 자체가 과연 사람이냐를 다시 한 번 묻게 돼요.
사람이라는 게 환상 속에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사람인지,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사람이라고 우기지만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귀, 불순종의 악한 영들에게 지배받고 있는 죄인들이었을 뿐입니다. 그 말은 독자적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능력이 있다. 나는 이것도 잘하고 이런 솜씨가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해도 나중에 입을 다물 순간이 와요. 그 순간을 사도바울은 죽음의 순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왜 죽는가?’ 하는 거예요. 그렇게 잘난 체를 하면서, 그렇게 뽐내면서, “한평생 나는 당당하게, 떳떳하게 누구한테 꿇리는 것 없이 살아왔다.”고 큰소리치면서 버티다버티다 그 큰소리치는 그것마저 입을 닫아버리고 죽어버리잖아요.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누가 너를 죽이느냐? 과연 누가? 누가 너를 죽이느냐?” 하는 겁니다. “죽고 싶어?” “아니요.” “살고 싶어?” “예” “그런데 너는 왜 죽어?” “글쎄요.” “네가 뭘 모른다는 것은 네가 인간이냐, 하는 것부터 문제가 있다.” 하는 겁니다. 네가 인간이냐는 그것부터 증명을 못하는 거예요.
분명히 너는 스스로 인간이라고 우기지만 사탄의 눈에서 보면, 또 하나님의 눈에서 보면 이것은 조작된 거예요.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 행세를 했고 사람 흉내를 낸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맞아요. 우리는 흙이었습니다. 사람이었다가 흙 되는 것이 아니고 흙이 잠시 사람 모양새를 유지했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는 환원되는데 흙으로 환원되지요. 그렇다면 “흙으로 될 것을 왜 이렇게 사람으로 살게 합니까? 이왕 흙으로 다 될 것, 아예 태어나게도 말지 왜 사람 모습을 해놓고 나중에 흙으로 돌리기는 왜 돌리십니까?” 사람 되게 한 그 의미가 뭐냐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의미가 없는데 하나님, 나에게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에 잠시 인간구실, 인간구실도 못하지만 하여튼 인간 비슷하게 만들어낸 겁니다. 지금 사도는 마귀하고 싸우는 거예요. 마귀가 보는 관점과 주님의 관점가지고 싸우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너를 구원코자 함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22절)라고 하는데 구원코자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알고 있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이 사도바울 내가 알고 있는 세계로 입성시키겠다.” 그게 구원이거든요.
“너는 갇혀 있어서 못 빠져 나오는데, 구원, 다른 말로 구출, 내가 너를 구출시켜서 나 있는 곳에 데려오는 작업을 하겠다. 하는데 그것을 뭘 로 하는가? 오직 복음으로만 한다.”는 겁니다. 23절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으로 한다면 사도바울 당신이 우리를 복음으로 구원합니까?” “아니요.” “그러면 사도바울 당신은 왜 우리 앞에 얼쩡거리고 등장합니까?” “나는 복음으로 뭘 하는 게 아니고 복음에 참여합니다.”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복음으로 사람을 건지는 이는 따로 계신데 나는 지금 거기에 참여된 형편에 놓여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쉽게 갑시다. 사도바울이 “나는 사람하고 상대 안한다. 사람하고 이야기해봐야 소용도 없으니까. 나는 마귀하고 상대한다.” 할 때 사람들이 그 소리 듣고 뭐라고 하겠어요? “마귀하고 상대한다면 그냥 마귀하고만 상대하세요. 우리는 건드리지 마세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당신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당신을 건드립니다. 나는 거기에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귀하고 당신 싸움하라고. 나는 나 건드리는 것이 싫다고. 나 건드리면 짜증나니까 나 건드리지 말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싸우는 그 적이 현재 당신을 가두고 지배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건드려야 되겠습니다. 왜? 당신은 현재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당신을 건드려주게 되면 당신은 복음으로 인하여 당신이 있던 그 자리 말고 다른 자리로 당신은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에 참여하기 때문에, 마귀와 싸우기 때문에 당신을 꼭 건드려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인생 괜찮게 살아가는데 왜 나를 건드리려고 하느냐?”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합니다. “건드리는 방법은 사람의 종류에 따라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는 뭐냐? 유대인에게는 유대인 건드리는 방식 따로 있고 유대인이 아닌 율법이 없는 사람들, 유대인 빼놓고 다른 사람들인 이방인들에게는 건드리는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마귀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마귀하고 싸우는 방법은 복음을 가지고 싸우는데 마귀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를 인질로 잡고 우리를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하고 싸우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를 건드리는 거예요. 건드리는 방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건드려요. 하나는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으로 건드리고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이 없는 식으로 건드립니다. 율법이 있는 자에게는, 사도바울 본인이 율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율법이 없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율법 없는 사람이 율법 있는데서 율법 없는 쪽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율법 있는 식으로 건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율법이 없는 사람은, 이 사람들은 율법이 없는데 율법을 경유해서 구원이 되어야 하기에……, 전에 사도바울이 유대인이거든요, 율법이 있는 자잖아요. 율법 있는 자 입장에서 율법 없는 사람을 율법 없는 식으로 건드리는 겁니다. 문장이 길지요? 그런데 문장이 길다고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오늘 본문 문장이 그 문장이에요. 사도바울은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닙니다. 진실을 이야기해요. 친절을 베풀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마귀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마귀하고 싸우고 나는 건드리지 마. 누가 싸우지 말래? 마귀하고 싸워!”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지금 마귀가 너를 인질로 잡고 있다.”는 말이지요. 내(사도바울)가 너에게 다가감으로 말미암아, 건드려줌으로 말미암아 너로 하여금 불순종의 악한 영들, 세상 신, 복음을 가리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서 건져내는데서 그동안 홀로 있던 것이 아니고 마귀가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복음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제가 서울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물에서 건져내야 전에 우리가 어디에 빠졌었는지를 알아요. 물에서 건져내서 옷이 축축해야 ‘내 옷이 왜 이렇게 축축하지?’ 주위를 살펴보니 네안데르탈인인지 뭔지 고대인의 진흙발자국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게 내 발자국이라는 말이지요. 내 발자국을 따라가 보니 물이 있어요. 그 물에서 내가 나왔어요. 아, 물에서 건짐을 당하고 난 뒤에 비로소 ‘전에 물에 빠졌었구나.’를 아는 거예요. 그걸 아는 사람이 누구냐?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 나하고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나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야. 나는 너희와 싸우는 것도 아니야. 다만 주님께서 마귀하고 싸워서 승리한 그 선물을 줬는데 그 선물이 뭐냐? 내가 어디에 빠져 있는 것도 몰랐는데 주께서 날 찾아와서 사도되게 만들어서 다시 내가 뒤돌아보니까 나는 마귀에 홀딱 빠져서 지옥 가는 사람이 되었던 거” 예요.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합니다. “사람이 왜 죽는가?” “죽으면 죽는 것이지 무슨 이유가 있어?”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죄 지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 듣고 “그러면 죄 안 지으면 될 거 아닌가?” 하잖아요. 죄 안 짓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악한 행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요, 행동이 악해요. 안 악한 행동이 없다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이제 안 거예요.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착한 것이 없고 처음부터 죄에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모든 행동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죄 값은 사망이 되는 거예요. 그 코스를 도중에 내가 팔자를 고친다고 내 힘으로 잡아 당겨서 바꿀 수가 없어요. 태생이 죄인데 죄가 죄를 쫓아낸다고 열심히 해 봤자 그것마저 죄가 돼요. ‘나는 죄 짓지 않는다. 나는 바르게 살아야지.’ 바르게 사는 그것이 죄의 또 다른 면면이에요. 죄의 또 다른 모양새가 바르게살기에요. ‘이제는 착한 남편이 되어야지.’ 그게 죄라니까요? ‘이제 착한 아내가 되어야지.’ 그게 죄에요. 그게 모아져서 이유도 없는 죽음에 이르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어요.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적인 기능의 말씀을, 권면의 말씀을 줬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5절이 나와 있는데 거기에 열아홉 가지의 계명 같은 것이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첫째 계명, 자기를 사랑한다. 두 번째, 돈을 사랑한다. 세 번째, 스스로 자기를 긍정, 자랑한다. 네 번째, 교만하구나. 다섯 번째, 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가? 자기 자랑으로 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느냐는 말이지요. 여섯 번째, 부모를 왜 거역하는가? 여기서 부모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부모를 이야기합니다. 일곱 번째, 왜 범사에 감사하지 않고 불평들을 해 대는가? 여덟 번째, 왜 거룩하지 않은가? 아홉 번째, 왜 정이 없고 그렇게 무정해? 열 번째, 원통함을 왜 풀지 못해? 열한 번째, 왜 참소하며 남 고소하기 좋아하는가? 열두 번째, 왜 절제하지 못하는가? 열세 번째, 사납다. 열네 번째,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열다섯 번째, 자기 이익에 따라서 팔고 배신한다. 열여섯 번째, 조급하다. 이건 나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열일곱 번째, 자고하다. 왜 스스로 높이는가? 열여덟 번째, 쾌락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다. 열아홉 번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 “이런 자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뭘 돌아서요? 우리가 바로 그건데 돌아설 것이 뭐가 있어요? 열아홉 가지인데 여기서 두세 개 빠지면 지옥 갑니까? 실컷 십자가 믿음 주장하다가 예수 믿고 난 뒤에 56년 7개월 4일 째에 열두 번째 것, 절제하지 못하면 지옥 갑니까? 교회 나온 지 41년째 되었는데 다른 것은 다 했는데 17번, 자고하면, 스스로 높이면 지옥 갑니까? 이거 못 지켰는데. 50년, 60년을 믿어도 못하는 것이 있어요. 1번,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를 안 사랑할 위인이 누가 있습니까? 2번도 만만치 않아요. “돈을 사랑하며” 연금에다가 최저생계비도 챙기고, 이렇게 돈을 사랑하며. 열아홉 가지 이거 들이대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방인들아! 너희들은 현재 마귀에게 속했다는 것이 이것을 못 지켜서 마귀에서 속한 것이 아니고 이런 절대적인 계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못 들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착하다는 이것이 문제”에요. 나름대로 착해요. 항상 자기긍정이거든요.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낫고 교도소는 물론이고 파출소도 한 번 안가고, 나름대로 최선을 대해 살아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선배들인 유대인한테 배워라. 나름대로 착하다가 망했던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나름대로 착하면 안 죽습니까? 안 죽어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마귀하고 싸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열아홉 가지 말씀을 주게 되면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들리느냐 하면, 마치 계명으로 들려요. “제대로 해. 바르게 살란 말이야. 이게 신자다운거야. 예수 믿고 이거 못 지키면 예수 믿는 것도 도로 무효야. 지옥에 가는 거야. 개가 토한 것을 먹듯이 지옥 가는 거야.”라는 것처럼 들려오는 거예요. 분명히 사도바울은 마귀하고 싸운다 했는데 사도바울이 나에게 잔소리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이것, 이게 바로 마귀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경말씀을 준 것은 지키지 말라고 준 것인데 평소의 행동이 뭐냐? ‘착해야 천당 가, 착해야 천당 가. 나쁜 짓 하면 지옥 가.’ 이것이 자기를 방패처럼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 못 지키면 지옥 가는 줄 알고 열아홉 가지의 이 말씀을 받고 난 뒤에 이것은 큰일 난 거예요.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거 다 지키면 부활됩니까? 부활은 한 분으로 끝났어요. 예수님의 부활로 끝났습니다. 우리는 부활 근처도 안 갔어요.
이방인에게 이 말씀을 준 것은 네가 너 자신을 모른다는 겁니다. 모르는데 이미 물에서 건져내놓고, 축축한 옷을 입고, 물에서 건져내서 십자가로 용서 받아 놓고 네가 과거에 어느 길로 왔는지를 네 발바닥의 진흙을 한 번 보라는 겁니다. 그 더러운 진흙을. 그 진흙을 보니까 우리는 자신만 사랑했고, 진흙을 보니까 우리는 돈만 사랑했고, 진흙을 보니까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긍정하고, 교만했고, 훼방했고, 성질냈고, 절제하지 못했고, 전부 다 질질 끌려나오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오면서 그저 나 살겠다고, 나사는 그것이 진리니까, 남 죽는 것은 즐거운 일이고 나만 살면 되거든요, 나만 살겠다고, 내 식구만 살겠다고 살아온 모든 것이 방금 디모데후서 3장에 나오는 모든 구절을 깡그리 무시한 거예요. ‘나만 살면 되지 이 말씀이 왜 필요한데? 말씀이라 하는 것은 내가 더 잘 살기 위한, 날 축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야?’ 이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물에서 빠져나왔는가를 묻고 있는 겁니다. “네가 진흙자리에서 질질 끌려나온 이유를 알겠어?”라고 묻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힘으로 못 지킵니다. 왜? 우리는 그동안 마귀에게 붙잡혀 있기 때문에 지키고 싶어도 못 지켜요. 특히 1번, 자기를 사랑하며. 이것은 이미 창세기 2장에서 마귀가 우리 인간에게 결정타를 내린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정신개조라 하지요. 정신이 완전히 바뀐 거예요. 단순히 행동에 절제 못한다는 그 정도가 아니고 기본중심자체를 바꾼 거예요.
선악과가 들어오지 않아야 할 우리 두뇌에 선악과가 들어오고 만 거예요. 마귀가 그 짓을 한 겁니다. 인간 아닙니다. 이것은 폐기처분해야할 폐품이에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선악과 뒤에 ‘죽으리라.’가 붙어 있잖아요. “따먹었느냐? 죽어야 되겠네.” 이게 그대로 적용되는 대상이 우리입니다. “따먹었어?” “예” “그러면 죽는다는 이야기인데 죽어라.” 이렇게 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선악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우리가 곧 죽을 인간이라는 뜻으로 누가 정했는가? 위쪽에 계신 분이 정했어요.
그것을 인정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만약에 부정하게 되면, 네가 뭔데 이것을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에 격리조치 당합니다. 그게 지옥이거든요. 성경에서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고 선악과 이야기 나왔지요? 그 다음에 구약과 신약을 가름하면서 나오는 전봇대같이 우뚝 솟은 게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온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그것, 그리고 구약부터 이미 인간은 추방되었어요. 추방되었다. 추방되었다는 말은 추방시킨 분 따로 있고 추방된 우리 따로 있고. 어떤 분에 의해서 우리가 강제로 발길에 차인 거예요. 행복한 곳에서 우리가 쫓겨나간 겁니다. 그거하고 십자가 이야기, 이 두 가지가 투톱으로 성경전체를 결정짓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 두 가지를 기둥으로 성경이 현수교 다리처럼 축 늘어져 있어요. 이쪽은 추방당함, 이쪽은 십자가, 그 사이에 축 늘어져 있는 거예요. 그 사이에 이스라엘 역사가 깔려 있고요.
쉽지요? 문제는 이 큰 두개의 교각에 둘 다 인간이 개입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이 알아서 에덴동산이 지루하다고 나온 것이 아니고 ‘난 저쪽 세계에 살고 싶어.’라고 알아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발길에 차였다니까요? 추방당한 입장이에요. 추방당한 입장이고, 십자가의 용서도 “주님, 죄 지어서 우리 힘으로 안 되는데 어떻게 구원 좀 안 되겠습니까?” 우리가 요청해서 온 십자가가 아니에요. 십자가도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구세주를 요청했던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거예요. 이건 우리가 원했던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받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가 3장에 나오는 추방당한 이야기하고 이 십자가이야기가 전부 다 우리 손을 떠난 거예요. ‘나’라는 선에서 떠난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없어져도 교회 있고요, 있으면 교회 아니고, 그런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 아닌 나’를 구원하는데 우리는 자꾸 이 나, 나를 구원하라고 우기거든요. 그런데 나라는 것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구원 못 받은 상태에서 마귀한테 놀림 받으면서, 언어, 자꾸 어떤 말을 하면서 그 말 가지고 나를 구축한 그것이 가짜 나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걸 살리려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죄 값은 사망이라.” 그 모든 수고가 결국 우리 죄를 이기지 못해서 결국 내 죄가 승리해서 죄 값으로, 내가 만든 나, 장난감 같은 나, 인형 같은 나도 그냥 날라 가버린 거예요. 이 세상은 인형극입니다. 인형들의 집합이에요. 현재 약 65억의 인형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지도자인형은 배가 볼록 튀어나왔어요. 미국지도자 인형은 흑인이고. 한쪽은 마귀가 갖고 노는 인형이었다가 지금은 주님이 갖고 노는 인형이에요. 그래서 I = doll, 아이돌, 말이 좀 안되지 싶은데, 이것은 개그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할일이 있습니다. 어릴 때 국민교육헌장 많이 외웠거든요.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떤 사람은 광복 70년을 맞이해서 이 민족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더 발전해야 된다는 사명도 이야기하던데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인간으로 사는 이유, 우리는 죄를 짓는 훌륭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어요. 죄를 짓는 사명밖에 없어요. ‘아, 죄의 가짓수도 이렇게 많구나.’ 그걸 파악하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죄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어 있기에 죽어 있는 티를 팍팍 내 주는 것이 주님께 영광입니다. 그것이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에 합치된 삶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해 놓고 추방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십자가를 이야기했는데 그 십자가가 뭐냐? 어떤 사람은 죽음을 두 가지로 봅니다. 하나는 가능한 죽음, 또 하나는 불가능한 죽음, 이렇게 죽음을 둘로 나눴어요. 참 잘 나눈 거예요. 가능한 죽음은 뭐냐 하면,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보는 나이 많이 들어서 죽는 그 죽음이 가능한 죽음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죽음, 내가 늙어 쓰러지고 숨이 끊어지면 죽잖아요. 그러면 “그 인간 죽었다.”고 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죽음은 반드시 앞에 붙어요. “어제 ……가 돌아가셨대.” 앞에 사적으로 누군가가 연결되는 죽음, 이것이 인간이 가능한 죽음입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죽음은 죽어도 죽었다고 할 수 없는 죽음이 불가능한 죽음인데 그게 십자가 죽음입니다. 마귀가 계속해서 우리를 협박 공갈했던 그 근거가 뭐냐? 죽기가 무서워서 우리가 마귀한테 종노릇 하고 있거든요. 그 마귀가 죽이는 죽음은 우리가 가능했던 죽음,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협박을 했고 우리는 평생을 쫓기듯이 살아요.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열 살 때, 모든 사람은 동화를 보면서 커 왔습니다. 거기에 인어공주부터 신데렐라, 백설 공주도 나오고, 왕자님도 나오고, 온갖 좋은 것은 다 나와서 거기서 꿈을 키워요. 어린애들이 ‘나중에 커서 공주처럼 살아야지.’ 하고 꿈을 꾸는데 그 어린애가 뭘 모르느냐 하면, 본인이 지금 살았다는 그것을 기초로 해서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애들이 나중에 자라서 사회에 나가면 이제는 공주, 왕자는 뒷전이고 당장 취직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과연 어떻게 하면 사는가, 이 사는 문제로 역행해요. 내가 일단 살았다 치고 그 다음에 ‘내가 어떻게 되느냐?’ 엄마가 밥 먹여 줄 때는 꿈만 꾸면 되는데 사회에 나가니까 꿈꿀 여유가 없어요. 24시간 가동되는 것이 뭐냐 하면, 돈 벌어야 돼요. 아르바이트 해야 되고, 애들 과외도 맡아서 하고. 다 돈 앞에서 사느냐 죽느냐, 벌벌 떨면서 살아갑니다. 마귀가 “너 그러면 죽는다.” 그 한마디에 우리는 꼼짝 못하고 그냥 벌벌 떨고 있어요.
하다하다 안 되면 마지막 나오는 게 뭐냐 하면, 가룟유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 까짓 거 이게 죽음이라면 일찌감치 내가 알아서 죽으면 돼지. 고통이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하냐? 죽어가는 것을 생각하자. 죽어간다는 것은 내가 사라져가는 것이고 내가 사라져가는 그것이 기껏 죽음이라면 고생 실컷 하다가 사라지나 지금 아플 때 미리 당겨서 사라지나, 사라지고 없어지면 그만인데 내가 알아서 내가 죽어버리면 이것은 죽음에 대한 나의 유일한 최후의 승리다.’ 그 말이지요.
죽음과 더불어서 생각하는 겁니다. 죽음자체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냥 죽음과 더불어서 생각하는 거예요. ‘죽음이란 의식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냥 잠자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뭘 놓쳤느냐 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몰랐던 거예요. 그렇게 죽어봤자 마지막 날 인자가 “야,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하고 호출하게 되면 자살한 그것도 다 헛수고한 겁니다. 소용없어요. 괜한 짓을 한 거예요. 자살이라는 추가적인 죄를 더 지었을 뿐이에요.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죽음에서 벗어날 처지가 아닙니다. 백번 자살을 해도 우리는 죽음에서 못 벗어나요. 우리가 기껏 생각한 것은 마귀가 거짓으로 가르쳐 준, “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잘못되게 가르쳐준 그 죽음, 우리가 가능한 죽음이 죽음의 끝인 줄 알았지만 사실 진짜 죽음은 죽어도 갈 수 없는 곳, 죽어도 못가는 곳에 죽음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건너편, OVER THERE, 죽음 저편, 죽음 저편에 영생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걸 장담합니까? 이렇게 장담합니다.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부활의 첫 열매가 아니에요. 그냥 소생이에요. 부활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냥 자기가 살던 세계에 다시 태어난 것뿐이에요. 가능한 죽음세계에 다시 가능한 죽음뿐입니다. 불가능한 죽음은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최초로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기대하지도 못하고 예상하지도 못한, 마귀에 속했기에 아무리 아이디어를 짜내고 아이큐 250짜리 동원해도 도저히 알지 못한 그 세계에 들어가신 거예요.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게 바로 구원이고 그 세계가 바로 복음의 세계에요. 마음 낮춘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믿는다고 구원이 아니에요. 자기를 부인하면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말씀, 율법을 주면 자기가 그거 지키면 그대로 되는 줄로 오해한 거예요. 그래서 이미 율법에서 벗어나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을 받는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 찾아가서 하는 말이, “나도 옛날에 많이 해봤거든? 이걸 지키면 그걸 지킨 내가 그 내용과 일치된다고 오해를 했다니까? 옛날에, 내가 옛날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야. 나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며 최고로 율법을 지키는 그 학문의 학자로서 살았던 사람이야. 하지만 그거 다 쓰레기야.”라고 유대인한테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이방인들은 아직 유대인 근처도 못 왔어요.
유대인을 경유해야 비로소 되거든요. 율법 모르는 이방인에게는 율법을 줘야 돼요. 율법적 기능을 가해야 됩니다. 자기 잘났다고 까부는데 율법 줘야지요. 율법 주게 되면, 이렇게 돼요. “여러분, 이제 율법 갑니다. 율법 나가요.” 중국집 가서 짜장면 시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주방장! 아직 안됐습니까?” 하면 “자, 짜장면 나갑니다.” 이제 율법 나가는 거예요. 율법이 나가니까 이 이방인들이 옛날 유대인들이 하는 행세를 그대로 해요. ‘그래, 짜장면이 왔구나. 어? 말씀이네. 말씀을 지키자.’
“그런데 사도바울님! 우리가 이방인인데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니 거짓 종들이 하는 말이, “전에는 성령을 못 받아서 못 지켰지만 이젠 성령 받고 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여러분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젠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착하게 살면 그 착하게 산만큼 영광 돌리고 착하게 안 살면 영광을 가리니까 바르게 사세요.”라고 옛날 유대인들이, 선배들이 실패했던 것을 그대로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악마의 종이거든요.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그대로 한다고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으니까 율법 받은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알고,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았어요. 그 율법 받은 자중에 한 사람이 누구냐, 가룟유다 아닙니까? 가룟유다는 스스로 자기가 저쪽 세계에 못가니까 못가면서도 자기한테는 당당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뭐냐? ‘이렇게 양심에 걸쳐서 고통 받느니 차라리 내가 먼저 죽으면 결국 남는 것은 나에 대한 찬미다. 나는 승리한다. 봐라. 내가 알아서 내가 지은 죄보다 더 큰 벌을 내가 나에게 알아서 가했잖아. 그러니 나에 대해서 수근 대지마. 나에게 욕하지 마. 나는 내 양심을 위해서 자살한 위대한 영웅 같은 사람이야.’
이게 바로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분명히 구원이라는 것은 ‘나 아닌 나’를 구원해야 되는데 이 가룟유다는 끝까지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유대인에 의하면 어디서 만드는가?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 가지고 조립해서 그걸 자기 안에 채우면서 그게 ‘나’라는 겁니다.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지켰나이다.” 이게 나라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하는 말이, “저는 교회 몇 년째 다니고 있고, 나는 목사고, 나는 신학교교수고, 신학박사고, 그게 나”라는 거예요. 이정도로 믿음 좋다는 겁니다. 복음 전하러 다니고 강의하고, 그게 나라는 거예요. ‘이렇게 훌륭한 나’라는 겁니다.
주께서 그 이마에 손가락 대고 밀어내요. “나 너 구원 안하거든! 실컷 찧고 까불어라. 나는 너 같은 존재는 구원 안한다.” 그 말이지요. 그게 바로 네 선배 되는 유대인들, 이스라엘의 실패거든요. 실패의 반복이라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 잘되라고 주신 율법인 줄 알았어요. 성전을 허락하니까 그 성전이 있으면 이스라엘이 영원할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라이터 불 들고 와서 휘발유 뿌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직접 한 것은 아니고 배후조종에 의해서 바벨론이 했지만.
그 성전, 그 금으로 만든 성전을 휘발유 뿌려서 라이터 불로 그어버렸잖아요. 불내버렸다니까요? 그 안에 솔로몬이 만든 모든 기구, 영광 돌리는 모든 재료들, 중요한 것은 다 바벨론이 유물로 빼가고 나머지 시시껄렁하게 보이는 것은 전부 다 불질러버렸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이야?”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거예요. 기껏 너희가 아는 것은 너희가 가능한 죽음 안에 갇혀 살았어요. 내가 너희에게 소개하는 것은 뭐냐? 지금의 너 말고, 네가 조작한 너, 네가 구상한 너, 괜찮은 말씀 끌어 모아서 이게 ‘나’라고 우기고 “정녕 나를 버리시렵니까?” 이렇게 하나님에게 까불거리고 대드는 너, 애초부터 조작된 너, 그 너는 마귀가 만든 거예요.
그 마귀가 만든 ‘나’를 지워버리는 겁니다. 제가 안양에서 강의할 때 쉽게 이런 예를 들었거든요. 새 복권 사면 그 복권에 번호를 감추느라 뭐가 덮여있거든요. 동전가지고 그걸 긁어내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잖아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올 때, 몇몇을 복음으로 구원한다 할 때 이미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를 알아요. 아는데 뭐가 덮여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나는 훌륭한 내가 된다. 그 나는 영원히 구원될 거야.’라는 마귀가 만든 나가 있거든요. 그걸 동전으로 긁어버려요.
동전으로 긁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주께서 성도를 구원해놓고 왜 네가 성도가 아닌지 그 이유를 계속 추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도라고 해놓고 “이래서 너는 성도 아닌 거야. 이래서 너는 성도 아닌 거야.”라고 계속 추궁하시는 이유는 그게 성도라는 뜻이에요. 이게 긁어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네가 말씀을 임의로 해석해서 얼추 ‘나는 이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한 그것을 긁어내는 작업, 그걸 말씀으로 해요.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 할 때 “3번, 4번은 되는데 6번과 7번은 안 되네요.” 골라잡기 합니까? 뭘 골라잡아요? “9번은 나중에 한 5년 뒤에 하고요, 8번, 이것은 제가 5년 전부터 했고요. 아, 미치겠다. 성적이 별로 안 나와서.” 이러고 있는 이 자체, 그 자체가 마귀가 만든 너의 원론적인, 가짜 너의 진면목이에요.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그것은 너부터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인들, 선배들이 이미 그 짓 해왔던 겁니다. “십계명 지키면 복 받지요?” 이미 해 왔던 거예요. “십일조와 안식일 지키면 복 받지요?” 이미 했던 것이고 지금도 교회에서 하고 있는 짓들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저에게 물을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에게 물으세요. “사도바울, 당신은 어떻게 삽니까?” “복음에 참여합니다. 나는 복음에 참여합니다.” “어떻게?” “어떻게, 는 묻지 말라.”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것도 우리가 관여 못하는 일이고 십자가의 관한 일도 우리가 관여 못하는 일이라면 현재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관여해서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뒤돌아보는 거예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구원받았으면 앞으로 여러분이 살날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보면 나이 40대도 있고, 50대도 있고, 60대도 있거든요. “앞으로 살날들이 여러분의 미래가 아니고 여러분의 과거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따로 있어요. “가능한 죽음이 아니고 불가능한 죽음에 이미 속해 있으면, 우리는 거미줄처럼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미 그 쪽에 갔는데 왜 내가 말씀을 지켜서는 못 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기껏 해내는 것이 그동안 ‘이것, 또 이것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마귀 짓밖에는 한 게 없습니다.’를 앞으로 사는 그 만큼 여러분의 과거 모습을 미래에 보여주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영화 필름 돌리듯이, 드라마 보여주듯이 보여줄 거예요.
주님이 마귀하고 싸워서 아무 공로도 없이 그냥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 그리고 사람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말에 자기가 책임지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 인생에, 우리말에 책임지지 마세요. “주여, 제가 거짓말 했습니다.” “너는 처음부터 거짓인데 뭘 새삼스럽게 거짓말을 해.”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가 거짓인데 뭘 거짓말을 또 해요. “그러면 거짓말을 안 하면?” “거짓말을 안 하면 나는 착한 인간 되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를 가리는 거예요. 마귀가 마지막 노리는 게 그거예요. “바르게 살아. 그러면 영광 돌린다고!” 그게 거짓이에요.
영광은 빌립보서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서 영광이에요(빌 2:11). 끝났어요. 십자가 앞에 잘난 나를 내세우는 그것이 영광이 아니고, 그것은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고 십자가 뒤로 물러가세요. 그리고 십자가만 자랑하세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를 진 내가 안 보이느냐?” 이렇게 되면 안돼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십자가 안 졌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본인을 십자가 뒤로 옮겨버려요.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는 바라보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들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모아지기 때문에.
“목사님,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알아채는가?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사도바울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아주 진짜 여유 있게 ‘내가 복음에 참예함이라.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라.’ 했는데 우리는 지금 돈 벌고 애 키우고 살다 보니 그런 여유가 없는데, 그러면 내가 신자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인데, 내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넉넉하게 이야기 못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주 쉬운 예가 있어요. 어제 내가 그걸 알아챘는데. 어떤 사람이 김치를 썰다가 “앗!” 하고 손가락을 베었어요. 벌써 웃으시는 분이 계신데 그 드라마의 장면을 본 모양이에요. 김치를 썰다가 왜 손가락을 베었을까요? 김치를 썰다가 다른 생각을 한 거예요.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약혼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놀래서 손을 베인 거예요. “아야!” 저는 그거 보면서 ‘후스딘 연고 바르고 밴드 하나 붙이면 되지.’ 했거든요. <여자를 울려>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김치를 썰고 있었어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해야지 그냥 있다가 약혼한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는 놀라서 자기 손가락을 벤 거예요. “아야!” 했지요.
우리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나는 내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디모데후서에서 무슨 소리 하는지 그것은 들리지도 않아요. 우리는 끝까지 나만 사랑할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어떻게 하는가? “아야!” 뭔가 예상 못한 틈새가 비어져 나오면서 ‘이건 아니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것은 허구고 허상이야. 이것은 마귀가 조작한 인생이야.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아야!” 하는 그 순간, 주께서는 이야기합니다. “네가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십자가로 구원을 받아놓았으면 ‘내가 어떤 죄를 지었나?’ 그것만 살펴야 되는데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이제는 “네가 잘났는지, 내가 잘났는지? 나는 내 자랑할 만하지?” 그것만 남아서 자랑 질을 해대는 엉뚱한 생각을 하니 주께서는 “현재 너는 구원 받았어.”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위해서 우리가 예상 못한 우연한 사건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미 너희들은 선악에 있었어. 하지만 선악자체가 나에게는 없어. 없는데 없는 입장에서 너희에게 율법으로 다가가겠어. 너희들은 선악이라는 마귀에 아직도 매여 있다. 선한 인간되려고. 악을 멀리하면 선한 인간 될까 싶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인간은 드디어 선과 악을 논할 입장이 못돼.” 거기서 이미 벗어난 겁니다. 선한 것도 없고, 이제는 악한 것도 없고, 복음에의 참여, 하나님이 주신 용서 안에만 존재할 뿐이에요.
이거 3초갑니다. 이거 장담하지요. 이거 3초갑니다. 딱 돌아서면, 돌아서면, 이 십자가라는 김치 썰다가 딱 돌아서면, 엉뚱한 것 보고 있어요. 주께서는 이것 시켰는데 우리 시선은 딴 데 가 있어요. “하나님, 이렇게 착한 일 했으니까 이번 주간에 복 주겠지요? 하나님, 이렇게 내가 회개했으니까 하나님이 복 주겠지요? 아이고, 하나님 이런 잘못을 했으니 이번 화요일쯤에는 벌 받겠지요?” 또 선과 악을 생각하는 거예요.
자식을 멀리 보내놓고, 저 멀리 스위스로 보내놓고 한국에 있는 엄마는 행동을 조심해요. 왜? 나의 착함이 유학 간 딸에서 어떤 좋은 영향을 준다는 거지요. 내가 착한 것을 만회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네가 안 착해도 되는데 왜 그렇게 착해? 음, 착함이 남아도는구나. 이 남아도는 것의 행운을 누구에게 주지? 옳지. 네 딸이 저 멀리 유학 가 있네? 네가 착한 일을 많이 생산하고 그 남아도는 잉여착함을 딸에서 팍팍 부어줘서 딸이 잘 되도록” 바라는 것, 이거 지울 수 없는 우리의 본성입니다.
아들이나 딸은 새벽기도도 안 하는데 왜 엄마는 새벽기도 나와서 무릎연골 다 나가도록 기도를 하는지?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나만 기도하면 착함이 덤으로 생산될 것이고 이것은 나에게는 줄 필요 없이 남아도는 마일리지를 저쪽에 소모하게 되면 그 애는 영문도 모르고 복을 받을 테니까 ‘내가 까짓 거 자식 위해서 무슨 희생을 못하리?’ 그거, “아야!” 해야 돼요. 그것은 내가 만든 환상이고 내가 만든 착각입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살려주는 거요? 유학 보내는 것? 주께서 하시고, 주께서 알아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나는 그 애 보내놓고 이게 죄라는 것을 아야, 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복음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마치 나는 나를 위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교회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한 마귀의 생각, 주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십자가를 알게 하셔서 “아, 우리는 이 땅에서 할 일이 바로 즐겁게 죄짓는 일밖에 없군요.” 내가 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부활의 세계에 입각해서 모든 것, “내 행한 것이 나를 구원한 것이 절대로 아니었구나.” 추방한 것이 내 뜻이 아니었듯이 십자가로 용서한 것도 복음에 참여하라고 일방적으로 복음이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상관없이 성령이 임하면 그 사람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넉넉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마조마 합니다. 하루도 스트레스 안 받고 긴장 늦추고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주여, 십자가로 베이게 하옵소서. 온 몸에 십자가의 그 피가 흐르게 하옵소서. 용서가 흐르고, 사랑이 흐르고, 긍휼이 흘러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