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53강-상(고전9;15-18) 1508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8. 13. 10:04

2015-08-09 12:45:04 조회 : 192         
   상賞 150809 이름 : 이근호 (IP:119.18.86.67)   

상賞(고린도전서 9: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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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8-09 13:27 
상(賞)

2015년 8월 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9:15-18

(9: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9:17)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9: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사도 바울이 상(賞)을 언급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노동해서 얻을 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상 줄게”해서 주어진 상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입장에서 달갑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요청하지도 않았음에도 외부에서 주어지니 심적 부담만 높아질 뿐입니다.

인간들은 그저 안주고 안 받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주는 것도 귀찮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을 언급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앞장 세우시고 인간 세계에 개입하시는 것은 이 상을 통해 인류를 둘로 줄 세우기 위함입니다.

상 있는 쪽과 상 없는 쪽으로 나누려고 하십니다. 상이 발생하는 곳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수행되는 전쟁을 통해서입니다. 창세기 15:1에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이 발생하는 곳에는 반드시 ‘방패’라는 전쟁 기구와 병행해서 드러납니다. 즉은 그동안 인간을 속박했던 적들의 것을 이제는 전쟁에 승리하신 하나님의 것으로 전환되었고 그 노획한 전리품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선물을 주시는 방식으로 도달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쟁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그 요인이 생겼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두 나무처럼 보이지만 서로 연관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악과만 따먹지 말아야 될 과실을 갖고 있지만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이번에는 생명나무 과실도 인간들이 못 따먹는 과실이 되었습니다. 선악과 따먹기 전에서 생명나무에 대해서 ‘따먹지 마’라는 그런 언질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연계시키는 하나님의 일방적 조치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전쟁쪽으로 확산이 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출생은 하나님이 친히 벌리시는 전쟁과 관련을 맺게 되었습니다. 상이라는 이 와중에서 주어집니다. 갈라디아서 3:22에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들의 평소의 삶이란 갇혀 있는 삶입니다. 죽는 게 무서워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남들이 뭐라할까봐 무서워서 점점 외진 곳으로 갑니다. 이 세상에서 돈없이 힘없이 서러움이 무서워서 돈과 힘을 얻는데 매진합니다. 그리고 그 얻어진 돈과 힘으로 자기를 위장입니다.

모든 게 속임수요 거짓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따로 격리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수용소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상이 무엇이냐를 논하기 전에 먼저 상이 없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상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신약에서 인간 그 자체에게 집중합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자기 의로움과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바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의 의의를 무시하는 태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부수어서 성도에게 되돌려주면 그것이 바로 상(賞)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에게 상(賞)이란 바로 죽을지언정, 부득불 해야하는 것,
곧 복음을 위하여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동안 보통 인간들이 죽는 것이 무서워 얼마나 세상 것으로 자아를 덮고 걸치고 다녔느냐를 말해줍니다.
죽는 것이 두렵고, 자기 가치가 손해보는 것이 두렵고, 자신의 자존심이 웃음거리가 되는게 겁을 집어넣고 보다 더 깊은 내면의 토굴을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자기만의 아지트를 인간은 버릴 생각이 없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훼손하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4:8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전쟁이 마감되고 전쟁의 주인공에 의해서 얻어진 선물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나누어주신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사로잡은 자들이 사사기를 통해서 보면 그동안 이스라엘을 심하게 압제하던 이방민족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민족들에게 숨막히듯이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면 모든 인류가 이런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죄지으면 행여 저주받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전의 가치와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꾸미기에 들어갑니다. 자신의 죄성을 종교적이고 교리적이고 실천적으로 커버하게 되며 정작 지키고 싶고, 정말로 사랑하는 자아를 다치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실은 이런 종교문화로 포장을 하고 살기 때문에 여전히 자아가 귀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신약에 와서 인간을 지배하는 악은 모든 분야에서 활개를 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둘로 나누십니다. ‘상 있는 자’와 ‘상 없는 자’로 말입니다. 더 이상 속임수가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하는 일이 더 이상 인간의 일이 아니라 전부다 하나님의 자신의 일로 넘어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내시는 상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게 되면 바로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될만고 돈될만하고 인기높을 만하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을 자기 주변에 깔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열에 서 있는 자입니다.

다이빙 선수가 실수해서 풀에 떨어지지 않고 주변 타일 바닥에 떨어지면 그것으로 선수생활 끝입니다. 파멸이요 파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삽니까? 자신의 본색을 감추는데 필요한 것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삽니까 아니면 자기 속성이 노출되게 삽니까? 살기 위해서 매일같이 사기쳐야 한다는 사실이 그만큼 우리의 본색은 이미 주님에게 들통났음을 의미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난 맛에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8-11 00:02 
51강-고전 9장 15-18(상)1508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9장 15-18절입니다. 신약성경 273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9:15-18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성도에게 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상을 줘도 문제에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상 달라고 하던가요?” 남이 우리에게 뭔가를 주면 수상해요. 부담 된다니까요? 안주고 안 받는 것이 최고거든요. 상을 주겠다고 했을 때 슬슬 이제는 간섭하겠다는 그런 뜻밖에는 생각 안 나거든요. 하나님이 나에게 상 주겠다는 그 말, “잘하면 상 줄게.” 이 말은 달리 들으면 “너는 이제 내가 부리는 대로 부림 받아야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유는? 내 인생, 내 계획은?’ 그런 것은 다 엉망이 되는 거지요. 다 망가지고 뭉개지는 거예요. 그래서 상 주겠다고 하면 고마운 것이 아니고 천리만리 도망치고 싶어요. 지금 이 자리에 안 보이는 분이 있어서……. 나는 내 인생 살아가는데 하나님 네가 뭔데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찾을 그 때나 응답해라. 내가 내 일 할 그 때는 너는 끼어들지 마. 창조했다고 행세하지 마. 창조했다고 해서 행세하는 것이 나는 싫어. 이미 만들어졌으면 내 인생은 내 꺼야.’ 이런 생각은 어느 누구의 생각이 아니고 모두가 타고난 겁니다. 모든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하니 이게 좋아지는 복음이 아니고 굉장히 부담이 되는 거예요. 상 안 받으면 맞을 거 같아요. 주는 상 안 받겠다고 하면 주께서 팰 것 같아요. 차라리 안 주고 안 받는 것이 훨씬 좋은데. 상을 주겠다는 말은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뜻이거든요. ‘네 눈에 너만 일하는 것으로 보이지? 내 눈에 내가 일하는 것은 눈에 안 보이지?’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어떤 이가 저를 공격하기를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는데 네가 복음 왜 전하는데?” 질문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데 너는 가만있으면 되지 왜 네가 복음 전하는데?” 이게 질문이에요. 더운데서 여러분의 아내가 힘들게 부엌일을 하면 어지간히 못된 남편 아니면 “여보, 더운데 도와줄 거 뭐 없어?” 이렇게 반응을 나타내기 마련이지요. 하나님이 일하시면 우리는 가만있게 되어 있어요? 아니면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바람처럼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우리는 남들 보기에 내가 일한 것 같지만 주께서 일하게 하셔서 일한 그런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한다. 나는 나 따로 일한다.’ 이러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뭘 받은 게 없어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아무 교류가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 입장에서는 “하나님, 네가 나에게 준 게 뭐가 있는데? 없어! 없는 거야!” 그런데 성경에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하셔서 된다고 하니까 “그래 일해! 나는 나대로 일할 테니까. 그런데 저 이 근호는 왜 자꾸 복음전하지?” 이렇게 된 거예요. 자기는 받은 게 없어요. 받은 게 없으니까 반응도 없는 거예요.



애가 태어났는데 ‘하나님 뜻으로 태어났겠지. 지가 알아서 오줌 가리고 똥 가리고 다 하겠지. 나는 기저귀 가는 거고 뭐고 없다. 그냥 드러누워 자련다.’ 그런 엄마 봤습니까? ‘하나님이 귀한 아들을 주셨구나. 잘 키워야지.’ 이게 반응이지요. 그래놓고는 ‘야, 엄마가 훌륭하다.’ 하면 “아니야. 하나님이 나보고 너 키우라고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한 거야.” 이게 바로 자식과 부모사이까지 끼어드는 하나님의 일, 그 일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여러분은 있어요?



제가 오늘 교회 와서 20분 동안 파리 잡는다고 애를 먹었습니다. 파리를 왜 잡아야 되는가? 저 뒤에 있는 파리를 안 잡으면 저 뒤에 있는 사람이 파리를 잡는다고 하다가 설교에 집중 못할까봐서 미리 파리를 잡는 거예요. 20분 걸렸습니다. 틈이 있어서 다 들어오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저에게 공격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파리 그냥 놔둬라. 주께서 파리 들어오게 하셨는데 가만 놔두지?” 파리한테 한 번 당해봐야 ‘아……!’ 하고 정신을 차리지요.



여기 하나님의 상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 내가 여기 존재하고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죽어서 만납시다.”가 아니라 지금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지금 일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는데? 어디 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그것은 뻔한 레퍼토리인데, 작년도 그렇고 올해도 그렇고 늘 뻔한 것인데, 그래서 새로울 것도 없는데 뭘 일을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아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25절에 상을 언급하면서 “내가 죽을찌언정”이라는 말을 해요.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신다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상 맞습니다. 상에 대한 합당한 저의 반응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죽을찌언정, 하나님이 죽이신다면 저는 기꺼이 죽어드리겠습니다. 왜? 그게 나에게 주신 상이기 때문에.”라고 이야기해요.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찌질이 상’하고 전혀 다르지요?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준 상은 뭐냐? 받아 챙겨서 소유하는 그것이 상이 아니라 같이 움직이는 그것이 상이에요. 같이 활동하는 그것이 상입니다.



연극무대에서 관객들이 에어컨 틀어놓은 곳에서 시원하게 구경하는 게 상이 아니라 지금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대 위에서, 복음을 위해서 연극을 하고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데 심지어 “죽을찌어정 복음을 위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이것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활동이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상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죽어서 상을 받는 게 아니고 죽어지는 그 자체가 상이라 그 말이에요. 하나님께 반응을 나타내면서 산산조각 찢어지는 그 자체가 상이 되는 거예요.



“목사님, 뭘 받아 챙겨야 기쁘지 자기가 죽는 게 뭐가 기쁩니까?”라고 하는데 이번 수련회 참석하신 분들은 다들 알고 있어요. 내가 너무 과찬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이 허무를 알고 사라지게 되면 그것이 제일 행복한 순간이에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가 허무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 가장 행복해요.
 왜? 이제 그만 살고 사라져도 괜찮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게 되면 나의 수고와 무거운 짐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처럼 ‘야호’가 없습니다.
최고입니다. 내가 사라져주는 것, 이 땅에서 없어져 주는 것.




그래서 상을 설명하는데 하도 그동안 여러분이 찌질이 상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찌질이 상 아시지요, 찌질이 상, 가정 화목, 애 건강, 공부잘하고 부흥성장, 선교사파견, 예배당 짓기, 이런 상, 오래 사는 것, 그런 찌질이 상, 그것은 소유기 때문에 소유는 있으면 더 힘들어져요. 그것을 지켜낸다고. 그 찌질이 상 말고 진짜 상을 사도바울이 소개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쉽게 전달할까를 고민하다가 어제 저녁에 하나 생각한 것이 그겁니다. 올림픽에 다이빙종목이 있잖아요.



다이빙선수가 다이빙대에서 뛰어내려요. 그냥 뛰어내리면 점수 없지요. 공중에서 두 바퀴 반을 도는데 그것도 그냥 도는 것이 아니라 트위스트로 도는 고난이도 동작을 하면서 뛰어내려서 입수할 때는 물 튀기지 말고 쏙 들어가는 식으로 해야 높은 점수를 받는 답니다. 그렇게 물속에 뛰어들 때 관중들은 박수를 치고 다이빙선수는 물속으로 사라지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상은 그겁니다. 두 바퀴 반을 공중에서 돌아서 내려와서는 복음과 더불어 낯선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제일 웃긴다 할까요, 참혹하다 할까요, 다이빙선수가 뛰어내리는데 물에 떨어져야 할 선수가 철퍼덕 하고 맨 바닥으로 뛰어내렸을 때 관중들은 웃겠지만 본인은 죽어요. 피터지고 죽는다고요. 교회 와서 천국 가겠다고 뛰어내렸는데 나중에 보니 바닥에 떨어졌어요. 천국에 못가고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이런 처참한 지경이 다 있습니까? 지금 누가 “아이고!” 했는데 그게 맞아요. 이건 보통 문제 아니에요. 교회 왔는데 지옥 갔다?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물속에 뛰어내릴 목표를 가졌는데 자기 몸을 던져 보니 타일 바닥에 떨어져서 피는 터지고, 점수는 빵 점을 받고, 응급구호 팀에 의해서 사이렌 울리면서 병원에 실려 갈 판이에요.



중간에 어떤 작용에 의해서 풀장에 빠져야 하는데 그 중간에 끼어든 그 작용을 받은 적이 없는 거예요. 자기가 물이라고 여기고 자기 몸을 던졌는데 맨바닥에 떨어진 거예요. 처참한 지경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찌질이 상을 상이라고 여겼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알아왔기에 그렇습니다. 복음으로 하나님 살아계심에 반응을 나타내면서 “죽을찌언정” 이것마저 하나님이 내게 내리신 상이라는 사실을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그 이야기하면 그 목사는 교회에서 쫓겨나는데. 그 이야기 하면 교인들 아무도 안 올 건데요? 상, 보너스 받기 위해서 왔는데 죽으라고 하면 누가 오겠어요?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스스로 자기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해요. “궁금해?”라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내 상이 무엇인지 궁금하면 오백 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궁금해? 그러면 답변해줄게. 나의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 이렇게 나온 거예요. “내 상이 무엇이냐? 내 권리를 포기하는 것. 포기할 수 있는 반응을 나타내는 이것이 나의 상”이라는 겁니다. 권리를 포기하면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권리를 포기한다는 그것이 중간과정이 되어서 나중에 보너스를 많이 받는 것이 아니고 내 권리를 포기하는 이것 자체가 주께서 나에게 허락한 상 그 자체라는 겁니다. 이거 해서 상 받는 것이 아니고! 그걸 노리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뭘 노린다는 것은 그 중간과정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거든요.



“예수를 믿습니다. 마음을 낮췄습니다. ‘마음 내려놓기’(그런 책도 나왔지만)”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놔야 되는데? 백날 내려놔도 노리는 게 따로 있거든요. “내려놓으면 뭐 주실 건데요?” 그걸 노리는 이상 그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그것은 철퍼덕,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인간이에요. 내려놓는 그 자체가 상인데 이거 내려놓으면서 주께 하는 말이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이렇게 내려놓으면 됩니까? 더 내리라는 말입니까? 이보다 더 내려갈까요?” 백날 내려가 보세요. 철퍼덕, 타일바닥인데.



마음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상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요, 16절에 보면 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부득불’ 하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드라마 <주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부득불’이라고 나왔어요. 한참 전에 나온 드라마인데 그거 보면서 “아, 저 단어는 고린도전서 9장의 단어다!” 했어요. 강철 검을 만든 사람 이름, 다시 기억이 새로울 겁니다. 부득불, “이것은 그 원인제공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야. 결코 아니야. 이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 이 짓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죽을찌언정, 죽는다고 할찌라도 이 일은 피할 수가 없어. 왜? 부득불 해야 되기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예수 믿으면 구원해 줄게.” 이런 계약 같은 것이 여기는 없어요. “네가 예수 잘 믿으면 나중에 천국 보내줄게. 잘 믿어.” 이런 계약관계, 타협, 양해각서, 이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구원 받는 그것이 아니에요. 이미 구원의 길에, 복음의 일에 접어 들어버렸어요. 구원을 챙기고 안 챙기고 할 그런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어떻게 하면 구원 됩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 될까요? 이케요?(이렇게 해요?) 저케요?(저렇게 해요?) 이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하나님께서 날 가만두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상이라는 표현을 한 거예요. 상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왜 언급을 하셨느냐 하면, 개성이 각자인 너무나 다양한 세계를 그 구조로서 둘로, 대조적인 위치로 나누기 위해서 상이라는 언급을 하신 겁니다. 상 있는 자와 상 없는 자로 이 전 인류를 두 조각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교회 와서 “상은 뭔데요? 상을 어떻게 받는데요?” 이것부터 생각하지 마시고요, “상이 없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이것부터 생각을 해야 돼요. 상이 없다는 것, 상이 없다는 것.



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혼자 살았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성경에서 상이라는 말이 어디에 나오는가? 처음 나오는 것이 창세기 15장 1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나오는 이 말이 너무너무 어려워요. 소유개념으로 풀 수가 없어요.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 보고 상을 달라고 했습니까?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들이대시는 겁니다.



“아브람아!” “예” “내가 너에게 큰 상이니라.” 아브람이 “누가 달라고 하던가요? 그냥 살도록 가만 놔두세요. 찾아오시는 것도 이제는 부담됩니다. 누가 달라고 했습니까?”라고, 아마도 아브라함이 묻고 싶어서 환장했을 거예요, 그렇게 물으면 하나님께서 “네 인생 이걸로 끝났어. 이제부터 네 인생이 아니야. 내가 꾸려가는 인생이 될 거야.”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고 한 그 때부터 아브라함은 이미 자기 인생 거덜 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집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어요. “믿는 자여! 아브라함 뒤에 줄서라.” 그런 뜻이에요. 아브라함 같은 신앙고백이 아니라면 그것은 철퍼덕, 하고 물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일에 떨어져서 지옥에 빠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상황과 동일한 상황에 너에게 들이닥치면 너는 이미 신자”라는 겁니다. 이것은 네가 이렇게 저렇게 행동을 하고 행위를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찾아오심, 그냥 찾아오심이 아니고 상급을 들고 찾아오신 하나님 안에 들어온 그 순간 이미 구원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꿀 거예요. 이름조차 바꿀 겁니다. 그 바뀐 이름, 아브람에게 아브라함, 그 바뀐 이름에서 하나님의 상의 실체, 상의 본질이 드러날 거예요. 처음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나무가 연결되어 있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저쪽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몰랐지요. 따로 노는지 알았지요. 선악과 따먹어도 저것도 같이 따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냐? 생명나무 따먹지 말라는 그 제안이 선악과를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없었거든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에요? 선악과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하기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의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인류를 두 계열로 나누고 말았어요. 두 계열로 나눈다는 말은 그냥 나란히 가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만들어놓고 싸움이 벌어져요. 그 전쟁 중에 없던 상급이 새롭게 발생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 1장을 다시 보면, 거기서 상급이라는 말과 함께 다른 단어를 결부해서 봐야 해요.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방패’라는 말은 전쟁 중이라는 그 말이고 전쟁을 이제 감행하는 겁니다. 전쟁을 감행해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서 너를 상 받을 사람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온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믿음의 계열에 있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그 계획이 들이닥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상이 생기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생긴다고 하고 이제 ‘그 상은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이거예요. 그 상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 상은 우리를 덮고 있어요. 우리를 덮치고 있습니다. 가끔 남편들이 아내에게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들이 있어요. 어떤 경우냐 하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웬 괴물이 누워있을 때인데 아내가 팩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요. 이 전에 알던 아내의 얼굴이 아니고 복면 같은데 복면은 아닌 이상한 것을 쓰고 눈만 빼꼼하게 내놓고 있으니까 깜짝 놀라지요. 어떤 남편은 경우에 따라서 ‘얼굴 내놓지 말고 그냥 계속 저러고 있었으면 좋겠다.’하기도 하지만.


덮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는데, 상을 끄집어내는 그 전쟁의 대상이 지금 인간을 덮고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알려준 게 있으니,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율법이 우리를 가두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것은 죄 안에 가두어져 있다는 겁니다. 죄 안에 가두어져 있다.



지금 주께서 뭘 하느냐 하면, 드릴로 우리를 덮고 있는 그 가면, 팩, 팩 정도만 해도 괜찮아요, 그 두꺼운 가면, 그 가면을 드릴로 뚫는 거예요. 뚫을 때 떨어져 나간 조각들을 우리에게 상으로 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평소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 기어들어가는 태도와 행동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자꾸 덧대기를 하지요. 갈수록 두꺼워요. 심지어 뭐로 덮느냐 하면, 십자가 복음, 언약, 하여튼 성경에서 좋은 것은 다 끌어다 자기를 덮어요.



덮으면 자기는 응축이 됩니다. 수축이 되고 자꾸만 더 단단해지지요. 결석 증처럼, 몸에 돌아다니는 돌처럼 자꾸 끼는 거예요. 그리고 누가 찾으면 자꾸 도망쳐요. 자꾸만 도망쳐요. 이야기 몇 마디 하다가 자기 자신이 들통 난다 싶으면 또 도망쳐 버려요. 그 일에 전문가가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는데 그 자기의 죄인 됨을 율법이라는 그 팩을 통해서, 팩 정도만 해도 괜찮다니까요, 아예 토굴, 율법으로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속에, 아무리 쑤셔도 안 들키는 곳에 자기를 점점 더 숨기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 발견할라치면 다시 도망쳐요. 도망쳐서 계속 더 깊숙이,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서 토굴을 만들고 그리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이미 그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이 이방인이고 그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그들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상 줄게.” 상을 다른 말로 세 자로 하면, “너희들에게 전리품을 줄게.” 전쟁은 주님이 해요. 왜냐하면,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연결시키는 그 고리는 주님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연결되려면 전쟁은 주님이 하셔야 하는 겁니다.



주님이 전쟁을 하셔서 죽음에 있는 자를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중간자로, 중보자로 주님이 스스로 나서셔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나서시는 그분이 전쟁을 해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이 신약에 오면 ‘주’가 돼요.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옛날 구약에서 전쟁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님이 되셔서 전쟁하고 계신다는 그런 뜻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요. 전쟁한다는 그 뜻은 뭡니까? “우리는 우리 힘으로 갇혀 있음에서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냥 묻혀 살고, 도망치기 바쁘고, 그저 토굴 속으로, 나도 모르는 내부의 더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가는 일, 온종일 24시간 하루 일과가 그것이고 그것밖에 안됩니다.” 그런 고백을 우리는 할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말합니다. “기다려라. 내가 드릴로 뚫고 찾아갈 테니까.”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보면 ‘주 예수’라는 말이 이렇게 많은 내용이 담겨 있어요. 그런데 구약 다 제거하고, 마태복음의 족보도 지루하다고 없애버리고, 다 떼어버리고, 그냥 “목사님! 저 천당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쉽네요. 주 예수를 몇 번 믿으면 됩니까? 2만 5천 번 믿을까요, 3만 번 믿을까요? ‘주 예수, 주 예수……,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처럼(창가학회에서 하듯이)하면 되고, 그 다음에 교회 와서 남들이 눈 감으니까 모방하면 되고, 쉽네.”



교회 와서는 남 흉내 내서 종교생활, 문화생활 하고, 밖에서는 내가 하던 일 하고, “그런데 이 근호 너는 왜 복음 전하나? 하나님은 하나님 일 하고 나는 내 일 하면 되었지 왜 너는 가만있어도 되는데 왜 복음을 전하나?”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가가면 또 기어들어가 버리고. 또 토굴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려요. 말 좀 할라 치면 기어들어가 버리고. 다시 돌아오게 되면 또 공격하고, 찾아가면 또 기어들어가고, 돌아오면 또 공격하고. “너만 예수고 너만 목사인가?” 또 공격하고, “이야기 좀 해 봅시다.” 하면 또 기어들어가 버리고. 비겁하기 짝이 없네요. 참 비겁해요.



‘나는 나만을 위해서 산다.’는 그 실태를 차마 끄집어내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상은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는 그것을 드릴로 뚫어서 빼내거든요. 그러니까 상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 생활을 계속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일요일 되면 교회 나오고 평소에는 자기 일 하고, 나는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때, 전쟁을 할 때 분류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을 격리조치 하겠다는 거예요. 이 격리조치보다 더 무서운 말이 없어요.



격리조치 하겠다는 말은 수용소를 따로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을 모독했으니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네. 내가 다 알아서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벌이는 그 모든 일에 전혀 반응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주의 영광, 주의 이름으로 돌리는 영광을 훼손했거든요. 그 훼손한 사람은 천국 못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가리니까 따로 격리조치 해서 수용소를 따로 만들어놓았는데 그게 지옥이에요.



이 상이라는 이 단어가지고 슬슬 주님께서 우리한테 개입하고 인간 세상에 달려듭니다. 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쟁을 주께서 소매 걷어붙이고 “아브라함아! 기다려봐. 내가 너를 가지고 전쟁할 테니까. 너는 행한 것도 없어. 행한 것도 없지만 너는 반드시 복을 받을 거야. 저쪽에서는 복 받기 위해서 애쓸 거야. 왜? 자기 밖에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노력을 해도 본인이 해야 돼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주께서 관여하시네요. 관여하셔서 죽었던 아브라함을 살아 있는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는 겁니다. 심지어 이삭까지 바치라고 하면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그것이 아브라함이 요청했던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이지요.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허무입니다, 허무. 주신 아들 사라질 때 허무지요. 처음부터 없었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있다가 사라져보세요. 얼마나 아쉽다고요. 저 뒷자리에 제 아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가 지금 앉아있어요. 아내가 있던 자리에 아내가 없어버리면 굉장히 허전하거든요. 제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되면 옵니다.



있다가 없으면 이렇게 허전한데 문제는 스스로 자신도 그렇게 보라는 겁니다. 있으니까 아쉽지만 내가 없어질 때 그게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라면 기꺼이 없어져 줍시다. 그게 세상만사 모든 것을 잊는 유일한 행복한 순간이에요. 하지만 “죽을찌언정! 부득불!” 이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은 하나님의 일로서 그대로 남아있는 겁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이게 사사기 5장 12절에 나오는 전쟁에 나왔던 대목을 인용한 겁니다. “깰찌어다 깰찌어다 드보라여 깰찌어다 깰찌어다 너는 노래할찌어다 일어날찌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찌어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야빈이라는 가나안족속으로 하여금 무려 20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하게 했지요. 이스라엘을 압제한다는 말은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굉장히 힘들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사를 등장해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사사를 통해서 승리케 하시고 “그 승리한 모든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고 찬양하는 대목이 사사기 5장이에요. 드보라가 찬양하는 대목입니다.



찬양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이 이스라엘 약속의 땅 어느 구석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라고 찬양하는 거예요. 그런 찬양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가 토굴 속에 있다가 자신을 덮고 있는 것이 날라 가버리고, 자신을 덮고 압제했던 그것들이 다 조각조각 나버리고 주께서 그 떨어진 모든 조각들, 전리품들을 모아서 “자, 이것이 내가 승리한 증거물이다.” 하고 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겨줄 때 비로소 그 때 아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제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상을 이렇게 넉넉하게 주시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상이에요.



이게 구약이잖아요.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바울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해버립니다. “인간은 자신의 법 지키기로 인하여 더욱 더 숨 막히듯이 갇혀 산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의에서 못 빠져 나오는 미련한 존재, 이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자기 의로움, 자기 잘난 맛, 자기가치, 자기의미, 자기 훌륭함, 여기서 무슨 수로 빠져나옵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려놓으라고요? 내려놓으면 저의 가치를 보존해 주실 거예요?” 이렇게 곁눈질 하면서 내려놓는 이것이 무슨 ‘내려놓기’입니까? 이것은 철퍼덕,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실패한 다이빙선수지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심지어 신학교수가 되고 신학박사가 되어도……,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한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이별은 만남보다 참 쉬운 거예요. 윤 도현 밴드가 부른 ‘사랑했나봐’라는 노래의 첫 가사의 내용입니다. 어떻게 이별이 만남보다 쉬운가? 그렇게 사랑한다, 죽고 못 산다, 하다가 헤어질 때는 딱 한 순간이에요. “그만 만나자. 끝!” 어떻게 이별이 만남보다 쉽습니까? 제가 정답을 이야기했지요. 그게 전부다 부자연스럽고 억지였다고. 잘나지도 못한 인간이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렸으니 죽으면 천국 보내주겠지.’ 하는 부자연스러운, 억지스러운 짓들을 해 온 겁니다.



그러다가 집안에 무슨 불화 생기면 한반에 “내가 예수 믿으면 나는 나쁜 놈이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 안 믿는다.” 하고 한 방에 교회 안 나와요. 자기 자존심 건드리고 자기 가치 건드리면 한 방에 교회 안 나옵니다. 어디 갔어요? 그 자아 어디 갔습니까? 토굴 속에 들어갔어요. 아무도 들키지 않는 곳에 기어 들어갔습니다. 상이 없는 자의 전형적인 모델케이스에요. 그동안 믿는 척 한다고 참 수고 많았어요. 교회요? 문화입니다. 문화 활동이에요. 노인정 문화 활동하고 똑같은 거예요. 그냥 팩 하나 뒤집어 쓴 겁니다.



진짜 교회는 그 팩을 벗기는 거예요. 두드러기가 나든지 피부가 벌겋게 되든지 관계없어요. 그 덮였던 팩을 하나님께서는 벗겨내는데 우리 힘으로는 벗겨낼 수가 없어요. 우리는 본 얼굴 안 들키려고 얼른 다른 것 가지고 커버합니다. 주께서는 벗겨내시고 내가 스스로 자기 의를 갖추기 위해서 동원시킨 것, 대표적인 것이 개혁주의신학, 성화론, 삼위일체이론, 십자가언약, 교회 좀 다니면서 들었던 것, 그런 모든 것을 전부 다 찢어버립니다. 심지어 예배당까지, 교회라는 공동체까지 찢어버립니다.



십자가 마을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못돼요.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를 모르니까 십자가마을이 아직도 유지된다고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어느 누구도, 너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겁니다. 구원자가 없어요. 어떤 위대한 기독교 영웅 같은 그런 자가 등장하면 용서하지 마세요. 주 기철이니 뭐니 그런 자를 용서하지 마세요. 어느 누구도 나를 가렸던, 나를 완전히 들춰내서 말씀으로 발가벗긴 채, “네가 이렇게 죽을 짓만 하고 살았어. 너는 너밖에 모르지? 그치?”라고 완전히 우리를 노출시켜 줄때 그 사람은 그동안 자기가 자기를 꾸민다고 애썼던 무거운 짐에서부터 벗어난 겁니다.



자기의 직업으로 자기를 가렸고, 자기의 예쁜 인물로 자기를 가렸고……, 예쁜 인물로 자기 가린 사람들 많아요, 우리 교회에. 하여튼 예쁜 인물로, 그리고 건강한 가정화목, 자기가 아는 지식, 이런 것으로 얼마나 자기를 가려 왔습니까? 더운데, 덥지도 않습니까, 그 이불? 좀 시원하게 삽시다. 좀 벗고 삽시다, 정말! 그 교회라는 문화 활동, 덥지도 않은가 몰라. 이제는 교회 와서 주님 알지 마시고요, 바깥에 직장에서 아시고, 농사짓다가 아시고, 그래서 주께서 완전히 껍데기를, 그 팩을 그 때 그 때마다 직장 상사를 통해서, 우리 부장님을 통해서 완전히 벗겨내는, 주께서 그렇게 해내시는 ‘하나님의 상’주시는 그것, 하나님이 벗겨주는 그 상 주심을 교회에서 말고 바깥에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그만 살아도 되는데, 내가 미쳤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하, 나는 세상이 어떻든 간에 밥이나 먹고 살면 그만이다 하는 이것, 이게 바로 내 진면목이구나.’ 그것을 노출시킬 때, 얼마나 시원합니까! 한 21도쯤 되는 것 같아, 시원~해. 아, 나는 나 살려주면 신이 뭐가 되었든지, 부처가 되었든지 하여간에 나만 살게 해주면 제일 좋아, 라는 그것이 나의 진면목이고 내 진짜 모습인 것을. 그게 그 본모습이에요. 그것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커버한 겁니다.



죄에 갇혀 있던 우리를, 이제는 우리를 떼어낼 때, 우리는 날라 가고 그 떼 내어져서 날라 가는 죄를 보세요. 보게 되면 내 얼굴, 그 이미지가 다 카피되어 있어요. ‘아, 나 저렇게 살았지. 그래, 저렇게 살았지.’ 이게 다 보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에요. 성경 보면 그 욕 얻어먹는 사람들, 우리가 그들을 욕할 입장이 못 돼요. 우리가 바로 그 욕 얻어먹는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수련회 때 이야기 했거든요, 삼손이 여자 밝혔다. 여자1, 여자2, 여자3, 여자 밝혔거든요. 그런데 삼손에게 수수께끼가 왔을 때, 블레셋이고 뭐고 간에 여자가 밝히는 삼손이 내민 수수께끼에 “저게 뭐야?” 하고 우, 다 몰려든 거예요.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삿 14:14) ‘뭐지? 이게 뭐야? 여기 뭐 있을 거야.’



개 코나 뭐 있어요?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삿 14:18) 삼손의 개인 식사 문제를 수수께끼로 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 신이 임한 것이거든요. 신이 임하니까 신이 임한 그 경계선에 뭐냐, 하나님의 나실 인이라는 본래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줬던 하나님의 본래 계획, 하나님의 전쟁이 거기에 딱 마주쳐 있었던 겁니다.



허무가 있는 쪽으로 인도해 내시고 마치 가는 살얼음 밑에, 귀 기울여보면 그 밑에, 봄볕에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 습자지 밑에 흐르고 있는 주님의 자기 증명, 자기 예정, 하나님의 계획, 그것을 귀담아 들으라고 우리를 얇게, 얇게, 아주 허무하게 얇게 만들어서, 정말 습자지 같은 흰 페이퍼, 아주 얇은 종이처럼 우리를 얇게 놓고, 그 얇은 종이 위에 투명하게, 얇으면 얇을수록 투명하게 솟아오르는 것은 뭐냐? “부득불 인생을 내가 살게 하고 죽을지언정 주께서 저를 주의 구원의 일에 참여케 하셨군요.” 하는 주님의 상(賞)보여주는 일에 우리가 끼어들었다는 그 즐거움, 이 기쁨, 오늘 설교의 주제는 “얇으세요.”



그 동안 나를 속이고 나를 숨겨왔던 그 모든 답답한, 그 두꺼운 담요 다 벗으시고, 내가 내 식대로 살면 허무한데, 그렇게 허무하게 하신 그것이 주의 예정된 일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자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상 주겠다는 것이 어찌나 우리에게 부담이 되던지. 그냥 안 주시고 그냥 나대로 살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왠지 그것이 익숙해진 저희들에게 난입하셔서, 개입하셔서 우리 인생 전체를 죄로 통째로 노출시키시고, 그 자체가 주의 전쟁의 전리품으로 이미 구원을 해주시니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주의 십자가 능력만 고마워하는,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