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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의 허구성(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30. 10:22

 

성화론의 허구성(1)

이근호 목사

 

 

Ⅰ. 서론

 

 

우리는 경험상 두 번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은 우리의 신체는 사실 두 번 죽음을 겪도록 되어 있다. 그래야지만 우리 신체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성의 내용이 드러난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0:4-6, 21:8)

 

 

 

기독교인들의 삶을 정리하면 이 두 번의 죽음을 어떻게 표출하느냐와 관련된다. 쉽게 말해서 ‘왜 인간은 두 번씩이나 죽어야 하느냐’를 오직 거듭난 성도들만 증언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진정한 삶이다. 이 점을 밝혀내려면,

1. 누가 성도를 죽이느냐?

2. 왜 꼭 그 분께서 성도를 죽여야만 하는가?

이 두 가지를 밝혀내면 된다.

 

 

그런데 이 진리에 대해서 반대하고 나서는 측이 있다. 진리란 이 우주 안에서 꼭 반(反)-진리를 불러내게 한다. 아무리 꼭꼭 숨어도 진리가 등장하면 맞은편에 반-진리가 그냥 숨어있지 않고 얼굴을 내밀게 되어 있다. 진리에 대한 반대하는 반-진리의 특색은 특히 신학 내에서 ‘성화론’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된다.

 

 

성화론의 초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우리가’에 해당되는 항목은 강렬한 ‘주체의식’으로 대변된다.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자아가’ 라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지 못할 진리는 애초에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거룩은 거룩으로 간주하지 않고,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복음은 복음이 아니며, 인간을 살려내지 못할 메시야는 메시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어떻게하든지 우리 인간들의 존재성을 확보해주는 식으로 모든 진리적 규정들은 움직여야만 한다는 전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거룩해 질 수도 있고 안 거룩해질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 서서 ‘거룩하게 사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 성화론이다.

 

 

 

따라서 성화론을 인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첫째, 인간의 행위가 추가로 바르게 실천되지 아니하면 결코 거룩이라는 것이 이어질 수 없음.

 

둘째로, 인간의 행함에 의한 성화가 성사되는 과정이 빠지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

 

세째로, 성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주도적으로 행사해야만 함. 만약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나서면 이것은 ‘인간 성화’가 아니라 ‘성령 성화’가 되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화를 인간에게 부탁할 사항이 아니라 성령님에게 부탁할 사항으로 전이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성화에 있어 인간의 의지나 능력이 주도권이 쥐고 진행되는 과정이지 성령님이 주도권을 쥘 수는 없음.

 

설사 성령님과 인간이 서로 교제하면서 협력한다할지라도 어디까지나 성령님은 그냥 외부에서 안타깝게 요청하고, 하소연하고, 사정하고 부탁할 위치에 있기만하지 결코 직접 관여해서 대신 행동해 주는 입장은 못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주체자는 인간이라는 주체자의 그 주체 영역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신앙이 없는지 있는지를 본인이 납득이 가는 윤리성으로 측정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확인해 보겠노라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윤리적으로 측정해서 비로소 안심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 있음’으로 삼겠다는 처사이다.

 

 

만약에 처음부터 참으로 이럴 의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추가적인 인간의 행함의 거론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신앙 있음’=‘구원 완성’=‘거룩 달성’이 충족됨을 증거 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에 나오는,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온갖 명령들이 ‘신앙’의 내용에 관한 사항으로 초점이 모아진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행위를 자신이 측정하는 식으로 신앙을 확인코자 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이나 말씀들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신앙 내용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 도리어 신앙으로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추궁하는 말씀이 될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성화론의 초점은 의외로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내가 만족하는 거룩을 내가 과연 더 이상 미흡함이나 모자람이 없이 완전히 생산하고 또한 그 이상의 상승할 그 어떤 여분도 남겨지지 않고 거룩으로 꽉꽉 채워진 그 완전한 상태를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Ⅱ 본 론

 

 

사람이 무엇을 알고 믿고 실천에 옮길 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배겨 나오게 되어 있다. 이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의미이다. 즉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평가해서 내린 결론이 과연 진정 자기임을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에 자기가 누군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자기 행동을 점검하고 측정하고 분석하고 평가를 내린다면 그런 것은 기껏 오류에서 나온 오류들의 연속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 자신을 오류없이 파악하려면, 오류 없는 분을 기준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그 오류없는 분을 하나님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었다고하자. 그렇더라도 과연 인간이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마저 오류가 아닐까?

 

 

십계명 제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고 나온다. 이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하나의 신만 유통하고 있지 않음을 이미 참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과의 차이를 아는 안목이 갖추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십계명 1 계명조차도 무의미해진다.

 

 

즉 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안목을 갖지 않는 인간에게는 이 십계명 1계명을 평생 들여다본다 할지라도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영원히 ‘다른 신’만들만 배회하다가 평생을 끝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이라고 묘사된 경우가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아담 안’에 놓여 있다는 말은 곧 ‘죄 아래’ 놓여있다는 말이고, 죄 아래 놓여 있다는 말은,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 아무리 부지런히 성경 말씀을 묵상해도 거기서 그 어떤 진리는 도출될 수 없다.

 

 

구약 성경은 바로 저주받을 이방민족이 왜 저주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강퍅해야 될 이방민족이 왜 강퍅해야 하는 지를 ‘언약 안’과 ‘언약 밖’으로 설명하는 논리에 부합되는 논리이다. 이처럼 참 하나님도 모르는 처지에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거론한다는 것은 고작, 거짓 하나님에게 거짓 구원을 구걸하는 식 밖에 안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기 전에는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신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십계명 돌판이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 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에게 당하고 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항이다.

 

 

그들이라고 결코 완악하지 않거나 교만하지 않거나 목이 곧지 않는 백성이 아니거나 강퍅하지 않거나, 자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그런 자들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저주받고 징벌받는다. 옳게 살았다면,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알았다면 과연 징벌과 저주와 심판을 받았겠는가?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 31:27)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는 사곡한 종류로다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 32:5-7)

 

 

이처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이 계명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철회할 의사가 없으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만이 이 어두운 세계 속에서 빛의 세계를 따로 창설하고 건설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따로 택한 자들이 있다는 말은 이들만큼은 이 하나님의 새로운 거룩의 내막을 맛보게 하고 창세 전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과 자비에 대해서 감탄과 찬양과 감사가 울려나오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즉 이 지상의 인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세 전의 기획된 대로 움직이는 피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 속의 세계로 인도함에 있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 이스라엘-이 자신의 능력으로 순순히 그 세계로 끌려 들어가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그 거룩한 말씀에 본의아니게 끌려 들어가게 되므로서 이들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거룩과 의로움과 하나님의 얼굴의 무서움을 역사 밖으로 드러나게 하신다.

 

 

이 말씀이 직설법적이 되었든 명령법적이 되었든, 그리고 그 어떠한 양식의 말씀이든 간에 인간들은 그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의해서 이미 자신들이 속해 있는 그 죄악의 구조를 마음껏 외부로 방출하는 해석을 쏟아내게 된다. 그 해석이 바로 성화론을 품고 있는 모태로서의 ‘인간이 주체가 되는 구원론’이다.

 

 

즉 인간 긍정에 기초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그런 죄악된 신학을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위장하여 배태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기존의 인간 세계의 죄악 구조와 하나님이 주신 언약 구조와 정면 충돌을 빚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자신이 택한 민족에게는 ‘언약의 세계’를 열어 보여주므로서, 기존의 선악체계와 이 언약 체계가 얼마나 차이지게 상호 적대인가를 알려 주신다. 이 충돌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희생자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으신다. 연속적으로 희생자가 발생한다. 마치 아벨처럼….

 

 

이 희생자의 등장은 인간들이 호락호락하게 하나님의 세계를 영접할 위인들이 못되고 모두 ‘하나님의 원수’로 버티고 있음을 말해주는 바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희생자와 그 희생자를 희생케 하는 지상의 공격자의 만남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희생자를 근간으로 ‘대신 죽으심’ 형태의 ‘언약 완성’으로 약속하셨다. 이렇게 되면 장차 ‘메시야 안’ 즉 ‘예수님 안’에 놓여 있게 되는 자들은 거룩이든, 의로움이든, 구원이든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긍정적으로 거론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 바로 이런 자들의 안목에만 “나 외에 다른 신”라는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 즉 참 신과 거짓 신의 차이점은, 인간을 긍정하는 신이냐 아니면 인간을 부정하면서 다가오시는 신이냐로 구분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예수님 안에서는 옛날 ‘언약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 그대로 벌어진다. 일시적이 아니라 그 안에서는 영원토록 동일한 작용이 벌어진다. 그 일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을 부정하는 일이다.

 

 

성화론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부정당하지만, “저는  부정당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한번 했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곧장 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긍정 당하는 존재’로 변모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루어지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어서 속히 자아가 긍정적인 존재로 재 탄생(새로운 피조물) 되기에 희망하는 성급한 마음에서 나온 판단이다. 어떻게 부정당한 자가 어느 새 다시금 긍정적인 인물로 다시 시작되는가? 여기에 대한 논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은 거룩한 분에 의한 거룩하지 못한 피조물에 대한 심판이요 저주이다. 마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온 이후에는 전에 있던 사적인 에서와 야곱의 관계란 사실상 소실되어 버린 상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 6:14에 나온 말씀처럼 이제부터 구원의 주체자는 성도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시고 직접 주도하시고 직접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성도가 주체자가 나서서 세상과 관여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 세상이란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성도는 자신이 마냥 십자가만 있음을 증거하고 자랑하면 그만이다. 그 십자가 안의 세계가 곧 거룩이며 구원이며 생명이며 천국이다. 성도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이며 단지 성도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이 살으셨으므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 때문에 발생시킨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죄는 본질이 발각된다. 인간은 자신의 지니고 있는 죄 관념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이 보시는 죄 관념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이해할 수 없음’을 분명하기에 터져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참으로 생각하시는 본연의 죄 관념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죄관념에 준해서 십자가 사건와 연결시켜 죄를 상쇄시키려고 시도하게 되면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자신을 ‘용서받은 의인’, ‘구원받은 의인’, ‘영생 얻은 새로운 피조물’로 착각하는 자아 뿐이다.

 

 

이 잘못된 의인관 속에서 더 이상 십자가가 계속 머물 이유를 갖지 못한다. 십자가는 새로운 피조물을 위하여 자리를 내어주고 추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의 말씀과 명령들을 그대로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하는 능력이 차지하게 된다. 이 능력을 행사하는 주체자는 누구냐?

 

 

그것은 당연히 인간 본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뭘 할건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마저 하지 못한 의로움과 거룩함을 성취해보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세상에 대해서 자아가 ‘옳음’과 ‘거짓’를 가려내어 ‘옮음’ 쪽으로 실천해 옮겨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의 문제는 이것이다. 과연 이 세상 안에서 옳고 그름을 구분지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거짓 되는지를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골라내고 가려내고 분류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면, 빗물이 한참 필요한 철에 전혀 하늘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이 비를 내리지 않는 대자연에 대해서 옳지 않음을 인간이 감히 이야기할 수 있느냐 말이다. 또한 자신이 고이 길렀던 아이가 갑자기 죽게 될 때에 그런 병마에 대해서 옳지 않음을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가?

 

 

결국 인간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은 대 자연에 대해서가 아니라 같은 인간들이 내놓은 것들 뿐이다. 이 ‘내놓은 것들’이 바로 인간들이 행한 실천이나 문화나 문명인데 이런 대상들은 모두 평가가 가능하고 판단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 이유는 인간들 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짜여져 있기 때문인데 그 ‘의사 소통’이 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은 곧 ‘언어구조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언어 구조 형식’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들의 옳고 그름의 개시이다. 인간은 자신의 실천성이나 행위에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을 부여하는데 따지고 보면 그 모든 것이 언어라는 형식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꽥!”하고 고함만 질러도 이것이 그 사회 안에서는 서로가 의사가 통하는 언어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판사가 언도를 내리는 재판장 안에서 판사의 언어를 듣고나서는 갑자기 죄수가 “꽥!”하고 고함을 쳤다는 것은, 곧 “당신의 진위와 판단 여부에 나는 동의할 수 없어!”라는 죄수의 강한 불만을 드러낸 말이 된다. 따라서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진리와 거짓, 참과 오류에 대한 분석은 언어분석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서도 서로 올바른 해석을 내놓았다고 하는 것도 결국 언어분석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서로 내세우는 식이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언어분석이 이 인간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확정지어 줄 수 있을까? 사전에 각기 갖게 되는 선입견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만약에 언어분석 형식으로도 옳고 그름이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소위, ‘나는 지금 바른 행위를 하고 있고 바르게 살고 있다’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그 진리성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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