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44강-지나감(고전7;29-31) 1506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9. 08:18

2015-06-07 12:33:04 조회 : 99         
   지나감 150607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지나감 (고린도전서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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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6-07 13:24 
지나감

2015년 6월 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29-31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시간에 대해서 인간은 난감해합니다. 시간 밖으로 뛰쳐나가서 시간을 측정을 재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 안에서 시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답일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때가 단축되었다’라는 주장을 증명할 만한 것이 시간 안에서 발견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평가하는 본인들도 같이 단축되기 때문입니다.

‘때가 단축되었음’에 대해 현상적으로 사도가 제시한 증거는 바로 그동안 집착했던 모든 집착들을 손을 놓는 현상들이라는 겁니다. 아내 있는 자는 자는 없는 것처럼 살게되는 현상이요, 가진 자들은 없는 것처럼, 돈에 대해서 무감각한 사람처럼 사는 현상이요, 우는 자들은 우는 것도 무의미함을 알고, 매매하는 자들에게 있어 장사일 조차 꼭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간주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제대로 사도의 소식을 이해하려면 사도와 동일한 안목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심도 있게 설명하게 되면 단순히 예수님 존재와 자기 존재와 만난 것이 아니라 사도는 십자가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이미 놓이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시간이란 모든 이의 삶의 방향을 하나로 집결시켜 버립니다. 집결된 이들이 어디로 하나가 되어 끌려갈까요? 그것은 시간 창조의 출발점, 즉 시간에서 시간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나님과 그 아드님에 의해서 창조된 그 자리까지 이끌려 당겨집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누구를 위한 시간인가’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의 종말’이 아니라 ‘시간의 종말’을 실시하십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KTX 열차를 시간으로 본다면, 인간들이 열차 안에서 객실을 옮겨타는 싟이 바로 ‘시간 속의 종말’에 대한 인식입니다. 즉 “지금은 이래도 얼마 안 있어 언젠가 이 세상은 멸망할거야. 우리가 그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야지”라는 인식입니다.

하지만 KTX 열차 자체가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 안에서 이러한 객실 옮겨다니면서 움직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신약에 와서 시간 자체가 쭈구려듭니다. 그 뒷면에는 예수님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관심 둔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행함의 흔적을 남긴 이 시간의 지평을 아까와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을 받았기에 모든 가치와 옳고 그름의 출발점은 인간에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 사건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역사를 창조하는 일에 역사 속에 삽입된 사건이 됩니다. 인간들은 선과 악을 자신이 시도한 행위, 그 기점부터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내가 세상에 태어나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되면 이 착한 일이 모여서 나로 하여금 천국에 입성케 한다는 식으로 믿고 싶어합니다. 또는 내가 세상에서 태어난 이러저런 악한 일을 하게 되면 혹시 이 악한 일이 나로 하여금 지옥가게 만드는 근거로 작용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자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악행의 대가가 천벌이라고 안다할지라도 인간들은 악행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벌이 무서워서 악행을 못할 위인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배후 세력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이런 상황과 마주합니다.

누가복음 4 :18-19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자유란 기존의 판에 통용되는 의미에서부터의 탈출입니다. 기존의 모든 의미가 가치는 자아의 존재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만났던 그 십자가 사건은 사도 자신이 없던 그 상황을 위해 본인이 지상에 태어나야만하는 것이 창조성의 기본 원리라는 겁니다.

이와 같은 의견이 요한복음 3:19-21에 나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 갈 사람이나 지옥 갈 사람이나 모두 인간 이전에 있어 빛과 어두움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조치로 인생을 꼭 그런 식으로 빈틈없이 살아와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행함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그 행위가 꼭 나오도록 조치하신 분의 존재함과 그 의도가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판을 어떤 식으로 바꿀까요? 노아 홍수(심판)에서 하나님께서 판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그 엄청난 일보다 더 엄청난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서 저주로 죽이시는 일입니다. 그 죽이시는 의도는 ‘죄를 지닌 인간’에 대한 여지없는 분노를 폭발하시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따라서 인간은 자기 믿음에 실패해야 합니다. 자기에 대한 모든 기대는 다 실패로 마감되어야 합니다. 차라리 자신의 죽음과 자살조차 무의미한 일로 실패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의미의 출발지점은 자기 행함 이전에 있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나 있기 전에 먼저 계신 분에 의해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 계신 분이 십자가 사건을 들고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탄 KTX마저 우리가 숨을 곳이 없이 모두 불바다 됨을 간파할 것입니다. 지옥간 부자가 지옥불 속에서의 관심사는 동생들이 자기가 있는 곳이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은 시간이 단축된 곳이요 멈춰서 사라진 곳입니다. ‘내가 어디 가느냐’보다 먼저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주님답게 드러내기 위해 후에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평가에 마음 두지 않는 자유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6-08 21:14 
43강-고전 7장 29-31절(지나감)1506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뭔가 주변 정리하라는 겁니다. 죽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지요. 아내 있는 것, 재산 가진 것, 열심히 살아온 것, 또는 울었던 일, 또는 웃었던 일,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는 날, 그런 때가 온다는 겁니다. 시간이 그렇게 되면 남은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이 말씀대로, ‘이 말씀이 과연 그래.’ 하고 수용이 되고 납득이 되고 인정이 되는 인간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겠지요.


지금 사도바울이 내뱉는 이 말에 대해서 “‘저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렇게 동의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인간이 그동안 끄집어냈던 모든 의미 있는 것, 그리고 고민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 같은 것들은 방금 열거한 여러 가지 사항에 집착하다 보니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뭐냐, 하는 거지요. 도대체 예수님이 왜 나타나셨는가, 하는 겁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나타난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자유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누가복음 4장 18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자유가 두개 들어가요.


한 마디로 해서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려고 왔다.”는 겁니다. 자유인의 모델이 있어야 할 텐데 모델은 예수님 본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했으니까. “성령이 임하면 너희도 나처럼 된다.” 그렇게 되지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그 말, 가난한 자가 복음을 원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가난한 자는 돈을 원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서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돈 줘버리면 정작 있어야 할 자유가 막혀버린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복음 4장의 말씀이나 오늘 본문의 말씀, 돈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는 그 말씀의 취지에 부합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준 자유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되는가, 그걸 아셔야 돼요. 자유를 성립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때가 단축하여진고로”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가 때를 단축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때를 단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시간 속에서 종말이 온다고 이해하시면 안돼요. 시간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고 시간 자체가 종말이 되는 겁니다. 시간 안에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운동하는 것. 어렵지요? 시간 자체에 서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구약이고 신약에 오게 되면 시간 자체가 거덜 납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KTX 타면서 5호실에서 6호실, 6호실에서 7호실, 7호실에서 8호실로 가는 것, 그것은 기차 안에서의 이동입니다. 시간 안에서의 운동이지요.


“나는 8호실에 가 있을게.” “나는 15호실에 가 있을게.” “나는 16호실에 가서 김밥 먹어야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게 우리가 아는 미래인데 KTX 자체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안에 타고 있을 때는 못 느껴요. 그러나 바깥에서 보면 KTX 자체가 움직여요. 7호선에서 8호선으로 간다고 해서 서울에서 대구에 도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차가 도착을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자기만 움직이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간 밖에 나가야 천국이지 시간 안에 있으면서는 천국 못가요.


시간 안에 있으면 자꾸 미래를 생각하게 돼요. 앞으로 5년 뒤, 10년 뒤, 20년 뒤에 언젠가는 내가 잘 될 거라는 희망과 비전과 꿈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가지고는 천국 못갑니다. 시간 자체에서 휭, 하고 날라 가버려야 돼요. 시간 자체에서 슝, 하고 사라져서 시간 바깥으로 툭, 튀어나와야 돼요. 그런데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이 시간 밖으로 못나갑니다. 생각하는 것이 시간 안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시간도 함께 창조했기 때문에 그 시간이라는 창조 속에, 인간이 6일째에 만들어졌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안식일 지키는 것,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구약 때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를 보내서 인간을 구원할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자 애를 썼어요. 특히 12제가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에게 올인 했습니다.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걸었어요. 그렇게 살게 되면 예수의 나라가 자기의 나라가 되는 줄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십자가에 떠날 때 다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가룟유다만 떠난 것이 아니라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곁에 있던 세 여자들도 오해를 하면서 곁에 있었지 결국 예수님의 세계를 이해 못했어요.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 계시면 예수 믿을 줄 압니까? 예수를 붙들고 사정하고 이용할 생각이나 하지 예수님을 믿겠어요? 못 믿어요.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단순히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만 만나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던 그 짝 나요. 소용 없어요. 사울이 만난 것은 단지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건을 만난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만난 거예요. 십자가사건.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만나고 헤어진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을 만난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사울은 지금 딴 세계에 와 버린 거예요. 판이 바뀌었어요. 놀던 판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기억, 흔적을 이 세상에 새기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지요. 이 세상에서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은 전부 다 자기흔적을 새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서울 가락교회 강의하러 가보니까 서울은 난리도 아니라는 겁니다. 메르스때문에 난리가 났대요. 그냥 감기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KTX 직원들도 다 마스크 쓰고 다니고요. 여기가 네팔인지 어디인지 분간도 안 될 지경이에요. 다들 공포에 잠겨 있어요.


사실은 그런 일이 터지면 공포에 잠길 것이 아니고 죄송해야 돼요. “오래 살아서 미안합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게 자유에요, 자유. 지진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할 때 “주여! 너무 오래 살아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돼야 그게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부들부들 떨기는 뭘 떨어요. 무서워 떤다는 말은 더 살고 싶다는 것밖에 더 됩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왔습니까? 온 이유가 없잖아요. 자유? 무슨 자유요? 주님이 준 게 뭐가 있는데?


저를 서울역까지 태워 주신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메르스가 퍼지는데 휴거되기 보다는 차라리 메르스에 빠지는 게 소원입니다.” 놀라운 이야기를 했어요. 휴거 되지 말고 메르스에 빠지고 빨리 죽으면 돼요. 그에 이 판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이에요. 절호의 찬스가 지금 온 거예요. 특히 누가복음 4장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라고 할 대 그것은 돈이 아니라고 했지요. 메르스가 유행하는 그 지역에서 누가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 동네 메르스가 퍼졌다는데 괜찮으냐고 걱정을 제가 하니까 “평택과 우리 집과는 30분 거리입니다.” 하고 자신만만해요.


어떤 분이 대신 질문해 달라고 해서 온 질문이 뭐냐 하면, “경제정의실천을 외치는 목사가 있는데 그게 맞습니까?”라고 했어요. “이단입니다.”라고 했어요. 경제정의실천이라는것이 뭐냐 하면,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풀어서 소득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것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돈이 좋다는 것은 어디 있는 거냐 하면 기존의 판, 판이 바뀐 것이 아니고 기존의 판에 있는 기억입니다. 기억에 불과한 거예요. 기억을 고수한다는 것은 기존의 판을 끝까지 고수하겠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돈이 없어 어려워하는구나.’ 돈이 없어 어려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 보시기에는 복음이 없어서 어려워하는 거예요. 양식이 없어 갈함이 아니고 말씀이 없어서 갈함이에요.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유산이 있거든 자식에게 꼭 물려주라고. 교회 갖다 바치지 말고 사회에 기부하지 말고 자식에게 줘야 해요. 왜? 자식도 구원 받아야 되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돈이 마약이거든요. 우리는 돈 힘으로 살아가요. 마약 같은 그 돈, 돈이 마약인데 돈 번다고 예수고 뭐고 인간 다 버려놓았잖아요. 그렇다면 그 돈을 자식에게 꼭 물려줘서 자식도 돈 때문에 망가질 때 비로소 자식은 구원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논리가 이상하지요, 지금? “너도 돈 처먹고 망해라.” 그 말이에요. “그래야 네 주제를 안다. 돈이라는 마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통해서 네가 망할 인간임을 깨닫는다.”는 그 말입니다.


경제정의를 주장하는 인간들은 돈이 부러운 거예요. 돈 가진 사람이 시기 날 정도로 부러운 거예요. 화가 나는 거예요. 돈 가진 사람이 맨 날 골프치고 좋은 차타고 다니니까 화가 나서 질투심에 주체를 못해요. “돈 가졌다고 자랑 질 하나? 가진 사람들에게 주지.” 해놓고는 성경구절 다 뽑아내요. ‘부한 자들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디모데전서의 말씀도 뽑고 그 다음에 ‘십일조라는 것은 레위기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모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십일조는 꼭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십일조는 꼭 거두어야 한다.’ 여러분, 지옥 가면 십일조 한 사람들 수두룩하게 있습니다. 아마 십일조 한 사람들 거기 다 갈걸요. ‘출애굽 때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돕는 것이 주의 뜻이다.’라고?


그 모든 말씀들은 돈 주라는 말이 아니에요. 판을 바꾸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가 찬양할 때,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2-53) 이런 말씀은 뭐냐 하면, 이쪽 세계에서는 가난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자유만 얻으면 된다는 거예요. 가난한데 복 받아서 부자 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돈 그까짓 거, 나를 망하게 한 마약.” 이렇게 벗어나는 그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자식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마약을 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목사님, 그러면 줘서는 안 되잖아요.” 줘야지요. 내 자식인데 나처럼 돈 밖에 모를 것이 뻔한데.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크면. 네 주제파악을 하라고 돈을 물려줘야지요. 그걸 왜 교회에 내고 사회에 기부합니까? 꼭 챙기도록 돈을 줘야지요. 돈 달라고 입 떼기 전에 먼저 줘야지요. 부모들이 왜 돈 버는데요? 자식에게 물려줄게 있을 때 힘이 불끈불끈 솟아난다니까요. 나 하나 고생해서 자식 잘 된다는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데. 자식도 없어보세요. 돈 벌 마음도 안 생긴다니까.


제가 옛날에 산 넘어 교회에 있을 때입니다. 그 교회가 어느 교회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 교회 어느 교인, 집사님인데 회갑잔치를 했어요. 촌에서는 회갑잔치를 했어요. 주로 한 동네 사람들이 다들 모였는데 돌아갈 때 고맙다고 선물을 주는데 뭘 주느냐 하면, 담배를 나눠주는 거예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담배를 나눠줘요. 담배에서 발암물질이 수천가지 나온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본인은 담배 피우지도 않는데 담배를 나눠주는 거예요. 왜 담배를 나눠주는가? 그 당시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신 손님들에게 선물을 주는데 담배가 나눠주기가 제일 쉬워요. 매끈한 비닐을 입혀서 깨끗하게 나눠줄 수 있잖아요.


얼마나 해로운 것을 나눠주는 겁니까? 그걸 회갑잔치에 와 주셔서 고맙다는 성의표시로 하는 거예요. 인간의 판은 무슨 판이냐 하면 돈 판입니다. 돈 판에서 이야기하는 그 모든 대화의 마지막은 내 놓을 돈이 있느냐는 그걸로 결국은 끝나요. 마지막은 돈 이야기로 끝나요. “얼마면 되겠어? 얼마?” 막 던지면서 “얼마면 돼? 사랑은 얼마면 살 수 있어?” 전부 다 돈 문제거든요. 모든 판에서의 측정은 돈으로 환산해서 측정이 됩니다. 돈 가지면 성공한 것이고 돈 없으면 실패한 거예요. 이 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으로 자유케 하기 위해서 그 판 자체를 뒤엎어 버립니다. 다른 판으로 튀어나오게 했어요. 그 작업을 노아 홍수 때 이미 실시를 했습니다. 판 바꾸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이 우주 자체를 물로 덮어야, 이 지구 자체를 물로 덮는 식이 아니면 판이 안 바뀌어요. 노아 당시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잖아요. 이 판, 사고팔고 하는 이 판이 무슨 판입니까? 돈 판이고 그게 자기 목숨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태어나서 기껏 아는 것은 목숨밖에 몰라요. 하지만 생명은 다른 판에 있어요. 인간은 목숨만 알지 생명은 몰라요. 목숨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모른다고요. 그 가진 목숨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애를 쓰는지. 어떤 노래 가사에 이런 것도 있어요. 이 노래 가사 보니 이 세상의 판을 그대로 잘 노래했어요. 양 인자가 썼던 가사가 이런 게 있어요.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그거 남겨서 뭐하는데? 판 자체가 바뀌는데.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서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이 노래입니다.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 있는 내 청춘에 건배.” 짜잔, 건배! 내 청춘에!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숯불갈비 집에 가면 나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아줌마! 불판 바꿔주세요.” 그 이야기하잖아요. 주께서는 우리의 불판을 바꿔주는 거예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불판을 바꾸려면 맨홀에 빠져야 돼요. 맨홀. 그 맨홀이 실패의 장입니다. 신앙에 실패하세요. 이게 정답입니다. 신앙에 실패하세요. 신앙에 성공하지 마세요. 내가 믿는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지옥가게 만드는 것들이라고 보면 돼요.


KTX의 5호실에서 6호실, 꼬리 칸에 있는 사람을 제일 앞 칸에 가게 하는 그것이 성공이라고 본 거예요. <설국열차>라는 영화에 보면 나옵니다. 꼬리 칸에서 점점 다 앞 칸으로 가게 되면 거기에 뭔가 있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귀족들이 탄 그 앞 칸은 꼬리 칸을 닮았어요. 목숨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뒤 칸에서 앞 칸으로 가 봤자 맨 그 목숨만 유지할 것이고, 앞 칸으로 앞 칸으로 진격해 봐야 계속 목숨만 유지할 것이고 거기서 종교, 문화, 국방, 치안, 예술, 문학, 모든 자리가 생명은 없고 전부 목숨, 목숨, 목숨밖에 없어요.


어떻게 하면 목숨을 유지하는가? 어떻게 하면 내 목숨이 행복한가? 그것밖에 없어요. 실패니, 성공이니, 그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돈밖에 없고 결국 돈이 최종적인 해답이고.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툭 던지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판 자체가 뒤집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판 말고 다른 판은 하늘에 있는가? 아니에요. 천국 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판 바로 밑에 딱 붙어 있어요. 이걸 뒤집어야 돼요. 거꾸로 서야 됩니다. 거꾸로.


천국은 하늘로 향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어디로 빠졌는지를 봐야 돼요. 예수님은 어디로 빠졌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빠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영생이 없는 거예요. 주님가신 그 구멍에 꼴까닥 하고 빠져야 된다니까요? 그 구멍에 빠져야 돼요. 그 구멍에 빠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20세기 초반에 어떤 수학자가 쓴 소설에 그 구멍, 토끼 굴에 빠져서 일어난 희한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에 보면 고양이가 있어요. 그 고양이가 웃어요. 웃는 동안 그 고양이의 몸이 점선이 분산되듯이 갈라지면서 고양이는 없고 웃음소리만, 호호호, 남아요. 실체는 없고 웃음소리만 남는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고양이보다 웃음이 더 오래되었다는 말입니다. 고양이의 웃음이 고양이보다 더 먼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이유는 예수님의 육신이 시작이 아니고 그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계신 거예요. 그 분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고 여호와께서 육체를 입으신 겁니다.


천지창조보다 앞서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 아들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처음 들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수천 번 이야기한 거예요. 이해는 안 되더라도. 이 천지창조보다 예수님이 앞섰다는 말을 제가 왜 하는가 하면,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있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에 있어서의 하나님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약속, 언약이라 하는데, 그 약속이 예수님의 육신보다 먼저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고양이 웃음소리에요. 고양이 웃음소리가 먼저고 고양이 웃음소리가 과연 있는지 없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토끼 굴에 빠진 소녀의 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웃음소리가 고양이 몸체로 실체화 된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평소에 내가 하하, 호호, 웃는 것처럼 ‘내가 웃는다. 내가 먼저고 내가 웃을 때 웃는다.’ 하듯이 ‘고양이가 먼저고 고양이가 웃을 때 고양이가 웃네.’ 그렇게 돼 버려요. 이해를 하든지 말든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야기 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상식에서는 고양이가 없어지면 고양이 웃음소리도 없어져야 되는데 고양이는 없어졌는데 고양이 웃음소리는 남아 있는 거예요. 이 말은 그걸 반추해서 나를 투영해 보자는 거지요. 그러면 진짜 나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원천은 여기 이렇게 잡히는 나의 몸, 나의 육신이 나의 원천의 전부가 아닌 겁니다. 지금까지 교회에 대해서 내가 싸워왔던 것이 뭐냐 하면, 성화 론입니다. 착해야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묻지요. 그 착하다는 출발점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착해야지.” 왜? 너 혼자 구원받고 싶어서? 내가 착한데 안착한 저쪽이 가게 되면 왜 약이 오르지? 그러니 착해야 한다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불교적인 발상이에요. 일반종교 적 발상이거든요. 갓 바위 발상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의 출발점은 내가 아니고 나보다 더 원천이 있다. 십자가에서, 진짜 선과 악은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로 선과 악을 쥐고 계시는 분이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가고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 입장에서 본 행함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 22장 12절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하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 행함이 뭐냐? 예수 안에서 행한 것이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한복음 3장 20절의 말이 정말 이상한 말이에요. 이것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못지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그래요. 이 판 대기, 이 불판에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에 대한 답변을 주려고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는 상식이지만 다시 당부합니다. 사람의 악행의 대가로 천벌이 온다 할지라도 인간은 악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인간존재입니다. 천벌이 무서워서 악행을 안저지를 그런 위인들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좀 똑바로 압시다. 제가 부탁합니다. 좀 바로 압시다. 네가 나쁜 짓을 하면 지옥 간다고 해서 나쁜 짓 안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정말 우리 자신을 너무 몰라요. 벌칙이 강화되면 나쁜 짓 안 할지 알아요? 도박 하면 집안이 날라 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려드는 것이 도박이고 강원 랜드입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주부들이 모여서 화투를 치는 이유가 다른 힘에 이끌려서, 내부적 힘에 이끌려서 하는 거예요. 그게 나쁜 짓인 거 다 알아요.


지난 월요일에 강의했지만 연세 많은 분은 이마에 주름이 있잖아요. 그것은 이마의 주름이 아니고 내부의 굴곡입니다. 인생 평생을 굴곡지게 살아온 것이 외향으로 드러난 거예요. 그래서 노인의 면류관을 존경하라는 말이 잠언 서에 나와요. 성공해서 존경하라는 말이 아니고 고생 직사하게 했다는 그 말입니다. 자기 욕심에 허우적대면서 직사하게 고생했다는 거예요. 성경은 해답을 먼저 주는 게 아니고 질문을 다시 구성하라고 준 거라고 지난번에 이야기했지요. 물론 다 잊었겠지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에서 출발하면 안돼요. “주여, 내가 이거 하면 구원 받겠습니까? 제가 예수 믿으면 구원 받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을 자기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게 유 병언 돼요. 구원 파 된다니까요.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알아서 뭐하려고? 네가 왜? 우리는 우리의 심령과 결단으로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십자가지 우리가 아니에요. “목사님, 제가 나쁜 짓 했습니다.” 그러면, 그거 안하면 나쁜 인간 아닌가요? 처음부터 우리는 나쁜 인간인데. 처음부터 우리는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메르스가 찾아왔어요? 진작 찾아와야지요. 메르스 앞에서 우리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소리를 해야 돼요. 너무 오래 살아서 미안합니다.


왜 피하려 해요? 무서워서 피하지요. 무섭다는 말은 자유가 없다는 뜻이지요. 완전히 티가 났어요, 티가. 티가 확 났어요. 확 나. 온 천지가 지금 불순종의 영의 지배 속에 있다는 티가 확 났어요. 그 출발점을 우리로 삼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 종교인들, 요한복음 3장은 출발점을 ‘너’가 아니라 우리 이전으로 돌립니다. 악한 자가 빛으로 오지 않는 이유는 빛으로 오지 못하는 힘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것이 해답이에요.


주님이 오신 것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 세력이 너를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음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각자가 특수한 존재거든요. 마지막에 특수한 존재로 환원돼요. 뭐라고 하고 또 해도 나중에는 ‘나 살아라.’ 이게 끝이에요. <샌 안드레아스>라는 영화를 개봉 당일에 조조로 보고 평을 올려놨어요. 마지막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유를 묻지 말라.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살아남아라! 늙어가는 육신이라도…” 이게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진리에요. 딱 그거뿐이에요. 교회를 세군데 다녔다. 그렇게 다녀도, “장로, 집사, 목사입니다.” 필요 없어요. 오직 해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살아야 돼. 왜냐고? 묻지를 마라.” 그것뿐입니다.


뭘 지키려고 하는데요? 목숨을 지켜야지요. 목숨이 생명인가? 몰라. 일단 생명이라고 치고. 생명이라고 친다면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는 왜 죽였는데?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목숨을 얻고”가 아닙니다. “나를 믿는 자는 목숨이 연장되고”가 아니에요. “나를 믿는 자는 90까지 살고”가 아니에요. “나를 믿는 자는 영생, 생명을 얻”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바로 출발점을 태어날 때를 기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기점으로 해 버리면 나사로는 지금 예수님과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이에요.


오빠 나사로, 못난 누이동생 때문에 다시 군대생활을 하게 했어요. 이미 죽어서 쉬고 있는 사람을, 세상에, 쉬고 있는 사람 깨우면 화나요. 이미 쉬고 있는 오빠인데 철없는 동생들 위해서 다시 오게 했습니다. 군대생활 두 번 했어요. 군대 생활 두 번 한 경우는 ‘싸이’ 이전에 나사로고 그 다음에 ‘싸이’가 군대생활 두 번 했어요. 그 외에는 없어요. 도대체 여러분이 지금 무슨 판에 살고 있습니까? 불 심판의 판에 살고 있어요. KTX자체가 불바다된 것을 모르고 5호실에서 6호실로 옮기면 삽니까? 7호실에서 8호실로 옮겨가면 살아요? 벙커 짓고 생수 갖고 들어가면 삽니까? 그 판이 무슨 판인데? 지옥 판인데, 불바다 되는데. 천사가 불 지를 때, “아이고 하나님, 미안합니다. 한 곳을 빼놓았습니다.” 이런 실수가 있습니까? 지하 300미터는 불 심판이 안 닿는지 알았어요?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미리 당겨서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네 몸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말고 네 마음 자체를 바꾸면 되는 거예요. 새 판에 합당한 인간으로 바꾸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꾸는가? 생명을 쥐려고 하지 말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요소를 칩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게 십자가고 그게 십자가의 영, 성령이십니다. 사울은 단순히 예수를 만난 게 아니에요. “사울아, 네가 만난 예수가 어떻게 생겼더냐?” 빛 가운데 계신 분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표현 못해요. 다만 사건을 만난 거지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이 십자가 사건은 기존의 시간의 지점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항시 현재화 되는 그런 시간이 덮치게 돼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3장 1절에서 말하기를, “십자가가 눈앞에 안 보여? 안 보여? 보이잖아.” 현재를 새로운 판, 십자가 판으로 보는 겁니다. 거꾸로 밑에서 보니까 세상 전부, 메르스고 뭐고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십자가로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시간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하나로 집결시키는 능력이 시간 속에 있습니다. 왜? 다 늙어죽으니까.


그래서 때가 단축했다는 거예요. 그 어떤 인간도 시간 밖에 나가는 인간은 없기 때문에 시간을 밧줄로 해서 꽁꽁 묶어서 하나로 조이면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그 시간의 끝과 십자가를 만나게 하는 겁니다. 시간의 끝, 공간의 끝, 그리고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시간이 되는 그 세계, 그것은 나의 세계가 아니고, 나로 출발한 세계가 아니고 예수님으로 출발한 세계, 신세계입니다. 깡패영화 아니에요. 신세계, 백화점 이야기도 아닙니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세계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 성경대로 한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니까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빛으로 오는 사람은 구원 받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하나님의 계심을 드러내는 증거용으로 빛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되게 이끄셨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모든 굴곡진 평생이 하나의 밑에 깔린 카펫이 되어서 그 카펫을 주님이 살살 잡아 당겨버리면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예수 십자가까지 오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강도질 해야만 하는 것은 강도질 한 그 굴곡진 일생이 결국은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나라에 저를 생각해 주세요.” 이런 말이 나오도록 하게 하신 겁니다. 그 때 다른 사람이 “네가 평소에 주님에 대해서 연구한 적도 없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해?” 하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 일을 내 입술을 통해서 나타나게 함이라.” 이게 요한복음 3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은? “지옥 가는 그 사람들은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그 사람들은 악한 세력이 그들이 빛으로 오지 않도록, 빛 되시는 예수님을 못 믿도록 오늘도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메르스를 통해서 열심히 생명을 못 보는 조치를 당하는 환경에 있어요. 우리는 특수자입니다. 최종적으로 자기만 챙기는 게 인간이에요. 이 특수자는 보편자를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밀어내는 거예요. 예수님을 자꾸만 밀어내는 겁니다. 욥기 13장 24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싸웁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인 것은 알지만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나에게 어떤 이익을 제공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출발점을 나로부터 고집하고 고수해요. 내가 없는 하나님은 의미 없다는 겁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게 데카르트만의 생각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숨겨진 본성입니다. ‘내가 존재함으로 신은 존재해야 돼.’ 이게 인간이 생각입니다. ‘내가 여기 있음으로 교회는 있어야 되고 예수도 날 위해서 십자가 져야 해.’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마귀 생각이에요. 아까 경제정의실천 이야기를 했지만 “부자들이여, 돈 내놔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서 다 같이 잘 사는 이것이 유토피아고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는 그것은 바로 그 판에서 자기도 일부 혜택을 입기 위한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돈을 많이 받아먹었습니까? 없잖아요. 주님은 다른 판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판 말고. 나 잘되는 판 말고. 네가 있기도 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만 소곤소곤 알고 있는 그 비밀의 언약을 예수님의 몸으로 나타냈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 피로 나타나는 거예요. 처음부터 우리는 목숨이 없고 생명이 없는 자에요. 생명도 없는 자에게, 천국도 없는 자에게 천국 주시고 생명 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좋은 것을 이미 주께서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불판을 바꿔요. 판을 죽 쏟아버려요. 고기 굽고 있던 것, 갈아 치우면서 그냥 쏟아내 버려요.


그 쏟아내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고로(네가 있을 시간과 공간은 좁아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쏟아내라. 기울여서 다 긁어내버리라는 말이지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본문 해석은 딱 하나입니다. “아줌마! 불판 갈아주세요.” 판을 바꾸면 돼요. 판을 바꾸면 된다고요. 이 말씀을 지켜서 구원 받으려고 ‘성도는 말씀대로 살아야 해.’ 하면서 평소에 아내하고 이혼하고 싶어서 환장하던 차에 이 본문 보고 이혼하자고 서류 내밀고 그러지 마세요. 또 부자에게 “같은 장로인데 왜 너만 부자고 너만 돈이 많으냐? 돈 좀 내라. 장로가 되었으면 성경 지켜야지. 네 돈 나 좀 줘.” 이런 식으로 강탈하지 마세요. 그것은 양아치가 하는 짓이고 강탈입니다.


판을 바꾸면 돼요, 판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유명하잖아요. 거지 나사로와 부자. 그 부자가 지옥가고 난 뒤에 관심사가 달라졌습니다. 부자가 땅에 있을 때는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것이 관심사였거든요. “어이! 여기 포도주 좋은 거 내놓으라니까! 오늘 오신 손님들이 보통 분들이 아니거든. 포도주 좋은 거 내놔.” 파티 여는데 관심 쏟다가 지옥 불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관심사가 뭐냐? 아직 죽지 않은 동생들이 이곳에 안 왔다는 것으로 관심사가 바뀌어요.


진작 관심을 바꾸지, 진작. 진작 판을 바꾸지, 진작.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지옥에 왔다 치지 이 말이지요. 불바다 속에 우리가 두 발 딛고 산다 치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치고 우리의 관심사가 뭐냐? 세상이 까불거리고 호들갑떠는 것을 구경하면서 “저게 제 모습이었습니다, 주님!” 마스크 쓰고 살려고 애쓰는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뭔가는 모르겠는데 무섭고, 뭔가는 모르겠는데 쫒기고, 콩닥콩닥, 철렁철렁, 아슬아슬, 불안불안, 이리 피하면 저걸 만나고 저리 피했더니 이걸 만나고. 판만 바꾸면 되는데. 판만 바꾸면 되는데.


“글쎄, 목사님! 판 바꾸는 방법이 뭡니까?” 맨홀에 빠지면 된다니까요? 오늘 오후 설교의 제목이 ‘사랑’이에요. 맨홀에 빠지는 그것이 사랑이에요. 맨홀이 뭡니까? 숨도 못 쉴 정도로 실패하면 돼요. 숨도 못 쉴 정도로. 끝났어. 킬리만자로의 표범 되지 말고 그냥 썩은 고기나 찾는 하이에나 되면 돼요. “그래, 나 이것밖에 안 돼.” 모든 것이 절망과 실패로 끝나는 그 마지막 실패의 장은 뭐냐 하면, 내가 태어난 자체가 바로 실패다. 오늘도 실패다. 내가 태어난 자체가 실패다. 욥의 고백입니다. “내가 원수 되게 하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셨군요, 주여!” “이제야 너의 임무를 아는구나.”


로마서 5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 된 자를 주의 피로 인하여 의인되게 하셨으니까 내가 원수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십자가 그 피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원수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돈으로 실패하시고 자식 대대로 돈 물려줘서 같이 실패해서 실패한 그 맨홀에서 다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은 주의 십자가의 희생덕분이라는, 십자가사건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줄 아시고 우리의 인생을 사수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설픈 판 위에서 어설픈 성공 내다보다가 십자가 놓치고, 십자가진 주님 매일같이 밀어내는 것이 우리의 일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지 마세요, 가까이하지 마세요, 내 꿈 따로 있습니다, 하고 매몰차게 주님을 배격하지만 주님의 끈질김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 됨을 노출시키고 십자가 앞에 등장시켜서 원수 된 자도 천국 갔다는 기쁨과 고마움과 죄송함을 세상에 증거케 해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