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강-고전 7장 32-35절(세상일)1506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32-35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32-35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세상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의 전부라고 여깁니다. 결혼하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세상일의 일부라고 생각되는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고 세상일과 주의 일을 구분합니다. 세상일 따로 주의일 따로 구분을 해요. 그리고 세상일에 몰두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주의 일에 방해가 되고 주의 일에 몰두하게 되면 세상일에 대해서 마음 상한다든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든지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따로 구분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일과 주의 일을 구분하는 자체가 일상의 생활로서는 부자연스런 구분이 되는 거지요. 자연스럽지를 못해요. 오늘 본문은 누가 봐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동의는 하지 않겠지만 이해는 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장가간 사람은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나눠져서 주의 일을 제대로 못하고 시집간 여자도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해서 주의 일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장가가서 아내를 기쁘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장가는 왜 가며 남편을 기쁘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시집은 왜 가는데요? 요즘 세상이야 시집가서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그 사람도 드물어요. 결혼해서 아내 혹은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그렇게 고민하는 새댁이나 남편도 아마 찾기 힘들 거예요. 그런 새댁이나 신랑이 있다면 얼른 결혼하고 싶을 거예요. 부부가 서로를 기쁘게 하는 그것이 행복의 원천이라 해서 그 일에 매진하는 그것이 어떻게 주의일에 소홀함이 되느냐 하는 문제지요.
사도바울의 말에 대한 취지는 알겠는데 동의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중립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일에 분요해 있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일에 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한 몫을 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뭔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겁니다. 결혼했으면 아내를 기쁘게 하고 남편을 기쁘게 해야 된다는 그런 것이 하나의 과제로서 우리에게 떠 맡겨져 있는 그것이 바로 사람 사는 일이다, 끝! 그게 세상일이고 그게 전부다.
그렇게들 생각하시는데 성경의 에덴동산을 보세요. 에덴동산의 특징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환경이 에덴동산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우리는 그 세계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났으면 우리는 그 자체로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실패자가 되는 그 입장에 있으면서 마치 아닌 것처럼, 실패자가 아닌 것처럼, ‘이 땅에서 그저 열심히 살면 되겠지.’ 하면 그것이 성공입니까?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서 보상 주시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열심히 사는 자에게 보상을 주신다는 그런 원리를 겨냥해서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라고 나오시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열심히 하면 천국 가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평소에 세상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세상에서 버티는 그 원리들이 몸에 배겼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천국은 그렇게 가는 곳이 아니에요. 열심히 한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에는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예수님 만날 때 그 두 분의 대화를 들어보세요. 마태복음 8장 9절에, 백부장이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할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최고다! “천국에 본 자손이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다 쫓겨나고 너 같은 인간이 천국에 가는 거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마음껏 영생을 누리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식도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들어가는 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천국에 들어가는 원리와 방식이 우리가 평소에 현실을 읽고 있는 그 눈으로서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거부감을 유발할 수밖에 없지요. 열심히 일을 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 가서라도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라고 뽐낼 수 있는 주체성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데 개나 소나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집합되어 있으면 평소에 내가 나를 위하여, 나의 가치와 자존심을 위해서, 나를 빛내기 위해서 남 잘 때 잠도 안자고 열심히 일했던 이 모든 가치는 묵사발 되는 거잖아요. 완전히 다 짓밟히잖아요.
게다가 하나님에게 짓밟히면 우리가 참을 수가 있습니까? 참을 수가 없어요. “네가 뭔데 나를 짓밟아?”이런 식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 몸의 모든 행위는 현재 우리가 현실이라고 할 때 이 세상이 현실의 전부거든요. 이 현실이 전부인데 이 세상에서 내가 내 고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되느냐, 라는 그 문제에 몰두하는 이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실패자이기에 나오는 행동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고 있어요.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어떤 분이 참석을 했어요. 다른 분이 제 강의를 듣고서 하는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사투리가 심하다.” 제가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가 상당히 마음에 확 닿았어요. “대안이 없다.” 그런 거예요. 대안이 없어야 돼요. 천국은 우리보고 대안을 요청하는 곳이 아닙니다. 있는 대안도 손 털기를 원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전혀 대안이라는 것은 주께서 용납을 하지 않아요. 만약에 대안이 있어버리면 주님의 대안과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안이 있다는 말은 내 의미를 챙길 수 있는 나의 구역, 나의 가치를 유지하면서 내가 원하는 천국, 영생을 따내는 식으로 가겠다는 것이거든요.
그게 바로 정확하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일’이에요. 이 세상에서 스펀지처럼 푹 젖은 사고방식입니다. 일체 대안은 필요 없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 쓸데없는 자” 이거든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정립이 돼요. “아, 쓸데없는 자.”라는 것이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비로소 밝혀지는 내용입니다. 만약에 은혜가 오지 아니하면 나는 아직도 쓸데 있는 자가 되고 내가 계속해서 쓸데 있는 자로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대안이 필요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런 식으로 내 쪽에서 제시를 하게 돼요.
복음을 듣는 가운데 많은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제일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목사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됩니까? 기도할 게 없네요.” 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도를 잘할 수 있는데 이것 빼고 저것 빼고 다 빼버리니까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첫 번째 현상, “기도할게 없네요.” 두 번째는 뭐냐? “목사님, 기도 못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더 진전이 되면, “기도 안 해도 되네요.” 네 번째가 뭐냐? “내가 사는 것이 곧 주께서 일하시는 기도의 결과네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1,2,3,4 나오면 앞에 것은 다 잊어버렸어요. 1번부터 다시. “기도는 잘할 수 있는데, 방법만 가르쳐 주면 기도를 잘할 수 있겠는데 방법이 뭡니까?” 대안이 뭐냐는 그 말이지요. 그렇게 시작하다가 두 번째는 기도를 포기해요. “저 기도 못합니다.” 특히 오후예배 때가 그런 경우지요. 세 번째가 뭐냐? 무슨 똥배짱인지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에요. 네 번째는 뭐냐 하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나 말고 다른 분이 기도한 그 기도의 응답자체로 내가 여기 등장해서 살아간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산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코스인데요.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고 그냥 세상 일, 은혜와 성령을 받지 못해서 그냥 세상일에 그냥 종교인으로 살아버리면 기도가 뭐가 되냐 하면, 주문이 돼요. 랄라라라, 하면 되는 것. 주문(呪文)이 뭐냐 하면 주문(注文)입니다. “카푸치노 한 잔이요.” 이렇게 주문할 때가 있잖아요.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주문(呪文)을 외워서 주문(注文)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제가 되도 않는 썰렁한 개그를 한 거예요. 주문을 그렇게 해서 응답 받아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문하지 않더라도, 주술을 외우지 않더라도 그냥 은혜로 제공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곳에서 살다가 쫓겨난 거예요. 따라서 그런 입장이 아니고 다른 방식으로 산다면 이미 우리는 “오늘도 실패다!”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이미 실패한 거예요. 따라서 성경 볼 때에 “이상하다. 사도바울의 말이 앞뒤고 안 맞는다. 결혼을 해놓고 아내나 남편을 기쁘게 하지 말라는 말인지. 앞뒤가 맞지가 않네.”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실패다! 네가 그렇게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자체가 실패”에요.
실패자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도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신학자들이 오늘 본문을 두고 내린 결론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은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결혼의 행복을 몰라서 그런 사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사도바울은 그걸 알아요. 그런 소리가 나올 것을 다 아시고 “결혼 하더라도 실패자로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이 너에게 만족치 않더라도 그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라.” 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요구하는 바에요. 결혼 해봐야 결혼을 알거든요. “결혼 했더라도, 그리고 제대로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고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이 땅에서 결혼하게 하신 하나님의 취지였다는 것, 실패자에게 합당한 실패의 조합이라는 사실을 네가 수용하는 그것으로 제대로 내 말을 납득하고 이해했다.”는 겁니다.
실패자가 실패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지 실패자가 실패했다고 새삼스럽게 화를 낸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분수를 모른다는 겁니다. “결혼해도 실패고 안 해도 실패인데 결혼하고 싶은 것은 결혼 하고 실패하라는 코스이고 결혼 안하고 사는 것은 결혼 안하고 실패자인 것을 알아라.” 그 말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31절의 말씀처럼 흔적, 또는 형적으로만 존재하는 세상이라서 그냥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31절을 보겠습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를 끄집어 낼 수 있어요.
하나는 역사의 종말, 또 하나는 세상의 종말, 두 가지가 나눠져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이라 하는 것은 시간의 종말, 시간이 스톱이 되는 그 순간, 흔히 말하는 하늘, 땅이 다 꺼져버리고 불 심판 받는 그 순간이 역사의 종말, 시간의 종말이라면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은 뭐냐? 그런 시간의 종말을 야기 시킬 수밖에 없는 원인이 이 세상 한 가운데 이미 심겨져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마지막 때에 왔어요. 히브리서 1장 2절에 나오는 말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아들 간 것 알지? 너희들 내 아들 거기 있는 것 알지? 그러면 너희들 끝났어.” 아들이 도착하면 끝난 거예요. 이제 세상은 허물어지는 거예요. 아들이 옴으로써 아들을 위하여 세상은 껍데기로서 철거작업이 개시가 됩니다. 몸에 붙어 있는 것 다 털어내듯이 털어내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허물어지지요. 붕괴하는 겁니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배려해야 되니 다시 해야 돼요. 세상일과 주의 일을 대비하면서 구분했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전체 현실을 세상이라고 해요. 그런데 주님은 누구냐 하면, 어떤 아저씨라니까? 어떤 개인, 어떤 인격이에요. 이게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성경에서 비교하니까 비교 된다고 하지만 따져봅시다. 세상 전체, 산과 별, 팔공산도 세상이고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 호주의 시드니, 전부 다 세상에 포함됩니다. 중국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다 포함이 되잖아요.
세상에는 하늘, 별, 산, 들, 나무, 풀, 그 중에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중 한 사람이 ‘주’라는 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현실관이고 세상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 전체와 예수님을 따로 빼내서 대비를 시켜야 이게 옳은 안목이고 옳은 관점이라는 겁니다. 성경이 뭐가 이렇게 어려워요? 주의일과 나머지 세상 전체, 통째의 일과 대비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에서 빠져서 세상의 일부가 되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은 대조가 되고, 충돌을 일으키고,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예수님을 안다는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되고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어요. “네가 뭔데 나를 알아?” 예수님 오신 것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전에는 그리스도를 육체로 알았다는 겁니다. 전에는 육체로 안 거예요. 지금은 영으로 안다는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육체로 알 때, 그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 핍박할 때 “나는 예수를 전에 육체로 알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내가 아는 현실관, 내가 아는 세상관 속에서 당신은 그저 일개 아저씨에 불과해.”라는 식으로 예수를 알았던 거예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뭔가 성령께서 외부에서 오시지 않는 한 우리가 아는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일종이고 대자연, 세상 현실의 일부로 속하지 이것이 대비되는 개념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했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여러 전공분야, 과학이라든지, 어떤 지식, 인문학이든지, 그 중에서 철학이든지, 고대근동역사든지, 신학이든지, 그런 전문가, 치과의사든지, 그런 전문분야의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치과 치료하는 이 일이 육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안한다니까요? 목사한테 물어보세요. “저는 목회 열심히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목회 열심히 하는 이것이 육체의 죄입니다.”라고 사람들이 이렇게 고백을 안 한다니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몰라요. 왜 예수님을 모르냐 하면, 내가 나를 안다고 여기니까 예수님을 몰라요. 제가 하나 아이디어를 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찰관 복장을 하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를 해요. 등에다 무슨 글자를 붙였느냐 하면, “나는 경찰관이 아닙니다.”라고 붙였어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체포합니까? 경찰관사칭명목으로 체포할거예요? 마그리트라는 화가가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하고 써놓았어요. 그것은 뭐냐? ‘저거 파이프 맞네.’ 여기서 파이프는 담배 피울 때 쓰는 그 파이프를 말합니다. ‘파이프가 맞네.’라고 하는 그 사람의 주체를 화가가 작품을 통해서 지적 질하고 고발하는 그림이에요.
“네가 파이프를 알고 있지? 그러면 네가 잘못이네.” 그런 뜻이라니까요? 세상이 예수님을 건드리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복음 7장 7절의 말씀대로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세상이 악하다고 하지를 못해요. 왜? 자기 빼놓고 악하다고 하기에 그럴 자격이 안돼요. 다 같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입장이잖아요. 다 같이 실패자잖아요.
제가 오늘 설교에서 너무 많은 분량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여러분이 잘 감당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논리가 어렵지 않는데 문제가 뭐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가짜고 엉터리라는 그것을 제가 언급해드리는 거예요. “엉터리 아닌데요?” 자꾸 이렇게 해버리면, “결혼하셨습니까?” “예” 그러면 “남편 사랑하십니까?” “예” “그러면 주의 일을 소홀히 했네.” 지금 논리가 이런 논리라니까요. “목사님, 저는 남편 사랑하지 않고 남편에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여자네. 아내 값도 못하는 여자네.” “주의 일을 한다고 게을렀지요.” 주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일 하기 위해서 결혼을 안 해보세요. 그게 세상일인데.
지금 이 성경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못 지킨다는 이야기에요. 이야기하는 내가 답답타. 깔끔하게 이야기해 드릴게요. 지금 세상을 어떻게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대안을 내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예수를 잘 섬기느냐,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집가지 말고 주를 섬기면 주의 일이 된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시집 안하고 주의 일 한다고 전도사 하다가 나이 50넘어서 돈 많은 남자 상처했다 하면 우르르 덤벼들어서 결혼하는 사례가 한 두 경우가 아니잖아요.
의존교회 강의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돈은 예수님의 피를 닮았다. 왜? 돈은 모든 것을 용서하기 때문에.” 나이, 체중, 병듦, 다 용서가 돼요. 못된 자식, 성질 더러운 자식, 다 용서가 돼요. 돈만 가져오면 다 용서가 돼요. 예수님과 세상을 대비시킬 때 세상 사람들은 자기 배후에서 자기를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지배자를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한 인격으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응축이 되면서 사탄의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불교에서는 세상에 중심부가 없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중심부가 있었어요. 이게 에덴동산을 치고 들어온 뱀이에요. 뱀.
뱀이 에덴에 들어와서 뱀과 더불어서 인간은 저주받은 상태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악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하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평화롭게 살게 되면 좋은 천국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만 그래요. 예수님이 하나의 인격으로, 예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전체가 예수님에게 달려듭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의 중심부로서 팽이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또 하나의 중심부에요. 따라서 이 세상은 중심과 중심의 싸움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싸움이라니까요.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 자연세계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이에요. 아브라함의 육체, 이삭의 육체, 야곱의 육체가 우선이 아니고, 그것은 육체대로 그리스도를 아는 전제고 그 전에는 약속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이삭을 이삭 되게 하는 거예요. 자연세계보다 약속이 더 우선입니다. 약속이 자연세계를 창조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결혼한 사람은 몸과 영에서 심란해진다는데 여기서 몸은 우리가 알고 이 세상에 속하는 겁니다. 육신입니다. 그러면 영은 뭐냐? 영은 이 세상이 사탄의 활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외부에서 이미 알고 있는 안목이 영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살 몸인데 주변의 내 가족이 나를 쥐어뜯는구나. 내 육신을 위해서 엄마가 존재해야 해, 내 육신을 위해서 아빠가 존재해야 해, 이런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그런 경우가 생겨버리면 우리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할 수밖에 없는 혼인생활을 한다. 그렇게 정신이 산란해지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도 차라리 한쪽을 택하라고 내가 너희에게 권면한다.” 이게 본문 내용이잖아요. 이게 오늘 본문 내용이라고요.
그런 것은 세상을 볼 때 예수님을 중심부로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예수님과 세상을 대비한다는 말은 세상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고 살아 있는 겁니다. 이 세상 자체가 살아 있다는 그 증거가 여러 군데 나오는데요, 제가 그것은 다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서 히브리인들이 출애굽을 하는데 거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 것이 없습니까? 모세가 애굽의 바로 왕과 대화를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릴 때 누구한테만 내려야 하느냐 하면, 그 바로 왕과 그 집구석에만 벌을 내리면 돼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열 가지 재앙이 어디에 떨어집니까? 사적인 바로 왕궁에만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애굽나라 전체에 다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보는 이 현실, 이 나라가 하나의 인물로 응축이 되는 거예요. 배후에서 사탄이 조종하는 하나의 인물로 응축이 되고 모세 당시에는 바로 왕이라는 대표, 대변자로서 모세와 대결한 거예요.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표자고 저쪽은 뱀에 속한, 사탄의 세계, 사탄의 세계가지 갈 것도 없어요, 이 세상의 대표자로서 마중 나와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똑바로 하라.”가 아니라 “네가 이 세상 전체를 다 볼 수 있는 눈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가 되어서 살아온 것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지진이 일어나서 무덤이 열리고 하늘이 새까매졌지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흑암이 되었어요.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가 오후 세시 입니다. 체포되어서 재판할 때가 아침 여섯시고요. 재판 끝났을 때가 아침 아홉시고요. 아홉시부터 성문 밖으로 나와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난 뒤에 해질 무렵에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달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안식일 입니다.요새 말로 하면 일요일 아침에 안식일에는 못 움직이다가 안식일 다음날 여자들이 무덤에 갔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공간과 시간의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주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인격이에요. 인간은 시간에 매여살고 공간에 매여 살지만 주님께서는 거기에 매여 살지를 않아요. 따라서 우리가 에덴동산보다 더 좋은 세계, 천국에 가려면 이 세상의 일부가 된 우리의 주체가 예수님의 주체로 바뀌어야 돼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새로운 주체로서 바뀌어서, 우리가 설친다고 영생,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주어짐을 온 몸으로 만들게 되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할 게 없네요.” 하다가 “안 해도 되네요.” 왜? 주께서 시공간을 초월한 기도의 응답으로서 우리를 만들어 내시니까. 그러려면 “이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면 돼요? 대안이 뭡니까? 내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영광을 돌립니까?” 하는 이 여전히 살아 있는 나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서 함께 종말을 맞이해야 됩니다. 그 종말을 맞이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언제입니까, 묻지 마세요. 성령이 임할 때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의, 나의 종말은 끝까지 맛보게 됩니다.
시공간에 있을 때의 주체는 뭐냐? “나는 이런 일을 한다. 나는 이게 전공과목이다. 나는 직업이 교사다. 나는 교사 일을 한다.” 또는 “나는 점차 흙이 되어간다.” 이렇게 하다가 “내가 곧 흙이다. 내가 곧 생명이고 내가 진리다.” 왜? 그 ‘나’는 ‘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기 때문에 예수님 진리를 위하여 나는 죽어줘야 될, 주께서 일으킨 종말 안에 나를 포함시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이것은 종말, 끝가지 가본 사람, 성령이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마지막 모습을 미리 당겨서 아는 사람이에요.
“나는 결국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고, 하나님에게 범죄하고, 하나님에게 대들고, 사탄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80을 살고 90을 살아도 주를 대적할 수밖에 없는 주의 원수입니다.”라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고백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속의 나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무너져야 될 세상의 일부로서 내가 만들어졌습니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허용한 인생, 주께서 허용한 공간을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영웅 나오는 영화, 제가 그런 것 진짜 안 좋아해요. 007영화도 그런 건데 악당이 큰 전망 창밖으로 자기가 지배하는 세상을 내려다봅니다. 내려다보면서 ‘저 빌딩들, 부동산 다 내거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웅이 나타나서 그걸 다 폭파시키고 부숴버립니다. 전망 창 정면을 통해서 내려다보고 있는 나를 향하여 정면으로 미사일이 날아드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네가 지금 보기는 뭘 한가하게 보느냐는 말이지요. “주여! 세상은 망해야 됩니다. 베리칩을 몸에 심다니요, 세상은 망해야 돼요.” 하는데 갑자기 망하게 하는 그 미사일이 나를 향하여 날라 온다니까요. 창을 뚫고 나를 폭파시켜 버려요. “육체로 아는 너는 끝났어. 너는 너 자신을 육체로 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이냐? 인간의 행동은 무엇이냐?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변하지 않는 행동이 있어요. 나와바리(구역) 챙기는 거예요. 공사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 알지요. 개가 오줌 눠서 자기 영역 표시하지요.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와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이 뭐냐? 상대방의 나와바리(구역)에 걸립니다. “오지 마. 내 자리야. 내 꺼야.” 이 부딪힘을 굉장히 힘들어해요. 강의하면서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최근에 본 인상 깊은 CF가 있어요. 자세히 안 보면 그냥 넘어갑니다.
고등학교 막 졸업한 소녀가 이제는 화장을 맘대로 할 수가 있거든요. 선하나 그었을 뿐인데 예뻐도 너무 예뻐서 자기가 놀라 나자빠질 정도에요. 화장술에 도취되어 있는 소녀를 향하여 “네가 네 화장술에 놀라지 말고 앞으로 돈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놀라라! 돈 버는 것은 삼송증권에 맡겨라.” 그렇게 흘러가는 CF에요. 백날 화장해서 예쁘면 뭐합니까? 세상에 나가면 예쁜 것은 다 지워지고 치사하게 돈을 버는데. 왜 돈 버는 게 힘든 줄 알아요? 세상 곳곳이 나와바리, 전부 남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나의 영역.
결국 성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나와바리를 따로 챙기는 것, 이게 사는 목적이고, 의미고, 자극이고, 도전이에요. “네 꿈을 펼쳐라.” 개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의 나와바리를 펼쳐라, 그거예요. “너의 영역을 확보하라.” 이게 꿈과 비전이라는 겁니다. 총신신학교에서 어떤 목사가 설교를 했던 모양입니다. 설교 제목이 가관입니다. “비전의 사람.” 그런데 그 설교 들은 신학생들이 기립박수를 치면서 울었다는 거예요. 보세요. 얼마나 육신적이고 육체적입니까? 세상에서 자기의 나와바리, 자기영역, 자기만의 세계, 그걸 확고히 하는 것에 전부를 바치는 것, 배후에 누가 그 짓을 하겠어요? 뱀이 그 짓 하는 거예요, 뱀이.
뱀 하니 생각납니다만 자기 영역, 자기 나와바리, 목사가 자기 교회 가지는 그것 말하고 있는 거예요. 어렵게 할 것도 없어요. “나는 내 교회 있다.” 그거 말하는 겁니다. 자기 나와바리, 자기 영역, 자기 오줌 누는 것, 개가 자기 영역 표시하듯이. 예수 믿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이 이거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무엇과 같으냐? 어떤 사람이 뱀술 담가 두었는데 다른 사람이 뱀 대신 그 안에 자기 허리띠를 집어넣어두고 뱀을 꺼내서 구워먹었어요. 나중에 주인이 와서 보니 뱀 인 것 같은데 뱀이 아닌 뱀이 거기 있거든요. 술을 마실 때마다 가죽냄새도 나는 것 같고 이상하기는 한데 비슷하지요.
사람이 예수 십자가를 믿는다고 우기고, 성령 받았다고 우기고, 복음 안다고 우기는데 보니 뱀이 아니고 뱀 같이 생긴 허리띠에요. 십자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허리끈 들어 있어요. 자기 나와바리라니까요. 복음 전해서 자기교회 챙기는 그것이 목표였고 그것 때문에 복음 외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흙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곧 흙이에요. 예수님 보시기에 예수님주체, 예수님의 인격에서 성경에 합당한 개념, 진짜 맞는 개념들이 우리에게 퍼부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주여, 흙을 만드신 것은 합당한 조치입니다. 저를 아무 쓸모없이 만든 것은 정말 하나님다운, 예수님에게 정말 부합되는, 십자가 사건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조치이십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내 영역은 없어지고 나의 있는 그곳을 예수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십자가 안으로 바꿔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무엇이관대 저를 이렇게 다루십니까? 새삼스러운 게 아니고 고마워서 하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저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열심히 한 것도 없는데 무상으로 영생을 주시고, 제가 일한 것도 없는데 공짜로 ‘오늘밤에 네가 낙원에 가게 될 것이다.’라고 이미 우리의 미래를 확정 시켜 주십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그 주체 자, 그 주체 자를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나만 미움 받는 것이 아니고 너도 같이 미움 받는다.”고 이야기했거든요. 그리고 그 증거가 여러 가지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패배하게 만듭니다. 왜 패배하게 만드는가? 십자가가 마귀가 승리하는 순간이거든요. 예수님이 패배하고 유대인들이 승리하는 순간이 그게 십자가사건이에요. 마귀가 승리하는 그 순간부터 드디어 마귀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폭프로젝트’에요.
내가 설치면 설칠수록 점점 더 나의 본색이 드러나는 프로젝트, 이게 현대인의 하루하루의 일과입니다. 지난번에 어떤 분의 이야기를 언급했지요. 그 이야기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절절합니다. 늦은 밤에 서울역까지 운전해 주시면서 “목사님, 저는 휴거되기 보다는 메르스에 걸리기를 원합니다.” 그 짧은 멘트가 얼마나 와 닿았는지. 이 땅에서 실패자기 때문에 마땅히 실패해야 되는데 자꾸 마귀가 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눈치 안채게 하려고, “성공해야지. 야망을 가져라. 꿈을 키워라. 뭔가 기대하면 기대한대로 주어진다. 기도한대로 응답받는다. ‘기도와 금식 외에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다.’고!” 어떤 유? 망하는 유.
망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은 주 안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주여, 메르스 걸리게 하옵소서, 메르스 걸리게 하옵소서.” 세상에 이런 기도가 어떻게 자기 입으로 나옵니까? “확진판정입니다. 격리되겠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걸 비전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 평소에 살아왔던 그 세상 원리가 스펀지처럼 그냥 우리 속에 들어왔어요. 그것은 나의 나와바리, 나의 영역, 내 것 챙기는 것, 실패 안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으로서, 예수님의 적으로서 아직도 우리가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으로 아는 순간이에요. ‘이왕 적이 되는 거 시집이나 가야지.’ 이렇게 시집가시면 되는 거예요. 이왕 적인 것, 이왕 실패한 것, 결혼 해보고 실패하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주께서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새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또 실패의 갖가지 경우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혹시나 남편이 오해하기를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군요.” 할 때 속으로만 이야기하세요. “네 눈에는 그게 사랑으로 보이나?” 속으로만 하세요. 괜히 복음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소리해서 갑자기 선물 취소되면 곤란하니까. (속으로)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으로 보이나? 나를 실패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를 유혹하는 하나의 유혹이다.”
모든 것이 실패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감사할 것뿐이지요. 범사에 감사할 것뿐이지요. 그리고 “주께서 준비해 놓은 그 나라, 주의 얼굴 어서 뵈옵기를 원합니다. 제가 뭔데 공짜로 주십니까? 한 시간 일하게 해놓고 하루 품삯을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라는 그것, 물을 필요도 없어요. 천국가면 다 알게 될 거예요.
이 세상은 이미 붕괴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는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짓을 하고 있어요. “검찰에 가서 다 말하겠습니다.” 그런 것이 다 자기를 망치는 짓이에요. “찍지 마세요. 검찰에서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하여 살아온 모든 인생 자체가 자기를 망치는 짓입니다. 왜? 자신의 구역 챙기기에 성공하겠다는 그것, 번지수를 잘못 봤어요.
세상을 내 육체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흔적도 지금 쓸려 내려가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쓸려 내려가는 흔적을 동전으로 긁어버리면 안에서 당첨권 나와요. 우리의 세상살이란 뭐냐? 주께서 우리의 껍데기를 날마다 긁어서 안에 진짜 천국이 들어 있다는 것, 그걸 보여줍니다. 물론 긁으면 꽝, 나오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긁어보니까 “한 병 더” 이런 게 나와요. 우리가 어떻게 망가지든 관계없이 우리 배후에는 “한 병 더!” 그게 있어요. 그걸 가끔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우리의 마지막 때를 미리 당겨서 아는 것이고 그 십자가 지신 분이 부활함으로서 만들어진 세계, 거기에 속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위치와 새로운 영역을 부여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몸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쏟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