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42강-종과 자유자(고전7;20-24) 1505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26. 08:21

2015-05-24 12:44:59 조회 : 103         
   종과 자유자 150524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종과 자유자(고린도전서 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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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5-24 13:34 
종과 자유자

2015년 5월 24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20-24

(7: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7: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7: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성경은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들이 왜 문제덩어리 인가를 재구성토록 촉구하는 책입니다. 이 세상을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한 삶이 아닙니다. 에덴동산 속에 이미 죽음의 힘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동산이 아닙니다.

저주가 저주답게 드러내기 위해 준비된 환경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속성을 발진하시려는 것입니다. 과연 아담은 선악과 과실을 먹었습니다. 저주의 징후가 단순히 아담이 속해있는 자연 환경에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마음에서도 엉겅퀴가 피어납니다. 자식 이름을 허무(아벨)로 지을 정도입니다. 허무란 곧 무가치를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값’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값’이란 곧 ‘가치’, 혹은 ‘가격’을 의미합니다.

즉 “너희들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가치에 놀아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일상이 삶이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때만 생존에 유리합니다. 물론 깊은 산중에 들어가 홀로 산나물 깨먹고 개울가의 물 마시면서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립고 특히 가족이 그립습니다.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 가치들의 연결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들의 가치에 준한 의미망에서 자신들이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출생 자체가 실패입니다. 무가치합니다. 기껏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자기 존재 이유의 전부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가 됩니다. 하지만 이미 인간들이 이런 외부에서 만들어진 가치에 따르고 굴복하므로서 정작 본래의 가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의 아벨은 이름 그대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므로서 기존의 가치체계말고 다른 가치와 연결된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곧 기존의 인간들 세계의 가치체계와 무관하게 벗어난 상태가 자유입니다. 이런 자유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보여주신 모든 행위와 말씀을 통해서 주변에 영적 구조를 들추어주십니다. 즉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그런 가치말고,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진짜 가치성을 보여주십니다.

그 가치는 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저주받기 위한 자들이 있어야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한 자들도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25:23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류를 두 부분으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이 두 부류는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을 담게 됩니다. 하나는 자비요 다른 한쪽은 진노입니다. 이삭 가정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축복과 저주를 내막을 펼쳐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인간들의 세상이나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두 가지의 속성이 펼쳐지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주받을 자입니까? 마가복음 5:7에 보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인간 세계는 악마가 장악한 이상, 각 사람마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발언을 매일같이 쏟아내면서 살아가는 지경입니다. 즉 이미 기존에 자기를 자기 답게 하는 가치를 주변 인간 세계에서 조달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삶은 야곱과 에서를 통해를 통해서 보여준 참 현실과 맞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이 인간 세계에 ‘끝’을 앞당겨 보여주는 식으로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시도들은 창조 때의 본래의 자리를 잊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지만 로마서 3:24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즉 인간이 스스로 자기 가치를 지탱하기 위해 끌어모으는 그런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따로 갖고 계시는 가치가 이 땅에서 자기 백성에게는 ‘인간적인 가치를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가치’로 제공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나름대로 신들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거기서 보여주는 가치는 몽땅 다 인간 세계에서 이미 가치 있는 것으로 통용되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행함으로 자기 운명이 바뀌어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상대해서 이 지상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양산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가치 외에 다른 가치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하신 모든 일을 정면으로 대드는 짓이 됩니다.

이미 예수님의 가치를 부여받은 자들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한 가치는 자랑거리가 아님을 압니다. 인간의 자기 자랑은 그동안 인간을 억누르고 있는 힘을 이겨낼 수도 없고 뚫고 탈출에 성공하지도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 내부를 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출 작업을 벌리십니다.

성도의 마음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극렬하게 대들고 원망하고 반항하는 귀신의 활동을 보게 됩니다. 이미 그것을 파악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피의 가치가 그 사람 내부에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성도는 자신이 자유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무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유하심에 일임하고 맡깁니다.

아무리 이 세상 나락으로 떨어진다 할지라도 그곳은 바로 십자가 피가 있는 곳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악마의 힘에 눌려 살고 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악마의 힘에서 자유로운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5-26 06:10 
42강-고전 7장 20-24절(종과 자유자)1505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20-24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20-24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값이라 하는 것은 요새 통용하는 단어로 고치면 ‘가치’라는 겁니다. “너희는 주님의 ‘가치’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 나름대로 갖고 있는 가치를 통해서 우리를 사셨다면 우리는 주님을 알기 전에 갖고 있는 가치,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는 가치에 푹 빠져 있었던 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말은 “‘남들이 나를 얼마를 쳐 주겠는가? 얼마짜리로 내 인생을 봐 주겠는가? 내 스펙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사갈 수 있는가? 내 노동력이 이 시장바닥, 노동시장에서 일당 얼마짜리, 시간당 얼마짜리인가?’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순간 너는 이미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고 언급을 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의 힘에 의존해야 우리가 생존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이렇게 되거든요.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살아야 된다. 살기 위해서 누가 나의 가치를 쳐줘야 한다. 따라서 나는 그 사람이 쳐주는 가치에 준해서 나의 수입이 들어온다. 그 수입으로 나는 양식을 사 먹고 이 땅에 산다. 그래서? 그게 다네요? 이런 방법, 이런 순환논리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성공해야 된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많아서 죽게 되면, 죽게 되면 이 귀한 가치 있는 나를 도대체 누가 죽이는 겁니까? 사람이 죽이는 거예요? 옆 사람이 죽이는 겁니까? 도대체 나를 누가 죽이는 거예요?



남 탓 할 것 없어요. 우리는 나를 죽이는 그 분을 일찌감치 못 만나서 그게 문제에요. 우리는 일치감치 나를 죽이려고 작정하신 분을 못 만났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같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인간들 세계 속에서 찾았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사람의 종이 안 되면? 그러면 나는 못사는데? 사람의 종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의 본래의 가치라는 것을 지금까지 내가 오해했다는 거지요. 나의 본래의 가치라 하는 것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씀,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그 분이 내가 모르고 있는 진짜 나의 가치를 따로 챙기고 계신 분이 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부교역자가 있습니다. 당회장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당회장 목사가 “너도 목사니까 설교하라.”고 수요오후설교 맡겼거든요. 설교에 목말랐던 이 부교역자, 설교에 목마른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설교에 목말랐던 차에 설교를 했더니만 끝나고 난 뒤에 당회장 목사가 종용히,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부르지요. 불러서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려거든 이 교회에서 나가라.”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그 부교역자에게 들이닥치게 하시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7장 22절에 나오는 말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부교역자 된 네가 제대로 온 몸으로 체험하고 평소에 살아왔는지, 아니면 성경에 이런 말씀이 들어 있다는 그것으로 끝났는지?”를 하나님께서 측정해 보시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왜 있는가? 나를 힘들게 하는 세상, 노동시장, 이런 것이 왜 있는가? 일당 5천 원짜리, 이런 것이 왜 있는가? 마가복음 5장 7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을 안 보니 그런 것이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와 있어요.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하는 말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렇게 했어요.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주 특이한 멘트를 날리는 거예요.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걸 귀신이 이야기했거든요. 귀신이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처럼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군상, 사람들의 무리에 귀를 기울이고 ‘저 사람이 나를 얼마짜리로 써줄 것인가?’ 하지 말고 ‘귀신들의 무리에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귀를 기울여야 돼요. 귀신의 무리에게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겁니다. 귀신과 귀신을 하나로 묶는 힘이 있어요. 그게 ‘예수와 나는 상관없다.’ 그거거든요. 예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가지고 귀신들린 자라고 하더라는 말이지요.



그게 귀신들린 자의 무리, 그룹이라면 “여기 추가요!” 하고 우리도 손들어야 돼요. 왜? 우리가 평소에 언제 주님과 상관있게 살았습니까? 내 가치는 내가 알아서 챙긴다는 식이지 “주님이여, 제 가치는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라고 생각한 적이 언제 있느냐는 말이지요. 교회 와서 기도해도 남들이 원하는, 내 가족들이 원하는 가치를 더 추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힘을 빌리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나의 가치는, 내가 정리하고, 내가 추스르고, 내가 소유할 그 가치는 나에게 그 권한이 없다는 생각을 언제 갖겠어요? 없어요.



성경 코앞에 둬도 성경과 우리 사이에 뭐가 지나가고 있느냐 하면, 성경은 나와 상관없다, 예수는 나와 상관없다, 이게 복사할 때 광선이 쑥 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자꾸, “예수는 나와 상관없다? 성경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사는데, 나의 선택에 의해서, 나의 의지력에 의해서, 나의 열심과 힘씀과 절제력과 자기관리에 의해서 이만큼 살아왔는데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런 식인 거예요.



아까 그 부교역자 이야기 다시 합니다. 당회장 목사가 종용히 불러서 하는 말이 “그런 식으로 네가 설교하면 너는 우리 교회 못 있게 된다.” 그러면 초짜 부교역자가 순진해요. 당회장한테 대들어요. “제 설교가 주의 뜻에 혹시 틀린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게 얼마나 순진한지 몰라요. 교회를 몰라서 그래요. 초짜라서 그래요. “제 설교가 주의 뜻과 틀린 데가 있습니까?” 당회장 목사가 듣고는 ‘참, 정말 초짜구나.’ “(이 초짜야!) 네가 설교를 잘하고 못하고는 네 사적인 신앙문제지만 여기는 목회의 현장이다. 사람들에게 은혜가 되고 사람들이 우리교회 붙어 있으면 좋은 교회고 이 교회에 붙어 있지 않으면 이 교회운영이 안 된다. 부교역자 월급은 어디서 나오는데? 다 저 사람들이 주신 돈이야. 너는 지금 이론만 알지 현실을 몰라. 앞으로 설교 할 때 나에게 검사 맡고 설교해. 긍정적 마인드를 심어줘야 그 사람들이 희망을 갖는 거야. 부정적 마인드가 아니라 긍정적 사고방식을 심어줘야 해.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했지만 나중에 철들어보니 ‘아하, 그게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되었어. 신학교에서 안 가르쳐주는 거야. 현장에서 배워.”



그 말은 뭐냐 하면, 교인들이 예수와 상관 짓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고 남들이 나를 얼마나 우수한 존재로 볼 것인가, 남들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서 신이라는 나름대로의 우상에다 힘을 얻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눈치코치 없이 예수 이야기를 해버렸으니 그게 이해될 리가 있습니까? 당회장 목사가 아주 불안하지요. ‘너 하나 붙들고 있으면 내 자리가 위태로워. 너를 내쳐줘야 교인들로 하여금 내 목회노선을 확실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같이 갈 수 있어야 내가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제가 부교역자의 직장 예를 들었습니다만, 교회뿐만 아니고 일반기업이나 회사에서 마찬가지거든요. 어떤 사람은 회사 가서 복음 전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가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서 부탁합니다. 제발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마세요. 진주가 아까워요. 딱 보고 개, 돼지다 싶으면 복음 이야기 하지 마세요. 왜 그 귀한 것을 그렇게 던집니까? 오늘 설교 주제가 그거예요. 개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그거예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열두 제자가 귀신 쫒아내는 것이 자기권한 아니었어요. 주님의 선택이 계속해서 작용해요. 선택했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행동에 선택의 능력이 같이 임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귀신을 쫒아내든 뭘 하든 자기 맘대로 못해요. 주의 능력이 임할 때만 할 수밖에 없어요. “주의 능력이 임할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능력은 예수님도 아버지에게 받은 능력이고 그게 다 같은 성령의 능력이거든요, 그 성령의 능력은 예수님을 죽게 하는 능력이고 따라서 전도할 때가 언제냐 하면, 내가 실패자인 것을 확인할 때 유일하게 전도가 되는 순간입니다.



어떤 순간이냐 하면, 품에 사직서 쓰고 이제는 보란 듯이 사장 책상에 내려칠 그 때 복음 전하세요. 왜냐하면 내가 망하는 순간이거든요. 내가 망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에게는 일절 안 망해야 될 가치는 없습니다.”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일절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망한다는 말조차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태어나는 그것부터가 실패였기 때문에.” 태어난 것부터가 실패다! 태어난 것부터가 실패에요. 임신했는데 따님이 태어났습니까? 실패다! 아들이 태어났습니까? 실패다! 고추 실패, 복숭아 실패, 다 실패! 태어난 것부터가 실패인데 사는 게 실패가 아닐 수가 있어요? 실패지요.



왜 우리가 실패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가격을, 가치라는 말보다 가격이라는 말이 더 확실하네요, 나의 가격을 따로 경매붙이는 분이 있어요. 나의 가격을. 주님의 가격경매붙이는 그것을 방해하는 쪽이 누구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또 가격을 붙이니까 나는 주님 붙이는 가격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에서 붙이는 가격 따라 평생을 허송세월하면서 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나는 이만큼 근사하게 살아야 해. 그래야 사람대우를 받아.’ 무슨 실패자가 사람대우를 받습니까? 실패자가 사람대우 받겠다는 그것도 사치에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농사지을 때 가시와 엉겅퀴가 난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은 그 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 피는 것만 보지요. 그것만 보시면 안돼요. 아담의 마음 밭에 가시덤불 피는 것도 같이 봐야 돼요. 아담의 마음, 하와의 마음, 저주의 증표가 거기에서 소생하고 있습니다. 번지고 무성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가인이 누구 자식입니까? 아담 자식이지요, 뭐. 엄마는 하와지요. 꼴좋다. 하나님의 창조된 존재에서 가인 같은 존재가 나타났으니.



그래도 아벨은 나왔지 않는가? 아벨은 허무하게 죽었는데요? 이름도 ‘허무’에요. 세상에, 자식 이름을 지으면서 허무라고 짓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김 허무, 박 허무, 최 허무, “허무 집사님 기도하겠습니다. 허무……, 끝!” 허무라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 값으로 칠 자격도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아예 무가치한 존재라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저주 받아도 대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죄 짓고 난 뒤에 아담의 가치를 뭐로 바꿨느냐 하면, ‘허무’로 바꿨어요. 허무함으로써 가치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허무를 맛 봐라 그게 너의 유일한 가치다. 너의 최종 가치다.” 그 허무를 맛보려면, ‘나는 허무하지 않다. 나는 허무하지 않다.’를 악바리처럼 유지를 해야 되거든요. 유지해라, 유지하면 할수록 점점 더 허무의 강도는 짙어지는데요?



처음부터 우리는 실패자였어요. 그런데 그 실패자인 것을 사람들은 모르거든요. 모르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서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저주받았다. 너희들의 토지도 저주받고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아기를 낳으면서 고통을 받는다.” 남 보지 마세요. 남들도 애 낳을 때 다 아파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현실에서 온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현실에서 주어진 겁니다. 뭐가요? 우리들이, 저와 여러분이. 그걸 자꾸 눈에 보이는 사람에다 손톱 세워서 달려들고 “너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 하면서 부부싸움 하고, 그러면 곤란해요.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성경에서 해답을 얻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네 문제를 구성하라고 주신 거예요. 해답은 나중문제에요. “대체 내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를 성경에서 찾아야 돼요. 성경 대하는 법도 몰라. “주여, 제 인생이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성경 봐라. 처음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지.” 가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게 했는데 꾸깃꾸깃, 거기에 가치를 집어넣으려고 위선을 떨며 교회 나오고, 장로 목사 집사가 어떻고. 집사, 장로, 그게 무슨 가치가 있어요? 목사, 당회장, 부교역자, 그게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가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 되게 했고, 가치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장로 집사 되게 하신 거예요. 가치가 없는 거예요.



가치 없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끊어버리면 갑자기 우리 가치가 발생됩니다. 예수 없이 남들처럼 살면 가치가 발생돼요. 이솝의 우화에서 토끼와 거북이 달리기 경주하는 대목을 상당히 좋아합니다. 어릴 때는 약자 편에 선다는 생각으로 봤어요. 거북이가 느리니까 토끼가 앞섰어요. 여러분도 다 아는 이야기지요. 토끼가 앞서가다 뒤 돌아 보니 거북이가 엉금엉금 한참 뒤에서 오고 있어요. 토기가 한 숨 잤지요. 잠을 잔다는 것은 자아가 통제가 안 되는 순간이거든요. 깰 때 비로소 정신 차리지 자면서 ‘나는 잠에서 깨야지.’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지요.



잠에서 깨보니 벌써 거북이가 만세 부르고 있는 거예요. 어릴 때는 제가 ‘부지런하면, 성실하면 빠른 사람을 이길 수 있구나.’ 하고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복음 알고 보니 둘이 달리기를 했잖아요. 그래서 뭐? 뭘 어쩌라고? 달리기해서 이겼다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인생 승리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정주영 회장은 하루 세끼 된장찌개만 먹었답니다. 된장찌개 먹으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경부고속도로 닦았습니까? 그래서 재벌 됐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건희는 휠체어를 탔느니 일어났느니, 무슨 소문이 들리지만 지금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요?



이걸 전문용어로 포대갈이라고 합니다. 원산지 속이기 위해서 포대를 갈아서 중국산을 한국산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전부 다 우리는 포대갈이를 다 하고 있어요. 창세기 3장을 압니까? 마가복음 5장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해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니까 보고도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도대체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보게 되면 성경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가시가 되어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있고 저런 문제가 있다고 매일같이 쑤시거든요.



“가치도 없는 주제에 무슨 가치 있는 행세를 해?” 이런 식으로 쏴대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뭘 의미하는가? 왜 우리는 가치도 없는 왜 살아야 되는가? 보통 산다는 것은 살만한 가치가 있어서 산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에서는 애초부터 우리는 이 땅에 살 가치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간단하게 나와요. “참새를 내가 키운다.” 간편하게 이야기해요. “참새는 내가 키운다. 죽고 사는 것은 내 손에 달려 있다.” 사무엘상에 보면 “사는 것 죽는 것이 다 내 손에 달려 있다.”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나한테는 별로 보탬이 안 되네.’ 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니 그걸 외면해 버리는 거예요.



‘대체 내가 뭐가 문제인가? 뭐가 문제이기에 내가 왜 이렇게 심난한가?’ 보게 되면 지금 가치도 없는 게 포대갈이 해서 가치 있는 행세를 하는 이 위선덩어리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위선덩어리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중간노선에서 바꾸면 안돼요. 처음으로, 원천, 출발한 노선으로 가야 돼요. 그 출발한 노선이 창세기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23절에 우리의 원천이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게 임신하지 못한 리브가가 하나님의 계시로 임신하고 그래서 쌍태를 낳게 되는데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먼저 있었고 그 계획을 구체화하는 작업으로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것은 에서나 야곱의 가정사에 속한 문제지 나하고는 상관이 없잖아.’라고 생각할거예요. ‘그것은 이삭의 개별가정사 문제고 우리 가정사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보면 ‘두 국민’이 나와요. 벌써 달라요. 두 국민이 나온다는 말은 세상 모든 인류를 두 쪽으로 나누겠다는 거예요.



‘에서 편이냐, 아니면 야곱 편이냐?’ 둘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이게 원천계시에요. 인간은 왜 존재하느냐? 인간은 어떤 가치, 어떤 이유 때문에 이 땅에 나타나야 되는가? 그 원천, 처음 나오는 그 샘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이삭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에요. 나와 상관없다고 하지 마시고요, 우리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서 좀 들읍시다.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우리 출생의 원천보다 더 앞선 원천을 언급해요. 그게 뭐냐 하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고 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둘 다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속성에 속해요. 하나님의 속성에는 저주하시는 하나님, 동시에 축복하시는 하나님, “축복도 저주도 내 맘이다. 왜?” 이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그러면 축복과 저주를 처음 에덴동산에서부터 알려줘야 되지 않습니까? 알려줬지요. 선악과 없는 에덴동산은 에덴동산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선악과가 없는 곳은 에덴동산이 아니에요. 인간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살았는가? 에덴동산에서 태어나서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우리의 원천이고 우리의 고향이에요. 원천부터 이미 저주의 속성이 동산 한가운데 박혀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존재의 가격이고 가치입니다. “저주받을 자는 저주 받아야 되고 복 받을 자는 복 받아라.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가치니라. 끝!” 사적으로 개인적인 가치를 따로 챙기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원대한 계획에 의해서 저주받을 그 대상자가 뱀의 후손을 통해서 이미 우리한테 들어와 버렸어요. 그 들어온 것을 한 글자로 해서 뭐냐 하면, 바로 ‘힘’이에요. 힘.



“목사님, 나는 왜 그렇게 정신적으로 불안합니까?” 힘 때문에 그래요. 알 수 없는 힘, 보이지 않는 힘. “목사님, 나는 저 여자가 왜 그렇게 좋습니까?” 힘 때문에 그래요. 사랑의 힘. 셀린디온이 불렀다는 ‘POWER OF LOVE’ 힘 때문에 그래요. 그 힘에서 못 벗어나요. 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는 다른 종류의 자유자냐, 종이냐? 이걸 구분해야 되지 인간 세상, 인간의 가격을 매기는 노동시장에서 종이냐, 자유자냐? 그것에 구애받지 말라. 그냥 살아라. 종이냐? 그냥 살고 자유자냐? 그냥 살아라. 그냥 살면 된다. 그냥 살면서 사람의 종이 되지 마라.”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무가치한 자’라고 하는 자만이 자유자라는 겁니다. 힘에서부터 벗어난다는 거예요. 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의 그 힘의 논리에 해당되지 않음을 수긍하는 사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유자입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이 가는 인생길을 보게 되면 마치 잔잔한 바다 위를 보트가 지나가게 되면 지나간 물결의 자취가 새롭게 생기듯이 주님이 가는 모든 곳에는 저주와 축복, 저주와 긍휼의 물결이 생겨요.



다시 말해서 인간만 있다고 여기는 세상에서 주님이 가게 되면 귀신과 마귀의 힘이 느껴지도록 하는 취지로 주께서는 일하셨습니다. 악마의 힘이 추상이 아니고 실제적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악마의 힘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던져놓고 그 말씀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만 했어요. 그런데 자기 가치, 자기 의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아까 말한 대로 포대갈이가 되어 있으니까 자기가치 챙기는 것밖에 모르니까 자기 가치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그래, 저 말씀 지키면 나는 구원 받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고 모든 가족은 전부 다 죽음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죽음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가족이 죽음으로서 나는 생명을 사랑한 게 아니고 죽음을, 저주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족이 죽을 때 발칵 뒤집어지면서 노출이 되고 폭로가 되지요. “내 자식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신다는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친히 자기 손으로 죽이게 했습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이미 주님과 생명의 관계가 이어진 사람은 그 관계성을 교체를 시켜야 돼요.



빨간 선으로 유입된 주의 영생을 받았으면 저주가 유입된 녹색 선은 잘라야 되는데 사람들이 이 선을 자를 수가 없어요. 왜? 기존의 자기가치 챙기는데 급급해서 그걸 자를 수가 없어요. 어제 멀리 있는 제 사위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제가 사위 언급하면서 먼저 전제를 하는 것은 ‘죽음으로 연결된 관계’ 그것을 먼저 전제로 합니다. 어떤 질문이냐 하면,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러 애굽으로 가는데 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 질문보다 더 기쁜 것은 출애굽기 4장을 보면서 이해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걸 덮고 그냥 지나갔다는 그 사실이 지금에 와서 다시 깨우쳐 진다는 그것이 저는 반가운 거예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되는데, 그동안 덮고 지나갔던 그것을 다시 한 번 들춰서 보겠다는 겁니다. 할 일도 바쁜 판에 어떻게 그런데 관심을 다 두는지, 아무 관계도 없는 출애굽기 4장을 왜 언급을 하느냐는 거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출애굽기 4장의 그 사실을 모르고 내가 나를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나는 당신과 상관이 없어.”라고 하면서 살아가도 이 노동시장에서 멋들어지게 잘 살아요. 그런데 예수와 상관없이, 말씀과 상관없이 산다는 것이 뭔가 찝찝한 거예요. 뭔가 누락시키고 빠트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내용을 아는 순간 내가 지금 쫓아가고 있는 그 노선에서 다른 노선으로 빠져야 된다는 그런 기회가 된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위험성도 있잖아요. 그게 위험성이 아니지요. 사실은 사는 길이지만 그런 위험성도 생각해야 되거든요. 엄마가 전화를 걸어서 복음 이야기라도 하면, “엄마나 잘 믿으세요. 저는 됐습니다.” 이렇게 끊는 것이 힘이잖아요. 마귀라고도 하지 말고 그냥 힘, 네가 힘이 센가, 내가 힘이 센가, 토끼가 빠른가, 거북이가 빠른가, 그 경주, 그 맹목적인 경주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폭탄주를 누가 빨리 마시는가, 되도 않는 그런 경주, 하루에 담배를 몇 갑 피웠는가, 그런 되도 않는 경주, 이런 경주 못해서 굶주린 이 세상, 누구 애가 영어 잘하는지, 아, 이 모든 방송이 다 경주에요. TV 언뜻 보니까 여섯 살 먹은 애가 영어로 노래를 불러요. 애도 영어로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요. 방송 PD가 그 현장에서 일본말로 된 겨울왕곡 주제가를 들려주니까 그걸 듣고 1분 만에 그 현장에서 불러버려요. 여섯 살 먹은 애가. 그거 보고 우리 애 천재라고 했던 부모들 다 졌어, 다 졌어요. 세상에 일본말로 ‘렛 잇고’노래를 현장에서 불러버립니다. 지금 TV 보고 있는 자기 애 쥐어박고 싶어요. ‘너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이래가지고 노동시장에서 너의 가치가 제대로 매겨지겠느냐?’



우리는 문제부터 모르기 때문에 해답도 모릅니다. 문제를 알아야 해답을 알지요. “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제가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가족은 피, 죽음, 죽음의 관계가 될 때 그 죽음, 어떤 메시아의 죽음 안에서 비로소 잃었던 본래의 가치가 거기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때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선을 교체해야 돼요. 피가 흐르는 붉은 선으로. 우리가 자랑하는 녹색 선을 잘라버리고 붉은 선으로 교체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까짓 거 교체하지 뭐.’ 교체 안 됩니다. 왜? 우리가 교체할 것 같으면 기존에 우리가 종으로 삼고 있는 힘을, 그야말로 슈퍼맨처럼 차고 올라가서 다시 내려와야 되는데 그 차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올라가, 올라가!” 찬송가 백날 불러도 우리는 도로 떨어집니다. 못 올라갑니다. 그 방법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포대갈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 안에 진짜 우리를 이렇게 만든, 우리에게 저주를 유발시킨 원형이 들어 있어요. 그 원형이 하는 소리가 딱 한 소리입니다.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따라서 그것을 들춰내줘야 돼요. 그래서 세상 사람을 보다가 뭘 보게 하느냐 하면, 자기 속에 있는 귀신을 보게 하는 방식이 주님이 하시는 절차에요. 그 절차를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졌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를 우리도 동일하게 발설하게 하도록 해주기 위해서 “주여, 내가 감당 못할 귀신이 들어 있습니다.”를 고백해야 되지요. 베드로가 자신 있게 “나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베드로야! 지금 귀신이 너를 지배하고 있다.” 했어요. “내가 기도를 안 해주면 너는 끝났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두렵게 하고 무섭게 하는 그 힘,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그 힘, 자존심의 힘, 체면의 힘이 끝이 날 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거지 나사로는 그것을 미리 알았어요. 내가 아프고, 내가 힘들고, 죽을 정도로 괴롭지만 이것이 한시적이라는, 그 끝을 낼 시간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여 변호사회 성경모임.’ 어떻습니까? 멋있지 않습니까? ‘창녀들의 성경모임’ 뭔가 지저분하겠지요. 똑같아요. 여 변호사회 성경모임은 자격이 여자 변호사들에 국한되겠지요. 그러면 얼마나 자긍심이 높겠습니까? 그거 귀신들입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창녀들의 모임이라 할 때 창녀 아닌 사람들은 또 못 들어가지요. 그러면 창녀들 나름대로 또 그것도 자존심이에요. 창녀가 무슨 자랑도 아닌 그것이 저희끼리 자랑이 돼요. 그러니까 제가 오늘 어려운 소리를 한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재소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 도와달라고 손 벌리는 것 전부 다 힘을 노리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들 도와주지 마세요. 재소자들 도와주지 말고, 창녀들 도와주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지 마세요.



전부 다 귀신이 심어놓은 자기 가치를 그냥 쥐고 있겠다는 거예요. 로마서 3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너하고 상대해서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너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네 운명이 바꿔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었는데 이제 행동 바르게 해서 모처럼 얻은 구원을 다시 내 팽개치고 도로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이 바로 마귀생각이에요. 히브리서 6장을 가지고 한 번 비췸을 얻었는데 뭐가 어쩌고저쩌고,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 보면 정말 속 탑니다. 우리의 잘잘못에 의해서 우리의 운명이 바뀌지 않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원천인데 둘이 나올 때부터 싸웠습니다. 싸움이에요. 처음부터 싸움꾼이었어요. 싸움꾼이라는 말은 각자 갖고 있는 이질적인 힘, 대립되는 두 개의 힘을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그 힘에 의해서 모든 인류는 두 조각납니다. 야곱편인가, 아니면 에서편인가, 두 조각 나는 겁니다. 그 싸움, 저주의 힘과 사랑, 용서의 힘, 두 힘이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 싸운다는 내용이 분명히 창세기 25장에 나왔잖아요. 이제 그 창세기 25장이 성경에만 박혀 있지 말고 우리 내부에서 벌써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내가 해답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왜 문제가 생겼는가를 보니 정작 이 문제는 정말 영적인 문제인데 우리는 전부 다 세상 적으로 내 가치를 그냥 유지하려는 너무나 인간적인, 그저 인간적인 내 가격을 그냥 유지하려다 보니 정작 나의 본 모습을 잃어버린 거예요. “열심히 교회 나와야 돼. 왜? 벌 안 받아야 되니까.” 이게 무슨 망발입니까? “저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해. 왜? 가난한 사람 도와주면 돌고 돌아서 결국 나에게 복으로 오니까.” 그것은 갓바위에서 매일 읊어대는 내용이에요. “모든 것은 업보다. 모르고 한 것도 다 돌고 돌아서 네가 아니면 네 자식 대에 잘 되는 복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절에서 사람 꾀이는 즉효약이거든요.



결국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라.” 그 이야기잖아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도요 또 하나의 가치, 자기가 성공했다는 사례를 남기고자 하는 이기주의적 수작에 불과합니다. 가치 없는데 가치가 있고 없고 그 자체에 대해서 네가 신경을 끊어버려라. 이미 너는 가치 있다. 왜? 값없이 주신 그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너는 이미 어느 쪽에 속하는가? 이미 다른 힘에 속하는 거예요. 뭐냐? 용서의 힘, 사랑의 힘, 긍휼의 힘, 그 긍휼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이제는 네가 전에 인간적인 힘으로 견디기 힘들고 어렵고,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벌벌 떨었던 그 힘을 사랑의 힘이 너끈히 이길 거예요.



환란이고 곤고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경우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지상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봐야 십자가에요. 우물에 빠져봐야 십자가에요. 빠진 그 장소가 십자가에요. 우리는 떨어질 때 갈빗대고 척추고 다 나갈 것 같았지만 막상 떨어지고 나니 출렁, 피가 있는 곳에 떨어졌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 피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의 명예와 주의 가치, 주님만 값있음을 위해서, 마귀에서 끄집어낸 그 값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동안 주께서 활용하신 겁니다.



그 활용한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와요. 고린도전서 7장에 23절에 보면,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네가 종이 되더라도 종으로 여기지 말고 네가 자유자로 살아라, 무슨 말인가? 네가 자유자라 되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자유의 종이 되라는 말입니다. 말이 달라요. “나는 내 맘대로 산다. 나는 누구의 간섭 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나한테 어떤 강제성도 필요 없다.” 이것은 가짜 자유가 “나는 즐겨 종이 되겠습니다. 이 땅에서 마귀의 힘으로부터 벗어난 그 자유의 종이 되겠습니다. 곧 진리이 종이 되겠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래서 23절에 보면,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2절에 보면,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지금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속에 귀신 들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언급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자기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들은 이 말이 진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아무 의미 없는 소리입니다. 제가 오늘 할 말은 이거예요. 아무것도 여러분의 운명과 팔자를 뜯어고칠 행위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행동을 해서 팔자를 고친다면 그것은 이미 여러분이 엉터리 가치를 아직도 유지하려고 붙들고 있다는 사탄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아프면 아프고 아파서 죽으면 그만이고, 떨어져도 십자가에요. “아, 인생 끝났다.” 끝장나도 십자가에요.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젖 뗀 아이가 젖을 마음껏 먹고 기분 좋아서 씩, 웃듯이, 엄마 얼굴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우리의 기존의 가치를 포기해야 됩니다. 어떻게 포기하는가? 참 어렵지만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과 깊이 사귀세요. 사귀면 여러분들이 반항하게 될 겁니다. 처음에는 좋은 게 좋다고 나오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못 참습니다. “이러려고, 내 인생 이렇게 망치려고 주께서 믿게 했습니까?” 하고 나올 때 주께서는 성공의 박수를 치면서 “축하한다. 드디어 귀신 층과 너의 층이 드디어 분리되는구나.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를 아주 힘들게 하는군요.’라는 그 층이 처음부터 너의 주인이었어. 너는 그 종으로 살았다는 것을 이제 알겠느냐? 박수! 축하한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근사하게 영접하는데 실수입니다. 근사하게 영접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에요. 손님 대접하듯이 주를 대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망치고 뭉개는 분이기에 영접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공격당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주님한테 그 사랑의 매에 매일같이 공격당해서 우리가 남들 보여주기 위한 포대갈이, 그 위선의 종에서부터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갈아 치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인 사업이라고 해서 주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현장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공포, 이러다가는 내 인생이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거리,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절차, 축복된 절차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