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41강-계명지키기(고전7;18-19) 1505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5. 26. 08:19

2015-05-17 12:51:23 조회 : 332         
   계명 지키기 150517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계명 지키기(고린도전서 7: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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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5-17 13:44 
계명 지키기

2015년 5월 17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18-19

(7:18)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할례 계명도 전체 계명 속에 포함된다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 들어앉아서 외칩니다. 이미 할례 계명은 인간하고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에 의해서 달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골로새서 2:11-12에 보면,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할례 계명이 모든 계명의 대표계명이라는 겁니다. 할례 계명이 예수님에 의해서 달성됨으로서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가 성립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례 계명 외의 여타의 계명들이 모두 할례 계명에 종속된다는 말입니다.

이 할례 계명의 성취자가 일반인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확정지어졌음으로 인해 그 이후의 ‘계명 지키기’는 곧 ‘십자가 안’이라는 계명 완성상태의 현실이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현실을 대체해버리게 되었습니다. 곧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현실은 그야말로 환상이 불과한 거짓 현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한 현실을 무엇일까요?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내가 있다는 것다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대책도 없고 해답도 없습니다.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내 인생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해서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결국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이 구태여 철학자들의 주장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냥 무턱대로 버티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겠다는 것은 기존의 현실을 자기 위주로 키워보겠다는 시도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명을 받을 때 이런 자기 위주의 현실 속에 계명이 첨가되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점을 생각해보세요.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시내산 밑으로 왔을 때, 산 밑에 있던 백성들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즉 자신의 현실 속에 계명이 첨가되었으니 그 첨가된 계명을 지키면 기존의 현실이 좋게 변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계명 들기  이전에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지팡이가 올라가면 이기도 지팡이가 내려가면 졌습니다. 물이 없을 때,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니까 없던 물이 나왔습니다.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지켰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팡이가 계명의 완성을 선도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오기 전에 그들은 필히 할례를 지켜야 했습니다.

할례 지키지 아니하면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바름과 홍해 갈라짐의 효과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요건이 이미 할례 계명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 됩니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요건은 십자가 밖에 인간의 이성과 양심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만 갖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십자가를 자력(自力)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참되게 십자가를 아는 자는 자신이 십자가 능력으로 자아의 기대가 배제된 채 구원 안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압니다.  즉 구원의 결코 자신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더 이상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놔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명 속에 일찍 들어오셔서 ‘계명완성’의 진면목을 보이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계명 준수에 나서시면서 계명 완수를 달성하셨는데 그 첫 번째 절차가 바로 광야에서 악마와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나야했을까요?

그것은 광야가 참된 현실의 유일한 모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현실이 아닙니다. 사단이 줄곧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이 있음을 인간들이 몰랐던 이유는 사단이 그렇게 설득해왔기 때문입니다. 즉 사단은 인간이 납득이 되는 현실관으로 위장시켜 왔습니다.

첫째가 이것입니다. 사람은 먹고 사는 게 우선이다 는 겁니다. 살아남게 하는 것만이 진리라는 겁니다. 따라서 먹고 사는데 보탬이 되는 신이 참된 신이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고 말입니다. 기계가 밧데리 충전으로 깜빡인다고 해서 생명이 아닌 것처럼, 사람이 호흡이 지속한다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단의 주장을 ‘유혹’이라고 표현합니다. ‘유혹’이란 이 현실 말고 따로 현실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현실이 대적관계에 있으며 전쟁을 감행할 때나 성립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광야를 확장하려 하십니다. 이는 곧 사단과의 전쟁의 확장을 뜻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관한 겁니다. 사단은 말합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숱한 사람들이 당신의 메시야로 인정해줄 것이다” 이 말은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납득이 될 만한 증거를 제시한 쪽에 서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들은 어떤 희망을 갖는데 실은 인간들이 희망 갖는 게 곧 실수입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내가 환상 속에서 본다는
모든 이가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네
마치 훨훨 나는 구름처럼
저 깊은 곳으로부터 인간애가 충만한 영혼을”

「넬라 판타지아」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인간들이 기존 현실을 긍정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것을 빌미로 인간들이 납득할만한 세상을 소개하는 자들이 사단에 속한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기존 현실관을 사수하는 자들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인간의 자기 집착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알게 된 복은 곧 자기 자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식’의 양산이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육이 단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대표계명의 완수 안에서 성도는 말씀완성의 효과를 표현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작용하는 ‘계명 지키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한 세계 속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5-19 05:43 
41강-고전 7장 18-19절(계명 지키기)1505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18-19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18-19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본문에서 할례계명이 하나님의 계명에서 빠지게 되는 겁니다. ‘할례 받느냐, 안 받느냐?’ 이것도 계명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네가 저촉 받거나 부담가질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계명이란 것은 할례 계명까지 포함해야 그것이 계명인데 할례 계명이 빠진다는 말은, 할례 계명이 다른 계명을 지키는 대표계명으로서 다른 분이 그 계명 지키기에 있어서 이미 완료 상태라는 뜻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을 시내 산에서 받기 이전에, 홍해를 건너올 때 그들은 이미 할례를 행했습니다. 계명 이전에 할례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계명은 할례 받은 자에 한해서만 그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계명 지키는 요건이 할례 속에 들어 있다는 그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를 믿으려면 십자가를 지키고 믿어야 되는 조건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믿을 수 없다는 논리와 똑같은 논리에요. 골라, 골라, 골라잡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 믿을래, 십자가 믿을래?” “십자가 믿을래.”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제대로 십자가를 믿으려면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먼저 전제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 없이 십자가를 믿을 수 있는 방도는 굉장히 많아요.



십자가는 무엇이냐? 사랑의 완성이다. 십자가는 무엇이냐? 희생이다. 그 희생, 인간이 인간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그 희생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희생해서 그 희생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구원한다. 이런 식의 십자가는 성령 받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십자가에요. 사랑이 뭐냐? 사랑에는 세 가지 있는데 아가페, 에로스, 플라토닉이 있는데 최고의 사랑은 아가페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은 뭐냐?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의 결정체가 뭐냐? 십자가다.



이것은 철학자도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요건은 십자가 안에만 폐쇄적으로 담겨 있고 제대로 십자가를 믿는 것은 그 십자가가 자체적인 능력을 발휘할 때, 그 때 그 요건도 밖으로 방출이 되면서 그 십자가의 능력에 휩싸일 때에 그 때 비로소, 아까 이야기한 아가페 사랑이 어쩌고저쩌고, 인간의 희생정신이 어쩌고저쩌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것은 마귀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알게 되면 내가 십자가 믿어서 구원 받겠다 하는 이 수작, 이것도 사탄이 내세운 거짓에 불과한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 믿어서 그래서 나를 천국에 보내겠다고요? 그것은 사탄의 짓입니다. 십자가 능력이 겹쳐서 그래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는 이 십자가를 내 능력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권한 속에 있었다. 나는 이 십자가를 알고 싶어도 모르게 되어 있는 그런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났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십자가 이전의 유대인 사상 속에도 희생정신이라는 것이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정신이 다 들어 있어요. 그것을 십자가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 게 십자가가 아니에요. 십자가라는 것은 ‘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구원에서 탈락이 되어야 되며 그런데 왜 그 하나님은 잘나고 잘난 인간, 경건한 인간, 거룩한 인간, 행세하는 인간이 그렇게 많은데도 불구하고 왜 모든 사람을 제쳐두고 유독 나사렛 예수라는 한 분만을 주목하시는가? 왜 우리는 안 되는가? 우리는 왜 예수님 곁에 가서도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예수님에서 빠져야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나보고 시킨 것으로 계명을 줘놓고 왜 나를 비켜가고 그 모든 계명을 예수님 홀로 이룬 것으로 몰입시키는가?’ 그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나의 십자가고 그 십자가만이 찬양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오늘 본문의 말은 이거예요. “할례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끊어라. 이제 신경 쓰지 말라.” 할례는 모든 계명의 대표계명이 되는 겁니다. 이 할례계명을 못 지킨다는 것은 다른 계명도 지킬 수 있는 조건이 못 된다는 이야기거든요. 지금까지의 설교 논리에 의하면 할례계명을 유대인들은 행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할례 그 외의 계명도 우리는 본격적으로 지켜보세, 그렇게 나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할례를 알아?”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할례를 알아? 할례를 모르면서 뭘 지켜? 할례를 했다고? 음, 아닌 거야. 할례를 했다고? 해도 괜찮아.” “사도바울님, 그렇게 나오시면 안 되지요. 할례 계명도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인데 그걸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괜찮다니까. 할례 안 받아도 괜찮아.” “할례 계명 안 지키면 율법 못 지키는데요? 순서가 그런데?” “순서고 뭐고 그런 것 다 치워.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왜 그렇게 사도는 모든 것이 자신만만하지요? 사도가 뭘 봤기에? 우리보기에는 만만치 않은 세상이 사도에게는 왜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 걸까요? 우리는 이 세상살이가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아요. 한순간 한순간이 조마조마해요. 마치 공사 중인 롯데백화점 들어가는 사람 심정이에요. 위에서 건축자재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세상이 아슬아슬한데 왜 사도바울은 구애받는 것이 없이 그렇게 자유롭게 삽니까?



그것은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이것이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할례를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렸기 때문에 그 다음 16절에,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할례 받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모든 계명에 대한 부담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완성상태에 놓여 있기에 그렇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지킬 계명은 성경 어느 한 구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게 정답이에요. 내가 없어졌기에. 제가 한 10년 전, 아니 10년이 뭡니까? 30년 전부터 이야기했거든요. “십일조라는 그런 계명은 신약에 없습니다.”라고 외쳤더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다 오해해요. ‘헌금은 형편 따라 하면 되는구나.’ 전부 이런 식으로 해명을 해버려요.



“십일조가 없습니다.” 하는 말은 “당신은 헌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헌금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삼조, 사조를 해도 안 받아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손으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것으로 쳐주지를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라고 했잖아요. 같은 말이에요. 할례는 대표계명이에요. 모든 계명에 앞서 있는 계명입니다. 그 대표계명을 출애굽기 16장부터 죽 나오는 거기에서는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지팡이’ 그걸 지팡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팡이’



지팡이는 바다를 갈라지게 했습니다. 제가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지게 했다고 하니 또 “그 지팡이 어디서 파는데요?” 이렇게 하지 마세요. 지팡이는 바다를 갈라지게 했습니다. 지팡이는 반석에서 물을 냈습니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높이 들매 전쟁에서 승리했고 지팡이를 든 손을 내리니 전쟁에서 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지팡이를 든 손을 높이 드니 전쟁에서 또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적들인 아말렉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 지켰습니까?



우리가 십일조를 하고 안하고,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안 지키고, 사도바울의 권면을 듣고 안 듣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지시와 명령을 듣거나 듣지 않고, 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되고 안 되고, 가 결정되는 겁니까? 모든 계명은 대표계명의 완성의 효과와 혜택입니다.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구약 모든 계명의 대표계명을 찾아야 돼요. 그 대표계명이 뭐냐? 예수님께서 할례 언약을 이루었다. 그게 뭐냐? 십자가에요. 외우기도 쉬워요. 구약 때는 모세가 든 지팡이, 세 글자. 신약에는 십자가, 똑같이 석자에요.



다시 묻습니다. 그들이 계명 지켜서 물 나왔습니까? 아니에요.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온 거예요. 그들이 갈 길을 알지 못했을 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 때 모세의 지팡이로 말미암아 인도함을 받았어요.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그 지팡이가 여전히 모세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을 인도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 계명은 왜 있는가? 계명을 지킨다고 했는데 계명은 왜 있는가?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뭐냐? 너는 계명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개를 향해서 “네 집이나 지켜라.” 하는 이 말은 집에 들어가라는 말이거든요. 네 집에 들어가 있으라는 말이지요. 침대에 자꾸 올라오지 말라는 말이지요. 어딜 사람인척을 해요? 개집에 들어가라, 네 집 지켜라, 하는 것처럼 계명 지키라는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으며 어느 영역에 포함되어 있느냐를 살피라는 겁니다.



이 할례언약이 십자가로 완성이 되고부터 이제는 계명을 지키는 요건에 있어서 우리는 빠지게 되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하겠습니다. 친절해서 문제라. 구약에서 계명이라 하는 것은 앞선 요건이 있어야 되는데 앞선 요건이 할례언약이었습니다. 출애굽 할 때 할례 받지 않으면 어린양 잡아도 소용없었어요. 모든 식구들이 할례를 받고 난 뒤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그 할례 언약을 받은 자들이 홍해를 건너고 계명의 돌 판을 받고 제사법도 받게 됩니다. 그것은 할례 받은 자에 한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받은 할례의 의미를 확대하고 확산시키기 위해서 보조적으로 계명들이 줄기차게 주어지고 또 주어지고, 또 제공되고 또 제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할례 받았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라. 무할례자냐?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할례언약이 완성된 그 공간 안에, 그 영적공간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그 계명을 준수해야 되는데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짜인 현실세계를 유일한 현실세계로 받아들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 말이 이해 안 될 줄로 알고 다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들로 올 때에, 이것은 누구나 그런데, ‘나는 여기 있는데 모세라는 양반이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양손에 돌판 들고 내려왔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이 현실, 이 흙, 이 돌, 시내산, 짹짹거리는 새, 나무, 이런 현실에 무엇이 하나 추가되었는가 하면, 십계명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누구나. 집에 가면 성경책 한두 권은 다 있지요.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은 열 댓 권 될 수 있고 다 있잖아요. 목사 가정은 더 많고.



책꽂이에 성경책이 많은 책들 중에 일부로서 차지하고 있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맞아요. 차 뒤에도 성경책이 있고 다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계명을 받을 때 내가 보는 현실 속에 추가적으로 십계명이 들어왔다고 생각했지요. 그게 오해였습니다. 십계명이 있는 그 안에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 더 나아가서 유일한 현실, 하나밖에 없는 현실, 그게 계명의 현실이에요. ‘나는 여기에 있고 내 눈앞에 모세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내가 생각한 현실 속에 계명이 들어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이라니까요?



‘우리 집에 성경책이 두 권이 있다.’ 이러면 안 돼요. 여러분의 집은 오직 성경, 말씀의 세계입니다. 여러분 책꽂이에 성경말씀이 꽂혀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살아가는 것이 성경말씀의 그 현실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농사짓는 것도 말씀 안에서 하고, TV보는 것도 말씀 안에서 하고, 드라마 보는 것도 말씀 안에서 보는 거예요. 이제 드라마 두개 끝났어요. <압구정 백야> 끝났고 <폭풍의 여자> 끝났습니다. 전부 다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나는 여기 있는데 거기에 성경, 교회 다니기, 이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던 현실은 이것이 엉터리고 환상이었구나.’ 하고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바꿔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계명은 그 안에 소위 밧줄이 있어요. 주님께서 그 밧줄타고 하늘나라 올라가셨거든요. 그렇다면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밧줄타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설치되어 있는 건축구조물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나를 위한 세상으로 봤는데 이제 보니까 주님을 위한 세상이에요. 그 현실이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계명을 지키라고 하니까 ‘그래. 우리가 계명을 지켜야지.’ 이렇게 하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지킬 계명이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이 계명은 예수님이 먼저 계명을 지켜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주신 계명대로 지키면서 나름대로 보여줬던,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우리에게 보여준 참 현실의 절차들이 있어요. 그 제일 첫 번째 절차가 뭐냐? 광야였습니다. 이 세상은 광야였습니다. 우리는 오해하기를 우리가 사는 녹색지대가 있고 황량한 광야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유일한 현실입장에서 보니까 우리가 사는 이곳이 광야였습니다.



광야라면 풀도 없고, 녹색식물도 없고, 불 뱀만 있고 ‘참 살기 힘든 곳이네.’ 라고 생각하는데 주님이 알려준 광야는 불 뱀만 있고 모래만 있는 그 동네가 아니고 사탄이 등장하는 상황, 영역을 광야라고 하는 겁니다. 사탄, 악마가 설치고 지배하고 통치하고 인간을 관리하고 관장하는 숨겨진 현실, 그게 바로 광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예수님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현실을 만나기 전에 인간현실을 통째로 광야로 확장시키는 작업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광야에서 인간은 배제가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현실 속에 살면서 현실에서 배제된 채 나름대로의 환상을 갖고 있으면서 살아가는 존재, 이게 인간입니다.



광야에 갔더니 준비된 마귀가 주님을 마중 나옵니다. 그 광야에서 인간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이해할 수가 없는 대화들이 오고 가요. 제 삼자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미쳤나?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무도 없는데 너무 굶다보니 정신이 나가서 헛소리하고 있구나.’ 제 3자가 볼 때 주님은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우리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이 세상을 쥐고 있는 권력자와 주님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그 권력자와의 대화 가운데 첫 번째 대화가 뭐냐? “예수여! 밥이나 먹어야지. 40일이나 굶어서 무슨 주의 일을 하겠는가? 먹고 해라. 너는 재주 있잖아. 돌들을 다 빵으로 만들 수 있잖아. 먹어야 일을 하지. 주의 일이 문제가 아니야. 먹고 사는 게 우선이야.”라고 마귀가 예수님 보고 이야기하네요.



우리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로 여겨지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현실을 따로 챙겨놓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은 현실이 아니고 환상을 챙긴 거예요. 진짜 광야에서는 악마가 매일같이 우리에게 설득을 해 온 겁니다. “예수고, 부처고, 종교고, 기독교고 밥 먹고 사는 게 최고다.” 부산 자갈치 시장에 가보게 되면 억척같은 아줌마들이 어물전에서 생선 하나 더 팔려고 애를 씁니다. 그 아줌마들 지옥 간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찬바람 부는데 시멘트 바닥에 앉아서 생선 한 마리 더 팔려고 애쓰는 게 자기 위해서 그런 겁니까? 다 그거 팔아서 자식 공부시키려고 그렇게 하잖아요. 철없는 남편 막걸리 값 좀 보태보겠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잖아요.



그런데 그 아줌마들이 지옥 간다? 그들을 지옥 보내는 논리는 어디서 가져옵니까? 아무도 가져올 수 없어요. 차라리 존경스러운 한국의 아줌마에요. 한국의 훌륭한 아줌마들이에요. 오직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한 몸 희생하는, 진짜 십자가 사랑 같아요. 그런데 지옥가요. 뭘 근거로 해서? 할례의 완성을 몰랐기 때문에.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계명 지킨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해서 아줌마는 자기를 위한 현실 외에 예수님이 계명 완성한 숨겨진 현실 속에서 그동안 자기가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온 것이 마귀가 시킨 짓이라는 그 사실, 마귀를 모르기 때문에, 마귀의 존재를 인정치 않기 때문에 그 아줌마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철학에서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만이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만이 확실하지 그 외 모든 것은 불확실해. 예수, 십자가, 성경의 이야기는 다 신화고 농담이고 장난이야. 그건 옛날이야기야. 지금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 그것 외에는 없어.” 이게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한 거예요.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나, 이것만은 확실하게 의심할 수 없는, 의심을 뛰어넘는 확실한 사실이다.”



그런데 묻습니다. 그거 가지고 뭐하려고? 그 확실한 것 가지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아무 쓸모 짝이 없는데. 70, 80평생 살아봤자 자기 밥 먹고 사는 것 외에는 뭐, 뭐? 뭐 없어. 대책 없어요. 해답도 없어요. 그래 확실한 것은 나다. 그 확실한 나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건데? 써먹을 데가 어디 있는데요? 지금 여러분 자신의 몸뚱이 가지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합니까? 평생 해봐야 일해서 자식 먹여 살렸잖아요. 그게 다입니까? 어디로 가시는데요? 그것은 모르지. 그래서 사는 이유도 없어요. 목적도 없어요. 원인도 몰라요. 그저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중세철학에서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다고, 어떤 의미와 목적을 계속해서 이야기해 왔던 겁니다. 그런데 20세기에 사르트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이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인생은 내가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나 신을 찾는 것은 다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게 왜 좋은지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겠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결정하는 나라는 인간이 누구한테 잔소리 듣는 것보다 우선한다는 겁니다.



제가 데카르트나 사르트르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사르트르 이야기를 몰라도 이미 쓰나미처럼 밀려 와 버렸어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게 서로 뺏고 빼앗기는 현실이 되다 보니까 누가 이야기했는지 누가 정리를 했는지는 알 필요 없고 다만 내 인생 내가 만드는 그 재미, 끝! 그것뿐이에요. 확실한 것은 내가 있다는 그것뿐이에요. 누가 이야기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내가 아는 유일한 현실은 그것뿐이에요.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자고, 끝!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키려는 그 말씀대로,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제일 먼저 했던 그 순서가 뭐냐? 광야를 맞이하는 것, 광야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명 지키기는 날 위한 나의 현실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지만 그것은 잘못된 계명 지키기에요. ‘교회 나와서 목사 말 들으면 복 받겠지.’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진짜 성령이 임한 계명은 그 계명을 통해서 예수님이 밧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그 절차를 살펴보는 겁니다.



그 절차 중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광야였습니다.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이 뭐냐? “네가 우선이다. 네가 우선 배불러야 해. 네가 먹고 살아야 해. 그것이 우선이야. 하나님 보다 네가 우선이야.”라는 것을 마귀로부터 요구받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유혹이라고 해요. 우리의 현실에서는 전혀 유혹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혹이 되려면 내가 아는 현실 말고 다른 진짜 현실이 따로 있어서 나는 지금 잘못된 현실이라는 것을 알 때 그것은 유혹이 되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현실, 나밖에 모르는 현실, 이게 유일한 현실인데 무슨 유혹이 됩니까, 당연한 거지. 당연한 거잖아요. 학교에서 배울 때 그것이 당연하잖아요. 학교에서 배운 것, 공부해서 시험 치는 것이 다 누굴 위해서? 날 위해서, 끝! 그 외에 뭐 없어요. 끝났다니까요.



교회 와서 계명 지킨다고요? 목사 말 순종한다고요? 누구 좋으라고? 다 나 좋으라고. 그게 무슨 신앙입니까? 마귀 장난이지요. 첫 번째를 통해서 자갈치시장 아줌마들 지옥 보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 문제입니다. 하나님나라 확장해야 되고 더욱 정진하기 위해서 목사는 희생적으로 어린양 구원하는 일에 열심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뭐냐? 순수한 말씀가지고 말씀을 해석하고 바른 말씀전해서 양떼들을 천국으로 보내줘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광야에서 예수님한테 달려들었던 마귀의 두 번째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고 하니까 “그래? 말씀 가지고 사람 건져내는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너의 사명 맞잖아.”라고 나선 거예요. “따라서 네가 말씀대로 기적을 베풀어봐라. 많은 사람이 네가 구세주인 것을 인정해 줄 것이고 그러면 이 땅에 온 너의 사명은 달성될 것이다.”라고 악마가 예수님을 미혹했습니다. 희생적으로 “초막이나 궁궐이나 말씀 들고 가오리다.” 하는 그 순교의 각오, 큰 교회 탐내지 않고 그저 어려운 사람 돌봐주고 사창가,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복지에서 소외된 사람을 발품 팔며 찾아가서 주의 사랑을 전하는 이것, 그게 바로 마귀의 작업입니다.



그것도 지옥 보내버립시다. 주의 일? 왜 그것이 악마의 일인가? 그것이 우리에게 납득이 되거든요. 우리의 양심에 호소가 되고. 우리가 고대했고 기대했던 그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화되었잖아요. 현실화. “♬We Are the World We Are the Children We Are the one To Make A Brighter Day So Let's Start Giving”(우리가 바로 세계이며 우리는 다 같은 신의 아이들 입니다. 우리는 밝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야할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나눔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게 죽은 마이클 잭슨이 그렇게 외쳤던 거예요. 인간애로 뭉쳐진 공동체.



그래서 옛날 그리스 철학은 사랑보다 우정이 더 앞섰어요. 왜? 사랑은 사적이지만 우정은 통합적이고 공통적이니까. 우정을 더 쳐줬습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세상은 나 자신을 배제하지 않고 나 자신을 포함해서 이상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신의 세계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그 희망한 것이 실수에요. 희망을 품은 것이 실수에요. 희망과 환상. “나는 환상 속에 본다네. 모든 이가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 나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며. 마치 나는 훨훨 나는 구름처럼 저 깊은 곳으로부터 인간애로 충만한 영혼을.” “넬라 판타지아”의 가사의 일부입니다.



‘모든 이가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 넬라 판타지아, 맞습니다. 환상입니다. 마귀가 만든 환상, 마귀가 꿈꾸는 환상, 희망, 소망, 오늘도 이 환상, 넬라 판타지아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교회 공동체, 집단공동체를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자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두 번째 트랩, 덫이었지요. 예수님께 두 번째 덫이었습니다.



이게 천국이 아니라면 천국은 뭐냐? “이제 제발 네가 너를 좀 놔 줘라.” 하는 겁니다. 네가 없는 곳으로 네가 좀 나가라는 거예요. “네가 설치지 않는 곳으로……, 네가 꿈꾼 공동체, 그리고 그것이 평화로운 세상이라면 그것은 네 꿈이고, 네 세계고, 네 현실이니까 그것을 손 놔버리고 거기서 나오너라.” 그 말이지요. 손 놓을 때 그냥 놓지 말고 “이게 바로 사탄이 그동안 나를 속여 왔던 죄였습니다.” 하는 것을 십자가에 죽이고 나오라는 말이지요.



지팡이나 광야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 광야의 시험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광야라는 뜻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게 광야냐, 안 그러면 실제 현실이 포함되어 있느냐?’의 전쟁터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에요. 지금 주님께서 성령 받고 난 뒤에 계명을 지키면서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은 뭐냐?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넬라 판타지아’가 아니고 마귀와 싸우는 전쟁터라는 거예요. 전쟁을 치러야 아군과 적군이 분간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 계명으로 만든 계명의 망, 그물 같은 촘촘한 그물망, 이 바깥의 현실은 없다는 거예요. 오직 계명의 현실만 현실이고 그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광야의 그 계명에서 현실을 모르는 사람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떼 내는 작업, 철저하게 떼 내는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계명 지키기로 보시는 겁니다. 주님의 계명 지키기라는 것은 “누구든지 주를 믿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 이걸 철저하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천국 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넣어주지 않는 사람은 제발 달라붙지 말라는 거예요. 들러붙으면 발길로 차서 막 떼 냅니다. 정원 찼다는 거예요. 오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지요? 아무나 오소, 그게 아니고 “어딜 넘봐?” 하고 발길질 하고 “너는 천국 못가. 너는 천국 가면 안 돼. 너는 지옥 가야해.” 자꾸 떼 내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희망과 구원이라는 포부를 갖고 있는 사람한테는 주님의 발길질이 정면으로 충돌되어서 박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납득되지 않는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네가 납득이 되어버리면 네가 구원받잖아. 그런 실수를 나는 못하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말씀이 이해된다는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거든요. 내가 아직도 뭔가 작품이 괜찮다는 이야기에요.



깜박인다고 다 생명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것도 생명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런데 살아 있는 인간들은 살아 있는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이걸 인간이라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게 이해가 돼요? 내가 살아 있는데. 나는 이게 살아 있다고 생명인줄 알았는데. 제가 얼마 전에 스마트폰으로 바꿨습니다. 전에 쓰던 폴더 폰과 다른 점이 녹색불이 깜박이고 있어요. ‘아, 깜박인다고 해서 다 인간이 아니구나.’ 그걸 알았어요. 깜박거려요. 꼭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인간을 닮았어요. 그러나 숨 끊어지면 꼬르륵, 하고 가겠지요. 인간이 기계에요. 인간이 기계.



이 현실이 마귀와 더불어 산다는 현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라는 현실을 까마득히 몰랐지요. 알 수가 있어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자기 희망과 ‘넬라 판타지아’밖에 모르는데. 자기 구원받는 천국밖에 모르는데 알 수가 있겠어요? 하나님은 나를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나를 안 넣어주지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천국 가는가? 천국 가서 내가 새롭게 조립되지요. 천국 갈 때 이 몸 가지고 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는 나를 없애버리고 난 뒤에 예수님이 다시 만드는 사람, 다시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이미 손질한 사람을 다시 만들어서 새로운 피조물로 천국에 가는 겁니다. 복잡해요, 복잡해요. 이게 왜 그런가 하면요, 이 세상을 나의 현실로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현실이 네가 주인공 되는 현실을 삭제하는데 “그러면 내 현실이 아니라면 누구 현실입니까?” 예수님의 현실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서 “그러면 나는 뭡니까?” “주께서 너를 새롭게 만들어주게 되면 너는 내가 만든 이 예수의 세계에 살 수 있다.” 라는 세 번째 절차에서 함께 살 수 있어요. 절차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면서 “내가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었다.” 그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는 살아 있으면 나만 홀랑 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생각했던 현실과 나의 세계도 같이 껴않고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이렇게 착했어요. 이렇게 거룩했어요. 이렇게 교회 봉사 많이 했어요.” 이런 것도 같이 집어넣으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주께서는 할례계명을 대표계명으로 삼은 겁니다.



할례계명이 십자가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렸어요. 진정한 할례라는 것은 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 그게 할례라고 했습니다. 몸의 일부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의 표피를 벗기는 것이 할례라. 그러면 사람이 죽잖아요. 죽으라는 그것이 할례에요. 할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그 죽음에 네가 참여하는 방법이 할례라는 겁니다. 그렇게 할례언약을 실시를 해놓고 그 다음에 주께서 만드시는 그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알려줬습니다.



제가 할례가 십자가라는 것은 골로새서 2장의 신약에서의 이야기고 “목사님, 구약 때도 그런 흔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구약 때도 이미 있었다는 그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신약에서 ‘할례가 십자가’라는 그 이야기가 이미 구약 때도 있었어요.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거기서 이삭을 바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기를 너의 자손이 많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니까 “걔는 아니고”라고 해서 빼버렸어요.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이스마엘도 분명히 사람이고 자기 몸에서 낳았는데 그 애는 아니라고 한다면 ‘하늘의 별만큼 많은 자식은 어느 자식입니까?’라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지요. 없잖아요. 약속은 받아놨는데 복은 와야 되는데 그 애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없잖아요. 없는데서 새롭게 생겨나야 그것이 아브라함의 복에 해당되는 약속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없는데서 생겨날 때에, ‘자 없다. 내가 약속을 받았으니까 내가 이 없는데서 어떻게 조작을 하고 어떤 작업을 가하게 되면 없는데서 새로 생기겠는가?’ 한다면 아브라함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있어야 하지요.



세상일도 그래요. 시간 때우면 일이 마감되는 일이 있어요. 예를 들어 마트의 계산대나 근로자들이 하는 일은 시간 끝나면 땡, 일이 끝나고 한 달 되면 월급 받습니다. 반면에 소위 발명하는 사람들, 예술가들, 이런 사람들은 시간 간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열 시간 지났으니 뭐가 더 생긴다든지 그런 것이 없어요. 뭔가 번쩍, 하는 아이디어가 없으면 새로운 발명이 생기지를 않아요. 어느 것에 보수를 많이 줘야 됩니까? 단순노동이에요, 없는데서 새로 창조하는 것이 돈을 많이 받겠습니까?



한쪽은 힘들지만 창조적이지는 않아요. 그러나 다른 한쪽은 없는데서 생겨나는 거예요. 정말 이것은 창조지요.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는데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애쓴다고 해서 약속을 근사하게 만들 어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는가? 천국은 우리한테 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 현실은 우리한테 가로막혀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항상 내가 중심에 서 있어요. 내가 중심이고 내가 최정상에 서 있어요.



이런 세계 가지고는 천국에 못가지요. 갈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가는 길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주는데 이삭을 주니까 아브라함은 오해했습니다. ‘아, 나의 현실에 이삭이 등장했구나. 그러면 나 여기 있고 이삭이 저기 있으니까 이삭을 통해서 자식을 많이 낳게 되면 나의 꿈은 이루어진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은 뭐냐? 그 현실의 지평, 현실의 밭, 그 평지, 그런 공간을 완전히 꾸겨버리지요. “죽여라.”



제가 지금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는 것은 흔히 신약에서 말하는 십자가, 할례의 의미를 알려 드리기 위해서 구약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할례? 그거 포경수술이잖아. 그거 안 받아도 된단다. 음, 안 받지 뭐. 십자가? 예수님이 희생하거잖아. 난 합격했잖아. 아무 문제없네. 돈 벌러 가자.” 현실 속에서 똑같아요, 똑같아. 전혀 지금 몰라요. 그런데 구약을 보게 되면 현재 네가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을 구겨버린다니까. 그런 현실이 모아진 게 둥근 하나의 모형이라면 그걸 주님 손으로 꾸겨버려요.



꾸겨버리면 그 시공간이 같이 압축이 되면서 찢어져 버리지요. 아버지 아브라함을 위한 이삭? 그런데 그 이삭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렸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현실붕괴입니다. 나의 세계, 나의 현실붕괴입니다. 죽였지요. 죽였는데 하나님이 수풀 속에 수양을 준비해놓고 “멈춰라!” 하고 이삭 대신 수양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이제는 이삭의 세계가 아닙니다. 수양의 세계입니다. 수양의 세계 속에서만, 예수님의 세계에서만 예수님의 자식들이 하늘의 별같이 많아질 것입니다.



나의 자식, 우리 가정 아닙니다. 구미의 어떤 목사, 전도한답시고 애를 열두 명 낳은 사람이 있어요. 시 당국에까지 부담을 줬어요. 자기 힘으로는 못 키우니까. 아이 낳는 이것이 자신의 종교에요. 그렇게 전도하는 게 아닙니다. 전도하지 마세요. 왜? 그것은 내가 전도한 게 되기 때문에 전도하지 마세요. 신앙생활 하지 마시고, 전도하지 마시고, 헌금하지 마시고, 계명 지키지 마시고, 교회 나오지도 마시고, 떠나가지도 마시고.



주께서 꾸겨버리는 그 절차에 우리를 맡겨주시고 우리는 꾸겨진 절차에서 빠져나오시기 바랍니다. 내가 빠져나오면서 나의 벗어놓은 파자마를 주께서 찢고 주무르고 하더라도 우리가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네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것은 드라마 <다모>에 나오는 대사에요. 우리 인생을 주께서 뭉개더라도 이미 빠져나와서 지켜보는 입장에서 내 엉터리 현실을 주께서 엉터리현실이라고 짓밟는데 우리가 감사해야 되지 왜 짜증을 냅니까? 내가 주인공 되는 것을 짓밟아야 대신 만들어주신 그 대체하신 현실이 진짜 현실로 우리에게 등장하는데, 그게 절차거든요, 절차.



계명 준수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확인하시면 돼요. 어떻게 확인하는가? 광야를 마중할 때 그 광야 속에서 나의 현실은 마귀를 빼버린 현실, 마귀가 존재한다는 것을 빼버리고 나 잘되는 현실을 현실로 했던 그것이 마귀가 나에게 조작하고 강요해서 덮친 잘못된 현실, 환상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가신 그 길 따라 가게 되면 십자가를 통해서 그 다음에 부활 승천했다면 우리의 모든 현실은, 우리의 모든 현실은 예수님의 자신의 주되심을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조약돌에 해당됩니다.



광야에 깔려 있는 조약돌, 하나 들춰보니 거기에 내 이름 하나 있네요. 주께서 밟았던 그 광야를 확장시킵니다. 그 때의 광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그 광야를 확장시키다 보니까 바로 그 확장시킨 그곳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이 땅에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할례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할례 안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는 이미 계명의 그물망이라는 유일한 현실 속에서 내가 먹고 마시는 이 모든 것도 주님의 희생 덕분으로 먹고 마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께서 그냥 주신 인생, 주신 인생이거든요. 따라서 주신 인생 속에서 주의 말씀의 의미만 드러나면 되는 겁니다.



설교를 해도 잘 못 알아듣는 분을 위해서 마지막 예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어떻게 살면 됩니까?”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배 용준이가 가을에 결혼한답니다. 배 용준이 가을에 결혼한다. 이것은 환상 속에 있는 일반인들이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여러분이 신자입니까? 성령 받았어요? 십자가 압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세요. 배 용준이가 결혼하고 난 뒤에 어떤 말씀의 기능을 보여줄까? 그 뒤에 그거 하나 갖다 붙이시면 되는 겁니다.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고 난 뒤에 예수님 살아 있음을 어떤 식으로 보여줄까? 배씨가, 배씨가 어떻게 보여줄까?



그거 보여주면 그 사람은 주께서 시키신 결혼이고 그거 못 보여주면 자기만의 현실이고,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러한 확인은 여러분한테 일임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틈새 속에서 말씀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말씀이 완성된 그 안에서 천국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날마다 깨닫는 경험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