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강-고전 7장 36-40절(그냥 지내기)1506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36-40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36-40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오늘 본 이 내용은 성령, 하나님의 영이 성령이거든요,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그동안 신경을 좀 쓰였더라도 후딱 다시 중요한 성령의 일로 되돌아오라는 이야기입니다. ‘딸 시집보내느냐 마느냐?’ 하는 그것이 심각한 일로 생각되거든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잠시 떠난 줄로 알라는 그 말입니다. ‘비가 오냐, 안 오냐?’ 그런 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거든 지금 신경을 엉뚱한데 쓰고 있는 줄로 알라는 말이지요. 다시 본래의 자리, 성령의 자리로 오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자유를 받아놓고도 자유를 받은 값을 못했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쓸데없이 시간 보냈네.’ 하고 후딱 우리 본래의 자리, 성령의 자리로 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뭘 말하느냐 하면, 성도는 딱 하나만 구분하면 된다는 거예요. ‘영이냐 육이냐?’ 그것만 구분하게 되면 주님보시기에, 주님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그 말씀이 나오거든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 대목을 보고 “어떻게 하면 성령을 위해서 심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지를 마시고요,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일입니까, 하고 신경 쓸 정도로 다른 일은 별로 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해 왔는가를 묻는 거예요. “성령 빼놓고 다른 일은 별로입니다.”라고 생각을 해왔느냐는 그 말이에요. 지난 목요일에 가락모임이 있었는데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번 달 매출이 반 토막이 났다는 거예요. 식품회사니까 놀러들 가야 밥을 먹고 그래야 매출이 오를 텐데 놀러들을 가야 말이지요. 그래서 매출이 반 토막 났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분은 반 토막이 나든 반의 반 토막이 나든 그분이 저에게 하는 질문은 꼭 복음에 관한 것만 해요. 말씀에 관한 것만 질문합니다. 그분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회사를 꾸리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전부 다 자기의 애씀과 노력, ‘이렇게 하면 이렇게 돼야 되고 저렇게 하면 저런 결과가 나와야 돼.’라는 원인과 결과, 필연적인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왔지만 사실은 예수 믿는 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필연적인 생활을 아무리 해봤자 우연의 세계에 못 들어가거든요. 내 사업이 나의 직업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연히 찾아온, 우연히 다가온, 꼭 노래 제목 같아 보이지요, 우연히 다가온 그 분, 복음, 십자가, 다른 것은 날라 가도 이것을 빼놓고는 도저히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가 없다는 거지요. 얼마나 감사한지.
흔히 사람들이 말합니다. 세상에서 그런 이야기들 많이 하지요. 인문학강좌에 많이들 나오는데 “여러분의 인생길을 굽이굽이 넘을 때마다 희망을 가지고 한고비 넘고 또 한 고비 넘으시면 당신은 결국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들 이야기하는데 저는 이야기하고 싶어요. 굽이굽이 인생길 넘지 말고 드론 띄우라고. 드론, 공중에서 다 비추는 헬리캠 띄우면 되잖아요. 한꺼번에 다 알면 되잖아요. 굽이굽이 넘기는 뭘 넘어요. 무슨 소설을 쓰고 있어요. 소설 백날 써봐야 표절인데. 그냥 드론 띄우면 다 보이잖아요, 다. 등산 할 때 제일 약 오르는 것은 드론 띄워서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표점 다 보여주는 그것.
확 트인 공간, 자유가 충만한 세계, 영의 세계입니다. 그 영의 세계는 우리가 이 땅을 떠나서 만나는 세계가 아니고, 성령께서는 이 땅을 떠나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땅에 살면서 확 트인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를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이 확 트인 공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벌써 와 있다는 확 트인 공간, 성령의 공간, 그곳에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인데 구약 시편에 보면 바벨론 강가에서 나온 말이에요. 보니엠이 불렀던 유명한 노래입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시편 137편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찌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 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바벨론 강가에서 다시 고향을 돌아보니까 비로소 옛날에 살던 그곳이 하나님이 함께 있던 곳이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바벨론 강 너머 포로 잡힌 상태에서 다시 보게 한 거예요. 바벨론 강가는 이방민족의 땅입니다. 여호와께 예배를 못 드리는 곳이에요. 그곳에 와서 옛날에 마음껏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던 그 곳이 얼마나 좋았던가, 하는 것을 실패하고 난 뒤에 아는 겁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바벨론이 따로 있어요. 바벨론 강가 너머에 실패의 땅이 따로 있는데 신약에 오면 중첩이 돼서 같이 겹치고 하나가 돼버려요. “늘 실패하세요. 그러면 늘 광활한 자유의 땅이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이게 겹쳐 있어요. 구약에는 떨어져 있지만.
실패와 성공을 겹치게 하시는 그 표현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몸이라고 하는데 “실패의 몸을 네가 알아라. 그렇다면 그 실패의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신 광활한 성령의 세계, 자유의 세계를 네가 맛보게 될 것이다.”라는 겁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4장을 보겠습니다. “갑자기 왜 출애굽기 4장을 보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에 의도해서 주어졌거든요.
달리 말해서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말씀의 수용액, 말씀 액 속에 몸이 담겨 있는 겁니다. 생물표본실에 보면 알코올 액에 뭐가 담겨 있지요. 지난번에도 예를 들었지만 뱀 술병 안에 뱀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어떤 병 안에 담겨 있어요. 어느 병이냐 하면, 말씀의 병 속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 말씀의 병을 뭐라고 하느냐,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 출애굽기 4장을 보기 전에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 있어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 온 천지가 물바다입니다. 물 밖에 없어요. 방주 바깥에서 못삽니다. 방주 바깥에 나가면 죽어요.
그런데 이 방주 안에서 평생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새 한 마리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합니다. 그 새가 비둘기에요. 딱 생각이 나시지요. 요단강에서 주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오잖아요. 헌 하늘과 헌 땅,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전부냐,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 난데없이 새가 이 세상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때나 있을 나무 잎사귀를 물고 다시 이쪽으로 왔듯이 성령께서는 우리가 죽어서 갈 수밖에 없는 그 세계의 이파리, 그 열매를 성령 안에서 미리 당겨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통보를 해주지요.
“있더라. 빈말 아니더라. 말씀의 성취가, 약속의 성취가 헛소리 아니더라.” 우리가 도저히 갈 수 없었던 나라인데 갈 수 없었던 그 나라에 입장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들어오면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상을 연결시키는 매개가 되는 겁니다. 그 성령이 물고 오는 게 뭐냐, 이 땅에서는 얻을 수 없고 생산 될 수 없고 공장에서 나오지 않는 것, 반도체나 TV나 냉장고나 그런 것이 없이 이 땅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다른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 부활의 몸이에요.
많은 철학자나 과학자들, 특히 철학자들은 이 영혼문제에 대해서 몰두했습니다. ‘영혼이 어떻게 불멸의 존재, 불사의 존재로 계속 이어져 나가겠는가?’ 그렇게 연구를 하는 겁니다. 이 영혼문제. 영혼을 불멸, 불사의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 육은 죽으면 없어지지만 영혼은 살아남으니까 영혼이 중요하다. 문제는 이 영혼의 성질이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해야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동네인지를 몰라요. 아무리 자기의 질을 높여놓아도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만한 성질의 영혼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정을 내립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몸이라 하는 것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실패하고 문제성이 있는 겁니다. 이제 출애굽기 4장을 통해서 그걸 보려고 해요.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하나님 일을 벌이기 전에……, 이미 모세가 벌벌 떨고 있거든요. 모세는 혼자고 저쪽은 애굽나라 전체지요. 애굽나라 전체와 혼자가 상대해 봐야 ……, 제가 무지하게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겁니다. 참 많이 들었습니다. “네 말이 옳은데 그래가지고 한국교회가 바뀌겠느냐?” 누가 바꾸라고 했습니까? 안 바뀌면 말고. 누가 바꾸라고 했습니까? 괜히 그쪽에서 오해를 해가지고.
네가 그런 소리 해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하는데 계란으로 바위치기 해봐야 누가 실패하느냐 하면, 계란이 실패해요.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실패를 하라는 겁니다. 실패 안할 때의 문제가 자기 백성 건지는데 실패했다는 겁니다. 모세 본인이 실패를 안 하니까 구원문제가 실패한 거예요. 자기가 안중근 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나서서 반란반동을 일으켜서 애굽에서 자기백성을 건져보겠다고 시도를 하는데 그게 실패에요, 그게. 그랬다가 현상수배 돼서 도망쳐서 ‘나는 이제 양이나 키우면서 여생을 보내련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살도록 허락하소서.’ 했는데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말이지요.
찾아와서 지팡이만 달랑 들고 가는데 지가 찰리채플린도 아니고 지팡이만 달랑 들고 돌리면 뭐하는데요? 콧수염도 하나 붙일까요? 또라이가 된 거예요. 완전히 또라이에요.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콧수염은 없다만. 이거 뭐예요? 뭐하다 온 거예요? 양 치다 온 거예요. 와서 바로한테 와가지고 “내 백성 내 놓아라. 안 그러면 망한다.” “너 어디서 온 뼈다귀야?” 하니까 “여호와에게서 온 뼈다귀야.” “난 여호와를 모르는데?” 대화단절, 끝났어요. “난 여호와를 모른다. 난 여호와를 무시한다.”
그 전에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기적을 베풀어줬는데 그 기적은 뭐냐? 모세가 애굽에 때 그냥 간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름으로 애굽과 만난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영혼을 잘 잘되게 하기 위해서, 멋있게 살기 위해서, 기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인간은 떠나게 되어 있어요. 떠나봤자 애굽이라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네가 백날 떠나봤자,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 백날 해 봐야 애굽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여기 있거든요. 40절에 보면, 오늘 설교 제목도 여기서 왔는데요.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그냥 지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마음껏 떠나라는 말이지요. 첫 번째……, 오늘도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나옵니다. 이런 게 나올 때마다 제가 신경이 쓰이는데 첫 번째, 떠나라. 두 번째, 떠나 봤자다. 세 번째, 그냥 지내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특히 젊은 사람들, 이거 할까, 저거 할까, 취직할 까, 무슨 사업을 벌일까, 뭘 할까, 못 떠나서 환장 했어요.
언약의 용액, 언약 액이 들은 병 안에, 말씀의 액이 들은 병 안에 우리가 놓여 있어요. 떠나봤자 애굽이에요. 떠나는 우리도 중요하지만 떠나봤자 도달되는 마지막 병벽, 바깥 세계는 모르는데 비둘기나 알지 우리가 알겠습니까? 그곳이 애굽이라고 표현돼요. 따라서 애굽과 상대한다는 것은 우리를 가둬놓은 한계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누가 도대체 나를 가둬놓았어? 나를 가둬놓은 존재가 누구야?” 그게 애굽이에요. 그러니까 그 애굽이 인간들의 집합체, 국가라는 이름의, 국가라는 인간의 공동체인데 그걸 하나님의 기적, 언약에서는 뭘로 보느냐 하면, 뱀으로 봐요.
첫 번째 기적, “지팡이를 던져라. 그게 뭐가 되는가? 그것이 뱀이 된다.” 지팡이를 모세가 던졌어요. 자기도 놀랐어요. 모세는 그냥 양이나 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민족의 독립도 필요 없고 이제는 그냥 평범한 80먹은 노인네라니까요. 평범한 그저 노인네. 말씀의 병 속에 없을 때, 자기가 자기를 볼 때 그냥 평범한 노인네에요. ‘그럭저럭 살다보면 하나님 믿으니까 죽으면 천당 가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지금 모세를 통해서 만들어간다니까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천국을 우리를 통해서 만들어내고 있어요.
남자야 목욕탕 갈 때 그냥 덜렁덜렁 가지만 여자들은 목욕탕 갈 때 목욕용품 한 가방 가득 챙기듯이 주께서 마련해놓은 천국과 합치되는 요소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에게 안겨줘야 돼요. 애굽이라는 두꺼운 벽을 깨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갑니다. 그냥 자기가 이불 뒤집어쓰고 상상한 세계는 천국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망상이고 환각의 세계지요. 그런 것은 마약을 먹으면 잘 나온대요. 마약 먹으면 아름다운 세계가 눈에 보인답니다. 마약기운 떨어지면 그것도 끝나버리고요. 또 술 먹고 나면 그런 세계가 보인답니다. 알코올의 효력이 떨어지면 그것도 그만이고. 담배피우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말씀이 가득 담긴 그 안의 존재라는 생각을 못하고 달랑 나 혼자 홀로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니까 자꾸 상상만 해대는 거예요. 자기 상상 안 되니까 옆 사람 상상까지 해서 그걸 인문학 강좌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 공부해서 네 상상 내 상상 둘 다 틀린 답 가지고 둘 다 맞다고 우기고요. 또 절에 가서 빌고 갓 바위에 올라가서 빌고. 불교가 어떠니, 교회사가 어떠니, 교리가 어떠니, 삼위일체가 어떠니, 전부 다 그것은 상상한 건데요.
상상할 필요조차 없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일이십니다. “상상할 것 없어. 인생에 실패하면 되는데 네가 뭘 또 상상해?” 우리 정 춘기 성도님이 아주 도발적인 글을 남겼어요. “욕 나온다.” 제목이 그래서 안 보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어요. 성도의 입에서 뭐 때문에 욕이 나올까? 직장 생활이 힘들어서 욕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올렸지요. 놀면 욕이 적게 나오고 일하면 욕이 많이 나온다고요. 돈이 많으면 쓰는 재미로 사는데 욕 나올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없는 돈 벌려고 하니 욕 해가면서 하는데 남 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고 내 팔자야.’ 자기가 자기보고 욕하는 거예요. ‘나는 무슨 팔자가 되어서 놀지도 못하나. 이놈의 팔자야.’ 자기가 자기보고 욕하는 거예요. ‘나도 욕 좀 안하면서 넉넉하게 살고 싶다.’ 하는 자기에 대한 불만. 쉽게 말해서 초인이 되지 못한 분통. “왜 내가 세상을 내 맘대로 장악 못하느냐?” 하는 거지요. 이것에 대한 불만이에요. 내 뜻대로 되지 못한, 초인적 인간이 되지 못한, 영웅이 되지 못한 이 불만. 20대는 다 초인이에요. 30대 접어들어서 벌써 팍 꺾였어. 아부쟁이로 바뀌었어요. 60이나 70이 되어서도 자기 집에서 여전히 초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무슨 배짱인지 대단한 배짱이에요.
모세의 경우는 사적인 구원문제가 아니에요. 모세를 택한 것은 모세를 둘러싼, 모세에게 젖어들고 있는, 모세를 스펀지처럼 사용해서 거기에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집어넣으니까 모세 앞의 애굽나라는 그냥 애굽나라가 아니고 세상의 끝, 인간세계의 한계가 애굽이에요. 그 애굽나라가 언약 안에서는 뱀이 되는 겁니다. 나일 강에 그런 괴물들이 많이 살았던 모양이에요. 욥기에도 나오지요. 르워야단이라는 괴물, 뱀, 옛 뱀.
모세가 지팡이를 던질 때 뱀이 되었어요. 으악! 놀랐어요. “꼬리를 잡아라.” 꼬리를 잡으니까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뱀의 머리를 치는 분야는 네가 가입할 분야가 아니고 그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 할 때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서 뱀의 머리를 치는데 그 여자의 후손이 모세 너한테 일을 맡겼다는 거예요.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안하겠다고 얼마나 뺐습니까? “믿음 좋은 사람에게 맡기세요. 저는 안 하겠습니다. 저는 말 주변도 없어서 안 합니다.” 그렇게 뺐어요.
그 다음에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뱀이니까 뱀에게 쳐들어가자,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이 뱀 머리 작살내는 전문가, 여자의 후손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으로 오마 하던 그 분, 메시아가 이미 모세 안에 있으니까 자신은 가기만 하면 되는데 주께서는 그 지팡이 잡은 손을 가지고 “네 품속에 넣어라.” 품속에 넣었다가 빼니까 문둥병 손이 되었어요. 멀쩡한 품속, 사실은 저주받아 마땅한 문둥병입니다. 자기는 저주받아야 될 인간이었어요. 실패자였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나쁜 짓을 해서 문둥병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는 저주받은 몸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처음부터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인생을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결국 최종점, 최종점의 표지판을 들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내가 왜 마지막이어야 하는가, 내가 왜 마지막으로 파괴되어야 마땅한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매일매일 우리의 몸을 통해서 바깥으로 발산됩니다. 이게 뭐냐? 언약과 말씀의 수용액, 말씀의 그 액이 들어 있는 병 속에서 나오는 특이한 특이현상입니다.
사골 푹 고면 어떻습니까? 하얀 국물이 나오지요. 주께서는 우리를 언약에 집어넣고 푹 고면 죄가 나옵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이 뭘 드시는지 나와요. 하나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오뎅 볶은 것을 좋아하실까? 아니면 암웨이제품을 좋아하실까? 아니면 비타 500을 좋아하실까? 어떤 음식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뭘 매일 같이 드시고 계실까? 여러분은 그런 것은 궁금하지도 않지요? 말씀에 관심도 없고 자기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제자들이 빵 구하러 갔다가 오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는 오늘 밥 먹었다.” 제자들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주님에게 아무 음식도 안 드렸는데 무슨 양식을 먹어요?” “저 사마리아 여인이 나를 믿은 것이 바로 나의 양식이다.” 레위기에서는 하나님의 양식이 뭐냐 하면, 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를 잡수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잡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맛보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겁니다. 그것도 죄 없는 아들을 죄 있는 아들의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 있는 자들이 죄 없이 의인이 되는 그것이 하나님을 흐뭇하게 만드는, 배부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양식이 됩니다.
모세로 하여금 저주받는 자의 티가 나게 하시고 처음부터 실패자가 되게 하신 자로 하여금 그 실패자와 그리고 애굽이라는,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는 애굽이라는 거대한 솥단지, 거대한 단지를 만나게 하십니다. 죄와 죄의 만남에서 어느 것도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뻔하지요. 둘 다 파괴되어라. 둘 다 파괴되어서 펑크가 나버려라. 펑크가 나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나님의 바깥의 준비된 의가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그 쏟아진 의로 말미암아 자기의 택한 백성이 의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 놓고도 거짓말 같아요. 불교의 중이 이 소리 들었다면 “구라지요? 사람들 기쁘게 하려고 조작한 교리지요.”라고 극렬하게 반발할 거예요. 사실 그러한 반발은요, 중이 한다지만 매일 같이 우리 내부에서 내가 나한테 해대는 극렬한 저항입니다. 설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처녀 딸 결혼하느냐 마느냐, 할 때에 제가 이렇게 요약해 드렸습니다. “성도는 성령 받은 사람이기에 후딱 본래의 자리로 찾아들어라. 하지만 중간중간에 성령과 상관없는, 이러나저러나 별 상관없는 일에 정신 팔릴 때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후딱 다시 성령의 일로 돌아오너라. 왜? 성령의 일로 사는 자가 영생을 얻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제가 지금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배려를 해 드린 거예요.
문제는 육과 영을 최종 판단해야 되잖아요. 육과 영을 최종 판단해야 되는데 만약에 우리가 육이 없고 영으로 산다면 판단할 것도 없어요. 제 논리 맞지요? 영밖에 없는데 무슨 판단을 해요. 이미 와 버렸는데. 그러나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육신은 육의 일을 항상 표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성령이 아니고 우리한테 맡겨놓으면 우리에게는 육이 항상 강렬합니다. 그러면 육이 뭐냐는 거예요. “목사님, 육이 뭡니까?”라고 하면 육은 강력하게 말씀이 우리 속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이 육이에요. 말씀이 우리 속에 침투하는 것, 이게 육의 특징입니다. 그게 애굽이고 애굽의 세계입니다. 애굽의 나라고.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언약의 수용액, 그 병 안에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생물표본실의 표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 이야기,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말씀의 수용액 속에 녹아 있다는 이 말조차도 저와 여러분이나 방송 듣는 분한테는 별로겠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 듣기 거북스럽고 욱 하고 올라온다. 인간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뱀술인가 내가 어디 속에서 녹아 있다는 식, 나 말고 더 큰 범주 안에 내가 통째로 녹아 있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부담을 주느냐?”라고 극렬하게 반대합니다.
김 용옥 박사 같은 사람들, 아주 극렬하게 반대하지요. “사람이란 자기가 하기 나름이다. 자기가 노력하기에 따라서 인생이 바뀐다. 사람의 영혼이란 노력 여하에 따라서 성장한다.” “성장해서 뭐하게?” “성장해야 천국가지.” “네가 천국을 가 봤나? 성장하면 천국에 합당한 영혼이 되는지 미리 당겨서 판정해 봤나?” 옷 만드는 기업에서 하청을 주면서 디자이너가 원단을 내려 보내면서 디자인대로 이 색깔로 새 옷을 신상으로 내 놓는다고 했는데 나중에 다시 가져온 것을 보니 원단 자체가 안 맞아요.
봉제하기 전에 본사에서 내려 보내준 원단과 똑같은 색깔인지 확인 작업을 안 한 거예요. 본사에서 내려온 원단이 있어야 확인이 되잖아요. 그런데 이 하청업자가 대충 빨강색이겠지 하고 자기 맘대로 하고 보니 내려 보내준 그 원단의 빨강색이 아니라. 제품 다 폐기처분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원단을 줬어요. 원단을 줬거든요.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아닙니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문장이 너무 길어요. 딱 두자로 줄이면 돼요. 애굽. 언약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애굽입니다.
신약에 오면 그걸 세자로 늘여요. 바벨론. 이스라엘이 바벨론 강가에 가서 비로소 자기가 비로소 어디서 실패했는가를 알잖아요. 우리는 우리 살려고 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땅에 살았다는 사실은 말씀의 수용액 안에서만 비로소 발견될 사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이 애굽이 살다보니까 “한 달 수입이 얼마냐?” “칠백” “나는 이백인데?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백을 더 올려야 해.” 이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애굽을 닮아가려고 해요. 애굽이 나의 원단이에요. 나의 모델케이스에요. 그게 인간성공 같아요.
모든 드라마를 보게 되면 꼭 재벌 2세나 3세, 호텔 경영하는 대표가 복도 지나가다가 가난한집 아가씨하고 우연히 부딪힌다든가 잃어버린 운동화 찾고 그러다가 마지막 결론은 그 재벌 3세하고 잘 살았더라. 그게 원단입니까? 그것은 나의 욕망의 한계지요. 인간 개개인은 죄를 들고 다니는 피켓입니다. 인간은 백날 상대해봐야 피봇(pivot), 회전하는 중심점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팽이처럼 뱅뱅 돌고 있어요.
그렇다면 진짜 말씀이 함께 있다는 그 증거가 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에서만 유일하게 부활로 이어지는 중심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십자가에 달린 그 몸이 사흘 만에 부활의 몸으로 변했습니다. 십자가 몸에서 부활 몸 사이에 뭐가 있는가? 비둘기 있어요. 성령이 계십니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예수를 살리는 것같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중요한 것은 그냥 성령이 아니고 그 분의 영, 죽었다가 성공적으로 천국에 입성한 그 분의 능력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신다.” 방금 한 것 다 잘라내고 마지막 끝만 남겨보세요.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렇다면 그것도 길다. 잘라버려요. “너희는 제발 죽어라. 죽을 몸인 것을 언약에 비추어서, 말씀에 비추어서 받아들여라. 너희는 말씀의 수용액에 놓여 있는 언약의 존재니라.” 이게 바로 모세입니다.
말씀 앞에 놓여 있을 때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 이게 대한민국인지 필리핀인지 중국인지 일본인지 관계없어요. 애굽입니다. 애굽은 뱀입니다. 따라서 애굽은 뱀이기 때문에 그동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기근만 들었다 하면, 가뭄만 들었다 하면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애굽으로 피신 갔습니다. 가뭄이 들지 않았으면 야곱은 애굽으로 피신가지 않았을 것이고 피신 가지 않았으면 애굽에서의 출애굽도 성사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뭄 들게 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라는 그 가나안 땅, 버리기 아까운 약속의 땅, 죽으나 사나 그 땅에서 살아야 할 텐데 기어이 못 버티지요. 끝까지 버티려고 했던 분이 야곱이었어요. “아버지, 갑시다. 애굽에서 요셉이 성공해서 잘 있답니다. 갑시다.” “아니야. 여기는 우리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 땅을 우리가 떠나면 안 된다.” “떠납시다.” “떠나면 안 돼.” “떠나야 됩니다.” 그래서 떠났잖아요.
그래서 지난번에 설교했잖아요. 여러분은 신앙에 실패하라고요. 더 과격하게 이야기해서 예수 믿지 마세요. 예수 믿어서 성공하려고 믿는 그것 믿지 마세요. 그런 예수 없습니다. 나 성공하게 해주는 예수 없어요. 나 구원해주는 예수 없습니다. 떠나세요. 내가 실패한 입장에서, 내가 실패한 위치에서 “날 구원해 봐라.” 하는 것은 주님 약 올리는 거예요. “당신이 말 멋지게 해서 날 예수 믿게 해봐라.” 이것은 사도바울이 당했던 시험이에요. 어디 개 같은 것들에게 귀한 진주를 던집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진리가 무엇이냐?” 하니 주님이 “말 안한다. 안 가르쳐줘.” 떠나야 돼요. 우리의 신앙이고 예수고 다 떠나지 아니하면 알 수 없는 그 대목이 호세아에 나옵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호 11:1) 이게 결정적입니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예수님께서 애굽에 가서 비로소 애굽을 통째로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선택해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겁니다. 나는 애굽의 일부고 애굽에서 같이 저주받고 멸망당해야 될 마땅한 존재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볼까요?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 2:15)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은, “지금 현재 있는 자리에서 날 구원해봐라.”가 아니라 애굽이라는 자리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찾아오심, 주님의 개입이 없이는 우리는 구원의 대상조차도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전부 다 이기주의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 스스로 내 손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야곱은 거기서 질겁해 버립니다. 왜 질겁하느냐 하면, 그 애굽에서의 구원이 전혀 자기가 예상한 방식이 아니라 자기가 손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떻게 풀어낼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데 그 사태를 ‘우연’이라 합니다. ‘필연’이 아니고 ‘우연’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겠지. 이렇게 하면 복 받겠지.’가 아니라 우연히. 이 세상 전체가 ‘우연 + 우연 + 우연 + 우연’ 다른 말로 하면 ‘말씀 + 말씀 + 말씀 + 말씀 + 말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가뭄이든지 비가 오는 것이든지 전부 다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그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고,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예배 전에 불렀던 찬송가, “내 주여 뜻대로 합소서.”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주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말은 다시금 내 것 따로 챙길 수 있는 여지를 주께서는 전부 다 작살내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거든요. 우리는 어디에 참여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마저 죄인으로 만든 이 세상의 실체를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어떻게 아는가? 말씀이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 갈 겁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뭐든지 하자. 떠나자.’ 그러면서 말씀이 임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뭐냐? ‘떠나 봤자구나.’
그게 야고보서 4장에 나옵니다. 13절부터 보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우리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를 보리라는 그것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는 겁니다. “이것은 네가 혼자 지어낸 것이 아니고 악한 이 세상에서 네가 충분히 맛 들였던 일이다.”
그러면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느냐? 그렇지 않아요. 네가 주의 뜻이면, 언약이 오게 되면, 장차 이런 멋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 땅에 심어놓기 위해서 우리를 비둘기처럼 사용하시는 주의 뜻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뭘 해도 주의 뜻으로 행한다는 것을 외부에 전달하는 예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이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피켓 들고 살아온 사람이고, 이 세상은 우리를 죄 되게 만드는 세상이고, 그 세상 바깥에 준비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하나님의 음식물이 되는 의의 세계가 있음을 미리 우리를 통해서 증거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 모든 능력과 이 모든 솜씨는 주의 약속과 말씀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사도바울에게 많이 했던 모양이지요. “이미 약혼하기로 되어 있는데 지금 와서 파혼할까요, 말까요?” 그런 식의 상담이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또 있을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럴 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은, “맘대로 하세요.”라는 거예요. “내가 떠날까요?” “떠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요. 떠나봤자 라니까요?” “결혼 할까요?” “결혼 하세요. 결혼 해봤자.” “결혼하지 말까요?” “결혼 안 해봤자 또 그런 거고. 네 맘대로 하세요.”
38절에 보면,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갈 데 없어서 안 가는 것 말고, 오라고 오라고, 재벌 3세고 의사고 판사고, 그렇게도 오라고 하는데, 이건 뭐 진드기처럼 따라다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안가겠다는 것은 그만큼 그 딸이 결혼하는 것에 대해서 ‘별로 안 중요해.’라고 영적으로 다른 곳에, 성령 쪽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영의 세계를 위해서 심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잘 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더 잘한 것이 있음에 우리는 결국 더 잘한 쪽으로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실 거예요. 결혼도 하시고 다 하세요. 하시면서 거기에 목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부부싸움 하면서 이런 결정적인 말을 해요. “당신이 똑똑하고 성실한 것은 다 좋은데 당신에게 한 가지가 빠졌다.” 뭐가 빠졌는가? “당신은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다.”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 그 드라마작가가 진짜 뭘 빼먹은 게 있어요. 뭐가 사랑인데? 그것은 그 드라마 작가도 몰라요.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자기 속에서 자기의 적을 발견하는 겁니다. 네가 내 원수가 아니라 내가 내 원수인 것을 발견하는 거예요.
‘자꾸 너는 잘나야 돼. 너는 높아져야 돼.’ 주님은 너를 실패자로, 저주받은 자로, 문둥병자로 낮추고 있는데 그 낮추는 것을 극렬하게 저항하는 나의 육신적인 다른 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자꾸 주의 법을 거부하는, 주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배척하는 이것이 나의 적이 되지요. 이 적을 의식하면서 늘 살아갈 때, 내가 적은 바깥에 있지 않고 내 안의 내가 내 적인 것을 알 때, 그게 외부로 나타날 때 사랑과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형제우애, 그런 겁니다.
마누라가 옆에서 무슨 잔소리를 해도 그 잔소리마저 아름다워 보이는 것, 그 정도로 마음이 낮아져야 돼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한답시고 스카프 사주고 다이아반지 사주고……, 아이고, 그러지 마세요. 그거 다 값을 하는 거예요. 그것은 딴 놈한테 기업을 물려주려는 하나의 수작일 수가 있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마음을 낮춰야지 목걸이 해줘봐야 소용 없어요. 뭔가 이 땅에 꿍꿍이가 없어요. 뭐든지 주의 언약대로, 말씀대로 완벽하게 오케이, 사인이 나서 지금 이대로 사는 이것이 주 앞에서는 최고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그러면 그 십자가에 있는 몸은 부활의 몸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보고 마음 낮추라 말고 정작 우리 자신은 마음 낮춘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녹아져서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