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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43강-육신의 고난(고전7;25-28) 1505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5. 6. 2. 08:22

2015-05-31 12:36:55 조회 : 93         
   육신의 고난 150531 이름 : 이근호 (IP:119.18.83.69)   

육신의 고난(고린도전서 7: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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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5-05-31 13:23 
육신의 고난

2015년 5월 31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7:25-28

(7: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7: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7:27)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7:28)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사도 바울은 ‘임박한 환난’을 언급하면서 뒤이어 결혼에 대해서 소극적 대응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헤어지자면 마음 아프게 생각할 것도 없이 놔주어라 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 헤어지겠다는 아내를 억지로 내어쫓는다든지 반대로 혼인생활을 어떻게든 이어가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이 모든 대응은 임박한 환난의 성격을 미리 아는 자들의 처신에 맞다 는 겁니다. 환난에 대해서 사람들의 첫 반응은 “이러다가 내 것 날아 가버리겠다”는 우려감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살 수 있는 조건 챙기기에 급급하고 있고 그것이 인생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말씀은, 혼인으로 단단히 결속된 관계가 결코 환난 때에 버틸 수 있는 조건이 되지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혼인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가 환난 날에서 낱낱이 조각조각 나버립니다.
우정과 애정과 신뢰와 배려와 성실함과 친절함과 희생과 양보로버티든 인간 관계가
환난이 찾아오게 되면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저주 퍼붓는 관계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능력으로는 이러한 변화를 뒤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육신 대 육신의 관계가 실은 죽음을 근거로 해서 유지되며 그 죽음의 힘이 외부로는 이기주의의 힘으로 발휘됩니다. 아무리 외부적으로 고상함을 내비쳐도 내부적으로는 오직 자신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환난이란, 인간들이 스스로 힘으로 자기 행복을 사수하겠다는 모든 요건과 환경을 다 무산시켜 버리는 방식으로 찾아든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 안에, 약속 자체 안에 이미 ‘환난’을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1에 보면,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계시록 14:13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는, 성도 아닌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식으로 살지만,
성도는 ‘예수 안’에서 쉼을 얻는채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바깥에서 아무리 환난의 회오리 바람을 불어도 성도는 ‘주 안에서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은 아무리 나름대로 행복의 요건을 다 갖춘다 할지라도 밤낮으로 쉼을 얻지 못하는 신세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 있어 환난마저 복입니다. 성도에게 이런 쉼이 주어지는 것도 예수님의 ‘속죄의 능력’입니다.

속죄의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일체 다른 성공사례를 요청하지를 않는 방식입니다. 성도의 어떤 경우라도 속죄의 능력은 무효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함을 보고서 그때마다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모든 행함마저 ‘속죄의 능력’의 산물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자꾸만 거룩해지는 행위를 주장하는 이유는, 자기 노력에 대한 결실에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성도됨은 성도 본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 속죄의 능력에 의해서 주어진 결실물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실패나 모자람이란 없습니다. 마치 화장실에서 볼일 다 보고 난 뒤에 따라오는 상쾌함 같은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입니다. 바로 이런 속죄의 능력으로 탈락당한 자들의 발생과 더불어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환난입니다.

느헤미야 시대 대, 유대인들은 인구의 10%를 예루살렘 경내에 거주시키면서 나머지 10의 9가 복받기를 원했습니다.(느헤미야 11:1-2) 이들은 성전과 예언자들의 예언한 계시를 연결시켰는데, 선지자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반드시 성전이 있는 이 예루살렘 중심으로 성취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올 메시야는 바로 이 성전개념 자체로서 오실 분이십니다. 성전이 성취된다는 말은 구약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모든 예언이 이미 그 분 안에 고스라니 다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게 되면, 요셉의 일생은 자기 뜻대로 되어진 인생이 아니라 말씀이 현실에 자리잡는 과정 속에 합류된 일생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환난’은 곧 애굽 전체가 심판받는 환난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최후의 환난은 이미 예수님의 몸 안에 함께 있습니다. 마치 팽이가 제자리에서 맹렬하게 돌면 주변에 회오리 바람이 부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면서 7 교회를 손을 쥐게 되면 그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고 탈락된 나머지 인간 세계에 대해서 혹독한 징벌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정신적인 다툼입니다. 환난이 단순히 외부적으로, 물리적으로만 다가오지를 않았습니다. 우선은 정신적인 혼돈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일어나게 됩니다. 마치 조선시대 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여타의 사회 체제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즉 조선인들은 평소에 자기 육신의 안락함 이외에는 최종적으로 다른 목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해서 평등을 외쳐버리면 그들은 자동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따라서 환난이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키시는 겁니다. 환난은 벌써 시작된 혼돈의 얼룩입니다.

혼돈이란 창세전의 상태입니다. 즉 모든 있는 것들이 없든 시절입니다. 그 시절의 내용을 바닥에 깔고 하나님의 언약이 실시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예수님의 ‘자기 뜻’은 예수님의 일의 장애물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의 육신이 성도가 증거해야 될 복음의 장애물이 됩니다. 걸핏하면 자기 행복을 위한 공간과 요건으로 만들어버리는 성질을 육신이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당연히 파괴되어야 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마저 속죄의 능력을 위해 필수적인 순서라는 사실을 성도는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재산이 풍부하고 늘어나도 참된 성도 같으면, ‘십자가의 속죄 능력’에만 최종 마음 두게 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자기를 지키는 일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의미를 위해서 우리가 없는데서 태어났음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06-01 20:10 
42강-고전 7장 25-28절(육신의 고난)1505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 25-28절입니다. 신약성경 27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7:25-28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임박한 환란이 어떤 환란입니까? “장가가는 것도 죄 짓는 것이 아니다. 시집가는 것도 죄짓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참 아까워서 하는 이야기이다. 참 안됐다. 육신의 고난을 자처하면서 저렇게 시집가고 장가가느냐? 내가 걱정돼서 하는 이야기인데 구태여 시집가고 싶고 구태여 장가가고 싶거든 시집가고 장가도 가거라. 하지만 책임은 내가 안 진다.” 도대체 임박한 환란이란 어떤 환란이기에 전혀 우리의 일상적인 상식과는 배치되는 의견을 사도가 이렇게 제시하는 겁니까? 우리가 사도의 말을 무시해도 괜찮아요. 무시할 수는 있는데 문제는 사도의 말을 무시하고 관심두지 않게 된다면 지금 사도가 놓여 있는 성령 안, 예수님 안, 십자가 안, 그 세계에 우리가 같이 놓여있는지가 불분명해지는 겁니다.



같은 성령 받아서 같은 십자가를 알고 같은 복음을 안다면 생각과 사고방식이 얼추 비슷하게 일치되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노는 동네가 같은 동네이기 때문에. 사도가 주님의 종으로서 이런 발언을 할 때 사도의 취지는 이런 겁니다. “이 말을 꼭 내가 해야 돼? 너희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면 참 좋겠다.” 하는 투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는 겁니다. 장가간 사람이 “장가가보니 육신의 고난이 참 많더라. 안 갈 수 있으면 참 좋았겠는데 이왕 간 것 무를 수도 없고 육신이 고난을 그냥 감당해야지. 뭐 어쩌겠어?”라는 이야기가 장가간 사람에게서 나오기를 사도바울이 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 줘야 자기 후배들이 “형님! 꼭 장가가고 싶습니다.” 할 때 “가겠다고 하는 것을 내가 말릴 수는 없는 일인데 안 갈수만 있다면 안 가는 것이 더 좋아. 왜냐고? 네가 아까워서 그래. 그런데 꼭 가겠다면 말릴 수는 없다만 고생 단단히 해야 할걸? 육신의 고난이 많을 거야.”라는 이야기가 우리 입에서 나오다 보면 ‘우리가 사도바울과 같은 부류에 속하는가?’ 하면서 성경말씀이 그냥 책속에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성경 말씀이 활력이 되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씀 안에서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이 팍팍 티가 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장가를 꼭 가야 되나? 안가는 게 더 나은데. 장가가면 육신에 고난이 있을 거야.’라고 할 때에 이것은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파탄난 사람, 그런 사람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올 수가 있잖아요. ‘저 사람이 장가가서 실패했다고? 장가 안 갈까보다.’ 그런 남자는 별로 없어요. ‘실패라. 이제는 젊은 색시 만나서 다시 한 번 장가가 볼까?’ 이렇게 된다니까요. 뭐가 빠졌어요? 사도바울은 무엇과 연관시킵니까? “장가가는 것도 죄가 아닌데 내가 꼭 장가가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육신의 고난이 많기 때문에 안 가는 것도 좋은데 가고 싶으면 가거라. 하여간 뒷일은 내가 책임 못 진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뭘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임박한 환란을 염두에 두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나서 두 번째는 처음 실패한 것까지 보상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는 식의 것, 미진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결혼 할 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결혼이라는 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공통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미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려면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임박한 환란’이라는 것이 어떤 성질이고 어떤 성격이기에 이렇게 결혼이라는 인간관계조차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가 하는 거지요.



부부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혈육관계, 새로운 가족 만들기잖아요. 가족 만들기라는 것이 쉽게 말씀드려서 뭐냐?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살 자리를 내가 챙겼다, 하는 그런 투거든요.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드라마의 마지막장면을 결혼으로 끝낸다는 것은 이제는 큰 탈 없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죽 간다는 뜻이라는 말이지요. 그만큼 결혼의 관계가 단단해요. 티격태격 싸워도 함부로 이혼 못하는 것은 그만큼 결속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임박한 환란 앞에서는 내 행복을 위해서 다지고 또 다졌던 모든 인간의 결속 관계가 여지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임박한 환란 속에서. 임박한 환란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다가오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사이의 모든 관계를 다 조각내 버립니다. 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우정? 애정? 배려? 친절? 선량함? 호의? 성실함? 신뢰? 희생?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했잖아. 내가 너를 선량하게 대했잖아. 내가 너에게 신뢰를 보였잖아. 내가 너에게 사랑을 베풀었잖아. 내가 너에게 투자를 했잖아. 내가 너를 아끼고 지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잖아.” 하는 그 좋아 보이는 모든 관계가 막상 들이닥치는 환란 앞에서는 다 힘을 못 쓰고 다시 본색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육신의 정욕대로 되돌아와 버립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다툼과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그런 바탕에 담겨 있는 숨겨진 죄를 환란 때에는 버틸 수가 없어요. 나만 살아야 되겠다는 것, 모든 것이 내 위주라는 것이 환란이 안 올 때는 근사하게 얼추 포장이 되어서 견고하게 버틸 수가 있는데 환란이 딱 오니까 “그래, 나는 나만 챙긴다. 왜? 그게 뭐가 어때서? 너도 마찬가지잖아.” 이런 식으로 자기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자기위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고 난 뒤에 충돌이 많았어요. 복음이 들어올 때 이미 환란은 거기에 이미 상주해 있는 거예요. 기존의 정신,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환란이 유발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환란’을 설명하려고 하거든요. 오늘 본문의 핵심이 ‘임박한 환란’인데 그게 어떤 성격이냐 하는 것을 규정을 해야 해답이 풀리니까. 조선 땅에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이미 환란이 일어났었습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것이 유교의 체제로 이미 있었거든요.



여자가 어릴 때는 부모를 섬기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섬기고 죽어서는 자식을 섬겨야 한다는 일부종사, 여자는 남자에게 매여 살아야 된다고 가르쳤던 윤리체제가 있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일부종사를 외치는 그것이 누구 입장이냐 하면, 여자 입장이 아니고 그 집 대대로 내려오는 종족, 뼈대 있다는 가문의 입장에서 일부종사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복음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이런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들어왔다 치고, ‘모든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며 속죄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는 그거예요. ‘속죄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이것은 뭐냐? 일종의 일부종사가 버티고 있던 세계에 평등을 외치는 겁니다. 평등에 대해서 지금 하나님께서 ‘메르스’를 통해서 제대로 가르쳐요. ‘메르스’라는 중동에서 온 RNA 바이러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남녀노소, 직업과 성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세상에, 얼마나 평등합니까? 인물이 좋다든지, 복장이 허름하다든지 그런 것은 일체 가리지 않고 이 바이러스만 들어가면 무조건 다 걸려버려요.



이런 완벽한 평등이 어디 있어요? 그 평등이 어디서 나왔는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왔거든요. 왜? 십자가를 증명해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서는 직업이고 남녀노소 다 관계없어요. 질문을 할 테니 그동안 복음 들었는데 어느 정도 알았는지 스스로 테스트해 봅시다. 속죄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개심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개심이란 마음 바꾸기, 마음 개조하는 것. 질문을 다시 풀어서 하게 되면, 예수님의 속죄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아니면 속죄의 능력 받아서 마음이 바뀌어서 바뀐 마음으로 구원 받는 겁니까?



제가 정답을 이야기해 드릴 테니 답변은 하지 마세요. 개심의 능력, 다시 말해서 회개하는 심령, 바뀐 심령, 사람 자체가 달라져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속죄의 능력을 모독하는 겁니다. 사탄이 그런 아이디어를 자꾸 제공해요. “네가 복음 알았으면 인간이 되어야지.” 이것은 사탄의 소리에요. 악마의 내부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속죄의 능력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속죄의 능력이 나라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효한가를 내가 따져서, 내가 측정해서 내가 구원 받을지 안 받을지 내 선에서, 내 이성적 판단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챙기는 것,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지금 임박한 환란이라 했는데 왜 환란 앞에서 부부관계 자체가 의미가 없느냐 하면, 이 환란은 내가 내 살 자리를 내가 챙긴다는 이 모든 조건을 전부 다 무산시켜 버려요. 나는 이것 때문에 살고 있다는 그 자체를, 그 조건을 환란이 없애버린다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은 임박한 환란 앞에서 다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다 엎어지게 되어 있고 다 깨지게 되어 있어요. 내가 내 인생을 안 챙겨도 살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가 있는데 왜 굳이 따로 내가 살 궁리를 챙겨야 됩니까?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해요. 복음은 듣기는 하는데 내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어요. 잘 모르는 게 아니고 구원 안 받은 겁니다. 전화 거신 분에게 이런 예를 들었지요.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아, 시원하다.” 그러면 벌써 들어간 거예요. “아이고, 시원하다. 시원하네!” 이러면 들어간 것이 맞는데 “화장실이 어디지?” 이러면 못 들어간 거예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따로 내가 살 궁리, 내 자리를 따로 안 챙겨도 되어서 속이 다 시원하네, 이렇게 되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에요. 이미 속죄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됩니까?” 설치고 안절부절 한다는 것은 구원 못 받은 거예요.



특히 성경에 환란이야기가 많이 나오니까 구원 못 받은 인간들이 호들갑을 떨어요. 666칩을 심으면 안 된다, 마지막 때를 준비해서 벙커를 준비해야 한다. 노아가 홍수를 대비했듯이 우리끼리 마지막 때를 살 수 있는 비상식량 준비해야 된다는 식으로 호들갑을 떨지요. 미국에서 요새 없어서 못 판다는 것도 있어요. 마지막 핵전쟁이 일어났을 때, 종말의 3차 대전이 일어날 때 성도가 살아남기 위해서 벙커를 준비해야 된다는 거예요. 돈 없는 사람은 구원도 못 받을 참이에요. 벙커 살 돈도 없으니.



이렇게 호들갑을 떤다는 자체가 뭐냐? 성경에서 말하는 환란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성경을 이해하려면 그 벙커, 마지막 피난처 안에 마누라 따라 오면 내 쫓아야 해요. 오늘 본문이 그 말이거든요. 성경에서 말하는 환란은 외부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내부적으로 이미 다가온 거예요. 환란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4장 11절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사람 찾아보려면 편의점 알바 하는 학생들 찾으면 돼요.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그 뿐만이 아닙니다. 취직 못한 젊은 사람들은 취직 못해서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취직 한 사람은 야근한다고 밤새도록 쉼을 얻지 못하고, 가정주부는 애 교육 시킨다고 밤 낮 쉼을 얻지 못하고, 남편 어디서 뭐 하는지 감시한다고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목사는 교인 떠나갈까 싶어서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장로는 헌금 안 나올까 싶어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그러니 지금이 환란의 때잖아요. 제가 아까 조선시대 이야기를 했는데 조선시대 때 복음이 전파되는 순간에 이미 거기서 마주치는 경계선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환란이었어요. 환란이라는 것은 언제 오느냐가 아니라 예수님 오실 때부터 이미 임박한 환란이 본격적으로 개시가 된 겁니다. 그 환란 속에 인간적인 관계가 얽히고설킨다면 그 인간적인 관계, 그게 애정이든 사랑이든 우정이든 혈육이든 그 모든 관계는 환란에 다 스며들게 되어 있어요. 왜 스며드느냐 하면, 어떤 인간적인 결속력과 단결에 자기 일생을 의지하려는 것이 육신의 본성이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하심에 의지해야 될 성도가 주님의 의지하심 말고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인간관계에다가 모든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재산 팔아서 그 돈 교회에 바치는 것, 그게 환란을 대비하는 벙커 만들기에요. 부흥사라는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서 멀쩡한 집을 팔고 월세로 들어가고 그 돈 교육관 짓는 곳에, 목사 사택 짓는 곳에 대게 되면 돈 댈 때는 그냥 공짜로 대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교회가 나의 살길이다.’ 여러분, 교회를 믿습니까? 교회가 믿을 만 해서 그렇게 돈 갖다 바치는 거예요? 속죄의 능력을 믿어야지 왜 교회를 믿어요? 교회는 친목단체인데.



정이 없는 사람 교회에서 정 찾고, 사랑에 목마른 사람은 교회 와서 사랑을 찾고.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그렇게 네 몸 하나 의지할 곳은 이 땅에서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그게 필요치 않을 정도로 속죄의 십자가의 능력은 대단하다는 겁니다. 속죄의 능력을 아주 우습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 몸 하나 건사하려고 여기 기대고 저기 기대고 자꾸 기대시는데 아모스 8장 11절의 말씀에 이 ‘마지막 때에는 물이 없어서 갈증 나는 것도 아니고 양식이 없어서 배고픈 것이 아니라 말씀이 없어서 배고프다.’고 했어요.



그 말씀을 오늘 낮에 지금 펼쳐놓고 있잖아요. “네가 성도냐? 그렇다면 임박한 환란의 때를 생각한다면 네 몸 하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꼭 결혼할 필요는 없다.” 그런 취지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런 설교를 하니까 천안의 어떤 아가씨가 저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설교 듣고서 제가 결혼해 대해서는 잊기로 했어요.” 그 소리 듣고는 ‘내가 큰 탈을 냈구나.’ 싶었어요. 그런 뜻이 아닌데.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무슨 뜻이냐 하면, 이왕 실패한 것 결혼하고 실패해라, 제 뜻은 그런 뜻이거든요.



이왕 망가진 인생, 실패한 인생, 결혼 해보고 망가지면 더 재미있잖아요. ‘나는 어떤 남자도 의지하지 않고 어떤 여자도 의지하지 않는다.’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까 예수고 삼위일체고 다 잊어버리고 앞치마 두르고 남편 하나 챙긴다고 현관까지 나와서 “오늘도 잘 다녀 오세요.” 이렇게 보내고 라디오 아침방송 틀어놓고 의자에 발 쭉 뻗어서 길게 올려놓고 에스프레소 마셔가면서 ‘이게 행복인가?’ 하는 순간 그 사람 속에는 속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동안 공들였던 결실물을 의지하는 순간이 되거든요.



그게 바로 임박한 환란을 요청하는 셈이 돼요. 어떤 분이 질문합니다. “목사님, 거룩하라는 그 성화론이 뭐가 문제입니까?” 답변했습니다. 성화론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자기가 노력한 결실을 챙기고 있다는 그게 문제거든요. 거룩하기 위해서 애쓴 그것을 너무 아까워서 못 버리겠다고 하니까 그게 사탄의 이론이에요. 성화론이 악마의 이론이에요. 인간이 우왕좌왕 한다는 것을 주께서 뻔히 아십니다. 인간은 한평생 우왕좌왕 해요. 한 평생 불안해하고 우왕좌왕한다니까요. 한평생을.



그럴 때마다 속죄의 능력이 왔을 때 ‘내가 쓸데없는 것에 혼이 나갔구나. 걱정 안 해도 될 일을 내가 걱정했구나.’ 속죄의 능력이 훅 다가오게 되면 환란도 복입니다. 환란도 복이에요. 환란도 즐거운 일입니다. 환란마저 즐겁고 축복이에요. 그저 “환란아, 나가라.” 하고 그저 밀어내는데 환란을 밀어냈다고 해서 환란이 “실패다!” 하고 멀찍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환란의 본격적인 시작은 예수님에게서부터 입니다.
예수님 약속 안에 환란자체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움직일 때마다 환란이 소용돌이치면서
예수님이 있는 그 현장에서 환란이 전 우주로 확산되게 됩니다.
팽이를 돌리면 거기서 소용돌이 바람이 불지요.
예수님이 팽이라면 그 팽이를 돌려버리면
그 예수님 소용돌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점점 예수님 소용돌이의 파급의 효과는 전 우주를 덮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부적으로 이미 환란을 준비해두셨습니다. 그 환란은 뭐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환란 받는다는 그 조건에 맞추어서 예수님이 오셨어요. 이 세상 자체가 환란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환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 속에 있는 환란을 밖으로 끄집어내면서 동시에 거기서 꾸역꾸역 만들어지는 것이 있어요. 마치 마술사가 검은 보자기를 가지고 만지작거리다가 그 속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꺼내 무대 위로 날리는 것처럼 주께서 마술사처럼 이 환란 받는 세상 속에서 뭔가를 꾸역꾸역 만들어내요.



환란 받는 세상 속에서 환란을 이기고 나오는 유일한 단체를 만들어내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라 하는 것은 그 일곱 교회에서 탈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심판을 두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환란 안 받을 생각 하지 마세요.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친히 만들어 낸 교회, 그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바깥에서 동반해서 일어나는 부대현상중의 하나가 환란의 유발입니다. “탈락자에게는 저주뿐이니라.” 그런 뜻이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탈락된 사람은 저주뿐이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지요. 반면에 성도는, 교회는? 밤 낮 쉼을 얻지요. 왜? 속죄의 능력이 환란을 이기니까. 왜 속죄의 능력이 환란을 이기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내부의 환란과 고난을 십자가로소 이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 예수님의 자기 뜻이 자기에게 장애물이에요.
예수님 본인의 뜻이 본인의 일에 장애물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도 자기라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사건이 십자가 안에 내용으로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애쓴다고 해서 스스로 환란을 벗어 제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임박한 환란에서 헤엄치고, 버티고, 고함치고, 발악하고, 악 쓴다고 해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벙커 만들고, 베리칩 거부하고, 신사참배 안하고 온갖 경건성을 다 띈다고 해서 주의 심판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은 되지를 못합니다. 말씀 가지고 도배를 해보세요. 이길 수 있는가?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환란이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느헤미야 11장에 보면 예수님 오시기 약 400년 전에 이미 그 방법을 예언했어요. 그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거하게 하였으며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백성들이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백성중의 십분의 일을 늘 예루살렘에 살도록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성전을 향하여 자신을 포함해서 나머지 십분의 구를 위해서 복을 빌었어요. “하나님이여, 복을 주옵소서.”



복을 비는 것은 이사야 25장 9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사야 25장 9절의 예언대로 느헤미야가 총독으로서 바사나라의 후원을 받아서 고토, 잃어버린 옛 영토인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짓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 현장에서 실시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를 강권해서 필요한 물자조달부터 필요한 법적 행정적 조치를 다 해줘가면서 성전 짓게 한 그 이유는 예언서대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본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살기를 작심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언서대로 이루어지는 현장이기에 그렇습니다. 언제까지?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입니다. 부활승천하실 때까지. 만약에 그들이 인구의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에 거주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전의 가치, 성전의 능력, 성전의 중요함, 성전의 의미를 빼놓고 그냥 살게 되면 그 땅은 개인적으로 자기가 사는 동네에 불과해요. 뭐가 빠졌는가? 성전의 의미가 빠졌어요. 성전의 의미가 빠져버리면 제사장의 의미, 선지자들의 예언의 의미도 같이 빠져버리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도대체 누가 우리를 살리느냐를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누가 우리를 살리는 겁니까? 말씀대로 되게 하신 약속의 성취가 살리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내 살 궁리를 따로 챙기는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겁니까? 이걸 분명히 하자는 거예요. 이 아파트와 재산으로 앞으로 내가 평생 살게 될 것이라고 뭉치게 되면 그 자체가 뭐가 누락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게 우선되기에 그 자체가 환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종종 이야기합니다. 아파트가 열 채가 있고 땅이 수십만 평이 있어도 주님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성도라는 말을 그래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가진 재산이 결코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 내 구원의 능력은 재산이 아니고 다른데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왜 환란을 줬습니까? 욥이 가진 게 많아서 그래요. 자식도 잘되는데 하나같이 잘돼. 자식 열 명 다 잘되고 재산도 많고 남들이 다 칭찬하고 그야말로 욥은 그 사회의 갑이지요. 부족함이 없이 살았는데 주께서 그 모든 것을 몽땅 빼앗아가잖아요.



마귀가 고자질을 했거든요. “하나님, 욥 믿지 마세요. 재산 때문에 하나님 믿지 재산 없으면 하나님 안 믿을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믿음을 줬기 때문에 뻔히 욥을 아시면서도 “그렇다면 한번 내기를 해보자.” 해서 하나님과 마귀의 게임 판에 욥이 말려들어가서 욥은 재산 날라 가, 건강 날라 가, 목숨도 달랑달랑. 처음에 욥은 오해했지요. “하나님이여, 도대체 어떻게 구원하시렵니까?”라고 오해를 했지요. 나중에 욥은 알았어요. 이미 구원 받았기에 구원의 능력이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환란을 이긴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을 통해서 증거 하도록 하기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자기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속죄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주께서는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을 다 공습해서 파괴시켜버려요.
환란이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혼란이라는 뜻이에요.
혼란은 다른 말로 하면 붕괴라는 뜻입니다.
모든 관계의 붕괴에요. 재산뿐만 아니고, 건강뿐만 아니고 인간관계가 다 붕괴되는 거예요.
그 붕괴는 어디서 나왔는가? 붕괴는 죽음에서 나오는 겁니다.
죽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죽음은 없음, 무에서 나오는 거지요.



따라서 환란이라 하는 것은 창세전의 혼돈, 혼란한 시기를 맛보게 하는 겁니다. “힘들다고? 까불지 마라. 너는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야.” 그게 환란이거든요. 따라서 환란 속에서 “어떻게 저를 살리시렵니까?”가 아니라 “주께서 없는 나를 예수님 증거 하라고 만들었지요? 그렇지요, 하나님?” 그런 고백이 나오게 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없어도 되는데 주님이 먼저 계시기에 먼저 계신 분을 먼저 계시다가 증거 하라고 후차적으로 저를 이 땅에 만들어놓으셨지요? 그렇지요?”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주님이 단지 계실뿐만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 십자가 지신 그 속죄의 능력이 이 땅에 후차적으로 등장하는 모든 죄와 사탄의 능력마저 거뜬하게 이겨냈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그 결실물로, 열매로 우리를 이 땅에 만들어놓은 거예요. 따라서 환란조차 복이 되는 겁니다. 환란이 찾아온 것도 복이 되는 이유는 “주님, 저는 처음부터 저런 것을 의지하지 않았어요.”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내 인생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지요.”라는 말이 나오도록.



어떤 남자가 아가씨와 사귀고 있는데 “당신이 나와 결혼할 수 있느냐?” 해서 프로포즈도 하고 다이아반지도 주고받고 다 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가 결혼식 당일에 웨딩드레스 입은 채로 막 뛰쳐나간 거예요. “도저히 당신하고는 안 되겠다.” 그럴 때 그 신랑은 뭘 보는가? 고린도전서 7장, 오늘 본문을 보면 돼요.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구하지 말라.” ‘내가 언제는 저 인간 없이는 못살았나? 그런 관계였나? 나는 주님의 속죄의 능력만 있으면 돼요.’ 그것을 고백하라고 어떤 여자가 왔다가 가버린 겁니다. 세상 살기 참 편하지요. 성령 안에서 믿음대로 살기 참 편해요.



사도바울은 지금 완전 배짱이에요, 배짱. 이런 배짱이 없어요. 내 배 째라는 식이에요. “사도바울은 결혼도 못하고.”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그래, 안했다. 뭐! 안했다. 왜! 결혼하는 자에게는 육신의 고난이 있을 것이다.” 세상이 얽히고설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만들어줬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가 육신에게는 환란이라는 의미로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내 몸이 여기 있는 것 자체가 환란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모든 것이, 아침에 눈 뜨면서 보이는 모든 것, 심지어 꿈속까지 다 환란입니다. 환란인데 그 환란이 그냥 환란으로 끝나버리면 지옥가요. 그런데 그 환란이 어디서 나오는가, 출처와 연결되어 있으면 영생 얻는 사람입니다.





요셉을 가지고 그냥 요셉이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환란이라고 이야기해요. 요셉의 아들이 둘 있는데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므낫세는 ‘내가 지난 고난은 잊었다.’ 해서 므낫세의 이름의 의미가 ‘잊어버림’입니다. 에브라임은 잊고 난 뒤에 ‘창대한다.’ 해서 에브라임이고.

요셉의 환란이라는 것은 요셉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중요합니다.
요셉의 환란, 요셉의 한평생이 요셉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요셉보다 항상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앞서 가요.
앞서가는 그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성취되기 위해서
요셉을 뒤 따라 보냅니다.


요셉이 육신을 가진 이상 요셉이 그냥 초연하게 살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지만 실패와 좌절을 자꾸 느낍니다.
쉽게 말해서 환란이 외부적이 아니고 환란은 항상 내부에서 소용돌이친다는 것에 주의해야 돼요. 내부적이에요.
미국이라는 잘 사는 나라에도 자살이 있어요.
유럽의 잘사는 나라에도 세상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못 살아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 많아요.

외부적인 환경이 아니고 주께서 주님의 자신의 환란을 내부적으로 집어넣게 되면, 우리 내부에서 내가 주의 몸, 다시 말해서 교회, ‘내가 교회 될 거냐, 아니면 그냥 육신으로 남을 거냐.’라는 심한 투쟁과 갈등이 일어나면서 내부적인 환란이 바깥으로 방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일어나요. 쉽게 말해서 ‘속죄의 능력을 내보이는 평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내 육신 잘났다는 이 자랑 질을 위해서 살 것인가?’ 그걸 계속해서 보게 하시는 거예요.

요셉의 환란은, 그 하나님의 말씀, 언약, 시편 105편 말씀대로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요셉도 알고 있는 요셉의 환란을 팽이처럼 돌리면서 외부적인 환란으로 번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 때문에, 요셉 하나 건지기 위해서, 요셉이라는 교회 하나 건지기 위해서
애굽나라에 7년 대흉년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까 본 느헤미야 때 성전중심으로 왔잖아요.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성전에 담기고 성전을 통해서 완성이 되는데 예수님은 성전으로 오신 분이거든요. 성전으로 오셔가지고 예수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환란을 본격적으로 퍼뜨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예언서 중 하나가 유명한 요엘입니다. 요엘 2장 31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가 누구냐?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캄캄해 졌지요? 이미 하나의 징후가 등장했습니다.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예루살렘 자체가 성전이 있는 곳이고 성전 자체가 예수님 있는 곳이고 예수님 자체가 예루살렘이 되는 거예요. 그 예루살렘이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위로 올라가요. 그러면 밑에 있는 예루살렘은 의미 없습니다. 땅에 속한 것은 전부 다 환란의 대상이고 사탄의 지배영역이지 기존의 문자적 예루살렘은 의미 없어요. 이미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다. 요한계시록 21장의 말씀대로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그 예루살렘이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탈락한 이 세상은 불의 심판과 환란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그에 합당한 모든 징벌과 저주가 이 땅에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이루어져야 되는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일곱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일곱 교회에서 탈락한 사람은 이 땅에서 계속해서 교회에 성도가 생길 때마다 동반해서 저주가 일어나는 겁니다.

제가 이걸 달리 쉽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중국집을 생각했어요. 중국집 주방장이 손으로 면을 뽑잖아요.
바닥에는 밀가루가 허옇게 묻혀 있고 손에는 면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교회에 땅에 내려 칠 때마다 땅에 있는 밀가루먼지가 일어나면서 환란을 받아요.
그럴 때마다 면 가락은 하나씩 늘어나네. 14만 4천 가락으로.
성도 하나 만들 때 마다 환란이 벌어지는 겁니다.
조선시대에 복음이 들어올 때 조선시대 자체가 환란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이 말은 결혼 안하면 행복하다, 가 아닙니다. 결혼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결혼 안 하면 계속해서 외부에 환란을 주기 위해서 복음이 성도가 성도답게 살도록 조치가 취해집니다. 어떻게? “아, 시원하다.” 아침부터 화장실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아이, 시원하다. 속죄의 능력으로 사니 이렇게 편한 것을!” 그런데 다른 사람이 불편한데 어떡하나? 어떤 아가씨가 불도 심한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새댁이 복음을 알아요. “얘야! 제사 잘 모셔야지.” “저는 예수 믿기 때문에 제사 안 드립니다.” 그 소리 듣고 시어머니가 “이 싸가지!” 제사 드린다고 땀 뻘뻘 흘리면서 게다가 한복까지 차려입고서 그러고 있는데,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제사 안 드립니다.” “시어머니가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안 보이나? 마음 안 아파?” “속이 다 시원합니다.” 이게 바로 면 하나 뽑았어요. 면 발 바닥에 내려치면서 뽑은 거예요. 시어머니에게 밀가루가 허옇게 묻었어요.

“결혼 안하면 행복합니까?” 하는 질문을 하면 안돼요. 행복은 결혼 안 해서 행복한 게 아니에요. 속죄의 능력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행복한 거예요. 세상 어떤 것도. 아내의 자리는 따로 없습니다. 아내가 아내로 들어올 때 아내의 자리가 새로 생기는 거예요. 남편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남편과 아내를 허락하거든 하세요. 하는 이유는 왜 십자가의 속죄의 능력 빼놓고 나머지는 다 실패로 끝나야 되느냐를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 결혼하게 하는 겁니다.



안하시면 하시고 했던 분도 다시 하셔도 괜찮습니다. 이왕 실패한 것. 왜 세상 자체가 실패인가? 왜 성도에게는 실패의 기쁨을 허락하시는가? 실패 속에서도, 속죄의 능력을 그냥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실패의 현장에서 속죄의 능력을 새삼스럽게 시원하게 알려주는 그 방식으로 왜 그렇게 주께서 하시는가? 그것은 주님의 자신의 뜻마저 자신의 일에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육신들 가지고 계시지요?
육신이 우리의 구원의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이걸 미리 아시고 우리의 육신 대신 다른 육신으로 바꿔치기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내 육신 말고, 내 노력 말고, 내 희생과 내 거룩함 말고,
주님의 몸에 의해서 이미 구원을 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그거 측정하지 마세요. 그것은 악마의 유혹입니다.
거기에 빠졌으면 발을 빼세요. 인간 안 됩니다. 인간 안돼요.
제가 이 소리 하는데 30년 이상 걸렸습니다. 전부터 이야기는 했지만.
여러분, 나라는 인간이 사람 안 됩니다. 내가 사람 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세요.
육신입니다. 육신은 인간 안 됩니다. 육신은 자기 행복꺼리만 자꾸 챙기는 것이 육신입니다.



결혼하면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이혼하면 행복할까, 혼자 살면 행복할까, 자식하고 같이 살면 행복할까,
없어요. 행복은 이미 속죄의 능력으로 줄 거 다 줬습니다. 이미 주께서 자기 생명을 다 줬어요.
성도에게 환란은 얼룩이고, 하나의 징후고 십자가의 창 자국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면서 내가 내 장애물이라는 것을 보여준 흔적이 창자국과 못 자국이라면
우리들도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내가 왜 죄인이며 왜 내가 나한테 기대해서는 안 되는가, 내 착함에 기대해서는 안 되는지
를 보여주는 흔적과 증거물로 여러분이 활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육신, 어디에 쓸데 있는가 싶었는데 속죄의 능력 증거 하라고 필수적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몸 하나 잘 간수하기 위해서 예수님 이용하지 말고 이미 우리 자신이 이용하기 전에 속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느긋하고 편하게, 속 시원하게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