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적으로 본 예정론
1. 서론
1) 사변적인 예정론의 한계
하나님께 보다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선의의 이론인 예정론이 단지 인간 이해력과 연결점을 갖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껄끄러운 주제로 따돌려져 왔다.
여기에는 신학자들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의 결론이 옳다는 것을 너무 우선적으로 생각한 나머지 기어이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무리한 개념을 혼란스럽게 첨가시키고 있다. 자기에게도 확실하게 정리가 되지 않은 개념을 상대방에게 강요함으로써 얼렁뚱땅 말의 위협으로 넘기려고 한다. 공의의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갑자기 사랑 주제로 노선을 이탈하고 다시 공의 이야기를 설명하곤 한다. 이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를 시키려는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된다. 그래 놓고는 끝에 가서는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자기 설명이 성경대로 인양 상대방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결론에 대해 설명해주기 보다는 처음부터 양해를 구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을까?
이렇게 자기 주장이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으니 다른 방법으로 예정론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즉 反예정론자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함으로써 자기 주장이 논리적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를 시도이다. 일종의 불로소득을 노리는 작전인데 이는 실컷 남의 이야기만 하다가 마는 경우가 된다.
그러면 여기서 왜 기존의 예정론이 딜레마를 갖는지 그 이유를 살펴본다.
기존의 예정론 설명은 처음부터 인간의 무분별한 자율성과 독자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神의 속성이라고 여겨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성을 반대 위치에 놓는 방법을 취했다. 여기에 등장한 신의 주권과 자유성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편에서 이해하고 부러워하고 있는 주권성과 자유성의 확대 개념으로 봐야 한다. 즉 인간 편에서 경험했던 속성을 신에게 일방적으로 안겨주고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못박아 버린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신과 인간 간의 필연적 대립성을 오히려 인간 쪽에서 조장한 느낌이 든다. 그 가운데는 신의 자유로운 주권이라는 먹이를 두고서.
중세 때의 사변철학은 신을 인간의 언어(이해력)로 설명하려는 노력에 몰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개혁 때도 반대파를 공격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사변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 당시 신학의 발달이 그 수준 밖에 안되었으니) 그 결과로 사변적인 예정론이 탄생했다. 그 사상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神을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즉 교회의 禮典에서 신의 실체를 파악하는데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경험되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파악하려고 했다. 그들은 교회의 예속에서 벗어나면 자연이 주는 새로운 자유가 자기들을 기다릴 줄 알았다. 거기서 충분히 연구하면 신도 직접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인간의 양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행동들을 보였기 때문이다.
시대 분위기상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용감한 시민의 정형적인 자세이며 선각자의 모델이었다. 이러한 계몽주의적 풍토 속에서 신을 다시 한 번 정립해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무절제한 인간 자율성과 이성 찬미는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짐승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 간섭으로부터 해방을 외친 자들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으나 정작 그들 머리 속에서는 신의 품성이 정립되지 않았다. 자기들 나름대로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대충 이성에 맞도록 그려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전체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가 요구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 이어진다. 예정론의 일차 목표는 인간 이성에 대한 견제이며 고발이다.
성경 전체를 다 상고한 칼빈은 성경의 주제를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고 보고 그 주권사상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자명한 원리로 삼았다. 성경을 불손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로 대한 사람에게는 증명할 필요도 없는 중심사상이 바로 주권사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에 우선하며 인간의 모든 행위를 총괄하신다. 그 기쁘신 뜻대로! 여기에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 구원론도 바로 일관된 성경의 중심 사상에서 나와야 마땅하다. 예정론은 구원문제에 있어 인간의 공로나 업적에 쐐기를 박는다. 이것이 바로 가톨릭을 겨냥한 주제이다.
인간의 공적이나 업적을 주어 담아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게 해 주는 가톨릭이야 말로 마귀의 사주를 받는 이단이다. 인간의 이성과 계시를 혼합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중도에 가로채는 로마교회이야 말로 하나님이 용서할 수 없는 집단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총괄하여 운영하신다면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구원문제에 있어 성경은 확실하게 우리들에게 구원의 실상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구원하지 인간의 뜻에 따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원뿐만 아니라 심판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어떤 것은 진노의 그릇으로, 어떤 것은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기쁘신 뜻’에 준하여 이루어진 것이기에 인간의 어떠한 이성으로 여기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못한다. 인간은 토기 불과한데 어찌 토기가 자기를 만드신 분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항변할 수 있는가!
물론 여기에 대하여 수많은 의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선악과 문제이다. 이미 하나님은 창세 전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할 줄을 아셨을 뿐 아니라 곡 그런 짓을 하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이 얼른 납득이 안 간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모두 아담에게 돌릴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뱀을 투입한 것부터 사전에 하나님의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또 한 인간이 구원에 대한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창세 전에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하나님이 강제로 그 사람을 타락시켜야 하고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가서 벌 받는 경우가 생기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칼빈은 하나님의 공정성으로 처리해 버린다. 하나님의 공의는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공평한 처리를 하실 것이다. 그리고 선택된 자들은 그들의 행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거저 주시는 선물의 형태로 구원받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면 이 모든 것은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칼빈은(또는 칼빈주의자들은) 선택을 설명할 때는 하나님 행위의 결과로 설명하지 하나님의 속성으로 설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행위란 속성의 후속조치로 나타난다. 따라서 선택을 제대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해명해야 한다.
①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선택을 해야 만이 공의를 행사할 수 있는가?
②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선택을 해야 만이 꼭 사랑을 행사할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공의나 사랑이란 공의와 사랑의 대상이 존재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공의와 사랑의 상대를 미리 선발해 놓고 시행하는 것보다 상대의 행위를 본 후에 그 상대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의 결해는 성경의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 또한 문제가 된다. 성경은 분명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그 상대자가 이 세상에서 무슨 선한 일을 했는가 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로마서 9:11-23)
분명 선택이란 1) 공의와 사랑을 보여 주기 위한 선택이고
2) 이 선택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창세 전에 결정된 것이라면 위의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선택론이 등장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바르트의 선택론이다.
2) 칼 바르트의 선택론
칼 바르트는 구원과 유기를 한 대상에 집결시키고 그 대상의 선택을 무시간적인 차원에서 처리하기 위해 영원한 삼위일체 내의 선택으로 매듭짓는다. 물론 칼빈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언급한 바 있다.
‘...중략...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엡1:4) 기독교 강요 중 PP 565-566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칼빈은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의 뒷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을 만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들로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의 나라를 상속하는 영예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칼빈이 이해하는 ‘그리스도 안’이란 장차 그들이 구원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렇게 간단히 보지 않는다. 칼 바르트는 구원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론 그 자체라고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 구원론은 기독론에서 도출되어야 하고, 기독론은 선택론의 의지를 지상에서 구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성부께서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이전에 그의 아들 안에서 장차 자신의 선택한 자와의 계약을 미리 성자에게 다해 버린 것이다. 대표로서 말이다. 그래서 성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이다. 장차 선택될 자들은 영원 전에 선택된 자인 성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답습해야 한다. 칼 바르트는 여기서 또 한편 유기(버림)를 생각한다. 하나님의 유기행위는 선택된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유기함으로 성사된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유기된 자이다. 이 전제를 놓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이 무색해지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서 구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선택과 유기를 전체적인 동시행위로 처리하고자 했다. 일시적으로 이 둘의 구속사역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선택된 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속에다 그 의미를 담아두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유기)과 부활(구원을 위한 선택)은 모든 인간의 버림과 구원은 일단 그리스도에게는 완성을 보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뜻이 전 세계에 펼쳐져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칼 바르트는 우선 그리스도 자신의 사건을 공동체의 사건으로 발생시키고 그 공동체(교회)가 세상의 중재자가 되어 개인의 선택에 들어가는데 그 개인은 맨처음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유기와 건짐)이 재현되고 발생됨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함유되는 것이다. 그 은혜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면 칼 바르트에 있어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는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차이가 난다. 이 부르심은 이미 창세 전에 선택된 것을 증명하고 확인할 뿐이지 소명 받을 때 비로소 선택된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버림 받은 자의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은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버릴 수 없는 이유는 선택이 자기 잘나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부와의 계약 때문에 이루어진 것처럼 유기도 잠정적인 것이고 이미 대표로 유기되었다가 구원으로 선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그들도 구원받는 다는 것이라고 칼 바르트는 주장한다. 그래도 하나님 편에서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을 보여줌으로써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두에게 자비하시고 은혜로운 분이다. ‘그는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약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누가복음 6:35)
칼 바르트는 선택론과 칼빈의 선택론의 다른 점은 칼빈은 선택을 저쪽 유기 당한 자와 비교해서 나는 구원으로 선택되었다고 구원론적으로 다루지만 바르트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하나님론으로부터 연장된 선택론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칼 바르틑 선택론의 허점은 유기, 구원 이 두 가지 상태의 양립이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시킬 것이라고 믿는데 있다. 그래서 이 둘을 하나로 몰아감으로 은총은 더욱 확대된다고 여기고 있지 하나님의 절대적 결정 그 자체가 은총의 지극히 큰 상태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은혜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 성경은 그렇지 않다. 악인이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은혜는 손상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자들에게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셨는가? 그것은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셨다.
따라서 아들과 (선택된 자로서의 아들이라는 말은 유기를 전제로 해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그냥 언약을 따라 선택된 분으로 아들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드님은 유기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칼빈의 선택론의 문제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선택된 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자의적인 구속기능의 수행이 누락되어 있고 단순히 장소적 기능로만 머문 점이다. 즉 인간 편에서 서서 행하는 일에 소홀한 것이다. 그래야 유기의 의미도 분명해 질 것이 아닌가! (유기가 단순히 선택의 반대 논리적으로 도출할 것이 아니라 유기될 자의 적극적인 구속사의 역할도 선명하게 등장시켜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약점을 성경신학의 도움으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2. 본 론
1) 구약에서의 선택의 의미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만 두고 볼 때 꼭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선행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이 특정 인물을 선발할 때 선발 기준이 사람 쪽에서 찾으냐 아니면 아예 그 인물이 됨됨이 하고는 상관없이 밀 하나님이 점지한대로 일을 처리하느냐와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선택에 관한 언급에서 전부를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정되어서 발생한 일이라는 것은 일의 맨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결과를 두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정되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 신앙인에게(또는 선택된 자에게) 필요하다면 예정의 섭리가 갖고 있는 은총은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난 뒤에 알려지는 것이 당연하다. 예정되었다는 말을 주저없이 던질 수 있는 시기는 종말의 시기뿐이며 그것이 알려지는 그때가 인류의 위기때이다.
따라서 신약에서 바울로 통해 던져진 ‘예정’이라는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엡1:5), 예정 없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만들어 질 수 없는 이유를 구약에서 찾아내어야만 한다. 예정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은 철저히 인간 실패의 場이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 보면 구약의 이스라엘 선택은 ‘예정’이라는 개념이 왜 요구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다. 그 실패의 부산물이 바로 ‘남은 자’개념이다. 모두 다가 아니라 누구 누구 만큼은 (기적적으로)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태를 긍정적으로 본 결과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이 기대를 걸 수 없었다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구약에서의 예정이나 선택을 논하고자 할 때는 어떻게 일을 처리했기에 남은 자가 생기나 하는 관점에서 다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겨우 명목이 유지된 상황을 찾아서 우리는 예정과 선택의 은총을 논해야 한다. 물론 理想的인 기준은 신약의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 신약의 표준에 미달되었기에 그들은 실패했고 그 실패한 현장에 하나님이 희생의 흔적을 남기셨다는 증거로 ‘남은 자’를 두셨다. 이 ‘남긴 자’의 집단 속에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있다. 이 정신이 들어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약의 ‘예정된 신앙공동체’와 본질이 다른 이교 집단이 되고 이단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놀랍게 개입하시는 구약적 위기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은 타락이 후 처음부터 끝까지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택 그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이들의 선택 속에는 구원과 버림의 양상을 다같이 포함하고 있다. 건지기 위해서 선택했고 또한 버리기 위해 선택했다. 그들에게는 ‘예정’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다. 그 이유는 아직 종말에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부모 밑에서(이삭과 리브가) 버림받는 자식과(에서) 용서받는 자식(야곱)이 동시에 나왔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누가 축복의 대상이며, 누가 저주의 대상인지를 두고 식구들은 서로의 장기와 지혜를 짜내어 복이 자기에게 오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릇이 자기들의 뜻을 성취하는데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질없는 세월의 낭비는 아니다. 왜냐하면 그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택’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노력과는 무관함을 보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심중을 전달하기 위해 이삭의 가정을 선택한 것이다. 다만 이 와중에서 선택의 섭리를 구원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쪽은 물론 야곱이다. 형 에서는 이러한 섭리를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보지 않고 불합리로 평가했다. 그 증거로 자기에게 돌아올 여분의 축복이 없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아버지 이삭에게 던지고 있다. 그는 구원이 버림의 상대개념인 것을 아직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버려진 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구원이란 인간의 전적타락이 아니면 없어야 하는 상태이다. 선택된 야곱만이 선택이 안고 있는 본질을 파악한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고백이 그것이다.(창 32:30)
결국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건짐 받은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정의 선택을 이해하도록 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의 체험을 이스라엘의 국가정신으로 삼으셨고 이름도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셨다.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뽑힌 자는 야곱에게 벌어졌던 그 체험이 자기 체험화 되지 않는 한 버림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이 이스라엘 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야곱의 언약이 선택이라는 섭리 아래서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언약이 다시 바뀌고 보충된 때는 여지없이 야곱의 선택의 정신이 그 내부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일 때이다. 따라서 언약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예정은 더욱더 분명해 진다. 예정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신앙인들의 축복이 이스라엘의 위기 때마다 빈번하다.
아담의 범죄 직 후 하나님의 개입이 그러했고 아벨의 죽고 난 뒤 아벨의 보복을 위해 나타난 경건한 후손 셋 계열의 노아 등장이 그러하다. 아브라함의 선택이 바벨탑 혼란을 새로운 질서로 이끌고 죽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이삭의 희생은 언약의 영속성이 죽음보다 강함을 나타낸다. 야곱의 투쟁이 축복의 정로를 뒤틀리게 할 때, 야곱에고도 못이기는 하나님의 겸손으로 언약은 계속 이어진다. 형제들에 의해 죽음 직 전까지 갔던 요셉은 난해한 꿈을 꾼 바로왕의 개입으로 온 집안이 살아났고 또 그들이 번성할 수 있는 터전까지 확보했다. 요셉을 알지 못한 바로왕의 핍박에 이스라엘은 와해의 순간을 맞이했지만 모세를 불쌍히 여긴 바로왕궁의 공주의 도움으로 히브리 정신은 계승된다. 그러나 모세의 완력에 구원시도는 무모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열조의 언약정신으로 (할례의식) 돌려 무사히 백성들을 구출한다.
여호수아와 때마다 나타난 사사들의 활약상은 이스라엘 국가를 야곱의 선택정신으로 되돌리는 시도였다. 사울왕의 강퍅이 다윗의 고난으로 극복되고 다윗의 교만은 충신 우리아의 순교를 불렀지만 그 희생은 헛된 것이 아니어서 솔로몬을 낳게 했다. 그 이후의 선지자의 활동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남은 자’의 의미를 더욱 심각하게 해 주면서 국가는 종말로 치닫는다.
과연 이대로 이스라엘은 주저앉고 마는가?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새로운 계약을 제시한다. 문자와 문자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계약이 아니라 영과 영,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계약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예레미야 31: 32)
지금까지가 바로 옛계약(구약) 시절이다.
저주와 구원을 한 계약 안에 담고 있다. 선택은 이 두 가지 개념이 있어야 설명된다. 남은 자와 하나님에 의하여 버려진 자, 이 두 개의 집단은 이제 새시대에는 새로운 계약에 의해 구별될 것이다.
2) 신약에서의 예정과 선택
구약의 선택이 그 당시의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면 신약에서의 선택은 새로운 계약에 의해 규제된다. 계약이 성사되려면 계약 대상자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계약도 마찬가지로 선택된 자들이 있어야 하며 그들이 바로 계약상대자들이다.
하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원하셨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통합하여 새로운 계약공동체 형성을 의도하셨다. 이러한 통합의 원칙에는 과거 유대인에게만 적용되는 선택의 원칙이 깨어져야 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원리가 도입되어야만 한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있는 담은 무엇이며 그 담은 어떤 식으로 깨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옛계약의 선택에 묶여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비선택인이라는 한계를 새계약으로 깨뜨려 버리는 것이다. 이 담을 깨뜨리는 방법은 옛계약에 맞추어 진행된다. 하나님의 언약 정신이 현 이스라엘에게 남아 있는가를 아들을 보내어 검진한다. 만약 없다면 계약대로 파멸과 저주와 따를 뿐이다. (신명기 28: 15이하) 임마누엘로 오셨다는 선지자의 예언은 구원을 우선으로 하는 표현이 아니라 심판을 우선으로 하는 예언성취이다. (즉 나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으로 구별 짓기 위한 우리의 하나님으로 임재함: 아하스 시대와 동일하게.이사야 7:12-14참조)
또한 종말 때에 다윗언약에 의하여 ‘남은 자’를 생산하는데 과연 누가 진정 남은 자인가? 그것은 언약 정신을 구현해 줄 대망의 메시야를 고대하는 자들이다.(누가복음 1: 46-79, 2:23-40)
만약 이 메시야가 이스라엘에 의해 버림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계약위배이며 과거와의 단절로 이어진다. 이것은 곧 역사의 종말을 뜻한다.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버림받은 메시야를 중심으로 하여 탄생될 때 언약은 새로운 차원으로 재생된다. 처음 선택받은 국가는 원칙에 따라 無로 돌아가고 새로운 의의 창조(이사야 45:8)작업이 개시된다. 담이 헐렸다는 것은 실패의 흔적이 저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된 저주가 제대로 주어졌다는 차원에서의 성취에 근거한 것이다. 이렇듯 언약의 속성인 건짐과 버림은 이미 선택된 자의 실패로 새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것을 단순히 보편주의가 특수주의를 대신했다는 것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왜냐하면 아직도 선택이라는 특수주의가 새언약 속에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통주의에서 신앙주의로 바뀌었다고도 해서는 아니된다. 전 유대인이 다 남은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새언약시대에는 선택의 대상이 유대인에게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복음이 유다지역을 넘어 이방지역까지 펼쳐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언약 선택의 원리는 공간이나 혈통으로 정리할 것이 아니라 달리 정비되어야 되는데 그것은 새언약 자체가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루어지는 선택행위란 선택받은 자의 조건이 어떠하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한 선택이냐로 진위가 판가름나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이 중요한 게 아니다. (칼빈은 이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강조와는 빗나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서의 창조이다. 그 새로운 세계란 바로 ‘그리스도의 세상’이다. 이 새세상을 위하여 너희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새로운 계약이 적용되고, 그 원리에 따라 통치되는 세계이다. 선택받은 모든 이들은 그들의 관심을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다 쏟아 부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은 기본이다. 이러한 생각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도 갖고 있었다. 이미 선택받은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어디로, 무엇하기 위하여 선택되었느냐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가 거기에 있었다. (칼빈이 잘못 생각한 것처럼 나 자신의 구원에 있는 게 아니라)‘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말은 선택된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은혜를 겨냥하여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 말이다.(엡 1:15-23 참조)
'예정‘이라는 개념도 이럴 때 비로소 동원된다. 개인의 구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예정이라는 개념이 끌려 들어와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롭게 통일된 세상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들의 참여를 예정하신 것이다. ’예정‘의 관심사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머리 되는 몸이다. 종말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사전 계획과 공작이 있었다는 것을 ’예정‘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깊이 인식하여 자신의 구원만 챙기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이 있는 쪽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눈 앞에 전개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충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요 바람이다. 그렇다면 선택된 자들도 이런 기대와 바람을 가져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는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첫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예정했지 우리를 예정한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예정이 도달목표를(도달 목표는 확정적이다) 겨냥한 선택의 예정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결국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예정이 아니냐라는 주장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예정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과 예정의 의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에베소서 1:4-5은 다음과 같이 변경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이 불필요하게) 그리고 우리들을 모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었다’ 이렇게 하면 애당초 예정의 목표인 그리스도의몸은 예정에 제외된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는 말이다. 예정의 본래의 의도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예정의 대상을 분명히 한정할 때 우리는 사도의 예정개념에 접근할 수 있다.
3. 결론
칼 바르트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가 선택되었으며 그 선택된 자가 또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이중 선택론은 사도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개념을 사도는 선택의 중간 매체로 보지 않는다. 또한 그의 선택의 확산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선택의 방향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사역의 확정지이기 때문에)
칼빈은 사도의 예정개념을 무리하게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결합시켜 예정론을 창시했다는 오해를 자진해서 받았다. 사실 그의 주장은 예정론이 아니라 유신론적 주권론이다.(유대인들도 주장할 수 있는 이론이다)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구약에서의 ‘언약 안’의 의미를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을 보호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한다면 주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가에 초점을 모아야 되지 않을까? 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아들은 믿는 것이다.(요 17: 1-3)
오늘날에 와서 사도의 그리스도 중심은 인간들의 사변적인 구원론으로 공격을 받는다.
마치 막차를 타기 위해 많은 군중이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면서 자기들끼리 아귀다툼을 하는 것같다. 구원받겠다는 것은 탐욕이다. 나라는 인간은 정말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성경의 뜻이며 그럴 때 구원의 의미가 그 속에서 제대로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 구원받기 위한 기술습득과 지능과 지식을 갖기 위해 이리 저리 자기에게 합당한 구원론이나 구원의 서정을 논하는 것이 기독교적이 아니라 이교적이 작태이다.
이런 차에 우리는 사도가 제시한 선택론을 생각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널리 보여주기 위해 일방적으로 뽑혀 나왔다는 것과 그러한 지속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함으로 구원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감지하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인 참여기 되기 위해 희생의 대가에 대한 감사가 우리 속에서 번져나와야만 한다. 성령께서 예정한 자들은 그런 쪽으로 무사히 인도하실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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