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고전 4장 9-13(사도의 자리)150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9-13절입니다. 신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이 본문말씀을 가지고 제가 지금부터 15년 전에 시찰회에서 목사님들 상대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 주제는 이거였습니다. “다 같이 쓰레기가 됩시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제가 빠트린 것이 있어요. “이 성경말씀대로 사도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쓰레기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가 쓰레기가 됩시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에는 제가 분명히 옳은 이야기를 성경대로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중요한 것을 첨가하지 않았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지시대로 쓰레기 같은 목사가 되게 되면 쓰레기 같은 목사 본인이 갑질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 그때는 그걸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가 주의 뜻대로 쓰레기 같은 목사니까 나는 너보다 더 훌륭한 목사야.”라고 이 땅에서 갑질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돌변했을 때 대책이 없는 겁니다.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엄마들이 청학동으로 보내요. 하도 집에서는 감당이 안 되니까 청학동 훈장님한테 보냈다는 말이지요. 청학동 훈장님에게 보내 놓으니까 아이들이 울고불고 하면서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효도하겠습니다.” 하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이제 효도하겠구나.’ 그렇게 생각들을 했지요.
그런데 청학동 다녀와서는 얘가 위세를 떨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 청학동 갔다 온 사람이야.’ 회개했는데 그 회개한 것 때문에 갑질 하는 인간들, “나는 회개해서 새사람 되었다. 회개 못하는 사람은 나에게 무릎 꿇어.” 할 때, 아, 인간이라 하는 것이 이게 인간이구나. 회개한 것도 자기의, 목사가 쓰레기같이 그야 말로 비천하게 사는 것도 자기 잘남, 이거 감당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막 사는 것이 낫겠다. 그래서 막 살라는 용어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사도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죽이기로 작정하고 우리를 쓰레기취급 했습니다.” 하는 말을 성경 고린도전서 4장 9절에서 입을 뗀 순간 이걸 흉내 내고 모방함으로써 내가 진짜 사도고 내가 진짜 목회자라고 나설 위인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어느 글에서 사기성멘트라고 이야기했는데, 혹은 영업용멘트라고 했는데요. 자기를 낮추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남들이 못한 것까지 해내는 대단한 존재인 것을 부각하는 재료로서 끼어들 때 거기에 대한 방비대책이 없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마지막에 너희가 잘 되기 위해서 우리가 쓰레기가 되었다.” 하는 이 말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경 자체는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니까.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걸 해석하면서, 모방하면서, 흉내 내면서, 유사목회자 훌륭한 목회자 또는 유사성도, 훌륭한 성도로 자처하는 우리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본문 말씀을 제대로 훑어봐야 돼요. 두 번 다시 그런 시찰회 설교 같은 식의 설교를 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렇다면 사도가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마지막에 우리가 쓰레기취급 당했다.”라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도의 모양새, 사도의 인생, 그것만 눈에 들어오는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하나 놓치기 쉬운 것이 있어요. 그게 9절에 나옵니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뭐를 누락시키느냐 하면, 천사라는 것을 빼버리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천사를 건너뛰고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해 버려요. 천사를 빼버리고.
천사를 빼버리니까 ‘아, 저 사람은 진짜 목사야. 진짜 사도야. 저 사람은 가짜 목사고 엉터리 목사야.’라는 것을 인간적 입장에서 충분히 판정이 가능하다고 되어버리는 겁니다. 천사를 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런데 천사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되는가? 집어넣게 되면 이 해석이 전혀 손도 못 대는 해석이 되어버려요. 사도바울에게는 천사를 집어넣고 이 문장을 만들었고 이 계시가 현실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천사는 시답지 않게 여기거든요. ‘천사가 어디 있어? 천사가 어디 있는 거야? 그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야. 천사 빼고 우리 인간 대 인간들 사이에서 사회, 건전한 신앙, 바른 하나님이 교회, 이런 것들을 고려하는 거예요. 사도는 천사를 넣고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제일 설교하기 힘들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 점은 여전히 힘들어요. 왜 그러냐 하면, 듣는 쪽이 “하나님 빼고 이야기합시다. 하나님 빼고 갑시다.” 이렇게 나오니까 거기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다, 이걸 집어넣으려니 집어넣는 족족 들어갔다가 튕겨 나오고, 들어갔다가는 튕겨져 나오고. “우리, 하나님 없이 이야기합시다. 인간들 세계입니다. 하나님을 집어넣어서 혼란스럽게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납득되도록 우리 하나님 빼고 천사도 빼고 ‘우리 인간들이 이렇게 하면 주의 뜻입니다.’ 이렇게 쉽게 갑시다.”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 참 해석하기도 힘들고 설교하기도 힘든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그걸 제가 왜 언급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들끼리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걸 증명해내기 위해서 그 다음에 우리 인간들이 차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주님이여, 제 인생 왜 이렇게 꼬입니까?”라고 하면 안돼요. 출발점을 내 인생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 때문에 제 인생을 이런 쪽으로 이끄십니까?” 그렇게 돼야 되지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됩니까?” 하면 벌써 불만이 시작이 되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무슨 의도로 하는 겁니까?” 하는 말은 “정말 궁금합니다. 저요? 하나님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스가 되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에 대해서 시비 걸 것이 없습니다. 다만 모르는 것은 내 인생이 왜 저 사람하고 다르고 왜 이 사람하고 다르고, 왜 이렇게 가는 겁니까? 그것이 약간, 아주 약간 궁금할 뿐이지 전혀 감정은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되는 거지요.
그렇게 본문 보니까 본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하나님께서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처럼” 이 말에 사도바울의 감정 안 섞였어요. “하나님, 정말 이렇게 나오십니까?” 이런 것이 없이 나오는 거예요. 왜냐? 그 증거가 천사,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조치를 했다면 저는 얼마든지 구경거리가 되겠습니다. 주께서 쓰레기취급을 한다면 쓰레기 취급당하겠습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천사를 집어넣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천사를 빼기 급급한데 주께서는 천사를 집어넣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 인생을 “여러분, 남들 보기에 제 인생 어때요?”라고 사람들만 보지 말고 아예 천사한테 물어야 돼요. “천사님! 제 인생 어때요?” 천사한테 물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지가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저 어떻습니까?” 하고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돼요. 그냥 바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눈만 뜨면 나오는 게 인간들인데 그 인간들만 신경 쓰다가는 많이 피곤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되지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해서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도 아셔요. 아신다고 하지만 막상 설명하라고 한다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어디 계신데?” 갑자기 말문이 막히지요. “어디 계신데? 몇 번지에 계신데? 어느 도시에 계신데? 어느 교회에 계신데?” 이러면 말문이 막히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성경 안에 계십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들이 있고 그 사건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 의미를 이 세상 판에 반복시킴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겁니다. 후딱 지나갔지요?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성경 말씀 안에 나타나시고 성경 말씀은 곧 사건이 되어서 이 땅에 흔적을 남기시고 그 사건의 흔적을 남길 때 사건은 과거사건이지만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고 그 의미를 반복함으로써 주께서는 반복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해서 “이런 분이 나다. 이런 분이 하나님이다.”라고 증거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그 의미인데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의미도 눈에 안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요. 당연한 거예요. 의미를 놓쳐버리면 사람은 눈에 띄는 것을 신봉하다가 몸 빼앗기고, 돈 빼앗기고, 시간 빼앗기고, 청춘 다 빼앗기는 거지요. 하나님의 의미인데. 그러면 의미를 캐치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옳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일으킨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의미 있는 사건들이 가득 담겨 있어요.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신약과 구약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나누었어요. 구약을 옛날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을 새언약이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눈 겁니다. 신, 구, 말은 다르지만 같은 말이 있어요. 언약, 언약은 같은 말입니다. 언약, 언약은 같은 말이니까 언약을 연결시켜버리면 하나님께서 지금 반복해서 의미를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반복되는 그 반복의 의미를 우리가 캐치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에요. 반복되고자 하는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이 따로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담겨 있는, 약속 안에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언약이 반복되어 있는지 아니면 시답지 않은 것이 반복되어 있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것이 새언약과 관련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반복시킨 진짜 의미고 새언약과 무관하게 비켜 지나가면 그것은 엉터리계시고 그런 겁니다. 그러면 새 언약은 뭐냐? 새언약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요. 왜? 세상 사람들은 인간만 생각하기 때문에 모르잖아요. 그런데 천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의미 있게 반복하는 것은 십자가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능력으로는 십자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지혜롭다는 말을 하려면 “다 같이 지혜롭다.” 이렇게 해도 되는 문제를 가지고 “우리는 미련하고 너희는 지혜로워라.”라고 하는 말은 “너희들은 우리가 없었으면 어리석은 자인데 이제는 우리로 말미암아 너희가 지혜롭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는 주님 안에서 미련하게 되어도 여한이 없다. 우리는 미련하게 되어도 괜찮아. 너희만 지혜로우면 돼.”
그래서 그 말은 “그리스도 없으면 너희들은 지혜롭지 못할 뻔 했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없었으면 너희는 지혜고 뭐고 진리도 아무것도 모를 뻔했다는 그 말입니다. 너희 잘되기 위해서 우리 사도가 있다는 겁니다. 더 어렵게 말해서 우리 사도가 없었더라면 너희라는 것도 없는 존재라는 거예요. 너희라는 것이 없던 거예요. 사도 있음이 없던 너희도 새로 발생이 되고 아예 사도가 없으면 천국 갈 너희도 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없던 구원받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순서가 너희를 먼저 만든 것이 아니고 사도부터 먼저 사도되게 만들어서 없던 사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여파로 없던 성도들이 있는 성도들로 너희들이 새롭게 발생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너희들은 왜 스스로 성도될 수 없는가? 너희들은 사람만 고려하지 천사나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는 그것이 일상생활이기 때문에 그래요. 언제 우리가 천사한테 관심 있었습니까? 관심 없어요. 천사라고 하면 그저 요정, 예쁜 요정 같은 그런 것, 크리스마스 때나 잠시 눈에 띄는 그런 것, 숲속에 사는 것, 그것도 소나무가 아니고 전나무숲속에만 사는 예쁜 요정, 키는 약 36내지 38센티 정도, 예쁜 옷 입고, 그런 것만 자꾸 생각하지 정말 천사가 있는지 우리는 몸에 와 닿지를 않지요. 와 닿지를 않는 것을 하나님은 사도를 통해서 와 닿게 하는 겁니다.
사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이제는 너희 사건이 되어서 사도들만 지혜롭게 십자가를 알게 된 그 현상, 그 결과가 이제는 몰랐던 너희들도 십자가를 알아서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그 십자가 알아서 뭐 할 건데?”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처음에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했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지금은 십자가 알아서 뭐 할 건데? 십자가가 뭔데? 이렇게 주제가 바뀌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신약성경에 하나님을 유일하게 하는 반복된 의미의 흔적인 겁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글로바라는 제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별 볼일 없게 된 겁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다가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돌아가셨으니까 별 볼일 없어요. 에이, 하고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그냥 내려갑니다. 내려가는데 누가 자기일행에 따라 붙었어요. 어떤 아저씨가 따라붙었다는 말이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따라 붙어요. “어디 갑니까?” “엠마오로 갑니다.” “같이 갑시다.” 그래서 엠마오로 같이 가면서, “아저씨는 엠마오에 무슨 볼일 있는 모양이지요?” “예, 뭐, 하여튼 같이 갑시다.”
계속 가면서, “예루살렘에서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메시아인줄 알았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예루살렘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 볼일 찾아서 가자. 다 없던 일로 치자.’하고 내려가는 중이오.” 하니까 그 사람이 막 화를 내면서 “분명히 성경말씀에 메시아가 오시고 고난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했잖아요. 성경에 있는데 왜 성경을 더디 믿습니까?” 막 나무라는 거예요.
낯선 사람이 나무라니까 ‘나이가 들었나? 왜 자꾸 잔소리가 많아?’ 하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막 나무라면서 “왜 그걸 더디 믿습니까? 그분이 죽었다가 다시 살줄을 왜 믿지 못합니까?” 하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그것이 비정상이지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그래도 성경말씀에 메시아는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메시아를 믿으세요.” 싸우는 것인지 동행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 식사하러 갔는데 주께서 뿅, 하고 눈을 뜨게 해주니까 세상에, 그 이야기한 당사자가 바로 예수님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예수님입니다.
놀래서 그 사람이 왔던 길을 유턴해서 도로 예루살렘에 가요.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이 숨어서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으니까 제자들한테 알려줬습니다. 글로바는 열두 제자에 포함되지 않아요. “주님이 살아나서 나와 만났다.” 하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미쳤나?” 해요. 미쳤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믿지를 않아요. “환장하겠네.” 본인은 만났는데 믿지를 않는 거예요. 나중에 제자들이 숨어 있는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서 “잘 있었느냐?” 하고 그제야 옵니다. 글로바에게 먼저 나타나고 열 두 제자에게 다음에 나타나요.
“너희는 왜 내가 전한 말을 믿지를 않느냐?”라고 나타나요. 그 열 한 제자가 나중에 열두 사도가 되는 겁니다. 사도라는 것은 이게 미친 사람들이에요. 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과연 계실까? 천사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라고 할 때 우리 쪽에서 출발하게 되면 그것은 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무리, 열 두 제자를 사도로 만들어버려요. 거기에 나중에 사도바울까지 포함이 되지요. 사도직이 원래 없는데 사도로 만들어버렸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만든 거예요. 예수님이 직접.
사도라는 말은 그 배후에 그냥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냥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죽었다가 성경에 약속한 대로 약속, 언약, 언약하신 대로, 약속한 대로, 사흘 만에 살아난 그 분이 사도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가 사도된 것은 본인의 의사도 아니고 뜻도 아니에요. 이것은 막무가내에요. 그냥 사도가 돼야 돼요. 사도가 되어야 하듯이 사도로 말미암아 어떤 일단의 무리가 성도도 아닌 것이 성도되어야 되는 그 다음 순서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없던 성도들이 생겨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사도가 교회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도가 사람들에게 갑질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사도는 뭔가 상실한 사람이에요. 읽어버린 사람,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무엇을 박탈당했느냐 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의 눈에 띄는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전부다. 천사 같은 것은 신경 안 써도 돼.”라고 장착되어 있던 보통 평범한 보통사람의 삶을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누구한테?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으로부터 박탈당한 사람이에요. 글로바도 마찬가지에요.
호기심에 예수님 그냥 따라가다가 예수님 죽고 나서 별 볼일 없다 싶어서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괜히 주님 따라 붙었다가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된 동시에 기존에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 인생관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그것을 빼앗기고 상실당한 사람입니다. 그 빼앗기고 상실하고 박탈당해야 된다는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 속에 있는 반복된 의미가 반드시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자, 설교 안 들은 것으로 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사람들 관심 없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사람뿐인데 하나님을 알아서 뭐할 건데요? 관심 없어요. 교회와도 관심 없어요. 교회와도 헌금 통에 이 헌금, “오, 신난다.” 이거 관심 있어요. 하나님에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천사를 들이밀면서 바로 그런 식의, ‘돈 있으면 되고 사람 있으면 되고 그게 교회고 그렇게 그냥 사는 거야.’ 라는 것을 통째로 박탈당하게 하고 그것을 상실케 하는 그 작업, 그것이 거기에 뭔가 뻥 뚫려야 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사도의 직을 이해 못하는, 사도와 같은 맥락의 반복된 하나님의 작업이 없는 사람이 돼버려요.
사도도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입니다.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그냥 별 볼일 없어요. “예수? 이제 끝났어. 나는 엠마오로 갈 거야.”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를 하나의 사람으로 본 거예요. 내가 너무 솔직했습니까? 예수를 그냥 하나의 사람으로 본 거라니까요. 사람인 예수를 믿은 거지요.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고 나한테 뭔가 도움 줄 것 같아서 예수를 믿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통째로 완전히 깨져야 돼요. 내가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우선이고 나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명하고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되고 새로 만들어져야 될 존재가 된 것이라는 그것, 사도에게 먼저 그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이게 언약 적의미의 반복이에요.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반복된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기존의 것을 모두 빼앗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이 신약의, 아까 본 누가복음 24장에만 있는가? 아니에요. 출애굽 할 때 유월절 날 그 날 밤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여러분이 잠시 이 뜻이 무엇인가를 저하고 같이 생각해 봅시다. 출애굽기 12장 12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이것은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이 어려워요.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이게 무슨 뜻인지.
애굽의 신이 신장이 180이고 몸무게가 얼마인지 그런 것이 나옵니까? 엎어놓고 곤장을 치든지 회초리로 때리든지, 이것이 우리가 아는 벌 내리는 방법이거든요. 어떤 덩치, 어떤 실체가 있고 실체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때릴 때 “매 맞고 있네? 벌 받고 있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지혜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미련하지 않다고, 지혜롭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신은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분의 종아리를 어디서 찾습니까? 보이지 않는 엉덩이를 어디서 찾지요? 신에게 벌을 내린다니 이것이 무슨 말이지요?
신을 죽 불러 세워서 “야! 애굽 신들 나와. 1번 신, 2번 신, 나와! 손바닥 내.” 때려야 실감나잖아요. 하나님이 나타나서 때찌, 때찌, 하시고 이래야 실감나는데 하나님도 안보여, 애굽의 신도 안보여.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의 신들에게 벌을 내린다 하니까 우리는 감을 못 잡아. 감을 못 잡으니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뚝 떨어져 나간 느낌. 제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하게 알지 못한 느낌. 그런 느낌이 들면, ‘에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 수준으로는 안 되겠다. 몰라도 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지요.
하나님은 분명히 중요해서 이런 말을 했거든요. 애굽의 모든 신들에게 벌을 내린다고 할 때 신을 어떻게 벌 세우냐는 말이지요. 학생들 죽 앞으로 불러 세우듯이 세워놓고 “손바닥 내.” 이렇게 벌을 내리시느냐는 말입니다. 신에게 벌을 내리는 방식이 그 뒤에 나옵니다. 그 뒤가 뭐냐 하면, 애굽의 왕궁에서부터 모든 가정의 맏아들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누나 있고 밑에 남동생이 있으면 그 동생이 맏아들이에요. 어쨌든 간에 맏아들 있는 집안은 다 조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인데 히브리인들도 각 가정마다 아들이 있을 수가 있어요. 확률 상 많아요.
어쨌든간에 애굽에 살고 있던 애굽의 장자나 히브리인의 장자나 모든 장자는 다 죽여 버립니다.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고 있느냐 하면, 애굽의 신들에게 벌주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방법은 뭐냐? 거창하고 덩치가 큰 신이 와서 “꿇어앉아!” 이런 것만 자꾸 연상을 하는데 실제로 애굽의 신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주는 방식이 신을 때리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때리는 거예요. 사람이 갖고 있는 뭘 때리는가? 사람의 혈육을 끊어버립니다. 히브리 장자는 안 죽었다고 하는데 히브리 장자도 사실은 안 죽었지만 사실은 이미 죽은 자에요.
왜냐하면 그 히브리인들, 문설주에 피 발라서 살려낸 그 맏이는 그 사건 후에는 더 이상 그 집안의 장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된 아들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것은 내것이니라.” 죽여서 가져가나 그냥 살려서 가져가나 빼앗기기는 마찬가지거든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할 때 특징이 있어요.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결코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혈육으로 전달된, DNA유전자로 전달된 그것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왜 있는가? 인간은 여호와가 참 신인지 아니면 다른 신이 참 신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혈육적으로 이 땅에서 자식을 배태하고 생산하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사를 고려해서 세상을 보자는 거예요. 천사를 고려해서. 천사를 집어넣고 세상을 보자는 겁니다. 그 때 장자를 죽였던 것이 하나님의 천사에요. 천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천사가 활동하는 영역을 우리는 인간들이 활동하는 영역으로 오해했던 거지요. 그저 내 자식 잘 되면 되고 우리 가족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순간 뭐가 빠져나가는 겁니까? 천사가 날라 가버리고 하나님의 활동영역이라는 것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살아도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밥 먹고 살다가 늙어죽으면 그만이겠지.’ 이게 끝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신들의 세계라는 겁니다. 애굽의 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애굽 입장에서는 맏이가 있어서 이 맏이가 다음에 자식을 낳고 그 다음에 또 자식을 낳아가지고 인류가 계속해서 단절되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어떤 박탈이나 상실 없이 계속 멸망이나 끝을 보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 인간을 그렇게 해주는 그런 하나님과 그런 인간의 세계가 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애굽의 신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그게 신인 줄 아느냐? 아니야.” 진짜 신은 그 신이 하는 방식, 혈육을 끊어버리고, 절단시켜 버리고, 그것을 죽은 자로, 자식을 얼마를 낳든지 간에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 그게 여호와 하나님, 참 신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죽는 것을 싫어하지요. 무서워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 죽음을 현실화시킵니다. 죽음을 깔고 세상을 보라는 겁니다. 왜? 하나님마저 그 죽음에 장차 가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죽는데 네가 뭔데 안 죽나?” 그겁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게 약속이에요. 그게 죽음의 의미를 반복시키는 겁니다.
아까 한 그 글로바 이야기를 다시 해 볼까요? “에이, 예수님 죽었단다. 별 볼일 없네.” 우리는 항상 끊어짐과 단절, 죽음 없이 살아 있는 것끼리 사는 이것이 우리의 전부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성경말씀은 뭐냐? 메시아가 오게 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 그것이 계속해서 봤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글로바란 친구는 믿지를 않았어요. 믿을 수가 없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전부기 때문에. 죽음은 어디 있느냐 하면, 저 도시 바깥에 가면 공동묘지에 있어요. 공동묘지에 가면 죽은 사람은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나가 있어야 해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따로 적체되어 있어야 돼요.
무시해도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세계라 하는 것은 무시해도 되는 존재, 그걸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는데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 그게 유대사회에서는 세리와 창기와 그리고 강도였습니다. 너는 죽음과 가까이 있으니까 산 사람 속에 끼지 말라는 거지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둥병이 있을 때 문둥병을 진 밖에 내놓았습니다. 저주 받았다고. 그런데 그 저주 속에서 생명이 나오고 저주 속에서 천국이 나오고 그 저주 속에서 메시아가 오신다면 우리는 그동안 세상 잘못 본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서 찾습니까? 너도 같이 죽었다가 같이 살아나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면 됩니까? “가만있어. 내가 찾아갈 테니까.” “어떻게요?” “언약의 의미를 반복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약속되어 있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부활하신 그 부활 속에는 죽어도 산다는 그 능력이 포함되어 있어요. 죽어도 산다는 그 능력을 가지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는 것만 생각하는, 그래놓고 자칭 지혜롭고 박사니 석사니 해가면서 산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요즘 우리나라에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 너무 이공계에 치중하지 말고 교양을 쌓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인문학, 철학, 역사, 언어학, 예술, 그게 뭔지 알아요? 그 목적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산 사람이나 행복하자. 그것밖에 없습니다. 행복입니다, 행복. 꾸베아저씨가 어쩌고저쩌고, 전부 다 행복이에요. 그래놓고 그들은 그것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걸 똑똑하다고 합니다. 바보에요. 바보입니다. 늙어서 안 죽습니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요. 결국은 죽잖아요. 죽을 때 ‘내가 왜 죽지?’ 모른다고 한다면 죽는 시점에서 모르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내내 몰랐던 세월이었고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죽는 이유, 왜 죽는지도 모르고.
사람이 왜 죽는지 알아요? 하나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죽어요. 하나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하나님이 먼저 깊은 물에 풍덩 빠졌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거예요. “나와 함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풍덩 뛰어들어라. 그래야 네가 살 것이다.” 자식을 빼앗겨봐야, 자식을 빼앗겼을 때 비로소 “네 자식, 내 자식 찾지 말라. 네가 발견한 것은 네 잃어버린 자식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날 때 더 이상 잃은 자식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아주 되바라진 이야기를 하지요. 명절에 사람이 많았어요. 어떤 통계에 보면 백만 명이 모였다는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사람이 그렇게 득실거렸는데, 그 때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고 어린 소년을 데리고 그 명절에 참석했다가 아들을 잃어버렸어요. 무려 사흘 동안 찾아다녔습니다. 사흘이면 무려 72시간이에요. 72시간을 찾았으니 말이 72시간이지 3년 세월보다 더 아픔이 있었을 거예요. 찾고 또 찾고 그 인파속에서 얼마나 찾았겠어요. “예수야! 예수야!” 얼마나 찾아 해맸겠습니까?
예수님이 성전에서 어른들과 성경말씀 이야기한다는 소문을 듣고 허겁지겁 가니까 과연 거기 있었어요. 아빠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너무 답답해서 “예수야, 사흘이나 찾았다. 왜 이렇게 속을 썩이느냐?” 하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아주 되바라진 말씀을 하셨지요. 아빠가 “내가 네 아버지야.” 하니까 “아버지요? 내 아버지는 여기 있는데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인데?”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를 찾아야지 당신의 자식으로서의 아들을 왜 찾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찾으면 거기 으레 거기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데.” 그런 뜻입니다.
“왜 아버지 어머니는 천사가 빠진 현실만 생각합니까? 왜 눈에 띄는 사람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것이 전부라고,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만 생각합니까?” 그것만 생각하니까 남 눈치보고 남 의식하고 출세했니, 성공했니, 실패했니, 그것만 생각하고, 그만 죽어버릴까, 살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왜 천사를 고려하지 않습니까? 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 약속, 하나님의 이 일관된 약속을 왜 놓쳐버립니까?”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십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은 지금 반복된 의미 속에 있습니다. 그 반복된 의미는 뭐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면서 가져왔던 모든 세상 현실관을 매일같이 삭제시키고 강탈해가고 빼앗아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들을 빼앗겼지만 그 상실된 맏이의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이 거기에 콕 박힌 반면에 애굽 사람들은 아들만 덜렁 날리고 그 빈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내 현실이 빼앗긴 그 자리에 주님의 약속으로 꽉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사도의 임무고 사도의 역할입니다.
사도라 하는 것은 좀 안다고 갑질하는 게 아니에요. 복음 안다고, 십자가 안다고 “너 나한테 배워라.” 하는 그런 사도가 아니에요. 사무엘하 23장 15절에서 17절 보니까 다윗이 목이 말랐던 모양이에요. 다윗이 그냥 물이 아니고 베들레헴의 물을 먹고 싶었던 거예요.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그 때 베들레헴은 적군이 점령하고 있는데 왕이 달라고 하니 자기 목숨을 내놓고 무사히 물을 길어왔어요.
그 때 다윗이 “아하, 내가 갑질을 했구나. 이게 주의 뜻이 아닌데.” 뭐냐 하면 이겁니다. 사도는 자기 사도직이 강탈될 때 사도가 되는 거예요. 사도직을 유지해버리면 갑질을 하는 겁니다. 다윗이 이걸 알아요. 지도자란 지도자 값을 하는 것이 지도자가 아니라 내가 지도자라는 그 의식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강탈당하고 빼앗기고 그 빼앗긴 빈자리에 주님이 직접 지도자노릇을 해야 되는데 천사는 안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이고 눈에 보이는 사람만 보이니까 “너는 내 부하니까 물 가져와.”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그걸 후회하면서 그 물을 먹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생명 걸고 가져온 물을 어떻게 마시겠느냐?” 이게 사도에요. 이게 사도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어떤 목사가 허니버터칩을 먹고 싶다는 식의 발언을 설교시간에 했더니 세상에, 생명을 걸로 그 허니버터칩을 구해온 분이 계셨어요. 지난 수요일 날. 저는 그걸 홀라당 혼자서 먹었어요. 맛있던데요? 갑질 했습니다. 허니버터칩으로 갑질 했어요. 생명 걸고 구해온 건데.
소유성,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이것은 내 세계라는 것, 이것 빼앗겨야 됩니다. 사도는 사도직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빼앗겼습니다. 물론 본인이 스스로 내놓은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사도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너는 사도하다가 죽어라. 사도직도 네 것이 아니야. 네 소유가 아니라 내 소유야. 너는 내 소유의 사도직을 네가 하는 거야. 갑질 하지 마.” 이런 식으로 죽이기로 작정해 놓으니까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은 복음을 알게 되었고 자기는 같이 덩달아 잘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쓰레기처럼 되어버리고.
이게 바로 사도의 일생 전체가 박탈당하고 빼앗기고 상실당하는 그러한 사도의 인생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진짜 계시에요. 거짓신이 아닌, 애굽신이 아닌, 진짜 여호와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가 소유하려는 것을 도리어 가져가시는 하나님, 나중에는 우리 목숨까지 가져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아이고, 어쩌나, 어쩌나?” 할 때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잖아.”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너는 죽어도 괜찮은 거야. 너는 이미 그런 관계야. 그런 신분이야. 그런 자리야.” 이게 사도의 자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쁘다 보니 하나님이고 천사고 관심 없고 어쨌든 밥 먹고 살아남는 것이 우리의 주 관심사, 그것뿐이었습니다. 주여, 그것이 가짜 신이고, 가짜 예수고, 가짜 성령이고, 가짜 복음인 것을 우리는 미처 몰랐습니다.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로 하여금 죽어도 상관없다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시키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영생인 것을, 약속대로 되는 일인 것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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