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전서24강-하나님의 판단 (고전4;4-5) 이근호 150118

아빠와 함께 2015. 1. 20. 08:02

하나님의 판단(고린도전서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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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5-01-18 13:33 
하나님의 판단 

2015년 1월 18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4:4-5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본인들의 판단 속에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시켜보려는 의도와 요청이 강렬합니다. 이러다보니 타인의 판단에 대해서 강한 저항감을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면서 인간들이 감당 못할 지점을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안’입니다. 즉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 정신은 아직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쪽의 일방적 조치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만들어진 존재라는 입장에 놓여 있는 인간들로서는 ‘지금 내가 있음’을 스스로 지워버릴 수가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참여할 수가 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만들어진 것이 만들기 전의 창조자의 입장의 자리에 끼어들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항상 실패합니다. 원리 창조하심에 부합해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이러한 실패성을 버리지 않고 도리어 확대시켜 나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이 실패에 함께 참여하십니다. 

이는 인간들의 판단에 뛰어드신다는 말이 됩니다. 인간들의 판단은 에덴동산에서 따먹게 된 선악과 과실의 효과를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선, 그리고 악 이처럼 대립되는 가치를 체제를 정신에 장착하고서는 자신을 선한 편에다 배치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면이 판단하는 가운데 밖으로 보여주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구원되기 위해서는 나는 악해서는 아니되고 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면 이 말씀을 가지고 선과 악을 나누게 됩니다. 살인하지 않는 것은 선이 되고 살인하는 것은 악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어떻게하든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왜 그러고 싶을까요? 그것은 평생 살인하지 아니하면 자신은 선한 자가 되고, 설마 하나님께서 선한 자신을 악인들이 가는 지옥에 집어넣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을 갖고 있게 됩니다. 이는 선한 일을 도모해서 자신을 선한 자로 확립하여 스스로 악에서 선한 쪽으로 자신을 구원코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이 자연스러운 생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뭔가 빠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3+5=8이라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3+5=7 은 틀렸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3+5=8에서 중보자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세상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3+5=8이라는 문장 속에서는 중보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수식이 정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맞다, 틀렸다를 결정하면서 중보자의 존재성을 집어넣지 않고 판단을 내려버린 겁니다. 옳고 그름을 본인이 내린 것으로 확정짓는 투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께서 오시기까지’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주께서 인간들의 오늘 삶을 최종 목적을 위한 과정들로 보십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상황들이 그때그때마다 주님의 작용에 의해서 다시 고쳐지고 다시 정돈되는 처지에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모든 판단은 시간에 따라서 재조정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보임에 따라 목적과 관련된 과정으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성공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재 실패도 역시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간 과정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들이 내리는 모든 판단은 전부 선악과적인 판단이라서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거절 당할 인간들의 행함입니다.  

인간의 생애라는 것은 주신 분이 은혜로 주신 인생입니다. 즉 내 인생이 아니라 누가 빌려준 인생입니다. 이 인생을 은혜로 바꾸는 작업에 참여된 자들은 그 인생 여정을 통해서 주님의 이 땅의 삶에서 당했던 수모와 억울함과 오해받음과 비난받음을 함께 당해야 합니다. 그냥 돌려주는 게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복음은 인간들이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성사될 일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타인들의 비판과 평가가 의인을 더욱 더 죄인으로 몰아세우게 됩니다. 이 타인들의 평가가 선악체제에서 날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준해서 일방적으로 판단한 ‘목적 달성’은 인간들의 교만함을 드러냅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전부 내부적으로 끌어오르는 ‘구원 요청’에 근거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학생을 스승을 구원자인양 내심 기대하게 되고, 직원들에게 있어 사장님도 그렇게 보고, 아내에게 있어 남편의 입장도 아내를 구원할 구원자처럼 기대하는 대상이 됩니다. 즉 남이 아니라 우선 본인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취하는 태도들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14:26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참된 판단이란 최종적인 판단을 터치하고 되돌아온 판단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따로 자기 선악체제에 의한 목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감과 여유를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수모당하심이 능력이 되어 그 능력 안에서 작용하는 은혜의 사람이라면 항상 주님의 무한판단에 관심 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주님의 무한판단은 매사에 있어 “그래서 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죽음 직전까지도 거지로 환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본인의 행위를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즉 “이러이러 행동이 원인이 되어 너는 평생 거지꼴을 못 면하고 있다”고 누가 만약에 비난한다면, 이 비난받은 거짓 나사라는 예수님의 억울함에 참여된 자로서 이미 구원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를 향하여 선악체제에부터 날아오는 비난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선악체제에 의해 완벽을 하고자 한다면 이는 본인 구원 자체가 최종 목적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과는 별도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악마적 발상입니다. 은혜로 받은 생애를 예수님의 억울함을 담아 돌려드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공이 교만으로 이끌고 실패가 은혜로 이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5-01-19 16:13 
24강-고전 4장 4-5(하나님의 판단)150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4-5절입니다. 신약성경 267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4:4-5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바울은 성령 받았지요. 성령 받았다.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받지 않은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나야 되는 겁니다. 어떤 차이가 나냐 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만든 큰 구성 속에, 조직 속에 본인을 두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확정 나고 결정나버린 큰 구조 속에 자기가 놓여 있는 반면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돼요. 정말 피곤합니다. 암담하지요. 내일 되면 나아질까, 모레 되면 나아질까, 십년 후면 괜찮을까,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본문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는 거대한 기구 안에, 구체안에, 공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이미 확정된 어느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해요. ‘예수 안’이라고 하니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 들지요. 같은 사도인 사도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2절부터 보면,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언젠가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본 모습 속에 창조물이 들려 줄 수 있는, 내 뱉고 있는 모든 소리는 예수님의 소리 안에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 안에 창조가 있어서 창조의 소리, 새가 짹짹거리고 식물이 자라는 소리, 동물이 자라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우리의 숨소리, 생명의 심장 뛰는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거지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체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미 모든 것이 완료가 되고 확정이 나고 결정이 난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자신감이에요. 그 자신감, 성령 받은 사도의 자신감입니다.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그 과정밖에 없다.” 내가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수상하거든요. 내가 은근히 뭔가 노리고 있다는 것이 되는데 결과와 목적을 잘라버리세요. 잘라버릴 때 우리는 누구 안에 있는 것이 되고 성령 받은 모양, 그 티가 나는 겁니다. 목적이라 하는 것은 우리소관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확정된 상황 속에서 거기까지 가는 그 과정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주가 오실 때까지”입니다. “주가 오실 때 까지”를 연거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가 오실 때까지 우리는 과정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설교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것이니까 들으셔야 해요. 뭐냐 하면, 주가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항상 재조정되고 정리가 돼요. 우리의 과거-미래-현재가 내일 되면 다시 조정되고, 모레 되면 다시 조립되고, 한 달 뒤에는 재 정돈이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트랜스포머라고 하지요. 자동차 되었다가 로봇이 되었다가, 이렇게 형태가 자꾸 바뀌는 겁니다. 



오늘 생각했던 세상과 한 달 뒤의 세상이 다시 정리가 돼요. 오늘은 실패라고 여겼는데 일주일 뒤에는 ‘아, 그거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 라고 오히려 성공의 쾌재를 부릅니다. 그러다가 한 달 뒤에는 다시 ‘아, 내가 그 때 착각을 했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과정이거든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만 하면 되었다.’고 여겼던 것이 실망으로 끝나고 ‘나는 죽었다.’ 했는데 이게 웬 횡재가 되고. 그런 식으로 자꾸 수정이 일어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가 “판단하지 말라”는 것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모르니까. 그리고 다 모른다는 말은 우리가 믿을 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믿을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몰라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자신감이에요. 



인생이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고 그렇게 꼬이더라도 무서워하거나 놀라지 말라는 거예요. 인생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인생이 너를 속이더라도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속임을 당하도록 행세를 꼭 그렇게 해요. 멋도 모르는 것이, 개뿔도 모르는 것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개뿔도 모르면서 촐랑대다가 주님한테 속임 당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의 여유와 자신감이에요. 우리가 실패할 때, 우리가 실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만의 노선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났다, 성공했다, 해 버리면 우리는 이미 넓은 길로 가고 있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확정지은 이상은, 그 가운데서는 우리 나름대로의 어떤 독자적인 목표와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민수기 강해 중에 나왔지요. 르우벤지파와 갓지파, 므낫세반지파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지레짐작, 사막생활 오래하다 보니 저 푸른 초원이 그리웠던 모양이지요. 갑자기 약속의 땅 근처에 왔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면서도 자기의 목축에 적당한 목양지 같은 들판이 보이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거기서 머무르고자 했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모세가 때치, 하고 아주 심하게 화를 냈어요. 하나님은 네 목적 달성해주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할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한 겁니까? 주님이 공이고 우리가 주님 안에 들어 있는데 우리가 공이고 우리가 주님을 집어넣으면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거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르우벤지파, 갓지파한테 이야기하지요. “네가 그 땅을 정 차지하고 싶거든 일단은 그 땅이 없다고 치고 네 목적 말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서 약속대로 이 이방족속을 내 보내고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이 함께 사는 이 전쟁에 충분히 참여하고 다 끝나고 난 뒤에는 다시 네가 원하는 그 땅, 초입에 있던 그 땅을 줄게.”(민 32:29) 이렇게 했지요. 



그 이야기 하면서 다른 백성이나 모세가 유념한 것이 있어요. “네가 네 땅 차지할 때 따로 거기서 여호와의 제단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열 두 지파가 떨어져도 제단의 장소는 이미 지정되어 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지점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따로 제단 만들어서 네 장소에서 네 하늘을 보고 네 땅에서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하늘이 있다고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이 아니고 땅이라고 다 네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땅과 하늘이 확실하게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어졌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음을 표시할 수 있는 땅, 그 지점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구약의 중보자적인 의식이에요. 중보자적 의식. 하나님의 매개, 하나님의 중간적인 역할 없이는 우리는 생존에 불과하지 생명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생존에만 매달려 있으면 필히 이것은 교만으로 끝나요. 잘살아도 교만하고 못살면 못사는 그 나름대로 부자나 재벌 3세를 또 그리워하고. 드라마가 그거 아닙니까? “주여, 나한테는 왜 저게 없습니까? 저거 주시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것은 이미 교만노선에 포함된 거예요. 



늘 우리는 실패하고 실망했을 때, 사실은 실패하고 실망했을 때 우리가 그 전에 미처 쳐다보지 못한 것에 눈 돌리게 하시는 주님의 일의 성사고 성공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우리가 일이 잘 안될 때 성도는 행복해야 됩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간단히 말해서, 이 땅에서 과정 속에 살면서 항상 일이 뭔가 비켜가고 있는 현상을 몸으로 느끼게 해요. 자꾸 뭔가 일이 비켜 간다는 거예요. 이걸 원하는데 딴 게 나오고 그거다 싶으면 또 딴 게 나오고. 뭔가 자꾸 비켜가면서 간격을 만들어내요.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주지 않고 원하지 않은 것을 주시고. 내가 기대한 상황은 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 상황이 찾아오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라는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과 합세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너는 종족이 다르다는 겁니다. 종내기가 다르다. 너는 그 사람들하고는 인간자체가 다른 족속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것과 안 받은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거든요.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라도 오늘 밤에 낙원 가게 되어 있고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부자라도 그것은 그 부자라는 것이 지옥으로 몰아넣는 과정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이렇습니다. 복음 아는 것은 혼자서 도 닦는다고 복음 아는 것이 아니고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대인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대인관계에서 남으로부터 판단을 받고 평가를 받아보라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는 울컥하지요. 울컥 한다고요. “너는 나를 오해했다.” 살면서 부부사이든지 뭐든지 제일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오해입니다. 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되는데 오해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오해를 받으면 억울한 일이 생기지요. 그 억울함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과정 속에서 살면서 우리에게 담고자 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이에요. 



아버지가 의인이신 주님께 지시한 것은, “너 의인이지.” “의인입니다.” “저주받아라.” 이게 복음이거든요. 여기서 내 뜻대로 하는 것, 의인이 의인다운 복을 누리는 것이 예수님 뜻이라면 아버지 뜻은 뭐냐? “네가 의롭나?” “의롭습니다.” “그렇다면 저주 받아라.” 왜 의인인데 저주 받습니까? 이게 인간의 머리로서는, 이 세상 인간의 종교로서는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잘 했는데 왜 매를 맞지요? 이것은 인간들이 끄집어내는 하나님을 다 묵살해서 사기이고 엉터리인 것을 고발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이 실은 우상 믿었다는 이야기에요. 온 교회 온 성당이 하나님 믿잖아요. 그건 절에 가서 갓 바위 믿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성실하면 복주고 게으르면 저주하는 것, 그런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교리입니다. 나쁜 짓 하면 벌 받고 착한 짓 하면 복 받는 것, 그게 인간들이 만들어낸 종교 안에 있는 교리라는 말이지요. 그걸 뒤집어버리는 말입니다. “착하니까 벌 받고 나쁘니까 복 받아라.” 이걸로 뒤집어야 돼요.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대인관계에서 복음 나와요. 집에서 도 닦으면 복음 안 나옵니다. 도 닦는 만큼 자기는 훌륭한 사람 되고 의인되고 자기정당화 되어버려요. 자기 처지에 대해서, 상황에 대해서 항상 옳은 판단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남을 만나야, 특히 오해할 수 있는 남을 만나야 우리는 뭔가 패배감을 느끼고 이 땅에서 성공이라 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를 보니까 주께서 그 전철을 밟았다는 사실, 주님의 공생애자체가 그 전철을 밟은 거예요. 신앙생활을 우리 힘으로 한다고요? 턱도 없는 소리에요. 우리는 백번이고 때려치웠습니다. 집어치웠어요. 열심히 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는 그런 종교를 우리는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독교와 그런 교회를 좋아하고 있어요. 왜? 납득이 되니까. 



어떤 점에서 납득이 되느냐? 모든 귀한 것을 내 안에 다 담겠다는 이 나의 본성이 있잖아요, 그 나만 잘되면 된다는 본성에 부합이 되기 때문에, 일치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교회나 종교를 좋아하는 거예요. 열심히 했더니만 그 대가가 나왔다. 얼마나 납득이 잘 돼요? 이것은 얼마나 이해하기 쉽습니까?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안 한 사람이 더 잘되고 열심히 한 나는 꼴아 박고 사기 당하고, 보증서서 몇 억 날리고. “주여, 왜 이러십니까? 주여, 미쳤어요? 왜 이래요? 주님이 일처리 잘못한 것 아니에요? 사고처리 잘못한 것 아닙니까? 서류결재 잘못해서 지금 일이 꼬인 것 아니에요? 장부를 보세요. 내가 열심히 했다니까요, 내가! 쟤 말고 내가 열심히 했는데 왜 나 말고 복이 저리로 갑니까?” 



모든 것이 뭔가 뒤틀리고, 삐걱거리고, 기대한 목적과 목표에서 자꾸 어긋나게 되고, 그렇게 될 때 내 판단자체에 이미 비 복음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눈치 채게 만드는 겁니다. 나는 끝까지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중간에 있으면서 마치 끝을 다 가진 것처럼 해서 자기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버리면 뭐가 빠지는가, 중보자가 빠져요. 오늘 본문대로 “주께서 오실 때까지”가 자꾸 빠져버려요. 누굴 안 기다립니다. 내가 똑똑하고 내가 다 알아버렸는데 뭘 기다려? 



사도바울이 주께서 자꾸 오신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순서가 이런 거예요. “네가 혼자 있을 때는 다 알지? 사람 만나봐라. 네가 오해를 받지.” “오해 받습니다.” “오해 받으면 성질나지?” “성질납니다.” “성질나는 너는 이제 죽었다.” 살 기운도 없고 살 능력도 없고 모든 것에 자포자기할 때 그게 탕자모델이잖아요. 탕자가 아버지 앞에 올 때 아버지 곁을 지켰던 큰 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탕자의 과거를 묻습니다. “쟤가 아버지 재산 기생한테 다 날리고 허랑방탕한 인간입니다.”(눅 15:13,18)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의 과거를 묻지를 않아요. 현재 네가 나한테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다렸다는 것이 중요하고. 왜냐하면, 아버지는 탕자의 그런 과정자체가 귀한 거예요. 돌직구로 말하면, 우리의 죄가 그리운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포기하고 제멋대로 사는 그러한 시간들이 귀한 겁니다. 잃어버림이 없으면 뭐가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구원자체가, 구출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은혜가 만들어지지 않아요. 천국은 은혜만의 세계거든요. 



그래서 탕자입장은 이렇습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꾸역꾸역 꾸려나가고, 만들어나가고, 힘들게 조립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미래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빌려준 거예요. 빌려줬으면 우리는 되돌려주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되돌려주는가? 실패작으로 되돌려주는 겁니다. “주여, 저는 이렇게 인생 망쳤습니다. 내 나름대로 안다고 여겼는데 엉망진창입니다.” 시험을 치고 자기를 가르친 선생님에게 점수를 되돌려 주는데, 1번 틀렸고, 2번 틀렸고, 3번 틀렸고, 25문제 맞은 것 하나도 없이 빵점. 이 빵점을 되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다움을 되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 정황에 아주 표준적인 모델로 만들고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네가 왜 추방되어야 되고 네가 왜 힘들여 고생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 때 하나님이 너를 그 추방시킨 취지가 죽지 않고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 몸을 통해서. “추방되어도 추방시킴이 너무나 정당합니다.”라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판단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의 사적인 판단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대인관계를 통해서 복음이 나오게 하기 위함이고 그 복음 나오는 절차는 남들한테 이러쿵저러쿵 판단을 받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이번에 대전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수련회 갔다가 질겁하고 수련회 안 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거기에 누구 판단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밤새도록, 새벽 세시까지. ‘네가 뭔데 내가 너한테 판단을 받느냐?’ 



판단 받는 것이 있어줘야 억울함이 발생됩니다. 억울함이 있을 때 우리는 화가 나지요.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되어 놓고 화를 낸다? 뭔가 삐걱거리지요. 추방당한 취지가 없어져 버리면 화내도 되는데 추방된 것을 항상 마음에 품고 있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주여, 내가 뭘 해도 죄인입니다. 추방되어도 마땅합니다.” 이걸 갖고 있는데 누가 판단한다면 굉장히 기분 나쁜 겁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본인이 스스로 죄인입니다, 할 때는 별로 서럽지가 않지요. 혼자서 “주여, 죄인입니다.” 하는데 그 소리가 새나갔는지 그 소리를 듣고는 그 옆에 있던 집사님이 “집사님, 무슨 죄 졌어요?” 하면 “가만있어! 네가 왜?” 



자기가 죄인임이 마땅하다고 해 놓고는 누가 지적질을 하면 그것은 용서가 안 되지요. 그러니까 본인이 회개하는 그것조차도 자기가 이만큼 훌륭하다는 것을 자랑질하는 하나의 공장이 되고 하나의 행함이 되고 마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의 만남에서 이루어지고 판단하는 가운데서 이 구원이라는 것이 내가 잘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왜? 잘하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그것들이 사실은 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구약에 사사기가 있지요. 사사기의 특징이 뭐냐? 죽 읽어보시면 ……, 아마 오는 8월 수련회는 사사기를 할 예정인데요, 사사기에 보면 꼭 뭔가 배부를 때는 하나님을 안 찾아요. 배부른데 왜 찾습니까? “배부를 때 하나님을 안 찾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내가 나빠요. 왜? 그 말에 여러분은 이렇게 해요. “목사님, 배부른데 하나님을 왜 찾지요? 아쉬운 게 없는데 왜 찾지요?” 사사기가 이야기가 그렇게 시작돼요. 배부른데 안 찾고 있다고 주변에서 누가 공격해 오니까 처음에는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고 온갖 것 다 갖다 바쳤는데 퍼줘도 또 퍼줘도 분위기가 이상하게 자꾸 꼬일 때 마지막 하는 것이 뭐냐? 주여, 라고 붙드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여”라고 부를 때까지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까? 정답을 스스로 알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모든 것이 몽땅 다 달아날 때까지 계속해서 대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주께서 일부러 이방나라 민족으로 하여금 내 백성을 더 패달라는 거지요.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 학부모가 학교에 와서 상담하면서 선생님 만나보고 하는 말이 “선생님, 우리 애, 패서라도 인간 만들어주세요.” 그런다고 진짜 패버리면 고소 들어오지만. 패서라도 인간되게 해 달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안 되니까. 자기가 자기 목적에 만끽해서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드러누워 버리는 거예요. 이제 다 된 거예요. 인간이 하나의 과정인데, 과정에 머물지 않고 그만 그 과정에서 스톱되어 버리고 “여기가 좋……” 하고 있으니까 주께서 깨우는 방법은 “일어나, 일어나! 아직 여기가 다가 아니야. 아직 멀었어.” 다시 주님을 찾게 만듭니다. 



“목사님, 대인관계에서 사람이 서로를 만날 때 어떤 심정에서 만나게 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딱 한 개에요. 구원의 욕구, 구원의 내부적인 요청에 의해서 인간들은 대화를 주고 받게 되어 있어요. ‘저 사람이 혹시 내 어려운 사정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인가?’라고 묻는 겁니다. 아내는 남편을 볼 때 남편을 자기 구원자로 보고요. 회사 사원은 사장님을 볼 때 자기 구원자로 보는 겁니다. 제자는 스승을 볼 때 나중에 나를 출세시킬 구원자로 보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행동과 의식 속에 구원이라는 것이 다 스며있어요.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구원이란 것이 뭐냐 하면, 나를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어떤 것, 그런 버릇이 세상에 있다 보니까 교회 와서도, 교회에서 예수라는 말이 유행이 되니까 ‘혹시 예수라는 분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예수 구원자,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엉터리에요. 이게 전부 다 사기고 엉터리입니다. 사도바울에 있어서 본인이 원하는 구원자는 없어요. 다만 주께서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를 사용할 뿐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이 자기 구원에 실패를 했음을 주님 앞에서 느껴야 됩니다. 



내가 구원받기위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그 모든 것이 매일같이 실패하는 거예요. 그리고 시도한 모든 것은 대인관계에서 억울함으로 나타나고, 억울함으로. 복음 전하려고 하는데 주께서 안도와줄 때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래서 거기에 판단이라는 그 판단을 가지고 네가 나처럼, 또는 주님처럼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받을 때에 이렇게 생각하라는 말이지요. 도리어 주께서 우리가 평소에 무관심했던 ‘주님이 누구신지. 주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거기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타인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찔러주는 거예요. 암시를 해주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목적 중심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간단한 거예요. 없는데서 있게 한 거예요. 없는데서 있게 했기 때문에, 없는데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에 되돌아가야 하는데 현재 있어버린 것을 어떻게 없앨 수가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찾아갈 수가 없어요. 없는데서 있게 된 것, 그 있는 것을 다시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구원자체가 안 되는 겁니다. 구원 자체가 없으니까 유사구원을 가지고 자기목적을 위해서 인간은 자꾸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 거예요. 원래 그 구원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도 되어 있어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자기목숨까지 자기를 미워해놓고 어떻게 자기를 사랑합니까? 내가 나를 미워하는 방식으로 내가 나를 사랑해서 기어이 나를 건져보겠다는 그 마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는 말이지요. 



미워하는 척을 해서 기어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식은 되는데 미워하는 척은요, 그것은 미워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기를 미워하면 너를 건져줄게.”라고 했을 때 이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 주님이 ‘나를 미워하면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주님, 저를 구원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내가 미워요. 나는 내가 구원받는 것도 싫어요.” 이렇게 했을 때 주님께서 “내가 가르쳐 준 정답을 잘 알고 있구나.” 이렇게 나온다면 내 작전대로 되는데, “그래? 진짜지? 지옥 보내마. 네 소원대로 해주마.” 하고 지옥 보낸다면 우리는 “어어? 이게 아닌데. 이런 취지로 한 이야기가 아닌데?” 그러면 주께서 “어디서 얄팍한 수를 쓰고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없는데서 만들었다면 우리는 이미 있는 존재가 되잖아요. 있는 존재에서 아무리 꼼지락꼼지락 해도 없었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있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그 있다는 것이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있는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에요. 성당과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다 거짓말이에요. 그것은 사람들 위로하려고 다 사기를 친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와 말 섞어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조립하고 조작한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사도바울은 우리의 판단, 인간의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겁니다. 인간의 판단은 두 가지가 있어요. 보통판단, 그 판단을 ‘부정판단’이라고 하는데……, 이런 용어가 나오면 또 어렵다. 하여튼 그냥 이런 게 있다고 하고 들으세요. 부정판단이란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모든 것을 판단할 때는, 예를 들어서 ‘이것이 사과다.’ 혹은 ‘이것이 마이크다.’ 하면 인간의 판단은 ‘이것이 마이크다.’ 그 다음에 ‘이것은 마이크가 아니다.’ 둘 중 하나밖에 없어요. ‘이것이 마이크다.’ ‘이것이 마이크가 아니다.’ ‘이것이 마이크다.’ 하는 것을 긍정판단이라고 하고 ‘이것은 마이크가 아니다.’ 하는 것을 부정판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이크다’ 혹은 ‘이것이 마이크가 아니다.’ 할 때 언어로 분석을 해보면 ‘이것……’이 있는데 그것을 주어라고 하고 ‘마이크……’ 하는 이것을 술어(술부)라고 해요. 문법에서. ‘이것은 마이크다’ 할 때 주어와 술부로 나누면 거기서 뭐가 빠지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가 빠져 있어요. 이게 문제입니다. ‘3+5는 8이다.’ ‘3+5는’ 이게 주어거든요. 그 뒤에 술부는 ‘8이다.’ 맞는 것 같지요? 뭐가 빠져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낄 자리가 없네요. 이게 문제 아닙니까? 이게 문제거든요. 이게 진리가 아니에요. 수학자가 지옥 가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중보자가 없어서 그래요. 의사나 판사가 지옥 가는 이유가 중보자가 없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중보자를 넣을 자리가 없는데? 왜? 자기 판단이 옳기 때문에. ‘3+5는 8, 그게 맞지 뭐가 틀렸나?’ 그게 틀렸거든요. 



중보자가 끼어들지 않으면 그게 틀렸어요. 왜냐하면, 중보자는 천지를, 무에서 유를 만들 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동과 판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비춰 나와야 되는데 비춰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비춰 나오지 못하는 그 그리스도를 이 본문을 통해서 비춰주게 만들어버립니다. 어떻게? 인간의 모든 판단을 시비 거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판단은 긍정판단, 부정판단, 그 둘 중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어요.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듣고 인간은 살인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그것이 하나의 명제고 선언이라면 우리는 살인하는 것과 안하는 것을 우리가 판단해 버려요. 이게 문제에요. 그 말씀을 지켜야 우리가 구원받고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 말씀을 지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니까 이것은 살인하거나 안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겁니다. 살인하거나 안하거나. 



그러면 예수님께서 거기다 추가를 해버려요. ‘이게 아주 내 취지를 모르는구먼. 약을 올려야겠다.’ 하고 추가를 해버립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살인하지 말라.”가 확대됩니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미워하지 않거나. “주여, 저는 형제를 미워하지 않았기에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게 대인관계를 안했구나. 대인관계를 통해서 누구한테 평가를 안 받았어. 네가 수련회참석을 안했구나. 지적질을 안받아본 모양이다.” 지적질을 받아봐야 “아, 그 인간은 진짜 보기만 해도 밉다.” 이렇게 나와 줘야 돼요. 미움의 충만, 수련회기간 내내 미움의 충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께서 오신다는 말은 주께서 그 때마다 재조립하고 재정리하는 거예요. 미래가 어떤 줄 모르잖아요. 우리는 현재쯤 살면서 ‘이 정면 괜찮지.’ 하면 미래, 내일 되면 또 어떤 일이 발생돼서 괜찮다고 자부했던 내가 트랜스포머처럼 나라는 인간을 조립을 다시 해야 돼요. ‘그 때 실망했던 것은 사실은 장점이었고 그 때 장점이라고 여긴 그것이 나의 단점이었구나.’ 조립해서 얼추 또 맞춰 들어간다고요. 자기정당화를 하면서. 



그래서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주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성령 받은 티는 내야 되겠고. 성령 받으면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그렇게 목사가 자꾸 이야기하거든요. 본인은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남들에게는 이야기한다고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신앙인가를 티를 내려고 성화론에 입각해서 날이면 날마다 거룩에 거룩,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 필이 꽂혔으니까 날마다 거룩에 거룩을 더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쓰다보니까 상황은 자꾸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미워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지 않으리라.’ 하는데 기억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다 기억을 하면서. 속은 다 썩어가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웃으면서,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연출인데 이게 연극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제가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방법을 이 자리에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궁금해요? 500원 안줘도 됩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방법은 다 죽여 버려요. 다 죽여 놓고 아무도 죽일 사람이 없을 때 비로소 살인할 수 있는 여지조차 없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린 지킨 게 돼요. 



어떻습니까? 제 방법, 괜찮지요? 다 죽여 버려요. 더 이상 살인할 사람이 한 명도 안 남게 해요. 끝까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티를 내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해서 나를 구원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그것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그 생각 외에 달리 안 들어갑니다.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입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그들 뒤를 밟아서 지옥가라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면 말씀 지킬 수 있습니다. 말씀 지키면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이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 책임입니다.” 이렇게 가르치지요. 그게 맞는 이야기입니까? 



히브리서 11장 2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지금 히브리서 11장의 모세는요, 내가 뭘 지키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하나님이 주신 상황, ‘예수 안’ 그 상황에 그대로 자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믿는 자의 여유입니다. 이게 자신감이에요. 내가 내 인생을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인생을, 내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 공간 안에서 ‘주가 오실 때’는 주가 아시니까 주께서 만들어내는 공간 안에서 우리는 내가 기대하지 못한 다른 어떤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고난조차도 주께서 영생주시기 우해서 받는 고난이라고 받는 자신감과 여유, 그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원인이 되어서 지금 상황이 결과로 주어진 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행동 더럽게 해서 오늘날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한국의 노숙자들, 아무리 노숙자지만 몸 아프면 사회복지정책에 의해서 병원에서 무료진료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노숙자들이 아프리카의 중산층보다 낫습니다. 이게 뭐냐? 인간의 고난이라는 것은 너무나 상대적이라는 거예요. 전부다 상대적이라는 거예요. “이 옷 비싸지요?” 상대적입니다. 모든 게 나를 구원하기 위한 조치에 대해서 주께서 다 거부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판단은 뭐냐? 무한판단이에요. 무한판단. 아까 긍정, 부정판단에서 한 가지가 더 있어요. 무한판단인데 이게 뭐냐 하면, 무한으로 가서 다시 돌아와서 판단할 때 무한판단입니다. 끝까지 가 봐서 다시 되돌아올 때의 판단이 이런 겁니다. “그래서 뭐?” 이게 무한판단이에요. “그래서 뭐?” “얼레리꼴레리, 너 죄었데이.” 그러면 이쪽에서 하는 말이, “뭐 어쩌라고? 그래서 뭐?” 이게 무한판단입니다. 이미 무한에 손을 대서 접촉을 하고 무한이 뭔가를 알고 다시 받는 거예요. 



그 무한이 뭐냐? 이 시간에 여러분이 그 무한에 접촉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무한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거”에요. 은혜로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여부에 앞서서 이렇게 해야 돼요. “뭐? 그래서 뭐? 뭐 어쩌라고?” 이게 무한 판단이에요. 선악과적인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적 법칙입니다. 값없이 주는 거예요, 값없이. 값없이 주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알아버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나무 그늘아래 있는 셈이 되어 버려요. 



생명나무가 주는 은혜의 그 맛을 보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맛을 보기 위해서 그 은혜란 나밖에 모르는 나 사이에 있는 그 과정, 그 과정을 늘여보면 그게 우리네 인생이 되는 겁니다. “누구와 만나라. 그리고 판단 받아라. 약 오르지? 화나지? 억울하지? 분하지? 원통하지?” 주께서는 “그래서 뭐! 그런데 뭐!! 부자로 사는 집 보이지? 너는 몸 아프지? 개들이 핥지? 너는 죽을 때까지 거지로 살면서 벅벅 몸이나 긁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이야기합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서 저런 큰 저주를 받느냐. 부자는 매일 잔치하고 노는데 왜 그 꼬라지냐? 네 부모가 불쌍하다. 너 낳아준 부모가 얼마나 한탄할까?” 거지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뭐? 그래서 뭐!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데.”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다. 이런 수모를 당해야 돼요. 우리 교회가 복음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분이 이야기했답니다. 복음 전하고 진리 전하는데 왜 숫자가 그것밖에 안되느냐고. 그래서 뭐? 숫자 적다. 그래서 뭐? 몇 명 안 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게 무한판단이에요. 주님의 판단입니다. 내가 그렇게 수모를 당했다는 겁니다. 내가 당하는 그 수모에, 내 품안에 들어오라는 그 말이지요. 



이럴 때마다 제가 기억나는 CF가 하나 있는데요. 옛날 광고라 젊은 사람들은 잘 몰라요. 초콜릿 광고인데 여자가 덩치 큰 남자 품에 안겨 있으면서 자기 품 안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내면서 보여주는 것. 이 이야기 하지 맙시다. 괜히 이야기했네요. 품안에, 주님 품안에. 사랑하는 남자 품 안에 있는 행복이 이 초콜릿 맛의 행복이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주님 품안에서 초콜릿을 늘 내밀 수 있어야 돼요. 거기다가 적으세요. “그래서 뭐? 그래, 나 못살아. 그래서 뭐? 난 행복해요. 난 여자라서 행복해요.” 이런 게 있어야 된다니까요. 여자라서 행복해요. 



세상이 모든 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 이런 선악과 체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판단, 결정을 자꾸 요구하니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요. 회사가 경쟁이 심하고 업무실적 때문에 싸우느라 힘드니까 밑의 부하직원이 “너무 힘듭니다.” 했어요. 그 때 오차장이 하는 말이 “직장은 전쟁이고 싸움터다. 하지만 직장 바깥은 지옥이다. 지옥 할래, 전쟁할래?” 드라마 <미생>의 한 대목입니다. “너 지옥에 살래, 안 그러면 전쟁터에 살래?”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저는 전쟁터에서 승리할래요?” 이게 바로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어요. 이게 바로 선악체제에서 나온 겁니다. 판단하는 거예요. 



아예 실패하면 되는데. 아예 실망스러우면 되는데.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 가져 버리면 그 미련이 자기에게 암이 되고 스트레스가 되어버려요. 사도바울은 자신감이 있습니다. 여유 있습니다. 여유만만 합니다. “주께서 오시면 지나간 모든 것이 내가 만든 인생이 아니고 주님 스스로 조립해 나간 트랜스포머같은, 형태가 늘 변하고 내일 되면 또 변하는 그 형태변함에 대한 모든 목적이 주님께서 손댄 것이다. 주님이 손댔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주와 만나기 바란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대인관계에서 남을 만나야 되고 그들을 통해서 되도 않는 놀림과 조롱과 무시를 당해야 되는 겁니다. 영적전쟁이지요. 하지만 그 세계는 지옥입니다. 우리가 지옥을 경유하지 않고 어떻게 천국의 기쁨을 맛보겠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기 때문에 임시적으로나마 충분하게 지옥이 왜 지옥인가, 잘났고, 똑똑하고, 착하고, 거룩하고, 훌륭하고, 경건하고, 이런 것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거룩하자! 거룩하자!” 이 ‘거룩하자’를 외치는 그 동네가 왜 지옥 그 자체인지를 오늘 본문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반듯하게 살아야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챙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심 있는 자에게 복 주십니다.” 왜 그것이 우리에게 스트레스가 되고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드는지, 그것은 우리 내부에 아직도 선악체계가 잠복되어 있는 거예요. 그 선악체계가 아직도 있으니까 우리는 한탄합니다. “하나님이여, 세상은 다 헛된 거지요?”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세상이 허구가 아니고 네가 허구야, 네가. 세상은 실재고 네가 허구야.” 너는 세상이 만든 하나의 허구적 효과지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주께서 오신다고 할 때, 그리고 각 사람에게 칭찬이 있다고 할 때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공, 그 안에 있어요. 여유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차이 난다는 겁니다. 판단을 받되 그러한 억울함, 모욕, 누명, 그걸 즐길 수 있어야 된다. 왜? 그런 게 없으면 우리는 교만에 빠져서 인간이 못씁니다, 그래가지고는. 잘난 척 해서 못써요. 항상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사랑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사랑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 분이 성령을 통해서 이미 계시기 때문에, 지금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 분이 계신데 왜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사서 심적인 고생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고생하지 않더라도 주께서 사랑한다면 이제부터 우리 할 일은 간단합니다. 내 성공과 내 잘남을 이제부터는 미워하세요. “또 네가 성공했어? 또 승리했어? 때찌때찌, 이 못된 것들. 이 못된 나. 또 승리했어? 또 돈 벌었어요. 이 못된 것.” 남이 나를 평가하기 전에 먼저 주께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있는 이 선악적인 요소를 책망한다는 사실, 이미 그 자체가 생명나무에 속한 사람만이 선악체제에 대해서 책망을 받는다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너무 우리 자신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이렇게 침착하고 절제해야 남부러운 듯이 성공한다는 선악적인 법칙을 우리 속에 가동시키고 작동시켰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지를 이제 알았사오니 주여, 이 교만을 늘 시시때때로 내일 그리고 모레 또 지적해 주시고 항상 우리를 처음 자리로 되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