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강-고전 4장 1-3(그리스도 일군)150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4장 1-3절입니다. 신약성경 266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4:1-3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방금 보았던 이 본문은 굉장히 친숙한, 교회 꽤나 다닌 사람에게는 다 친숙한 거예요. 청년회 헌신예배 할 때는 로마서 12장 1절을 많이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 다음에 제직해 헌신예배 할 때는 바로 이 본문 채택합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참 많이도 들었습니다. 이 제직회 헌신하면서 그때 들은 것이 제 머릿속에 아련히 남아서 저는 우야면 좋을꼬? 하는 그 생각밖에 없습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할 때에, 맡았다는 말은 집사를 의미하고, 집사에게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그게 뭐겠습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청년회 헌신예배 할 때는 세상에 나가서 똑바로 살고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그런 내용이라면, 이 본문 같은 경우, 집사에게 맡긴 것은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들이 돈 좀 있거든요. 교회 바빠서 못 오거든 돈으로 때우라는 그런 식인 것 같은데.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을 과거에 쭉 생각하면서 얼마나 엉터리로 해석들을 하는지, 근본적으로 그래요. 누가 누구를 맡기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그것부터 따지고 싶어요. 목사, 장로, 지가 뭔데 왜 맡기죠? 연초에 집사 맡겨 놓고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 “누가 맡겼는데?” “당회에서.” “당회가 뭔데?” “당회 지가 뭔데?” 오늘 본문에서, 여기서 맡겼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맡기신 거예요. 당회 목사, 장로가 모여서 회의해가지고 맡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충성이라는 것은 목사, 장로 눈에 충성되게 보이는 그것을 목표로 삼으면 안 돼요. 집사가 이러면 되느냐고 목사, 장로가 그러면 니나 잘하세요.
주께서 직접 집사를 맡겼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람에게 터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직접 맡겼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충성이라는 것을 외부인이 판단을 못해요. 맡긴 분이 충성이냐, 아니냐를 판단합니다. 맡긴 분이. 집사 맡길 때에 그냥 교회가 맡긴다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순서가, 뭔가 대단한 순서가 빠진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세요. 사도행전에 보면 일곱 집사 맡길 때에 그들은 순서가, 사도들이 맡긴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한 자를, 성령이 임한 자를 사도들이 확인해 줄 뿐입니다. “아저씨! 성령 받은 거 맞지요? 아이구, 집사네요.” 이게 사도가 한 거예요. 이게.
교회가 조직사회가 되게 되면, 이 오류가요, 조직사회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하는 일을 방해를 해버려요.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한다니까요. 교회는 조직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조직사회가 되면 행정적으로 편리하겠지 라고 이렇게 하는데, 편리는 하죠. 편리는 해요. 에, 조직이 있으면 편리는 하는데, 편리한 데 뭐? 뭐? 없어~ 편리는 한데 그게 뭔데? 편리한 조직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조직에 당했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고 사도들이었습니다. 아, 그 짓을 또 합니까? 교회가? 조직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비밀은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만 나오면 돼요. 하나님의 비밀만 나오면 누가 거기서 토 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만 나오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이 뭐냐, 하나님이 비밀인 것을 외치는 사람이 비밀이에요. 하나님의 비밀은 하나님이 비밀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비밀이에요. 이 말은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그런 비밀스러운 교류가 있는 사람이다. 그것 지키면 그 사람 되게 충성된 사람입니다. 어디까지 충성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나오는 말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이, 충성에는 뭐냐 하면, 니 목숨보다 중요한 것을 니가 이미 알고 있잖아? 라고 우리보고 통촉하는 거예요. 니가 니 목숨보다, 니 목숨이 귀해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그런 식이 아니고, 이거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비밀을 알았기에 이제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맡겨준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내 생애에서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그걸 여러분들이 드러내시면 그 집사, 그 권사, 그 장로, 누가 터치 못합니다. 그 목사 터치 못합니다. 그게 바로 충성된 사람이에요.
문제는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니까, 이건 충성 아님. 덜 충성. 덜 충성도 아니다. 엉터리 충성이에요. 자기 잘남에 충성하는 것, 이거는 성령 없이도 가능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와서, 일곱 집사에게 성령이 오니까, 사도들은 집사라고 명했습니다. 그 집사 중에 한 사람이 죽은 사람 유명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얼굴이 천사같이 되었다고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충성한다고 다 죽어야 될까요? 아니에요. 충성한다고 죽으라는 것이 아니고, 죽어야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충성했기에, 죽음이라는 그러한 하나의 사소한 일에 불과하더라 이 말이죠.
죽는 순간에도, 돌이 날아오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얼굴이 천사같이 변했으니까. 얼마나 충성합니까? 뭐, 더 이상 어떻게 충성돼요? 얼굴이, 완전히 낯짝이 변했는데 그거보다 충성된 것이 어딨습니까? 또 천사처럼 얼굴들 하려고 미용 받고 성형 받고 그러지들 마시고. 맡은 자라 하는 것은 간단히 이런 겁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사명받기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거는 자기한테 충성한 것이고. 사명이, 맡겨진 사명이 나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맡은 자입니다. 맡은 자. 그러면 재미난 일은, 주께서 직접 일을 맡겼기 때문에 그것을 흔들어 놓는, 그것을 시험하는 자들이 또 주위에 같이 포진되어 있어요.
주님 나타날 때 마귀랑 악마랑 항상 동반해서 나타나십니다. 주님께서 자기 실체를 드러낼 때는 악마의 존재도 항상 같이 드러내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는 이 말씀과 동시에 가짜 맡긴 것, 가짜 충성을 요구하는 자들을 곁에 항상 등장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등장할 때,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 연초에 집사 맡겨놓고 헌신예배에 유명한 사람 불러가지고 이 본문으로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 이래 가지고 시간 없거든 돈으로 때우라고 쭉쭉 유도해나가는데, 그러한 경우를, 상황을 우리가 얻어 당해야 돼요. 그걸.
왜 당해야 되느냐 하면, 사람은 백지상태가 아닙니다. 날 때부터 착한 사람이 아니고, 곱게 태어난 것이 아니고, 안에 뭔가 괴물이, 능구렁이가 들어 있어 가지고 어떤 일을 맡았으면 제대로 했는지를, 분명히 우리는 보이지 않는 주님한테 맡았다고 해놓고 검사는 누구한테 맡느냐 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한테 검사 맡아서 자기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려는 그러한 의도가 강렬해요. 그거는 누가 여기서, 누가 무슨 일을 안 하면, 무슨 말을 안 하면 못 느끼는데 교회 와서 무슨 일을 하다보면 느낄 때에, 내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주님만 아시면 되지 라고 하여튼 말은 잘해요. “주님만 아시면 되지.”
그런데 막상 누가 궁시렁궁시렁 해버리면 여기서 독이 올라온다니까요. “왜 나를 안 알아주는데?” 그럼 저는 묻죠. “누가 맡겼습니까?” “왜 당회가 안 알아줘?” “집사 누가 맡겼는데?” “당회가 맡겨줬잖아요.” 당회가 맡겨줬다는 본인부터가 이미 지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당회가 맡긴 집사를 던져버릴 용의가 있어야지요. “니가 뭔데?” 하고 던져버려야죠. 말로만, 뭐 보이지 않는 주님만 섬긴다고 해놓고 가만 보면 주변에서 나를 어떻게 관찰할까? 거기에 신경써가면서 그냥 이쁘게 보이려고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 남들의 평가에 휘둘리는 것, 연초부터 이거 없기 합시다.
그냥 충성하세요. 절대로 교회에 충성하지 마시고 주님한테 충성하세요. 교회 충성한다는 것은 결국은 우회해서, 빙빙 돌아서 내가 내 자존심에 충성한다는 그 소리밖에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흑인 배우가 연극에서 흑인 역할을 맡았어요. 어떻게 하느냐, 얼굴을 검게 칠해버리는 거예요. 참 이상하죠? 흑인 배우가 흑인 역할을 맡을 때 얼굴에 검게 칠해버립니다. 안 칠해도 흑인인데 왜 칠할까요? 검게. 남들이 백인이라고 알아줄까 싶어서, 남들이 나를 백인이라고 알아줄까 싶어서. “아, 저 사람 백인 배우인데 흑인 역할 한다고 검게 얼굴에 떡칠을 했구나!” 이렇게 알아주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자기가 흑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주님은 아무 열등감 없이 그냥 주님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기 위해서 고귀한 직분을 줬는데 사람들은, 그걸 받은 자가 이번 기회에 열등감을 벗어나서 나도 이렇게 멋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어떤 기회로 삼기 위해서, “날 좀 봐! 이정도로 교회에 충성하잖아.”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거는 자기한테 충성하는 거예요. 그건 주님한테 충성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한테 충성하는 거예요.
얼굴에 검게 칠하지 마세요. 가릴 것 아무것도 없어요. 신호위반 겁나서 번호판 가리는 것도 있답니다. 화물차에. 제가 이렇게 보니까 그런 사람 백만 원 벌금에 형사입건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주께서 너희에게 맡겼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너는 사람의 평가나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구원자도 그리스도가 구원자요, 심판을 해도 그리스도가 심판을 하는데. 구원할 능력도 없어, 구원할 자격도 없어, 더구나 더 기분 좋은 것은 심판할 수도, 정죄할 수도 없는 그런 자의 눈치를 왜 봅니까? 그런 자의 눈치를 왜 봐요?
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아가씨 때 교회봉사 많이 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주여, 좋은데 시집가게 해달라고 막 기도하는 거예요. 시집가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기도의 응답은 아니겠죠. 어떤 남자 만나가지고 결혼을 했습니다. 하고 난 뒤에 이제 교회를 가야 할 건데, 그쪽은 불도가 심하네요. 그러니까 정치적인 협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시집가게 해달라고 한 건 결국 뭐예요? 그거는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 한 것이 그때 들통이 난 겁니다. 일부러 불도가 심한 가정을 만나게 해주신 거예요. 니가 진짜 하나님께 무슨 맡은 일이 있는지, 아니면 니 속에 니가 생각한 니 자존심만 있는 그것에 평생을 소모하는지, 니가 한번 봐라 이 말이죠. 너한테 충성하는지, 하나님한테 충성하는지 한번 보라고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의 충성이라고 할 때는, 그냥 우리가 직접 나오지 말고, 이게 고린도전서 4장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맡아서 충성해볼라고 했던 그 선배들이 있어요. 그것을 경유해서 이 본문을 봐야 되는 겁니다. 보기 전에 미리 여러분들에게 말씀 하겠습니다 만은, 먼저 하나님께 비밀을 맡아서 충성한 사람이 성공했을까요? 실패했을까요? 그걸 묻는 내가 참 나쁘다. 이게 성공했겠어요? 실패했겠어요? 실패했죠. 그 누구도 성공한 사람 없습니다. 예레미야도, 엘리야, 에스겔, 아브라함 다 마찬가지에요. 누구도 맡은 일에 충성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충성을 못해야, 오직 진짜 충성의 모델은 예수그리스도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비밀, 하나님의 비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말은 그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충성해봤자 우리는 실패한다는 그 내용이 그리스도 일꾼 안에 들어있어야 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일꾼에 충성한다는 것은, “내가 비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해봐라. 나는 충성 못했거든.” 이게 비밀이에요. 나는 어떤 경우도 주님의 말씀 못 지킨다는 이게 비밀로 그게 들어가야 돼요. 그게 들어가야 한다고요. 신년 초부터 기쁜 소식 전해서 제가 기쁩니다. 백날 해봐야 여러분 말씀 못 지킵니다. 이게 기쁜 소식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게 그리스도의 비밀 안에 들어가야 한다 이 말이죠.
해보세요. 성질나지. 그러니까 주님은 성질내지 않는데 우리는 성질내거든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이에요. 나 아니고 그리스도만으로 주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일부러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는 것에 먼저 실패한 모델이 우리한테는 귀한 모델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실패한 모델을 에이, 왜 알아야해?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러면 안 돼요. 실패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거예요. 먼저 맡은 일에 실패한 자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고, 실패로 끝났고, 그리고 단순히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고 나라가 홀라당 망해버렸습니다.
그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사명이 간직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 사명을 간직하게 될 때에, 주신 조건에 그들은 현혹되었습니다. 그 조건이 뭐냐, 말씀대로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복에 마음에 땡긴 거예요. 복에. 복에 성급하게 마음이 땡겨 가지고 대충 지켜서 복을 따내려고 한 겁니다. 그러나 복은 미끼였어요. 어떤 모습, 어떻게 지켜서 복이 아니고 점점 더 복이 아니고 저주가 번지는 그런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나중에 알게 돼요. “이것 지키면 복 줄게.” 할 때, 복이 먼저 손이 가니까, 마음이 가니까, 이것 지키는 것은 지가 지 맘대로 지켰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 대충 해놓고 지켰으니 이것 달라고 하니까 “제대로 지켰는지 한번 봐! 안 지켰는데? 그럼 다시!” 또 요것 했으니까 이것 달라고 “다시!” 안 지켰다는 거예요.
계속해서 뭔가 지켰다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안 지킨 걸로 자꾸 미끄러져 이동하면서 복은 점점 더 멀어져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쯤 뭔가 이야기했으면 뭔가 그들이 눈치를 채야 돼요. 뭐냐 하면은, 이렇게 눈치를 채야 돼요. “우리가 도대체 생겨먹은 것이 어떤 존재이기에 주의 말씀을 못 지킨다는 말이냐?” 그걸 눈치 채야 합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도 눈치 못 챘어요.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아, 모든 말씀은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하는 용도로 주셨구나! 하고 알았지만 자기도 그 전에는 딴에 열심히 한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그거 뭐 길게 이야기 하지 않고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고체덩어리입니다. 인간은 고체덩어리에요. 죽으면 물질로 변합니다. 에, 물체에요. 소한테 성경 읽어주고 은혜 안 받는다고 때리면 말이 안 되지요. 말이 안 될 겁니다. 그리고 개한테 같이 이야기하다 말 안 듣는다고 나무라면 말이 안 되지요. 왜냐? 동물이라는 것은 언어를 못 배워서 우리하고 이야기 할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몰랐죠. 그래서 동물에게 자꾸 말 안 듣는다고 때리면 동물이 화를 냅니다. 화 낼 때, “어이구, 저거 봐라 짐승의 본성이 나오네.” 이러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하고 말이 안 통해요. 안 통하면서 인간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방법은 매가 최고에요. 때리는 거예요. 저주를 주게 되면 내가 누구지? 내가 누구지? 내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하고 의사소통 안 되는 이유가 뭐지? 그 이유가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는 그냥 흙이에요. 흙에서 어떤 정신적인 요소가 둘러싼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될 속성을 그렇게, 바깥에 언어를 예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해요. 내가 정신적으로 생각한 것들을 다 끌어 모으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마땅한 이유가 그 안에 이렇게 표출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은 몰랐던 거예요.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죽어요. 성경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안식일 날 나무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여라. 하여튼 성경에 죽이라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뽑아보면 여러 가지가 많아요. 이것도 죽여라. 저것도 죽여라. 박수무당 죽여라. 궁합보면 죽여라. 어떻게 죽여라, 죽여라 다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들이 말 안 들으면 때려 죽여라 이런 것도 있어요. 죽여라인데, 그 말씀을 지킬 때에 사람들은 내 새끼 빼놓고 지켜요. 나한테 연관 없는 사람, 평소에 내가 저 죽이고 싶었으면 좋겠다는 그 인간에게만 적용시키지, 나와 연관된, 내가 아는 사람한테는 이게 은근슬쩍 그냥 넘어가요.
그러면 주님이 와서, 주의 말씀이 중요하지 니 식구가 중요하냐? 이렇게 나오면 누가 화를 내냐 하면, 왈칵 우리가 화를 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우리가 말이 안 통합니다. 이게 의사소통이 되지를 않아요. 되지도 않으면서 복은 되게 찾는 거예요. 지키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지가 지켰다고 우기고 복만 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이 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지를 쭉 역사를 통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 예를 들면, 출애굽기 13장 고 대목을 한번 읽어드릴 테니까 들어보세요. 출애굽 이후에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희들 큰 아들하고 너희 집 가축의 처음 난 것은, 처음 난 새끼는 다 여호와 것이다. 알겠지?” 그들은 그것을 지킨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아, 그 정도. 주님 것 맞습니다. 그 정도 쉽네. 이거 지켰으니까 복 주겠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몰아버렸거든요. 광야로 몰아버리니까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안 되는지. 하나님께서 장자는 내 것이고 모든 첫 새끼는 내 것이라는 그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서 광야로 보냈는데. 그들은 광야 가기 전에는 안다고 고개 끄덕이면서 누구도 이구동성으로 “그 말씀 잘 지키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해놓고 막상 그들이 광야에 갔을 때는, 그 말씀과 완전히 괴리된, 뭔가 모든 의미가 끊어진 채, 자기 자신만을 챙기면서 딴소리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주님은 연속적인 드라마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른 내용이 그들 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14장 12절에 보면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광야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애굽과 이스라엘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왜?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맡겨진 사명이 없기 때문에, 비밀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너희들은 하나님께로 맡겨진 비밀이 있고 그 비밀에 충성해야 하기 때문에, 종족이 달라, 라는 취지로 해서 종족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로 보냈거든요. 근데 그들은 그 말만 들은 걸로 종족이 다르다는 것으로 쳐달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이 광야생활 해봐야 도대체 다르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드러낼 수 있거든요. 근데 그들은 광야 나오니까 다르기는커녕 똑같아요. 이러다가 우리 이 코너 끝나겠다. 우리가 죽겠다. 그러면 그것은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차이점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보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싫어하는 악이라는 것, 죄라는 것을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생산해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죄악을 생산해내고, 죄를 생산해내야 뭐도 생산되느냐,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도 거기서 생산해내는 거예요.
근데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이 문장으로 나오니까 알아들으면 그걸 비밀로 안 거예요. 그걸 비밀로 오해한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밀이 나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듣기만 하면 진짜 비밀을 안다고 여긴 겁니다. 막상 비밀을 만들기 위해서, 비밀 때문에, 비밀이 뭐냐, 모든 맏이는 여호와 것이고, 모든 것은, 첫 것은 내 것이라는, 이런 새로운 고체덩어리에서 새로운 정신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는 광야라는 상황을 집어넣었는데 그들은 자기가 고체덩어리인 것을 모르고 자기가 애굽에서 알고 있던 그런 정신세계로 둘둘 감아놓으니까 기껏 나온 정신세계가 뭐냐 하면, 이러다가 차라리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애굽 생활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겠다. 이게 툭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겁니까? 이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그것이, 이런 노선에는 저와 여러분, 그 당시 선배들, 지금 다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뭐, 십자가 안다. 언약 안다. 살아보세요. 그게 아는지. 오히려 하나님께 원망만 나오지. 십자가 아는데 왜 이리 힘들게 아십니까? 내 인생 왜 꼬이게 하십니까? 이래 나와요. 이게 바로 출애굽기 14장에 나오는, 12절. 우리가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사는 게 낫겠다, 편하겠다, 행복하겠다는 겁니다. 선배들하고 똑같아요. 비밀? 날아가 버렸어요. 사명 같은 것?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 죽어서 만나겠다는 거예요. 나는 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충성 같은 소리, 나에게만 충성할 거야. 다시 애굽 사람, 본래 저주 받을 고체덩어리로 되돌아가 있네요. 참 하나님도 답답하지. 이런 되지도 않는, 될 수도 없는 인간을 가지고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천국 백성을 만들어 냅니다. 그게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상상도 못할 솜씨고, 그리스도의 비밀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이에요. 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이번 수련회 민수기 할 때, 민수기 거기에는 열 번이나 나와요.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뭐,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제가 생각나는 게 뭐냐, 김광진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편지>라는 노래가 있어요. 여러분 잘 모르겠지만. 그걸 잠시 초반만 불러보면, 전에는 가사만 이야기하더니 이제는 용기가 나서 부르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이제 나는 돌아서겠오~♫이 노래거든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거기까지는 좋아요. 근데 그 뒤에 말이 심금을 울립니다. 이제 나는 돌아서겠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자리가 나한테는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니한테 돌아갈 자리가 애초부터 없는데, 우리는 애굽으로 가면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고 이야기 해놓고,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는 것에 니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따로 니들의 자리가 있기 때문에, 여차 하면 돌아갈 자리가 있기 때문에, 애굽이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선배들이 자기의 본색을 그렇게 드러냅니다.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5주차 가입교 훈련하는데, 그 진해 산에 20키로 하는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고됩니까? 젊은 애들이 안 해보다가 올라가니까. 다 올라갔을 때, 여관 생도들은 힘들어서 뒤처지고, 또 뒤에 오지랖 넓은 남자가 도와주고, 또 올라간 사람은 올라갔는데, 그 교관이 하는 말이,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수고했는데, 그냥 자기 힘으로 올라 온 사람 같으면 우유와 간식을 그냥 먹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먹지 마라. 그냥 자력으로 올라와야지 도움 받아 올라오면 되나?” 하고 이렇게 하니까 뭐 힘 약한 여학생들은 못 먹고 했는데, 다 먹고 난 뒤에, 교관이 뒤늦게 이런 소리합니다. “여러분들은 같은 동지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못 먹는 것에 마음이 안 아프나? 니그만 먹고 니 몸만 챙기나?”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이야기하지요.
진작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교관이 테스트한 거예요. 다같이 힘들지만 해군사관생도들이 되었으면 우리는 힘들어도 같은 동지다. 동지애가 있는 쪽으로, 동지애가 없다가 나만 생각하는 그런 십대를 보냈다면 이제는 해군사관학교에 와서는 나보다는 이제는 집단이 더 중요하다. 맡은 자에게 충성이니까. 집단이 더 중요하다는 이걸 바꾸기 위해서 그걸 나중에 이야기 한 거예요. 먹고 난 뒤에 “그래 어떤 사람은 먹지도 못 했는데 니들만 먹으니까 그래 좋대? 좋아? 그게 동지야? 동지끼리 정이야?” 이러니까 그제서 부끄러워가지고 우물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는, 이 천국백성 되기 위해서는 먼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우리의 정신세계, 나는 이정도로 돼야 나답다는 그것을 전부다 벗겨내는 겁니다. 전부다 긁어내서 하나의 고체로 만드는 거예요. 인간은 짐승이고 인간은 동물이다. 끝.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둘둘 감어 싼 모든 사고방식이 하나님이 반대하는 그러한 적들로 그렇게 있던 사고방식 그대로 입힌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출애굽기 14장, 오늘 설교 제일 중요한 대목, 14장 24절, 25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데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그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에 극난하게 하시니(곤란을 주시니) 애굽 사람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애굽 사람들이 다 홍해바다에 빠져 다 죽어요.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군사를 다 죽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직접 손을 대니까 그 애굽 군사들이 다 홍해바다에 빠져 죽었거든요. 그렇다면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 할 때에, 애굽이 어떤 세계인지를 그들이 미처 몰랐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저주 내리시는 동네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렇게 무서운 동네라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 겁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지기 전에는 아주 살기 좋은 동네에요.
이게 어느 정도로 소돔과 고모라가 좋은 동네냐 하면, 성경에 보니까 에덴동산만큼 좋았다는 겁니다. 에덴동산처럼 좋은 동네니까 니도, 저도, 전부다, 그 땅을 점령하고 차지하려고 전쟁이 일어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복 받은 땅에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떨어지게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천사를 보내서 롯보고 “나가라! 빠져나가라!” 니가 나가는 게 사는 길이라는 겁니다. 이게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방금 읽었던 출애굽기 13장, 14장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테마는 이게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확대가 되는 거예요. 니가 있을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너로 인하여 파악되지를 못한다. 니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롯의 처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소금기둥이 뭐냐, 이게 고체에요. 고체. 물체덩어리라니까요. 아이구, 인간인데 소금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소금인데 잠시 인간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도 이쁘장한 여자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소금이 이쁘장한 여자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주님의 관점에서.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잖아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그게 비밀입니다. 비밀.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거예요. 비밀을. 그 비밀은 우리가 눈치 채고 우리 능력으로 파악할 수 있으면 그건 비밀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애굽을 보는 것과, 우리 쪽에서 애굽을 보는 것과 큰 차이가 나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 볼 때, 참, 이 말이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 쪽에서 이스라엘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어떤 조치를 하느냐 하면은, 예를 들면요, 이게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여러분 사라지는 것과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는 차이 나죠. 예를 들면, 어떤 배우가 연극에서 총에 맞는 장면을 하고 연극배우가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무대 뒤에 가면 그 연극배우가 살아있어요. 살아있단 말이죠. 그 역할만 끝날 뿐이죠. 사라지는 것은 곧 죽는 것은 아니에요. 연극에서는. 우리 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릴 때 다 겪어왔는데, 어린애들 보세요. 어린애들이 엄마가 장에 가면 다 울죠? 왜?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면 고거는 곧 없어지는 거예요. 사라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겁니다. 어린애일 때. 근데 우리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엄마 장에 갔어. 울지마! 울지마! 엄마 장에 갔다 곧 등장할거야.” 근데 애는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산타클로스할아버지가 실존한다는 것을 아는 애들한테는 엄마가 사라지는 것도, 자기 눈앞에 없으면 죽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어린애 편에 서요.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은 곧 저주입니다. 죽는 겁니다. 죽는 거예요.
하나님의 비밀이 없는 사람은 죽은 자예요. 이게 우리한테는 매치가 안 되는 겁니다. 교회 안 나가면 되지. 예수 안 믿으면 되지. 우리는 교회 안 나가도, 예수 안 믿어도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내가 안 죽고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니가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모든 세상 자체가요, 전부다 그 사람을 아예 없애버리는,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없애버리는 쪽으로 이미 모든 작동들이, 우주가 그렇게 작동되게 되어있다는 것을, 그 비밀을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준 거예요.
이야기 더 간단하게 해서 애굽 사람들이, 애굽 군사들이, 바로 왕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 있잖아요. 어린양의 피를 발라라. 그리하면 산다고 할 때, “아이, 저그들은 이 땅에 살다가 자기 땅에 가겠지.” 라고만 생각한 거예요. “그래 살기 싫으면 나가라고 해! 근데, 나가는데 어린양 피 바르고 좀 이상하다. 이상하든 말든 나가라고 해!” 그들이 나가면 우리끼리, 애굽 사람들끼리 살지. 단지 그렇게만 생각을 했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가는 것이 자기들에게 죽음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데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죽었다 이 말이죠. 그들이 생각한 이스라엘과 우리들의 차이가 그거는 너무나 인위적이고, 그거는 고체덩어리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정신세계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현실에서는 그런 구분과 분리는 인정받지 못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소위 하나님 믿으면서도 애굽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교회 안 나가면 되지. 안 나가도 나는 재미나게 살면 되지. 행복하면 되잖아. 여러분 구출한다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애굽적인 관점에서 뭐냐, 그냥 쓸데없는 것, 나가라는 이런 뜻이에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못 박는 그쪽에서 보면 너같은 인간의 작자는 우리 사회에 필요 없어. 아이구,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것 내다버려. 치우는 거예요.
저들 보기에는, 죽이는 것은 쓰레기 치우는 거고. 주님 보시기에는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구원의 비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사회에서 치워버림을 당하는 것과 똑같은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나를 치워버리면, 어머나! 어떻게 살지? 하고 걱정하고 근심한다는 것은, 결국 애굽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뜻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자기한테 충성한 거예요. 맡은 것도 없고. 맡은 게 없으니까 충성할 것도 없고. 결국 뭐에 충성하느냐, 자기 자신의 생존에만 매달리고 충성하는 겁니다.
복음이고, 말씀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비밀이고, 계시고, 그거는 이차적 문제고. 첫째 문제는 그것이 내 생존에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하느냐, 이것만 따지는 거예요. 그게 선배들이 했던 실패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선배들이 했던 실패담이에요. 자신이 그 정도로 생존에 집착할 줄을 본인들도 몰랐어요. 광야로 가는 순간,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한 번 더 부를까보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러니까 그들은 홍해 앞에 서가지고 가보니까 바다잖아요. 그러니까 합창 부르듯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나 이제 돌아가겠오~♫ 못 가면 돌아가면 되지. 돌아가면 되지. 왜? 하나님의 비밀은 이차적인 문제니까. 나한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나를 사라지게 하는, 나를 죽게 하는 것은, 나한테 달려있지. 주님의 계시와 주님의 비밀에 의해서 내가 저주받고 복 받는다는 그런 생각은 못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가 자기한테 충성한 모습이에요. 그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맡은 자에게 비밀이다, 충성이다, 이런 용어를 집어넣은 것은, 너로 하여금 이젠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너가 어디로 먼저 가야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충성되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쓰며, 하나님은 뒷전이고 내가 먼저다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그 느낌을 앞으로 주님께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나 바르게 살아야지. 아이구, 되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바르게 살지 말고. 주께서 구약에 밀어 넣고, 광야에 밀어 넣고 신약까지 끄집어 땡길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진짜 내가 맡은 대로 충성했습니다가 비밀이 아니고,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고 훼방꾼이었습니다. 훼방꾼이었고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충성되게 하시는 일을 통해서 나는 내 것만 충성되게 바둥바둥 아주 저항하고 반항하는 이스라엘 같은 존재였습니다는 것을 고백할 때, 그게 우리가 증거 해야 될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뭐냐, 하나님이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우리는 어디가 궁금했는가. 내가 누군지가 궁금했어요. 나는 비밀이 아닙니다. 왜냐, 나는 이미 고체덩어리로 확정된 사람입니다. 고체덩어리에요. 내가 고체덩어리에 둘둘 감았던 그 짐승 같은 그 모든 정신세계는 애굽에서 온 거예요. 주께서는 껍데기를 벗겨내는 거예요. 번호판 가리지 말라는 거예요. 흑인이 백인인척 하면서 흑칠하지 말라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주여 다 내 탓이오.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하고 그 짓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바리새인들이 잘했거든요.
나는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 갑자기 감기 걸린 목소리로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이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그거 했다고 카리스마 있고 영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 저쪽 애굽에서 요구했던 종교적인 모습이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그리스도의 비밀, 하나님의 비밀을 언급하면서 먼저, 뭔 배경을 깐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사람의 어떤 평가에도 휘둘리지 말라는 이유가 바로 충성, 맡은 직분, 이 모든 용어가 자기의 자존심과 연관되어 교회에서 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움직이는 거예요.
아까 이상규 집사님이 권사님한테 “아이구, 권사님!!” 권사님께서 “아이구, 권사고 집사고 뭐가 중요합니까?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소” 했지요. 아주 좋게 평하겠습니다. 주께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니가 권사라고 해도 나는 집사다.” 아주 좋게. 좋게 평해서. 좋게 평한 대로 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끝으로 마가복음 2장 4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맡은 자에게 충성이라는 말을 이렇게 해놓고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어떤 중풍병 걸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님께 가까이 오기가 힘드니까 지붕 뚫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이거 끝나고 나서 다시 시공하려면 힘들긴데. 지붕 뚫고 주님 앞에 왔다는 대목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니 믿음이 대단하다.”
도대체 뭘 뚫었느냐. 지금 중풍병자 친구들이 뭘 뚫었습니까? 지붕을 뚫은 거예요. 이 지붕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 생존에 필요하거든요. 그러나 아무리 생존에 필요한 것도 주님을 가려버리면 이거는 하나의 장애물이 된다는 이야기이죠. 생존까지만, 우리가 살 집이라는 것, 살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하다는 것에, 요까지만 시선이 멈춘 거예요. 그것을 장애물로 여긴다는 사실, 이걸 주님께서는 이만한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스도의 비밀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은 다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그게 진정한 장애물이 되는 거죠.
문제는 그 장애물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뭐 이제 연초에 당회에서 결정해서 집사 줬기 때문에, 근데 하고 난 뒤에 오후에 보니까 목사가 누구 하나 불러가지고 헌신예배 하는데 본문이 맡을 자에게는 충성이니라. 시간 없거든 돈으로 때우세요. 그래 충성해야지 라고 하는 그것이 장애물입니다. 왜, 이 성경이, 헌신예배 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장애물이에요. 교회가 장애물이에요. 아휴, 이 말 하려고 목회 30년 걸렸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애물이에요.
교회가 내 자존심을 키워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지를 까발리는, 그걸 드러내는 그런 단체기 때문에. 그래서 질서가 중요하니, 교회법이 중요하다는 그런 되도 안 되는 소리를 다 들춰버리면 우리 자존심이 중요하고 나는 나에게 충성할 겁니다는 그 소리에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너를 판단 할 수 없다는 그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 자신이 발각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자신이 발각되어서.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존재라는 것이 발각될 때, 그게 하나의 충성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충성이 안 되고 주께서 관여해 주셔야 맡은 것과 충성이 일치된 줄 압니다. 합치되지도 못한 맡음, 합치되지도 못한 충성에 우리의 가면을 사용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